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아예 숫자로 바꿨어요 <
* 중3편이자 4편
* 원작 기준 11년 후, 바쿠고랑 미도리야가 빌런 x 프로파일러로 재회하는 이야기


BGM / Koda - Staying


http://youtu.be/7PClJma9Q8U







손은 말하지 않는다


@ruka_tea




04








침묵 같던 어둠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었다.

손님은 미도리야에게 쓰러진 것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제 어깨에 기울어 꼼짝도 하지 않는 얼굴을 미도리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쳐다보았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바쿠고 카츠키였다. 혼란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러나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바쿠고의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숨은 가빴고, 등은 축축했다. 그 느낌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해서 미도리야는 축축이 젖은 핏자국을 따라 상처의 근원을 찾아 급하게 눈길을 돌렸다. 후드 자락 밑으로 하얗게 드러난 목과 어깨의 경계점이 유난히 붉게 흠뻑 젖어 있었다. 흠뻑 젖은 후드 자락 틈으로 그제야 옴폭 파인 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칼 끝으로 도려낸 듯한 상처는 미도리야의 예상보다도 깊었다.
대체 이게 무슨… 미도리야가 가빠진 숨을 깊게 들이켰다.

“저기요, 바쿠고씨. 바쿠고씨?”

일단은 방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저보다 반뼘은 큰 몸을 어설프게 부축해 거실로 끌어오는 동안에도 바쿠고는 헉헉 거칠어진 호흡을 몰아쉴 뿐 구겨진 눈을 뜰 줄도 몰랐다.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 팔다리를 가까스로 추슬러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소파 위에 엎드리도록 눕혀놓았다.
거실에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수배 중인 빌런을 구류해야 한다든가, 혹은 선배들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급하게 옷을 벗겨내면서도 미도리야는 계속 손끝을 떨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후드의 조여진 끈을 풀고 옷섶을 끌어내릴 때 바쿠고가 크게 요동쳤다. 과다출혈 시에 볼 수 있는 흔한 발작이다. 경찰대에 있을 때 이론으로는 그렇게 배웠지만 막상 실전이 코앞에 닥치니 눈앞이 새하얬다. 프로파일러는 현장과 먼 보직이었고, 때문에 이런 돌발상황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침착해야해. 침착하게 생각하자. 미도리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일단은 지혈이 급했다. 상비하고 있던 구급함을 급하게 가져와 붕대와 지혈제를 꺼냈다. 급한 손길에 걸린 구급함이 와르르 넘어지면서 속을 드러냈지만 그런 걸 정리할 여유나 시간이 없었다. 살려야 해. 그 생각 밖에는 하지 않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죽으면 안 된다고, 살릴 거라고, 구해줄 거라고 연거푸 생각을 짓씹었다.
그러다 미도리야는 스스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지금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던 기억,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달려들었던 기억.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모르겠다. 파헤치려고 안간힘을 써보아도 역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미도리야는 이번에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기분 탓이야. 붕대를 크게 풀면서 미도리야는 그렇게만 결론지었다.
지혈제를 쓰고 붕대를 단단히 압박해 감는동안 바쿠고는 몇 번이나 몸을 크게 떨었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도 자신을 자꾸 밀어내는 손을 피해서 미도리야는 붕대의 매듭을 마무리했다. 이론에도 실습에도 성실했던 경험은 이럴 때 꽤 큰 도움이 됐다.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피가 멎으면서 바쿠고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미도리야는 소파 아래에 기대 후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크게 째깍거렸다. 멈췄던 고민들이 다시 터진 보처럼 살아났다. 어쩌면 딜레마인지도 몰랐다.

“말을… 해야 할까, 선배에게.”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씹었다. 아니면 병원에 먼저 연락을 해야 할까.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들이 정처 잃은 부표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지, 당신의 상처는 무엇인지, 당신은 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왔는지.

