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쓰다보니 길어져서 그냥 상중하로 들고 옵니다(mm
* 맞선보기 싫어서 바쿠고가 미도리야랑 가짜 애인 흉내 내는 이야기
* 중편







애인이 있는데


@ruka_tea









숲색 눈이 소리 없이 꿈벅거렸다. 당황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대타에게 만루 홈런을 맞아버린 구원 투수처럼.

“그러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씨발, 여보… 이 새끼 웃기는 새끼네, 씨발. 전화를 먼저 끊어!?”

바쿠고가 끊어진 핸드폰을 향해 씩씩거렸다. 다행히 자기 핸드폰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는지 벽을 향해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대신 침대 아래에 앉아 있던 미도리야에게 던지듯이 핸드폰을 토스해주고 바쿠고는 애꿎은 제 이불만 힘껏 걷어찼다. 아오, 씨발. 그러다 돌연 선홍색 눈이 쓰게 웃고 있던 숲색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야. 바쿠고가 말했다. 미도리야가 혀 끝을 씹으며 대답을 버벅거렸다. 어, 어?! 이를 꽉 악문 바쿠고가 한참동안 씩씩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이었다.

“헤어져.”

캇쨩. 미도리야가 눈썹을 모으며 쓰게 웃었다.

“…이미 헤어졌다고 했잖아.”
“어, 그럼 다시는 이딴 새끼 만나지마.”
“……”
“남자 보는 눈 존나 없어, 씨발. 이딴 새끼보다 내가 훨씬 더 잘났…”

우물거리던 바쿠고가 돌연 입을 합 다물었다. 가끔 어떤 침묵은 열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신호가 된다. 미도리야는 늘 눈치가 늦었다. 그래도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도 참지 않는다는 이 바쿠고 카츠키가 갑자기 입을 다물 때가 어떤 때인지는 알고 있었다. 선홍색 눈이 우뚝 굳은 숲색 눈을 바싹 들여다보았다. 등줄기에 땀이 삐질 흘렀다. 불길했다.

“야, 데쿠.”

어, 어?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혀끝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뻥치면 죽여 버린다.”
“캇쨩, 갑자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
“있었지, 너.”
“뭐가?”
“나 좋아한 적.”

예? 둥그렇게 열린 숲색 눈이 꿈벅꿈벅했다. 그리고 흐 웃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난 언제나 널 좋아해, 캇쨩. 친구잖아…”
“누가 그딴 거 물어봤냐? 멍청아, 그딴 거 말고. 나한테 관심 준 적 있어, 없어. 나한테 꼴린 적 있어, 없어.”
“그런 적은… 없는데.”
“……”
“없어. 진짜.”
“단 한 번도.”
“응, 단 한 번도. 저기, 캇쨩. 게이라고 해서 무조건 어떤 남자든지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캇쨩도 물론 멋진 남자지만!”
“……”
“내 이상형은, 어… 너보다는 좀 더 다정하고 웃는 얼굴이 근사한…”

우물거리던 미도리야가 순간 말꼬리를 스르륵 흐려버렸다. 눈앞에서 울컥 일그러지던 선홍색 눈을 봐버린 탓이었다. 눈치는 없었지만 26년 평생동안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에 대해서는 전공분야라고 해도 좋을만큼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바쿠고 카츠키는 지는 걸 매우 싫어했다. 동네에서 최고라고 해도 좋을만큼.

“웃기지마, 씨발.”

바쿠고가 우득 이를 갈았다. 급격히 좁아진 미간을 뚫어보며 미도리야는 조용히 쓴웃음을 삼켰다. 큰일 났다. 스위치 켜버린 것 같은데.

“너 눈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어!? 존나 얼굴부터 머리까지 너한테 존나 과분한 남자가 평생 앞집에 살고 있는데!”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일그러진 선홍색 눈을 보며 미도리야는 말없이 볼을 긁적거렸다. 그거야 네 성격을 보면 알 텐데, 캇쨩…

“아니, 나도 내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게다가 캇쨩은 이쪽도 아니고, 완벽하게 스트레이트…”
“어, 씨발, 말이 안돼.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이 등신 새끼야.”
“……”
“어떻게 데쿠새끼가 씨발,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어.”

