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결국 또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을 못 참고 그만(mm
* 젊은 황제 미도리야를 암살하러 오게 되는 바쿠고 이야기로 캇뎈
* 고전
* 급한대로 맛보기 여는 글 부터(mm






說之者能無嬰人主之逆鱗, 則幾矣.

임금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다면 목적을 이룰 것이다.


- ≪韓非子(한비자)≫ 說難篇(설난편)








역린의 서

逆鱗


@ruka_tea






사람들은 그 사내를 이르러 선생이라 불렀다.

“도둑단이라기에 좀 더 첩첩산중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아, 마음에 든다는 뜻이네.”

그날은 초대황제의 탄신일이었고, 객잔은 일찍부터 사람이 붐벼 빈자리 하나 없었다. 은전(銀錢)을 헤아린답시고 늘 뒷방에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객잔의 주인도 오늘은 술을 들고 탁자 사이를 바쁘게 오고 다녔다. 타지에서 온 무인(武人)들 몇이 술에 취해 싸움을 했고, 사람들은 돈을 걸며 싸움을 부추기다 병졸들이 오면 모르는 척 술잔을 비우기를 반복했다. 곳곳에 술과 고기가 넘쳐흘렀다. 어딜 가도 시끄러웠고 어딜 가도 부산했다.
2층 객실의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키리시마가 눈앞까지 튀어 오르는 불꽃에 실색을 하며 허겁지겁 문을 닫았다. 성질 급한 아이들이 해가 저물기도 전에 불꽃놀이를 하며 노는 모양이었다. 객실의 방문도 진작 꼭꼭 닫았으나 하필 이런 날이라 객잔의 낡고 얇은 장지로는 바깥 소음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은밀히 만나기에는 도리어 이런 날이 낫다. 손님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찻잔을 고요히 들이켰다. 맞은편 찻잔은 이미 비었다. 탁자 위에 두 다리를 얹어놓고 까딱까딱 의자를 흔들고 있던, 색밝은 머리칼의 젊은 사내였다.

“그래서, 뭐. 용건이나 말하라고, 씨발.”

손님과 달리 마주 앉은 사내는 말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이제 갓 소년기를 벗어났을까. 머리의 반을 덮은 두건, 허리춤까지 덮은 단옷과 바지 모두 검정색이었고 때문인지 오히려 사내의 준수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눈길은 사나웠으나 피부는 하얗고 이목구비는 반듯했다.
만일 사내의 말투나 허리춤에 찬 크고 긴 칼이 아니었다면 어느 귀공집의 자제이려니 했을 것이다. 주눅 드는 법도 없이 사내는 오히려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고 손님을 곁눈질로 흘깃 거렸다. 야단이 난 건 외려 키리시마였다. 눈치를 보며 홀로 발을 동둥 구르던 키리시마가 기어이 제 벗에게 눈치를 줬다.

“바쿠고, 야. 제발 손님한테는 말투 좀 곱게 하라고…”
“아, 신경 쓸 것 없네. 나는 이런 배포 있는 자들을 좋아하거든.”

손님이, ‘선생’이 껄껄 웃었다. 비단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매만으로도 선생이 썩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선생은 사내가, 바쿠고 카츠키가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과연. 나는 새도 숨을 죽인다던 천하의 도둑다운 배포다. 그리고 이 일에는 자네처럼 간이 큰 인재가 퍽 필요하지. 나는 자네 같은 자를 찾고 있었거든.”
“아, 서론 존나 기네. 아부 떤다고 돈 안 깎아주거든.”

키리시마가 울상을 했다. 바쿠고 너 제발 좀… 제 벗이 그러거나 말거나 바쿠고는 귓등으로도 듣는 체를 하지 않았다. 웃음을 삼킨 사내가 장옷을 주섬주섬 뒤적거려 자루 하나를 꺼내 탁자에 던져놓았다. 그 둔탁한 소리에는 키리시마도, 무심히 벽 쪽만 바라보던 바쿠고도 눈길을 돌렸다. 척 보아도 한 손을 가뿐히 넘어갈 자루는 불룩했고 무거웠다.
하, 씨발. 자세를 바로 한 바쿠고가 의자를 당기며 자루를 들여다보았다. 못 해도 은전 300닢은 족히 될 양이었다.

