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Other Fiction

Extra Form
장르 쿠로코의 농구

* 사랑해마지 않는 동생, 민이 (@min_daydream)에게 생일 선물로 써줬었던 청흑 단편입니다XD
* 민이의 개인지에 협력 되어 판매되었던 글입니다. 고로 공유는 링크로만 가져가주세요.




(140201)

w.Ruka
for.靑黑, 민이



그 밤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야 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도쿄를 떠나 꼬박 4시간동안 액셀을 밟아댔고, 10시면 집마다 모든 불을 꺼버리고 잠이 드는 한적한 동네에 찾아오는 일 즈음이야 연에 한두 번은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4시간동안 산길을 달리며 운전을 해야 했던 수고도, 불편한 얼굴들과 억지로 대면해야 하는 불편함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예 진귀한 체험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아닐 날이었다. 어른들 몇이 술을 권했고, 불편함 참아가며 시작한 술자리에서 시비를 붙인 건 그쪽이었고, 먼저 주먹을 내지른 건 내 쪽이었다. 불편한 친척 어른들과 술을 마시면 으레 있는 일이었고, 나를 뜯어 말리는 소꿉친구의 행동마저 자연스러웠다. 기분이 더러워져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내 뒤통수에 어른 몇이 대놓고 싫은 소리를 꽂아 넣었지만 이내 또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며 연신 낄낄 거렸다. 술에 취한 걸음을 비척비척 옮겨가며 나는 대충 집 뒤에 있던 연못가에 처박혔다. 아무 것도 아닐 날이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많은 날들의 하루에 불과했다. 그런 밤이었다. 그냥 이해하자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그냥 평범히 직장 생활하고 있는 다른 날에 비해 약간 패턴은 다르지만 살면서 한두 번쯤은 만나게 되는 뭐 그런 평범하고 빤한 날.
그 밤은 그랬어야 했다. 그 밤은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니었어야 했었다. 그대로 저물었다면 내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밤이 아니었다면 난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그런 달이 뜨지 않았으면 내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게 빤했다. 그런 달이 뜨지 않았더라면,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꼰대 같은 친척들이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불편한 양복 차림으로 대충 돌계단을 베고 눕지만 않았더라면, 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으며 향을 올리는 수고 같은 걸 하지 않았더라면, 그 단에 박혀 있는 사진이 내 스물다섯 평생동안 지독히 미워했던 그 영감쟁이가 아니었더라면. 그 밤이 그런 밤이 아니었더라면, 그 밤만 아니었다면.
평생 가족에게 살가운 말 한 마디 없던 영감쟁이는 죽은 후에도 당신과 꼭 같은 친척들의 불편한 잔소리를 아들에게 쑤셔 넣었고, 아들이 술 몇 잔에 취해선 친척들과 시비를 붙고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쪽짜리 달이 높게 걸려있던 그 밤, 그 빤한 밤은 아버지의 장례가 있던 날이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먼 밤하늘을 울렸다.


“아오미네, 어디 있어? 아오미네―”


감겨 있던 눈을 찬찬히 열었다. 많이 듣던, 익숙한 소꿉친구의 목소리였다. 낯이 익은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부르는 톤과 잔소리의 패턴마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채로 모모이는 연신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누가 날 찾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찾고 계시단 말야. 자고 있지, 너! 아버님 향단 불은 지켜야 될 거 아냐. 이번엔 또 어디에서 자고 있는 거야? 아, 진짜, 다이쨩!”


