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고전에_알오버스로_캇데쿠.short
* 알파 귀족 x 오메가 황태자 이야기
* 오랜만에() 미약한 수위 있습니다



http://youtu.be/2-9CnV_cLsE









바쿠고는 그날, 달을 보았다.

저녁상을 봐주었던 하인들은 모두 자택에 딸려 있던 숙소로 돌아갔고, 일찍부터 집은 밤 어둠처럼 고요했었다. 아마도 내일이 해의 날이라 그럴 터였다. 홀로 쓰는 독채의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본 바쿠고는 아무도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의복부터 무인의 것으로 갈아입었다. 언젠가 엄마가 색이 곱다며 지어주었으나 제겐 어울리지 않아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하얀 여우의 털외투가 옷장 안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옷장을 열어젖힌 선홍색 눈이 가벼운 호선을 그렸다. 저보다도 이 옷이 제 것인 듯 어울릴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오늘밤은 먼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내일 날이 밝으면 나는 다시 이 망할 집으로 돌아와 있겠지. 잠시 쓴웃음을 삼킨 바쿠고가 털외투를 옆구리에 찔러 들고 소리를 죽여 독채의 장지문을 스르륵 떠밀었다. 짐은 그뿐이었다.

어제보다 더 커진 달이 저 멀리 어둔 밤하늘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례하면서 지었다던 바쿠고 가문의 자택은 궁을 제외하곤 도성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기로 늘 이름이 높았다. 아마 궁에서 머물던 공주마마를 궁과 다름없는 곳에 모시고 싶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일 터다. 총 8채의 크고 작은 독채들이 한중간에 파인 연못을 중심으로 드문드문 처마를 맞대고 있는 이 집에서 바쿠고는 제 집인데도 어릴 적엔 가끔 길을 잃었었다. 마구간을 향해 걸어가며 바쿠고는 잠시 살얼음이 얼어붙은 연못을 쳐다보았다. 연꽃 하나 없는 어두운 연못에 하얀 달빛이 마치 거기 갇힌 듯이 부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때도 어쩐지 픽 웃음이 났었다.

멍청아, 너한테는 이런 계절이 더럽게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쓸데없는 생각이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크게 마른세수를 하고 바쿠고는 마구간에 들러 맨 구석에서 얌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흑마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처음 바쿠고가 승마를 배울 적에 제 어미를 따라 왔던 조랑말은 이 집에서 가장 힘이 좋고 날랜 성마成馬로 자란 지금에도 난리 한 번 피우지 않고 얌전히 바쿠고를 따라 나섰다. 말을 끌고 뒷문으로 향하는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허나 뒷문을 넘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에 바쿠고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하인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마주치지 않기를 가장 바랐었던 유일한 존재였다.
카츠키. 목소리가 담담히 웃었다. 세상은 지금도 그녀를 이 나라의 딸, 가장 귀한 태양의 여식이라 불렀었다.

‘내 아들이 이 야밤에 가장 아끼는 말을 끌고 도둑처럼 뒷문을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혹시, 사흘동안 이 나라 태자전하의 별궁에 가있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 존나. 바쿠고가 돌아선 채로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왜 하필 엄마를 여기서 만나냐고. 허나 그때도 관둘 맘은 없었다. 이미 마음은 정했다. 하, 입매를 비튼 바쿠고가 저와 꼭 같은 선홍색 눈을 담담히 뚫어 보았다.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 이 나라 황가의 고귀한 증거가 그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알 바 아니잖아.’
‘알 바가 아니기는. 네가 내 아들이듯이 이즈쿠도 내겐 조카야. 이즈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언질도 없다 이 야밤에 갑자기 여장을 챙겨 길을 나서고 있으면 아무리 무심한 엄마라도 눈치를 채지 않겠어? 둘이 도망치기로 한 게 아니고서야.’
‘……’
‘네가 이즈쿠에게 유난히 마음이 약한 것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
‘제 정신이니? 넌 지금 이즈쿠의 마지막 남아있는 발판까지 부숴버리고 있는 거야. 그 아이가 평생 지키고 싶었던 걸 네가 부수고 있는 거라고.’
‘알아, 씨발.’
‘……’
‘그딴 건 잔소리 안 해도 다 안다고, 전부.’

내 마음과 욕심대로 할 요량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간편한 차림으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녁 내내 생각했었다. 어차피 데쿠 녀석은 궁을 떠날 수 없다. 감정에 떠밀려 나를 따라 나서도 너는 그 입으로 내게 돌아가겠노라 말하겠지. 그 정도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를 너무 잘 안다고. 다섯 살에 소꿉동무가 되어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며 평생을 함께 자랐다. 상대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시간이다. 바쿠고가 빈 주먹을 힘껏 쥐었다.
다 안다. 네가 거기에서 태어난 것도, 네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네가 결국 어떤 멍청한 길을 택하게 될 것인지도.