“이거면 씨발, 이 망할 객잔을 한 열댓 점은 사겠는데.”
“그럴 걸세. 내 400닢 정도 넣었네. 물론 이건 그냥 착수금이야. 성공하게 되면 이것의 다섯 배를 주지.”

다섯 배라니, 2천닢이라니. 키리시마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움켜잡았다. 객잔이 아니라 궁을 사야하는 거 아냐?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는 제 벗과 달리 바쿠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웃음기를 잃은 선홍색 눈 사이가 유난히 깊었다. 존나. 바쿠고가 입꼬리 끝을 픽 비틀었다. 손님을 뚫어보는 선홍색 눈이 매섭도록 사나웠다.

“고작 도적질 하나 시키면서 이만한 돈을 주지는 않지. 그럼 딱 두 가지거든. 댁 대가리가 돌았거나, 아니면… 누구 목을 따오라거나.”
“……”
“어디서 수작이야, 씨발.”

살인은 절대 안 해. 어깨를 물린 바쿠고가 칼자루 끝으로 손님 쪽을 향해 돈 자루를 툭 밀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키리시마가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손님의 입매는 그때도 웃고 있었다. 비단 수건 밑으로 고요히 걸려있던 웃음처럼 손님은 가볍게 답을 받았다.

“자네 팔자를 고쳐줄 지도 모를 텐데.”
“어, 은전에 피 묻히면 일진이 존나 사납거든. 토사구팽 당하는 취미도 없으시고.”
“흔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네.”
“그 기회는 댁이나 존나 챙기시든가. 남 배에 칼 쑤셔주고 돈 받아 챙긴 새끼들 치고 내가 잘 된 새끼를 본 적이 없거든. 아, 정정. 살아있는 새끼를 본 적이 없어서. 존나 일 끝나면 다들 뒤지시더라고. 약 처먹고, 마차에 치여서, 강에 빠져서, 벼랑에서 떨어져서. 처자식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사는 게 거지같다면서 목을 매고. 난 그렇게는 못하지, 씨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거든.”
“……”
“야, 건달. 손님 가신단다.”

말을 끝낸 바쿠고가 그대로 의자를 밀고 자리를 털었다. 당황한 건 키리시마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만한 돈인데… 손님은 조용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도, 내밀었던 은전을 다시 물리는 일도 없었다. 비단 수건 밑으로 교묘히 드러나 있던 입매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자네는… 홍(紅)의 일족이군.”

창 쪽으로 몸을 돌리던 바쿠고가 돌연 우뚝 멈췄다. 손님이 고요히 입매를 밀었다.

“참 고생이 많겠어. 눈이 그리 붉으니 밤일 외에 무얼 달리 할 수 있겠는가. 선대 황제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지. 홍의 일족은 역적을 모의한 것이 아니라고, 짐의 판단이 틀렸노라고… 허면 뭘 하겠나. 이미 여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대부분 도륙되어 학살당하였는데. 겨우 살아남은 자손도 기껏해야 밤도둑질 뿐이지. 자네 그 붉은…”
“…죽여 버린다.”

선홍색 눈이 손님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눈 얘기 꺼내지마, 씨발.”
“아, 불편한 얘기겠지. 그래. 실례했네.”

손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사과하지. 허나 손님은 자루를 물리지도,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이미 틈은 발견했다. 손님은, ‘선생’은 이런 틈을 비집는 데에 굉장한 재주가 있는 자였다. 바쿠고는 진작 덫을 물었다. 비단 수건 그림자 밑으로 중년의 간교한 입술이 다시 한 번 고요히 웃었다.