귀찮게. 짧은 말을 삼키며 나는 대답 대신 길게 하품을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답을 해주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돌계단 위에 길게 누워 연거푸 하품을 삼키고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하늘만 봤나. 이미 해가 진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도 걸려 있었다. 도쿄에 비해 별이 터무니없이 차고 넘쳤다. 저런 걸 두고 곰이니 사냥꾼이니 전갈이니 하는 묘한 자리 이름을 붙여 두는 것 같던데, 그것까진 내 알 바 아니고. 천문학이니, 점성술이니 하는 것들은 관심이 없었다. 환생도 믿지 않고 귀신의 존재도 믿지 않으며, 죽은 자의 세계라는 건 전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하늘을 올려보는 내 기분도 별 감흥이 없었다. 나를 찾는 목소리에 별 대답이 없던 것처럼, 어쩌면 영감의 죽음처럼.
아, 기분 뭣 같냐, 또. 한 마디를 탁 뱉듯이 던져가며 나는 뒤척뒤척 돌아누웠다. 여름 햇살에 한껏 달궈졌을 돌계단은 등 아래에서 찬찬히도 서늘해졌다. 돌아누웠다, 뒤척였다, 이내 몸을 들어 다시 앉았다. 망할 영감쟁이. 한 번을 더 씹듯이 뱉어가며 발끝을 툭 걷어찼다. 발끝에 걸린 돌멩이 하나가 계단 위를 톡톡 굴러가더니 아래 놓여있던 연못 속에 뛰어 들었다. 잔잔했던 연못가에 풍덩 물소리가 울렸다. 날 부르던 목소리는 포기했는지 이미 진작 사라졌다. 고요해진 연못가에서 풀벌레들이 찌륵찌륵 울었다. 머리 위에 걸린 달이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칼로 토막을 내기라도 한 것처럼, 모난 데 한 곳 없는 완전한 반달이었다.
달 한 번 참 기똥차네. 순수한 감탄이었다. 만지면 벨 것 같은 모양새에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만지듯이 천천히 덧그리다 우스워서 이내 관뒀다. 뭔 짓이냐고, 나는. 픽 웃음을 삼켜놓고 그제야 자리를 털었다. 대충 양복 주머니를 쑤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액정의 시계는 11시 59분에서 정확하게 네 개의 0을 찍었다. 꼭 짜기라도 한 것 같은 타이밍에 픽 웃고 말았다. 이쯤 되면 시끄러울 일도 대충 지나갔겠지. 영감의 꼰대 같은 친척들이 저녁잠이 많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침까지 남아 기운차게 잔소리를 해줄만큼 의리 있는 친척들은 누구도 없다. 당신의 형제들도, 친구들도 딱 그 정도의 의리였다. 그마저도 영감 같아서 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평생 어머니에게 화풀이만 쏟아 붓던 영감은 일본에선 너무 먼, 중동의 어느 인공 휴양지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지키지 않은 석유부호의 람보르기니에 치여 객지에서 죽었다.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결말엔 먼 길 잘 가시라고 밤새 향불을 지켜줄 친구 하나 제대로 없었다. 딱 그런 인생이었지, 당신이란 아버지는. 그게 같잖아서 나는 이번엔 한 번 정도 웃어줬다. 비실비실 입새로 웃음결을 흘려놓고 닦듯이 얼굴을 쓸었다. 그제야 술이 좀 깨는 기분이었다. 새벽녘 바람이 이제는 제법 좀 찼다. 여름인데도.
들어갈까. 짧게 기지개를 켜고,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밟아 내려갔다. 듬성듬성 잡목이 자라있는 연못가의 희미한 흙길을 따라 찬찬히 걸었다. 비척비척 걷는 걸음결에 나무뿌리며 수풀이 채일 때마다 옅게 우짖던 풀벌레들이 숨을 죽였다. 그러다 어느 즈음에 나는 어떤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이상했다. 연못이, 연못에 걸려있던 반쪽짜리 달이, 거울처럼 비춰지던 달이, 흔들림조차 없던 수면의 결이, 일순 짠 것처럼 울음을 멈추던 풀벌레들이, 아니,
거기에 오도카니 웅크리고 앉아있던 어떤 그림자가.


