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도둑처럼 살며시 백업합니다.

* 사랑 받으면 꽃이 피어나는 세상에서 어느날 붉은 꽃 한 송이 핀 이즈쿠의 이야기
* 캇뎈 / 원작에서 이어지는 세계인 것 같습니다



BGM / 단비(Sweet Rain) - 사랑이 꽃을 닮아 (Piano)


http://youtu.be/fMQmGVJldNA






카츠키 그리고 이즈쿠에게

루카 씀





이 피었습니다

01 ~ 03









꽃이 되고 싶었다.

사랑을 받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즉 그런 뜻이 된다. 동화책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처음으로 읽은 책이었다.

─ 어린이 여러분, 세상은 나무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나무에서 태어났지요. 이름도 생김새도 모두 다르지만 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린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 사시사철 잎을 떨구지 않는 푸르고 단단한 나무였지요. 햇빛과 바람, 땅으로 살포시 내려오는 빗줄기가 나무를 키워주었어요. 그래서 나무는 언제나 예쁜 꽃을 가득 피웠답니다. 그 꽃은 또 무성한 씨앗으로 맺히곤 했지요. 우리는 모두 그 씨앗에서 태어났어요.


글자를 처음으로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가장 먼저 <씨앗동화>를 사주었다. 이 세계의 엄마들이라면 흔히 그렇게들 한다. 관례와도 같은 거다. 엄마들은 어쩌면 엄마가 되어 이제 아이에게 먹고 마시는 것 외에 더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을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그 책을 아이에게 쥐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씨앗동화>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이었다. 나는 지금껏 그 책을 수 천 번쯤은 꼬박 읽었다. 올마이트의 데뷔 영상만큼, 히어로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위한 유에이 고등학교의 입학 안내서만큼.

─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짝을 만나고 번식을 하며 후손을 남깁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본능이에요. 말이 어렵나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이라는 뜻이에요. 거리에 핀 이름 모를 들꽃,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는 강아지와 같아요.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짝을 만나 후손을 남긴답니다. 그건... 그래요. 책임 같은 거예요. 지구가 우리에게 남겨준 숙제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두세요. 첫째, 모든 인류에겐 짝이 필요해요. 둘째, 그래서 사랑이라는 간편한 감정이 있답니다. 사랑은 즉 여러분이 짝짓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가끔 길을 걷다보면 묘한 꽃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손목에, 발목에, 손바닥 안에, 입술에, 뺨에, 머리 위에, 귓불 밑과 뒷목에 꽃이 피어 있었다. 피어난 위치만큼 꽃들의 색과 모양도 저마다 달랐었다. 붉은 꽃, 하얀 꽃, 푸른 꽃과 노란 꽃. 어떤 것은 색이 섞였고 어떤 것은 점박이 강아지처럼 독특한 무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내 새끼 발가락에 관절이 하나 더 있어서 걱정이라던 의사 선생님의 왼손 약지에도 시든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난 무개성이라는 선고보다 시들어 가는 그 꽃이 무서워 펑펑 울었었다. 피어있는 꽃이 아름다운만큼 시들어가는 꽃은 참으로 무섭고 추해서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꽃 한 송이 없던 우리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쓰게 웃으며 선생님에게 그렇게만 말했었다. 개성이 없다고 해서 우리 이즈쿠가 충격이 큰 가봐요.

─ 하지만 사랑은 공평하답니다. 당신이 개성이건 무개성이건, 당신에게 힘이 있건 없건.


동화책은 말했다.

─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에 씨앗이 피어날 거예요. 그건 그 사람조차 모를만큼 작고 투명한 씨앗이죠. 씨앗은 어느 틈엔가 바람결을 타고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향해 날아간답니다. 사랑에 빠진 눈짓을 따라, 사랑을 원하는 손짓을 따라 씨앗은 사뿐사뿐 날아 사랑하는 상대의 몸에 스며들어요. 그리고 어느 틈엔가 조용히 뿌리를 내리면 그때부터 오랜 기다림이 시작되지요.


엄마에게도 꽃이 핀 자리가 있었다. 유치원 때 나를 예뻐해주셨던 선생님의 왼쪽 귀에 예쁜 패랭이 꽃이 하얗게 피었을 때 나는 그 꽃이 예뻐 넋을 놓고 보다 그날 배운 동요를 끝까지 다 외우지 못 했었다. 그 일로 누군가는 나를 두고두고 놀렸었다. 이미 손 안에서 불꽃을 피울 줄 알았던 녀석이었다. 오래고 아득한, 내게 있어선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었다. 마치 씨앗동화처럼.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했던 타인이었다. 더불어 태어나 처음으로 미워했던 타인이기도 했다. 동전처럼 앞뒤가 다른 그 감정의 이름을 나는 오래도록 캇쨩이라고 불렀었다. 부르면 어쩐지 목 뒤가 간질거리는 그런 이름이었다. 이름 모를 씨앗이라도 앉아버린 것처럼.