“자네도 좋아할 거야. 내가 누굴 죽이길 원하는지 알게 된다면.”
“……”
“복수할 기회를 주지.”

선생이 또 한 번 품을 뒤적여 작은 수건을 하나 꺼냈다. 숲처럼 색이 짙은 비단 수건에는 유려한 필체로 누군가의 이름이 금실로 새겨져 있었다. 그 네 글자를 바쿠고는 똑똑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읽었다.

“…미도리야 이즈쿠 緑谷出久.”

그래. 선생이 말했다.

“황제일세.”










*

미도리야 이즈쿠, 혹은 녹왕(緑王)이라 하였다.

17세에 선황의 죽음으로 황제에 올라 올해로 즉위 2년이 되었다. 황제의 성은 본디 황호(皇號)와 같은 것이다. 선대 토시노리 황제가 자신의 성으로 야기를 골랐던 것처럼 이즈쿠는 열일곱 살이 되어 관을 물려받으며 미도리야라는 황호를 선택했다. 숲과 연못의 초록처럼 깊고 인자한 성군이었다. 이는 또한 어질고 현명한 군주가 되라는 선황의 의지를 받든 것이기도 했다.
웅영국(雄英國)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를 확장했다던 선황 야기 토시노리는 살아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용맹한 군주였지만, 그 자신의 생명을 좀먹던 병은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더불어 자식 복도 없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황후가 젊은 날 일찍 떠난 후로 야기는 후처를 두는 대신 황후의 조카였던 이즈쿠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갓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화재로 부모를 잃은 아이는 세 살에 궁으로 들어와 황태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래보다 몸집이 왜소했던 검술과 마술(馬術) 등 무예에는 서툴렀으나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일을 즐겨 했다. 야기는 이런 이즈쿠를 제 핏줄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다. 허나 제후들은 언제나 이즈쿠를 마뜩찮게 여겼다.

「태자께서는 검보다 책 읽는 일을 좋아하시고 마술에도 소질이 없으시니 후에 전쟁이 벌어지면 어찌 선봉에 설 수 있겠습니까. 보위에 오르신 후에 그 유약함으로 주변국들에게 얕잡힐까 신들은 심히 걱정이 되옵니다.」

그때마다 토시노리는 오히려 제후들을 호통 쳤다.

「짐이 이즈쿠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이 나라이지, 전쟁이 아니오. 나는 용(勇)은 있으나 인(仁)이 부족하여 가족을 전장에서 떠나보낸 백성들의 슬픔을 달래주지 못하였으니 이즈쿠가 어진 성군이 되길 바랄 뿐이오. 허니 경들은 두 번은 내 앞에서 그런 말 마시오.」

무엇보다 황제의 형이었던 대군이 이즈쿠를 특히 탐탁찮게 여겼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해 아우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대군은 자신들을 따르는 제후들을 앞세워 자주 제 조카의 자격을 따지고 들었다.
허나 야기 황제가 괜히 아낀 것이 아니듯 이즈쿠는 무예엔 서툴러도 지혜가 깊고 영민한 아이였다. 사람을 차별할 줄 몰랐고, 웃음이 많았으며, 나서며 군중을 휘어잡는 것보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혜를 발휘하는 일을 좋아했다. 일찍부터 얌전하고 어른스러운 소년이었다. 내궁부에서 일하는 많은 내관과 궁녀들, 또 학자들과 선하고 청렴한 관리들은 모두 태자를 좋아했고 따랐다. 그들은 후에 미도리야가 급작스러운 선황의 죽음으로 황제에 올랐을 때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곁을 지켰다.

그중 으뜸은 단연 책사인 우라라카였다.

사내치고는 호리호리한 몸집이 본궁(本宮)의 높다란 계단을 재게 걸어 올랐다. 오늘도 금수를 놓은 백의는 단정했고, 갈색머리칼은 관 밑으로 모두 말끔히 숨겨 놓았다. 유난히 혈색이 좋은 뺨은 오늘따라 무슨 일에선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곁을 지나던 궁녀들이 사내를 보며 소리를 죽여 수군거렸다. 개중 몇은 이미 양뺨이 붉었다.

