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고전에_알오버스로_캇데쿠
* 알파 귀족 x 오메가 황태자 이야기


http://youtu.be/2-9CnV_cLsE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밑으로 말 한 필이 쉼 없이 달렸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금발 머리칼의 풍채 좋은 남자가 말을 몰아 도읍의 남문을 통과해 들어왔을 때부터 소문은 말보다도 빨리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6년의 세월이 지났다고는 하나 나라에서 최고로 손꼽혔던 의관의 명성은 하루 아침만에 잊혀질 것이 아니었다. 그를 알던 모든 이들이 두런두런 입을 모았다.

이 나라 최고의 의관이 돌아왔다. 이유는 하나뿐일 터였다. 이 나라에서 태자의 독을 다스릴 수 있는 오로지 야기뿐이었다.

도읍으로 들어온 야기는 6년동안 버려져 있던 사가私家에 들르는 대신 곧장 바쿠고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몰래 들어선 야기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던 미츠키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준비해준 의술 도구부터 챙긴 후에 야기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야기가 황궁 입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황궁 앞을 10년이 넘도록 지켜온 노련한 초병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기는 그저 쑥스러운 낯으로 이렇게만 고했다.

“자네들은 가서 황제폐하께 돌아오자마자 문안을 드리지 못하는 불충을 부디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전해주시게. 지금은 한 시가 촉박하다고, 일이 모두 끝난 후에 들러 꼭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겠노라고.”
“……”
“아, 그런데 별궁이 어느 편이었지? 워낙 오랜만이라 생각이 나질 않아서, 하하…”

소식은 곧장 태휘전에도, 별궁에도 전해졌다. 허겁지겁 달려온 초병이 야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전해주었을 때, 내관장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다 그만 책상에 놓여있던 벼루를 떨어뜨렸다. 아끼던 벼루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으나 내관장은 그 깨진 조각을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마치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얼굴이었다. 허나 별궁 앞에 나타난 금발 머리칼의 풍채 좋은 사내를 보았을 때엔 내관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기 토시노리가 돌아왔다. 태자의 하나뿐인 스승이, 이 나라에서 음양의 조화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유일한 자가 기어이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하하.”

오랜만에 관복을 차려 입은 야기가 허허로운 얼굴로 웃으며 내관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내관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마주 받았다. 허나 음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던 노련한 관리도 그때만큼은 눈길의 떨림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었다.
다행입니다. 애써 담담한 얼굴로 내관장은 환히 웃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수의관.

“안 그래도 태자전하께서 위중하신 이때에 이 나라 최고의 의관께서 계셨어야 한다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이리 발길을 해주시다니요. 기적이 아닙니까. 드디어 태자전하를 구할 방도가 생기다니…”
“예, 하늘이 저를 이곳으로 보내주셨지요. 태자전하의 목숨을 구하라고 말입니다. 계시처럼 말이지요.”

아니, 분명히 누군가 소식을 전한 것이다. 내관장은 알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6년 전에 국외로 떠난 이후 야기의 소식을 아는 이는, 내관장이 알기로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저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의술을 행하고 있노라는 소식만 행상인들의 입을 타고 전해져 왔을 뿐이다.
드물게 떨리는 내관장의 눈길을 이미 다 봤으면서도 야기는 그에 대해선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호쾌했던 전직 수의관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인사는 이쯤 하지요. 지금 이 궁에서 태자전하의 목숨보다 귀하고 중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
“태자전하를 뵈러 가겠습니다.”

그대로 야기는 지체 없이 처소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태자를 진맥하던 수의관보도,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던 키리시마도 모두 황궁 초병과 다름없는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짧은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야기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와 미도리야의 상태부터 살펴보았다. 헤어질 때 너무나 작고 어렸던 제자는 이제 제법 뼈대가 굵어지고 남자의 태가 났지만, 생기를 잃은 하얀 뺨은 기억보다도 파리하고 창백했다. 황급히 짚어본 이마에선 열이 끓었고, 손목의 맥박은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도 못할만큼 너무나 미약했다. 허나 아직은 죽지 않았다. 하루라도 지체되었으면 이미 돌이킬 수 없었겠지. 길게 심호흡을 한 야기가 들고 온 도구들을 펼치며 가장 길고 예리한 침들을 골라냈다.