“……”


귀신은 믿지 않는다. 신사의 신년 운세도, 잡지의 한 귀퉁이에 꼭 붙어 있는 별자리 점도, 어느 동네의 실화라는 둥 떠들어대는 미스터리 괴담도 나는 믿어본 적이 없다. 귀신은 존재하지 않고, 사후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이며, 점은 그저 재미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보았을 때, 아니, ‘녀석’을 보았을 때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귀신일지 모른다고, 그토록 고요히 웅크리고 앉아 있던 녀석의 모습이 차라리 영혼일 지도 모른다고.
연못을 닮은 옅은 물색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축제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늬가 없는 하얀 유카타는 이런 흙길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치고는 얼룩 하나,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체구가 작은 몸은 웅크리고 앉은 유난히 더 작았다. 그 때문에 기척을 못 느낀 걸까. 몇 살이나 됐지.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 척 보아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수면에 비친 달빛을 받아 부옇게 빛났다. 그마저도 묘해서 마치 녀석을 둘러싼 주변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려둔 것만 같았다. 하얗고, 부옇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른 채로 그저 지나칠 녀석이다. 저토록 현실감이 없는 느낌을 나는 스물다섯 평생에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손을 뻗어 잡는다면 금세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 꼭 물그림자 같은 녀석이었다. 수면 위에 그림처럼 떠올라 있는 반달인 듯 했다.
여어, 하고 붙인 말에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제 머리색과 꼭 같은 눈동자의 색도 물색이었다. 나를 빤히 올려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연못처럼 일렁거렸다. 이상하게 목이 타서 잠깐 마른침을 삼켜 넣었다. 목울대가 느리게 울렁이는 게 내 몸인데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녀석은 답 없이 나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뭐하는 놈인데 이 시간에 이런 데 있냐, 너.”
“……”
“뭐냐, 벙어리야?”


귀신인가. 설마. 또 한 번 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귀신도 아니고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아닙니다.”


신도 벙어리도 아니었다. 다행인가, 이거. 묘하게 안도하는 내 기분에 놀랐다. 녀석은 그 채로 앉은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났다. 바라보고 있는데도 녀석의 행동을 놓쳐버릴만큼 기척이 작았다. 이렇게 희미한 기척은 처음이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녀석이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우고 난 후에야 난 녀석을 제대로 내려다 봤다. 세 걸음 앞에 선 녀석의 머리는 딱 내 가슴께까지 올 듯 했다.


“귀신도 벙어리도 아닙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이런 시간에 이런 연못을 헤맬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아아, 뭐.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만.”
“상복처럼 보입니다.”
“제대로 봤잖냐, 너.”
“누가 죽은 겁니까?”


어어. 짧게 받아칠 때 조금 느린 웃음이 터졌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표정이 없어도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공손한데 어딘지 제 할말은 딱딱 하는 말투였다. 묘한 녀석인데, 이거. 다른 때였으면 진작 잃었을 흥미가 식지도 않고 솟아났다. 이름은. 짧게 묻자 녀석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네 이름. 넌 이름이 뭐냐고.”
“이름을 알아서 어디에 쓰려는 겁니까.”
“불러주려고.”
“이름 불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초면입니다.”
“그런 예의 따지기엔 초면에 이름 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이잖냐, 너.”
“……”
“이름.”
“성격이 나쁘네요.”
“칭찬이냐? 고집은 좀 세지. 그러니까 이름.”


연거푸 떨어진 말에 녀석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마저 묘했다. 여름날 옅은 바람처럼 한숨을 삼켜 넣고 녀석은 또박또박 제 이름을 늘어놓았다. 그마저도 그림자였다. 물결 위에 어리는, 바람결에 일렁이며 작은 빛에도 반짝거릴 물그림자.


“쿠로코 테츠야라고 합니다.”
“어, 그럼 테츠.”
“테츠야라고 제대로 불러주면 좋겠습…”
“난 다이키다, 아오미네 다이키.”


