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주말을 맞아 또 슬그머니 백업

* 사랑 받으면 꽃이 피어나는 세상에서 어느날 붉은 꽃 한 송이 핀 이즈쿠의 이야기

* 캇뎈



BGM / 단비(Sweet Rain) - 사랑이 꽃을 닮아 (Piano)


http://youtu.be/fMQmGVJldNA






카츠키 그리고 이즈쿠에게

루카 씀





이 피었습니다

04 ~ 06






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꽃도 주인 닮냐? 존나 작네.”

너는 자주 몸을 기울이고 내 목 뒤를 들여다 봤다. 네 주변에서 꽃을 피운 사람이 나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린 열여섯 살이었다. 사랑을 받기에는 약간 이른 듯한 나이,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사랑을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던 그 애매한 거미줄에 너와 나는 나비처럼 걸려 있었다. 꽃을 피운 녀석들은 반에도 더러 있었지만 너는 다른 꽃에는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나뿐이었다. 내 꽃뿐이었다. 네가 들여다보는 꽃도, 네가 궁금해하는 꽃도, 그러다 무심결에 재채기를 해버리는 꽃도.
흥미를 잃을만큼 목 언저리를 조물거리다 넌 만족했다 싶으면 그제야 슥 손을 거두고는 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턱을 괴고 노트를 내려보며 넌 내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자주 이런 소리를 했다.

“아무도 보여주지마.”

네가 쥔 연필이 노트 위에서 잎을 갉는 작은 애벌레처럼 사각거렸다.

“재밌으니까.”
“……”
“알겠냐, 등신아. 이것도 비밀로 하라고.”

그 어감에 숨이 막혔다. 가슴이 떨렸다. 네가 또 한 번 등 뒤에서 습관 같은 재채기를 하는 동안 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노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비밀. 그 말을 소리 없이 거듭해 씹어보고 다시 발음해보았다.

비밀,
세상에서 오로지 너랑 나랑 둘이서만 아는.

캇쨩이 등 뒤에서 재채기를 했다. 아, 씨발. 욕을 씹으며 너는 코를 훌쩍 들이켰다. 목 뒤가 무거웠다. 이제 슬슬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한 꽃을 다시 교복 셔츠 안으로 밀어 넣고 나는 필기를 시작했다. 수업 내용은 어쩐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


캇쨩은 내가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 꽃에 망울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캇쨩이 처음으로 내 꽃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 무렵이었다. 일주일 전쯤이었다. 처음으로 실습다운 실습을 했다. 내 상대는 하필이면 캇쨩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내 비밀을 캇쨩에게 말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만약 그날 내가 맞선 상대가 네가 아니었다면, 내 대결 상대가 하필 네가 아니었다면,
너만 아니었다면.

너는 그날 내게 졌다. 달리 말하면 나는 그날 처음으로 캇쨩에게 이겼다. 너는 나와 함께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 있던 양호실 침대를 빠져 나간 후에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당장 멱살을 잡고 때려눕힐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가볍게 빗나갔다. 너는 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할 텐데. 특히나 무시하던 내게 져버렸단 사실을 너는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너 같은 새끼가 나를 이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욕을 해야 했는데.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어, 캇쨩.

「나를… 속였어, 데쿠새끼.」

너는 석양을 등지고 있었고, 그 탓에 나는 네 표정을 차마 읽지 못했다. 내 비밀을 처음으로 올마이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았지만 마음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미안했다. 너를 이겨서가 아니라 너를 속여서 나는 미안했었다. 그래서 언뜻 보인 네 젖은 눈을 나는 모르는 체 했다.
그날 밤은 많이 아팠다. 밤새 열에 시달렸고, 거대하게 자란 내 꽃의 뿌리가 내 혈관을 뚫고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꽃은 꼭 캇쨩의 눈처럼 붉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침대도, 입고 잤던 옷도 흠뻑 젖어 있었다. 목 뒤가 전날과 달리 묵직하고 무거웠다. 낯선 느낌에 나는 손을 뻗어 내 목 뒤를 더듬어 보았었다.

그날 꽃망울이 맺혔다.





*

“야.”