“뭔가를 파낸 자국 같았는데…”

상처는 깊었지만 좁았고,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후빈 것처럼 벌어져 있었다. 공격을 받았나. 생각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몸에는 그 상처 외에 다른 상흔이 보이지 않았다. 칼이나 총, 그 밖의 다른 둔기들로 난 상처도 아니었다. 법의학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단서들을 모아 큰 그림으로 유추해내는 것은 프로파일의 영역이다. 절반은 직업적인 본능이었고, 남은 절반은 호기심이었다. 미도리야는 바쿠고 카츠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싶다는 그 마음이 프로파일러가 빌런에게 가지는 흥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도리야도 퍽 헷갈렸다.
칼 끝 같았는데. 아니, 그보다는 좀 더 깊고 날카로웠다. 칼보다는 메스 같은 의료용 기구라고 보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기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후벼낸 자국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파냈을까.
당신의 목 밑에 묻혀 있던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를 보면 보통 GPS 신호 마이크로칩 같은 걸 여기 심던데.”

흐, 농담처럼 흐물흐물 웃으며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주변은 조용했고, 바쿠고는 소파 위에 반쯤 엎드리고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의 조명들이 블라인드의 틈을 비집고 빗살처럼 기울어졌다. 피를 흘린 탓인지 보다 더 하얗게 반짝이던 얼굴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오래고 빛바랜 사진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지워져 버린 오랜 기억인 것 같았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미도리야는 이미 홀린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알고 있었다. 빛처럼 찬란한, 태양처럼 눈부신, 불길처럼 뜨거운, 그리하여 데일 것만 같았던 한 존재의 얼굴.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착각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걸 알 수가 없어서 미도리야는 손을 뻗어 천천히 바쿠고의 얼굴을 매만졌다. 반듯한 이마, 주름이 잡혀 일그러져 있던 미간. 길고 사나운 눈꼬리 위를 덮고 있는 속눈썹은 의외로 길었고, 입술은 모양새가 좋았다. 잘 생겼다. 솔직한 감상을 우물거리며 미도리야는 또 한 번 봄바람처럼 흐 웃었다. 이런 얼굴이니 인기는 어디엘 가도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B의 외모와 스타일에 반했다는 추종자들이 인터넷에도 꽤 많았었다.
하지만 정작 당신에게 다가가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다. 겹겹이 쌓인 벽, 누구에게도 함부로 허락하지 않을 그 견고하고 단단한 벽. 그러나 누군가는 한 번쯤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의 그 견고한 벽을 뚫고 당신의 마음까지 가닿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모두 보았을 지 모른다. 당신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 당신의 가장 약한 부분, 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 당신은 아마 그를 싫어했을 것이고, 밀어내며 미워하고 무시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몇 번은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벽이 견고한 자들은 낯선 감정의 틈입을 용서하지 않는다. 당신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당신을 당신답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
그리고 당신은 끝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온 가슴이 부서지도록, 목숨을 걸어도 좋을만큼.

“부럽다…”

저도 모르게 우물거리다 미도리야는 제 말에 놀라 그만 입을 합 다물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이 부족해서 그래. 그렇게만 생각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단은 자야겠다. 바쿠고 카츠키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는 한 숨 달게 자고 생각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다. 이런 몸으로는 어차피 당장 달아나지는 못할 테니까.
생각을 짓씹으며 몸을 일으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손목을 잡혔다.

“저 바쿠고씨, 저는… 그러니까 딱히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당황하니 혀끝은 자꾸만 헛돌았고, 손목은 아무리 빼내려고 애를 써도 빠지지 않았다. 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홀로 어버버 늘어놓다 미도리야는 이상한 기분에 그제야 눈길을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다. 바쿠고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색이 밝지 않은 흑발 머리 아래로 꽉 닫힌 눈과 눈 사이가 고통스럽게 좁아졌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바쿠고는 중얼거렸다.

“데쿠…”

또 그 이름이었다.

