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고전에_알오버스로_캇데쿠
* 알파 귀족 x 오메가 황태자 이야기
* 약수위 주의해주세요





http://youtu.be/2-9CnV_cLsE








그날, 바쿠고는 밤이 늦도록 출궁하지 않았다.


염려를 하는 상관들에겐 밀린 업무가 많다는 핑계를 댔었다. 사흘간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니 처리해야할 두루마리들이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었고, 이는 해가 기운 후에도 궁 안에 남아있을 훌륭한 변명이 되었다. 기실 업무가 많다 한들 출궁을 미룰 정도는 아니었을 터다. 허나 바쿠고는 업무를 미루며 출궁하지 않았다. 마음이 쓰여 그랬다. 아니, 어쩌면 지난 사흘동안 기거했던 별궁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려두고 와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쓰였다. 신경이 쓰였었다. 생각이 나고 무시로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 몸의 열을 아는 탓이었다. 그저 손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미도리야의 체온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몽정 중에 열에 들떠 꾸던 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젠 모두 남김 없이 알았다. 네가 도달하는 순간, 너의 기척, 너의 온도, 너의 호흡과 너의 습한 자리들… 몸은 머리보다 솔직했다. 기어이 붓을 놓친 바쿠고가 먹물에 젖은 오른주먹을 힘껏 쥐었다. 하필 모두 출궁하고 내조에는 바쿠고 뿐이었다. 말려줄 이도, 어디로 가느냐 물어봐줄 이도 아무도 없었다.

밤하늘에 달이 걸려있었다. 하얀 실금 같은 초승달이었다. 그 달만 보고 있어도 어쩐지 코가 시큰거렸었다.

무엇을 어찌할 작정으로 별궁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식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발정이 찾아왔으니 또 소문대로 차디찬 별채 안에 구금된 처지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별궁을 지키는 이들 중 몇몇은 입이 가벼울 터였다. 그런 거래엔 바쿠고도 제법 요령이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섰던 초병은 곤란해하면서도 이 추운 날에 술이나 한 사발 하고 오시라며 바쿠고가 찔러준 금전 몇 닢에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도 멈췄어야 했다. 그리는 하지 말아야 했다. 별궁의 쪽문을 열며 그 안으로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었다.
향내가 나고 있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초승달 밑으로 그보다 하얀 옷자락이 펄럭, 흔들렸다. 주근깨가 흩어진 뺨은 열기로 달아올라 붉었고, 그 어느 때보다 색이 깊은 숲색눈이 이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쿠고가 저도 모르게 울대를 밀었다. 그때는 어쩐지 숨이 막혔었다.

참으로 달보다도 아름다웠다.

무엇이 바쿠고를 그 달에게로 떠밀었는지는 모른다. 해조차도 모를 것이다. 단지 양인이라, 때 아닌 발정에 접어 들어 가쁜 호흡을 헐떡이고 있던 음인에게 끌린 것만이 아닐 터다. 제게 달려와 안기는 마른 허리를 으스러질 듯 끌어 안으면서도 바쿠고는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온 사방에서 향내가 흘러 넘쳤다. 연꽃의 향이 너무 짙었다. 이런 추위에 이미 연꽃의 대는 까맣게 말라 붙어 버렸는데도 오로지 네가 꽃인 듯이 그렇게 향기로웠었다.
허겁지겁 벗겨낸 살갗이 달빛처럼 하얗게 빛났을 때, 기어이 가슴에서 치솟은 불길이 바쿠고의 입술을 그 곧은 목덜미 위로 기울였다. 이를 세우며 가슴팍을 더듬는 손길이 온통 급하고 거칠었다. 당연한 섭리다.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를 멍이질만큼 힘껏 움켜잡고 추삽을 하면서, 바쿠고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이런 건 씨발, 당연한 거라고. 음인은 양인을 꼬여내기 위해 향내를 풍기고, 양인은 그 향내에 이끌려 음인의 꽃잎을 연다. 당연한 섭리고 이치다. 허나 거듭 되뇌여도, 몇 번이고 그 살갗에 자신을 비비며 속을 갈라도 기어이 깊은 속까지 닿지는 않았다. 마음의 괴로움까지 가시지는 않았었다.

이런 식으로 품고 싶지 않았었다고, 멍청아.