‘그딴 거 안 해. 잠깐 바람만 쐬고 오는 거니까.’
‘……’
‘그 등신이 해를 보고 싶다니까, 해만 보여주고 돌아올 거라고.’

물론 그때도 진심은 그렇지 않았었다. 할 수 있다면 너를 데리고 어디로건 숨고 싶었다. 황제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그 누구도 너를 두고 양인의 황가에서 홀로 음인으로 태어났노라며 입방아를 찧고 수군거리지 않는 곳, 너를 감시하지 않는 곳, 너를 원망하지 않는 곳.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누려온 이깟 핏줄, 이깟 명예와 권력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었다.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나는 언제든 망설이지 않고 그리할 것이다.
허나 아닌 것을 안다. 아닐 것이라고 바쿠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힘이 필요하다. 또 한 번 버릇처럼 볼 안쪽을 씹은 바쿠고가 고삐를 당기며 잠자코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돌아올 거니까. 고집스러운 입술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우물거렸다. 달아나지 않을 거라고, 망할 엄마.

‘허니 부탁 하나만 들어.’

바쿠고가 미츠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기울어진 입술을 힘껏 악물었다 떼며 바쿠고는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씨발, 아직 힘이 없으니까.

‘도와줘, 망할 엄마. 그래도 공주마마잖아.’
‘……’
‘도와달라고.’
‘……’
‘나는 씨발, 그 새끼를 어떻게든 황제로 만들고야 말 거니까.’

네 인생에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바쿠고는 알고 있었다. 허면 나는 그걸 어떻게든 이룰 것이다. 너를 비웃던 사람들, 너를 반찬삼아 농을 하고 수군거리던 치들의 머리 위에 어떻게든 너를 올려놓고 말 거라고. 힘껏 이를 악물던 그 얼굴을 미츠키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오래도록 뚫어보았다.
세상에, 내 아들이 정말 미쳤구나. 미츠키가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신음을 했다. 그래도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황제보다도 현명하며 이 나라에서 가장 지혜롭다던 공주의 얼굴이 아닌 엄마의 얼굴이었다. 너무 훌쩍 자라버린 아들이 기특한 엄마의 얼굴이 슬며시 웃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너.

‘어릴 적부터 이즈쿠한테 놀러가는 날이면 전날 밤에 잠까지 설쳐가며 그리 좋아하더니… 하긴. 이즈쿠가 내관들 손만 잡아도 삐쳐 있었지?’
‘내가 씨발, 언제 그랬…’
‘하지만 알고 있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안 들킬 리가 없어. 별궁은 뒤집어져 있을 거고, 운이 나쁘면 내 오라버니도 알게 되겠지. 그럼 까딱하다간 난 아들을 잃게 되겠고.’
‘……’
‘그래도 갈 거지? 망할 아들.’
‘어.’

약속했으니까. 바쿠고가 거듭 입술 끝을 씹었다. 해를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미츠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약속은 지켜야지. 그리고 곁으로 다가온 미츠키의 손이 바쿠고의 손에 말고삐를 쥐어주었다.

‘돌아올 땐 이즈쿠를 데리고 이 집으로 와. 궁으로 곧장 돌아가지마. 너희 숙부 성질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며칠 지켜보며 때를 기다려. 그래도 그 성질머리를 너보다는 오래 보고 살았잖니? 너희보단 여동생인 내가 좀 더 낫겠지, 후후. 네 부탁도 그때 제대로 들어볼 테니까,’
‘……’
‘잘 다녀와, 망할 아들.’

잘 다녀오긴 개뿔. 바쿠고가 씨근거렸다. 그래도 그때는 어쩐지 웃음이 났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하얀 달이 빛나고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처럼, 이 세상 가장 강하고 고운 어떤 이의 이름처럼.

참으로 달이 아름답다고, 그때도 생각했었다.












를 보았다
@ruka_tea



08







쏟아지는 빛살을 뚫고 검은 말黑馬이 너른 초원을 달렸다.

좁은 숲길을 타고 내려온 말이 초원에 접어들 때에 이미 세상은 훤히 밝아 있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는 동안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미도리야는 밝아온 초원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소르륵 잠에 빠져 바쿠고의 등에 기대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저만치 도성이 보일 즈음에는 아예 바쿠고의 등 위로 뺨을 묻고는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와중에도 한 번 풀지도 않고 제 허리에 감겨 있는 손을 내려다 보다 바쿠고는 피로가 앉은 눈길로 소리 없이 헛웃었다.

속이 좋은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엉엉 울어버릴만큼 미안해하던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기대올만큼 내가 편한 건지.

등에 닿은 체온은 단단히 여민 털외투 덕인지 따뜻했다.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혹여 달게 취한 잠을 깨울까봐 염려가 되어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당기면서도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황제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처럼 미도리야도 올해 나이가 열여덟이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열아홉이 되는 내년 가을에는 관을 물려받아 스무 살 정월부터는 정식으로 황제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아무 문제만 없었다면. 바쿠고가 볼 안쪽을 깊게 씹었다.