“미안한데 자네들 모두 자리를 비켜주시게. 지금부터 태자전하의 독을 뽑아낼 것이라서.”

이불을 걷고 여며진 미도리야의 허리춤을 풀며 야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수의관보와 키리시마가 문을 닫고 나선 후에야 야기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제대로 내려다보았다. 호기심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아 늘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이 많았던 제자는 총명하고 깊은 숲색 눈을 굳게 닫고선 미동 없이 시신처럼 누워 있었다. 의복을 모두 걷어낸 미도리야의 굳은 팔을 주무르고 침을 놓을 위치를 잡으며 야기가 낮게 말을 걸었다. 이즈쿠.

“너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단다. 네 소꿉동무가 말이다. 난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그 녀석이 원래 남에게 부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잖느냐, 허허.”

내가 또 그런 약속은 거절을 잘 못해서… 야기가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간절히 속삭였다.

“허니 살아다오. 네가 살아야 그 아이도 사는 것이다.”

견뎌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황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 알아야 한다. 누가 너의 삶을 이 차가운 궁에 유폐시켰는지, 누가 권력에 눈이 멀어 너와 너의 어머니를 가두었는지. 다시 한 번 깊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야기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반드시 살릴 것이다. 야기가 하얀 살갗에 첫 번째 침을 찔러 넣었다.
별궁 위로 낮게 깔려있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태자가 쓰러진 지 꼭 사흘이 되던 날이었다.









를 보았다
@ruka_tea



13









하늘 높이 뜬 태양빛이 찬란히 부서져 내렸다. 멀리 매미가 울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별궁의 연못에는 예년보다도 송이가 크고 탐스러운 연꽃들이 흘러 넘칠만큼 가득 피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미도리야는 이것이 모두 꿈임을 알았다. 이처럼 환히 피어오른 연꽃을 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넉 달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 그때가 되어도 이만큼 아름다운 연이 피지는 못하겠지. 꿈 속의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별궁에선 모든 것들이 늦되고 더디게 자랐었다. 꽃도, 잎도, 그리고 자신도.
이런 광경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반짝이는 햇볕, 푸른 물결, 햇님이 내려온 듯 송이를 흠뻑 열고 있는 하얀 연꽃과 그 꽃을 단단히 떠받치고 떠있는 넓고 푸른 잎사귀. 바람은 이따금씩 연꽃을 흔들며 잔잔한 수면 위에 파문을 그려냈고, 그 결에 실려온 연의 향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태양에게 향기가 있었다면 그건 분명 연꽃을 닮았을 거야.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떴다.

쪽문을 폴짝 뛰어 넘은 작은 그림자가 한 달음에 달려와 미도리야를 와락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끌어안은 미도리야가 제 허리에 매달린 작은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숲처럼 굽슬거리는 머리칼에 선홍색 눈을 가진 아이가 미도리야를 올려다보며 환히 웃었다. 분명 모르는 아이임에도 미도리야는 어쩐지 그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익숙한 인상이 아이의 눈매와 콧날에 오밀조밀 매달려 있었다.

‘아바마마.’

미도리야의 옷소매를 꼭 잡으며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아바마마라니… 당혹감에 미도리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성큼성큼 나타난 검은 장옷 소매가 아이의 뒷목을 냅다 잡았다. 그 옷을, 그 얼굴을, 아이를 나무라던 그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를 알아차렸을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인데도.

‘너희 아바마마는 지금 바쁘다고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지. 읽으란 서책은 안 읽고, 어!’
‘싫어, 서책 싫단 말야! 캇쨩은 바보야! 맨날 뭐라 그래! 나빠!’

뒷목을 잡힌 아이가 조그마한 주먹을 붕붕 흔들며 버둥을 쳤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입매를 씩 밀면서도 검은 장옷의 주인은, 바쿠고는 아이를 봐주거나 손에서 순순히 풀어주지 않았다.

‘안돼, 니네 아빠는 더럽게 바쁘다고. 황제는 본래 바쁜 자리야. 것도 모르냐?’
‘몰라, 흥. 나는 캇쨩보다 아바마마랑 노는 게 더 좋은데!’

