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 캇뎈을 자급자족합니다
* 맞선보기 싫어서 바쿠고가 미도리야랑 가짜 애인 흉내 내는 이야기
* 가볍게 상편부터






애인이 있는데

@ruka_tea











어떤 위기는 가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루를 시도하다 2루에서 잡혀버린 역전 주자처럼.

“다시 말해봐.”

어머니가 말했다. 선홍색 눈이 한번 끔벅거리는 법도 없이 대답했다. 사귄다고. 그리고 바쿠고의 손가락이 정확히 미도리야를 가리켰다.

“데쿠새끼랑.”
“……”
“연애 중이라고.”

일단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잠시 미뤄 두도록 한다. 토요일 오후였고, 이 세련된 미국 남서부풍 2층 목조 저택의 안주인이자 아시아 굴지 건축 디자인 회사의 여사장이 오늘은 오랜만에 집을 지키고 있었다든가, 바깥주인이자 그 회사의 부사장인 아버지가 와이프 허락 없이 일찍부터 골프를 치러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의 기분이 영 언짢았을 것이라는 예측도 우선 미뤄두는 게 좋겠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제 막 연애를 선언한 이 집의 아들과 그 애인이다. 둘은 소꿉친구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남자라는 지점이었다.

미도리야는 진작부터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그랬다. 이미 수차례 각오하며 반복해 연습한 멘트였는데도 실전은 역시 달랐다. 게다가 바쿠고가의 안주인은 자기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만큼 결코 쉽지 않은 존재였다.
일단 놀라지는 않았다.

“세상에.”

그뿐이었다. 짧게 소회하고 어머니는 눈썹을 잠시 좁히며 미도리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성질 개차반으로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악명이 높았던 자기 아들의 생애 첫 친구이자 이제는 느닷없이 아들애인 포지션을 선언당한 미도리야의 아래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주었다. 아들을 대할 때와는 표정부터 달랐다.
이즈쿠. 아들과 꼭 같은 선홍색 눈이 싱긋 웃었다.

“또 협박당했니?”
“예? 아뇨, 어… 어머니, 그런 건 아니…”
“협박은 무슨, 이 새끼 나랑 사귄다니까!”
“그래, 카츠키. 선보기 싫다고 가짜 애인 행세하는 게 아니면 참 좋겠는데.”

그때는 바쿠고도 미도리야도 짠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뜨끔해서 그랬다. 역시 바쿠고가의 안주인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님 내 눈앞에서 해봐.”

어머니가 다리를 바꿔 꼬며 말했다.

“키스.”

예?

“우리 아들은 남자랑 손만 잡아도 두드러기가 나는 족속이잖아. 세상에 저 혼자 잘난 새끼… 미안, 이즈쿠. 혼자 잘난 자식이라 진심으로 자기 이외의 남자는 모두 죽기를 바라거든.”
“망할 엄마, 내가 언제 그랬…”
“그래. 그러니까 해봐. 사귄다며?”

바쿠고 가문의 안주인이 자기 아들과 꼭 같은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그때, 미도리야는 똑똑히 보았다. 왼편에 앉아 있던, 아마도 평생 소꿉친구로 살아왔을 녀석이 분한 듯이 제 입술을 깨물던 모습과 무릎 위에 놓여있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껏 주먹을 움켜쥐던 모습.
힘들 거야.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마따나 세상이 알고 자신이 아는 바쿠고 카츠키는 남자와 키스를 할 바에는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부류였다.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3초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하, 누가, 씨발.”