─ 기다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하루, 한달, 일년... 어쩌면 10년이 걸릴 지도 몰라요. 그의 마음이 더 무르익을 때까지 씨앗은 기다려야 해요. 오로지 사랑만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으니까요. 가벼운 호감만으론 싹을 틔우지 않지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 당신은 거울을 보다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어, 이상하다?
누가 내 몸에 꽃을 피웠을까?


캇쨩은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걸까? 소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나는 오래도록 그 질문 안에 갇혀 있었다. 둘뿐이었던 관계는 유치원에서 소학교로,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갈 때마다 수많은 숫자들로 쪼개지며 더 많은 간격을 벌려 놓았다. 캇쨩은, 그러니까 바쿠고는 분명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심한 말을 수시로 들었고 담담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몇 번씩 상처를 입었다. 캇쨩의 말은 칼보다도 예리해서 나는 자주 뒷목이 베인 것처럼 아팠었다. 아픔이 심할 때마다 나는 가끔 캇쨩의 몸 어딘가에 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어느날 자기 몸에 꽃이라도 피어버린다면 캇쨩은 죽기보다 더 싫어할 게 틀림없었다. 캇쨩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을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게 생각하니까. 질색을 하면서 난리를 치는 캇쨩의 얼굴을 생각하면 잠깐은 픽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꽃이 핀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다. 그게 내가 다시 이 동화책을 오랜만에 꺼내든 이유다.

"어떡하지, 진짜..."

벌써 30분이 다 되도록 나는 내 방에 앉아 목 뒤를 더듬고 있었다. 몇 번을 더듬어봐도 똑같았다. 척추의 첫번째 뼈와 두번째 뼈가 꺾이는 지점, 고개를 숙이면 뒷목 위로 약간 봉긋하게 도드라지는 그 둥근 목뼈 위에 뭔가 가늘고 연약한 것이 자꾸 잡혔다. 촉감만으로 억측해보자면 줄기는 가늘었고 아주 자그마한 망울이 거기에 맺혀 있었다. 망울이 맺힐 정도면 싹 트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걸 몰랐지. 실없이 웃음이 흐 터져 나왔다. 머리를 좀 더 성실하게 관리할 걸 그랬다. 이발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금방 알았을 텐데.

그나저나 왜 내 목 뒤에 싹이 텄을까.

"여자랑 대화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여자는 고사하고 근 몇달동안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엄마를 제외한다면 올마이트 뿐이다. 스승이 제자를 향한 신의로 싹을 틔웠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있다 해도 이상하다. 어쨌건 올마이트와 나는 서로 남자니까. 사랑은 짝을 짓기 위한 감정이라고 동화에선 말했고, 아무리 어릴 적부터 존경해온 내 인생 최고의 히어로라고 해도 그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종류의 감정은 아닐 거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전혀 가지 않아서 나는 애꿎은 꽃만 자꾸 만지작거리다 스르륵 손을 걷어냈다. 아무리 상대를 모른다지만 꽃이 죽어버리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그랬다.

누굴까. 나는 정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중 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말은 걸지 않았지만 누군가 나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엄마, 올마이트... 그뿐이다. 둘을 제외한다면 캇쨩 뿐인데. 생각을 해보다 나는 금세 생각을 흐려 버렸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넌 멱살을 잡던 것만으론 끝내주지 않을 테니까.

넌 정말 나를 싫어하니까, 캇쨩.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은 학교에 갔으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해보다 나는 또 말았다. 책상에 놓아둔 거울에 목 뒤에 돋아난 싹이 언뜻언뜻 보였다. 아직은 가늘고 작은, 연약한, 몽우리 뿐인 꽃이었다. 이 꽃은 내 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좀 벅찼다. 유에이 합격 통보를 받았던 것만큼이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피어난 씨앗이 그의 눈짓을 타고, 몸짓을 타고 내 몸으로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유에이 입학을 하루 앞둔 그날,
누군가 내게 꽃을 피웠다.






02

씨앗을 보낸 사람들은 모두 재채기를 한다.

─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동화책에서는 그랬었다.