나랑 놀면 되잖아, 이 고집불통아. 드물게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타이른 바쿠고가 그대로 아이의 손목을 잡아 끌며 제 목에 무등을 태웠다. 싫다고 하던 것과 달리 아이는 바쿠고의 등 위에 업히자 금세 또 눈을 둥그렇게 접으며 흐흐 웃었다. 바쿠고가 아이를 태운 어깨를 배를 태우듯 양옆으로 흔들흔들하며 박자를 타자 신이 났는지 아이는 까르르 웃었다. 더, 캇쨩 더! 붕붕, 나 붕붕! 바쿠고가 콧날을 노골적으로 일그러뜨렸다. 아, 더럽게 귀찮네, 진짜. 그래도 어깨에 속도를 붙이는 그 얼굴은 무등을 탄 아이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넌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찮아. 니네 아바마마 닮았지, 어?’
‘아니거든! 캇쨩 닮았거든!’
‘웃기는 소리 한다. 야, 나 닮았으면 머리는 더 좋아야지. 얼굴만 닮아가지고.’
‘어, 아바마마는 그래서 좋댔는데. 그쵸, 아바마마?’

바쿠고의 어깨에 앉아있던 아이가 이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꿈인데도 미도리야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맞아, 꿈인데도. 환히 웃는 아이는 참으로 해맑았다. 세상 모든 사랑스러움을 그곳에 모아다 빚어놓은 것처럼 아이는 작았고, 귀여웠다. 그런데도 미도리야는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아이의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아 그랬었다.

‘우리 아이구나.’

아이와 놀아주던 바쿠고의 몸이 멈칫 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했다. 그렇구나. 숲색 눈이 아이와 같은 기색으로 흐 웃었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미도리야가 자신을 바라보던 동그란 선홍색 눈을 향해 천천히 양팔을 뻗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괜찮을까?’
‘네, 아바마마!’

신이 난 아이는 바쿠고가 자리에 앉으며 자세를 낮춰주기도 전에 미도리야의 품으로 훌쩍 뛰어 들었다. 이게 다치려고! 바쿠고가 순간 성을 냈지만, 아이는 못들은 척 미도리야의 품안에 파고 들었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은 따뜻했고, 덤불처럼 곱슬거리는 숲색 머리칼에선 희미하게 연꽃의 향내가 났다. 꿈인데도 그랬다. 맞닿은 아이의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바쿠고가 툭 물었다. 야, 데쿠.

‘어때.’
‘예뻐.’
‘그거야 당연하지. 누구 자식인데.’
‘그러게, 흐. 어떻게 안아야 할 지 모르겠어. 안겨본 적이 없어서, 하하. 이런 느낌이구나.’
‘……’
‘이름은 뭐야?’
‘아직 없어.’

어설픈 팔로 아이를 추스르고 있던 미도리야가 잠시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름이 없다니… 그렇구나. 그 얼굴을 가만히 뚫어보다 바쿠고가 가볍게 입술을 뗐다.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으니까.’

그 채로 얼마나 오랫동안 그 아이를 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아이를 안고 있는동안엔 늘 버거웠던 곤룡포도, 머리에 쓴 관도 다른 때처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품이 편했는지 아이는 금세 가슴팍에 뺨을 대고 소르륵 잠이 들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여름 바람은 잔잔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잠들었네. 곁으로 다가온 바쿠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툭 그렇게 말했다. 응. 미도리야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천천히 뻗어온 바쿠고의 손이 기울어져 있던 미도리야의 뺨을 매만졌다. 고개를 들어 올릴 때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입술이 짧게 겹쳤다 떨어졌다. 그때도 어디선가 연꽃의 향내가 났었다. 선홍색 눈이 하, 웃었다.

‘그러니까 돌아와.’

아이가, 연꽃이 빛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하얀 허상 속에서 바쿠고가 말했다. 이름은 붙여줘야 될 거 아냐.

‘돌아와서 살라고, 이 인생을. 전부 네 인생이라고, 멍청아.’
‘……’
‘이젠 좀 행복해져도 되잖아.’