바쿠고가 입술을 씨근거렸다. 무릎 위에 놓여있던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턱으로 향했다. 어? 졸지에 턱을 잡힌 미도리야가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미도리야는 경계심이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하여도 평생을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를 향한 촉은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설마. 바쿠고의 손 안에 잡힌 채로 숲색 눈이 부슬부슬 웃었다. 하지만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잠, 캇쨩? 아니, 이런 얘기는 없었, 읍…”

뺨이 당겨질 때 입술은 이미 겹쳐 있었다. 항의 한 번 똑바로 할 틈도 없이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양손에 붙잡힌 채로 반쯤 기울어진 몸을 버둥거렸다. 각도를 능숙하게 틀어온 입술은 당혹감에 저도 모르게 열린 입술 틈을 단숨에 비집었다. 혀가 얽혔을 때 미도리야는 하마터면 바쿠고의 광대를 그대로 날려 버릴 뻔 했다.
안돼, 나는 공수도 유단자야. 어떻게든 숨을 참고 버티면서 미도리야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어색한 키스는 양을 몇 마리나 세면 끝나는 걸까. 10마리? 50마리? 아니, 50마리부터는 숨이 막힐 것 같은데…
다행히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양을 열 마리쯤 셌을 즈음에 이 기이한 키스를 멈춰주었다. 기세 좋게 덤벼들었던 것만큼 입술을 떼어내는 속도도 빨랐다. 아, 씨발. 바쿠고가 손등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비벼댔다. 선홍색 눈이 불쾌감과 기타 다른 여러 감정들로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존나 못해먹겠네. 그 말에 바쿠고 가문의 안주인이 빙긋 웃었다. 것 보라는 듯이.

“우리 아들이 남자랑 진심으로 키스할 리가 없지.”
“누가 씨발… 사귀는 거 맞거든!?”
“그랬니? 미안. 내 눈엔 네가 목적 성취를 위해 이즈쿠랑 억지로 키스하는 걸로밖엔 안 보여서.”

어머니가 턱짓으로 미도리야를 가리켰다. 미도리야는 영혼이 탈출 당한 것처럼 하얗게 굳어 있었다. 어오, 데쿠새끼. 바쿠고가 이를 갈았다. 연기 존나 못해. 엄마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생이구나, 이즈쿠.”

숲색 눈이 송구스러운 듯 하하 웃었다. 어쩐지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저 망할 아들이 딸이었으면 일찍부터 미도리야 부인께 말씀 드려서 저 망할, 자식이 성격을 더 버리기 전에 약혼 시켰을 거야. 반대여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하지만 이즈쿠, 아줌마가 말했었지? 카츠키 하는 짓에 휘둘려주지마. 너는 이딴 자식한텐 너무 아까워.”
“와, 존나… 내가 백배는 아깝거든!?”
“닥쳐줄래, 아드님? 엄마는 너 말고 이즈쿠랑 대화중인데.”

꽥 소리를 지르던 바쿠고가 씨근거리면서도 합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팔짱의 방향을 바꾸면서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래, 정말 너희 둘 다 사귈 수는 있겠지. 나도 내 일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이 내 아들의 반려가 되면 정말 좋겠어. 게다가 이 새끼… 미안, 이즈쿠. 이 자식은 성격이 이 따위라 어른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지 얼굴 믿고 까불다 평생 이대로 혼자 늙어죽을 거야.”
“아주 씨발 저주를 해라, 망할 엄마.”

물론 이번에도 바쿠고 부인은 아들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너라면 난 고마워. 내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는 이 동네가 다 알아. 하지만 문제는 너도 아들이고, 얘도 아들이라는 거지. 이 동네는 좁아. 나는 상관없지만 너희 어머니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생각이야? 너희 어머니는 나하곤 달라. 그거야 이즈쿠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만.”
“……”
“근데.”

아들과 꼭 같은 색의 눈이 예리하게 좁아졌다. 등받이에 기댔던 어깨를 당기며 어머니는 미도리야를 바싹 들여다보았다. 그때도 미도리야는 무심결에 딸꾹질을 할 뻔 했다. 네, 네? 어정쩡하게 눈길을 피하며 우물거린 말에도 어머니는 한참동안 미도리야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선홍색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줌마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설계도가 있었는데, 이즈쿠.”
“네, 네?”
“오늘 자고 갈 거지?”
“아, 주책 부리지마, 망할 엄마!”

