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오랜만에 스스슥
* 고전에_알오버스로_캇데쿠

* 알파 귀족 x 오메가 황태자 이야기



http://youtu.be/2-9CnV_cLsE








달별들이 까만 어둠 속에서 춤을 추었다.

전날보다 둥글어진 달 곁으로 조각난 구름들이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구름 틈으로 이름 모를 별이 긴 꼬리를 끌며 떨어질 때, 바쿠고의 몸 위에 앉아 춤을 추듯 흔들리던 미도리야가 하늘을 향해 기어이 턱을 젖혔다. 이윽고 바짝 경직한 몸이 바쿠고의 품으로 쓰러졌다.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은 두 소년의 주변으로 고요가 평온처럼 내려앉았다. 대화가 없어도 좋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바람소리, 풀 소리, 숨소리, 맞닿은 가슴팍을 두드리던 심장소리, 너의 소리…

‘눈이 내리면 좋겠다…’

한참 후에야 몸을 떼어내고 급하게 벌려놓은 미도리야의 허릿대를 묶어주고 있던 바쿠고가 우물거린 목소리에 픽 입매를 밀었다.  눈은 무슨. 쑥스러움에 괜한 투로 무심히 받아주면서도 바쿠고는 느슨하게 웃고 있던 제 입매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다가온 손이 미도리야의 콧망울을 장난처럼 쥐었다 놓았다.

‘눈 오면 이런 짓도 못해, 멍청아. 그 정도 생각도 없냐?’
‘그런가… 그치만 그때는 내가 몰래 캇쨩한테 찾아가면…! 이제는 집도 알고 있잖아.’
‘잘도 찾아오겠다. 동서남북 방향 구분도 못하는 멍청이가.’
‘그럼 캇쨩이 약도를 그려주면 되잖아.’
‘그딴 번거로운 짓을 왜 하냐, 내가. 야, 옷 다 입었으면 일어나. 하, 더럽게 무거워.’

아니, 거짓말인 것을 너는 이미 다 알았을 터다. 유난히 둥글게 접힌 숲색 눈이 흐흐 웃었었다. 캇쨩은 쑥스러우면 매번 나한테 성을 내. 속내를 정확히 짚는 그 얼굴이 건방지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바쿠고는 괜히 제 몸 위에 올라앉아 있던 미도리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닥치며 입을 다물었다. 콧날이 스칠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겹쳤다.
짧은 입맞춤이 연이어졌다. 머리 위에 떠 있던 달은 이제 제법 기울었다. 해가 뜨기 전에는 돌려보내야 한다.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못내 아쉬워서 바쿠고는 쑥스러움에 눈길을 피하는 얼굴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주근깨가 흩어진 뺨과 턱 곳곳에 가림 없이 입을 맞췄다.

‘무서워.’

바쿠고의 어깨로 기울어진 숲색 머리가 우물거렸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 덤불 같은 머리칼을 가만히 매만지작 거리면서 바쿠고가 툭 대꾸했다. 뭐가.

‘이 순간이 끝나 버릴까봐, 이게 다 꿈일까봐…’
‘……’
‘이 행복이 깨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

아니, 나는 그딴 것보다 너를 잃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렇게 탐심貪心 을 부리다 네 아버지의 성질을 다시 한 번 거스를까봐, 나의 탓으로 네가 네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예 이 궁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까 하여. 그리하여 살아생전 영영 다시 너를 만나지 못할까봐. 네 어머니는 너를 낳은 죄로 아들조차 맘 편히 보지 못하고 궁 뒷산의 가장 외지고 깊은 골방에 구금 되었다.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보증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영원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을 것이란 확신은 또 어디에 있을까.
허니 너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 바쿠고가 하지 못한 말들을 삼켜 넣으며 볼을 힘껏 씹었다. 네 아버지조차 뜻대로 할 수 없을만큼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지.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자리에 기필코 너를 앉혀두고 말 거라고. 생각을 삼키며 바쿠고는 말없이 미도리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전과 다름없이 좁은 어깨가 힘을 따라 별다른 저항도 없이 바쿠고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지금은 황제도, 보위도, 어머니의 입장이나 그밖에 복잡한 것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품 안에 단단히 갇혀있는 체온만이 바쿠고가 영원히 지키며 살아갈 유일한 존재였다. 중요한 건 오직 그뿐이었다.