그럼에도 황제가 되고 싶다고 너는 말했었다.

너의 간절함을 나는 죽었다 깨나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고도 바보 같은 생각이다. 차라리 보위를 포기하고 폐태자가 된다면 네 삶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감금되어 사는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란다면 한동안 황가의 별장지에 머물면서 매일 같이 산 위 폭포에 올라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테다. 음인임을 감추지 않아도 되고, 매월 겪는 발정 때마다 섭리를 억누르는 탕약을 마시며 네 몸의 수명을 스스로 깎아먹지 않아도 된다.
선홍색 눈이 제 등에 가만히 기댄 채로 잠들어 있던 덤불 같은 머리칼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화가 났다. 네 행복을 모두 걷어차 놓고 너는 어떻게 내 등에 기대서 그리도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로 잠들 수 있는지.

알고 있냐, 멍청아. 나는 널 위해 황제가 되려고 했다.

네 아버지의 말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것은 황제라는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탐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었다. 나라의 태양이 되는 것이라고 하나 그 자리가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지에 대해서 바쿠고는 진물이 날만큼 알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황가 제 1의 외척이자 사대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태어나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삶이었다. 헌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었다.
네가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나는 기꺼이 그 감옥 안으로 멍에를 지러 걸어들어 갔겠지. 그 마지막 기회를 너는 스스로 져버렸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멍청할 수 있는지.

이걸 또 이뤄주고 싶어 하는 나는 또 얼마나 등신 새끼인지.

“흐, 캇쨩… 좋아해, 진짜…”

등에 붙은 입술이 잠꼬대처럼 우물거렸다. 저 혼자 속만 좋은 새끼. 누군 씨발, 저 때문에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말고삐를 잡고 있는데. 그래도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은 너라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웃고 마는 것도, 잠결에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그저 귀여운 것도 모두 너라 그런 것이다.
반한 새끼가 죄지. 선홍색 눈이 쓰게 웃었다.

“일어나면 너는 내 손에 뒤졌다, 이 황태자야.”

이 나라에서 나를 이렇게 부려먹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픽 입매를 밀어올린 바쿠고가 박차를 가했다. 이제 곧 도성이었다.









*

도성 입구를 지키던 초병들은 다행히 미도리야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일부러 인적이 적은 북쪽 출입구를 택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약간 맥이 빠졌다. 하기야, 별궁 안에 갇혀서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듯 살아온 황태자에 대해서 대부분은 모르고 살아갈 터였다. 그래도 신경은 쓰여 잠이 든 미도리야의 얼굴에 외투자락을 깊게 올려 덮어주고 바쿠고는 좁은 길을 천천히 달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처음 말을 끌고 나섰던 제 집의 뒷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젊은 하인이 바쿠고를 보며 기겁을 했다.

“카츠키 도련님, 이런 이른 아침부터 어디엘… 그 분은 누구십니까?”
“알 거 없다. 네 놈은 서둘러 내 방에 자리나 봐두어라.”

다른 하인이 달려와 말고삐를 건네받는 동안에도 미도리야는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인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그대로 말에서 내려온 바쿠고는 곧장 외투채로 미도리야를 품에 안아 들고는 독채로 향했다. 저희들이 들겠다며 쫓아오는 하인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바쿠고는 그대로 미도리야를 안아든 채로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었다. 급하게 자리를 깔고 있던 하인이 절을 하고 후다닥 방을 빠져 나갔다.
이불에 내려놓으면서 행여 잠을 깨울까봐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씨발, 너 때문에 별 짓을 다한다. 자조처럼 중얼거리고 바쿠고는 겉옷만 대충 벗어던지고 잠에 빠진 미도리야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제야 밤 내내 말을 몰고 달렸던 노곤함이 수마처럼 덮쳐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려 있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였다.

바쿠고는 버릇처럼 멍하니 옆자리를 더듬어보다 비어있음을 깨닫고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그 몸을 감쌌던 하얀 외투도, 겉옷도 모두 자리 곁에 단정하게 개켜져 있었지만 그 옷을 입고 있던 미도리야만 자리에 없었다. 설마 또 혼자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겠지, 이 멍청이. 불안감에 바쿠고가 마루로 곧장 통해 있던 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마루에 앉아 있던 숲색 눈이 바쿠고를 향해 끔벅거렸다. 하얀 장옷만 가볍게 걸쳐 입고 앉아 있던 그 익숙한 얼굴에 바쿠고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절로 이가 꽉 악물렸다. 이 등신 새끼가.

“너는 씨발,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기척을 하든가!”
“? 어? 아니, 아까 계속 깨웠는데 일어나질 않아서… 근데 하인분들이 그러시잖아. 도련님은 본래 아침잠이 많으시니까 가만 두면 오후 늦게 일어나실 거라고, 흐.”
“……”
“아, 요기로 드시라며 귤을 좀 주고 가셨는데 먹을래?”

