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드디어 이 썰 완결...........
* 순혈 뱀파이어 x 사육인간으로 캇데쿠 + 토도데쿠
* 마지막편 BGM은 이 곡으로

<Lupe Fiasco - Solar Midnite>


http://youtu.be/n31XQPUyv2g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30 (完)
@ruka_tea




태양은 정수리를 지나 거대한 저택 위로 긴 그림자를 만들며 기울어졌다. 토도로키 저택의 상징과도 같은 외벽의 벽시계가 2를 가리켰다. 2시였다.
엔데버는 진작부터 업무를 겸하는 본관의 2층 서재에 있었다. 책상을 등지고 창쪽을 향해 비스듬히 돌아간 의자에 앉아있던 엔데버가 다리를 반대로 바꿔 꼬았다. 수행비서가 다가와 허리를 기울이며 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시작했습니다. 엔데버가 고요히 입매를 밀었다.

“쇼토 도련님께서 그 인간과 함께 다운타운으로 향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밖에 다른 녀석은.”
“없습니다. 바쿠고 카츠키는 그보다 먼저 혼자 자기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
“둘뿐입니다, 회장님.”

잘됐군. 엔데버가 낮게 웃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엔데버는 다시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모래알이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모래는 1시간이면 모두 떨어질 것이다.

세 번 째로 모래시계를 뒤집었을 때 택시 한 대가 토도로키 대저택의 대문을 넘었다. 복도에 걸려있던 괘종시계가 꼭 다섯 번을 울던, 다섯 시였다.

엔데버는 집무실 창가에 선 채로 천천히 정원을 가로지른 택시가 본관 현관 앞에 우뚝 멈춰서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먼저 달려 나간 수행비서가 뒷문을 열어주었고, 유에이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던 색이 다른 머리칼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토도로키 쇼토는 혼자 오지 않았다. 토도로키의 품 안에 같은 유에이의 교복을 입은 소년 하나가 단정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구불거리는 숲색 머리, 하얀 얼굴… 엔데버가 군침을 삼키듯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흠뻑 더듬었다.

드디어.

엔데버가 탄식처럼 감탄했다. 붉은 눈이 탐욕으로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무슨 주박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짝도 없이 토도로키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잠시 양팔의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은 토도로키가 녀석을 고쳐 안고 로비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택시 요금을 치르고 있던 하인 중 하나가 무릎을 꺾으며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소년의 피 때문이라는 것을 엔데버는 알고 있었다. 엔데버가 흡, 숨을 들이켰다. 단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샬레가 가진 힘이지.”
“……”
“내 피를 물려준 아들이지만 네 놈은 진짜, 인내심이 대단하군.”

비식 웃으며 엔데버가 서재의 입구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년을, 미도리야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토도로키 쇼토가 거기 서있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잠시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뿐이었다. 대단해. 엔데버가 박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정염처럼 불타는 눈길이 아들의 품에 안겨있던 인간 소년에게로 향했다.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얼굴은 지난번에 얼핏 보았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았다. 단내가 짙어서 자꾸만 침이 고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엔데버는 연거푸 울대를 밀었다.

“토도로키의 아들이 바쿠고의 아들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순간이군.”

조롱처럼 감탄을 삼킨 엔데버가 천천히 토도로키를 향해 걸어왔다. 단내가 터진 둑처럼 사방에 흘러 쏟아지고 있었다. 넋을 놓은 하인 하나가 이성을 잃고 달려드려는 걸 뒤를 따라왔던 수행비서가 능숙하게 막아냈다. 곧이어 토도로키의 등 뒤에서 서재 문이 닫혔다. 닫힌 문 뒤에서 하인들이 괴로워하며 울부짖은 소리가 들리다, 이내 비명과 함께 고요해졌다. 뒤를 잠시 흘깃 거린 색이 다른 눈동자가 두어 걸음 앞에 서있던 제 아비를 향했다.

“매우… 짙구나.”

단내가 매우… 말을 흐리고 입술을 핥으며 엔데버가 미도리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뺨 위를 미끄러지는 손길이 욕망으로 덜덜 떨렸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와 똑같은 유에이 교복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는 없었고 셔츠는 풀어져 있었다. 뺨을 타고 떨어진 엔데버의 손끝이 셔츠 틈을 벌리며 목덜미를 탐색했다.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 시퍼런 잇자국들에 엔데버가 하, 조소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바쿠고 가의 애송이에게 처음으로 공감했다. 누구라도 이 녀석을 가졌다면 수백, 수천번씩 이를 박아 넣었을 것이다.

“훼방꾼은.”

엔데버가 미도리야의 목덜미를 깊게 매만지며 물었다. 누굴 가리키는 질문인지는 빤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토도로키가 대답했다.

“모릅니다.”
“비서의 말로는 바쿠고 카츠키가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일찍 떠났다고 하던데.”
“집안에 일이 생겼다는 가짜 메시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
“더러운 술수는 쓰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내 고매한 아들께서는. 뭐, 좋은 일이지. 결국 네 놈도 어쩔 수 없는 내 핏줄이군.”
“……”
“이 녀석을 내게 보여준다는 것은 지난 번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되는데.”
“편한대로 생각하십시오.”