‘이제 들어가야 하는데…’

품으로 기울어진 얼굴을 파묻으며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행여 누가 들여다보기 전에 가야하는데, 내관장 어르신이 알면 안 되는데… 말과 달리 품 안에 파묻힌 덤불 같은 머리칼은 바쿠고의 팔을 벗어날 힘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럼 떨치고 가든가. 툭 씨근거린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끌어안고 있던 양팔에 단단히 힘을 실었다.

‘가봐라, 어디. 내가 놔주나.’
‘……’
‘비실거리는 거 봐라. 밥 좀 더 처먹으라고 그랬지, 내가.’
‘아냐. 내가 딱히 비실거리는 게 아니라 캇쨩 쪽이 너무…’

억울함에 미도리야가 홱 고개를 들어 올리던 것과 동시에 바쿠고가 입술을 겹쳤다. 일부러 그랬다. 다물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틈입 당한 미도리야가 두 눈을 둥그렇게 열며 한동안 부산스럽게 바쿠고의 가슴팍을 툭툭 떠밀었지만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뒷머리칼을 헤집으며 더 깊게 입술을 기울였다. 떨어지고 맞붙으며 바쿠고의 가슴팍을 두드리던 주먹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치사해, 캇쨩. 겨우 떨어진 입술 틈으로 미도리야가 억울한 듯 삐죽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냐? 씩 입매를 밀어 올린 바쿠고가 가볍게 미도리야의 이마에 입술을 찍었다. 그때도 저 멀리 달이 걸려 있었다. 참지 못한 한숨이 바쿠고의 입술을 낮게 비집었다. 멍청아.

‘어차피 이런 밀회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이제 사흘 후면 보름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겐 다시 음인의 발정이 시작될 테고, 너는 달의 음기에 사로잡혀 볕도 별도 들지 않는 별채에 갇히게 되겠지. 허니 얼른 자라야 한다. 힘을 키워야 한다. 너를 그 빌어먹을 감옥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네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처럼 네 아버지의 관을 물려받아 그 빛나는 옥좌 위에 오를 수 있도록.

내 달아, 나는 너의 해太陽가 될 것이다.

본래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오로지 해로 인해 빛나는 것이다. 허니 내가 너의 빛이 될 수 있다면, 너의 불길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너의 오랜 겨울을 부술 수만 있다면. 너는 오로지 나의 빛으로 광휘하며 세세토록 찬란하겠지. 생각을 삼키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을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캇쨩? 느닷없이 제 손등 위로 기울어지는 색이 밝은 머리칼에 미도리야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허나 대꾸 없이 그 손등 위에 가만히 입술을 찍으며 바쿠고가 가만히 눈길을 들어 올렸다. 태양처럼 붉은, 태양보다 뜨거운 빛이 그 안에 있었다. 소리를 죽여 고하는 말투는 이번에도 편한 투는 아니었다.

‘허니 전하, 한 번만 더 입을 맞춰도 괜찮겠습니까. 며칠을 뵙지 못하는 사이에 서약이 사라져서야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곧 해가 뜰 텐데… 정위, 제가 요즘 아침에 일어나질 못합니다. 이제 그만 이 손은 놓아주시고…’
‘……’
‘들어가야… 하는데.’
‘……’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
‘…하세요.’

정위의 뜻대로. 우물거린 목소리에 가볍게 목례를 한 바쿠고가 그대로 미도리야의 손을 잡아 당겼다. 그 목소리가 귀여웠노라고, 홱 돌려버리던 귀 끝이 새붉은 것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노라고 말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입술이 겹쳤다. 그 바람에 보지 못했다. 저 멀리 희부연 달빛 위로 천천히 먹구름이 덮이고 있었다.
다시 만날 때는 해가 바뀌어 있겠네.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가볍게 다가와 부딪친 입술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꼭 만나러 와줘야 해. 그리고 덧붙였다. 보름이 지난 후에… 밤말고, 낮. 바쿠고가 기가 찬 듯 헛웃었다. 누구 목 달아나라고.

