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Other Fiction

Extra Form
장르 랑야방

* 랑야방 감상을 겸해 손으로 틈틈이 써내렸던 조각글을 스르륵 옮겨봅니다.
* 경염임수, 더불어 정왕종주.






바람소리

수 颼



@trickste_r





좋은 사냥터는 바람이 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임수에게 즐겨 그렇게 말했다. 활이란 모름지기 바람을 타야하는 것이다. 어린 임수에게 활을 처음으로 쥐어주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작은 손끝을 시위의 한 중간으로 끌어주었다. 만져 보아라, 수야. 아버지는 말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임수의 손결을 따라 가늘게 떨었다. 당기며, 일순 놓은 화살이 마당의 과녁을 꿰뚫었다. 정중앙을 맞추진 못 했지만 벗어나진 않았다는 기쁨에 임수는 신이 난 듯 깡충 뛰었다. 아버지가 임수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당부했다. 그 바람을 너는 기억해야한다. 네가 바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너를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 곧 네 안에도 바람이 나부끼는 때가 오겠지.
그 바람을 향해 너는 걸어라.

아버지가 쥐어준 활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곧 부러졌다. 임수의 키가 자란 때문이었다. 임수는 금릉에서도 손에 꼽는 악동이었다. 하도 자주 넘어진 통에 정강이와 종아리엔 상처가 없는 날이 없었다. 그래도 어른들은 임수를 퍽 귀여워했다. 낯가림이 없는 임수가 포르르 쫓아와 채근을 하면 아들들에겐 뚝뚝한 숙부도 함께 연을 날려주었다. 궁의 곳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임수는 자랐다. 벗을 따라 사냥터에 나가기 시작한 무렵부터 임수는 더 이상 궁의 안마당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지 않았다. 그래도 무뚝뚝한 제 벗의 앞에서는 여전히 장난이 심한 철부지였다. 제 벗인 경염에게 자주 골탕을 먹였고 장난을 쳤다. 경염은 의젓했다. 임수가 놀리고 장난을 칠 때마다 경염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마음엔 담아두지 않았다. 임수는 그런 제 벗이 못내 편하고 좋았다.
나이를 먹으며 생에도 봄철이 찾아왔다. 궁의 어른들은 종종 경염과 임수를 두고 혼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임수를 귀애했던 태후마마는 예황을 정인으로 두면 참으로 좋겠다며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정작 임수는 그런 것엔 관심이 퍽 없었다. 혼례 이야기를 들으면 어쩐지 부끄럽고 낯이 간지러웠다. 무인(武人)치곤 지혜가 깊었고 문장을 잘 썼지만 여인의 환심을 사려 연서(戀書)를 쓰는 일은 임수에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맞지 않는 갑옷 같았다. 어릴 적에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 아버지가 억지로 씌웠던 어른의 투구 같았다. 머리 위로 툭 미끄러지는 투구를 억지로 써보려 안간힘을 쓰는 대신 임수는 경염과 어울려 사냥터로 나갔다. 손이 날래고 잽쌌던 임수는 사냥터에서는 늘 경염보다 앞섰다. 네가 굼뜨고 느린 탓이라며 임수는 종종 경염을 놀렸다. 그때에도 경염은 잠깐 되받아치고 말뿐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열여덟의 봄에도 둘은 사냥을 했다. 여느 때처럼 임수의 성화에 경염은 못 이기는 체 검과 활통을 지고 말을 몰아 사냥터로 향했다. 사냥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활은 탄성(彈性)을 높이면 살(虄)의 속도가 빨라지고, 이를 위해 시위에 꼼꼼히 풀을 먹인다. 과거의 편린을 더듬어보자면, 그저 한 두어 번 슥슥 풀을 먹이고 말뿐인 임수와 달리 경염은 이 작업을 꽤 신성하게 여겼었다. 매일 활시위에 풀을 먹였고, 사냥터로 나오면 말을 묶어두고 한 자리에 앉아 얇게 몇 번을 더 펴바르곤 했다. 어린 임수는 성질이 보다 급했다. 좋은 살(虄)을 골라내는 일에도 경염은 언제나 고민이 길었다. 진작 활통을 한가득 채워두고 제 벗을 기다리던 동안에도 임수는 발을 구르며 채근하기 일쑤였다. 그런 적이면 늘상 이름보다는 벗의 별칭이 성급하게 튀어나오고는 했었다.
물소.
임수는 소경염을 그리 즐겨 불렀다. 더불어 퍽 좋아했다. 아마도 짐작컨대 임수는 스스로 붙인 별칭을 호(呼)하는 것으로 두 사람간에 놓인 교우와 친밀감을 즐겨 확인하는 듯 했다. 어쩌면 그만큼 오래 제 벗을 깊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풀만 먹일 거냐. 그러다 사냥은 하겠어? 벌써 해가 중천이다, 이 물소야.」
「재촉 좀 하지 마라. 급할 것도 없잖아.」
「그래봐야 차피 나한테 질 것을 뭐하러.」
「…허면 먼저 가. 쫓아갈 테니까.」