하. 엔데버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엔데버는 거듭 같은 자리를 더듬었다. 자꾸 침이 고였다. 식도 안쪽이 바짝 조였다. 울대를 깊게 밀며 엔데버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때도 눈길은 의식조차 없는 미도리야에게 못박혀 있었다.

“언제쯤 깨어나지.”
“1시간쯤 걸릴 겁니다.”
“최면을 꽤 강하게 걸어둔 모양이군.”
“여지를 주었다간 쓸데없는 잔챙이가 붙어올 테니까요.”
“그래… 그 잔챙이 같은 애송이는 지금쯤 눈이 뒤집어져 있을 텐데. 얼마나 길길이 날뛰고 있을까, 바쿠고 집의 그 어린 애송이는. 하하, 근래 겪어본 것들 중에 가장 기분이 좋은 일이로군.”
“……”
“이 녀석을 내 실험실로 옮겨야겠다.”

미도리야를 안고 있던 토도로키의 팔이 일순 움찔했다. 볼 안쪽을 깊게 씹었다 놓으며 토도로키가 낮게 물었다.

“왭니까.”
“네 놈은 이 몸에서 피를 어떻게 추출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게다가 각인… 그래, 그 망할 녀석이 각인을 새겼다고 했지. 그 각인을 어떻게 지우면 좋을지도 생각해봐야겠어.”
“……”
“너무 네 아버지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지 마라. 유용하게 사용하고 깨끗하게 돌려줄 테니까.”
“……”
“아주… 깨끗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소리를 죽인 생각들을 혀 밑으로 쑤셔 넣으며 엔데버는 다시 군침을 삼켰다. 잠시 아버지를 뚫어보다, 이내 눈길을 거두며 토도로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축 늘어진 하얀 몸이 아들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옮겨졌다. 미도리야를 품 안에 받아 안으며 엔데버는 하마터면 이를 드러내고 그 목을 물어뜯을 뻔 했다. 그러나 그런 짓은 잡혈들이나 하는 것이다. 욕망을 깊숙이 짓누르며 엔데버는 담담히 미도리야를 고쳐 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년의 단내는 인내가 힘들었다. 바로 코앞까지 닥쳐온 짙은 단내에 엔데버는 잠시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키며 심호흡을 했다.
가봐라. 욕망으로 번들번들 빛나는 붉은 눈이 탁한 목소리로 거듭 덧붙였다. 얼른. 잠시 주춤하던 토도로키가 이내 허리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아들을 등진 채로 미도리야의 목덜미로 콧날을 기울이며,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엔데버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녀석은 언제쯤 죽여줄까.”

붉은 눈길이 색이 다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비식 웃었다. 약속은 지켜야지. 토도로키가 잠시 입술을 질끈 씹었다, 놓으며 대꾸했다. 편하신대로.

그리고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이젠 완벽히 둘이었다.

“너는 참… 네 어머니를 닮았구나.”

아니. 엔데버가 뚜벅뚜벅 벽 쪽을 향해 걸으며 품에 안긴 소년을 다시 뚫어보며 중얼거렸다. 체취라면 네 쪽이 더, 훨씬 더… 친아들 앞에서도 평정을 잃은 적이 없던 순혈 뱀파이어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어리기 시작했다. 코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헉헉 가빠지기 시작한 호흡을 몰아쉬며 엔데버가 벽 앞에서 발끝으로 곁에 서있던 책장 아래쪽을 걷어찼다. 벽이 반원모양으로 크게 돌며 숨겨져 있던 밀실을 드러냈다. 가구도, 카펫도 깔려있지 않은 하얀 방 한 가운데에는 돌로 만든 제단 하나만 놓여 있었다.

“네 어머니가 누웠던 자리지.”

미도리야를 제단에 눕히며 엔데버는 속삭였다. 당신은 이 녀석을 지키려고 했었지, 하지만 결국 모두 소용없어. 미도리야의 몸을 제단 위에 똑바로 펴고 셔츠의 단추를 열면서 엔데버는 거듭 생각했다. 소년의 마른 뼈대를 더듬는 손길도, 옷 속에서 주사기를 꺼내는 손길도 온통 서툴고 다급했다. 이윽고 하얗게 드러난 송곳니가 비죽 웃었다.
피를 뽑아야 한다. 하지만 주사보다 네게 먼저 찔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엔데버의 입술이 미도리야의 목덜미를 향해 기울었다. 쇼토 녀석에게 넘겨주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고동을 따라 박동하는 혈관 위에서 엔데버는 잠시 황홀에 취한 듯이 눈을 감았다. 네가 깨기 전에, 쇼토가 걸어둔 최면이 풀리기 전에. 그리고 의식이 없는 소년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겁먹지 마라.

“네 전 주인의 각인을 지울 뿐이니까.”