“가지마, 씨발…”
“……”
“가지… 말라고, 제발, 내가…”
“……”
“잘못했어… 존나, 내가 잘못했다고, 씨발.”
“……”
“가지마.”
“……”
“가지마, 등신아.”

당신은 누굴 잡고 있는 걸까. 미도리야가 바싹 마른 입술을 세차게 짓이겼다. 목 안쪽이 자꾸만 답답했다. 생각에 아득해졌다. 누구를 이토록 애타게 붙잡고 싶어하는 것일까. 당신은 누굴 잃어버렸을까. 누굴 잊었을까. 그도 당신을 찾고 있을까. 그는 누구일까. 그의 마음도 당신과 같을까, 아니면 다를까.
확실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당신이 사랑했을 그 사람이 아냐.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다. 허한 감각에 미도리야가 또 한 번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감겨 있던 바쿠고의 눈이 번쩍 열린 건 그때였다.
눈은 아까 보았던 것처럼 검지 않았다. 이건 대체… 선명하게 붉은 눈을 가늘게 떨면서 우물거리다, 이내 얼굴을 울컥 일그러뜨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목을 떨쳐내듯 놓았다. 후려쳐진 자리가 홧홧했다. 아픔보다 서러운 감각이 미도리야의 손금들을 따갑게 긁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오른쪽 손바닥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길에 데인 것 같았다. 그 아픔이 생생해서 미도리야는 먼저 말을 열었다. 혀끝이 또 한 번 변명 같은 말들을 더듬었다. 쓸모없이.

“일… 일어나셨어요? 저는 그냥, 딴 게 아니라 괜찮으신 지를 확인하려고 그냥…”
“꺼져.”
“……”
“도와달라고 한 적 없으니까.”

구해달라고 한 적 없으니까.

숲색 눈이 크게 열렸다, 가라앉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다. 낯설지 않아 그랬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누구에게 했던 이야기인지를 미도리야는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당신과 나는 그런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미도리야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함부로 손을 대서 죄송해요. 하지만 찾아온 건 그쪽이에요, 바쿠고씨.”
“……”
“일단은 푹 쉬세요. 연락은… 안 할 테니까.”

목적어가 없어도 바쿠고는 어차피 알아들었을 것이다. 짐작하며 미도리야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쏟아져 있던 구급함을 대충 정리해 챙겨 들고 침실로 돌아왔다. 문이 닫힌 후에야 거실 쪽에서 소리가 났다. 아, 씨발. 바쿠고가 몇 번이고 욕을 했다. 씨발, 씨발, 아, 개 같은, 씨발! 미도리야는 닫힌 문에 등을 대고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선배에게 전화를 하는 거야. 어차피 바쿠고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묻고 싶은 건 그 후에 취조실에서 물어도 된다. 당신은 어디로 갔었던 건지, 사라진 며칠동안 무얼 했는지, 그리고 그후에 왜 하필 나를 찾아왔는지.

왜 자꾸 나를 데쿠라고 부르는 건지.

“…놀리는 거야.”

그것뿐이야. 생각하며 미도리야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썼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

미도리야는 끝내 선배에게 말하지 못했다.

며칠이 흘러도 수사는 제자리걸음이었고, B를 추적할 단서조차 전무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경찰본부의 무능함을 비난했다. 올마이트가 있던 시절이 좋았노라며 사람들은 자주 푸념처럼 떠들었다. 그래도 사람 좋은 선배는 미도리야에게 왜 이렇게 추적이 더디냐고, 주어진 정보가 부족하냐고 채근하지 않았다.

