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완결이 머지 않은 이때에 한 번 슥 백업을 합니다
* 순혈 뱀파이어 x 사육인간으로 캇데쿠 + 토도데쿠
* 29편은 마지막에 갱신되어 있어요y/////y
* 이번 편부터는 브금도 바꿔서

Unkle <With You In My Head> (Twilght saga Eclipse OST 中)


http://youtu.be/XjZAc7aV1Xw










흡혈귀AU로_캇데쿠.ssul (27~29)

@ruka_tea




왕립학교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오전 중에 잠시 바쿠고의 장난에 놀란 미도리야가 책상에서 넘어졌고, 또 그 상황을 핑계 삼아 미도리야를 양호실로 끌고 사라진 바쿠고는 점심시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생도, 학생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일은 늘상 있었다. 점심에도 한가롭게 교정을 떠돌며 홀로 산책을 하는 토도로키의 모습만큼이나.

그래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었다. 오늘 바쿠고는 미도리야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이렇게 단둘이 만날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산책을 방해 받은 토도로키가 색이 다른 눈 사이를 울컥 좁히며 말했다.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은 버려진 교사 뒤편엔 오가는 사람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고요한 공간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두 소년 뿐이었다.
마주 서 있던 색 밝은 머리가 울컥 선홍색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할 소리를, 씨발, 반푼이 새끼가 쳐하고 자빠졌네.”
“됐군. 그럼 가라.”

눈길만큼 무심한 투로 툭 뱉어놓고 토도로키는 다시 홱 몸을 돌렸다. 이 세상에 토도로키의 산책을 방해해도 괜찮은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바쿠고가 콧날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다 말았다. 붙잡지도, 가지 말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본론이었다.

“데쿠새끼가,”

돌아서던 토도로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남아있던 말들을 혀끝으로 밀어내며 바쿠고가 서너 걸음 앞에 서있던 토도로키의 등을 노려보았다.

“네 놈에게 뭘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어차피 학교에서 보는 사인데 그런 건 직접 부탁해도 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우물거려보다가 토도로키는 이내 이유를 알아차렸다. 감시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붙인 감시가 이젠 저 두 소년 모두에게 붙어 있을 터였다.
어차피 같은 감시가 붙어 있다지만 사육인간인 미도리야와 그 인간의 주인인 바쿠고는 입장이 달랐다. 아무래도 저 녀석 쪽이 움직이기 더 편하겠지. 남의 눈길을 피하기에도 쉬웠을 것이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인간이다. 인간의 체취는 달고 진하다. 바쿠고의 가드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뿐이지, 미도리야가 지나갈 때마다 젖은 눈길로 그 모습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마른 혀를 축이는 녀석들이라면 토도로키도 종종 봤었다. 이런 흡혈귀들 틈에서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추적이 쉽다. 그보다야 흡혈귀인 바쿠고가 차라리 남의 눈길을 피해 자신에게 접근하는 쪽이 훨씬 더 안전하다.
그게 분명 저 녀석의 기지는 아니겠지. 생각을 삼키며 토도로키가 그제야 뒤를 향해 돌았다. 바쿠고는 이 상황이 영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서 있던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애인이.”

색이 다른 눈동자가 천천히 서늘해졌다. 애인이라는 말은 일부러 그렇게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허세고 자만이었다. 각인에 성공한, 그리하여 미도리야 이즈쿠를 완전히 소유하게 된 자의 과시. 그래도 토도로키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게 네 놈 아버지의 목 위에 달려 있어서.”
“……”
“나는 씨발, 어떻게든 그걸 똑 떼어다가 주고 싶거든. 내 애인한테.”

토도로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심지어 표정조차 그대로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 그랬다. 그보다는 어제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네게 힘을 빌려준다면 최소한 그 녀석을 네가 취할 수는 있겠지. 영원히, 그 바쿠고 가문의 오만한 애송이의 눈에도 닿지 않도록.

토도로키가 잠시 볼안쪽을 힘껏 씹었다, 뗐다. 잠잠히 닫혀있던 입술을 열며 토도로키는 말했다.