목덜미에 바짝 닿아있던 송곳니가 하얗게 반짝였다. 그리고 힘껏 목덜미를 꿰뚫던,

그 순간이었다.

“……”

닫혀 있던 숲색 눈이 스르륵 열렸다.







*

‘죽지마.’

선홍색 눈이 속삭였다.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응, 안 죽을게.

‘그럼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가 바쿠고 저택의 비밀통로를 조용히 빠져 나갔다. 천천히 기울어지던 햇빛에 선홍색 눈빛이 잠시 나타났다 이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오후 2시였다.

미행은 없었다. 있었다 해도 바쿠고 저택의 비밀통로는 인간들의 주거지와 닿아 있으니 추적자들은 어차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집안일 때문에 저택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택시 차창에 비치는 풍경을 눈으로 훑으며 바쿠고가 후드 밑으로 씩 웃었다. 택시 기사가 기어를 풀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여전히 창 쪽을 바라보던 채로 바쿠고가 툭 대답했다.

“세인트 블랑 요양원.”

요양원은 소문으로 듣던대로 멀었다. 더불어 한적했다. 지폐 두 장을 내밀고 거스름돈 없이 택시에서 내린 바쿠고는 버릇처럼 주변을 먼저 살펴보았지만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로비에는 <외출중>과 함께 담당 직원의 연락처만 남겨져 있었고, 복도도 오가는 사람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잠시 안쪽을 살펴본 바쿠고가 쥐고 있던 명함을 가볍게 구겼다. 그리고 몸을 돌려 본관 건물을 빠져 나갔다. 오늘 목적지는 어차피 여기가 아니었다.

후드의 끈을 당기고 바쿠고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길은 요양원의 뒷산으로 통해 있었다. 요양원에서 머물다 죽은 자들이 묻힌 묘소가 있는 장소였다.

이 요양원에 토도로키 엔지, 즉 엔데버의 부인이 오래도록 입원 중이라는 사실은 바쿠고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순혈들 사이에서 돌고 있던 소문이었다. 엔데버의 부인이자 토도로키 쇼토의 친어머니인 재단의 사모가 백색병에 걸렸다고, 그리하여 공식석상에 모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소문을 듣지 않았어도 짐작은 했을 것이다. 죽었다는 소식도 없이 어떤 흡혈귀가 오래도록 보이지 않으면 그건 백색병에 걸려 세인트 블랑 요양원에 머물며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100프로의 확률이었다.
그러나 토도로키 엔지는 정략결혼한 자신의 부인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바쿠고에게 알려준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 바쿠고경이었다.

「카츠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말린다고 해도 어차피 너는 듣지 않겠지. 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이즈쿠의 일이라면 양보가 전혀 없었으니까.」

요양원으로 향하기 전 바쿠고는 아버지를 만났었다. 아버지는 마침 집에 있었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비밀통로로 향하던 바쿠고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미도리야를 양호실까지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였었다. 급한데 왜 잡느냐는 아들의 타박에도 아버지는 완강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었다. 갈 땐 가더라도 이 얘길 들으라고, 아버지는 거듭 말했다.
토도로키 엔지, 즉 엔데버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로회에서 토도로키 엔지를 상대로 반기를 든다는 것은 흡혈귀 사회에 대한 반역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난 네 녀석이 무엇을 꾸미는지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어. 네게 힘을 실어줄 수도 없다. 다만 원로회의 수장이 아닌 네 녀석의 친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이런 충고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아, 사설 존나 기시네. 본론만 말씀하시라고요. 바빠 뒤지겠는데 붙잡,」
「이런 소문이 있지. 토도로키 가문에서 왜 백색병 환자들을 수용소와 다름없는 자신들의 요양원에서 관리하고 있는지, 유구한 역사동안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백색병이 갑자기 왜 인간이 블러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는지.」
「……」
「블러드 바이러스가 만들어진 병이라는 건 네 놈도 소문으론 들어봤겠지.」

항간에 떠도는 음모론이었다. 바쿠고는 지금껏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이 그렇듯이 그냥,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히 말했다.

토도로키 가문에서 블러드 바이러스를 만들어 인간에게 심었다. 그리고 수차례 반복된 임상실험 중에 변이종 중 하나로 백색병이 태어났다.

언제요.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바쿠고는 되물었다. 아버지는 답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그러니까 전쟁이 한참이던 그 시절에.

「그때는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았지. 어차피 인간들은 전쟁 중이었고 세상엔 죽어가는 생명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흡혈귀의 오랜 역사 중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라고들 말하지.」
「……」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았었다.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 있다고, 그들에게 피를 빨리면 기이한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른다고, 게다가 그 병은 전염력이 강해 가족과 친구들까지 모두 감염시켜 버린다고.」

자신도 할아버지, 즉 바쿠고의 증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아버지는 쓰게 웃었다. 인도에서는 한 마을의 인간 전체가 하루 아침만에 병에 걸려 죽어버렸지만 그 누구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병은 오랜 냉전시대를 지나면서 잠시 잊혀졌다. 그러다 세 번째 전쟁이 끝난 90년대 말, 이 병은 다시 역사 속에 나타났다. 카이로 공항에 버려져 있던 수트케이스에서 시작된 블러드 바이러스는 비행기에 올라 전세계 인간을 빠른 속도로 감염시켰다. 그리하여 인류는 거의 멸족의 위기에 내몰렸고, 죽지 않기 위해선 흡혈귀의 항체가 필요했다. 인간은 흡혈귀 앞에 복종을 약속했고, 숨어 살던 흡혈귀들은 인간을 지배하며 지상에서 가장 잔인한 존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바쿠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너는 알고 있는지.