대체 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튀어버린 것일까. 입술 끝을 잘게 짓이겼다 놓으면서 미도리야는 침대 위에서 흥분해 있던 동네 최고의 젊은 폭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야? 미도리야가 물었다. 바쿠고가 울컥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어, 씨발. 그리고 또 한 번 베개가 허공을 날았다.

“납득할 수가 없거든, 이 씨발아!?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다시 말하지만 바쿠고는 언제나 지는 것을 싫어했다. 자기 엄마한테 당했다고 씩씩 거리는 심성이 하루이틀만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맞아, 넌 늘 그랬어. 미도리야가 베개를 힘껏 주먹으로 내리치던 바쿠고를 보며 쓰게 웃었다. 유치원 통학 버스에도 항상 1등으로 올라타야 하던 녀석이었다. 성적이나 운동은 당연했고, 매점에 갈 때조차 바쿠고는 2교시면 품절 되어버리던 메론빵을 가장 먼저 사기 위해 복도를 질주했었다. 하기야,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T대에도 수석으로 입학했던 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쿠고가 언제나 모든 일에 1등을 해야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미도리야가 오래도록 관찰해온 바로는, 겨룰만한 상대가 있을 때만 그랬다. 골목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가도 뒤에서 누가 자기를 추월하면 잰걸음으로 걸어서 어떻게라도 그 상대를 다시 앞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할까, 캇쨩… 생각을 삼키면서 미도리야는 흐물흐물 웃었다. 대체 그 경쟁심이 이번에는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상대로 켜진 것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면 그거야 당연히 너는…

“이건 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어, 어?”

침대 위에서 이불을 걷어차던 바쿠고가 오뚝이처럼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덕분에 당황한 건 미도리야였다. 그렇지, 정말… 미도리야가 흐물흐물 웃으며 적당히 말을 흐렸다. 분기는 좀 가라앉은 모양인지 패잔병처럼 구겨진 이불을 발끝으로 툭 밀치며 바쿠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선홍색 눈이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그 탓에 미도리야는 하고 싶었던 말을 이번에도 혀 밑으로 꾹 삼켜 넣었다.

“하자. 아니, 해, 씨발.”
“힉, 아니, 뭘?”

너는 남자를 싫어할 텐데.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딸꾹질을 했다.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 했다. 바쿠고가 잠시 뭐하냐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선언했다.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대타의 얼굴처럼.

“데이트.”

이번에는 딸꾹질도 나오지 않았다.





*

그야말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바쿠고는 어릴 적부터 저 하고 싶은 일에는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일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바쿠고는 침대 옆에 깔린 이부자리 위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미도리야를 발로 툭 밀어 깨웠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다 잡을 사이도 없이 그대로 욕실에 던져져서 대충 씻고 나왔을 때 바쿠고는 이미 외출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스트레이트 진과 컬러가 산뜻했던 캐주얼 셔츠의 핏을 확인해보고 있던 바쿠고를 발견했을 땐 미도리야도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머리까지 만지다니.

「그럼 캇쨩! 나도 잠깐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
「아니, 넌 얌전히 따라 나오기나 해. 멍청아.」

골목 하나만 건너면 우리 집이라고 우물거려보던 항변은 덥썩 뒷덜미를 잡히면서 그대로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그 길로 미도리야는, 어제 입고 온 셔츠에 청바지 차림 그대로, 바쿠고 저택의 차고로 질질 끌려갔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었던 포르쉐의 조수석을 열어주며 바쿠고는 가볍게 턱짓을 했다. 타. 그리고 씩 웃으며 덧붙였다. 집에 미리 연락하고.