경염은 그랬다. 심성이 곧은만큼 뚝심과 고집이 있었고, 매사 한 번 흠뻑 빠지면 매듭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중도에 멈추지 않았다. 임수는 그런 경염이 종종 재미있었고, 종종 질렸다. 누가 소 아니랄까봐. 허나 동시에 그 심성을 임수는 퍽 존경했다. 경염을 대하는 감정은 그처럼 보다 복잡하고 추상적이었다. 가까웠고, 친근했고, 보다 사사로우며 존경했고 이끌렸다. 경염에겐 임수가 태어날 적에 손 안에 쥐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소경염에게 귀명(貴明)을 더했다. 강풍에 흔들려도 부러지지는 않는다. 혹여 겨울의 칼바람을 만나더라도 잎새를 전부 떨굴지언정 뿌리는 뽑히지 않는 아집에 가까운 절개. 임수는 경염의 그 곧은 줄기에서 무성히 흔들리는 잎이고 싶었다. 그를 위해 돋아나 흐드러지다 발밑으로 스러지는 잎이 되어주고 싶었었다.
「사냥은 구하고 찾는 일이다.」 소처럼 커단 눈망울을 끔벅이며 경염은 말했다. 신중히 풀을 먹인 시위는 예리한 송곳처럼 팽팽했다. 손끝으로 시위를 만족스럽게 튕기면서 경염은 임수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흠뻑 웃었다.
「맨 처음 잡는 것은 네게 줄 거다.」
그날, 임수는 토끼 한 마리 잡지 못 했다. 화살은 쏘는 족족 과녁을 벗어났다. 활시위에 풀을 꼼꼼히 먹이지 않은 탓이라고, 네 놈의 성격은 왜 그리 허술하느냐며 경염은 드물게 퍽 놀리듯이 농을 했다. 임수는 마음이 상했다. 회포도 마다하고 돌아왔을 적에 하인이 임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선물이 왔노라며 하인은 뒷마당을 가리켰다. 마당의 한중간에 놓인 것은 숫사슴이었다. 하인들이 사슴의 목에서 낯이 익은 살촉을 뽑아냈다. 임수는 한참을 오도카니 선 채로 사슴의 눈을 내려 보았다. 사슴의 눈망울은 크고 깊었고, 퍽 아름다웠다. 그때 임수는 처음으로 바람 소리를 들었다. 제 안에서 무성한 잎들이 요란하게 부닥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쉬이 지지 않을, 어쩌면 퍽 오래 알아차리지 못 했던 바람소리였다.



*

매령의 바람이 죽음처럼 날카로운 혀를 날름거렸다. 바람이 매섭게 살을 에었다. 눈더미에 한 청년이 시체처럼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살갗을 파고 들었다. 불길에 덴 피부 곳곳이 새붉게 달아올라 짓물렀다. 부푼 상처가 진물과 함께 터지고 새 고름이 생기기를 반복했다. 타는 듯이 아팠다. 청년은 천천히 죽어갔다. 그럼에도 청년은 열망처럼 빌었다. 살고 싶습니다. 고름이 터진 자리 틈으로 벌레들이 찬찬히 파고들었다. 청년이 눈을 끔벅이며 또 한 번을 열망처럼 기도했다. 살고, 싶습니다.
아직 숨을 끌 자신이 없었다. 삼도천의 문턱에서 청년은 어떻게든 견디며 버텼다. 매령의 벌레들이 살갗에 이를 세웠다. 통각이 뼈를 도렸다. 살점을 파먹으며 혼을 바수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청년은 가까스로 몸의 감각을 쥐어짜며 지옥 같던 눈밭을 엉금엉금 기었다. 매령의 산기슭을 따라 바람은 목이 잘린 여인처럼 비명을 질렀다. 바람이 청년의 숨을 흔들었다. 마지막 남은 호흡마저 바람은 용납하지 않았다. 청년은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바람이 너를 이끄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리 말했었다. 바람을 따라, 바람이 부는 길을 좇아 청년은 힘겹게 눈 위를 기어갔다. 바람은 화마에 데여 짓무르고 뭉개진 피부를 자비 없이 비집었다. 청년이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고통으로 울었다.
그래도.
청년이 눈을 들었다. 수라 같던 전장은 눈보라에 파묻혀 흔적조차 없었다. 저 멀리에서 잎을 잃은 나무가 홀로 흔들렸다. 청년이 삶처럼 기도했다.
살고 싶습니다.