그때 무슨 얼굴을 했을까. 모르겠다. 안다 해도 기억할 수는 없었을 터다. 어차피 이런 건 다 꿈이야. 깨버리면 다 잊혀져버릴, 눈을 뜨면 생각도 나지 않을 그저 꿈일 뿐이다. 꿈이라면 지금껏 지겹도록 꿨었다. 다 알아. 난 자주 이랬어, 캇쨩. 꿈 속에서라면 뭐든지 바랄 수 있었다. 뜨지 않는 해, 저물어버린 연꽃, 될 수 없는 황제, 이뤄지지 않을 마음과 너의 달이 되는 일.
발정 때마다 볕이 들지 않는 별궁에서 버려지듯 구금되어 온 살갗을 파헤치고 온 뼈대를 부러뜨리는 발작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꿈속에서는 얼마든지 너에게 나를 던질 수 있었다. 밤 내내 난폭하게 나를 가르는 너의 허리 밑에서 달뜨게 헐떡이며 수없이 부서지다 눈을 뜨면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럴 때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깨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었어, 난.

하지만 이제 꿈같은 건 꾸기 싫어.

맞아. 입술을 꽉 짓씹은 미도리야가 양팔을 벌리며 바쿠고를 힘껏 끌어안았다. 캇쨩. 흠뻑 젖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여긴 너무 쓸쓸하고 외로워.

‘만나고 싶어. 보고 싶어. 안기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꿈은 허상이다. 진짜는 언제나 저 경계 너머에 있었다. 내가 음인인 현실, 그래서 제대로 황위조차 물려받지 못할 그 지옥 같은 현실. 그래도 거기엔 네가 있었다.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달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해를 그리며 어둠 안에 갇혀 있겠지. 달이 해를 만나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 안에 갇힌 시간들이 너무 오래고 길었다. 지키고 싶은 것도, 사랑하고 싶은 것도 언제나 그 경계 바깥에 있었다. 그걸 넘어갈 힘을 준 건 너야. 미도리야가 안은 팔에 힘껏 힘을 실었다.

‘돌아갈 거야. 네가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는 멍청한 황태자니까. 그 말에 선홍색 눈이 크게 열리다,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었다. 이 얼굴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정중한 투로 낮게 속삭였다.

‘허면 이제는 슬슬 일어나시지요.’

태자전하.











태자전하, 라고 누군가 멀리서 부르고 있었다.

“태자전하, 태자전하… 허 참, 이제 일어나실 때가 되었는데.”
“아직 독의 기운이 덜 빠지신 것은 아닐까요?”
“그건 아닐세. 맥도 본래대로 돌아왔고, 이제 힘든 고비는 다 지났네만…  태자전하. 태자전하. 이즈쿠, 내 말이 들리느냐. 대답해 보거라.”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 여기에 계실 리가 없는데… 아직도 꿈이 덜 깬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미도리야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열었다. 눈을 떴을 때 희부옇게 흐려진 시야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스승의 얼굴이었다. 그 등 너머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키리시마가 반가운 얼굴로 눈을 크게 열었다.

“일어나셨어요! 태자전하, 괜찮으세요? 접니다, 키리시마요.”
“아직 정신이 없으신 모양이야. 키리시마 소년, 아까 내가 만들어둔 환약을 건네주게. 자, 이즈쿠. 우선은 일어나보자꾸나. 천천히, 그래. 옳지.”

다른 이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는지 처소에는 키리시마와 야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 간 걸까? 나는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누워 있었을까? 그리고 캇쨩은… 산발적인 생각들이 멍한 머리 안에서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키리시마가 찾아낸 환약을 야기의 손에 건넸고, 허리를 받치며 미도리야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주던 야기가 삼키기 편하도록 손 안에서 뭉갠 환약을 미도리야의 입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약은 쓰면서도 달았다. 멍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약을 삼키자 그제야 흐릿했던 시야가 좀전보다 또렷해졌다. 저를 받쳐주고 있는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흐, 힘없이 웃었다. 허나 의식이 전혀 없던 조금 전에 비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스승님, 얼굴이… 많이 그을리셨어요.”

달싹이던 입술만 내려다보며 잔뜩 긴장해있던 야기의 얼굴이 느슨해졌다. 야기의 등 뒤에 서있던 키리시마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야기가 온화하게 웃으며 미도리야의 말을 가볍게 받았다. 여정이 길었으니까, 이즈쿠 소년.