─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것이지요. 똑똑한 선생님들은 이 증상을 두고 화수병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렇지만 아무 꽃에나 재채기를 해버리는 건 아니랍니다.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하나,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몸에 피어난 꽃 앞에서만 그래요. 이건 누구도 참을 수가 없어요. 애초에 재채기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누구나 다 그래요. 오래도록 수행을 쌓은 스님도, 일 밖에 모르는 사업가도, 영웅도 악당도 자기가 피운 꽃 앞에선 코끝이 간질거려요. 그리고 결국엔 푸에취, 크게 재채기를 하고 말겠죠.


엄마는 오랜 친구였던 아빠가 크게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눈치를 챘다고 했었다. 나는 엄마의 몸에 꽃이 있었다는 사실만큼 아빠가 엄마 앞에서 재채기를 하는 모습이 어릴 적부터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늘 집에 없었다. 일년에 한두 번, 이제는 몇 년에 한두 번 일본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버리는 아빠가 나는 늘 어렵고 어색했다. 볼 때마다 부쩍 자란 나를 보며 신기해하는 아빠보다 올마이트가 내겐 좀 더 가까운 어른이었다. 엄마의 꽃은 이제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꽃이 처음부터 무서웠다.

─ 왜냐면 사랑받지 못한 꽃은 언젠가 반드시 시들어버리니까요.


엄마에게는 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자신이 없어 그랬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면 엄마는 나보다도 더 가슴이 아플 것도 같았다. 우리 엄마는 마음이 약하고 다정하니까, 아직도 가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빠와 짧게 통화를 하고 나면 오래도록 꽃이 저물어 버린 자리를 만지작 거리고는 하니까.
꽃은 다행히 아직 작았다. 사실 꽃이라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새싹은 새 교복의 셔츠 깃 안쪽으로 손쉽게도 쏙 숨어 버렸다. 엄마에게 감추기 위해 목도리를 두를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거짓말에는 늘 자신이 없었다. 뭔가를 감추는 데에 늘 서툴렀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카츠키도 같은 학교에 들어간 거 아니었니?"

가방을 매고 현관 앞에 앉아 신발 끈을 꿰고 있을 때 엄마는 불쑥 그렇게 물었다. 손이 멈춘 건 엄마 입에서 오랜만에 들린 그 이름이 낯설어서 그랬다. 마치 TV 속에나 나오는 히어로의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 속을 감추면서 나는 괜히 흐물흐물 웃었다. 아, 캇쨩. 이 이름을 부른 후에야 비로소 남이 아닌 것 같았다.

"캇쨩은... 네, 같은 반이에요."
"어머, 또? 잘 됐다. 그럼 예전처럼 둘이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래. 놀러오라고 하면 되겠다, 그치? 작년에 험한 일도 있었잖아. 엄마는 카츠키만 생각하면 속이 상해. 부모님도 바쁘시고, 어릴 땐 참 우리집에 자주 놀러와서 식사도 하고..."
"아, 늦었다! 다녀올게요, 엄마!"

엄마, 캇쨩은 이제 나를 싫어해요.

그런 말이라도 툭 튀어나올까봐 나는 꼭 입을 닫고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지금은 좋은 일만 생각하고 싶었다. 염원하던 유에이에 입학했다. 히어로과에 갔어. 내 영웅을 만나서 나는 이제 달라졌어요, 엄마. 나는 무개성이라서 절대 영웅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 너 같은 건 유에이를 쳐다도 보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캇쨩, 나는 했어.

너는 내 얼굴을 보면 또 무슨 소리를 할까. 그래도 오늘은 웃으면서 먼저 인사해보고 싶었다. 끈을 힘껏 당겨 묶고 나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꽃은 옷깃 속에 있었다. 아직은 새싹이었다.







*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답니다. 개성을 가진 사람, 개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 그리고 씨앗을   뿌린 사람, 그 씨앗으로 꽃을 피워버린 사람.
꽃의 종류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사실 새싹은 모두 똑같이 생겼답니다. 거리에 핀 꽃들과는 달라요.   누군가의 눈짓과 몸짓을 따라 날아간 씨앗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으면, 새싹은 두 갈래 잎을 쫑긋 내밀면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 싹이 어떤 꽃을 피우는 지는 몰라요. 누가 어떤 개성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에요. 누가 이 씨앗을 주었는지도 모르지요. 하긴, 사랑은 본래 그런 거예요. 개성처럼 몸으로 드러나는 특질이 아니니까 말이에요.
그래도 일단 새싹이 생겨버렸다면 자, 당황하지 말아요. 그 싹은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햇볕을 많이 쬔다고 해서, 물을 흠뻑 준다고 해서, 혹은 그 꽃의 숙주인 당신이 좋은 영양제와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는다고 해서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니에요. 꽃은 오로지 한 사람의 마음으로만 피어나지요. 당신을 몰래 훔쳐보며 바라보다 끝내 마음에 꽃씨가 맺혀버린 사람, 그리하여 그 씨앗을 당신에게 몰래 날려보낸 사람.