“빈손으로 오진 않았겠지.”
“하, 씨발새끼. 장사치 아들 아니랄까봐.”

바쿠고가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말했지. 직접 가서 말해.

“피니, 흡혈이니 원하는 게 있으면 나중에 데쿠새끼한테 직접 요구하라고. 그 새낀 물건도, 애완동물 같은 것도 아니니까. 그걸 하고말고는 그 새끼 의지에 달린 거지 내가 씨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허락 받아. 허락 받겠다고 둘이 만나는 것 정도는 뭐… 씨발, 한 번 눈 감아주지.”
“……”
“이게 내가 네 놈에게 걸 수 있는 최고의 제안 같은데.”

씨발, 이것도 존나 싫지만. 바쿠고가 입술 끝을 꽉 씹으며 씨근거렸다. 콧날이 사납게 찡그려진 걸 보니 싫어도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당연했다. 미도리야 이즈쿠를 대하는 바쿠고 카츠키의 독점욕이라면야 학교는 고사하고 원로회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흡혈을 하건 뭘 하건 한 번은 눈 감아준다니, 바쿠고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일 게 틀림없었다. 그 점이 토도로키는 다소 의외였다. 미도리야를 완전한 인격체로 대하는 바쿠고의 태도만큼이나.
통상적으로 사육인간은 흡혈귀의 소유물이다. 재산목록에는 사육인간이 몇인지 기입하는 항목이 있었고, 당연히 금전적으로 가치 환산도 가능했다. 사육인간을 거래하는 마켓이 있으니까. 토도로키는 본래 그 모든 행위에 환멸을 느끼며 사육인간조차 두지 않았던 부류였다. 세상은 토도로키를 별종이라고 불렀었다. 근데 설마 바쿠고 카츠키의 입에서 저런 얘기를 듣는 날이 오게 되다니.

이즈쿠, 너는 저 녀석에게 뭘까.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 대체 뭘까. 이미 각인으로 맺어지기 이전부터 강한 연대감으로 묶여 있던 사이다. 적어도 토도로키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 연대감을 인지하면 인지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귓가에 자꾸 아버지의 말이 환청처럼 떠돌았었다.
저 녀석을 제거할 힘을 가지고 있다던, 반드시 그렇게 해주겠다던, 마땅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어른의 말.

“일단 계획을 들어보지.”

곧장 대답하는 대신 토도로키는 말의 방향을 한꺼풀 돌렸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산책길을 경계 어린 눈길로 훑으며 한 발자국을 다가선 바쿠고가 운을 뗐다. 아까보다 퍽 낮아진 목소리였다.
야, 반푼이.

“이건 데쿠새끼 생각인데.”









*

바쿠고 저택의 화려한 회벽 위로 햇살이 직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복도에 놓여있던 커다란 괘종시계가 한 번을 울었다. 1시였다.

검은 원피스 차림의 하녀가 발소리를 죽이며 빙글빙글 꼬인 너른 계단을 올랐다. 카펫이 깔린 대리석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녀는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자꾸만 주변을 살펴보았다. 긴 복도를 그대로 지나쳐 하녀는 맨 끝에 있던 커다란 방문 앞에 잠시 멈춰섰다. 또 한 번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본 하녀는 아무도 없음을 거듭 확인하고 난 후에야 문을 밀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1시. 하녀가 급하게 주머니 속을 뒤지며 중얼거렸다. 왕립학교는 보통 3시쯤 모든 수업이 끝난다. 시간은 충분해, 괜찮아… 숨을 가다듬은 하녀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것을 다급하게 꺼내놓았다. 함께 들어 있던 것이 떠밀려 떨어졌지만 마음이 급한 하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머니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서너 개의 작은 도청기였다.
하녀는 곧장 방 곳곳을 돌며 도청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침대 밑, 전화기, 탁자 밑… 카츠키 도련님은 나이는 어렸지만 신중하고 경계심이 많았다. 어설프게 붙여두었다간 전부 들켜버릴 지도 모른다. 탁자 밑에 도청기를 붙이고 테이프를 덧대는 하녀의 손가락이 자꾸만 덜덜 떨렸다.