‘너희 내관들이 태자전하 야반도주 시킬 뻔한 대관한테 잘도 오시라고 문 열어주겠다. 난 내관장 어른한테도 찍혔다고, 멍청아.’
‘하지만! 신년이니까 문안 인사 핑계를 대면 되잖아. 말 그대로 캇쨩은 가신이니까 이상한 것도 아니고, 3년 전엔 매년 그렇게 해왔었던 거고…’
‘……’
‘얼른 보름이 지나가면 좋겠다, 흐.’
‘……’
‘새해 복 많이 받아, 캇쨩.’

다음 날, 궁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쉬이 그치지 않을 눈보라라고 대신들은 입을 모았다. 더불어 궁의 그 누구도, 바쿠고조차도 몰랐었다. 눈을 뿌리기 위해선 구름이 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먹구름은 필연적으로 달빛을 가려버린다는 사실을.








를 보았다
@ruka_tea



10








새해의 첫 번째 태양이 동쪽 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환히 솟아올랐다. 황궁의 남문 위를 지키던 초병이 북을 두드리자 간밤부터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해를 향해 합장을 하며 저마다 복을 빌었다. 새해였다.

신년을 축하하는 초일절初日節은 가을의 풍월절豊月節과 더불어 나라에서 가장 크게 기리는 행사였다. 며칠간 휘몰아쳤던 눈보라도 잠잠해졌고, 하얗게 눈이 쌓인 거리 위로 붉고 노란 깃발들이 곳곳에서 펄럭거렸다. 아이들은 넓은 공터로 뛰어나가 고사리손으로 손수 만든 갖가지 모양새의 연을 하늘로 띄워 올렸고, 어른들은 떡을 나누고 쌀로 빚은 술을 마시며 한 해의 시작을 축하했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황궁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의 도청들은 일주일간 휴무에 들어갔다. 황제는 올해도 변함없이 이번 달의 조세를 감면해줄 터였다. 온 사방에서 축제를 즐기는 이들의 웃음과 노래 소리가 며칠이고 끊이지 않았다.

황태자의 발정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올해의 첫 번째 달은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글고 훤한 보름달이었다. 허나 초일절이라는 큰 축제가 겹쳐있는 덕인지 매월 보름마다 음인인 황태자가 발정 때문에 또 별채에 구금되었을 것이라던 수군거림도 이번엔 들리지 않았다. 잘된 일이다. 바쿠고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봤자 어차피 다음 달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망하게 주둥이들을 놀릴 테지만. 픽 입매를 비튼 바쿠고가 하인이 내밀어준 검고 붉은 대례복依例服의 소매에 팔을 꿰어 넣었다. 절로 볼 안쪽이 꽉 씹혔다.

데쿠 새끼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초일절을 지내는 일주일간 황궁은 일절 출입이 금지된다. 드나들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궁의 살림을 도맡는 내관들과 초병들뿐이다. 미도리야 황가가 천 년 전에 해와 달의 신화를 등에 업고 이 땅에 나라를 세운 후부터 지금까지 내려져 오는 전통이 그랬다. 초일절과 풍월절은 신년과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인 것과 동시에 각각 해와 달을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초일절에는 해를 위해, 풍월절에는 달을 위해 황궁 역시 일손을 놓고 모든 정무政務를 쉰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황가의 일족들과 가신들은 태휘전에 올라 황제와 황태자에게 새해 인사를 한다.
걸음마를 할 수 있었던 시절부터 바쿠고는 매해 엄마를 따라 태휘전에 올랐다. 가신이기 전에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황가의 일족인 탓일 터다. 허나 태휘전엔 언제나 황제뿐이었다. 대부분의 가신들은 황제가 있는 태휘전에만 들를 뿐 황태자의 별궁에는 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 버렸다. 하기야, 보위에 오를 지도 확실하지 않은 태자에게 굳이 새해 인사를 하러 들르는 이는 누구도 없을 터였다.