캇쨩이 말했다. 나는 판서 중인 선생님의 분필 끝을 쳐다보며 소리 죽여 대답했다.

“응.”
“그 꽃, 무슨 색이냐?”
“그건… 나도 몰라.”

꽃이 피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꽃의 색을 알 수 없다. 동화책도, 인터넷도, TV도,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었다. 캇쨩이 내 등 옆으로 툭 비져 나와 있던 제 왼손을 꽉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손 안에 퍼진 혈관이 불꽃처럼 붉어졌다 사라졌다. 이론 수업 중에 개성 쓰면 혼날 텐데. 그런 생각을 어물거려보다 나는 말았다. 등 뒤에서 캇쨩이 또 한 번 무심히 혼잣말을 했다. 저녁노을 같은, 붉은 햇님 같은, 그 손 안에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붉었으면 좋겠네.”
“뭐가?”
“네 꽃, 등신아.”
“……”
“진짜로.”

목 뒤에 바짝 다가온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그 숨결이 뜨거워서 나는 그만 흡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좁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보다 네 호흡이 닿았던 자리가 너무 뜨거웠다. 그 바람에 나는 네게 묻지 못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왜 붉은 색인지,

내 꽃인데
너는 왜 자꾸 그렇게 관심을 주는지.




*

사랑하고 아껴주세요. 전보다 더요. 그 사람에게 무정하게 굴었다면 이제는 그러지 말아요. 자주 웃어주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상냥해지는 거예요. 당신이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그 사람을 아껴주세요. 대화를 많이 나눠요. 실없는 소리라도 좋아요. 그럼 언젠가 볼 수 있을 거랍니다.

당신이 보낸 그 씨앗이 꽃을 피우는 순간,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몸 위에서
당신의 눈동자를 꼭 닮은 예쁜 꽃이 피어나는 순간,
그 찬란한 순간.
그 아름답고 눈부신 순간.





*

에취. 캇쨩이 또 한 번 재채기를 했다.






05



네가 자꾸 나를 따라왔다. 해처럼. 네가 자꾸 마음을 흔들었다. 봄처럼.

나는 자주 너와 마주쳤다. 학교에 갈 때, 학교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 같은 동네에서 날 때부터 자라왔지만 중학교 때 우리는 단 한 번도 함께 같은 길을 걸어보지 않았었다. 우린 늘 따로 걸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를 따르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그리고 나는 혼자서.
검은 학란 대신 유에이의 블레이저를 입은 너는 이제 수시로 길에 보였다. 왜? 나는 결국 참다못해 네게 물었다. 너는 대답에 앞서 괜히 길가에 놓여있던 돌 하나를 툭 걷어찼다. 차올린 돌멩이는 놀이터의 낮은 블록을 넘어 모래언덕 위로 톡 떨어졌다. 우리 집과 너의 집 사이에 있던, 우리가 한때는 자주 어울려 놀았었던 그 오랜 놀이터에서 너는 또 한 번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괜히 머쓱한 눈길을 돌리며 불퉁거렸다.

“너 따라가는 거 아니거든, 씨발아.”

누가 데쿠 새끼를. 석양을 등진 네가 그만큼 붉은 눈을 울컥 찌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나는 이 만남도 그냥 우연일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그 편이 우리에겐 자연스러웠다. 네가 요즘 부쩍 눈에 자주 보이는 것도, 네가 자꾸 재채기를 하는 것도, 네가 자꾸 내 꽃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야, 목 좀 보자.”

우연이야. 나는 생각을 씹으면서 주춤주춤 네 앞에서 등을 돌리고 셔츠의 뒷깃을 가만히 끌어내렸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위로 비죽비죽 솟은 네 머리칼의 그림자가 함께 겹쳐졌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어보려다 나는 그만 웃지 못하고 흡, 숨을 삼켰다. 또 네 손 끝이 내 목을 매만져 온 탓이었다.
많이 자랐네, 멍청한 꽃. 네가 목 뒤에서 픽 웃었다. 그 호흡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아서 나는 자꾸 무릎이 떨렸다. 어정쩡하게 기울어진 목 뒤가 자꾸만 덴 것처럼 따끔거렸다. 꽃은 이제 셔츠 깃으로 가리기엔 벅찰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캇쨩의 말마따나 꽃이 부쩍 자라있던 탓이었다. 어느 날 도둑처럼 싹을 틔운지 꼭 한 달이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너 혹시 … 아니지, 멍청아.”