바쿠고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아들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 어머니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미도리야의 손을 잡아끌었다. 작업실로 끌려가면서 미도리야는 그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

이 야단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순전히 바쿠고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가짜 애인? 나랑?」

미도리야가 숲색 눈을 연거푸 꿈벅거렸다. 토요일 오후였고, 시부야에는 당연한 듯 사람이 많았다. 똑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당연한 듯 계산한 것도, 언제나 미도리야의 몫이었던 진동벨을 자기가 챙긴 것도 바쿠고였다.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커피 잔을 받친 쟁반을 들고 오는 동안 불길한 예감에 오들오들 떨었다. 바쿠고는 결코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친절할 때는 바라는 게 있을 때 뿐이다. 그리고 역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커피에 먼저 빨대를 꽂아주면서 바쿠고는 말했다. 어, 애인. 숲색 눈이 흐물흐물 웃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 왜?」
「맞선 보기 싫어서. 아, 존나. 또 억지로 잡아왔잖아, 망할 엄마가. 내가 존나 싫다 그랬는데.」

세계 굴지의 건축 잡지 표지를 몇 번이나 장식했던 바쿠고의 어머니는 남성 중심적이었던 건축계의 유리천장을 돌려차기로 부숴버린 멋진 여성이었지만 아들만큼은 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외모준수, 문무겸비, 다재다능이라는 수식어를 어릴 적부터 달고 다녔던 바쿠고는 스물여섯 살이 되자 동네에서 가장 우수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지는 걸 싫어하는 심성 덕에 어릴 적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T대 경영대에 진학해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이름만 대면 억 소리 나오는 미국의 유명 통신 회사에 입사했다.
게다가 바쿠고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정환경조차 완벽했다. 올림픽 공식 경기장을 설계 건축한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건축사 수만 200명이 넘어간다는 회사를 이끄는 수장이었고, 사람들은 그 집의 하나뿐인 아들인 바쿠고 카츠키를 어릴 적부터 가만 놔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직업군만 몇이었더라. 미도리야는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디자이너, 외교성 행정관, 국회의원 보좌관, 영화배우, 펀드매니저, 변호사… 그러다 생각난 듯 바쿠고에게 물었다. 이번엔 어떤 여성분이신데? 바쿠고가 스트로를 쭈욱 빨며 툭 대꾸했다. S항공 막내딸.

「맞선보고 잘 되면 다음 달에 약혼 하고 영국으로 유학가라더라. 존나 웃기는 소리지. 언제까지 날 열 다섯짜리로 알 건데, 씨발. 시키라는 대로 다 하고 자빠져있게.」

아니. 너는 열다섯 살에도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은 아니었어, 캇쨩…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미도리야는 쓰게 웃었다, 이내 곧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의아해서 그랬다.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닐까? 어차피 지금껏 나간 적도 없잖아.」
「아, 데쿠새끼 또 성질 긁는다. 아니라고, 이번엔.」
「……」
「그게 씨발… 내가 사고를 좀, 쳐서.」

하도 아들이 요령 좋게, 라기보다는 과격하게, 거절하니 어머니도 이번엔 작정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바쿠고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포르쉐 911이 은빛의 미끈한 몸체를 자랑하며 차고에 서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3주일 전이었다. 이런 집의 아들이지만 바쿠고는 집안 방침에 따라 대학 시절부터 용돈이 모두 끊겼고, 글로벌 대기업의 신입 사원에게는 아직까지 도요타 SUV가 최선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바쿠고는 어릴 적부터 차를 매우 좋아했다. 이게 어머니가 쳐둔 덫인 줄도 모르고 바쿠고는 차키가 꽂혀있던 포르쉐에 올라 심야의 수도고속도로를 신이 나도록 질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대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있던 어머니를 보았을 때 바쿠고는 답지 않게 당황해서 주차를 하다 그만 앞 범퍼를 집 앞 가로수에 긁어버렸다.
어머, 이 차 아직 계약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소회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바짝 얼어 있던 아들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덧붙였다. 볼래? 맞선.

「개새끼들.」

바쿠고가 돌연 이를 우득 갈았다.