“여기와 달리 남쪽은 햇살이 매우 따가워서 말이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이렇게 피부가 그을려버린다니까, 하하…”
“그래도… 6년 전보다 더 멋져지셨어요.”
“자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이젠 어른이 다 되었구나.”

떠날 때는 그리 작은 아이였는데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미도리야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촉촉이 젖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늘어져 있던 미도리야의 손을 움켜잡으며 흠뻑 웃었다.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 같았었다.

“나흘동안 의식이 없었어. 애썼다, 이즈쿠. 정말로 고생했다. 덕분에 '모두' 무사하단다.”
“……”
“홀몸이 아니더구나.”
“……”
“누구의 아이인지는 묻지 않으마.”

둥그렇게 열리던 숲색 눈이 천천히 웃었다. 아마 야기는 누구와 동침하여 아이를 수태한 것인지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님은 언제나 모르시는 것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양인과 음인의 체질을, 또한 그 체질을 담는 그릇이라던 인간의 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의관이었다.
맞아요. 해를 보았어요. 그리하여 해를 가졌어요. 소리 없는 생각들을 삼키던 미도리야의 눈가가 일렁거렸다. 그리워 그랬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라 그리 했을 것이다.

“캇쨩은…? 키리시마군, 캇쨩은 지금… 어디에 있어?”
“……”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서 가슴이 멎어버릴 것 같아…”
“저 태자전하, 정위께서는…”

대답을 하는 키리시마의 얼굴이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눈치를 살피는 듯 제 얼굴을 스르륵 들여다보고 눈길을 돌려버리는 그 얼굴에 그림자가 어리는 것을 미도리야는 똑똑히 보았다. 한참 대답을 망설이던 키리시마가 천천히 다물었던 입을 뗐다.

“입옥入獄되셨습니다.”
“입옥이라면 감옥인데… 왜? 어째서 캇쨩이 그런 델…”
“태자전하를 독살로 음해하려 하셨다 하여… 황제폐하의 명으로 지금 옥사의 지하에 갇혀 계십니다.”
“……”
“허나 아닙니다. 모함을 받으신 게 분명합니다! 전하, 이제 전하께서도 의식이 돌아오셨으니 저도 고할 말씀이… 태자전하!”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미도리야가 키리시마와 야기의 만류로 다시 힘없이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미도리야는 고집스러웠다. 가야해. 숲색 눈이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가야해, 캇쨩을 만나야 해.
바쿠고가 자신을 독살할 리가 없다는 것은 이 궁 안의 누구라도 알 터였다. 모함을 받은 거다. 그때 나는 똑똑히 봤어. 미도리야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허나 이번에는 야기 쪽에서 미도리야가 잠자코 몸을 일으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만류하는 야기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깊게 드리워졌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오두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 네 몸의 혈에 침을 박고 기운을 눌러 놓았다. 내일까지는 몸을 돌보며 기를 보전해야한다, 이즈쿠.”
“하지만 스승님, 캇쨩이… 캇쨩은 절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모함을 받았어요. 그리 뒀다가 아바마마께서 혹 캇쨩의 목을 치라 하시면…!”
“이즈쿠!”

야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단 한 번도 제게 목소리를 높인 적도, 고함을 친 적도 없던 스승이었다. 나서겠다며 발버둥을 치던 미도리야가 그제야 멈칫 행동을 멈췄다. 미도리야를 바라보던 야기의 눈길에서 이번만큼은 웃음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너를 살려 달라고 내게 빌었다. 반드시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행여 이 일이 탄로나면 제 입장은 물론이고 공주인 제 엄마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카츠키는 내게 서신을 보냈지. 너를 살려놓으라고. 단 한 번도 황제 외의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녀석이 말이다.”
“……”
“그리 살려놓은 목숨을 너는 어찌 그리 함부로 하느냐. 그리하여 다시 네게 탈이라도 나면, 네가 다시 의식을 잃기라도 한다면.”
“……”
“옥사는 험한 곳이다. 이제 겨우 저승길 문턱에서 되돌아온 네가 가기에 그곳은 너무 위험해.”