「프로파일러라고 신은 아니니까. 정보가 없는데 너라고 무슨 수로 바쿠고 카츠키를 찾겠냐.」

선배는 오히려 미도리야에게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때마다 미도리야는 선배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괜히 먼 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선배는 매일매일 더 말라갔고, 매일매일 더 초췌해진 얼굴로 연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통 모르겠다니까. 이 정도면 빌런 연합과 한 번쯤은 접촉했을 법도 한데 시가라키 녀석도, 다른 빌런들도 영 조용하단 말이야. 오죽하면 지금 그런 소리까지 돌고 있다니까. B가 도주하다가 사고로 어디에서 죽어버린 게 아니냐는 그런 말까지 있어. 이러니까 SNS는 안돼. 인생의 낭비라니까.」


추종자들은 B가 불사신이라던데? 선배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미도리야는 그 말에도 좀처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자꾸 따끔거렸다. 어색한 입꼬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미도리야는 일부러 눈길을 떨어뜨리고 발끝을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선배. 미도리야가 하지 못한 말을 혀 밑으로 삼켜넣었다. 하지만 실수로도 말할 수는 없었다. B가 우리 집에 있다고, 당장 체포하러 오라고, 그가 사흘 전에 아픈 어깨를 움켜잡고 비틀비틀 나를 찾아왔다고, 지금이 기회라고. 양심의 가책으로 가슴이 아파올 때마다 미도리야는 도리어 묻고 싶었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왜 당신을 보낼 수가 없는 걸까.

“등신 새끼네, 이거.”

다른 때보다 유난히 피곤한 몸을 끌고 퇴근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미도리야를 맞은 건 낮고 불퉁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바쿠고가 제 집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꿈이 아니었구나. 멍한 생각을 짓씹으며 미도리야가 구두를 발끝으로 벗으며 제 집으로 올라섰다. 바쿠고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머리색과 눈색은 본래의 색으로 이젠 모두 돌아와 있었다. 아마 추격을 피하기 위해 요즘 시중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특별한 안료를 눈과 머리칼에 썼던 거라고 미도리야는 잠깐 생각하고 말았다. 그보다 바쿠고가 입고 있는 티셔츠가 낯이 익었다. 독립할 때 본가의 짐 속에 섞여 있던, 미도리야에겐 너무 큰 티셔츠였다.

“남자 애인이랑 살았었냐?”

욕실로 들어가는 미도리야의 등 뒤에 바쿠고의 목소리가 툭 꽂혔다. 일일이 대꾸하자니 미도리야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하루종일 여기에 있는 바쿠고 카츠키를 추적하는 시늉을 한 탓이었다. 대답 대신 미도리야는 잠깐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소파 쪽에서 선홍색 눈길이 이쪽을 흘깃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거. 바쿠고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손끝으로 잠깐 잡았다 놓았다. 미도리야에겐 너무 큰, 아무래도 사이즈 교환하는 걸 잊어버린 것 같은 티셔츠였었다.

“암만 봐도 형사선생 사이즈 치곤 너무 큰데. 나 같은 새끼랑 살았었나보다. 어쩐지 질질 흘리면서 쳐다본다 싶었지, 내가.”
“……”
“대꾸도 없네. 기분 더럽게.”
“……”
“아니라고 해, 씨발.”

네. 미도리야가 마지 못해 대답을 했다. 아니에요. 흐물흐물 웃는 입가에조차 기운이 없었다.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그러나 별 말 없이 바쿠고는 다시 TV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존나 맘 약한 새끼. 이를 꽉 악문 목소리가 그렇게 씨근거렸다.

“경찰이 신고도 못할 짓을 왜 하냐, 씨발.”
“……”
“사람 오해하게.”

눈치는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바쿠고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그러게, 나는 왜 당신을 신고도 못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당신을 숨겨주고 있는 걸까.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었다.

나는 왜 당신을 보낼 수가 없는 걸까.
당신은 왜 나를 떠나지 않는 걸까.

상처가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꽤 아물었을 것이다. 저를 볼 때마다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꺼지라는 소리를 반복하면서도 바쿠고는 쉽게 떠나지는 않았다. 참다못해 물었을 때에도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냉장고에서 멋대로 꺼낸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무심히 이렇게나 대답하고 말았었다. 네가 만만하니까, 씨발아. 그리고 말했다. 참아.