손을 뻗었다. 세 걸음 뿐이던 간격을 단박에 가로 질러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내 스스로도 좀 놀랐던가. 귀신은 아니었네. 제대로 만져지고, 제대로 느껴졌다. 손을 문지를 때마다 살갗을 부드럽게 스치는 머리카락이 기분이 좋았다. 작은 강아지라도 문지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개는 좋아하지 않지만.


“테츠, 너 같은 녀석은 이런 달밤에 그런 차림으로 헤매고 다니지 마라. 관두는 게 좋다고, 그거.”
“……”
“사람 맘이 술렁거리거든.”


뭐라고 떠드는 거냐, 나는. 비실비실 웃음이 샜던가. 아니면 그마저도 말았던가. 그래도 손을 걷지는 못했다. 의식적으로 매만지던 손아래에서 녀석은 눈을 들어 한참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시선 한 번 피하는 법이 없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의아한 듯, 그저 덤덤한 듯 나를 올려보다 녀석이 옅게 웃었다. 잔잔했던 수면 위에 나비라도 앉은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마음이 일렁거렸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아오미네군은.”


목이 탔다. 가슴께가 근질거렸다. 어쩌면 조금 심장이 뛰었던가. 근질거리는 가슴께를 되짚는 대신 나는 가만히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이 팔로 어깨를 안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은 어깨를 이 품으로 당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모두 달 때문이었다. 이 기묘한 기분은 달 때문이다. 반쪽 주제에 더럽게 훤한 저 달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거다. 망할 영감이 죽어버려서, 술을 마셔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뿐이다. 연거푸 생각하며 나는 말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테츠, 하고 불렀다. 녀석이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 또 한 번 물소리가 났다. 누군가 잔잔했던 연못에 돌이라도 던진 것처럼. 누군가 빤했던 문장에 낯선 점이라도 찍어둔 것처럼. 누군가 마치 작은 손으로 내 심장이라도 움켜 쥔 것처럼.


“좀 자주 웃는 게 좋겠는데, 넌.”
“웃는 건 내 맘입니다.”
“어, 웃으라고 말하는 것도 내 맘이고.”


예쁘니까. 덧붙은 말을 삼킬 때엔 나도 가볍게 웃었다. 머리 위엔 여전히 달이 훤했다. 칼로 잘라낸 듯 반쪽뿐인 반달이 수면 위에서 부옇게 부서졌다. 멀리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이키, 하고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았다. 아, 맞다. 뭐하는 놈인지를 못 들었는데. 몇 걸음을 떼어보다 다시 돌아봤을 때 거기에 녀석은 이미 없었다. 


“아오미네,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다이쨩?”


흙길 끝에서 나타난 분홍빛 머리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다이쨩, 괜찮아? 왜 그래? 연거푸 묻는 말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저 빈 연못만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연못은 텅 비었다. 고요한 수면 위에 반쪽짜리 달만 고요히 일렁거렸다. 잡으면 흩어져 버릴, 돌아서면 지워져 버릴 물그림자처럼,


“다이쨩?”
“……”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거야?”


꿈처럼.






* * *


아침 10시, 목탁 소리가 고택을 울렸다. 발인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문을 타고, 복도를 넘어 들리는 경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이불 더미 위에 늘어지듯 누워 있었다. 10분 전까지 나를 깨우겠다고 끙끙 거리던 사츠키도 이미 포기했다. 녀석도 아마 저 자리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훌쩍거리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거나, 손수건을 건네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내가 해야 했을 일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버지라는 꼰대 영감의 장례였기 때문이었다. 발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대단치 못할 게 빤했다. 저 자리까지 지키며 앉아 있는 건 경을 외는 승려와 사츠키의 식구들, 우리 어머니 정도겠지. 저 자리에 출석조차 하지 않은 주제에 꼰대 같은 친척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걸로 한동안 입방아를 찧어 댈 거다. 뭐, 상관있겠냐고. 어차피 오늘 지나면 보지도 않을 얼굴들이다. 이런 일이 아니면 평생 엮일 일도 없는 생판 남이다. 영감이 죽으면서 집과 연결 되어 있던 어설픈 실 하나도 이젠 완전히 끊어졌다. 어머니에게 미국행 티켓을 끊어준 건 나고, 남아있는 며칠동안 사츠키는 어머니를 도와 짐을 정리하겠지. 미국에는 어머니와 함께 그림을 그렸던 이모가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참고 견디는 한편으로 미국에 있는 이모를 부러워하고 동경했다. 삼시세끼 밥 잘 챙기고, 바깥 일에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으며 아이나 잘 키우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강조했던 아버지도 이제는 세상에 없다. 어머니마저 미국으로 떠나면 난 이 망할 집과 완전히 인연을 끊게 되겠지. 그게 다행이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기왕 떠날 거면 좀 일찍 가든가, 망할 영감이.”