인간들이 블러드 바이러스로 죽어갈 때 누가 그들을 살릴 항체를 개발했는지,
그리하여 누가 그 약을 독점했으며 가장 큰 돈을 벌었는지.

토도로키 제약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다. 지금껏 공식석상에서 이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던 이는 모두 죽었지. 아니, 모두 요양원에 누워 있다. 블러드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백색병도 토도로키 제약의 손아귀에 있다는 얘기가 있지. 이것 역시 소문일 뿐이지만… 확실한 건 토도로키 엔지의 부인이자 토도로키 쇼토의 어머니인 토도로키 부인이 10년 넘는 세월동안 백색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을 얻기 전부터도 두 부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
「……」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구나, 카츠키.」

아니, 충분하다고. 바쿠고가 눈앞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꽉 씹었다. 어두운 석굴 묘소 안쪽, 가장 높은 재단 위에 놓여있는 누군가의 석관이었다. 석관에는 묘소 입구와 똑같은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M.

하지만 바쿠고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석관에 새겨진 이니셜이 아니었다. 입꼬리 끝을 비틀며 바쿠고가 신음했다. 하, 씨발. 그리고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석관 앞에는 새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두 개의 초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빛이 바랜 사진 속에서 젊은 여인이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함박 웃었다. 아이와 엄마는 머리색도 눈색도 모두 같았다. 깊고 아득한 숲색이었다.
선홍색 눈 끝이 울컥 일그러졌다. 더듬더듬 후드를 끌어내린 색 밝은 머리가 픽 웃었다. 욕해서 죄송합니다. 더불어 바쿠고는 말했다. 이런 식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처음 뵙습니다. 바쿠고 카츠키라고 합니다.”

액자 속에서 웃고 있던 여인을 향해 바쿠고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 눈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이 아이를 알고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니까 데쿠, 미도리야 이즈쿠… 애인인데요.”

당신 아들의.





*

‘그래서, 데쿠 새끼가 안 죽는 방법은.’

선홍색 눈이 색이 다른 눈동자를 향해 물었다. 양호실의 커튼을 닫으며 색이 다른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숲색 눈을, 선홍색 눈을 번갈아 돌아보며 소년은 대답 대신 두 사람 앞에서 말아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숲색 눈이, 선홍색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됐나. 색이 다른 눈동자가 말했다. 선홍색 눈이 신음처럼 비틀거렸다. 하, 씨발. 잠시 그 모습을 지켜 보다 색이 다른 눈동자는 우뚝 굳어 있던 숲색 눈을 향했다. 색이 다른 눈동자의 소년은 제 손 안에 있던 것을 숲색 눈의 소년에게 쥐어주었다. 표정 없는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걸렸다.

‘그러니까 나를 믿어, 이즈쿠.’

나는 절대 너를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

엔데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는 엔데버의 목에 길고 뾰족한 것이 박혀 있었다. 주사기였다. 엔데버가 이를 갈았다.

“이 맹랑한, 이 찢어 죽일 녀석이 감히…!”

소년은, 미도리야 이즈쿠는 담담했다. 방금 전 엔데버의 목에 주사기를 찔러넣었던 손으로 벌어진 셔츠의 앞자락을 여몄을 뿐이었다. 비틀거리며 괴로워하던 엔데버가 크게 헛구역질을 했다. 조금 전까지 당장에라도 이를 쑤셔 넣고 싶을만큼 달고 감미로웠던 냄새가 이제는 역겨웠다. 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이 인간의 피 냄새가 끔찍할만큼 구역질이 났다. 온 혈관이 발작처럼 뛰어 올랐다. 그래도 이 작은 인간을 감히 용서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네 어머니도 내 손에 죽었어. 비식 웃음을 삼킨 엔데버가 재단에서 몸을 일으키던 미도리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소년의 작은 머리를 움켜잡기도 전에 걸음이 막혔다. 장애물이 나타난 탓이었다. 우뚝 멈춘 엔데버가 미도리야와 자신을 가르고 있는 장애물을 내려다보았다. 얼음 장벽이었다.
하. 엔데버가 입술을 비틀었다.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 녀석이 감히, 네가 어찌 감히.

“네 놈이… 나를 속였구나.”

무릎을 꺾으며 잔뜩 괴롭게 일그러진 엔데버의 눈길이 벽 쪽으로 향했다. 지하실로 통하는 비밀통로의 입구였다. 어둠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두 그림자를 보며 엔데버가 우득 이를 갈았다.