“어머, 저것 봐. 우라라카님이셔.”
“근데 어딜 저리 바삐 가실까?
“황제 폐하의 일등 책사이시니 당연한 일이지. 아, 너무 근사하셔라. 어느 여인과 혼례하실까? 그 여인은 참 행복하겠다…”
“너는 아니니까 꿈 깨, 바보야.”

궁녀들이 저희끼리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부리다 기어이 내관에게 야단을 맞았다. 계단을 오르던 우라라카가 잠깐 눈썹을 모으며 쓰게 웃었다. 어찌 나는 귀가 이리 좋아서. 그리고 다시 남은 계단을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처음 아버지의 손에 끌려 황태자와 만났던 열 살 시절부터 지금껏 빈번하게 걸어 오른 계단이었다. 그야말로 눈을 감고도 걸어오를 수 있을만치 익숙한 길이었다. 유난히 혈색 좋은 뺨이 하얗게 웃었다.

“하기야, 그땐 여기를 관을 쓰고 오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우라라카 오챠키, 허나 본명은 우라라카 오챠코라 하였다. 그 이름을 아는 이는 궁에서도 고작 둘 뿐이었다. 지금 국경을 수비하고 있는 수비장 이이다, 그리고 황제인 미도리야만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열 살 시절부터 궁을 드나들며 친해진 동무지간이었다. 하여 아는 것이 많았고 익숙한 것이 많았으며 비밀이 많았다. 우라라카가 감추고 있는 것이 비단 본명 뿐이 아닌 것처럼.

우라라카 오챠코는 우라라카 외무대관이 가장 아끼던, 딸이었다.

태자의 소꿉동무로 선출되어 동궁(動宮)을 드나들던 시절엔 우라라카도 여느 소녀들처럼 치마 장옷을 입었었다. 더 이상 치마를 입지 않게 된 것은 여인의 몸으로는 관직에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 친구가 황제에 올랐어도 몇백 년을 이어져온 국법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낙방했다는 통보를 받은 그날, 우라라카는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칼을 단발로 싹둑 잘라버렸다. 어머니는 쓰러져 울었고, 아버지까지 애원했으나 결국 딸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지방 계신 친척 어른의 일을 도우러 가겠다며 도읍을 떠난 우라라카 오챠코의 자리는 어머니의 육촌 조카인 우라라카 오챠키가 채워주었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우라라카는 남장을 한 채 과거를 치루고 책사부에 임명 받았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치마는 입지 않았다.
그날 치마를 벗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이즈쿠군의 신부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며 우라라카는 잠시 웃었다. 황궁 어른들은 어울려 놀던 둘을 보며 후에 혼례를 시켜야겠다며 자주 그런 농 같지 않은 농을 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황후의 삶을 동경해본 적이 없던 소녀는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미도리야의 곁을 지켰다. 이 꿈의 방향을 가장 믿고 응원해주었던 이가 또한 이 나라의 황제인 것처럼.
그래서 내가 이번 일을 가만 넘겨줄 수가 없는 거야. 우라라카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좀 전보다 좁아진 보폭이 성급히 본궁의 문턱을 넘었다. 이윽고 대당이었다.

“폐하, 우라라카 책사께서 드셨…”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내관이 다 고하기도 전에 성질 급한 소리가 먼저 터졌다. 서재방의 정중앙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던 학사가 가장 먼저 우라라카를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급박한 것을 알아차린 학사가 주섬주섬 책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숲색 머리가 눈에 보였다.
단정히 올린 머리 위엔 금으로 짠 관을 썼고, 정무(政務)가 끝난 사적인 시간인 덕인지 입고 있던 숲색의 용포는 우아하였으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폭이 넓은 소매 자락을 추스르며 황제는 제 오랜 동무를 그제야 바라보았다. 학사가 자리를 벗어나자 우라라카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이제 서재에는 둘 뿐이었다.