올해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제폐하, 신년을 감축드립니다.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초일절의 모든 행사가 끝난 월요일 아침이었고, 바쿠고는 연중 단 하루만 걸쳐 입는 대례복 차림으로 말에 올라 궁으로 향했다. 예년과 달리 성년을 맞이하는 올해 문안에는 아빠도, 엄마도 없었다. 홀로 태휘전에 올랐을 때 이미 황제가 정무를 보는 본당本堂 안에는 서너 명의 귀족들이 흩어져 저마다 떡과 단술을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허나 올해도 역시 이 본당 안에 태자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네가 올해로 벌써 열아홉 살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카츠키.”

황제의 태도는 예년과 다르지 않았다. 절을 올린 바쿠고를 곁으로 불러 답례로 금전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고, 이후에는 잠시 집안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숙부와 조카 사이의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은 대화는 짐작했던 것보다도 이르게 끝이 났다.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가신들을 위해 바쿠고는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 돌아섰다. 그 돌아서던 등을 향해 황제는 잊은 듯이 잠시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잊었는데.

“올해는 네가 꼭 좋은 짝을 만났으면 좋겠구나, 카츠키.”

하마터면 웃음이 날뻔 했던 것은 엄마 생각이 났던 탓이다. 엄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역시 내 등짝을 걷어찼을까. 허튼 소리 하지 말라면서 내 발등이라도 밟아주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라면 자신이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몸을 돌리며 바쿠고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염려는 황공합니다만, 황제 폐하.

“제 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한 눈을 팔아본 적이 없어서요.”
“……”
“약조를 지켜주실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등 뒤에서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황제는 기껏 새로 들여놓은 연적을 다시 한 번 부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목이 달아나겠지. 형법으로 처형할 수 없는 황족의 목을 벨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황제뿐이다.
언젠가 네가 황제가 된다면 내 목을 벨 수 있는 것도 오직 너뿐이겠지. 생각에 바쿠고가 픽 입매를 밀었다. 벌써 7일을 보지 못했다.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잠시 올려보다 바쿠고는 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쩐지 자꾸 웃음이 났다. 이제 곧 볼 수 있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안달을 냈다. 등신 새끼가 진짜.

“…보고 싶게.”

보름달이 뜬 때로부터 7일이 지났으니 발정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온 나라가 축제를 즐겼지만 너는 그 기간동안 볕도 들지 않는 별궁에서 빛을 그리며 밤마다 온몸을 뒤트는 발작에 꿈조차 똑바로 꾸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 고통을 바쿠고는 짐작도 다 할 수 없었다. 감히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지난 7일간 세상의 모든 달그림자가, 모든 밤이 다 너였다. 수도 없이 떠올랐었다. 달을 볼 때, 얼어붙은 연못을 볼 때, 창문가에 떠오른 해를 볼 적마다 수시로 네 생각이 났다. 분명 또 말랐겠지.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보고 싶었다. 별궁을 향해 돌아선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허나 황제의 궁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바쿠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얼굴을 보지 못한 고작 7일동안 바뀐 것은 해 뿐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십시오. 태자전하께서는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이르셨습니다.”

어린 내관의 곤란한 얼굴을 뚫어보던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유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믿기지 않았다. 꽉 악물린 목소리가 간신히 떨어졌다.

“…만나지 않으시겠다니.”

바쿠고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빛을 읽은 모양인지 좀 전까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고하던 내관은 조금 풀이 죽었다. 저는 그저 들은 바를 전할 뿐이라… 우물거리는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버릇처럼 꽉 악물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이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오기가 솟은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만나자고 했던 게 누군데. 보고 싶을 거라 말했던 건 누구였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압니다. 정위께서 태자전하의 사촌이시자 소꿉동무이신 것도, 지난달에 전하를 위해 얼마나 힘써주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태자전하께서 직접 그리 이르셔서…”
“허면 됐군. 이 나라 황제폐하보다도 더 숱하게 이 궁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비켜. 얼굴만 잠시 뵙고 돌아갈 것이다.”
“허나 정위, 지금 태자전하께서는 진맥을 받고 계시고… 정위!”

머리보다도 몸이 더 먼저 자신을 막아서던 내관을 떠밀며 문턱을 넘었다. 유난히 소란한 걸음이 고요했던 별궁의 복도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들이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분명 이르셨는데… 바쿠고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르면서도 내관은 안절부절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우물거렸다. 허나 바쿠고는 대꾸 없이 그대로 곧장 복도를 가로질러 익숙한 처소의 문을 요란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방 안의 풍경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 뒷목이 서늘했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었다. 참지 못한 말이 잇새를 기어코 비집었다.

