R의다락, Other Fiction

Extra Form
장르 하이큐

* 결국에는 보고 싶다는 욕망을 못 참고 스스로 자급자족에 자빠져 봅니다(mm
* 배구 안 하는 우시오이, 10년만에 재회한 우시오이가 원나잇 하고 난 그 이후부터의 이야기







“종교 있어요?”

호텔의 침대 끝에 앉아 젖은 머리칼을 털면서 남자는 물었다. 침대 앞에 서서 셔츠를 입고 있던 또다른 남자가 우뚝 멈췄다. 그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솔직히 말해 당황했다. 이런 대화는 볼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하는 생각에서였다. 최근까지 만났다 일방적으로 헤어졌던 한 여자는 당신의 그런 점이 꽉 막혀있다고 했었다. 어쨌건 우시지마는 남자의 질문이 퍽 당황스러웠다. 종교라니.
남자가 가운 아래로 뻗은 맨다리를 바꿔 꼬며 웃었다. 처음 바에서 우시지마에게 칵테일 한 잔을 사달라고 했을 때와 꼭 같은 얼굴이었다. 속눈썹 그늘이 유난히 깊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다 우시지마는 입술 끝을 꾹 씹었다. 남자는 벌어지는 가운 자락을 제대로 여미지 않았다. 자신이 남겼을 것이 뻔한 마킹들을 바라보다 우시지마는  셔츠에 헐겁게 걸려있던 넥타이를 마저 당겼다. 얼굴만큼 물기 없는 목소리가 툭 대꾸했다. 아니.
남자가 씩 웃었다.

“다행이네.”
“뭐가.”
“뭔가를 믿고 있는 상대와 자면 찝찝하거든요. 바람 피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훼손시킨 것만 같아서.”
“……”
“나는 인간이라 신은 못 이겨요.”

어차피 우린 원나잇이지만. 웃으며 남자는 벌어진 가운 자락을 끌어 모았다. 잔근육이 붙은 하얀 다리는 남자의 키처럼 길고 곧았다. 전체적으로 맵시가 좋았고 마냥 여자처럼 부드럽지 않아서 오히려 바보처럼 열중했었다. 신체의 피지컬이라면 우시지마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운동을 했나. 살결이 하얀 편이니 했다면 적어도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은 아닐 것이다. 수영이나 유도나, 아니면 자신처럼 한때는 배구를 했다거나. 무슨 운동을 했건 남자는 제 몸의 장점에 대해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다리를 바꿔 꼬았다. 가운자락이 반쯤 간신히 덮고 있던 하얀 허벅지를 우시지마는 잠시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벌리고 싶다. 다시 한 번 저 틈을 비집고 싶다. 그러나 이번엔 다정하고 달콤하게 할 자신이 없거니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처럼 원나잇이다. 어차피 끝난 게임이다. 아니, 시작도 하지 못할 게임이었다.

마지막으로 우시지마가 수트의 자켓을 꿰어 입을 때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시지마가 잠시 소리 없이 눈썹을 좁혔다. 나는 지금 금연 중이니 자제해달라고 할까 하다가 우시지마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오늘 이 정사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내일 오후에는 입찰받은 리조트의 미팅이 교토에서 있을 예정이고, 우시지마는 이 남자를 만난 바에 들어가기 직전에야 회의 자료를 메일로 건네받았다. 돌아가 자료를 검토하기에도 오늘 밤은 빠듯했다.
이름도 묻지 않는 것이 좋겠지. 아쉽지만 그게 페어플레이라고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예의상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았다. 남자를 향해 다시 돌아설 때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후 연기를 허공으로 흩뿌렸다. 속눈썹이 짙은 눈이 느긋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타이밍을 빼앗긴 건 그 탓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우시지마의 눈이 소리없이 열렸다. 남자가, 오이카와가 우뚝 굳은 얼굴을 향해 필터 끝을 질근거렸다. 근데.

“당신, 나 알지?”

우시지마가 신음처럼 비틀거렸다. 뒷통수가 순간 선득했다. 그보다는 찬물을 맞은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잊었을 리가.





