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런 캇뎈이 보고 싶어서(mm
* 어느 날, 우연히 길을 잃은 바쿠고가 한 남자와 원나잇 하게 되는 이야기
* 가벼운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BGM / Bon Iver & St. Vincent - Roslyn

http://youtu.be/-LKbYhEwUoE






그 카페, 오래 전부터 3번가 길모퉁이에 있었지요. 당신은 번화한 3번가를 자주 지나다녔을 테지만 그런 카페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을 거예요. 흔히들 그렇답니다. 그곳은 마치 달맞이꽃과도 같아요. 깊은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후에야 겨우 간판의 붉은 불빛을 겨우 내비쳐줄 뿐이죠. 그래도 찾으려고 맘을 먹은 자들에겐 보이지 않는답니다. 카페는 오로지 길을 잃은 이들을 위한 곳이니까요.

길을 잃은 사람, 기댈 곳을 잃은 사람, 갈피를 잃은 사람, 사람을 잃은 사람, 사랑을 잃은 사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잃어버린 사람.

해가 저물면 3번가로 찾아오세요.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더욱 좋아요. 길을 잃어요, 당신.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두 잃어요. 어깨가 축축이 젖을만큼 헤매다보면 길은 당신을 이곳으로 끌어주겠죠. 저 멀리 붉은 네온의 불빛이 보이면 그 빛을 따라가요. 녹슨 철문을 밀고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거기가 바로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곳이랍니다.
속여요. 잊어도 좋아요. 약속해요, 나는 영원히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사랑스러운 당신, 이곳의 이름은





Salon de Ruelle

@ruka_tea







바쿠고가 그 카페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일부러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길을 잃었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취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검은 정장이, 목을 갑갑하게 조인 넥타이가, 대학 졸업 이후로 오랜만에 꺼내 신은 옥스퍼드 슈즈가 낯설고 불편했던 탓인지도 몰랐다. 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동창들의 말을 거절하고 홀로 절에서 내려와 바쿠고는 무작정 가장 먼저 눈에 보인 주점부터 찾아 들어갔다.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는 모른다.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다. 그보다 바쿠고는 종일 답답한 제 가슴이 더욱 짜증이 났다.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체했을 리도 없는데 명치는 돌이라도 걸린 것처럼 갑갑했었다. 씻으면 내려갈까. 마시면 괜찮을까. 생각에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연거푸 잔을 들이켰지만 현기증이 잠깐 날 뿐 그 이상은 취할 수도 없었다.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누군가 이성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힘껏 붙잡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래도 잊고 싶었다. 괴로워서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었다.

거스름돈도 없이 지폐다발을 바텐더에게 던지듯 내밀고 거리로 나섰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어둠은 안개 같은 부슬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바쿠고는 그대로 잠시 걸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늘은 자꾸 걷고 싶었다. 그때가 몇 시였는지는 잘 모른다. 핸드폰을 술집에 두고 온 모양인지 검은 정장의 안쪽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부쩍 가벼워진 길 위를 흔들리며 정처 없이 걸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길을 걷다 문득 걸음이 멈췄다. 아무도 없었다. 인적이 뚝 끊어진 길 위에는 바쿠고 뿐이었다.

그때 그 불빛이 보였다. 부옇게 시야를 흐리던 길 끝에 붉은 네온이 끔벅거리고 있었다. Salon de Ruelle, 카페의 이름이었다.

왜 그 카페의 문을 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차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카페를 찾아가본 적은 없었다. 젖어서 그런 거다. 어둡고 좁은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바쿠고는 거듭 생각했다. 망할, 어울리지도 않는 이딴 정장이 존나 불편하고 축축해서,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거라고. 빗발은 굵지 않았지만 꽤 오래 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탓인지 정장의 웃옷은 물론이고 셔츠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밤바람은 찼다. 하기야, 이대로 길에서 얼어 죽어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입꼬리를 비틀면서 바쿠고는 힘껏 가게의 두 번째 문을 밀었다.

라일락 꽃 향기가 훅 끼쳤었다.