“쇼토, 네가 감히 내게…!”
“당신만 하겠습니까, 아버지.”

색이 다른 눈동자가 차갑게 대꾸했다. 토도로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 함께 나타난 얼굴에 엔데버의 눈이 더불어 크게 열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탓만은 아니었다. 토도로키의 옆으로 슥 선홍색 눈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는, 그 색밝은 머리칼의 애송이가 들고 온 것에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다.
바쿠고가 입매를 씩 밀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엔데버의 무릎 앞으로 들고 온 것을 툭 던져놓았다. 일기장이었다.

“대단한 걸 숨겨놓고 계셨던데요, 토도로키경.”
“……”
“말했습니다, 저는. 장갑은 그쪽에서 먼저 던지셨다고.”
“……”
“죽여 버릴 거라고 나는 말했다고.”

사회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가지지 못한 것이 없었던 가장 오만한 흡혈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엔데버가 다급하게 팔을 뻗어 노트를 회수하려고 한 순간, 바쿠고가 턱을 크게 걷어찼다. 힘에 떠밀려 나동그라진 엔데버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며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뭐냐. 바쿠고가 물었다. 토도로키가 가볍게 대꾸했다. 백색병의 초기 증상이지. 더불어 색이 다른 눈동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차갑게 내려보며 덧붙였다.

“내 어머니처럼.”

하, 존나. 바쿠고가 가볍게 웃음을 삼켰다. 그대로 두 부자를 지나쳐 바쿠고는 바닥에 떨어진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재단에 앉아 있는 미도리야를 향했다. 가볍게 뺨이 닿았다, 떨어졌다. 잘 했어, 데쿠새끼. 툭 말을 던지고 바쿠고는 들고 온 노트를 미도리야에게 내밀었다.
네가 직접 읽어, 멍청아. 웃음기가 사라진 선홍색 눈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

“네 어머니가 남기신 거니까.”

바쿠고는 토도로키 엔지가 요양원에 자기 부인 이외의 것을 숨겨놓고 있을 거라고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세인트 블랑 요양원은 쉽게 면회를 갈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데버가 1년에 서너 번씩 주기적으로 방문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순전히 감이었다.
그 감은 우연히 미도리야 엄마의 묘소를 발견했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바쿠고는 돌아가신 지 꽤 오래 되었다는 미도리야 엄마의 석관 끝이 반들반들 닳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최근까지 누군가가 오래도록 석관을 열어보았다는 뜻이었다. 그 다음 추리는 어렵지 않았다. 토도로키 엔지는 그 안에 뭔가를 숨겼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세상에 폭로되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감사해, 멍청아. 일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미도리야를 보며 바쿠고가 말했다.

“너희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분이시라고.”

응.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펼쳤다. 노트는 오랜 세월 석관 안에 묻혀있던 탓인지 색이 탁하게 바래 있었지만 내용을 읽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첫 페이지에도 같은 머릿글자가 쓰여 있었다. 미도리야가 손끝으로 그 책장을 가만히 만지며 읽어 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두 남자의 이름을 담아, M.

엔데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관절이 비틀린 몸을 연거푸 뒤집었다. 미도리야가 페이지를 넘기며 남겨진 내용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비명소리, 그리고 한 소년의 차분한 낭독 소리뿐이었다.

- 3월 X일

 토도로키 엔지 회장님의 개인 실험실로 배속되었다. 대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모두 회장님 덕분이다. 어떤 형태로든 이 은혜를 갚아드릴 기회가 생겨 무척 기쁘다. 어떤 흡혈귀가 자기 아내의 몸종이었던 인간에게 이만큼 다정하게 대해줄까.
회장님은 내가 당신의 연구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한다. 기대가 크다. 열심히 연구에 몰두해 그 분께 꼭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다.

- 9월 X일

연구는 계속 순조롭다. 실험 전에 회장님이 내 피를 채혈해가셨다. 벌써 스무 번째다. 내 피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회장님은 말씀하셨다. 언젠가 내 피가 인류를 위해 큰 도움이 되는 날도 오겠지?
아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 그가 기다릴 텐데…

- 10월 X일

회장님은 미도리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아가씨께서는, 아니, 토도로키 부인께서는 내 마음이 가는 방향을 따르라고 하셨다.
또 채혈을 했다. 목덜미가 아프고 피를 너무 많이 빨려 어지럽다. 그가 걱정하면 어떡하지… 회장님과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 4월 X일

점점 배가 불러온다. 아이 아빠는 소식이 없다. 오늘도 슬럼을 돌아다니면서 미도리야씨를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회장님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을 거라고 내게 위로를 해주셨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마도 아들이라는 듯 하다. 이름은… 이즈쿠로 정했다. 미도리야 이즈쿠. 그가 지어준 이름이다.

- 6월 X일

배에 진 멍이 가시질 않는다. 이젠 목덜미와 팔꿈치 외에 여러 곳에 잇자국이 늘어간다. 마님께서 아시면 어떡하지… 다정하신 우리 마님, 우리 아가씨… 그 분이 상처를 받을까봐 마음이 너무 아프다.
신이시여, 계시다면 부디 마님과 마님의 뱃속 아가를 지켜주세요.