웃었다. 우스워서, 꼴같잖아서 나는 그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데 명치가 아팠다. 울렸다. 나는 이게 우습고 같잖은 게 빤한 데도 웃음결이 썼다. 얹혀 있던 돌멩이가 빠져 나간 자리에 꼭 바람이라도 드는 기분이었다. 허전하고, 허망하고, 허무하고. 그 허무감에 나는 그저 웃었다. 웃고 웃다가, 이내 일그러졌다. 욕이 터졌다. 망할 영감, 하여튼 빌어먹게 망할 영감이.


“…이렇게 갈 거면 적당히 좀 하고 꺼지지.”


어릴 때 나는 학예회가 가장 두려웠다. 입학식과 졸업식이면 일부러 가장 줄 끝에 섰다. 어쩌다 담임 선생에게 걸려 질문을 받는 게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아오미네, 아버지는 오늘 못 오시니? 대답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 항상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건 엄마였다. 다이키의 아버지가 많이 바쁘셔서요, 죄송합니다, 다음엔 꼭 함께 오면 좋겠어요. 담임에게 아버지는 그저 세상의 수많은, 바쁜 가장 중 한 명이었는데도 나는 그 질문조차도 싫었다. 그런 날이면 유난히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아이들이 눈에 걸렸고, 어김없이 그 아이들을 쫓아가 시비를 걸었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어머니의 곁에서도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사과 밖에 할 줄 몰랐다. 담임에게도, 내가 때린 아이의 부모들에게도, 또 아버지에게도.
말대꾸를 한다고 밥상머리에서 걷어차여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어릴 땐 뭐가 그리 죄송한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고, 사춘기가 되면서는 그 죄송하다는 말에 화가 났다.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주먹이 날아오면 되받아쳤고, 말리는 어머니마저 불편해서 나는 점점 더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됐다. 어머니는 나를 학업을 핑계로 도쿄에 보냈고, 그때부터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추 대학에 가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샐러리맨이 되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동안 난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아버지라는 이름은 내 인생 곳곳에서 나를 괴롭혔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당신을 닮아가는 내 얼굴이 끔찍했다. 요컨대 아버지는 내겐 살아있는 망령이었다. 내 인생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때문에 지워도 지울 수도 없는 망령.
때문에 나는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귀신조차 믿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죽은 것보다 끔찍하다. 죽은 것은 원망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이 단지 나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원망도, 동경도, 화해도, 사랑도.

죽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죽었다. 나를 괴롭히던 망령이 이제야 나를 온전히 벗어났다. 그럼에도 나는 기쁘지 않았다. 즐겁거나 후련하지 못했다. 앓던 이가 빠진 자리가 그저 아팠던가. 아니면 시렸을까. 그 우스운 감각에 나는 누운 채로 그저 웃었다. 복도를 타고 경 소리가 느릿느릿 흘러 들었다. 어디에선가 멀게 향 냄새가 났다.
향 냄새에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연못 같은 물색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의 그 눈이었다.


“……”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형상에 나는 처음 몇 초간은 굳었다. 반응조차 할 수 없을만큼 현실 감각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어, 했던가. 그러나 대단한 리액션은 나오지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굉장한 얼굴이네요, 아오미네군.”