흔한 카페는 아니었다. 바쿠고가 잠시 문 앞에 멈춘 채로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다다미 여섯 장 남짓의 내부는 애매하게 넓었고, 정중앙에는 거대한 라일락 나무가 사방으로 줄기를 뻗고 있었다. 넝쿨이 얽히고설켜 바닥에도, 자리에도, 천장에도 빈틈 하나 없었다. 카페가 아니라 정원이나 숲 같았다. 넝쿨 틈에 듬성듬성 걸린 석유등이 일렁거릴 때마다 꽃잎을 한껏 열고 흠뻑 흐드러진 라일락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며 향을 쏟아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 선홍색 눈끝이 울컥 일그러졌다.
술 마신 게 언젠데.

“이제 취했네, 씨발.”

손님도, 주인도 없었다. 마루를 뚫고 올라온 굵은 뿌리들을 넘으며 바쿠고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 드리워진 라일락이 수시로 시야를 가렸다. 이런 지하에 이딴 짓거리를 하는 주인은 뭐하는 또라이일까. 얼굴을 툭 두드리는 라일락송이를 손끝으로 툭 걷어내면서 바쿠고는 잠시 생각했다. 흠뻑 젖은 색 밝은 머리칼을 타고 미끄러진 빗방울이 툭, 가게의 마루 위로 떨어졌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삐걱 마루를 밟았다. 문 쪽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바쿠고가 급하게 눈을 돌렸다. 좀 전에 바쿠고가 밀고 들어온 문이 다시 열리고 닫혔다. 무성하게 얽힌 라일락 넝쿨과 꽃송이들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곤 발뿐이었다. 물을 먹고 흠뻑 젖은 운동화는 색이 어두웠고 사이즈가 꽤 컸다. 젖은 발은 바쿠고가 그랬던 것처럼 가게를 보고 얼이 빠진 모양인지 잠시 문 앞에 멈춰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망할 라일락. 바쿠고가 무성하게 드리워진 라일락송이들을 노려보며 잠시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어.

인기척을 느낀 두 번째 손님의 발이 이쪽을 향해 돌았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울컥 일그러져 있던 선홍색 눈이 크게 열렸다. 단순히 남자라서, 이쪽에 아는 척을 할 것 같아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이런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다행이다, 위험한 덴줄 알고 걱정했는데…”

남자가 안도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운동화가 라일락 뿌리들을 지나 저벅저벅 안쪽을 향해 걸어들어왔다. 남자는 얌전해 보이던 목소리와 달리 꽤 적극적이었다. 거침없이 라일락송이들을 헤치며 뿌리들을 넘어온 남자가 이윽고 얼굴을 드러냈다. 바쿠고가 흡 숨을 들이켰다.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다. 빈 주먹에 꽉 힘이 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찬물을 맞은 듯 했다.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보다 누가 심장에 칼날을 꽂은 것만 같았었다. 남자가 우뚝 굳어 있던 바쿠고를 향해 흐, 웃었다. 색이 깊은 숲색 눈이었다.

“근처에서 길을 잃었거든요. 게다가 비까지 와서… 혹시라도 비를 피할 데가 없을까 찾다보니 여기까지 들어와 버렸어요. 오는동안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고… 겨우 여길 찾아내서 들어왔더니 아무도 없어서 걱정했거든요. 혹시 위험한 곳이 아닐까 했는데… 왜,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그렇잖아요. 이런 카페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가 몰래 숨어 있기도 하고…”

긴장한 모양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빨랐고 격양되어 있었다. 웃음은 습관인 듯 했다. 웃는 결을 따라 하얀 뺨이 보드랍게 부풀었다. 그 뺨에 별처럼 흩어진 주근깨를, 그 짙은 숲색 눈을 바쿠고는 시야에 박을 듯 뚫어보았다. 눈길을 붙들렸다. 눈을 깜박이는 법조차 잊어버린 선홍색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이럴 리 없어.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놓으면서 바쿠고는 우물거렸다. 남자가 색이 깊은 숲색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가요? 바쿠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취한 거다. 그래, 취했다. 보드카 한 병을 혼자 비웠는데 맨 정신일 리가 없다고.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마치 저 홀로 타오르고 있던 카페의 벽난로처럼, 들어서는 순간부터 후각을 사로잡던 라일락과 갖은 풀꽃들의 향기처럼,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이곳을 헤맸던 사람처럼, 오랜 친구처럼,
연인처럼.