*

누구를 택할 것이오? 정왕이 물었다. 매장소가 회답했다.
당신을 택할 것입니다.

바람이 멎었다. 매장소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 하고 있던 눈길이 호수처럼 떨었다. 오랜만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매장소는 생각했다. 커다란 눈은 여전히 깊고 맑았다. 티 한 점 없는 눈길은 차라리 아득했다. 가슴에서 파동이 일었다. 너는 변한 것이 없구나. 나는 지난 12년간 이토록 탁하게 흐려졌는데. 이토록 뒤틀어졌는데.
곧은 눈길은 좀체 물러서지 못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왕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면서 매장소는 잠자코 다음을 기다렸다. 당황한 듯 눈동자는 크게 열리다, 일렁였다. 그러다 정왕은 잠시 웃었다. 그 웃음만큼은 이전과는 달랐다. 마음의 물길을 막아버린, 하여 원껏 터지던 것이 아닌 그 웃음은 때문인지 퍽 어둡고 쓸쓸했다. 웃음을 흐리며 정왕은 말했다.

“사람 보는 안목이 너무 없구려.”

사람을 본 것이 아니었다. 기실 원하여 택한 것도 아니었을 테다. 바람이 나의 갈피를 당신에게 떠밀었다. 매령의 눈밭에 파묻혀 있던 망령이 바람을 따라 당신에게 향한 것뿐이다. 당신의 길 위에서 무성히 흔들리기 위하여, 당신의 일부로 피어나 저물기 위해 나는 그리 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뿐이다. 뽑혀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12년을 돌아왔을 뿐이다. 생각에 매장소는 잠시 아득해졌다.
당신은 이 잎의 이름을 영영 알지 못 하겠지. 허나 좋았다. 그런 것쯤은 기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틔워 드리웠다. 나는 당신으로 맺혔었다. 우리는 한때 무성한 숲이었다. 허니 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 저물 것이다. 소리 내어 읍(泣)을 하는 대신 매장소는 돋아난 말들을 잠자코 짓눌렀다. 정왕이 눈을 크게 열다, 이내 스르륵 눈길이 떨어졌다. 눈길이 지나간 자취들에 마음이 너무 많았다. 지난 12년간 할 수 없던 말들이 수많이 묻혀 있었다. 하여 아득해서 매장소는 구태여 그 눈길을 잡지 않았다. 정왕이 손을 뻗었다. 유려한 손끝이 술잔을 더듬었다. 화급히 잔을 들이켰다. 빈 잔을 내려놓으며 그제야 정왕은 쓰게 웃었다.
아둔한 자로군.
예, 아둔합니다. 매장소가 마주 웃었다. 멈추었던 바람이 다시 천천히 불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잎을 비비며 나부꼈다. 이제 저 잎은 오래지 않아 저물 것이다. 낙엽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 뿌리에 스며들겠지. 그리고 다음 해가 되면 또다른 싹들이 빈 자리에서 자라날까.
그거면 되었다. 매장소는 생각했다. 바람이 다시 불고 있었다. (*)






정말로 그냥 랑야방 감상문이네요 허허허허..... 제 안의 정매란 역시 원작으로 이미 너무나 완전하기에 (mm.... 하지만 아직 이 기분들이 다 정리가 안 된 게 슬프네요 흑흑 ㅠㅠ 언젠가 기회가 닿게 되면 이 기분들을 다시 정리해서 쓸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는 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정매가 좋습니다. 정왕종주가 좋습니다. 경염임수가 너무 좋아요 흑흑 ㅠㅠㅠㅠ



+ 제목인 수, 는 부제에 붙어있는 뜻 그대로입니다. 바람소리 수 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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