제 얼굴 앞에로 불쑥 내밀어지는 귤을 보니 기도 안 찼다. 누군 씨발 가슴이 철렁했는데 태평하게 앉아서 귤이나 까먹고 자빠져 있다니. 그래도 저를 향해 흐, 웃어버리는 그 얼굴에 바쿠고는 이번에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밥을 먹어야지, 아침부터 귤은 무슨. 괜한 말을 씨근거리면서 바쿠고는 내밀어준 귤을 낚아채며 미도리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숲색 눈이 곤란한 듯 쓰게 웃었다. 그래, 아침은 아니지만…

너른 정원의 연못 위로 떠오른 해가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늘도 날은 좋았다.

“캇쨩 집에도 연못이 있었구나. 처음 알았어.”

캇쨩 집에 와본 것도 처음이지만. 하늘을 올려보던 숲색 눈에 또 한 번 부슬부슬 웃음이 걸렸다. 바쿠고가 귤의 껍질을 벗기며 무심한 투로 말을 받았다. 그러게.

“한 번 놀러와 보고 싶었는데, 흐. 이제야 소원을 이뤄보네.”
“이깟 집 뭐가 대단하다고 소원씩이나 되냐.”
“하지만 저렇게 근사한 연못이 있는데… 여름이 오면 더 멋질 것 같아.”
“어, 연꽃이 엄청 나거든. 망할 아버지가 엄마 보기 좋으라고 연꽃을 그렇게 심어놨다니까.”
“아, 그렇구나. 맞아. 고모님도 연꽃 좋아하셨지. 오늘은 일찍 두 분이서 나들이를 가셨다고 하인분이 그러시더라. 오랜만에 얼굴 뵐까 했는데, 흐. 여전히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
“사이 좋아봐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 뭘.”

숲색 눈이 곤란한 듯 웃었다. 캇쨩, 그래도 부모님을 그렇게 말하면 안돼… 그 투에 대꾸하는 대신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등 뒤로 팔을 뻗어 두 번째 귤을 집어 들었다. 평온하고 일상적이었다. 마치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해를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좋다…”
“뭐가.”
“그냥 캇쨩이랑 캇쨩 집에서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거… 전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었는데, 하하.”
“……”
“잠든 사이에 돌아갈까 하다가 말았어.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꼭 얼굴 보고 하고 싶어서…”
“……”
“돌아가면 이젠 캇쨩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순간 울대가 밀렸던 것은 아마 목이 메여 그랬을 터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네 얼굴이 까닭없이 슬퍼서, 또 한 번 그 곧은 뼈대들이 으스러질만큼 너를 움켜 안고 싶어서 애꿎은 빈주먹만 움켜쥐며 바쿠고는 하고 싶던 말을 이번에도 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얼굴을 못보긴 왜 못 보냐고,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온갖 말들이 혀 밑에 돋아난 가시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부터 여기 나와 앉아 있었던 거지, 이 멍청이는.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살을 좁혔다. 코끝이 어쩐지 발갰었다. 그 얼굴만으로도 이 마루에 얼마나 오랫동안 나와 앉아 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분명 일찍 눈을 떠선 제 잠을 깨울까봐 염려가 되어 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안 봐도 빤했다.
하여튼간에. 쯧 혀를 찬 바쿠고가 몸을 일으키며 미도리야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이 멍청한 황태자야.

“됐고 들어와. 춥지도 않냐?”
“난 괜찮은… 으악?!”

또 흐물흐물 웃으면서 말을 흐리는 것이 괘씸해서 이번에도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옆구리에 손을 쑤셔 넣으며 멋대로 그 몸을 일으켜 놓았다. 걸을게, 걸을 수 있어, 걸을 수 있다니까! 방 안으로 반쯤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 미도리야는 몇 번이고 버둥거렸고,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바쿠고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가긴 개뿔, 봄 되면 들어 오냐!?”
“아냐, 진짜…! 아니, 난 이 방에 있는 게 좀, 그, 어! 곤란해서…!”
“별 지랄을 다 듣는다. 곤란할 게 뭐가 있어, 등신 새끼야.”
“아니, 여기 캇쨩 체취가 너무 나니까…!”

발뒤꿈치로 방문을 밀어 닫아버리고 제 품에서 버둥거리던 미도리야를 안쪽으로 밀어 붙이던 바쿠고의 동작이 우뚝 멈춰 섰다. 제 가슴팍 쪽으로 기울어진 미도리야의 목덜미가 홧홧이 붉어 있었다. 진짜로… 가슴팍에 파묻힌 입술이 곤란한 듯 우물거렸다. 정말…

“너무… 사방에서 캇쨩 체취가 나서… 기분이 좀, 약간… 이상해져 버리니까…”

양인이라면, 혹은 평범한 중인이었더라면 이 방에서 아무 향내도 맡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이 녀석은 음인이다. 그중에서도 음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체질로 태어났다고 내관장도 말했었다. 헌데 발정도 아닌 시기에 이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예민한 거냐고.
신경이 쓰인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몸을 감고 있던 팔 힘을 스르륵 뺐다. 그런 거라면 억지로 방에 들일 수도, 시킬 수도 없다. 이 녀석 의지가 아닌, 저 안에 박혀 있는 빌어먹을 달의 기운이 시키는 일이다. 생각에 바쿠고가 남은 팔을 마저 풀어내려고 할 때였다.