“미도리야 이즈쿠라고 합니다.”

남자가,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잘한 상처들이 박혀있던 그 손등을 바쿠고는 쳐다보지 못했다. 미도리야의 가슴팍으로 향한 선홍색 눈이 소리 없이 지진했다. 티셔츠 위에서 노란 머리칼에 풍채가 좋은 영웅이 껄껄 웃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물었다.

“그쪽 분은요?”

바쿠고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한 사람을 오래도록 증오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했다. 가지고 싶었었다. 온 마음이 부서지도록, 미워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도 없을만큼.

“봄이 온다더니 날씨가 아직 많이 춥네요. 아, 찾았다! 여기 커피 머신이 있어요.”

카페의 주인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몇 분동안 입을 연 건 거의 미도리야였다. 대체적으로 낯선 상대를 알아 가기 위한 쓸모없고 가벼운 질문들이었다. 어디 사느냐든가, 나이는 어떻게 되시냐든가, 직업은 무엇이며 어느 학교를 나오셨느냐는 그런 것들. 바쿠고는 대부분 대답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무시하지 않고 대답해준 건 이름, 그리고 나이 뿐이었다. 스물여섯. 그 말에 미도리야는 눈을 크게 뜨며 흠뻑 웃었었다. 나도 스물여섯인데.

“커피는 머신에서 뽑아 마시면 될 것 같아요. 어떤 커피를 좋아하세요? 어,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게 예가체프, 콜롬비아수프리모, 과테말라, 케냐AA…”

미도리야는 쉼 없이 주변을 살폈다. 뭐가 있을지 몰라 몸을 사리고 말도 사리는 바쿠고와는 달랐다. 라일락 넝쿨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빈 테이블들을 지나 바 쪽을 기웃거린 덕분에 미도리야는 주인이 붙여둔 것으로 보이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무엇이건 가격 걱정 없이 편히 이용하시고 머물고 싶은만큼 머무세요.
셀프냐고, 씨발. 카페란 소리를 말든가. 빈자리에 걸터앉으면서 바쿠고는 소리 없이 씨근거렸다. 눈높이가 낮아지니 무성한 라일락송이들에 에워싸인 것 같았다. 그냥 아무 거나 뽑을게요… 라일락 너머에서 미도리야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술은 커피를 마셔도 깨지 않았다.

“바쿠고씨는 이 근처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커피는 두 잔 모두 예가체프였다. 맞은편에서 미도리야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머그잔을 움켜잡으며 물었다. 앉으라고 한 적 없다든가 꺼지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서 바쿠고는 내밀어진 머그잔만 말없이 들이켰다. 라일락향이 짙은 탓인지 커피가 아니라 라일락을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라일락 향기와 산미가 강한 예가체프는 제법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대답을 던져준 것도 어쩌면 그 풍미가 퍽 싫지 않았던 덕일지 몰랐다.

“…친구 보내러.”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는 하지 않았다. 미도리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디 먼 곳에라도 가셨나봐요. 바쿠고는 대답이 없었다. 겸연쩍은지 볼을 긁적거린 미도리야가 또 한 번 습관처럼 웃는 얼굴을 했다. 머리 위로 라일락그림자가 등불을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저도 친구 때문에 왔어요. 바쿠고씨랑은 좀 다르지만, 흐… 저는 친구를 만나러 왔거든요.”
“……”
“아직 못 만났지만.”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망할.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놓았다. 술 한 번 더럽게도 안 깬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각설탕을 한 움큼 집어넣을 때 미도리야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얼굴조차 바쿠고는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미도리야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만지작거렸고, 바쿠고는 턱을 들고 머리 위에서 무수히 흔들리던 라일락꽃을 바라보았다. 햇빛도 없는 지하에 이만한 꽃이 필 리도 없었고, 봄이라지만 아직 라일락이 개화할 시기도 아니었다. 불경을 읊던 절의 스님도 아직 솜을 덧댄 누비옷을 입고 있었다. 꽃을 보던 바쿠고가 입매 끝을 픽 비틀었다.