「데쿠새끼 오늘도 집에 못 갈 거니까.」

내일은 월요일이야, 캇쨩. 내 출근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소리인지 우물거려볼 틈도 없이 부드럽게 발진한 포르쉐는 곧장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백화점 세 곳을 돌았고, 셔츠 두 벌과 바지에 구두까지 구입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점심 무렵이었다. 쇼핑백만큼은 내가 들겠다면서 미도리야는 어떻게든 버텨봤지만 바쿠고에게 정강이를 차이고 빈손이 되어 버렸다. 조수석에 앉아 어색한 양손을 쥐었다 펴면서 미도리야는 흐, 쓰게 웃었다.

「이것까지 다 캇쨩이 사줄 이유는 없는데… 계좌 번호 불러줘. 내가 보내줄…」
「어, 나는 원래 데이트를 이렇게 시작하거든.」
「……」
「계좌는 무슨. 그러니까 네가 그따위 연애 밖에 못하는 거라고, 등신아.」

계좌 번호 부르는 것과 연애는 대체 무슨 상관이며, 애초에 진짜 연애도 아닌데 왜 나는 네게 옷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게다가 네가 나한테 연애를 못한다고 할 게 아니잖아, 캇쨩… 상대의 옷차림에 간섭하는 걸 보니 왜 솔로인지 감이 잡혔지만 미도리야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쿠고는 어쩐지 신이 나 있었다. 수리비만 8백만엔이라더니 포르쉐의 승차감은 역시 값어치만큼 좋았고, 핸들을 유려하게 꺾는 바쿠고의 운전 솜씨 또한 몹시 좋았다. 이렇게 운전을 잘 했었구나.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지금껏 한 번도 바쿠고가 운전하는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탈 일도 없었지만.
점심은 미도리야도 이름은 알고 있던 중식당에서 해결했다. 딤섬을 먹었고, 이번만큼은 미도리야가 기를 쓰고 계산했다. 멍청아, 데이트는 청한 쪽에서 내는 게 매너고 룰이거든!? 바쿠고가 눈 사이를 좁혀가며 성질을 냈고, 결국 그 다음 행선지부터는 일절 지갑을 열지 않겠다는 대답을 거듭 듣고 난 후에야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음 코스는 놀랍게도, 영화관이었다.

“영화관이라니…”

극장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면서 미도리야는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이제 전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상대하고도 영화를 함께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 누구와도 이런 평범한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다. 성향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로 미도리야는 이런 데이트는 영원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미도리야는 극장 입구에서 몇 번을 주저했다. 남자 둘이 영화 보러 오는 거 좀… 그렇잖아. 그 말에 바쿠고는 기가 막힌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남자 둘이 뭐, 씨발. 뭐 어떻다고.
그때는 좀 놀랐다. 더불어 가슴께가 술렁거렸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쿠고에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한 번도 영화관에서 데이트 해본 적 없는데…”

스크린을 올려보며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아직 상영 전이었고, 광고 영상이 빠르게 흘러가는 스크린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실례합니다를 연발하는 커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남자끼리 온 커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괜히 긴장한 눈길로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
연애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데이트를 지금껏 미도리야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동성간의 관계는 흔히 그랬다. 아무리 전보다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발렌타인데이 때 남자가 초콜렛을 사러 오면 시선을 받고, 남자끼리 영화를 보러 오면 꼭 두서넛은 흘깃 거리며 수군거리는 세상이었다. 때문에 미도리야는 지금 이 평범한 데이트가 자꾸 낯설었다. 밝은 데서, 남자 둘이, 평범하게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는 데이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을까. 앞줄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커플들을 애써 외면하며 미도리야는 제 왼쪽에 앉은 바쿠고를 흘깃 바라보았다. 점멸하는 스크린 불빛에 비친 바쿠고의 얼굴은 새삼스럽지만 참 준수했고, 오늘은 늘 고슴도치 같은 머리를 매만져 앞이마를 반쯤 드러낸 덕인지 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너라면 얼마든지 좋은 상대와 평범하게 잘 만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밀며 쓰게 웃었다. 바쿠고가 돌연 인상을 썼다. 눈길은 여전히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데쿠새끼 또 쓸데없는 생각하지.”
“어, 어?”
“나는 그딴 새끼들하고 다르거든, 멍청아.”