키스는 능숙하게

연애는 서툴게


@ruka_tea




S 백화점의 도쿄지부 본사에는 기가 막힌 남자가 하나 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다. 잘 웃는다. 친절했고 다정했다. 신사복이 주류라는 2층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니 당연히 스타일, 좋다. 다른 남자직원들과 똑같은 수트 차림인데도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는 맵시부터 남달랐고, 때문인지 오픈 전에 비슷한 옷차림을 한 다른 직원들과 나란히 서 있어도 유난히 눈에 띄는 남자였다. 5년 전에 입사한 이후로 남자는 사내 여직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비공식 랭킹의 탑을 모두 갈아치웠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싶은 남자 1위, 안기고 싶은 남자 1위, 긴급점검 중인 엘리베이터 안에 함께 갇히고 싶은 남자 1위, 월요일 휴무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남자 1위 등등.
이만하면 거의 아이돌이었다. 여자에게 다정한만큼 접객매너 역시 훌륭했고, 덕분인지 남자는 업무 실적으로도 2층에서는 늘 1등이었다. 남자가 매니저로 재직 중인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의 매장에는 돈 좀 만지는 누님과 사모님들이나 늘 애인이나 남편을 반쯤 억지로 잡아끌고 찾아왔다. 이 정도 스펙이니 같은 남자들은 이 남자를 꽤나 얄미운 기회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회식자리에서 대화를 하거나 대작이라도 해보면 모두 그가 참으로 호쾌하며 남자답다고 엄지를 추켜세웠고, 갓 입사한 후배들은 그의 이름을 롤모델로 댔다. 지난 가을에는 여직원뿐 아니라 남직원들의 열화와 같은 추천으로 S 백화점의 고객에게 증정되는 달력의 모델로 활약했다. 백화점 곳곳에는 환히 웃는 남자의 포스터가 정면에 붙어 있었다. 남자는 2층 영업 1위를 먹은 감동의 미소를 날리며 이처럼 인사하고 있었다. 당신만 생각합니다, 당신이 우선입니다, 나는 S 백화점입니다.
옥상에 붙어 있던 포스터 앞에서 남자가 담뱃불을 당겼다. 필터를 질근거리면서 남자는 습관처럼 인상을 좁혔다. 등 뒤에 붙어 있던 포스터와 똑같은 얼굴이 하늘을 올려보며 남자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웃으며 욕을 했다. 아, 먹고 살기 힘들어.

“이 백화점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옆에 서 있던 후배가 찔끔거리다 이내 못들은 척 꾹 입을 다물었다.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선배는, 그러니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침 조회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후배가 곤란한 듯 눈꼬리를 떨어뜨리며 웃었다.

“오이카와상, 아무리 그래도 망하라고 할 것까진…”
“아, 그치? 더 크게 말해줄까? 아! 망해라! 부도 맞아라! 탈세! 장부조작! 부정축재! 경영진 구속!”
“으악, 제발요! 좀!”

후배가 양팔을 휘저으며 퍼덕거렸다. 닭장 안의 닭 같았다. 재밌다. 오이카와가 후 연기를 길게 뿜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예전에도 이런 애들이 있었다. 놀려 먹기 좋은 애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 후배가 옥상에 둘만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향해 오이카와는 가볍게 찡긋 덧붙였다. 농―담.

“화풀이 하는 거야.”
“예?”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예? 후배가 영문 모를 얼굴로 거푸 되물었다. 오이카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었다. 매장 후배는 아마 하루 종일 생각해봐도 자신의 선배가 왜 화를 내고 있는 지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할 거다. 당연하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거든. 오전 업무는 순조로웠다. 층별 조회는 평화롭게 지나갔다.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왜 이 양복은 양복이냐, 넥타이 매듭이 당신처럼 묶이지 않는다, 바꿔달라고 난리를 피우는 진상 고객도 오늘은 없었다. 그래도 대충 짚이는 데는 있었다.
어제 그 녀석을 만났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너무 짜증내지 마세요, 오이카와상. 오이카와상은 지금 본사 얼굴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화내시면 여직원들도 걱정할… 선배?”
“……”
“저기, 선배.”