저를 막아 세우는 원망과 서운함에 글썽글썽 흔들리던 미도리야의 눈빛이 서서히 고요해졌다. 맞아. 야기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소식만 듣고도 이렇게 억장이 무너지는데 옥사에서 네 모습을 직접 보게 된다면 나는 얼마나 또 숨이 막힐까. 게다가 지하 옥사라고 했다. 나라의 가장 중한 죄인들이 구금된다던 지하 옥사는 황족에게도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간다 한들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허면 나는 어찌 해야할까.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 별궁 안에서는 도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그 웃음결이 곧 부러질 연의 가지처럼 어쩐지 슬퍼 보였었다.

“허면 저는 어찌 해야할까요… 저는 왜 이리 태어났을까요.”
“……”
“캇쨩은 나를 살리겠다고 연통을 넣어 스승님을 제게 보내주었는데, 저는 캇쨩을 구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네요.”
“……”
“지금만큼 제 처지가 미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조금 더 힘이 있는 황태자였다면 이런 독을 삼킬 일도 없었겠지. 하다못해 너를 구명할 힘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형부의 관리들을 불러 너의 모함을 벗겨낼 수단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을 거야. 허나 별궁 안에 갇힌 신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여태껏 둘의 모습을 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던 키리시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태자전하…

“그러고 보니 정위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체념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미도리야가, 야기가 동시에 키리시마를 돌아보았다. 의관의 의복 소매 속으로 손을 쑥 밀어 넣은 키리시마는 한참동안 그 안을 더듬거리더니 이윽고 뭔가를 슥 끄집어냈다.
잿빛을 띄는 낡은 천조각이었다. 의복에서 뜯어낸 모양인지 한쪽 면은 솔기가 거칠게 뜯겨 있었고, 다 펼친 크기는 키리시마의 손바닥 하나 정도 밖엔 되지 않았다. 그 위에 글자 한 자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어디에서 구르는 돌을 집어다 쓴 것인지 글자는 흐릿했지만 미도리야는 그 글자를 분명 또렷이 보았다. 키리시마가 볼을 긁적거렸다.
蓮이라는 글자였다.

“옥사 안이라 지필묵을 구할 수가 없어서… 급한대로 이렇게 적어 주셨습니다. 꼭 태자전하께 전해드려야 한다면서요.”
“……”
“아, 이 연자는 렌이라고 읽으셔야 합니다. 아이의 이름으로 붙일 때는 다들 그리 읽는다고 하더라구요.”

아이의 이름.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먹먹한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미도리야도 잘 알고 있었다. 음인이 아이를 수태한 것을 ‘해를 가졌다’고 일컫는 것과 비슷한 풍습이다. 자신의 해를 가진 음인에게 양인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서 적어 보낸다. 그 언젠가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이즈쿠라는 이름을 가장 귀한 비단 천에 지필묵으로 적어 보냈을 것이다.

렌… 미도리야가 그 이름을 가만히 우물거렸다.

“연꽃이 사람이름이 되면 렌이라고 읽는구나.”

정말로 연꽃 같아. 그 언젠가 연못에 피었던 것처럼, 그 어느날 너를 닮았다며 한 송이 똑 따다가 억지로 떠밀듯 선물했던 그 꽃처럼. 너는 입으로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잔뜩 불퉁거려놓고도 기어이 그 꽃을 버리지 않았다. 야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양인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서 전해주는 것은 보통 혼례를 하자는 뜻이지.”
“……”
“정말로 좋은 짝을 두었구나, 이즈쿠.”

그러게요.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정말로 그래.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미도리야는 그저 제 앞에 내밀어진 그 한 글자를 오래도록 뚫어보았다. 가슴의 혼란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제는 무엇을 하면 좋을 지 알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미도리야의 말에 키리시마가 근심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얼굴을 알아챈 미도리야가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옥사에 가려는 게 아냐. 숲색 눈이 환히 웃었다. 가야할 곳은 처음부터 그런 곳이 아니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키리시마가 물었다. 미도리야가 대답했다. 응. 그리고 제 앞에 우뚝 선 별궁의 담장을 또렷이 쳐다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넘어본 적도, 넘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별궁의 경계가 거기에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미도리야가 천천히, 떨리는 걸음으로 쪽문을 넘었다.