짝이 된다면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너를 이보다는 더 아껴주어야 했다. 첫 발정 이후로 바쿠고는 수십 번씩 그리 생각하며 상상했다. 잘해주고 싶었다. 아껴주고 싶었다. 바람결에 부러져 버릴 연꽃의 여린 가지를 보듬듯이, 행여 손을 잘못 놀려 생채기라도 내버릴까 조바심을 내며 너를 안을 작정이었다.
이런 게 아니었다고. 어차피 짝지워질 운명이라면 씨발, 이보다는 더 다정하고 상냥해야 했다고, 나는. 바쿠고가 분한 마음에 이를 갈았다. 부연 어둠 속에서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괜찮아.

당연한 거니까, 이게 섭리니까.

“그렇게 태어난 몸이잖아, 나는.”

아, 존나. 바쿠고가 있는 힘껏 입술을 악물었다. 그때는 정말 네가 미웠다. 미워서, 분해서, 바쿠고는 이미 벌어져 다물 의지가 없던 젖은 틈으로 더욱 깊이 허리를 찍어 넣었다. 노골적인 기척에 놀란 탓인지 미도리야가 비명처럼 헐떡였다. 그리 해서는 안 됐었다. 제 아무리 마음의 해가 부추겨도, 달의 체향에 취해 욕정을 해도, 끝끝내 이 몸을 발가벗겨 저를 밀어 넣으면서도 욕심을 부리지는 말아야 했다.
허나 닿고 싶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의 괴로움에서 피어난 감정은 바쿠고를 더 깊은 곳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힘껏 허리를 다붙였을 때 온몸을 크게 경련하며 미도리야는 끝내 혼절했다. 동시에 바쿠고의 허리가 우뚝 멈추었다. 사흘간 접을 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촉감이 바쿠고의 가장 예민한 살을 뜨겁게 감싸왔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겪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본능일 터였다. 양인이기에 아는 것이다. 가슴에서 뜨겁게 일렁거리던 해日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 허탈하게 웃음을 삼킨 바쿠고가 눈을 들어 하늘 너머를 바라보았다.

짝이었다니.

머리 위로 희부연 달빛이 어지러웠다. 품 안에서 혼절해버린 얼굴처럼 하얗고 고운 달이었다.










를 보았다
@ruka_tea






황태자의 발정이 끝났다.

공식적으로는 황태자가 그믐 때에 발정을 겪었다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을 터였다. 허나 아무리 내관장이 별궁을 드나드는 내관과 의관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하여도 떠도는 소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궁의 안살림을 도맡으며 황제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내조는 이런 류의 소문에 언제나 밝았었다.

“…하여, 별궁에서 야단이 났다잖아. 태자전하께서 발정을 시작하시는 통에.”
“보름도 아니고 이런 그믐에? 허, 그것 참 희한한 일일세.”
“내 말이. 그것 때문에 별궁의 내관이고 의관이고 죄 목숨이 달아날까봐 벌벌 떨고 있다니까. 뭐, 이제라도 안정을 찾으셨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내조內朝, 그중에서도 정부正府는 궁의 법령을 정비하고 황가의 법도를 관리하는 직무를 도맡는다. 흔히 줄여 내정부內正府라 부른다. 황제의 직속인 내조에서도 황가의 중요한 법도를 관리하는 내정부는 영향력이 큰 만큼 가장 중요한 부서로 여겨졌고, 그 중요성 때문에 인맥이나 연줄로는 결코 등용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해마다 문과文科에서 급제한 인재들 중에서도 상위 3인까지만 내정부에 올 자격을 얻었다.
지난 해 문과의 장원은 바쿠고였다. 황제의 조카이며 공주의 아들이었으나 바쿠고는 스스로의 힘으로 시험을 치르고 이 자리에 올랐다. 허나 궁의 중한 일을 처리하는만큼 강직하고 곧은 관리들의 부서일 것이라 짐작했던 내정부는 막상 와보니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내조의 관리들은 오가는 소문에 밝았고, 황가의 뒷얘기를 두런거리며 뒷이야기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음인으로 태어나버린 황태자의 이야기가 늘 가장 인기가 높았다. 역겨운 자들이다. 두루마리를 펼치고 붓을 놀리고 있던 바쿠고의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허나 귀를 닫고 관심을 닫아도 음험한 수다는 좀체 끊이지 않았다.