캇쨩이 말했다.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낮고 작아서 나는 가운뎃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아니야? 나는 물었다. 너는 말했다.

“연애.”

다시, 너는 물었다.

“혹시… 연애하는 거 아니냐고, 데쿠 새끼.”

흐, 웃음이 났다. 그런 거 안 해. 젖혔던 셔츠 깃을 꾸물꾸물 끌어 올리면서 나는 굽혔던 허리를 은근슬쩍 다시 폈다. 계속 내 꽃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괜히 쑥스러워 그랬었다. 너는 내가 꽃을 다시 옷깃 속으로 밀어 넣고 몸을 돌리는 걸 그냥 내버려뒀다. 아직 덜 봤다든가, 누가 멋대로 가리라고 그랬냐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도 어쩐지 눈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목 뒷자리가 맥박처럼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네가 만진 자리들이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캇쨩은…”

귀 밑이 시끄러워서 입술이 멋대로 열렸다. 잠깐 숨을 들이켰다 내뱉으며 나는 남은 말을 마저 밀었다. 궁금했었다. 계속 알고 싶었다.

“왜 자꾸 내 꽃을 보고 싶어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는데…”
“뭐가, 씨발아. 보고 싶어 한 적 없어.”
“……”
“보인 거지.”

나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 했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물었다. 너는 꿈벅거리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대답은 곧바로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또 한 번 같은 자리가 뜨거워졌다. 꽃이 자란 자리, 망울이 맺힌 자리, 누군가 나를 사랑한 자리, 네가 만진 그 자리. 그 바람에 나는 다시 묻지 못했다.
넌 왜 요즘 들어 자꾸 나를 그렇게 보는지, 난 왜 자꾸 너를 보면 마음이 소란해지는 건지. 귀밑이 자꾸만 쿵쾅거리는 건지.

“얼른 펴버려라, 멍청한 꽃. 안 붉기만 해봐라. 존나 태워버릴 거니까.”
“…또 그래, 캇쨩은.”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웃었다. 너는 대꾸 없이 눈길만 돌려버렸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너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오도카니 서있던 내 옆을 스쳐갈 때 너는 잠깐 멈췄다. 네 손이 무심히 툭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나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 네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내 꺼야.”

너는 입술을 힘껏 씹었다 놓으면서 거듭 말했다.

“내 꺼라고.”

뭐가? 나는 물었다. 너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머리 위로 석양이 붉었다. 그때도 목 뒤가 아팠었다. 꽃이 핀 자리였다. 불길이 머물렀다 떠난 자리 같았다. 태양이 내려온 흔적 같았었다.

네가 만진 그 자리였다.





*


― 많이 아플 거예요.


동화책은 말했다.

― 그 꽃이 피어날 때 말이에요. 그 고운 잎을 여는 때가 찾아오면요. 많이 아파요. 정말 눈물이 쏙 날만큼 힘들 거예요. 차라리 그 꽃을 꺾고 싶을만큼, 차라리 그 꽃을 뽑아 버리고 싶어질만큼.


굳이 동화책이 아니더라도 개화할 때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인터넷에서도, TV에서도 말했다. 누군가는 온몸의 혈관을 통째로 파내는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는 온몸의 피부가 도려지는 것 같다고 했다. 열이 나고 어지럽고 메스껍다. 꽃이 핀 자리를 따라 혈관들은 팽창하고, 가슴이 수시로 쿵쾅쿵쾅 뛰어서 자다가도 이불을 박차고 깨어나기 일쑤라고 말했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기절하거나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가버리는 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겁을 주는 말들보다는 도감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더 무서웠다. 쇄골에 핀 꽃 밑으로 비대해진 붉은 혈관이 마치 잎맥처럼 퍼져 있던, 한 소년의 사진이었다.
헉 숨을 들이쉬고 몰아쉬며 몸을 웅크리면서도 나는 그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그보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뛰었다. 목 뒤가 불길처럼 달아올랐다.