- 7월 16일

이즈쿠, 사랑하는 내 아들. 너만 있으면 엄마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 3월 X일

결국 아가씨께, 아니, 마님께 사실을 모두 얘기했다. 마님은 한참동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다정한 아가씨… 몸이 약해 쇼토 도련님께 젖도 직접 줄 수 없는 아가씨가 내 걱정에 더 아프실까 걱정이다. 내일은 아가씨가 소개해준 중개인을 만나러 간다. 다운타운 근처에 작지만 괜찮은 집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 집이라면 이즈쿠는… 괜찮아.



- 8월 X일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 3월 X일

사랑하는 이즈쿠, 너를 위해 오랜만에 일기를 펼치는구나. 내 아들… 너는 엄마를 기억해줄까? 그 사람에게서 너를 지키고 싶었는데 엄마는 이제 너무 힘이 들어. 마님께선 소식이 없으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이 되는구나.
내 아들, 내가 없으면 누가 널 그 사람에게서 지켜줄까. 엄마는 그 하나가 너무 마음에 걸려. 미안하고 또 미안해. 사랑하는 내 아들.

- 4월 X일

신이시여, 제발
이 아이를 지켜ㅈ


일기는 길게 끈 펜자국과 함께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미도리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악마. 숲색 눈이 바닥에 웅크려 이제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을 쳐다보며 거듭 말했다. 당신이 모두 되돌려 받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웃었다. 흐, 웃는 숲색 눈을 따라 눈물이 툭 굴러 떨어졌다. 토도로키도 바쿠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바쿠고가 잠자코 미도리야의 어깨를 가만히 짚어주었다. 엔데버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회장님. 젖은 눈끝을 훔치며 미도리야가 말했다.

“지옥에서 영원히.”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해가 기울고 있던 저녁, 6시였다.









*

다음 날, 세상은 토도로키 엔지 회장이 건강 문제로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는 소식으로 온통 시끄러웠다. 토도로키 그룹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원로회의 모든 활동까지 잠정적 중단이었다. 이유는 백색병이었다. 언론은 하얀 천에 덮여 세인트 블랑 요양원에 오르는 토도로키 엔지의 모습을 일제히 보도했다. 세상이 기억할 토도로키 엔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병실은 3층이라고 전해졌다. 같은 병을 얻어 오래도록 입원 중이던 자신의 아내와 같은 방이었다.

그리고 토도로키 그룹은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아버지가 백색병을 얻으면서 그룹의 경영권은 당연히 토도로키 쇼토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토도로키는 곧이어 열린 주주총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후계를 거절했다. 오랜 회의 끝에 그룹은 전문 CEO를 등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토도로키는 기자회견장에서 마이크를 잡아달라는 주주들의 부탁만큼은 물리치지 못했다.
토도로키는 회견장에서 앞으로 그룹의 방향성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토도로키 엔지가 백색병으로 쓰러진 지 일주일이 되던 무렵이었다.

「…지금까지는 저희 토도로키 제약에서 개발권자라는 핑계로 블러드 바이러스 백신에 대한 업무를 전부 독점해왔습니다. 저희는 우선 이 독점 체제를 푸는 데서부터 출발하려고 합니다. 독점을 풀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시 백신을 무상으로 제공 받을 수 있도록 개편하겠습니다. 나아가 연구 설비 확장을 통해 블러드 바이러스의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완치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며…」

흡혈귀들은 엄청나게 반발하거나, 혹은 매우 찬성하는 두 파로 갈라졌다. 논쟁은 어디엘 가도 끊이지 않았다. 이건 앞으로 세상이 감당해야할 큰 변화의 첫 걸음에 불과했다. 적어도 세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시작이라고, 이제 세상은 다시 조금씩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바뀌어 갈 거라고, 그저 잘못되었던 것이 올바른 자리를 향해 바로 잡혀 가는 것뿐이라고.
회견이 끝난 다음 날, 미도리야는 바쿠고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토도로키를 배웅했다. 아침에 토도로키 제약의 연구원들이 미도리야의 피를 채혈해간 후였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내가 배워야할 것들이 더 많을 테니까. 토도로키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색이 다른 눈동자가 숲색 눈을 향해 세상 더도 없을만큼 다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고마워.

「네가 내 삶을 바꾼 거다, 이즈쿠.」
「아니, 고마운 건 오히려…」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토도로키의 입술이 정확히 미도리야의 입술에 겹쳐졌고, 그 순간 바쿠고가 토도로키의 얼굴을 향해 캐리어를 날릴 뻔 하다 공항 청경에게 저지당했다. 한동안 미도리야는 길길이 날뛰는 바쿠고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반푼이 새끼 찢어 죽인다는 협박을 가볍게 무시하며 토도로키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포기한 적이 없으니까.