“의관들도 고생이지. 태자전하께서 그리 태어나버린 것을 어쩌누, 하늘의 뜻인 것을.”
“친모가 천민 출신 음인이라더니, 혹시 무슨 저주라도 내린 거 아냐?”
“그래, 것도 말이 안 되지. 황제께서 무리해서 그 천출의 비를 정비로 앉히려고 하셨었다잖아. 후에야 정신 차리고 폐비 해서 쫓아내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 되냐? 이 나라 황실이 어떤 곳인데.”
“…야, 목소리 너무 크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아, 그래… 여기 황가의 핏줄이 계셨었지.”

뒤에서 떠들던 목소리들이 노골적으로 작아졌다. 시선을 느낀 바쿠고가 입매를 비틀었다. 자신을 이르는 말이다. 별궁에서 저를 보고 수군거리던 내관들의 얼굴이 떠올라 바쿠고는 순간 혐오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이 한 번 더 들렸을 때는 기어코 부아가 치밀었다.

“둬, 저 녀석이라고 그런 사촌이 좋겠어? 그런 황태자는 얼른 폐위나 되어버리고 차라리… 잠, 잠깐, 바쿠고 왜 갑자기, 힉!?!”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손이 가장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동기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힘이 떠밀린 녀석의 몸이 건너편 집무책상에 부딪치며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함께 떠들고 있던 녀석들이 큰 고기를 만난 피라미 떼처럼 우 흩어졌다. 미안, 실언이었어, 실언! 빌 듯이 벌벌 떠는 녀석의 멱살을 다시 낚으며 그대로 벽에 밀어 붙였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얼굴을 노려보던 선홍색 눈이 불길처럼 사나웠다. 바쿠고가 하, 입매 끝을 비틀었다. 뒤지고 싶나.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해보지 그래. 왜, 씨발. 그 지엄한 황태자의 사촌께서 들어주시겠다는데.”
“실언… 실언이었어! 허니 이 손은 놓고 얘기하자, 응? 내조에서 정위들끼리 싸움이라니, 황제께서 아시면…!”
“어, 고해. 해보라고. 허면 내가 거들어주지. 이 새끼들이 황태자가 음인이라며 지랄들을 했다고, 씨발. 당신의 아드님을 폐위 시켜야 존나 속이 풀리겠다고. 내가 못할 것 같지.”
“곤, 곤란한 건 네 놈도 마찬가지잖아. 공주의 아들이 내조에서 싸움을 했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나 다른 사대부들이 가만 있지 않을…”
“그거 존나 궁금하네. 해보든가. 대신 누구 목이 떨어지나 한 번 보자고. 말마따나 나는 공주의 아들이라, 씨발, 가진 게 잘난 환경과 권력 뿐이라서. 나는 내 눈에 거슬리는 건 어떻게든 죽여 없애야 성에 차는 미친 새끼거든.”
“……”
“한 번만 더 입을 놀려봐라. 그러고도 네 놈 목이 온전히 붙어 있나, 없나.”

목줄기를 부러뜨릴 듯 움켜잡고 있던 멱살이 힘을 풀었다. 동시에 다리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은 녀석이 한참동안 몸을 웅크리며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주저주저 눈치를 보던 다른 녀석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속이 시원했다. 진작부터 저것들의 주둥이를 닥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노골적으로 입매를 밀면서 바쿠고가 책상 앞에 펼쳐진 두루마리 앞에 앉았다. 그때 내정부로 통하던 입구가 벌컥 열리며 백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얼굴이 보이자 각자 흩어져 앉아 있던 정위들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내정부를 포함하여 그는 이곳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자였다. 궁에서도 그보다 품계가 높은 이는 아마도 황제와 황태자 정도일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서 어른!”

조금 전까지 바쿠고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던 정위들이 유난히 더 큰 목소리로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상서는 손 인사로 새카맣게 어린 신입 정위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냈다. 집기가 떨어진 책상을 잠시 보기는 했으나 상서는 이 소란이 다 무엇이냐며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 상서의 눈길이 바쿠고를 향했다. 가만히 턱짓을 하며 상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쿠고군.

“사흘간 밀린 업무를 하느라 오늘도 고생이 많을 테지만 잠시 손을 쉬어야겠군.”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는 다른 정위들의 시선을 무시하곧 선홍색 눈이 상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낮게 묻는 투에 상서는 담담히 대답했다.

“황제폐하의 명이시네.”
“……”
“우리 내조에도 황금을 내리시었지. 사흘간 애써준 답례를 직접 전해 듣고 싶다 하시니 자네는 어서 채비하여 태휘전으로 들게.”