어떻게 재회하게 되었는지 오이카와는 지금도 분명하게,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밤이었고, 바로 이 백화점 옆길이었다. 오늘과 달리 어제는 일진이 좀 사나웠었다.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직장 생활 뭣 같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아베노믹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경제는 불황이었고, 시대가 이만큼 바뀌었는데 꿈과 용기를 가지고 간절하게 소망하면 이뤄진다는 꼴통 부장이 하필이면 오이카와의 상사란 자였다. 부장은 처음부터 오이카와를 마뜩찮게 여겼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남자는 부장에게는 왠지 사생활이 문란하며, 성실하지 않은 자로 해석되는 모양이었고 그 탓에 부장은 오이카와에게 트집을 잡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즐거움인 듯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어제도 별 것 아닌 일로 트집을 잡혔었다. 진열대에 놓인 넥타이 상자의 각도가 왜 45도가 아니느냐는 소리로 시작된 잔소리는 택을 숨겨두지 않은 자켓 한 벌을 발견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이 나이에, 그런 일로, 시말서도 아니고 반성문을 써오라는 말에 오이카와는 옆에 걸린 넥타이로 부장의 목을 졸라버리는 상상을 일곱 번쯤 반복했다.
이러니 퇴근길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혼자 마시자니 또 청승 같이 보일까봐, 욕을 하면서도 어쨌건 달려는 나와 주는, 고등학교 동창이란 직업의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단칼에 씹혔다. 유부남 따위. 이와이즈미의 세 살짜리 딸에게 패배감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무작정 아무 바Bar로 휘청휘청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카치를 얼음도 없이 단숨에 스트레이트로 한 잔을 비웠다. 두 잔을 마시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때 오이카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고작 이 한 잔에 벌써 진탕 취해버렸다거나.
운동복도, 유니폼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 녀석이었다. 변함없이 키는 저보다도 컸고 철벽같던 그 등도 여전했다. 알아보질 말았어야 했는데 알아봤다. 아니, 애당초 한 번 흘끔거리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로 녀석은 여전히 시선을 모았다. 키가 커서 그렇겠지. 그래봐야 나보다 딱 5cm 더 크지만, 이란 생각을 우물거려보다 오이카와는 제 스스로에게 잠시 기가 막혔다. 이걸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분해서 술을 한 잔 마셨고, 훔쳐본 뒷모습도 여전히 멋져서 한 잔을 더 마셨다.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귀가 달아오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말을 걸고 있었다.
혼자 오셨으면 술 한 잔 사주실래요? 멋대로 옆자리의 빈 의자에 앉으면서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녀석은,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한참동안 말없이 오이카와를 돌아봤다. 변함없이 날카로운 눈매가 다시 시선을 돌리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맘대로.
그게 기가 막혔다. 남자를 꼬시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남자가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사실보다 그 대목이 오이카와는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정말로 까먹다니.”