저기…! 다급하게 다가온 미도리야의 손이 바쿠고의 손목을 돌연 움켜잡았다. 여전히 바쿠고의 가슴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입술이 망설이듯 우물거렸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발정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끝났잖아.”
“……”
“그냥, 캇쨩 체취가 너무 좋아서…”
“……”
“여기 누워 있으면 자꾸, 캇쨩한테 안겨 있던 때가 생각이 나니까… 캇쨩한테 안겨 있던 것 같으니까, 그래서…”
“……”
“내가 캇쨩을 그냥 너무, 좋아ㅎ… 읍,”

멋대로 뻗어나간 손이 미도리야의 뒷머리칼을 난폭하게 헤집으며 기어이 입술을 기울였다. 말을 다 맺을 틈조차 주지 않고 포개진 입술이 틈을 가르며 그 안에 숨어있던 설육을 휘어감으며 깊게 헤집었다. 이런 것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실 네가 양인이라, 음인이라 이리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도무지 인내할 수가 없었다. 겹쳐진 입술이 간신히 떨어지며 헐떡일 틈도 없이 미도리야의 몸이 펼쳐진 침상 위로 기어이 쓰러졌다.

“캇, 캇쨩, 잠시만… 여기 다른, 다른 하인들도 있을 텐데, 읏, !”

반쯤 엎드려진 몸이 도망을 치듯 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걸 또 누가 알까. 미도리야의 몸 위에 올라타고 허리끈을 풀어헤치면서 바쿠고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도 모르겠지. 몰라야 한다. 이런 것은 너의 아버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춘답시고 제 베개 안으로 파고들면서도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은 귀 끝까지 붉었고, 바쿠고의 손아래에서 마르고 곧은 허리는 자꾸만 두근거렸다. 심장이 거기 있는 듯 했다. 네 가슴이 그 아래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아서, 그 고동이 또한 사랑스러워서 바쿠고는 기어이 허리 위로 올라와 반쯤 엎드려 있던 그 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도 좋아… 제 베개 안에 파묻혀 있던 숲색 눈이 흐 웃었다. 그리곤 우물거렸다. 캇쨩 냄새.

“온 사방에서 캇쨩 냄새가 나. 달고 뜨겁고…”

그래, 햇님 같아. 둥그런 숲색 눈에 부스스 웃음이 걸렸다. 기실 쑥스러워 부러 말을 돌리고 있음을 바쿠고는 모르지 않았다. 알기에 자꾸만 입매가 밀려 올라갔다.
내 방이니 당연하지, 멍청아. 그렇게만 뱉어놓은 입술이 부연 햇살에 반쯤 드러나 있던 마른 어깨 위로 기울었다. 등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을 멍이며 잇자국은 이제 이틀 전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흐려져 있었다.

“허면 졸라 보시지요.”

견갑골 즈음에 걸린 옷자락을 느리게 끌어내리며, 그 언저리에 질근 이를 세우며 바쿠고가 낮게 속삭였다. 이번에도 편히 하는 투는 아니었다. 곤란한 얼굴을 보고 싶어 그리 했다. 둥근 숲색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끔벅거렸다.

“? 무엇을… 것보다 왜 또 그런 말투를, 읏,”
“해달라고, 하고 싶다고 그 입술로 졸라 보시라 청하였습니다. 태자전하. 이대로는 괴로우실 텐데요.”

아니 그렇습니까. 견갑골을 타고 목덜미로 올라온 입술을 깊게 찍으며 바쿠고가 낮게 속삭였다. 그런... 흠칫 어깨를 좁히며 미도리야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기척에는 어쩐지 울대가 밀렸다. 이 녀석은 영영 모를 것이다. 이런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그 얼마나 부추기는지. 분명 여인의 몸은 아니다. 흔히 유곽에서 볼 수 있는 음인들처럼 유려하거나 낭창한 선도 아니었다. 허나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 살결과 유독 선이 짙은 뼈대를 볼 때마다 바쿠고는 저조차도 몰랐던 난폭한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해가 시키는 일이 아니다. 내가 양인이라 음인인 너에게 반응하는 것도 아닐 터다. 발정이 아닌 때조차도 바쿠고는 수많은 충동에 수도 없이 어지러웠었다.
내가 너를 떠올리며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너는 내가 무섭겠지.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매를 밀었다. 곧은 등을 돌아 벌어진 옷자락의 틈을 비집은 손이 미도리야의 배를 지나 허리로 미끄러졌다. 스르륵 스치는 손길을 따라 긴장하는 살갗의 감촉이 그때도 못내 좋았다. 그 붉어진 뒷덜미에 피멍이 지도록 움켜쥐고 그 속을 가르고 싶다는 충동이 바쿠고의 목소리를 기어이 낮고 탁하게 흐려놓았다.