별궁 입구를 지키던 초병들은 당황하여 다가서다 입을 굳게 다문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몇 개의 문을 넘고, 몇 개의 너른 길을 건너가는 동안 야기와 키리시마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해는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떨어졌다. 그 부서지는 빛살에도 미도리야는 눈가가 자꾸만 버릇인 양 시큰거렸다. 이윽고 저 멀리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황금빛 지붕이 나타났을 때 미도리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대로 멈춰버릴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허나 돌아갈 마음도, 그만 둘 마음도 없었다.
마음이 떨려 미도리야는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그날의 풍경을 그렸다. 너의 팔에 안겨 별궁의 문턱을 넘었던 그날, 그 밤. 머리 위로는 달이 하얀빛을 흩뿌리며 달리던 그림자를 쫓아왔고, 쏟아질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온 하늘을 수놓았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산줄기의 그림자, 그림처럼 날아오르던 반딧불이, 그 깊고도 아름다웠던 어둠을 뚫고 이윽고 솟아오르던 태양, 그 찬란했던 해님…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손을 내려 제 배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캇쨩, 그날 나는 해를 보았어.

네가 내게 해를 주었다. 그 빛을 다시 보고 싶어 죽지 않았다. 그 빛이 그리워 나는 도솔천을 되돌아 기어이 이 지옥 같은 세상으로 돌아왔어. 그 빛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이젠 저승조차 나는 두렵지 않을 거야. 굳게 입을 다문 미도리야가 이윽고 태휘전으로 뻗은 넓고 긴 계단에 첫 발을 디뎠다.

폐하! 입구를 지키던 초병이 헐레벌떡 태휘전의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었다. 태자전하께서… 떨리던 무릎을 꺾으며 초병이 황제의 옥좌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즈쿠 태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 무르팍에 놓여있던 두루마리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내관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두루마리를 수습하여 한 쪽으로 치우는 동안에도 황제는 오로지 한 곳만을 또렷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활짝 열린 문을 넘어 옥색 곤룡포가 한들한들 춤을 추며 이 편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역광을 업은 탓에 처음에는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선홍색 눈을 희미하게 좁히던 황제의 시야에 이윽고 흐릿하던 그 얼굴이 또렷이 나타났을 때, 황제는 그만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깨물며 숨을 참았다. 열여덟 해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하는 아들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버렸던, 허나 태어나 가장 연모하며 귀애하였던 가장 귀한 여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열 걸음 앞에서 미도리야가 양손을 포개고 몸을 굽히며 깊게 절을 했다. 햇볕 앞에서도 불타지 않을, 그 어떤 빛에도 바래지 않을 색이 깊은 숲색 눈이 제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올려보았다.

“나라의 황태자 미도리야 이즈쿠가 폐하께 문안을 여쭙습니다.”

아바마마. 그 말을 뱉어내는 것도 무겁고 버거워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울대를 밀었다. 아득한 이름이었다. 단 한 번도 직접 불러본 적이 없던 말이었다.
하. 황제의 선홍색 눈이 버릇처럼 일그러졌다. 그 얼굴과 눈동자의 색, 머리의 색까지도 미도리야는 18년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고모님과 쌍둥이라 하시더니 정말로 대고 그린 듯이 닮으셨구나. 캇쨩이 지금보다 좀 더 나이를 먹는다면 아마도 저런 얼굴일까. 그리움에, 낯설지 않은 반가움에 그때도 어쩐지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황제가 이윽고 길고 무거운 침묵을 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그 목소리가 어쩐지 낮고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아픈 곳은… 다 나았느냐.”
“예, 여기 계신 두 분 의관님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이제는 괜찮습니다.”
“내가 내린 명을 스스로 어기고 나를 찾아올만큼 기운이 회복되지는 않았을 텐데.”

고개를 기울이던 미도리야가 순간 멈칫했다. 18년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던 금구가 숨통을 짓눌렀다. 침착하자. 미도리야가 흐트러진 숨결을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들이켜며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조아린 주먹을 굳게 쥔 숲색 눈이 다시 제 아버지를 또렷이 올려보았다.

“예, 저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말은 국법이다. 국법을 어기면 어찌 되는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이 일로 제 목을 치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한 번을 죽었다 다시 살아 돌아온 삶인데 다시 한 번을 더 죽는다고 해서 두려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가 아바마마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기꺼이 그리 하십시오. 허나 제가 이 자리에 올라 입을 열어 무고한 목숨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저는 몇 번이고 명을 어기고 나아와 그저 고할 것입니다.”
“……”
“바쿠고 카츠키를 풀어주십시오, 아바마마.”
“……”
“저를 독살로 음해하려 한 자는 제 오랜 소꿉동무가 아닙니다.”