들키면 죽을 거야. 하녀는 바쿠고 카츠키의 불 같은 성질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 도청기를 건네주었던 남자가 몇 배는 더 무서웠다.

“언니… 언니처럼 되면 어떡하지.”

새하얗게 질린 언니의 얼굴을 생각했다. 머리카락 한움큼 남지 않고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는 않아 숨은 쉬고 있던 그 기이한 몸은 언니가 아닌 다른 낯설고 불길한 존재 같았었다. 백색병은 무서운 병이야, 진짜 무서운 병이야… 하녀가 흐흐, 부슬부슬 웃으며 이미 도청기가 단단히 붙은 테이블 밑을 몇 번이고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었다. 나도 그렇게 될 거야, 나도 그렇게 되어버릴 거야.
엔데버님을 거역하면, 엔데버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언니처럼,
마님께서 당하신 것처럼…

그때였다.

“어머, 카츠키 도련님 방은 아까 치우지 않았었어?”

닫혀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문앞에 서있는 건 자신과 방을 함께 쓰고 있는 다른 하녀였다. 뭐하고 있는 거야? 룸메이트가 물었다. 들켰어. 하녀가 손가락을 힘껏 씹었다. 들켰어, 실패했어. 나는 이제 그 병을 마시게 될 거야, 백색병의 저주를 마셔버리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몸은 이미 룸메이트에게 달려 들고 있었다.

“!? 잠ㄲ, 뭐하는… !!! 웁, 으웁!”

비명을 지르는 룸메이트의 입을 틀어막으며 하얗게 드러난 하녀의 송곳니가 그대로 목을 꿰뚫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궁지에 몰릴 때 한계 이상의 힘을 낸다. 룸메이트의 입을 틀어막고 목줄기를 물어뜯는 힘은 스스로 생각해봐도 광포해서 하녀는 잠시 자신이 잡혈이 아니라 순혈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우드득,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버둥거리던 룸메이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녀가 기겁을 하며 차갑게 식은 룸메이트의 몸을 화들짝 밀어냈다. 덜덜 떠는 손끝이 룸메이트의 맥을 짚어보았다. 뛰지 않았다.
죽었다.

“어떡… 어떡하지…?”

사육제가 아닌 기간동안 흡혈귀는 다른 흡혈귀를 물어 죽일 수 없다. 명백한 살인이고 범죄였다. 나약한 정신이 자꾸만 둑처럼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하녀는 요양원에 누워 있는 언니에 대해 떠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언니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백색병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저주였다.
정신을 차린 하녀는 먼저 문을 열고 복도 바깥을 내다보았다. 텅 빈 복도엔 룸메이트가 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빨랫감 담는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 하녀는 허겁지겁 수건들을 끌어모아 룸메이트의 시체를 감싸고 수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수레를 밀며 조용히 복도를 벗어났다.
괜찮아. 하녀는 생각했다. 시키는대로 도청기는 모두 달았어. 그러나 하녀는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 방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










“어?”

미도리야가 허리를 구부렸다. 교복 셔츠에 걸린 넥타이를 잡아 뽑으며 바쿠고가 등 뒤에서 무심히 물었다. 뭔데. 미도리야가 침대 앞으로 바짝 몸을 구부리며 대답했다. 이거…

“이런 게 떨어져 있는데…”

어느 요양원의 명함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켓에서 바쿠고를 따라 왔을 때부터 미도리야 역시 오래도록 이 방에서 지냈지만 낯선 물건이 놓여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놓고 갔나?”

미도리야가 명함을 뒤집어 보며 툭 우물거렸다. 뒤에 서있던 바쿠고가 그 모습을 잠깐 흘깃 보다 이내 말았다. 그리고 기척을 죽인 선홍색 눈은 곧장 방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방 안에 들어올 때부터 바쿠고는 낯선 냄새를 느꼈다. 피 냄새였다. 흡혈귀는 인간보다 후각이 훨씬 예민하다. 특히나 바쿠고는 이 방에서 익숙하게 나는 피 냄새라면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의 냄새는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냄새일 리가 없었다.