그 짧은 몇 마디에 온갖 감정과 물음들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스르륵 가라앉았다.허나 따져 묻지는 않았다. 이 나라에서 황제의 말은 법도이자 법이며 순리이고 섭리였다. 황가의 일족이라 하여 예외는 없었다. 연유를 따져 묻는 대신 바쿠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하늘에 해가 훤히 떠 있었다. 오늘도 날이 좋았다.










미리 고지가 있었던 모양인지 태휘전 앞에는 이미 황제의 곁을 지키는 내관이 나와 바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관은 목례로 인사하는 바쿠고를 잠자코 사저로 안내했다.
태휘전도, 황제가 기거하는 사저도 유난히 창이 넓고 크다. 창에서 쏟아진 햇살들이 기둥과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산란散亂하는 통에 괴로울만큼 눈이 부셨다. 해가 떠 있을 적이면 특히나 그랬다. 때문인지 걸을 때마다 태양 속을 거니는 듯 했다. 선홍색 눈을 울컥 일그러뜨리며 바쿠고는 내관을 따라 너른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어쩐지 자꾸 입꼬리가 비틀렸다. 같은 궁에 있으면서도 이곳과 확연히 다른, 작고 초라한 곳을 알고 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 황태자는 볕이 들지 않는 별궁에서 평생을 살았다. 친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보러 별궁에 가지 않았다.

살아온 평생을 그렇게 컸으니 무려 18년이다. 친아들인 미도리야보다도 오히려 바쿠고가 이 길을 더 자주 걸어보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쌍둥이 오빠인 이 나라 황제는 바쿠고에게는 숙부였다. 오누이인 어머니처럼 이 궁에서 태어난 것도, 자주 이 궁에 와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에 두서너 번은 직접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을 때에도 황제가 바쿠고를 직접 치하하고 관을 씌워주었다. 황제는 바라는 자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그 자리에서 바쿠고는 내조로 가고 싶노라 청을 올렸었다.
허니 치하를 받기 위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어려울 자리도, 불편할 자리도 아니었다. 조카로서가 아니라 가신으로서의 소임을 다해 오르는 것이니 그저 기쁜 마음으로 걸으면 될 일이다. 허나 바쿠고는 일그러진 눈살을 좀처럼 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단지 눈부시게 산란하는 햇살 탓만이 아님을 바쿠고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제가 간밤에 발정이 난 당신의 아들을 품었노라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 몸을 열고 탐하여 기어이 그 안을 꿰뚫어 적셔 놓았노라고.

떠도는 소문처럼 그믐의 기이한 발정은 아마 끝났을 것이다. 내정부의 다른 정위들이 입방을 찧기 전부터 바쿠고는 진작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혼절하며 사방에 둑이 터진 듯 쏟아지던 연꽃의 향내도 사라졌다. 급히 달아오른 몸은 엄동설한의 겨울바람에 그만큼 빠른 속도로 차가워졌다. 바쿠고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대로 벌거벗은 미도리야의 몸을 감싸서 안아 들고는 곧장 별채로 향했다.
별채의 복도를 지나 엉망으로 흩어져 있던 침상에 내려놓을 때까지 미도리야는 잠꼬대를 하는 법도 없이 바쿠고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 목까지 이불을 당겨 덮어주고도 바쿠고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볼 안쪽을 힘껏 씹고 돌아서선 처음에 들어왔던 쪽문으로 나설 때까지 바쿠고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축시丑時였다. 허나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와 혼절하듯 눈을 감을 때까지 바쿠고는 오래도록 누운 자리에서 뒤척거리며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바쿠고가 내실 앞에 멈춰선 내관의 등 뒤에서 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젯밤, 분명히 너의 가장 깊은 틈을 열었었다.

양인과 음인이 교접을 한다 하여 모두가 다 짝인 것은 아니다. 이는 수태와는 다른 것이다. 하늘이 정해준 정인과 그저 수태가 가능한 상대는 엄연히 다르다. 해와 달을 그리워하고 달이 해를 좇아가듯 양인과 음인은 평생동안 자신의 짝을 찾아 체향을 피우고 발정을 한다. 그리고 음인은 오로지 자신의 짝에게만 음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밀한 틈을 연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 아는 것도, 배워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인이면, 또한 음인이면 자연히 알게 된다. 그리 생각하면 가슴이 메슥거릴만큼 쿵쾅거렸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멍청아, 네가 내 달이라고. 내 짝이라고.