당신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당신 꽃의 주인이랍니다. 오로지 그 사람만이 피울 수 있겠지요. 당신의 꽃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곱고 아름다울, 그 예쁜 꽃 말이지요.




*

어.

나는 오똑 멈춰섰다. 유에이의 높다란 교문 너머로 색이 밝은 머리가 비척비척 흔들리며 걷고 있었다.

캇쨩이다.

느릿느릿 다시 걸어가면서 나는 다섯 걸음 바깥에서 투박하게 걷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사하고 싶어. 하지만 또 무시 당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이내 말았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올마이트는 내가 짐작하던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바꿔주었는지도 모른다. 유에이의 교문을 넘어선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용기가 났다. 어쩌면 내 옷깃 밑에 숨어 흔들리던 작은 새싹 덕분이었는지도 몰랐다.

"캇쨩!"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윽고 놓았을 때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터졌다. 그 바람에 시선이 내 쪽으로 우 모였다 다시 흩어졌다. 그 눈길들을 따라 선홍색 눈이 나를 향해 잠시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다음 말을 다 떼어놓기도 전에 너는 다시 눈을 돌려 버렸다.
쓴웃음이 흐, 밀려나왔다.

"또 무시당했네..."

그래도 괜찮아. 이유는 모르겠다. 근데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빈 주먹을 나는 잠시 힘껏 움켜쥐었다. 시험 때 나를 도와줬던 단발 소녀가 곁을 지나다 불쑥 말을 걸었다. 얼굴이 붉어졌고, 당황했고, 그 바람에 나는 오래지 않아 캇쨩에게 또 인사를 씹혀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잊어 버렸다. 시끄러웠고, 활기찼고, 해는 높았고, 기분이 좋았다.

에취.

저 멀리에서 캇쨩이 재채기를 했다.





03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열여섯의 봄날은 시냇물처럼 빨랐고, 꽃은 빠른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내 꽃은 욕심이 많았다. 어제 보았던 것보다 다음 날이면 더 자라 있었고, 그 다음 날엔 더 키가 높았다. 솜털 같은 떡잎이 떨어진 자리엔 어느 샌가 초록이 짙은 잎사귀 서너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끔 손가락을 집어넣어 목 언저리를 더듬으면 혈관과 깊이 얽힌 꽃의 잔뿌리들이 만져지고는 했다.

─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예요.


동화책이 알려주었다.

─ 이제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랍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수시로 생각해봤다. 유에이의 새학기는 내게 어느 날 도둑처럼 고개를 내밀어 버린 꽃과 같았다. 바빴고, 정신없었고, 어제보다 오늘은 더 자라 있었다. 나는 꽃처럼 욕심이 많아졌다. 친구가 많아졌고, 말이 많아졌고, 밝아졌고, 웃음이 많아졌다. 그래도 끝까지 이 씨앗을 누가 내게 날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나는 궁금했다.

캇쨩은 왜 재채기를 했을까.

“꽃가루 알레르기가 요즘 기승이다. 너희도 조심하고. 이런 때면 식물 개성을 가진 녀석들이 자기 세상이라고 유난히 난리를 치고 다니는데, 몸들 사려라. 괜히 식물계 빌런한테 납치당해서 신문에 나지 말고.”

4월 보름에 접어들면서 담임의 종례에 레퍼토리가 하나 더 추가 되었다. 어디엘 가도 봄이었다. 꽃은 지난겨울이 서러웠던 것처럼 앞 다투어 잎을 열었다. 어디엘 가도 꽃향기가 났다. 사람들 몸 곳곳에도 꽃이 피었다. 봄에는 꽃이 핀 사람들이 유난히 더 자주 보인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나였다. 그래도 내 꽃은 아직 꽃잎을 열지 않았다.
반 애들 중에 꽃을 가지고 있는 건 두 서넛 정도뿐이었다. 그 아이들은 나처럼 꽃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은 꽃이 핀 녀석들을 구경하면서 인기가 많아 좋겠다며 놀리거나 함께 시시덕거렸다. 모든 꽃이 다 똑같지는 않았다. 어떤 꽃은 이미 입학날부터 손바닥 가득 만개해 있었고, 어떤 꽃은 무뚝뚝한 주인의 손등에 잠시 나타났다 망울이 맺히기도 전에 슬며시 시들어 버렸다.