숲색 눈이 둥그렇게 끔벅거리다 이내 흐, 웃었다. 짐작하고 있었구나.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다시 스크린 쪽으로 돌아앉는 미도리야를 바쿠고가 잠깐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될 모양인지 화면은 천천히 암전했다. 바쿠고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야.

“팔걸이 올려.”

미도리야가, 역시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왜? 바쿠고가 대답했다. 손 좀 잡게.

“데이트니까.”
“……”
“이러려고 극장에서 데이트하는 거거든, 멍청아.”

그래도 진짜 연애는 아니잖아, 캇쨩. 그런 말을 해볼 틈도 없이 팔걸이가 홱 올라갔다. 그리고 슥 뻗어온 손이 소극적으로 물러나던 미도리야의 손을 움켜잡았다. 크고 뜨거웠다. 그 느낌이 낯설어서 미도리야는 어쩐지 입술이 말랐다. 깍지채로 잡혀버린 손바닥 밑에서 혈관들이 두근두근 박동하는 것만 같았다. 심장처럼.

“손 풀면 죽는다.”

응.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영화 내용은 어쩐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꽤 붉었다. 다 끝난 후에도 손을 풀어주지 않아서 미도리야는 결국 앉은 자리에서 바쿠고와 함께 스탭롤까지 모두 시청했다. 자리를 정리해야한다는 직원의 안내에 떠밀려 바깥으로 나온 후에야 바쿠고는 주춤주춤 미도리야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래도 미도리야는 자주 허둥거렸고 자주 비틀거렸다. 이 가짜 연인에게 아직도 손이 잡혀 있는 것처럼.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계단에서 미도리야는 기어이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앞으로 쏠리던 허리를 안아준 팔 덕분이었다.

“데쿠 새끼 정신 빼놓고 다니지, 어.”

조심 좀 해라, 등신아. 바쿠고는 그렇게만 툭 우물거리곤 미도리야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앞서 걸어가는 바쿠고를 좇으면서도 미도리야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 아까는 손, 이번에는 허리가 시큰거렸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자꾸만 뜨거웠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 같은 미열에 조수석에 올라 탄 후에도 미도리야는 당황스러웠다. 제 뺨을 손등으로 꼭꼭 눌러대면서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눈을 피해 조수석의 백미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하얀 뺨이 발긋발긋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감긴가? 생각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말았다. 아니, 그렇진 않은데. 바쿠고 저택은 그 댁 안주인의 솜씨만큼 난방설비도 완벽했다. 바쿠고가 깨운 탓에 억지로 눈을 뜨기는 했지만 잠을 설칠 정도도 아니었다. 날도 오늘은 좋았었다. 그럼 나는 대체 왜 이러지?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연거푸 달아오른 뺨을 꼭꼭 눌렀다. 주차장을 빠져 나간 포르쉐가 이제 제법 한산해진 거리 위를 유려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무의식적으로 훑어보던 숲색 눈이 꿈벅꿈벅 했다.

“근데 캇쨩,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마지막 목적지는, 믿기지 않게도, 호텔이었다.

“캇쨩, 어… 이건, 어, 그러니까…”

좀 아닌 것 같다든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얼어서. 레인보우 브릿지를 배경으로 하늘을 뚫을 듯이 뻗어있는 고층 호텔을 올려다보던 미도리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포르쉐의 키를 호텔 보이에게 건네주며 바쿠고가 툭 물었다. 뭐. 그리고 동시에 선홍색 눈이 기가 막힌 듯이 일그러졌다. 마치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이런 미친.