하필 우리가 사촌지간으로 태어난 것도, 하고 많은 사대부의 자제 중에 내가 너의 소꿉동무가 되었던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을 터다. 달은 자신의 해를 부르며, 해는 그 부름에 따라 달을 좇아간다. 스승인 야기는 늘상 그렇게 말했었다. 인력 같은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했다. 마음에 박혀 있는 해와 달의 운명이 자신의 짝에게 떠미는 것이라 했었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매를 씩 밀었다. 접을 하던 중에 혼절을 하였으니 음혈의 가장 깊은 안쪽이 열리는 감각은 눈치 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뭐, 서두를 것은 없다. 천천히 알려줘도 될 일이지. 바쿠고는 생각을 그렇게만 매듭지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결착을 지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황제폐하. 열린 문 안쪽으로 깊게 고개를 숙이며 내관이 고하였다. 부름을 받아 내조의 정위, 바쿠고 카츠키가 들었사옵니다. 문 안쪽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단정한 투로 말을 받았다. 어쩐지 사흘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바쿠고는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했다.

“대례는 필요 없으니 편히 들라 해라.”

들은대로 하시게. 소리를 죽여 소근 거린 내관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앞을 지나 바쿠고는 말대로 복잡한 대례 없이 성큼성큼 내실 안쪽으로 걸었다.
황제가 사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방이라던 내실은 열 걸음을 걸어도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만큼 크고 웅장했다. 붉은 휘장이 걷혀진 기둥을 두 개 정도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장기판 앞에 앉아 있던 색이 밝은 머리칼이 보였다. 바쿠고가 가볍게 목례를 했고, 홀로 돌을 내려놓던 황제가 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들었다. 선홍색 눈이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저 붉은 홍채야말로 대대로 양인만을 낳아왔다던 이 나라 황가의 증표이며 증거였다. 바쿠고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 바로 그 힘이었다.

“춘절春節 이후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카츠키. 그때가 아마 네 생일이었던가.”
“하사해주신 연적은 지금도 유용히 쓰고 있습니다, 황제폐하.”
“그 연적의 모양이 무엇이었지. 연꽃이었던가… 네 엄마도 참 연꽃을 좋아했었다. 하여 미츠키가 궁에 있을 적엔 생일 때마다 연못을 연꽃으로 가득 채우느라 애를 먹었지. 그래, 내 누이는 어찌 지내느냐.”
“염려 덕에 언제나 그렇듯 무탈하십니다.”
“여상如常한 것이 늘 가장 좋은 것이다. 자, 앉거라. 내 조카와 오랜만에 장기나 한 판 둬볼까.”

쌍둥이 누이와 꼭 닮은 얼굴이 자애롭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손짓을 따라 바쿠고가 의자를 당기고 황제와 마주 앉았다. 언제 보아도 아들과는 닮지 않았다. 오히려 조카인 자신이 더욱 아들 같노라고, 함께 있으면 부자지간과 진배없이 보인다며 떠들어대는 말들에 대해선 바쿠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따금 그 예리한 선홍색 눈에 걸리는 웃음의 결이나 단정한 목소리의 투는 미도리야와 꼭 같았다. 더불어 구체적으로 딱 짚을 수는 없었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나 휘광 같은 것이 때때로 아들인 미도리야를 떠올리게 했다. 세상이 아무리 닮지 않은 부자라 떠들어대도 바쿠고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미도리야를 그 차디찬 별궁에 가두고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녀석의 친아버지다. 기실 그가 얼마나 냉혹하게 지금의 자리에 올랐는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사흘간 네가 고생이 많았다 들었는데.”