「앞 범퍼 갈아 끼우는데 8백만엔이나 받아 처먹는 엿 같은 새끼들.」

미도리야는 그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역시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인사 TOP 5에 올라 계신 분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어머니는 어떤 식으로도 말을 들어먹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아들에게 딜을 걸었다. 맞선을 보면 이 차를 깔끔하게 수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차의 소유권도 모두 바쿠고에게 넘겨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만약 거절한다면 차가 날아가는 것은 당연하고 수리비용도 고스란히 너에게 떠넘겨주겠다며 어머니는 차분한 얼굴로 아들에게 통보했다. 아무리 세계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하여도 포르쉐의 사후수습을 감당하기에 바쿠고는 아직 햇병아리 신입사원이었다.
안타깝다. 미도리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 무서운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자신의 소꿉친구에겐 일생일대의 위기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도리야는 이 흐름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바쿠고는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근데 캇쨩, 나는… 남자야.」

아무리 맞선을 보기 싫다고 해도 게이인 척을 하겠다니, 미도리야는 이 지점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남자가 필요한 거면 나보다 더 편한 녀석 많잖아. 키리시마라든…」
「미쳤, 미쳤냐!?!」

바쿠고가 드물게 혀를 씹어가며 두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진짜 싫은가보다. 질색하는 바쿠고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뒤로 어깨를 슬쩍 물리면서 미도리야는 잠시 그런 생각을 삼켰다. 상상도 하기 싫은 모양인지 바쿠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존나 소름끼쳐, 씨발. 이제 바닥을 다 드러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컵을 열고 얼음을 우드득 씹다, 선홍색 눈이 잠시 무심히 미도리야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니까.

「너는 되잖아, 씨발아.」

그때 처음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다 봤거든. 남자 새끼랑 키스하는 거.」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던 건 찔린 탓이었다. 철이 들 때부터 이미 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 번도 가까운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던 적은 없었다. 바쿠고는 당연하고, 엄마에게도 숨겼었다. 미도리야의 남자친구는 이 점을 가끔 못마땅해 했다. 데이트를 하다가도 동네에서 한참은 떨어진 역 근방에서 헤어지고 돌려보내길 반복하는 동안 싸우기도 자주 싸웠다. 내가 죄를 지었냐, 왜 떳떳하지 못하냐, 왜 자꾸 나를 숨기느냐며 화를 내던 남자친구는 기어이 미도리야를 집 앞까지 쫓아왔었다. 그게 딱 사흘 전이었다.
아무도 못 보길 바랐는데. 미도리야가 흐물흐물 웃었다. 바쿠고는 성격이 과격하고 이기적이기는 해도 거짓말로 남을 떠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날 때부터 함께 자라온 미도리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봤다면 본 거고, 네가 맞다면 맞는 거겠지. 부정할 맘도 딱히 없어서 미도리야는 그저 쓰게 웃었다.

「그럼 더 잘 알겠네. 맞아, 캇쨩.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 그래서 네 제안을 들어줄 수 없는 거야. 애인이 있으니까.」

바쿠고는 조용했다. 대답 없이 커피만 쭈욱 들이키는 선홍색 눈이 그때는 미묘하게 미도리야의 눈을 빗겨 있었다. 미도리야의 눈길이 자꾸 테이블 쪽으로 떨어졌던 것처럼.

「남자라고 다 되는 건 아냐. 이런 제안은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 엄마는 몰라. 영원히 숨길 거고. 만약 너와 애인 행세를 했다가 너희 어머니가 아시면 우리 엄마도…」
「그런 얘기 할 사람 아니거든. 자기 아들한테 사기 치는 망할 엄마이긴 해도.」
「……」
「소문나면 책임질 테니까.」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네가 날 책임져줄 필요는 없어, 이성애자니까. 그런 생각을 우물거려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말았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결국에는 바쿠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 잘 되면 내 도요타 네가 몰아. 바쿠고는 말했다. 지난달에 할부가 끝났노라며 바쿠고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설계사가 클라이언트 만나러 갈 때마다 전철이 뭐냐, 폼 안 나게. 그 투가 꼭 걱정해주는 투 같아서 미도리야는 면허가 없다는 사실을 바쿠고에게 말하지 못했다. 사실 자동차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을지 모른다. 아직 1만 킬로미터도 달리지 않았을 도요타 SUV 때문에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었다.