“꿈이네.”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툭 던져진 말에 미도리야는 잠깐 의아한 얼굴을 하다, 이내 천천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바쿠고가 대답했다. 어. 선홍색 눈은 그때도 여전히 무성히 일렁거리던 라일락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망할, 라일락의 꽃말이 뭐였더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아무리 반복해 생각을 해봐도 기억은 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모두 외롭대요.”

미도리야가 말했다. 라일락을 향해 있던 선홍색 눈이 숲색 눈을 향해 움직였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바쿠고는 말하지 않았다.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커피 덕에 이젠 추위가 가셨는지 좀 전보다 긴장을 푼 하얀 뺨이 부드럽게 부풀었다.

“외롭다는 건 상대적인 거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나 혼자 뿐이었다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래요. 어느 책에서 그러더라구요. 소중한 사람이 있었던 사람만이 외로움을 아는 거라고, 그 존재와 멀어지거나 잃고 난 후에야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고… 길을 잃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목적을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무슨 개소리야, 씨발.”
“하하, 그러게요. 뜬금없네요.”

숲색 눈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알고 있다. 네가 이제 무슨 행동을 할지. 너는 볼을 긁적거리고,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본 후에 눈길을 떨어뜨리겠지. 바쿠고는 생각했다. 미도리야가 볼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라일락송이들을 한 번 흘긋 올려보았다가 다시 머그잔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바쿠고가 얼굴을 크게 쓸며 마른 세수를 했다. 꿈이 틀림없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미도리야가 눈길을 떨군 채로 우물거렸다.

“바쿠고씨는 왜 길을 잃어버렸을까, 혹시 나랑 같은 이유로 길을 잃어버린 걸까… 나처럼 이 길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걸까. 나를 만났을 땐 나처럼 안심했을까… 혼자가 아니라서 마음을 놓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외로워, 멍청아.”
“맞아요. 누구나 외로워요. 그래도 저는 바쿠고씨를 처음 봤을 때 약간 기뻤거든요. 혼자가 아니라서… 맞아요, 그거 같아.”
“……”
“태어나서 처음 사귄 친구.”

선홍색 눈이 크게 열렸다, 이내 일그러졌다. 아니, 이건 꿈이다. 볼 안쪽이 자꾸 떨려서 바쿠고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또 한 번 라일락의 그림자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미도리야가 흡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바깥에서 만났으면 우린 친구가 되었을까요?”

숲색 눈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 빛이 등불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바쿠고는 알 수 없었다. 영영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그냥 꿈이다. 전부 다 꿈이었다.

“상상해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인 거예요. 나는 바쿠고씨를 캇쨩이라고 부르고, 바쿠고씨는 나를… 그래요. 데쿠. 데쿠라고 부르고. 우린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그럼 나는 분명 바쿠고씨를 동경했을 거예요. 멋지고 근사하니까, 내 인생의 첫 번째 영웅이었을 테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명치에 걸린 돌이 자꾸만 덜그럭거렸다. 숲색 눈을 촘촘이 덮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젖고 있었다. 그래도 녀석은 웃고 있었다.

“좋은 친구였을 거야.”

너는 말했다. 라일락 그림자가 젖어들기 시작한 하얀 뺨 위로 크게 일렁거렸다.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상처주지 않았을 거야. 왜냐면 바쿠고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
“우리는 참… 친한 친구였겠죠?”
“……”
“캇쨩.”
“……”
“그렇지?”

크게 밀린 의자가 나무뿌리에 걸려 요란하게 넘어졌다. 넘어진 의자를 바쿠고도, 미도리야도 쳐다보지 않았다.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일어선 바쿠고가 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그만해. 꽉 다물린 입술 새로 날선 숨결이 뜨겁게 흘러나왔다. 선홍색 눈이 지진처럼 일렁거렸다. 바쿠고가 거듭 볼 안쪽을 씹었다.