“…하, 존나.”

옥좌 아래에서 앉아 있던 미도리야가 벌어져 있던 옷섶을 급히 여몄다. 주근깨가 흩어진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곁을 따라왔던 내관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읽고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바쿠고가 미도리야와 마주 앉아 있던 젊은 남자를 말없이 뚫어 보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남자가 허겁지겁 바쿠고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제 또래 정도의 남자는 머리칼이 붉었고, 의관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정위,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신, 태자마마의 곁을 지키는 수습의관 키리시마 에이지로라고 합니다.”

의관은 기본적으로 내정부의 정위보다 품계가 낮다. 지난달에 황제와 내관장의 명으로 이곳에 사흘을 머물렀으니 저 자도 자신이 오며가며 보았던 얼굴 중 하나일 것이다. 누가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 안다. 헌데도 마음에서 불길이 일었다. 조금 전, 저 자의 손이 미도리야의 가슴팍을 더듬는 것을 똑똑히 보았었다. 별 일이 아니라고, 그저 의관으로서 소임을 다한 것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지난 7일은 너무 길고 오랬다. 바쿠고가 입매 끝을 차갑게 비틀었다.

“의복을 벗지 않으면 안될만큼 중한 진맥을 하고 계셨는가 봅니다. 혹 소신이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만, 태자전하.”
“정위, 갑자기 그 무슨 소리를…!”
“아니면 아직도 발정이 덜 끝나셨습니까. 보름은 벌써 지났는데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실언이다. 순간적으로 감정에 휩싸여 맘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저 진료에 불과한 것임을 알면서도 낯선 이에게 그리 쉽게 의복을 풀어헤치고 더듬어지는 너를 보았을 때부터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7일 전에 저 자리를 더듬으며 제 손 아래에서 불꽃처럼 발갛게 피어나던 너의 열꽃을 보았었다. 저 자리는 나의 자리다. 저 체온도, 저 살갗도 모두 남김없이 내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말을 분명 또 후회하겠지. 바쿠고가 버릇처럼 볼 안쪽을 짓씹었다. 너는 분명 상처 받았을 거다. 세상은 모른다. 저 녀석이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또 눈물이 많은만큼 얼마나 고집이 센지.
하지만 바쿠고는 단 한 번도 지금과 같은 순간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더 이상 동무는 하지 못하겠다며 자신을 밀어낼 때조차 그랬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숲색 눈이 바쿠고를 가만히 뚫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물렸던 입술을 뗐다.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바쿠고의 가슴을 후볐다. 달처럼, 그 손톱인 듯 예리한 칼날처럼.

“저는 정위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내관들에게 일러두었는데요. 듣지 못하셨습니까.”
“……”
“이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다섯 살 때 엄마의 손에 끌려 반쯤 억지로 소꿉동무가 된 후로 지금껏 10년이 넘도록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며 함께 자랐다. 헌데도 이런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럴 녀석이 아니었다. 아무리 눈물이 많아도 이런 감옥과도 다름없는 별궁에 갇혀 평생을 견딘 녀석이다. 네 놈 속이 어떤지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고. 허니 녀석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헌데도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마음이 그렇지 못했었다.

“정위,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그저 태자전하의 호흡이 평소와 다름 없으신지를 확인하려… 정위!”

곤란한 얼굴로 어물어물 말을 늘어놓던 붉은 머리 의관이 돌연 소리를 높였다. 말릴 틈도 없이 걸음을 좁혀 다가온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멱살을 단번에 틀어잡았다. 궁의 법도를 따지면 이것은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다. 안다. 둘만 있는 사사로운 자리도 아니었다. 헌데도 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숲색 눈을 바쿠고는 무엇보다 가장 인내하기 어려웠다.
네 놈은 꺼져. 돌아보지도 않고 던진 말에 주춤주춤 말리겠다고 나서던 의관이 멈칫 했다.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었다. 그 잇새를 비집는 목소리가 다른 어떤 때보다 유독 사납고 서늘했다.