“이제나 책사께서 오실 때가 되었다 생각했지요. 아, 그래요. 차 한 잔 들일까요?”
“아, 그럴까요, 폐하? 어째서 저라는 유능한 책사를 두시고도 또 책사 추천을 덥썩 받아 들이셨는지에 대해 먼저 합리적으로 설득해주신다면요.”
“……”
“게다가 대군이 추천한 책사잖아, 이즈쿠군.”

자연스럽게 짧아진 말투에 황제가, 미도리야가 눈꼬리 끝을 부슬부슬 떨어뜨렸다. 그러게… 참 힘 빠지는 반응이었다. 한숨을 삼킨 우라라카가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의자를 빼고 앉았다. 좀 전까지 학사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너를 사사건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야. 네가 죽으면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응, 하지만 숙부께선 책사를 추천하셨을 뿐이잖아.”
“널 죽이려는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이면 그도 너의 적이야.”
“……”
“그 찢어죽일…! 아니, 너의 숙부가 이이다군을 변방으로 보내버린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널 지킬 사람을 찢어놓고 있는 거야. 게다가 책사를 추천했다니, 이젠 나도 언제 잘려나갈지 몰라.”
“알아. 걱정시켜서 미안… 하지만 우라라카군, 이번에는 일부러 그러시라고 했어.”
“일부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일부러 책사를 구해달라고 했단 얘기야? 네 숙부한테?”

미도리야가 볼을 긁적거렸다. 생각을 정리할 때면 흔히 보이는 습관이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미도리야는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좋아 그랬는지 서재방은 모든 창을 다 열어두었다. 활짝 열린 뒤창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둥그렇게 휘어진 숲색 눈이 우라라카를 향했다. 백성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애롭다는 그 성품만큼이나 온화한 눈길이었다.

“혹시 역린이라는 말을 알고 있어?”
“역린이라면… 용의 비늘?”

우라라카가 대답했다. 미도리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용의 비늘. 답을 삼키며 미도리야는 훤히 열린 뒤창으로 마저 걸었다. 왕궁을 감싼 저 푸른 심림(深林)처럼 색이 깊은 용포 위로 오후 나절의 햇살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우라라카는 그 얼굴이 퍽 생기롭다고 생각했다. 아직 소년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어리고 젊은 황제 그 자신 같았다. 더불어 우라라카는 아직 어린, 그리하여 제후들이 자격이 없고 무용이 부족하다 조롱하는 이 젊은 황제가 얼마나 어른스러우며 지혜가 깊은지 알고 있었다. 진정 자신이 역린의 뜻을 몰라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닐 터였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그런 자였었다.

“어느 서책인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었지. 용은 본래 길을 잘 들이면 얼마든지 올라탈 수 있노라고, 허나 올라타는 때에 용의 뒷목에 거꾸로 돋아있는 비늘을 잘못 건드린다면 그 용은 포악해져 그대로 목을 물어뜯고 말 것이라고. 그것이 왕이고, 군주의 생리라고.”
“……”
“그래서 나는 내 역린을 찾고 있는 거야. 너처럼 우수하고 지혜로운 책사가 아니라, 우라라카군.”

우라카가가 답 없이 제 입술을 잠시 질끈 물었다 놓았다. 답이 없는 제 동무이자 책사를 돌아보는 대신 미도리야는 창틀에 양팔을 올리며 상체를 깊게 기댔다. 뒤창 앞 후원은 한겨울 동토를 뚫고 오른 꽃들이 한껏 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금세라도 흠뻑 꽃을 터뜨릴 듯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망울을 내려다보며 미도리야는 고요히 웃었다. 이제 봄이 지척이었다.

“무엇을 그리 염려하는지 알아.”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 바람에 우라라카는 이번에도 제 오랜 동무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황제가 아니었다. 남장을 불사하고 궁에 들어와 선황까지 기만하면서도 곁에 머물며 지키고 싶었던 소년이었다.