“엄마…”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더니 내 꼴이 딱 그랬었다. 목 뒤가 너무 뜨겁고 아픈데도 나는 어두운 침대에서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폈다를 반복하는 게 고작이었다. 똑바로 누울 정신도 없었다. 꽃이 핀 자리가 뜨거워서 자다 깬 적은 많았었지만 오늘처럼 아픈 건 처음이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젖은 입술을 꽉 씹으면서 나는 끙끙거렸다.

“아파…”

꽃망울은 이제 전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아직 꽃잎을 열지는 않았다. 책에서는 꽃을 여는 시기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이제 시작일 텐데. 견뎌야 하는데.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꽃은 피지 못하고 망울 째로 시들어 버린다. 나는 이 꽃이 보고 싶었다. 내 생에 처음으로 피어난 이 꽃의 색이 궁금했다. 더불어 알고 싶었다. 누가 내게 꽃을 피웠는지, 누가 내게 이 씨앗을 보냈는지, 이 꽃은 누구의 눈동자를 닮았을지.
누굴까. 생각하니 흐 웃음이 났다. 하필 그때 그 이름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캇쨩…”

열이 너무 높아서 사리분별이 잘 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멍하고 뜨거운 몸을 구부리고 펴고, 일어나며 눕고 버둥거리다 시트에 엉키며 우당탕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팠다. 아픈데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뭘 하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나는 몰랐다. 다 꿈같았다. 다 꿈같아서 나는 엉금엉금 기었다. 충전기에 꽂혀있던 핸드폰이 저만치에서 푸르게 끔벅거렸다.

너는 내 꽃이 붉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었어.

나는 아직 내 꽃의 색을 모른다. 몰라서, 나는 열이 오른 손끝을 더듬어 핸드폰의 잠금을 열고 차가운 액정 위를 두드렸다. 몇 개의 글자들을 지나 내 눈색을 닮은 전화기 모양을 더듬었을 때 액정 안쪽에서 먼 신호음이 들렸다. 신호음은 세 번 정도를 울린 후에 끊어졌다. 전화 너머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열 때문에 똑바로 보이지도 않는 액정의 <통화중> 아이콘을 향해 나는 흐, 웃었다. 이젠 봄인데도 액정 위로 뜨겁게 김이 서렸다.

“아파…”

목 뒤가 뜨거웠다. 귀밑이 시끄러웠다. 마음이 소란했었다.

“나, 지금… 너무 아파. 꽃이 아파. 진짜… 너무 아파.”
[……]
“진짜… 흐, 아픈데… 너무 아픈데…”
[……]
“말할 데가 없,”
[등신.]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가 툭,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기다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마음이 소란해져요. 가슴이 뛰고 열이 올라요. 가끔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요. 달게 잠을 자다가도 깨버리고 한참을 빈 어둠 속에서 뒤척거리죠. 숨이 막힐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괴롭고 아픈 일이랍니다. 그리고 처음일수록 더 아프죠. 그래요, 첫 이가 빠질 때처럼요.




*

어둠 속에서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릴 적에는 자주 이랬었는데. 나는 잠결에 그런 생각이 나서 흐 웃었다. 창을 넘어 다가온 손이 가만히 내 이마를 짚어주었다. 꿈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받쳐준 단단한 손끝이 내 머리 밑으로 베개를 놓아주었다. 어릴 때처럼.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또 한 번 재채기를 했을 때, 나는 그만 흐 울어버렸다. 왜 이 밤에 와준 거야? 그렇게 나는 묻지 못 했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거지? 그렇게도 물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끝내 묻지 못한 말을 가만히 혀 밑으로 삼켜 넣었다. 흐린 시야 너머에서 붉은 눈이 꿈처럼 웃었다.

손 더럽게 많이 가네, 등신 새끼.

“잠이나 자라, 멍청아.”

내 꽃이 붉었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

그래요, 그게 사랑이랍니다.