곧 죽을 사람처럼. 들여다보며 덧붙인 말에 난 잠깐 눈을 구기고 말았다. 바깥에선 여전히 경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낮게 퍼지는 소리를 들으며 난 나를 내려 보는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봤다. 햇살에도 녀석은 사라질 듯 희미했다. 그럼에도 일렁이는 물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그 깊고 푸른 연못의 물그림자처럼.


“테츠.”
“네, 아오미네군.”
“넌 뭐야.”
“글쎄요.”
“귀신이야, 아니면 사람이야.”
“귀신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새 까먹더니 머리가 나쁩니다.”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이상해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혼령 같은 건가. 아니면 뭐, 수호령이라든가.”
“그건 아오미네군이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하기야 뭐, 나름이겠지. 말을 받으며 난 얕게 웃었다. 귀신으로 보이면 귀신이겠고, 사람으로 보이면 사람인 거고. 난 귀신은 믿지 않는다. 귀신도, 혼령의 존재도 믿지 않는 내가 믿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실재뿐이다. 손을 뻗었다. 내 손 끝이 뺨에 닿아도 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 주춤하다, 이내 말았다. 그 채로 나는 찬찬히 녀석의 뺨을 더듬었다. 손 안에 채이는 뺨은 조금 축축하고 서늘했다. 그래도 부드러웠다. 이렇게 만지고 있으면 손 안에서 꼭 녹아버릴 것처럼 섬세한 촉감이었다. 한쪽에선 여전히 경 외는 소리가 울렸다. 승려가 외는 경 소리, 열어둔 창문에서 한가롭게 흔들리던 풍경 소리, 이름 모를 새 소리와 바람결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같은 것들. 그 모든 소리 속에 나는 가만히 마른 침을 삼켰다. 테츠,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왠지 탁했다. 내 목소리임에도 낯설었다. 녀석은 이번에도 네, 하고 짧게 말을 받았다.


“부드러워.”
“그건 아오미네군이 부드럽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만져 봐도 되냐.”
“허락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아오미네군의 의지라면.”
“안아보고 싶은데.”
“……”
“입 맞춰보고 싶은데.”
“……”
“왜지. 테츠, 왜냐고, 이건.”
“나쁜 건 아니겠죠. 아오미네군의 마음이 그렇다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대화의 맥락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무슨 주제인지 알 지도 못할 말을 떠들어 대면서도 나는 그저 웃었다. 웃음이 났다. 픽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잡는 대신 나는 녀석의 뺨을 매만졌다. 뺨을, 귓불 아래와 곧게 뻗은 목덜미를, 벌어진 유카타 자락 틈으로 보이던 선명한 쇄골 언저리를, 다시 한 번 목덜미를, 뒷목을. 뒷목 언저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가만히 팔을 잡아 당겼다. 왜인지도 모르면서 끌어당기는 동안에도 녀석은 나를 피하지 않았다. 눈 한 번 피하는 법도 없었다. 감을 줄도 모르는 물색 눈을 선명히 바라보며 다가온 입술을 가만히 내 쪽으로 당겼다. 입을 맞췄다. 탐색처럼 얕게 맞붙었다 떨어진 입술에선 옅은 물 냄새가 났다. 연못처럼 일렁이는 짙고 푸른 물 냄새가 나는 어쩐지 눈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픽 웃음이 샜다.