후배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담배를 비벼 끄면서 오이카와는 이번엔 가볍게 대꾸하고 말았다. 있어, 그런 게. 그뿐이었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벌써 10년을 훌쩍 넘겨버린 일이다. 같은 학교 동창들 이름도 이제는 가물가물한데 그 녀석이 내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리가. 게다가 나는 이제 배구를 안 하잖아. 그러고 보면 묘하기는 했다. 나야 그렇다 쳐도 너는 왜 배구를 그만둔 걸까.
사정이 있겠지. 어제 묻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도 오이카와는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하여튼 인생은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었다. 이럴 거면 배구나 계속 해볼 걸 그랬나. 생각을 해보다 오이카와는 이내 쭈욱 기지개를 켰다. 몸은 종일 뻐근했다. 지난밤이 남겨준 것은 허리 근처를 떠도는 노곤함과 피로, 그리고 불편한 이름뿐이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어디 가서 잠깐 눈이나 붙여야겠다. 담배곽을 쑤셔 넣으면서 오이카와는 돌아섰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 참 맑았다. 그제야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귀가 뜨거웠다. 날이, 더럽게, 너무 좋은 탓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    *    *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겼다. 말수가 적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꽤 무서워 보였다. 선뜻 다가가 말을 걸기보다는 먼발치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여자들이 언제나 더 많았다. 재미는 퍽 없었다. 인터뷰도 늘 딱딱했다. 그래도 배구를 정말로 잘 했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런 남자였다.
사람들은 둘을 라이벌 지간으로 즐겨 엮었었다. 오이카와는 그 평을 퍽 좋아하지 않았다. 그 곁에 설만하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게 더 컸다. 우시지마는 당시 리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선수였고,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가 거의 유일하게 인정해주었던 세터였다. 못하진 않았다. 잘 했다. 아니, 한 리그에서는 최고의 스타였다. 베스트 세터상을 수상한 적도 있었고, 늘 카메라가 따라 다녔었고, 지역 예선 중인 한산한 관중석에도 늘 자신을 응원해주는 소녀들이 있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늘 목이 말랐다. 아무리 토스를 올려도 넘어서지 못할 벽이 있었다. 아무리 높게 뛰어도 넘보지 못할 벽이 오이카와에겐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배구를 고3 때 전국대회에 실패한 이후로 깔끔하게 접어버렸던 것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에 오래도록 연연했다. 추천입학을 거절하던 순간에도 그 이름은 오이카와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첫사랑 아닐까? 몇 달 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이와이즈미는 물고 있던 마른 오징어의 다리를 허공으로 발사했다. 한때 배구를 같이 했고,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프로선수가 된 이와이즈미는 오랜 우정에 대한 대가로 오이카와의 정수리에 공 대신 빈 맥주캔을 토스해주었다. 빈 캔을 부러진 꽃처럼 가련히 움켜쥐면서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몸 위로 와르르 무너졌다. 아파, 이와쨩―징그럽다고 떨어지라면서도 이와이즈미는 두 번째엔 때리지 않았다. 대신 새 맥주캔을 따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개소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오이카와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는 늘 거기까지였다.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 같았다. 한참 흔들거리다가 쏙 빠져 버렸던 유치가 가끔 생각나는 것처럼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이름은 그랬었다. 궁금하기는 했다. 국내 리그에도 해외 리그에도 녀석의 이름은 없었으니 배구는 그만둔 것 같다. 왜 그만뒀을까. 그만뒀으면 지금은 뭘 할까. 야구, 축구, 농구… 장사? 연예인? 회사원? 뭘 상상해 봐도 다 이상했다. 코트를 떠난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상상조차 가질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이상해서 오이카와는 늘 그쯤에서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가끔 이유도 없이 화가 났다. 너는 했어야지. 나보다 강한 주제에 배구를 접으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뭐가 되는데.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취한 척 어깨를 기댔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남자와 자보기는커녕 상상 한 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즐기는 척을 했다. 이런 원나잇을 즐기는 것처럼 굴어봤다. 아파 죽을 것 같았으면서도 아닌 척을 했었다. 곤란했으면 했었다. 한 번쯤은, 네가,
나 때문에.

“근데 그럴 리가 없지.”

지금이라면 이와쨩의 말에 공감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다 개소리다.



*    *    *


오후에 접어들면서 매장은 오전보다 바빠졌다. 대체적으로 사이클이 그렇다. 백화점의 주요 고객인 사모님들은 오전 나절엔 백화점에서 문화교실을 즐기고 점심을 즐기며 지인들과 수다를 실컷 떤 후에 천천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쇼핑을 즐긴다.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지하 식품 코너다.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2층에, 그것도 이 매장을 잊지 않고 들르는 사모들이 많다는 사실을 오이카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단골 사모님 일행 중 한 분이 오이카와에게 수고한다면서 시내 유명 과자점의 카스테라를 내밀었고, 오이카와는 그 답례로 허리를 깊게 숙이고는 당신의 부군께서 마치 신혼 때처럼 낭만적으로 보일 법한 넥타이와 구두 여러 벌을 꺼내 놓았다.
자연히 접객이 길어졌다. 쇼핑만으로도 벅찬데 왜 그렇게 딸 가진 부모는 많은 것이고, 왜 궁금하지 않은 당신 딸의 전공과 취미 생활을 나는 알아야 하는 것일까.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수많은 소회들을 꾹꾹 짓누르면서 오이카와는 한껏 웃었다. 접객은, 특히나 여자를 대하는 일에는 언제나 자신 있었지만 이번엔 조금 벅찼다. 차라리 내 조카랑 저녁 내내 놀아주는 쪽을 택하겠어.