06


어떤 기억은 달게 자고 일어나면 안개처럼 흐려져 버린다. 군데군데가 잘려나간 필름 같았다. 그런 기억들을 세상은 그렇게 말했다. 꿈.
아침에 눈을 뜰 때는 전날만큼 목 뒤가 아프지 않았다.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을 꾸었던 것도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꿈 내용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창에 걸린 햇빛이 눈부셔서 나는 기억을 포기하고 졸린 눈을 크게 문질렀다. 빼꼼 열린 창턱에 작은 올마이트 피규어가 산타처럼 서있었다. 역 앞 가챠샵에 새로 들여온 기계 안에 이것과 똑같은 피규어가 들어 있었다.

“이건… 아직 못 뽑았는데.”

꿈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누군가와 전화를 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나서 핸드폰도 열어보았지만 착신창도 발신창도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올마이트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창턱 앞에 올려놓고 열려있던 창을 닫았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이제 꽃은 옷깃 안에 몰래 숨겨 넣기엔 너무 자라 버렸다. 어제보다 무거웠고, 어제보다 키가 컸다. 새로 돋은 잎이 어제보다 더 넓었던 것처럼 단단히 닫혀있던 망울은 이제 금세라도 꽃을 터뜨릴 것처럼 헐겁게 벌어져 있었다.
꽃의 색은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옷깃 속에 구겨 넣으려고 안간힘을 써보다 나는 그냥 포기하고 학교에 갔다. 자칫 줄기가 부러질까봐 겁이 났던 탓이었다.

“데쿠군도 꽃이 있었구나?”

목 뒤가 어색해서 쭈뼛쭈뼛 교실문을 넘어갔다. 우라라카가 가장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삽시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갑자기 우르르 몰리는 관심이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나는 등을 복도 쪽으로 돌리며 주춤 물러났다. 질문들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언제 생겼어? 누구야? 무슨 색이야?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여자 친구라도 있었던 거야? 나는 어느 것 하나 똑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거리는 나를 보며 우라라카가 활짝 웃었다.

“봄이구나, 데쿠군.”
“……”
“망울을 보니 이제 곧 피겠는걸. 목 뒤에 핀 꽃이라니 예쁘겠다.”

응. 나는 쑥스러워서 볼을 긁적이며 그냥 웃었다. 녀석들은 꽃이 신기한 듯 바짝 붙어 들여다봤다. 엄청 잘 자랐어! 카미나리가 눈을 크게 감탄했고, 곁에 서있던 키리시마와 이이다의 고개가 내 목 뒤로 기울었다. 이런 관심은 아직도 어색하다. 왠지 부끄러워서 목 뒤가 긴장처럼 바짝 굳어 있을 때 교실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선홍색 눈이 이쪽을 사납게 노려봤다. 캇쨩이었다.

“아, 존나 시끄러워.”

캇쨩이 제 앞을 막고 있던 키리시마의 엉덩이를 퍽 걷어찼다. 키리시마가 휘청거렸고, 그 바람에 내 곁에 모여서 꽃을 구경하던 녀석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치만 신기하잖아! 키리시마가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지만 캇쨩은 대꾸가 없었다.

“그깟 꽃이 뭐 별 거라고, 씨발.”

꽉 이를 악문 목소리가 낮게 씨근거렸다. 오늘 기분 되게 별론가보다. 카미나리가 내 뒤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취, 아, 썅.

캇쨩이 또 재채기를 했다. 목 뒤의 꽃잎들이 얕게 떨렸다.









*

나는 계속 아팠다. 잠을 설치는 날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 꽃이 피어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요. 누군가는 새싹이 돋아나고 일주일 후면 꽃을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두어 달이 흘러가도 꽃을 볼 수 없기도 해요. 꽃이 언제 피어나는지에 대해선 의사 선생님도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랍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답니다.
처음은 어려워요. 그리고 길지요. 두 번 째는 그보다는 더 쉽고 기간도 짧답니다.