“저를 졸라 보시라 했습니다, 태자전하. 어서요.”

조금 전보다 탁해진 투로 귓속질을 하며 바쿠고가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츱, 깊은 소리가 나도록 입술에 머금었다. 히익. 미도리야가 비명처럼 어깨를 떨었다. 슬금슬금 몸밑에서 달아날 듯 꿈지럭거리는 허리가 귀여워서, 바쿠고는 손을 뻗으며 미도리야가 채 모으지 못한 허벅지 틈을 난폭하게 파고 들었다. 어느 틈엔가 바쿠고의 가슴팍에 맞대어진 마른 등이 크게 흠칫 튀어올랐다. 급히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는 그 얼굴조차 사랑스러웠다. 어여쁘고 고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라 하시는 것 치고는 하, 제대로 발기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 손을 적시는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태자전하.”
“그런, 그, ! 아닙니다. 그런, 그렇지 않, 흐ㅇ,”
“아니긴요. 소리조차 참지 못하는 분이 이를 말씀은 아니시지요. 아니면 제 하인들에게도 어디 한 번 보여 볼까요. 이 나라의 아들이, 하, 이 품에서 얼마나 천박하고 상스러워지는지 저들에게도 보여주심이 어떠하십니까.”
“그런 짓을 감히 어찌… 아흐ㅂ,!”

더불어 앞을 향해 뻗어간 손이 자꾸만 닫히는 허벅지를 활짝 젖히며 벌려놓았다. 젖은 물소리가 적요했던 허공 속을 노골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어서. 바쿠고가 온통 붉어져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미도리야의 귓가에 사나운 호흡을 밀어냈다. 이리 고집을 피우시면 관둘 겁니다. 그 말에 미도리야가 기어이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베개에 파묻힌 입술이 천천히 우물거렸다.

“…주세요, 정위.”
“무엇을 말입니까, 태자전하. 똑바로 말씀하셔야지요.”
“그…! …정위의 그, 그것을 제게…”
“아아. 전하의 뒤를 벌려 제 것을 박아 넣고 음혈을 비벼대며 이르게 해달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 그렇게까진 얘기 안 했...! 아흐ㅅ,!”

항변을 들을 틈도 없이 아래춤을 비집고 손가락이 파고들 때 미도리야가 천장을 향해 턱을 젖혔다. 헐떡이는 숨결이 좀전보다 달았다. 신음이 흘러나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손등을 씹고 깨물면서도 미도리야는 제 뒤를 파고든 바쿠고에게 관두라는 말도, 눈짓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그 점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 바쿠고가 어느 틈엔가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저도 모르게 혀로 훑으며 깊게 허리를 기울였다. 베개에 파묻힌 숲색 눈 끝이 젖어 있었다. 그마저도 애처롭고 사랑스러워 바쿠고는 순간 말문이 막혔었다. 가슴이 괴로울 만큼 뛰었었다.

내 달이다. 네가 나의 달이다. 누구에게도 앗기지 않을, 그 누구에게도 닿도록 두지 않을.

“정, 정위,… 캇쨩, 잠시만, 그런 것은 하지 않아도… 흐ㅅ,!”

이젠 네 시선조차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감히 내가 아닌 누군가가 너의 이 달아오른 살결을 보게 된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자를 도륙하겠지. 날선 호흡을 밀어내고 그 몸을 어지럽게 더듬고 옷섶을 헤치면서도 바쿠고는 그 생각에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이 마음은 어두운 것이다. 너처럼 선하고 맑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그저 하루이틀 살을 섞어서, 네 아비의 말마따나 몸정이 들어 이런 것도 아닐 터였다.
너 이외엔 내 생에 그 누구도 없었다. 평생, 너 하나뿐이었다고, 이 멍청아. 미도리야의 다리 틈으로 몸을 기울이며, 발작처럼 떠는 그 몸을 모두 분지를 것처럼 힘껏 움켜쥐며 바쿠고가 선홍색 눈을 들어 숲색 눈을 바라보았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가슴팍 너머로 속눈썹 끝이 옅게 젖은 숲색 눈이 연못처럼 일렁거렸다. 저 눈에 언제나 사로 잡혀 있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멋대로 툭 떨어졌다. 이번엔 경어가 아니었다.

“사랑한다, 멍청아.”