“숙부께서… 그러니까 선황의 형님께서 나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어. 허니 이번에 데려오신다는 책사도 분명 좋은 마음으로 권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맞아, 이즈쿠군. 네 목숨을 노리는 거야. 빤하잖아! 널 가까이에서 암살할 자객을 심기 위해 그런 술수를 부리는 거야.”

우라라카가 결국 분을 못 참고 씩씩 거렸다. 허나 미도리야는 어릴 적부터 궁 안에서 서책을 벗하며 자라 세상물정에 퍽 어두웠어도 속이 깊고 남의 의중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여전히 후원의 아름드리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며 숲색 눈이 다시 운을 떼었다.

“있지, 우라라카군. 나는 그 자를 역으로 이용하고 싶어.”
“그 자라니… 누구?”
“숙부께서 내게 추천하신다는 그, 책사.”

황제를 바라보던 둥그런 눈이 크게 열렸다. 뭐? 되물은 말에 그제야 미도리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표정은 좀 전과 다름없이 담담하고 온화했다. 마치 그 속이 깊어 잔물결이 일지 않는 푸른 호수처럼.

“내 또래라고 들었어. 숙부께서 그러셨거든. 책사로 삼아 달라 권해 올리지만 무예 또한 뛰어나고 손재주 역시 좋아 여러 방면에서 보탬이 될 것이라 했어. 게다가 꽤 미남인가봐. 사족이지만, 흐…”
“이즈쿠군,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응. 알아. 하지만 이용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서.”
“……”
“나는 그를 내 ‘칼’로 만들 거야.”

어차피 나를 겨누는 칼이다. 내 숨을 도려내기 위해 숙부께서 고르고 또 고르셨을 테니 날이 보통 예리한 것은 아닐 터다. 허면 나는 그 칼자루를 돌려놓고 싶어. 칼은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 강도가 칼을 쥐면 사람을 죽이겠지만, 의원이 칼을 쥐면 사람을 살린다.
어쩌면 꽤 쓸 만한 칼이 될 지도 몰라. 그 칼자루를 내가 아니라 숙부를 향해 돌릴 수 있다면. 미도리야는 진작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제야 속내를 읽은 우라라카가 잠시 숨을 들이키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도 썩 내키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즈쿠군. 그러다 그가 진짜 네 역린이 되어버리면?”

숲색 눈이 답 대신 옅게 떨었다.

“마음이라도 줘버리게 되면, 그리하여 그가 진짜 네 가장 약한 비늘이 되어버리면…”
“그럴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
“만약 내가 마음이 약해 그에게 정이라도 주게 된다면 그땐 네가 나를 대신 해 일을 수습해줘. 네가 힘들다면 이이다군에게 부탁해도 좋아.”

우라라카가 잠시 눈을 끔벅거렸다. 말문이 막혀 그랬다. 넌 가뜩이나 정도 많으면서. 그런 말을 우물거려보다 우라라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너라고 언제까지 아이이고 싶지는 않을 거야. 왕이 되고 싶겠지. 선황이 숨을 거두면서 핏줄도 이어지지 않은 너를 후계로 삼아 황제의 관을 물려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비난했었다. 그때도 우라라카는 오로지 홀로 미도리야를 지키며 지지했다. 너에겐 검이 없는 대신 지혜가 있었고, 무용이 없는 대신 인자가 있었다. 숲색 눈을 사람 좋게 휘어트리며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아바마마께서 물려주신 관이야. 성군이 되라고, 전쟁도 역병도 없는 세상에서 더 많이 웃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고. 어려운 자를 구하는 왕이 되라고, 그들의 영웅이 되라고.”

그러니 어떻게든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미도리야는 거듭 생각했다. 우라라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놓았다. 맘대로 해, 황제폐하.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 안 꺾잖아, 이즈쿠군은.”
“그런가, 하하…”
“근데 희한해. 추천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맘에 들었어?”
“응.”
“이름이 뭔데?”