“그딴 거, 씨발, 나는 모르니까,”
“……”
“입 다물어.”

미도리야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도 같았다. 그 말을, 그 버끔거리던 입술의 모양을 바쿠고는 보지 못했다. 손은 마음보다 머리보다 빨랐다. 덤불 같은 머리칼을 낚아채며 그대로 몸이 기울었다. 입술이 겹쳤다. 바닥으로 쏟아진 머그잔이 산산이 박살났다. 젖은 속눈썹이, 색이 깊던 숲색 눈이 호수처럼 떨었었다. 다물 틈도 없이 겹쳐진 입술이 막힌 호흡과 진동을 반복하며 격렬히 뒤섞였다. 긴장에 굳어있던 입술을 힘껏 빨며 이를 세웠을 때 미도리야는 그만 입이 막힌 채로 흠칫 떨었다. 그제야 입술이 멀어졌다. 그때도 라일락은 색이 밝은 머리칼 위에서 유령처럼 흔들렸었다.

“어, 씨발.”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었다. 미도리야의 뒷목으로 스르르 떨어지던 손끝이 어쩐지 떨고 있었다. 라일락향기가 사방에서 어지러웠다.

어차피 꿈인데.

선홍색 눈 끝에 걸려있던 것이 볼을 타고 차갑게 굴러 떨어졌다. 바쿠고는 웃었다. 뺨이 자꾸 젖었다. 그래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라일락의 꽃말에 대해서 생각할 걸 그랬다. 라일락의 꽃말이 뭐였는지 기억이나 해볼 걸 그랬었다.

등신새끼야. 바쿠고가 힘껏 입술을 씹었다.

“너는, 씨발, 죽었잖아.”

나는 세 시간 전에 너를 불태웠다.









*

사고였다고, 네 어머니는 말했었다.

「신고가… 긴급 신고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위치가 이상한 거야. 그래서 말렸거든. 가지 말라고, 적어도 근처에 카츠키 있을 때 가라고… 엄마가 대신 연락 해주겠다고… 그랬더니 그러는 거야. 엄마, 지금 사람이 불타는 건물 안에 갇혔대요.」

돌이켜보면 그날 게자리 운세는 최악이었을 것이다. 신고는 하필 너에게만 들어왔고,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네가 현장에 달려갔을 때 이미 건물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근처에는 너를 도와줄 다른 영웅이 아무도 없었다. 네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을 때 나는 백화점에서 반지를 보고 있었다. 그때껏 수십 번을 더듬었던 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이 내 기억과 다를까봐 나는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네게는 이제 반지를 끼워줄 네 번째 손가락이 없었다.

「유에이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차라리 무개성으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영웅이 되겠다고, 왜… 왜…!」

네 어머니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만큼 새카맣게 그을려 돌아온 너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며 울다 몇 번이나 의식을 놓았다. TV에서는 빌런과 대적하다 목숨을 바친 영웅 DEKU를 위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연일 방영되었다. 국가 영웅에 추대되었고, 장례는 히어로협회의 주최로 성대하게 이뤄졌다. 탈수로 쓰러진 네 어머니를 대신 해 내가 너의 훈장을 받아 관 속에 넣었다. 화장터에 간 것도 나였다. 왜 나야. 내가 물었을 때 우리의 스승은 깡마른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었다. 미도리야 소년이 그걸 원할 테니까.

그래, 씨발. 바쿠고가 입술 끝을 꽉 씹었다. 내가 태웠다. 내가, 너를, 불태웠다고. 이 씨발아.

판판한 흉근 위에서 바쿠고가 힘껏 이를 세웠다. 미도리야가 턱을 젖혔다. 그 모든 게 그대로였다. 너는 언제나 상처가 많았었다. 이젠 흉터가 되어버린 살갗의 자국들을 질근거리고 키스하며 바쿠고는 남은 팔로 곧게 뻗은 미도리야의 척추를 거칠게 더듬었다. 천장을 향한 숲색 눈이 크게 떨며 헐떡였다. 흠뻑 젖어 반쯤 일그러진 숲색 눈 안에 라일락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바쿠고가 또 한 번 허리를 다붙이며 급히 입술을 겹쳤다.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그럭덜그럭 춤을 추었다.