바르르 떨고 있던 몸이, 일렁거리던 숲색 눈의 파문이 오똑 멈췄다. 아, 존나.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그 사랑스러움에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젠 네 아버지조차 널 함부로 하게 두지 않을 거라고, 나는.”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부끄러움에, 온몸을 삼킬 듯 더듬어 오는 희롱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발작처럼 바르르 떨던 미도리야의 몸을 힘껏 끌어안으며 바쿠고가 입매를 밀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올라 어설피 벌어져 있던 무릎을 움켜잡으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허니 전하, 지금은 그저 즐겨주시옵소서.”

그 말에 숲색 눈이 기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기실 그 얼굴이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허락임을 바쿠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사저의 입구를 지키던 초병이 헐레벌떡 뛰어왔을 때 황제는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도 누가 이런 때에 자신을 찾아와 알현하길 청하는지를 이미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내관이 거명을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예상했던 익숙한 얼굴이 당황한 내관과 초병을 지나쳐 황제의 앞에 몸을 굽히며 절을 했다. 황제는 인사를 받는 대신 입매 끝을 비틀며 제 앞에 엎드린 검은 관복의 젊은 정위를 굽어보았다.

“설마 내 조카가 스스로 제 목을 쳐달라고 걸어올 줄은 짐작 못하였는데.”
“……”
“넌 언제나 간단히 내 허를 찔러버리는구나, 카츠키.”

엎드려 있던 정위가, 바쿠고가 고개를 들며 가볍게 입매를 비틀었다. 겁을 먹은 얼굴도, 뭔가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황제는 그 얼굴에서 벌써 평생을 보지 않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다. 무정한 아비의 명에 따라 그 별궁에 평생을 갇혀 살았으면서도 결국 담장을 넘어버린 이 나라 아들이 생각났었다. 그 연쇄적인 생각들에 황제는 소리없이 쓰게 웃었다.
인코, 당신은 당신을 닮은 아들을 낳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 무슨 일이냐. 정말 죽기 위해 온 것은 아닐 테고.”

옥좌 앞에 펼쳐진 서책을 치우며 황제는 넌짓 물었다. 바쿠고가 담담히 목례하며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분명 고분고분한 투는 아니었다.

“태자전하는 저희 집에 모시고 있습니다, 황제폐하. 그 아무리 잊고 계신 아들이라 하나 가신의 소임으로 고해야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두 소꿉동무가 담을 넘어 반항심으로 밤놀이를 했노라고 지금 아비인 내게 이실직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야반도주를 할 담이 부족해 돌아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설마요. 저는 감히 협박을 하고 있는 겁니다, 황제폐하.”
“……”
“태자전하의 안위를 제가 쥐고 있다 이 말씀입니다.”

평온하던 황제의 선홍색 홍채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필경 분노의 빛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놓는 것을 바쿠고는 그 순간 똑똑히 보았다. 허나 바쿠고도, 황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다시 평정해진 얼굴로 황제가 온화하게 웃었다. 허나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라 한들 그 눈빛의 떨림까지는 인내하지 못했다.

“너는… 그래. 알겠구나. 미츠키가 너와 꼭 닮았었지. 허나 내 사랑스러운 누이도 이런 멍청하고 앞뒤 없는 말들로 감히 나를 협박하진 않았었다. 그리 나를 자극하여 내가 이즈쿠를 아예 내치기라도 하면 너는 어쩔 셈이냐.”
“허면 제가 여쭙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뿐인 태자를 내치신다면 다음 대는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달리 다른 자라도 있습니까? 폐하의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오를 자가 또 달리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
“저까지 그 자리를 거절한다면 이 나라 황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황제폐하.”

그날, 내관과 초병들이 숨을 죽이고 아예 눈길조차 돌려버린 것은 단 한 번도 황제의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터다. 끝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제가 던진 연적이 바쿠고의 곁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허나 바쿠고는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쿠고가 소리 없이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네가 평생 견뎌냈을 괴로움에 비하면 이딴 건, 씨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책상 끝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선 황제가 신음처럼 비틀거렸다. 그 손길이 눈길처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네가 감히… 하. 눈 사이를 일그러뜨린 황제가 바쿠고를 사납게 뚫어 보았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예, 황제폐하. 송구스럽게도 그러합니다.”

바쿠고가 고개를 조아렸다.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을 또렷이 뚫어보며 바쿠고는 이윽고 입술을 뗐다.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감히.