미도리야가 잠깐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감당하지 못할 이름을 발음하는 것처럼, 마음의 방비를 단단히 하는 것처럼. 그 파도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제 마음을 붙들어두는 것처럼.

“…바쿠고 카츠키.”














*

선홍색 눈이 하, 비틀렸다.

“책사라니.”

어처구니가 없네, 씨발. 바쿠고가 연거푸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가 막힐 소리였다. 글자는 읽을 줄 알아도 책은 커녕 종잇장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었다. 헌데 책사라니. 하도 현실감이 없어서 이 말에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도 손님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 평온함에 바쿠고는 부아가 치밀었다. 저 수건을 확 벗겨 버릴까, 얼굴이라도 기억해두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엄마, 깜짝이야! 놀랐잖아!”

바쿠고가 검집에 꽂혀있던 제 검을 뽑아 탁자 위에 힘껏 내리 찍었다. 꽥 소리를 지르는 키리시마를 가볍게 무시하고 바쿠고는 몸을 기울여 손님의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았다. 손님은 서슬 퍼런 칼날에도 입꼬리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이 남자도 보통은 아니다. 하기야, 황제를 죽이라는 놈이 보통 미친 놈이겠어. 생각하며 바쿠고가 입꼬리를 가볍게 비틀었다, 말했다.

“좋아. 하지, 뭐. 단, 당신도 걸어.”
“……”
“네 놈 모가지.”

가슴을 쓸어내리던 키리시마가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손님이 가볍게 웃었다. 건방진 녀석. 그리고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좋다.
입궁은 한 달 뒤다. 손님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까지 바쁠 게다. 배워야할 것들이 많을 테니까. 오늘부터 매일 저녁 술시마다 동문 앞에서 보자. 그 앞에 노파 혼자 사는 초가집이 한 채 있을 게다. 그리로 와. 나는 네가 입궁할 때가 되면 잠시 보러 들르지.”
“……”
“오늘 너희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거다.”

그러믄요, 당연한 말씀을. 손님의 말에 키리시마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손님이 내내 닫혀있던 객실의 문을 열었다. 앞을 지키고 있던 회색 머리칼의 빼빼 마른 사내가 잠시 문 안쪽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보고 이내 눈길을 돌렸다. 손님이 수건을 다시 깊이 쓰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던 그때였다.

“왜 나야.”

바쿠고가 뒤도 보지 않은 채 물었다. 손님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역시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건 그 녀석을 만나면 알게 될 거다.”

손님의 뒤를 황급히 따르며 키리시마가 방문을 닫았다. 그때도 바쿠고는 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건을 꿰뚫은 칼날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 날에 꿰뚫린 이름을 바쿠고는 다시 한 번 발음해보았다.
미도리야 이즈쿠, 황제의 이름이었다.    (*)







그리하여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역린이 되게 되는 그런 이야기...

결국 이 얘기를 너무 보고 싶어서 급한 마음에 티져라도 풀어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저 이렇게 쓴 티져 지금 47854959459개쯤 있는 것 같지만... <<.... 그래도 써야할 다른 글이 있기에 일단은 이렇게라도.. 여는 글이라도ㅠㅠ.... 무튼!

요즘 또 3월이라고 오프라인 생활에 충실히 살고 있느라 여러모로 글이 뜸하네요ㅠ ㅠ 저뿐만 아니라 다들 바쁘신 이 시즌... 그래도 곧 있으면 2기 방영이니까요ㅠㅠㅠㅠㅠㅠ 2기 시작하면 또 원기 충전하고 열심히 달리겠습니다ㅠ0ㅠ/// 이 글도 언젠가 풀버전을 꼭... 무튼 모두 건강하시옵소서ㅠ//ㅠ 환절기 감기조심, 먹는 것 조심 ㅠㅠ 저는 오늘 급체해서 연차냈어요 흑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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