황제가 붉은 색의 첫 돌을 움직이며 넌지시 말했다. 주어가 없어도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인지는 빤했다. 잠시 멈칫한 바쿠고가 곧 평정을 되찾고 푸른 돌을 대각선 앞으로 밀며 말을 받았다. 역시 빤하고 건조한 말이었다. 문 앞에서 느꼈던 기분은 이미 연못 안에 던져진 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다. 이 나라의 가신으로 당연한 소임을 한 것뿐입니다.”
“소임이라 하여도 소꿉친구와 접을 하는 것이 마냥 편하고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사촌을 떠나 너희는 양인과 음인이 아니더냐.”
“…양인과 음인이라 하여 모두 수태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 사람이 자신의 짝임을 알면서도 음인을 낳았다 하여 얼굴조차 보지 않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돌을 집던 황제의 손이 장기판 위에서 우뚝 멈췄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실언을 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져 말이 그만 헛나왔다. 하지만 주워 담을 생각은 없었다. 잠시 말을 삼킨 황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을 본 듯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대단하구나, 카츠키. 내 어릴 적부터 네가 당돌한 줄은 알았지만 내게 이 얘기를 이리 노골적으로 꺼낼 것이라곤 짐작도 못하였다.”
“이젠 저도 자격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폐하. 말씀하신 바처럼 쉽지 않은 소임으로 사촌과 뒤엉켜 사흘을 보냈으니 이만하면 저도 폐하의 의중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내 아들과 어울려 살을 섞더니 그새 몸정이라도 붙은 모양이구나. 아니면 음인의 체향에 홀려 눈에 뵈는 것이 없거나.”
“글쎄요, 저는 적어도 무책임한 심성은 되지 못해서요. 제가 많이 부족하여 용무가 끝났다고 살을 섞은 상대를 버리고 돌아설만큼 무신경한 성정을 미처 가지지 못한 듯 합니다, 폐하.”

이것은 미친 짓이다. 어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멱살을 움켜잡고 등을 후려쳐서라도 제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허나 참을 수가 없었다. 부아가 치밀어 그랬다. 속이 들끓어 그랬었다. 아니, 어머니가 아니라 네가 있었어도 나를 말렸겠지. 그러지 말아달라고, 그런 소리 말라며 너는 이 순간에도 너를 버린 아버지를 위해 곧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만류했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별궁에 들러 네 멱살을 잡고 데려올 것을 그랬다. 울며 난리를 쳐도 어떻게든 끌고 와 앉힐 것을 그랬다고, 씨발. 금구령 따위 엿이나 먹어라. 진심으로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주 앉은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득하리만큼 예리해진 선홍색 눈이 저와 꼭 같은 붉은 홍채를 차갑게 뚫어 보았다. 그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아 그때는 바쿠고도 뼈저리게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질이, 자신의 피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허면 네가 갖고 싶은 것도 정해져 있겠군.”

황제가 입매 끝을 차갑게 비틀었다.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지. 손 안에 쥐었던 돌을 판 위에 내려놓으며 황제가 의자의 등받이로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무슨 생각인지, 무슨 의중인지 이번에도 바쿠고는 그 속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하기야, 자신의 유일한 혈육에게조차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던 자다. 볼 안쪽을 버릇처럼 씹은 바쿠고가 다물었던 입술을 툭 열었다. 이번에도 별로 겸손한 투는 아니었었다.

“달라고 청하면 주실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폐하.”
“이 나라 황제에게 이루지 못할 일은 없지. 자네의 말마따나 무책임한 사내 아닌가.”
“허면요. 제가 감히 태자전하를 달라 청하여도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이즈쿠를 제가, 제 반려로 취하기를 원한다 하여도 들어주실 겁니까.”

이번에도 머리로 계산해서 했던 말은 아니었다. 마음이 떠민 것이다. 어쩌면 달의 온도를 이미 알아버린 해의 불길이 입술에 걸린 빗장을 열고 그 말을 쏟아놓았는지도 모른다. 허나 이번에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 아무리 이 핏줄이 이어진 친족이라 하나 상대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조차 버린 이 나라의 황제였다.
지금껏은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를 독대하면서 이즈쿠란 이름조차 바쿠고에겐 금구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나라에서 가장 귀한 사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안하무인으로 살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공주인 엄마의 입장을 배려할 여유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차디찬 궁에 갇힌 너를 이 이상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 나는 참았던 건지. 그런데도 무엇이 자신을 떠밀었을까.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바쿠고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만 또렷이 노려보았다.
황제는 곧장 말이 없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 얼굴은 이번에도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눈앞의 이 당돌한 조카가 괘씸한 건지, 아무리 버려둔 자식이라 하나 감히 황태자를 취하게 해달라는 이 가신을 찢어 죽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대체 무슨 심산인 것인지. 무거운 침묵이 지난 후에야 황제는 답에 앞서 놓여있던 돌을 두 칸 앞으로 전진시켰다. 장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장기판처럼 되돌아오는 황제의 말투 역시 더없이 평온했다. 짐작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우뚝 굳어버린 선홍색 눈앞에서 황제가 가장 커다란 장기말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허나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즈쿠를 폐위하고 네가 내 양자가 되어 보위를 물려받으면 될 일이지.”

황제가 가장 커다란 돌을 반대편 가장 깊은 진영에 내려놓았다. 바쿠고와 꼭 같은 선홍색 홍채가 차갑게 반짝였다.