캇쨩은 가끔 내 뒷자리에 앉아 재채기를 했다. 꽃은 없었다.

“너 때문에 재채기하잖아, 너드새끼. 앞으로 좀 꺼져.”

캇쨩이 훌쩍 코를 문지르면서 내가 앉은 자리를 퍽 걷어찼다. 억울하면서 어처구니도 없어서 나는 부슬부슬 웃었다. 이상하게 캇쨩이 전만큼 껄끄럽지 않아서 난 이제 하고 싶은 말들을 별로 참지 않았다. 그 용기가 어디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는지 나는 모른다. 유에이에 온 덕분인지, 아니면 꽃 덕분인지.

“캇쨩이 재채기 하는 게 내 탓은 아니잖아…”
“아니. 존나 너 때문이거든. 앞에 처앉지를 말든가.”
“…내가 네 앞에 앉은 게 아니라 네가 멋대로 내 뒤에 앉은 거잖아.”

입학식날부터. 그렇게 덧붙였더니 또 한 번 발길질이 퍽 날아왔다. 말대답 하지마. 캇쨩이 습관처럼 코를 훌쩍이면서 그렇게 불퉁거렸다. 나는 그저 웃고나 말았다.
다시 고개를 칠판 쪽으로 돌렸다. 선생님이 들어왔고, 이론 수업이 시작되었다. 등 뒤에서 캇쨩이 또 한 번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캇쨩 몰래 숨긴 꽃을 들킬까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너는 왜 재채기를 하는 걸까.

아이자와 선생님의 말처럼 꽃가루 알레르기가 기승인 탓일지 모른다. 아니면… 너도 누군가에게 꽃씨를 날려주었을까. 마음에서 꽃씨를 날려 보낸 사람에겐 꽃이 생기지 않는다. 캇쨩에겐 꽃이 없었다. 넌 그럼 누굴 좋아하게 된 걸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게 문득 궁금해져서 더 이상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캇쨩이 또 한 번 에취, 재채기를 했다.

“아, 씨발. 돌아버리겠네.”

코를 훌쩍거리면서 씨근거리는 소리가 툭 뒷목에 닿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양인지 숨결이 어쩐지 가까웠다. 그 훅 끼친 호흡이 어쩐지 낯설고 뜨거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 뒤를 가렸다.

“너 때문이라고, 씨발아.”

캇쨩이 소리를 죽여 우물거렸다. 캇쨩은 어릴 적부터 무슨 일이건 일단 불만이 생기면 나를 탓했다. 선생님에게 들킬까봐 나는 여전히 노트에 눈을 묻은 채로 작게 대답했다. 아냐, 내 탓.
어, 아니. 캇쨩이 말했다. 급하게 당긴 의자가 뒤쪽에서 드르륵 교실 바닥을 긁었다. 호흡이 귓불까지 느껴질만큼 거리가 좁아졌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킥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야, 데쿠.”

손끝이 꾹 내 목 뒤를 눌러왔다. 나는 긴장으로 굳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물었다.

“꽃 생겼냐?”
“……”
“꽃가루 존나 날리거든, 씨발아.”

아. 나는 그때 가슴이 철렁했었다.








*

명심하세요, 친구들. 세상에 내 코끝을 근질거리게 하는 꽃은 단 하나뿐이랍니다. 그 꽃이 당신의 꽃이지요. 당신이 피운 꽃이에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꽃말이에요.

세상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답니다.






(계속)




딱히 더 추가 된 내용은 없고 1만자가 되었기에 슬며시 올려봅니다(mm 마감 치자마자 곧장 일 때문에 야근 러쉬 달렸더니 이번 주에는 별다르게 쓴 글이 없네요 흑흑 ㅠ_ㅠ 다음 주에는 부디 뭐라도 좀 쓸 수 있길 바라면서, 저는 주말동안 여행 갑니다 u///u

?
  • JeNie 2017.02.10 22:53
    허엌...와 진짜 대박ㅠㅠㅠㅠㅠ♡

    브금이랑 정말 잘어울리는 글이에요..' 'b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하지ㅠㅠ진짜 너무 담백하고 잔잔하고..최고에요..!!!
    이렇게 제 가슴을 울리는 글은 처음이에요♥
  • 세상에나,,, 2017.02.13 01:41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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