바쿠고는 단박에 알았다. 이 방에서 뭔가 일이 있었다. 아니면 불청객이 다녀갔거나.

“이거 청소하던 분이 놓고 가신 게 아닐까? 챙겨놨다 돌려줘야 할 것 같… 캇쨩?”

우물거리던 미도리야가 제 허리를 안아오는 팔에 말꼬리를 천천히 흐렸다. 숲색 눈이 쑥스러운 듯이 흐, 웃었다. 왜 또 오자마자 그래. 허리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실으면서 미도리야의 목덜미로 기울어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내 맘이다, 멍청아.

“내 애인 체취 맡으려고.”

순간 미도리야의 하얀 얼굴이 귀까지 확 붉어졌다. 애인이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는 그 어휘에 숲색 눈이 잔뜩 당황한 듯 흔들거렸다. 피처럼 붉어진 뺨이 부슬부슬 웃었다.

“애, 애, 애인이라니, 하하…”
“왜, 뭐. 틀린 말도 아닌데, 씨발.”
“남들이 들으면 웃어.”
“웃으라고 그래.”
“……”
“너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내 생에.”

애인도, 사랑할 사람도. 이 목숨을 바칠만큼 아끼고 간절한 사람도. 춥, 입술을 깊게 묻으며 바쿠고가 낮게 속삭였다. 그 입술이 닿은 자리가 너무 뜨거웠다. 그보다는 가슴께가 불길처럼 달아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서 미도리야는 제 입술 끝을 옅게 뭉개면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정말로 너뿐이야. 같은 생각을 씹으면서 바쿠고가 입술이 닿은 자리를 깊게 빨았다. 이미 아침부터 잦은 흡혈을 반복했던 목덜미 곳곳에 저가 남긴 잇자국이 퍼런 멍처럼 남아있었다. 그 자국들은 언제나 좋았다. 너를 향한 내 모든 욕심의 증거이고 표식이었다. 네 등 뒤에 붉게 펼쳐져 있는 그 불꽃같은 날개처럼.
너를 잃으면 나는 분명히 죽어버리겠지. 바쿠고는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차라리 백색병에라도 걸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잠에 빠지고 싶었다. 입 밖으로는 쑥스러워 말하지도 못할 생각을 짓씹으며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너만 대하면 나는 간단히 이성을 놓쳐버려. 너만 얽히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겁쟁이가 되어버린다. 한때는 그게 분했다. 너를 간절히 원하면 원할수록 너를 잃을까봐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내가 씨발 한심해서.
그래서 그러는 거다. 방안에 떠도는 이 미미한 피 냄새에 신경이 쓰이는 것도, 행여 네가 겁을 먹고 잠을 설칠까봐 말하지 못하는 것도. 이렇게까지 연연하고 있었다. 너는 이렇게까지 내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얽혀 있었다. 너는 그 마음을 알까, 멍청아. 몰라도 이제는 좋았다. 상관이 없었다.

나는 너를 죽음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캇쨩, 오늘 뭔가 좀 이상해.”

미도리야가 부슬부슬 웃었다. 미도리야는 눈치가 둔한 대신 묘하게 촉이 좋았다. 쓸데없이. 생각을 혀 밑으로 꾹 삼키면서 바쿠고는 대답 없이 미도리야를 더 힘껏 끌어 안았다. 그동안에도 신경은 온통 방을 채우고 있는 낯선 피냄새로 향해 있었다.
분명히 피 냄새였다. 인간의 달큰한 체취가 아니었다. 동족이다. 순혈의 피는 차갑고 잡혈의 피는 그보다 더 미지근한 향취가 난다. 잡혈의 피가 틀림없는데. 생각을 삼키며 바쿠고는 다시 한 번 방안을 흘깃 둘러보았다. 뭔가 있었다.