“허면 네 뜻대로 할 수 있다. 황제가 되어 음인인 탓에 폐위 당한 황태자를 반려로 들이거나, 아니면 궁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첩실로 삼거나. 감히 황태자를 짝으로 취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무릎 써야 하지 않겠느냐.”
“……”
“자, 장군이다. 내가 이겼군.”

황제의 손이 바쿠고의 앞에 놓여있던 푸른 장군을 장기판 바깥으로 가볍게 떠밀었다. 싱겁게 끝났군. 황제의 소회에도 바쿠고는 말문이 막혀 말 한 마디 똑바로 할 수 없었다. 장기판 위에 놓여있던 빈주먹이 천천히 떨렸다. 알 것 같아 그랬다. 이 자가 정녕 왜 자신을 불렀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직접 청하라며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 독대를 하였는지.

“…그 말씀을 전하시려고 이딴 번거로운 자리를 만들어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다. 네 스스로 덫에 걸린 것뿐이지.”
“……”
“며칠 생각할 시간은 주도록 하마. 잘 생각해보도록 해라. 무엇이 너를 위해,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가장 이로울지. 너도 저리 갇힌 이즈쿠를 보는 맘이 마냥 편하지는 않겠지.”
“……”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 다시 나를 찾아오거라.”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는 법도조차 잊어 버렸다. 자리를 떠나는 황제에게 목례를 하거나 절을 하며 예를 취할 정신이 없었다. 우뚝 굳어버린 선홍색 눈이 황제가 떠나버린 빈 자리를 뚫을 듯 노려보았다. 그때도 햇살이 훤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살이 눈이 부셔 바쿠고는 끝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 사이를 힘껏 일그러뜨렸다. 허나 마음의 괴로움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님을 바쿠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등신 새끼. 바쿠고가 입매 끝을 쓰게 비틀었다. 미워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가.

그래도 지금 생각나는 얼굴은 그밖에는 없었다.

















내조의 검은 관복이 별궁으로 향하는 돌길 위에서 급하게 펄럭거렸다.

태휘전을 지키던 초병들은 느닷없이 사저를 박차고 나온 내조의 젊은 정위가 무슨 일이 있어 저리 걸음을 서두르나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상관없었다. 바쿠고가 가지런히 정돈된 돌길 위를 서슴없이 걸어 나갔다. 머리 위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바쿠고가 모퉁이를 크게 돌며 동쪽으로 향하는 좁은 문을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넘었다. 이제 이대로 곧장 걸어가면 별궁이었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걸음이 멋대로 이 편으로 움직였었다. 지난밤과 같았다. 가슴을 불살라버린 무언가가 달그림자에 삼켜진 해처럼 바쿠고를 별궁 쪽으로 떠밀었다. 향내에 끌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해가 훤한 낮이었고, 발정도 이미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멈출 수는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귀 밑이 소란해서 바쿠고는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귀 밑을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바쿠고가 마지막 남은 걸음을 크게 걸으며 익숙한 담벼락을 타고 돌았다. 담벼락 위로 뻗은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에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거기 있었던 것처럼,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별궁의 초병을 그대로 무시하며 바쿠고는 이윽고 닫혀있던 별궁의 쪽문을 멋대로 열어젖혔다. 그리고 우뚝 굳었다. 이조차도 지난밤과 똑같았었다.

“…캇쨩?”

얼어붙은 연못을 내려다보던 숲색 눈이 이 편을 돌아보았다. 전날처럼 얇디얇은 야장의 차림은 아니었다. 추위를 대비해 솜을 덧댄 초록빛 용포는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고, 밤의 달빛처럼 산발했던 덤불 같은 머리칼은 깔끔히 정돈하여 노란 관을 올려 두었다. 그 모습엔 바쿠고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참 징그럽게도 황태자의 얼굴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선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그런 맘을 먹어본 적도 없는 얼굴이 거기 서서 바쿠고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얼굴이 부슬부슬 웃음을 피웠다. 그 웃음이 기어코 바쿠고를 그 연못으로 떠밀었다. 거부할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기실 처음부터 그랬었다.