「할게.」

미도리야는 말했다. 더불어 덧붙였다.

「하지만 캇쨩도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
「꼭… 나중에, 반드시.」

꼭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

어머니는 해가 저물 때까지 미도리야를 작업실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반나절에 가깝도록 미도리야는 바쿠고 부인에게 붙잡혀 50여장에 이르는 건축 도면을 감상 당했다. 디자인과 건축의 앞글자만 들어도 질색을 하는 자기 아들과 달리 아들의 소꿉친구라는 이 청년은 같은 계열을 전공한 후학이다. 미도리야는 어릴 적부터 이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가 작업한 도면이나 건축 관련 서적에 자주 흥미를 보였다. 아들의 냉대에 지쳐있던 어머니는 미도리야만 오면 그렇게 열성적일 수가 없었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전공을 선택하는 데에도 바쿠고의 어머니가 준 영향이 크기는 했다. 지금 미도리야가 근무 중인 건축사 역시 어머니의 후배가 세운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작업실에서 나오니 날은 저물었고,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신이 나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엔 목욕을 권유받았고, 그 사이에 집안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이미 카츠키 도련님의 침실에 자리를 봐두었노라며 귀띔을 해주었다. 사정이 이래놓으니 길 하나만 건너면 저희 집인데도 꼼짝 없이 자고 가야할 판이었다. 어머니는 뜯지 않은 여벌 잠옷까지 미도리야에게 손수 건네주었고,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오는 바람에 다시 나가봐야 한다면서 아쉬운 얼굴을 했다. 당장 일이나 하러 사라지라는 스물여섯 장성한 아들의 등짝을 힘껏 때려주며 어머니는 현관 앞에서 힐을 신고 차림새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가만히 아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상자를 확인한 바쿠고가, 그리고 미도리야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콘돔 처음 보니? 아들과 똑같은 얼굴이 우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선물이야.

「카츠키 아빠도 내일 오실 거야. 부모님이 집을 비우고 너희 둘만 남는데 설마 아무 일도 없겠니? ‘사귀는’ 사이인데.」
「……」
「아주머니 난감하게 하지 말고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 안전한 섹스는 중요한 거니까.」
“…안전한 섹스는 개뿔, 망할 엄마가 진짜!”

바쿠고의 발에 차인 베개가 허공을 향해 크게 날았다. 침대 아래쪽에서 포키를 질근거리고 있던 미도리야가 제 쪽으로 날아오는 베개를 저도 모르게 덥썩 낚아챘다. 다시 베개를 정돈해 침대 위에 올려두는 동안에도 바쿠고는 씩씩 거리고 있었다.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절반쯤 남아있던 포키가 오독오독 미도리야의 입술 틈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까…”
“야, 씨발. 암만 뻥카건 진짜 연애건 이건 존나 아니지.”
“그래도 어머니 딴에는 걱정해주신 거 아닐까?”
“지랄한다. 아들내미 물건 안 설 걱정은 씨발 왜 하는데!?”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그게 열 받는 거였구나… 현관을 열고 나가던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능숙하게, 소위 말해, 엿 먹였다. 매일 당하면서도 바쿠고는 어머니에게 반박조차 능숙하게 못했다는 사실이 분통 터지는 모양이었다. 건축 뿐만 아니라 미도리야는 여러 방면에서 바쿠고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특히 바쿠고 카츠키를 다루는 능력만큼은 가르침이라도 얻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진지하게 하는 말씀은 아니시겠지만.
안 믿으시는 거겠지.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침대 아래에 펼쳐놓은 담요 위로 벌렁 누웠다. 어머니를 속여 보려던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 하긴, 감히 바쿠고 카츠키의 어머니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미도리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캇쨩?”

엎드린 채로 핸드폰 잠금을 열면서 미도리야가 물었다. 아직도 분기가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침대 위에서 툭 대꾸했다.

“뭘, 씨발.”
“맞선…”
“아, 안 해. 씨발, 절대 안 해.”
“하지만 어머니도 안 속으셨잖아.”
“아니, 안 끝났어. 두고 보라고. 내가 존나 믿게 만들어 버릴 거니까.”