「다음에 만날 땐 내게 반하도록 만들어주지. 장담한다. 내기를 걸어도 좋아.  나를 믿어, 이즈쿠.」
「지랄하고 자빠졌네. 죽고 싶냐, 이 씨발 새끼야!?!」

그날 미도리야는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바쿠고에게 잡혀 발끝에서부터 몸 곳곳에 수백 번씩 이를 박혔다. 그러니까 왜 토도로키 도련님은 캇쨩 눈앞에서 키스 같은 걸 해서…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의 토도로키가 훨씬 더 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며칠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세인트 블랑 요양원의 언덕길을 따라 검은 롤스로이스 한 대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7월의 열다섯 번째 날이었다.

“무슨 씨발, 성묘 오면서 꽃도 안 챙겨간다고.”

먼저 뒷좌석을 열고 내린 바쿠고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검은 정장차림이었고 손에는 바쿠고의 키에도 조금 커 보이는 하얀 데이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바쿠고가 잠깐 넥타이의 매듭을 바로 잡던 동안 반대편 뒷좌석이 덜컥 열렸다. 잰걸음으로 롤스로이스를 빙 돌아간 바쿠고가 열린 좌석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멍청아.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뒷좌석에서 쭈뼛거리던 미도리야가 귀 끝을 붉혔다. 바쿠고처럼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였다. 복장이 어색한지 잠깐 망설이던 미도리야가 슬그머니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다. 여름이었다.

“이렇게까지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갈 일은 아닌데…”

묘소를 향해 뻗어있는 산책로를 타박타박 걸으며 미도리야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바쿠고가 씨근거렸다. 그런 말투치고 선홍색 눈은 어쩐지 자꾸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미도리야를, 한 손에는 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챙겨 들고 바쿠고는 자꾸만 입매를 밀며 웃었다. 그 얼굴을 흘깃 돌아보다 미도리야도 그만 흐, 웃어버렸다.

“결혼하러 가는 거 아냐, 캇쨩…”
“누가 결혼하러 간댔냐, 멍청아?”
“그치만 혼인신고 하고 온 얼굴인걸.”
“어, 신고는 하고 왔지.”
“전학이랑 전입신고였잖아…”
“동거면 사실혼이거든, 멍청아.”

우린 지금까지도 계속 동거하고 있었잖아, 캇쨩… 그런 말을 우물거려 보려다 미도리야는 이내 말았다. 바쿠고가 웃는 얼굴이 썩 싫지 않아 그랬다. 그 얼굴에 자꾸만 마음이 술렁거려 그랬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늘 아침부터 하루가 전부 믿기지 않아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에게 팔을 내주고 있던 바쿠고는 보이지 않았다. 하녀는 카츠키 도련님이 잠깐 일이 있어 학교에 갔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바쿠고는 먼저 그렇게 말했다. 왕립학교를 그만뒀다고. 뒤이어 어안이 벙벙한 미도리야의 앞에 서류 한 장이 툭 날아왔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느 낯선 사립학교의 이름이었다.

「뭔 올마이트인지 뭐신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라는데, 존나 건방져. 주제넘게 인간이랑 흡혈귀가 같이 공부하는 학교라니. 하, 씨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
「데쿠새끼 이제 큰일 났다. 공부 존나 열심히 해야 될 걸.」

그 말이 믿기지 않아서, 눈앞의 서류를 보고도 다 꿈인 것만 같아서 미도리야는 하마터면 제 뺨을 때려달라고 말할 뻔 했었다. 현실인 걸 알았을 때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바쿠고에게 와락 달려들었고, 그 바람에 바쿠고는 하마터면 테이블에 뒤통수를 찍을 뻔 했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대신 바쿠고는 제 품에 안겨 엉엉 우는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멍청아. 그리고 덧붙였었다. 옷 입어, 이게 다가 아니니까.

「오늘이 며칠인지도 까먹었지, 데쿠새끼.」

나는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바쿠고에게 반쯤 떠밀려 정장을 꿰어 입으면서도, 꽃집에서 꽃을 고르면서도 자꾸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그때마다 등에 진 붉은 자리들이 심장인 것처럼 두근거려서 미도리야는 그저 바쿠고의 손만 꼭 잡았다. 오늘은 7월 15일이었다.

“생일 축하해.”

바쿠고가 말했다. 여름 바람이 새파랗게 펼쳐진 묘소의 잔디와 두 소년의 머리칼을 잔잔히 흔들었다. 기울어온 입술이 짧게 뺨에 닿았다 떨어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멍청아.”
“응.”

나도.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말도 못할만큼, 다 전하지도 못할만큼. 우물거리고 미도리야가 살며시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두 입술이 천천히 겹쳤다. 가슴이 뛰었다. 머리 위로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있었다. 열일곱 번째 여름이었다.



~ 끝






드디어 이 긴 썰이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흑흑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 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일단 지금은 탈력감에 너무 정신이 없는ㅠㅠㅠㅠㅠ 정신 좀 차리고 체력회복 좀 한 후에 후기 달러 오겠습니다ㅠ/////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한다 내 캇뎈 ㅠㅠㅠㅠㅠㅠ 쇼토 사랑해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Ah 넘좋아,,, 2017.01.17 21:23 SECRET

    "비밀글입니다."