「만나기로 한 양반이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아서.」
「……」
「만날 약속만 잡히면 곧장 뜰 테니까, 참으라고.」

몇 번을 다시 캐물어도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남은 건 미도리야 스스로 추측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바쿠고는 개통 되지 않은 핸드폰 공기계로 가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만나기로 했다는 상대일 것이다. 빌런 연합일까?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지만 본부에서 선배에게 전해들은 정보가 이 예측을 부정했다. 시가라키가 눈에 불을 켜고 B를 찾아다닌다던데. 미도리야는 그때 표정 관리를 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었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 먹은 얼굴을 선배에게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었다.

“빌런 연합에서 당신에게 현상금을 걸었다고 하던데요.”

바쿠고씨. 그 말까지 덧붙고 난 후에야 바쿠고는 비로소 침실 앞에 서있던 미도리야를 흘깃 돌아봤다. 잠깐 소리 없이 눈이 마주쳤다. 바쿠고가 제 머리를 크게 헤집으며 툭 씨근거렸다. 뭘 대단치도 않은 걸 물어보고 자빠져 있느냔 얼굴이었다.

“나는 또 씨발 뭐라고.”
“빌런 연합에 시가라키가 메시지를 돌렸다고 제보가 들어왔어요. B의 시체를 들고 오면 1천만엔을 주겠다고.”
“……”
“당신은… 그의 오른팔이었잖아요.”
“오른팔은 무슨. 하, 씨발. 어휘 존나 후지네.”

선홍색 눈이 같잖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뿐이었다. 다시 TV로 고개를 돌리며 바쿠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바쿠고씨. 미도리야가 재차 불렀다. 대답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뭐, 씨발. 바쿠고가 말했다. 선홍색 눈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앞으로 씹질 하고 싶을 때만 말 걸어라. 존나 짜증나니까.”
“바쿠고씨.”
“왜, 하고 싶냐? 지금 하고 싶으면 해주고.”
“……”
“너 같은 새끼들만 보면 물건이 존나 서버려서 씨발, 죽도록 쑤셔 버리고 싶다고 경고했을 텐데.”

말문이 막힌 미도리야가 빈 호흡을 버끔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말을 돌리는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더 이상 파고 들 수는 없었다. 이 남자는 처음 볼 때부터 그랬었다. 저 견고한 벽을 나는 한 번쯤 뚫어는 볼 수 있을까. 당신의 진짜 얼굴에 가닿을 수는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미도리야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며 몸을 돌렸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어 그래. 미도리야는 거듭 생각했다. 내일은 꼭 선배를 만나 솔직하게 얘기해야겠다.
생각을 삼키며 침실문을 당길 때 열린 틈으로 무심한 말투가 툭 끼어들었다. 참견하지 말라고. 여전히 TV 쪽을 향해 있던 색 밝은 머리칼이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몰라서 좋은 일이 더 많으니까.”
“뭐가요.”
“……”
“바쿠고씨.”

바쿠고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폐쇄된 상가의 좁은 골목 위로 길게 어둠이 드리워졌다.
전기가 오래 전에 끊어져 버린 골목에는 가로등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먼지가 새카맣게 앉은 가로등을 흘깃 바라보다 시가라키는 허리를 굽굽히고 길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새끼손톱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칩이었다. 칩은 검고 탁하게 굳은 액체에 뒤덮여 있어 본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색은 달랐지만 그 비릿한 액체가 본래 피라는 사실을 시가라키는 알고 있었다.
와아. 시가라키가 표정 없이 감탄했다. 독하네, B씨.

“설마 자기 몸에서 위치 정보 칩을 파낼 줄은.”