“폐하께서는 제가 무엇을 바라건 이뤄주신다 약조하시었지요. 황제의 약조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뤄져야 하는 것이 이 나라 지엄한 황가의 법도라 배워왔습니다만.”
“……”
“녀석을, 미도리야 이즈쿠를 황제로 즉위시켜 주십시오.”
“……”
“저는 강한 것을 좋아해서요. 제가 가질 존재라면 능히 황제 정도는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지금쯤은 잠에서 깨었을까. 네가 없는 자리에서 네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모르는 편이 좋다. 모르길 원해서 바쿠고는 제 팔 안에서 잠들어 버린 미도리야를 제 침상 위에 눕혀두고 기척 없이 조용히 의복을 차려 입고 홀로 궁으로 왔다. 이 말이 무엇을 변하게 할 수나 있을지, 네 아버지를 설득시킬 수나 있을지 확신은 없다. 헌데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너를 황제로 만들고 싶어졌다. 이제 어떻게든 너를 저 자리에 앉혀놓고 말 거라고, 내가. 바쿠고가 입술 끝을 세차게 씹었다.
황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바쿠고와 꼭 같은 선홍색 눈은 너무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어 이번에도 그 속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말없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참 후에야 황제가 천천히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그 목소리의 결은 분명 여느 때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았었다.

“네가… 나를 덫으로 던져넣었구나.”
“그 덫을 먼저 던지신 것은 당신이십니다, 황제폐하.”
“네 말을 내가 거절하고 물리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그러실 수는 없을 겁니다. 말씀대로 무엇이건 들어주시겠다 이 자리에서 저와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내조의 상서어른께서 그 명을 하달받고 제게 전달해주셨으니 이 말을 들은 증인은 그보다 더 많을 것 아닙니까. 이제와 없던 약조로 돌려버릴 심산은 아니시겠지요.”
“그 아이는 음인이다. 음인의 몸으로는 황비조차 되지 못하는데, 어찌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넌 확신하느냐. 가신들이 가만히 두고 볼 것이라 생각하느냐.”
“인코님께서 황비로 들어오실 적엔 저만한 힘을 가진 가신이 없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나라 황가의 핏줄이며 공주마마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천년을 이어진 개국공신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황제폐하. 폐하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안하무인이 아닙니까, 제가. 누가 감히 저를 적으로 돌리고 싶겠습니까. 이 나라 황실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말인즉… 너는 내 누이의 아들이면서도 이 나라 황가에 반역이라도 하겠다 이 뜻인가. 그깟 몸정 때문에.”
“예, 그깟 몸정 때문에 저는 미쳤습니다. 막말로 그 누가 황제가 되건 명분을 지키기 위해선 가장 힘이 강한 가신이 아군이 되어야 할 텐데요. 적이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
“이 점에 대해선 어머니 역시 저와 뜻이 같습니다, 황제폐하.”

황제는 완전히 입을 닫았다. 그 얼굴에 걸린 혼란과 분노의 빛을 바쿠고는 이번에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곧게 편 바쿠고가 몸을 기울이며 양손으로 땅을 짚으며 반절을 했다.

“허니 윤허하십시오, 황제폐하.”

말문이 막힌 황제를 향해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달리 선택지도 없지 않습니까.”

마지막 말이 장기판을 가로질렀다. 장군이었다.





(계속)







썼ㄷ ㅏ................. 흑흑 그래도 연휴 직전에 어떻게든 쓴 저에게 치얼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는 이제 명절 치러 내려 가야해서 며칠간 자리를 비웁니다 u///u 발렌타인 축하도 못하고, 올해는 생일도 하필이면 구정날 딱 걸려서ㅋㅋㅋㅋㅋ자축 소설도 없이 이게 거의 연휴 때 마지막 글이 되겠네요 ㅎㅎㅎㅎㅎ 그래도 부디 즐거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며 저는 살포시 올려놓고 이제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러 갑니다... 여력이 된다면 연휴 끝나기 전에 뭔가 써서 들고 올듯////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

+ 요기에도 덧붙여야지 u///u 글 속 세계는 창작되어 있지만 비주얼적으로 대륙의 당송시절을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u////u
아마 글 속의 캇뎈 옷차림은 이런 느낌 http://twitter.com/ruka_tea/status/962896786217091072

?
  • rio 2018.02.14 17:17 SECRET

    "비밀글입니다."

  • OOP 2018.02.14 18:38 SECRET

    "비밀글입니다."

  • 연휴 잘 보내세요!! 2018.02.14 18:48 SECRET

    "비밀글입니다."

  • 데쿠 2018.02.14 20:34 SECRET

    "비밀글입니다."

  • 아이스베어 2018.02.14 20:41 SECRET

    "비밀글입니다."

  • 눈누난나 2018.02.14 21:48 SECRET

    "비밀글입니다."

  • 눈물바탕 2018.02.15 01:09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 항상 고마워요..♥♥ 2018.02.21 07:43
    갓.......쨩....갓쨩입니다....루카님.....

    읽고 있는 저도 덩달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야말로 갓쨩이옵니다...........ㅠㅠㅠㅠㅠㅠ아ㅠㅠㅠㅠ

    루카님 '해를 보았다' 너무 재밌어서 1편부터 8편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정말 해 봤네요.....

    항상 이쁘고 사랑스러운 캇뎈 글로 녹여주셔서 고맙습니다ㅠㅠㅠ 그럼 전 이만 부족한 잠을 채우러.....
  • ㅌㅎ 2018.04.22 00:19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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