  • Quu 2017.01.17 21:32 SECRET

    "비밀글입니다."

  • 선과 2017.01.18 01:19
    으어어엉!!!!!!!ㅠㅠㅠㅠ
    감동 그 자체입니다!!
  • 행복 2017.01.18 05:31 SECRET

    "비밀글입니다."

  • JeNie 2017.01.18 13:25
    우와아아아ㅠㅠ

    전편에서 캇쨩과 데쿠 너무 애틋해가지고 무슨 일 생기는거 아닌가 조마조마했는데
    좋게 해결돼서 너무 다행ㅠㅠ ' ㅁ' b

    마지막에 캇쨩이랑 데쿠 성묘 가는 장면
    세상 행복해보이는ㅠㅠ

    원작 히로아카만큼 엄청 집중하고 몰입하면서 읽었어요!!
    소설책으로 나오면 사고 싶을 정도에요♡
  • YJ 2017.01.18 14:44 SECRET

    "비밀글입니다."

  • 오늘 저는 밤을 다 못잡니다... 2017.01.19 23:43
    아 진짜ㅇ야기가 왜 이렇게 아름답죠? 저 무슨 대장편을 읽은거죠????
  • 새얀송이 2017.02.03 17:32 SECRET

    "비밀글입니다."

  •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2017.02.22 01:44 SECRET

    "비밀글입니다."

  • 사랑합니다 2017.02.28 12:45
    허허헉 루카님 작품 항상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으허헣허헝 웃음과 울음이 섞여서 나와요 어떡하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좋아요
    루카님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루카님 스릉흡느드 2017.04.29 16:48
    ㅠㅜㅜㅜㅜ토도로키 존멋(심장멈춤) 으헝헝 ㅠㅠㅠㅠㅠ마지막 너무 벅차서 우주뿌숩니다ㅜㅠㅠㅠㅠㅠㅠㅜㅠㅠㅠㅜㅠㅠㅠㅠㅠㅠ루카님 찬양ㅇ해요ㅠㅠㅠ흐엉ㅎ헝
  • 헤피 2017.06.24 02:19
    오아ㅏ아아아앙!!!
    너무 재밌게봤어여 존.잘.뉨★
    앞으로도 이와같은 아주 섹쉬한 쌀들 많이 올려주세여!!
  • 너무좋다ㅠㅠ 2017.06.24 18:17 SECRET

    "비밀글입니다."

  • miel 2017.06.28 01:04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충성충성충성 2017.07.19 02:07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감사합니다 ㅠㅠ 2017.07.21 12:44 SECRET

    "비밀글입니다."

  • OOP 2017.08.04 02:55 SECRET

    "비밀글입니다."

  • 캇뎈사랑 2017.10.03 13:25 SECRET

    "비밀글입니다."

  • zZzzz 2017.10.24 17:42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7.10.31 22:21
    흑흑흑 세상을 구한 소년들이군요 ㅠㅠ 저는 끝까지 욕하는 카츠키가 너무 좋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행복해라..미도리야..캇뎈..!!♡♥♥♥
  • 10709 2018.02.19 16: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시엘라벨르 2018.03.21 02:15
    와....미친 작가님....졸잼입니다..!!!♡
  • dhshsh 2018.04.29 14:05
    저 진짜 너무 재밌어서 새벽 두시까지 보다 잤어요ㅠㅠ 지금 끝까지 다 봤는데 진짜 겁나 설레고 토도로키 다정해ㅠㅠ 사랑합니다❤❤
  • 글쓴이 2018.06.28 23:31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갓갓루카님 ㅠㅠ 2018.07.02 03:08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꼭 읽어주세요 2018.09.12 08:06 SECRET

    "비밀글입니다."

  • 무뮤 2019.04.02 04:40
    와 루카님ㅠㅠㅠㅠ제가 뭘 읽은거죠???진짜 너무 너어어어어무 재밌었어요ㅜㅠ브금도 찰떡이예요!! 셋이 엔데버랑 짱뜨다 죽는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미도리야가 슥 눈 떠서 스레기같은 엔데버한테 백색병 주사놨을 때 너무 통쾌하고 짜릿했어요ㅠㅠ 정말.. 흡혈귀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다는거에 감동받았어요ㅠ캇뎈뽕 풀충됐답니다...토도로키 너무 멋있고 마지막 올마학교로 전학가는거도 좋고 순혈 바쿠고 너무너무 멋있고 바쿠고한테 한대만 맞아보고싶어요;힉 미돌 냄새 저도 한번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무슨 냄새길래 다들 미치는건지 넘 궁금하구 .. 으으으으윽 제가 글을 좀 잘썼더라면 제 감상을 좀 더 잘 전해드릴 수 있었을텐데 하고ㅜㅜ아쉽습니다ㅠㅠ
    긴 글 쓰시느라 너무너무 고생하셨구 감사합니다!!!!!읽는 동안 너무 행복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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