봄이 저물었고 교복 셔츠가 짧아지면서 세상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연두빛을 띠던 꽃의 줄기도 이제 한껏 무르익었다. 나는 처음으로 잠을 설쳤던 날부터 매일 관찰일기를 썼다. 봄날 도둑처럼 돋아났던 새싹의 잎은 이제 내 손바닥 절반만한 잎사귀 3장으로 늘었다. 잎눈 틈에서 자란 가늘고 연한 가지가 가끔 목덜미를 간지럽혀서 나는 자주 어깨를 흠칫 떨었다.

― 첫 꽃은 두 번째 꽃보다 아파요. 그리고 길지요. 언제 피어나는지도 알 수 없어요. 첫 번째 꽃은 여름처럼 변덕스럽고, 사춘기처럼 예측할 수가 없답니다. 오래 걸리는만큼 더 정성스럽게 자라요. 그리고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요. 꽃은 모두 아름답지만 그 어떤 꽃도 내 몸에서 첫 번째로 피어나는 꽃만큼 향기롭지는 않아요. 그만큼 아프거나 괴롭지도 않은 것처럼요.

꽃은 퍽 무거웠지만 낮동안엔 아프지 않았다. 아마 밤이 되어야만 뿌리를 내리는 모양인지 통증은 언제나 해가 저문 후에야 시작되고는 했다. 매일 아픈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일상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통증이 닥치면 눈물이 쏙 빠질만큼 아팠다. 목 뒤가 불에 덴 것처럼 아픈 게 늘 신호였다.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나는 저녁을 먹고는 방에서 운동을 좀 해야겠다며 일찍부터 방문을 닫았다. 꽃이 구겨질까 베개에 어설프게 엎드려 누운 채로 티셔츠를 식은땀으로 흠뻑 적시면서 나는 밤이 저물도록 뒤척거리며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늘 기억나지 않았다. 귓가에서 재채기를 하던 소리, 눈앞에서 점멸하던 붉은 불꽃만 희미하게 떠오르고는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은 늘 침대 옆에 떨어져 있었다. 창턱에 새로이 놓인 올마이트 피규어처럼.

그리고 올마이트 피규어가 딱 열 개가 되던 날,
꽃이 피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내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울을 보고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기분이 그랬다. 이제 내 견갑골 위쪽까지 깊게 뿌리를 박아 넣은 자리들이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그대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뛰었다.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란히 놓여있던 10개의 올마이트 피규어들이 내 몸에 부딪쳐 와르르 쏟아질 뻔 했었다.

“아.”

거울에 목 뒤를 비춰보고 나는 그대로 오똑 굳었다. 꽃은 이제 막 망울을 살짝 열었을 뿐이지만 지금껏 몰랐던 꽃잎의 색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색을 보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가장 먼저 느꼈다. 숨이 막혔고 가슴이 뛰었다. 그보다는 말문이 막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흡 숨을 들이켰다.

꽃이 붉었다.
나는 이 꽃과 꼭 같은 눈동자색을 가진 소년을 알고 있었다.







*

그래요,
그가 당신의 첫사랑이니까요.





(계속)


여전히 재록본 배송 준비로 정신 없는 가운데 부지런히 쓰는 건 이것 뿐이네요 허허허허ㅠ... 쉬엄쉬엄 가고 있습니다u///u 글은 모두 https://twitter.com/ruka_tea/status/827989731002638336에서

?
  • 2017.02.18 20:20 SECRET

    "비밀글입니다."

  • JeNie 2017.02.18 20:20 SECRET

    "비밀글입니다."

  • 선도 2017.02.19 23:51
    엄마야~~~!!!♡♡♡ㅠㅁㅠ
    꽃이 피었어요!!!너무 좋아요!!♡♡
  • 잠옵네다ㅡㅡ 달군 2017.02.22 02:36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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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6 4 2017.03.26
118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5 8 2017.03.22
117 단편 Wolf Trapper 3 2017.03.20
116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下 13 2017.03.19
115 단편 Salon de Ruelle 12 2017.03.14
114 단편 거짓말쟁이의 역설 3 2017.03.12
113 단편 역린의 서 / 여는 글 2 2017.03.08
112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中 6 2017.03.05
111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7~09) 16 2017.03.04
110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上 6 2017.02.28
109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4 8 2017.02.25
»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4~06) 4 2017.02.18
107 단편 오해와 착시 6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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