지기 싫어하는 건 옛날 옛적부터 유구히 그랬다지만 볼 때마다 늘 새로웠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는 걸 싫어하는 건지. 맞선이 중요한 건지, 자기 어머니를 이기는 게 중요한 건지.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구체적으로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이라도 있는지 지금은 물어봐도 어차피 대답도 안 해줄 게 분명했다. 내가 부탁한 건 기억이나 할까? 생각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어차피 다 까먹었을 거야, 캇쨩은.
혼자 씩씩 거리더니 바쿠고는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망할 엄마 두고 보자. 꽉 입술 끝을 짓씹으며 결의처럼 선언하더니 색 밝은 머리가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퀸 사이즈의 더블베드가 크게 출렁거리는 모습을 미도리야는 반사적으로 잠깐 올려다보다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바쿠고가 천장을 향해 우물거렸다. 낱말 퍼즐에서 영영 생각나지 않던 단어가 이제야 뒤늦게 다시 떠오른 듯한 얼굴이었다.

“데쿠새끼가 말했던 그 건방진…”

바쿠고의 말을 멈춘 건 침대를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아니라 진동 소리였다. 진동소리를 따라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미도리야의 손바닥 밑에 놓여있던 핸드폰이었다. 널따란 방의 침묵을 뒤흔드는 진동소리는 유난히 컸다. 하지만 액정을 내려다보면서도 미도리야는 곧장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쿠고가 울컥 눈을 구겼다.

“아, 존나 시끄러워. 전화 받아, 씨발아.”
“……”
“야, 데쿠.”
“……”
“야.”
“어, 어?”

바쿠고가 어깨를 손끝으로 툭 떠민 후에야 미도리야는 뒤늦게 허둥지둥 대답을 했다. 아, 응.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도리야는 손 안에 쥔 핸드폰을 받지는 않았다. 선홍색 눈이 일순 예리하게 좁아졌다. 감 잡았다. 바쿠고가 어깨 너머로 미도리야의 핸드폰 액정을 흘깃 쳐다보았다. 액정에는 이름 대신 <받지 말자>라는 문구가 껌벅거리고 있었다.
하, 씨발. 바쿠고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등신 새끼.

“헤어지자고 했냐?”

대답 대신 미도리야의 어깨가 크게 움찔 했다. 하여튼 이런 건 더럽게 못 감춘다, 데쿠새끼. 바쿠고가 입술 끝을 힘껏 씹었다. 그리고 미도리야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을 단숨에 낚아챘다. 말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잠, 캇쨩! 그런 게 아니라…!”
“너 뭐야, 씨발.”
“……”
“뭐하는 새끼냐고.”

하지마, 캇쨩. 미도리야가 소리를 죽여 우물거렸다. 핸드폰을 다시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손짓을 능숙하게 피하면서도 바쿠고는 통화를 끊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예상했던 대로 남자였고 젊었다. 하지만 바쿠고는 웃지 않았다. 표정을 잃은 입매가 낮게 대답했다. 어, 씨발.

“이 새끼 애인.”


(계속)






예전부터 계속 쓰고 싶었던 글인데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 그 김에 휘리릭 사고를 쳐봅니다ㅠ.ㅠ.ㅠ.ㅠ.ㅠ..... 오랜만에 가벼운 글 쓰니까 넘 좋네요ㅠㅠㅠㅠㅠㅠ 아마 상하로 끝날듯...

?
  • 도영 2017.02.28 17:33 SECRET

    "비밀글입니다."

  • 도영 2017.02.28 17:41 SECRET

    "비밀글입니다."

  • 김얌 2017.03.02 09:58 SECRET

    "비밀글입니다."

  • 팔성이 2017.03.12 15:20 SECRET

    "비밀글입니다."

  • 사랑ㅇ합늬다ㅏ 2017.05.06 02:20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7.10.20 13:39
    아직 사랑하지 않는 미도리야 너무 신선하고 사랑스러워요....!!*>u<* 카츠키는 차를 좋아하는군요. 귀여워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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