망할 라일락의 꽃말이 뭐였더라.

너를 붉게 태우고 하얗게 부수었었다. 반지는 유골함에 넣었다. 주먹을 주로 쓰던 기술 탓에 네 손은 늘 상처가 잦았었다. 멍청이가. 입술을 떼어낸 바쿠고가 허겁지겁 미도리야의 왼손에 깍지를 얽고 입가로 가져왔다. 네 번째 손가락을 깊게 물었을 때 미도리야는 또 한 번 크게 턱을 젖혔다. 잔뜩 달아오른 숨결들이 달아오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진짜, 개 같은 멍청이가. 바쿠고가 머금고 있던 미도리야의 손가락에 힘껏 이를 세웠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
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사라지기 전에.

“그래도… 늦지는 않았잖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숲색 눈이 호흡처럼 헐떡였다. 어. 머금었던 입술을 풀며 바쿠고가 툭 대답했다. 그래, 늦지는 않았으니까.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다행이다. 미도리야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라일락의 꽃말은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산책을 하던 노인이 강둑에 떠밀린 시체를 한 구 건져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타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경찰은 말했다. (*)








+ 루엘(Ruelle)은 골목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살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고.
+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입니다.

결론을 가볍게 요약하자면 그러니까 바쿠고도 따라간 거.... 이 카페 자체가 사후세계였다는 고런 설정이었읍니다. 며칠 전부터 괜히 이런 뜬구름 잡는 분위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끙끙거리다 이렇게 자급자족.. 한 건 좋은데 다 쓰니까 이 시간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일단 퇴근합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ㅠ.ㅠ

?
  • JeNie 2017.03.14 23:03 SECRET

    "비밀글입니다."

  • 왼쿠 2017.03.14 23:15 SECRET

    "비밀글입니다."

  • 저는 발닦는 수건 달나라군 2017.03.15 23:36
    와 진짜 너무 놀라와서 답이 안나와요.... 미도리야가 죽은 쪽인 것은 예상했으나 바쿠고까지는......ㅠㅠㅠ 진짜 반전반전...
  • 와 우 , ,,,, 2017.03.16 17:23 SECRET

    "비밀글입니다."

  • 도영 2017.03.19 04:31 SECRET

    "비밀글입니다."

  • Ren 2017.03.20 00:08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7.04.28 01:34 SECRET

    "비밀글입니다."

  • 유ㄴ 2017.08.29 11:22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8.07.01 21:58
    노래 선정도 너무 좋고 반전의 반전도 기가막혀요.. 그리고 항상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루카님의 그 묘사가 볼수없는 장면도 눈앞에 흘러가듯이 말해주네요 항상 잘읽고있어요
  • 글쓴이 2018.07.06 09: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도영 2018.08.23 06:00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9.01.05 18:16
    루카님은 천재가 아닌신가 십네요
    어떻게 이런 띵작을 쓰시는지 ㅎㄷㄷ
    존경합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완결 히로아카 게시판 이용 전에 읽어주세요 XD 2016.05.24
116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下 13 2017.03.19
» 단편 Salon de Ruelle 12 2017.03.14
114 단편 거짓말쟁이의 역설 3 2017.03.12
113 단편 역린의 서 / 여는 글 2 2017.03.08
112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中 6 2017.03.05
111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7~09) 16 2017.03.04
110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上 6 2017.02.28
109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4 8 2017.02.25
108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4~06) 4 2017.02.18
107 단편 오해와 착시 6 2017.02.16
106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1~03) 2 2017.02.10
105 단편 Feed The Flame 2 2017.02.03
104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3 8 2017.01.21
103 완결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完) 27 2017.01.17
102 완결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27~29) 6 2017.01.14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20 Nex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