선생이 화낼 텐데. 혼잣말을 삼키며 시가라키가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뱉는 말투와 달리 얼굴은 킬킬 웃고 있었다. 곁에 서있던 빌런이 잠깐 굳은 얼굴로 혼자 킥킥 웃고 있던 시가라키를 흘깃 거렸다. 뭐, 괜찮아. 시가라키가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다. 흉터가 깊게 앉은 입술이 히, 웃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 같았다.

“뭐, 괜찮아. 어차피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거든.”

바쿠고 카츠키는 아무 연고도 없는 이런 외곽지역까지 와서 스스로 칩을 파냈다. 그리고 사라졌다. 지난 10년간 아무 문제없이 잘 달고 있었던 칩을 이제와 파낼 만큼 간절한 게 뭐였을까. 그게 누구였을까. 시가라키는 10년 전부터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갈 거야. 칩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시가라키는 돌아섰다. 곁에 있던 녀석들이 뒤늦게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디로?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시가라키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건물과 건물이 어깨를 맞댄 좁은틈으로 언뜻 보인 하늘에 아까는 보지 못한 반달이 어스름히 걸려 있었다. 시가라키가 습관처럼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아, 경찰은 귀찮은데.

“죽여야지, 뭐.”

어차피 10년 전에 죽었어야 하는 목숨을 10년 더 살게 해줬잖아. 이제는 죽을 때도 됐지, 뭐. 홀로 생각을 우물거리며 시가라키가 히죽 웃었다. 아, 그래도 그 남자랑 만나버리면 곤란한데. 잠깐 골치 아픈 생각을 하다 시가라키는 금세 머리를 털었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좋았다. 지금 보고 싶은 얼굴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예쁘게 잘 컸을까.”

눈이 예쁜, 겁이 많던, 주제에 건방졌던 그 무개성은.








*

빈 어둠을 뚫고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바쿠고가 스르륵 눈을 열었다. 자정이었다.

거실에선 홀로 켜둔 TV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마감뉴스의 아나운서가 오늘도 B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수사는 난항에 빠져 있다는 마무리 멘트를 전했다. 바쿠고가 손을 더듬어 TV를 끄고 리모컨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잠을 깨운 건 저런 하이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명을 닮은 울음소리가 또 연거푸 들려왔다. 침실 쪽이었다. 바쿠고가 담요를 박찼다.

“아, 존나 귀찮네.”

이 점 하나만큼은 징그럽게도 안 변했다, 데쿠새끼. 입술 끝을 꽉 짓이기면서 바쿠고는 단단히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어 젖혔다. 방문 쪽을 향해 모로 누운 하얀 얼굴 위로 도쿄의 불빛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거린 모양인지 엉망으로 엉킨 고수머리 아래로 드러난 이마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바쿠고가 걸음을 당겨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도 미도리야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자꾸만 몸을 잘게 떨었다. 가까이 다붙고 난 후에야 바쿠고는 속눈썹 밑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물지 못한 입술이 울음처럼 헐떡거렸다.

“캇쨩…”

머리칼을 향해 뻗어가던 바쿠고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 했다. 그대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손 그림자 아래에서 미도리야는 제 입술을 꽉 깨물며 몇 번이고 같은 이름을 불렀다. 선홍색 눈이 새벽 미명처럼 흔들렸다. 며칠동안 벌써 여러 번을 들었다. 그래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버릇처럼 주저앉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너는 나를 잊었을 텐데.

“캇쨩… 흑, 캇쨩… 캇쨩, …지마, 그러지마…”

단순히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니었다. 해마를 잘랐다고 시가라키는 말했었다. 흉터가 크게 앉은 입술로 녀석은 바쿠고를 가리키며 꼴좋다는 듯이 웃었었다. 이 녀석은 영원히 너를 기억할 수 없을 거라고, 너를 전부 도려냈다고.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나는, 씨발, 아직도, 빌어먹을, 그날 꿈을 꾸는데.

바쿠고가 빈주먹을 힘껏 쥐었다.

“웃기지마.”