“감히 일개 의관이 끼어들 문제는 아니지. 이 나라 지엄한 황가의 일족들이 풀어야 할 회포가 있으시다는데.”
“……”
“아니 그렇습니까, 태자전하. 제게 전하실 말씀이 매우 많으실 것 같은데요.”

멱살을 잡혀 있던 미도리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이 마음의 분기를 더욱 부추겼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 분명했다. 다른 무엇보다 바쿠고는 그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멍청아.

멱살을 잡힌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떠밀렸다. 두 청년의 몸이 뒤엉켜 넘어지는 소리가 유독 넓은 방을 우당탕 요란하게 울렸다. 끝내 참지 못한 내관의 몸이 미도리야의 멱살을 짓누르고 있던 바쿠고 쪽으로 움직였다. 허나 그 몸을 떼어놓기도 전에 미도리야가 손을 들며 막아섰다. 괜찮아, 키리시마군. 그리고 손짓에 반사적으로 멈춰선 의관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설명할 테니까, 내가 다 얘기할 테니까…”
“하지만 태자전하…!”
“자리 좀 비켜줄래? 미안. 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마.”
“……”
“…부탁이야.”

비록 이런 신세라고 하나 나라의 아들인 황태자의 명은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무시해선 안 되는 것이다. 굳게 입을 다문 키리시마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떠밀렸던 문이 닫히자 요란했던 실내에는 다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에는 오로지 둘 뿐이었다. 하. 바쿠고가 멱살을 잡힌 채 제 밑에 깔려있던 얼굴을 향해 노골적으로 헛웃었다. 그때도 숲색 눈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입새를 비집는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태자전하. 꼴에 또 남들에게 들키는 건 싫은 모양이십니다. 왜요. 이 참에 모두 다 알도록 소리라도 지르지 그러십니까. 어차피 이 궁 모두가 다 알지 않습니까. 제가 전하를 어찌 범하는지, 전하께서 제 밑에서 어찌 천하게 우시는지.”
“……”
“저를 보지 않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
“뭘 숨기고 계신 겁니까.”
“……”
“아아, 또 입을 다무시겠다…”

대꾸 하는 대신 미도리야가 피가 하얗게 몰릴만큼 제 입술을 꽉 씹었다. 그 얼굴이 화를 더 부추겼다. 네가 어떤 때에 이런 얼굴을 하는지 안다. 알아서 더 화가 났다.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볼 안쪽을 힘껏 씹은 바쿠고가 가볍게 입 끝을 비틀었다. 정 그리 원하신다면.

“지금부터 범할 겁니다, 태자전하.”

다른 편을 향해 있던 숲색 눈이, 멱살을 잡혀 있던 마른 어깨가 흠칫 떨었다. 멱살을 놓은 손이 그 떨린 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기울어온 입술이 바르르 떨리던 귓불을 머금었다 놓으며 습한 숨결처럼 속삭였다. 뒤가 닫히지도 않을만큼, 전하의 음혈을 꿰뚫으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피차 익숙하지 않습니까. 선홍색 눈이 쓰게 웃었다.

“저는 이 나라 황태자를 함부로 대하는 법외엔 알지 못하는 자라서요.”

곧이어 의복이 찢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소리가 꼭 비명 같다고, 바쿠고는 잠시 생각했었다.






*

조마조마한 얼굴로 문간에 귀를 대고 서있던 키리시마가 복도를 걸어오던 그림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파직 되어 고향으로 내쫓겼다는, 수의관이었다.

누구라도 수의관의 얼굴을 보았다면 귀신을 보았노라 했을 것이다. 낯빛은 그 스스로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시퍼렇게 질려 있었고, 양손으로 받쳐 든 소반 위에서 두 개의 찻잔이 덜그럭덜그럭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의관은 키리시마를 향해 활짝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조차 연희극의 배우처럼 과장되어 있었다.