“갑갑해서 잠깐 바람을 쐬고 있었어. 근데 캇쨩이 갑자기 올 줄은 몰랐는데 내관들에게 말해서 차라도 준비 시킬,”

우물거리던 어색한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몸과 함께 바쿠고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캇쨩…? 바쿠고의 귀밑에 묻힌 목소리가 당황한 듯 이름을 불렀다. 헌데도 등에 얽힌 팔을 풀 수가 없었다. 풀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으스러뜨려 이 가슴 안에 짓이길 수 있다면. 그리하여 너를 영영 이 품 안에 가둘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엔 분명 연꽃이 피어 있을 것이다. 그럼 멍청아, 너도 울지는 않을 텐데. 가슴에 걸린 설움 때문에 홀로 달빛에 몸을 비틀며 보이지도 않는 해가 그리워 괴로운 일도 없을 텐데.

내 달아. 그 말을 하는 대신 바쿠고는 입술 끝을 힘껏 악물었다 뗐다. 미도리야의 귓가에 바짝 닿아있던 입술이 오래도록 불러온 익숙한 이름을 더듬었다. 데쿠. 그 목소리가 어쩐지 저가 듣기에도 낮고 탁했다. 목에 돌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해 뜨는 거 보러 가자, 멍청아.”
“……”
“동쪽으로.”
“……”
“어디건, 씨발.”

이 궁이 아닌 곳, 네가 해를 볼 수 있는 곳. 너의 해가 뜨는 곳.







(계속)




이번엔 좀 일찍 쓰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도 너무 일찍 써버렸네요 허허… 덕분에 오랜만에 글쓴다고 남았더니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더 힘내서 신나게 쓰고 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피드백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7편도 짬 내서 이챠이챠 들고 오겠습니둥 99999


+ 이 글 속에 등장하는 관직은 중국의 한왕조 및 당송 시절의 실제 관직을 토대로 필요에 따라 섞었습니다. 본래 역사 속에서 내조와 정위는 전혀 다른 부서이지만 필요해서 섞었음2222을 밝혀둡니다. 요새로 치면 민정수석이 제일 가까울듯... 기본적으로는 형법관입니다. 허나 황제 직속 비서실의 역할을 하는 내조에서 일하는 것..

?
  • 꿀떡 2018.02.06 21:33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8.02.06 21:34
    엉엉 황제님 너무 무서워요!!;; 늦게 퇴근하시는 길이 걱정되옵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쉬고 계시길..!! 요새 해를 보았다가 저의 비타민이랍니다 루카님..!
  • ㅌㅎ 2018.02.06 21:41 SECRET

    "비밀글입니다."

  • rio 2018.02.06 21:43 SECRET

    "비밀글입니다."

  • OOP 2018.02.06 22:34 SECRET

    "비밀글입니다."

  • 리미 2018.02.06 22:52 SECRET

    "비밀글입니다."

  • CM 2018.02.08 20:00 SECRET

    "비밀글입니다."

  • JIEEHA 2018.02.26 02:06
    ㅇ..우와..글 정말 잘 쓰시네요..ㅎ
    뭐랄까 이 시대 배경의 말들은 어려워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으나, 정말 재밌는 글이라 멈출 수가 없네요 ㅋㅋㅋ
    설마 캇데쿠를 이런식으로 만들지 누가 알겠습니까 ㅋㅋ 아무튼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ㅎㅎ
  • 하오코 2018.05.25 16:51
    첫댓글이지만 계속 잘보고있습니다ㅠㅠㅜㅠㅠ캇데쿠가 이런식으로도 나올수있다니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완결 히로아카 게시판 이용 전에 읽어주세요 XD 2016.05.24
219 완결 해를 보았다 / 07 10 2018.02.11
218 단편 How long 7 2018.02.08
» 완결 해를 보았다 / 06 9 2018.02.06
216 완결 해를 보았다 / 05 5 2018.02.04
215 연재 캇데쿠_마피아보스x고등학교선생.ssul (02-01) 10 2018.01.30
214 완결 해를 보았다 / 04 4 2018.01.27
213 단편 Kill The Joy 5 2018.01.22
212 단편 키스와 거짓말 4 2018.01.19
211 완결 Who's the X? (9~完) 5 2018.01.14
210 완결 Who's the X? (1~8) 4 2018.01.13
209 단편 헤테로x게이로 캇뎈을 보고 싶어서.short 3 2018.01.09
208 완결 지옥에서 왔습니다 / 中2 6 2018.01.07
207 썰外 옆집 남자가 수상하다.ssul 5 2018.01.03
206 완결 해를 보았다 / 03 2 2018.01.01
205 완결 해를 보았다 / 02 4 2017.12.2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