아직도 어제인 것처럼 그날은 선명했다. 코를 찌르던 소독약 냄새, 낡은 암체어. 가죽 벨트에 팔다리를 다 묶이고 마취 탓에 의식을 잃어버린 얼굴은 조명 탓에 유난히 더 하얘보였었다. 그 자리에서 너는 기억을 삭제 당했다. 녀석들이 네 머리를 후비며 네 기억을 도려내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봤었다. 네가 부르는 그 이름이 이제 나일 리가 없어. 어차피 깨어나면 잊어버릴 기억이다. 며칠 전처럼 이번에도 그럴 게 분명했다. 너는 밤이 저물도록 나를 부르다 결국에는 잊어버리겠지.

천천히 무릎이 꺾였다. 울보 새끼. 바쿠고가 흠뻑 젖은 얼굴 곁에서 소리 죽여 웃었다. 너는 여전히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어. 색이 밝은 머리칼이 젖은 뺨을 향해 기울었다. 멋대로 뻗어간 손가락들이 축축이 젖은 뺨을 스칠 때 미도리야는 잠깐 몸을 흠칫 떨었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바쿠고가 젖은 눈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자꾸 웃음이 났다. 눈가가 덧없이 시큰거려서 바쿠고는 일부러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등신새끼.

“그러니까 그만 울어, 멍청아.”

젖은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쳤다. 벌어진 입술 틈을 조심스럽게 가를 때 미도리야는 막힌 입술로 흐끅 떨었지만 역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채로 오래도록 입술이 겹쳐 있었다. 울음결에 헐떡거리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분 좋아. 미도리야는 잠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운 냄새가 났었다. 오래도록 아팠던 자리처럼, 오래도록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이름처럼. 먼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넌 그냥 잊어, 영영.

“…나는 씨발, 겁쟁이니까.”
“……”
“너를 두 번 잃을 용기가 없는 새끼니까, 나는.”

아. 그때는 가슴이 너무 아팠었다. 꿈일 텐데도.






#

미안하다.

남자는 소년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웅도 결국에는 어른이었다. 헛된 희망을 잔뜩 심어주고 결국에는 할 수 없노라며 백기를 들고 물러서는 겁쟁이었고, 거짓말쟁이였다.

「거짓말.」

소년이 울음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하지마. 당신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잖아.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다 무사할 거라고 말했었잖아.」
「……」
「데쿠 새끼가 씨발, 당신을 얼마나 존경했는데!」
「……」
「영웅은 무슨, 거짓말쟁이가.」

남자는 끝내 소년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계속)






한달만에 쓰네요 허허허... 이것도 며칠동안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ㅠ.ㅠ.ㅠ.ㅠ.ㅠ.ㅠ.ㅠ 제가 정신이 없어서 상중하에서 숫자로 바꿨는데 오래 가진 않을 듯 합니다. 아마 7편이나 8편쯤 끝낼듯.....
무튼 이 글도 매편매편 감정 소모 너무 심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 편도 감정 추스른 후에 스르륵 들고 오겠습니다. 이제 뭐가 슬슬 좀 풀릴 듯..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완결 히로아카 게시판 이용 전에 읽어주세요 XD 2016.05.24
121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8 7 2017.04.04
120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7 13 2017.04.02
119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6 4 2017.03.26
118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5 8 2017.03.22
117 단편 Wolf Trapper 3 2017.03.20
116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下 13 2017.03.19
115 단편 Salon de Ruelle 12 2017.03.14
114 단편 거짓말쟁이의 역설 3 2017.03.12
113 단편 역린의 서 / 여는 글 2 2017.03.08
112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中 6 2017.03.05
111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7~09) 16 2017.03.04
110 완결 애인이 있는데 / 上 6 2017.02.28
» 완결 손은 말하지 않는다 / 04 8 2017.02.25
108 연재 꽃이 피었습니다 (04~06) 4 2017.02.18
107 단편 오해와 착시 6 2017.02.16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