“태자전하께 손님이 드셨다지? 정위께서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 아, 내가 짐을 정리하러 잠시 들렀다 마침 정위께서 와 계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태자가 기거하는 처소는 그 한 몸을 건사하기엔 너무 크고 넓었고, 그 덕인지 안에서의 소란은 바깥까지 다 들리지도 않았다. 스스로 자문하고 자답하며 수의관은 껄껄 웃었다. 그러다 잠시 뒤를 흘깃거린 수의관이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잔뜩 얼어 있던 키리시마에게 바짝 얼굴을 붙였다.
이것을 들이시게. 수의관이 들고 있던 소반을 키리시마에게 내밀었다. 소반 위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뚜껑이 덮여있는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키리시마가 저도 모르게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저 수의관 어른, 왜 이것을 저에게…”
“자네가 태자전하를 곁에서 가장 열심히 모시고 있지 않은가. 워낙 귀하게 구한 찻잎이라 다른 내관들에게 맡기자니 영 불안해서… 자네도 알지? 이 별궁의 내관들은 좋은 것을 보면 전부 다 제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어버린단 말이야, 쯧쯧.”
“하지만 저는 이제 전하께 올려드릴 탕약을 보러 가야해서,”
“내가 지난주에 내관장 어른 방 앞에서 바쁘게 사라지던 자를 보았는데 말이야.”
“……”
“그 친구 머리가 붉었거든. 자네처럼…”

키리시마의 얼굴에서 천천히 핏기가 가셨다. 울대를 밀 염치도, 기운도 없었다. 바짝 얼어버린 키리시마에게 소반을 내밀어주며 수의관이 낮게 웃었다. 허니 시키는대로 하시게. 험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녹빛을 띄는 쪽은 태자전하, 노란 빛을 띄는 쪽은 정위를 위한 차일세. 꼭 녹빛을 띄는 찻잔 쪽을 전하 앞으로 밀어드리도록 하게. 그뿐이면 돼. 간단하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사람 둘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지. 게다가 잘 풀리면 자네의 품계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거야. 언제까지 수습의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자네는 그저 기 보전을 위한 차를 올리겠노라, 딱 이 말 한 마디만 하시게.”

자네만 믿어. 툭툭 어깨를 두드린 수의관이 키리시마를 향해 껄껄 웃었다.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키리시마는 굳은 입꼬리를 감추며 소반 위에 올려 진 찻잔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초록빛 찻잔 위에 익숙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연꽃이었다.





(계속)






흑흑 다 썼ㄷ ㅏ................... 이 얘기 대체 어떻게 풀리려고 저를 매편 이렇게 고생시키는지ㅠ.ㅠ.ㅠ.ㅠ.ㅠ.ㅠ 모든 것은 다 저의 능력부족입니다...
사실 바쁜 일들은 어느 정도 지나갔는데 체력이 방전돼서ㅠ + 슬슬 날이 풀리니 봄이 오려고 하는지 탈력감이 엄청 나서 한동안 글을 손에서 놨더니 더 고생한 듯.... 존못이 더욱 존못이 되었읍니다...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이제 완결까지 플롯은 대충 나왔고,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생각하면서 저는 힘내겠다며 9999
무튼 저는 요새 정말 이것만 쓰네요... 이거라도 써서 다행ㅠ.ㅠ 항상 부족한 글 어여삐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입니다ㅠ.ㅠ.ㅠ 저는 그럼 또 좀 쉬다가 11편도 이챠이챠 힘내서 들고 오겠습니다. 이번 편도 감사합니다 u////u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완결 히로아카 게시판 이용 전에 읽어주세요 XD 2016.05.24
225 완결 해를 보았다 / 12 8 2018.03.11
224 완결 해를 보았다 / 11 5 2018.03.07
223 단편 etch 4 2018.03.04
» 완결 해를 보았다 / 10 4 2018.03.02
221 완결 해를 보았다 / 09 8 2018.02.23
220 완결 해를 보았다 / 08 9 2018.02.14
219 완결 해를 보았다 / 07 10 2018.02.11
218 단편 How long 8 2018.02.08
217 완결 해를 보았다 / 06 9 2018.02.06
216 완결 해를 보았다 / 05 5 2018.02.04
215 연재 캇데쿠_마피아보스x고등학교선생.ssul (02-01) 11 2018.01.30
214 완결 해를 보았다 / 04 4 2018.01.27
213 단편 Kill The Joy 7 2018.01.22
212 단편 키스와 거짓말 6 2018.01.19
211 완결 Who's the X? (9~完) 5 2018.01.1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8 Nex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