“입을 맞추는 이유가 뭐죠, 아오미네군.”
“내 맘이다.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따져 묻지 말라고, 머리 아프니까.”
“이유 없이 입을 맞추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이유를 말…”


당겨서, 찍듯이 키스했다. 맞붙은 입술이 당황한 듯 요동을 쳤다. 당황했나, 아니면 놀랐던가. 손을 펼쳐 양뺨을 움켜쥐면서도 나는 녀석을 놔주지 않았다. 옅게 입술을 깨물고, 호흡을 핥고 숨을 삼켰다. 옅게 퍼덕이던 녀석은 이내 잠잠해졌다. 버티듯 내 가슴팍을 셔츠 째 움켜 쥔 손에 난 웃었던가, 아니면 웃지도 못할만큼 집중했던가. 답을 찾는 대신 나는 또 한 번 각도를 틀고,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멀리서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을 외는 건 이제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목탁 소리와 함께 그제야 나는 움켜쥐고 있던 뺨에서 힘을 풀었다. 풀려 떨어진 손끝을 알면서도 녀석은 곧바로 나를 피하지 않았다. 피하거나 벗어나는 대신 녀석은 오도카니 나를 내려 봤다. 아오미네군, 하고 나를 불렀다. 대답 대신 난 녀석을 올려봤다. 바라보는 눈가가 온통 시큰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때였다.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뭘.”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잃어서 화가 난다고, 분하다고, 속이 상한다고.”


무슨 헛소리냐고 되받아 치려고 했다. 받아 치려는 타이밍을 빼앗긴 건 녀석의 손 때문이었다. 받아칠 틈도 없이 하얗게 뻗어온 손이 내 눈가를 문질렀다. 문지른 손끝이 젖었다. 문질러진 눈가가 시큰했다. 그제야 나는 내 눈가가 이토록 부옇게 흐린 이유를 알아차렸다. 손을 뻗어 눈을 가리며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눈을 가린 손이 흠뻑 젖었다. 병신처럼 쪽팔리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나를 녀석이 가만히 끌어안았다. 나보다 한참은 작은 녀석이 나를 안으며, 나를 다독이며 조심히 내 등을 쓸었다. 그 손에 나는 한심했다. 내가 한심했다. 그럼에도 싫지 않았다. 따뜻했다. 억지로 후벼 판 상처가 나아가는 것처럼. 따뜻한 물속에 감싸 안긴 것처럼.


“많이 아팠을 텐데, 아오미네군.”
“……”
“잘 견뎠어요.”


견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녀석도 내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나보다 한참은 작을 녀석을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멀리 목탁 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불었나. 풍경 소리가 울렸던가. 아니, 어쩌면 그건 멀고 먼 물소리였나. 귀를 기울이는 대신 난 녀석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안은 팔이, 온 어깨가 다 떨렸다. 진동하듯.


“듣고 싶었어.”
“……”
“사랑한다고, 넌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그래도 널 참 아끼고 있다고.”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긴 나를 떨쳐 내거나 미는 법도 없이 가만히 등을 쓸며 나를 마주 안았다. 그 작은 몸에 매달려 나는 기어이, 쪽팔리게, 울었다. 우는 건지도 모를 울음을 토해가며 으스러질 듯 너를 끌어안았다. 오늘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처럼, 지금이 아니라면 놓쳐버릴 말처럼, 이 순간이 아니라면 스러져 버릴 환상처럼. 물그림자처럼. 손을 뻗으면 이 품에서 산산이 쏟아져 사라져 버릴 그 물그림자처럼.


“사랑합니다, 아오미네군.”


녀석이 기어이 내 안에서 일렁거렸다. 꿈인 듯이, 사랑인 듯이. 이제 다시 꾸지 못할 여름밤의 꿈처럼, 그토록 말갛게 일렁이던 물그림자처럼. (*)














지금보니 저는 이런 망글을 대체 무슨 패기로 선물이랍시고 줬을까요.......... 심지어 협력으롴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 미안하다 민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이때 민이가 낸 개인지의 본편 내용이 뭔가 요괴가 나오며 동양적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기에 그 분위기에 일부러 맞춰서 썼습니다. 현대 일본이 배경인 장르는 이런 점이 가장 매력인 것 같아요. 이런 분위기가 하도 오랜만이라 신나게 썼던 기억이 새록새록. 그러나 대체 무슨 패기였을까요2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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