“다음에 봐, 토오루군―”
“우리 딸이랑 만나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구.”
“하하, 누님들도 참. 예. 살펴 들어가십시오.”

1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사모님들은 자리를 떠났다.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그녀들에게 허리를 숙여 깊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유가 찾아왔다. 소리 없는 한숨이 길게 터졌다. 이젠 정말 이 짓도 못 해먹겠다. 오늘따라 허리는 유난히 노곤했다. 티 나지 않게 매장 뒤쪽으로 허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후배가 불쑥 말했다. 선배, 저 잠시 위층에 재고 좀 보고 하고 오겠습니다! 허리를 문지르면서 오이카와는 남은 손을 휘휘 저으며 답을 대신했다. 매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쉬고 싶다. 하지만 요령을 피울 짬도 없었다. 이유라면 첫째, 저편에서 매의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저 부장이라는 자 때문이고, 둘째, 손님이 왔기 때문이었다. 매장에 들어서는 그림자를 향해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허리부터 숙였다. 이쯤 되면 백화점 직원 5년차의 조건반사였다.

“예,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

인사가 혀끝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허리를 굽힌 채로 오이카와는 우뚝 굳었다. 아니, 얼었다. 오이카와는 손님의 구두를 보고 있었다. 남자였다. 구찌의 지난 가을 신상 옥스퍼드 타입 수제 구두다. 이 구두 좋지. 나도 가지고 싶었었거든. 오이카와가 소리 없이 웃었다. 눈가가 욱씬 당겼다. 구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발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딱 이만큼 길고, 이만큼 넓은 발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었다. 이 발 위로 고개를 떨어뜨려본 적이 나는 너무 많기 때문에.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았냐든가, 나인줄 알았느냐는 말은 하지 못 했다. 볼 안쪽을 질끈 씹으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보다 더 피곤한 얼굴이,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가 이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넥타이는 헐거웠고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남자가, 우시지마가 담담히 우물거렸다.

“이 근처를…”

구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오이카와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옅게 움츠렸다. 그래도 달아나진 않았다. 다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를 몰랐다. 우시지마가 남아있던 말들을 호흡처럼 밀어냈다. 여기를, 이 근처를…

“다 뒤졌어.”
“……”
“널 찾으려고.”

헛웃음이 터졌다. 당신 바보야? 그보다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이렇게 무모한 사람 아니었잖아. 오늘 회의 있다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당신이었잖아. 혀끝에서 떠돌던 수많은 말을 오이카와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 했다. 곤란했다. 아니, 곤란해질 거야. 나는 분명히 곤란해질 거야. 생각할 때 손목이 잡혔다. 동시에 단숨에 끌어 안겼다.
낮은 호흡이 쏟아졌다. 잔뜩 눌린 목소리가 말했다. 미안. 어이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웃었다. 왜 사과를 해. 그 말조차 오이카와는 끝내 할 수 없었다.







후배가 돌아왔을 때 매장은 비어 있었다. 오이카와 매니저는 VIP룸에서 중요한 손님을 접객 중이라고, 옆 매장의 직원이 대신 전했다.




(하편으로)




결국엔 제가 넘 보고 싶어서 풀버전으로 급조해버리고 말았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하편은 제 원고 마감 때문에 아마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흑흑ㅠㅠㅠㅠㅠ무튼 반드시 들고 오겠다고 약속드리면서 저는 서둘러 퇴근................ 카게히나 넨도.. 카게히나 넨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행인 2016.12.19 10:01
    안녕하세요 존잘님 너무 좋아요... 하편 기다리고 있을게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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