내관들이, 관리들이 술렁거렸다. 짐작했던 분위기다. 아마 이 일로 궁은 다시 한 번 뒤집히겠지. 허나 나는 이제 숨지 않을 거야. 더 이상 귀를 닫고 모르는 체 하지도 않을 거야. 굳게 다문 입술을 떼며 미도리야는 다시 한 번 저를 내려다보는 황제를 또렷이 올려보았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차디찬 별궁에서 미츠키 공주마마가 제게 동무로 지내라며 정위를 소개시켜주었지요. 그 후로 함께 배우며 함께 자랐습니다. 그런 이가 어찌 황위에 눈이 멀어 저를 시해하려 하겠습니까.”
“……”
“제가 쓰러질 때 누군가 독이 든 주머니를 정위의 의복 안에 넣었습니다. 이는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허니 무고한 죄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미도리야가 다시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온 가슴이 뽑힐 것처럼 쿵쿵 뛰었다. 아냐,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없었다면 견딜 수도 없었을 삶이었다. 네가 있어 나는 견뎠어. 연꽃 같은 내 해님아, 네가 내 인생의 유일한 빛이었어. 생각만으로도 자꾸 숨이 벅차서, 미도리야는 바닥을 짚고 있던 주먹만 힘껏 움켜쥐었다. 황제는 그저 말없이 들었다. 그리고 술렁이던 내관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허면 누구더냐.”
“……”
“너도 확신하는 바가 있어 내게 찾아왔겠지. 그래, 목숨을 걸고 말이다. 말해보아라. 누가 감히 이 나라의 황태자를 독살하여 이 지엄한 황가의 대를 끊어 놓으려 하였느냐. 누가 감히 내 아들을 죽이려 하였느냐.”
“아바마마, 그 자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등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도리야가, 황제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들어 올린 한 손을 쑥스러운 듯 스르륵 내리면서 머리칼이 붉은 의관이, 키리시마가 미도리야의 뒤편으로 나아오며 고개를 조아렸다.

“별궁의… 내관장 어른이십니다.”

틀림없습니다. 쏟아질 듯 크게 열린 숲색 눈앞에서 푹 수그려진 붉은 머리가 거듭 그리 고했다.

“내관장 어른이 수의관 어른과 공모하여 그 약재를… 태자전하의 찻잔 속에 넣었습니다.”
“……”
“제가 직접, 똑똑히 들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태자전하. 키리시마가 저를 바라보는 미도리야를 향해 죄송한 얼굴로 거듭 고개를 숙였다. 진작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허나 그 뒤엣말을 더 우물거릴 시간도, 미도리야에게 더 깊이 사과할 틈도 없었다. 황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유난히 붉음이 짙어진 선홍색 눈동자가 서늘한 얼굴로 이윽고 입을 열었다.

“별궁의 내관장을 불러라. 지금 당장.”

명령을 받든 초병들이 허리를 숙였다. 활짝 열어둔 창 너머에서 천천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이제 곧 밤이었다.






(계속)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했더니 양이 엄청 기네요ㅋㅋ큐ㅠㅠㅠㅠㅠ 역시나 일주일에 한 편은 반드시 쓰겠다는 목표를 지키기 위해 투닥투닥 13편도 힘을 냅니다 u////u 사실 더 일찍 쓸 수도 있었는데 안 풀려서 + 썰 푼다고 며칠 정줄 놓고 있다 간신히 일요일이 되어서야 이렇게 완성하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번 편은 바쿠고가 안 나왔지만ㅎㅎㅎㅎ 그래도 이제 엔딩이 머지 않았으니 이챠이챠 힘낼 거라며99999

항상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ㅠ/////ㅠ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완결까지 힘낼 것.... 아마 완결이 나면 약속드린대로 소장본을 낼 것 같아요 u////u 그 약속 지킬 수 있도록 꼭 완결내겠습니다9999 그럼 저는 후딱 올려놓고 이제 본업을 하러.......... 흑흑 저는 왜 일요일에도 바쁜가 회사를 폭파시킬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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