“미쳤냐!?!! 저녁 먹으러 온 거거든!?”
“아니! 그래도 그게! 그래, 호텔이니까! 아니, 캇쨩, 저기,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니, 너랑은 그런 거 절대 못 하니까!”
“누가 너랑 한댔… 뭐, 씨발, 내가 뭐 어떻다고, 이 씨발아!”

키를 받아든 보이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러났다. 취소해.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으르렁 이를 갈았다. 취소하라고!

“나랑 못하겠다는 말 취소해.”

멱살을 잡힌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런 걸로 스위치를 켜버리는 걸까, 캇쨩은. 이게 이렇게까지 열을 낼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미도리야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힘껏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너는 애당초 게이도 아니잖아.

결국 꺾은 건 미도리야였다. 알았어. 부드럽게 휘어진 숲색 눈이 달래듯이 웃었다. 취소, 취소할게. 거듭 번복하고 난 후에야 바쿠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멱살을 풀어 주었다. 그럼 그렇지. 씨익 입매를 밀어 올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목을 잡았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기척을 느낀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뭐, 또.”
“어? 아, 아니… 그냥?”

아니, 사실 이유를 모르겠다. 미도리야가 가만히 입술 끝을 짓씹었다. 지금까지 너랑 있으면서 이런 기분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바쿠고가 말을 잃은 미도리야의 얼굴을 잠시 뚫어보다 이내 슥 몸을 돌렸다. 왜냐고 더 묻는 대신 바쿠고는 가만히 미도리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뒤를 주춤주춤 따라 로비를 지나는 동안에도 가슴은 자꾸만 쿵쾅거렸다. 손목을 잡혀버린 자리처럼, 이상하게 뜨겁던 네 손처럼.

핸드폰이 울린 건 막 로비를 통과하던 그때였다.

“어, 잠깐. 내 폰인데…”

미도리야가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낯익은 메신저의 알람 소리는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목을 놓아주고, 미도리야가 핸드폰을 꺼내는 동안에도 서너 번을 더 울렸다. 뭔데. 바쿠고가 물었다. 미도리야가 액정 위로 엄지를 놀리면서 담담히 대답했다. 글쎄…

“일인가? 아, 맞다. 나 내일 오전 중에 클라이언트 미팅 있어서…”

이런 휴일에 사적으로 메시지를 보낼만한 사람은 이제 없었고, 미도리야의 사수는 성질이 퍽 급했다. 전에도 몇 번 일요일 저녁에 내일 미팅 잊지 말고 준비하라는 전달 사항을 보내온 적이 있어서 미도리야는 이번에도 비슷한 일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무슨 놈의 회사가 일요일에도 지랄이야. 바쿠고가 울컥 눈을 구겼다. 미도리야가 핸드폰의 메신저 어플을 켜며 흐 웃었다. 그러게.
그러나 창이 열린 것과 동시에 미도리야는 우뚝 굳었다. 사수의 메시지는 아니었다. 광고도, 일기예보도, 오늘의 운세도 아니었었다.

“뭔데, 씨발, 또 엿 같은 얼굴 하고 있…”

씨근거리며 슥 핸드폰을 들여다본 바쿠고가 더불어 입을 다물었다. 액정에 큼직하게 열려있던 메시지 첫 줄부터 심상치 않았다. 친구로 추가 되지 않은 사용자가 첫줄부터 킬킬 웃고 있었다.

[차단하면 모를 줄 알았어?]

누군지 단박에 감이 왔다. 이 씨발 새끼가. 욕을 삼킨 바쿠고가 우뚝 굳은 미도리야를 대신해 스크롤을 급하게 밀었다. 킬킬 웃는 이모티콘 밑으로 네 장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익숙한 풍경에 선홍색 눈이 크게 열렸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제복 차림의 호텔 보이 앞으로 두 남자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사진 속에서 숲색 머리, 그리고 색이 밝은 머리칼의 남자가 손을 잡고 호텔 로비로 향하고 있었다.
화면에 박힐 듯 고정되어 있던 미도리야의 눈이 크게 진동했다.

[이즈쿠쨩 새로 만나는 애인 말야, G사 다닌다며?]
[잘 생겼더라? 앞집 사는 것 같더라구]
[G사 트위터 계정에 멘션 보내면 재미있겠다 그치]
[근데 그 친구는 게이, 아니면 스트레잇?]

이 개 같은 새끼가. 바쿠고가 우득 이를 갈았다. 미도리야의 얼굴은 이제 파랗다 못해 납빛이 되어 있었다. 아예 사고가 정지당한 것 같았다. 바쿠고가 잠깐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기껏 세팅한 머리를 크게 헝클였다. 등신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안 물어도 빤했다. 너는 씨발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딴 식으로 마음만 존나 약해 빠져서. 소리도 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눈길을 차마 들지도 못하고 미도리야는 제 핸드폰만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쿠고가 힘껏 입술 끝을 짓씹었다 놓았다. 멀어졌던 바쿠고의 오른손이 다시 한 번 미도리야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캇쨩? 숲색 눈이 끌려가며 물었다. 바쿠고가 이를 악물었다 놓으며 툭 대꾸했다. 닥치고 따라와.

“저녁은 됐어, 씨발. 밥맛 존나 떨어졌으니까.”
“어? 아니, 그래도 갑자기 어딜 가는… 놔줘, 응? 캇쨩, 이 손 좀 ㄴ…”
“등신새끼가 씨발,”
“……”
“남자 보는 눈은 존나 낮고.”

끌려가며 숲색 눈이 힘없이 흐, 웃었다. 나도 알아. 그 말에 바쿠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잠시 미도리야를 흘깃 돌아보고, 바쿠고는 그대로 손목을 잡아끌며 대리석이 깔린 로비 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리고 로비 앞에 멈췄을 때 미도리야는 잠시 우뚝 굳었다. 숲색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왜?

“그 새끼한테 연락해.”

체크인이 끝난 룸의 카드키를 받아 챙기며 바쿠고가 툭 말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선홍색 눈이 더불어 덧붙였다. 들려줄 테니까.

“미도리야 이즈쿠가 누구 애인인지.”







(계속)





그리하여 이 글의 최종목적지는 들려주면서 하는... 그런 것인 듯 합니다(mm....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걸 위해서 쓴 글이었는데 대체 왜 또 이렇게 길어져서 상중하로 나뉘었는지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 편은 수위조절이 관건일 듯 하지만 그래도 가급적(?) 15금으로 들고 오겠읍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해요ㅠ////ㅠ... 피드백 감사히 받잡고 있습니다ㅠㅠ 피드백은 제 빛, 제 마음의 양식, 제 삶의 원동력 ㅠ...♥

?
  • 와우 2017.03.05 22:53 SECRET

    "비밀글입니다."

  • 나기 2017.03.05 23:58 SECRET

    "비밀글입니다."

  • 김얌 2017.03.06 15:39 SECRET

    "비밀글입니다."

  • 도영 2017.03.07 00:22 SECRET

    "비밀글입니다."

  • 조아디짐 2017.03.08 18: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7.10.20 13:54
    최종목적지 살앙합니다...*^ㅂ^bbb* 너랑은 절대 못한단 소리에 ㅅㅂ ㅅㅂ 연쇄마가 된 캇짱 귀여워요...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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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단편 Salon de Ruelle 12 2017.03.14
114 단편 거짓말쟁이의 역설 3 2017.03.12
113 단편 역린의 서 / 여는 글 2 2017.03.08
»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中 6 2017.03.05
111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7~09) 16 2017.03.04
110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上 6 2017.02.28
109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4 8 2017.02.25
108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4~06) 4 2017.02.18
107 단편 오해와 착시 6 2017.02.16
106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1~03) 2 2017.02.10
105 단편 Feed The Flame 2 2017.02.03
104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3 8 2017.01.21
103 완결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完) 27 2017.01.17
102 완결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27~29) 6 201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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