“캇쨩, 왜… 방에 뭐가 있어?”
“어, 너.”

말꼬리가 돌아갔다는 사실을 미도리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숲색 눈이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둥그렇게 열리더니 이내 빠르게 끔벅거렸다. 캇쨩… 축 쳐진 숲색 눈이 쓴웃음을 지었다.

“또 이렇게 집에 오자마자…”
“싫어? 그럼 말든가.”
“아니, 그건 아니…!”
“……”
“아니지만, 그냥 좀…”
“……”
“소리 참을 자신이 없어서…”

우물거린 말에 바쿠고가 입꼬리 끝을 비틀며 얕게 웃었다. 그 얼굴이 건방지게 예뻐서 그랬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눈길까지 피하는 녀석이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바쿠고는 자꾸만 비식비식 웃음이 나왔다. 새빨갛게 익은 귓가로 슥 기울어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어, 참지마. 그리고 미도리야의 어깨를 감싸온 커다란 손이 부끄러움과 설렘으로 당황하고 있던 소년을 천천히 침대 위로 떠밀었다. 세탁이 갓 끝난 듯 깔끔하고 하얀 시트 위에서 숲색 머리칼이 풀썩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구두도 벗지 않고 바쿠고는 그대로 미도리야의 양손에 깍지를 끼며 몸 위로 올라왔다. 기울어진 입술이 잠시 쪽, 미도리야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숨결보다 뜨거운 말들이 입술의 붉고 얇은 피부 위를 간질거렸다.

천국으로 보내줄 테니까,

“넌 얌전히 헐떡이면서 내 이름만 불러.”

다시 다가온 입술이 격렬히 틈을 열었다. 다물 틈도 없이 얽힌 혀에 미도리야는 흡, 숨을 들이키다 바쿠고의 목에 천천히 팔을 둘렀다. 천장으로 돌아간 숲색 눈이 물기를 띠며 젖어 들었다. 입술을 떠난 바쿠고의 입술이 미도리야의 턱, 목덜미를 지나 쇄골에 이를 박으며 셔츠 단추를 급하게 뜯어냈다. 벌어진 셔츠 틈으로 판판한 가슴팍이 심장처럼 고동쳤다. 그 위에 이를 세우고 깊게 들이마시면서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허리에 걸려있던 혁대를 가볍게 뽑아냈다.
그뿐이었다. 바쿠고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것이 아닌 피 냄새에 대해서도, 침대 맡에 작게 튀어있던 핏방울에 대해서도.

“캇쨩, 흐… 아, 아으ㅅ…!”

미도리야가 크게 턱을 젖혔다.








*

다음 날, 바쿠고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방학식을 이틀 남겨둔 날이었다.

「어차피 방학식도 며칠 안 남았는데 뭐하러, 씨발. 너나 가라. 학교 가는 거 좋아하잖아, 너드 새끼.」

그거야 뭐… 사실이지만. 홀로 교복차림으로 덩그러니 서있던 미도리야가 작게 우물거렸다. 인간에겐 배움의 자유가 없다.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건 오로지 뱀파이어들 뿐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립학교에 사육인간이랍시고 자신을 끌고 다니며 교실 옆자리에 앉혀두는 게 얼마나 큰 특혜인지 미도리야는 알고 있었다.
아직도 파자마 하의만 입고 있던 바쿠고가 벌렁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혼자 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몸 간수 잘해. 뒤진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처음으로 롤스로이스를 홀로 타고 학교에 갔다. 왕립학교는 물론이고 그전을 모두 포함해보아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롤스로이스의 뒷문을 열고 쭈뼛쭈뼛 내리는 순간부터 시선이 따가웠고, 교실로 주춤주춤 올라가는 동안에도 다른 학생들은 미도리야를 뚫어보며 수군거렸다. 기가 막힌다는 반응들이었다.

“미도리야가 바쿠고 없이 학교에 왔다고?”
“하지만 저 녀석 사육인간이잖아.”
“미친 거 아냐? 이거 완전 잡아 잡수라는 것도 아니고.”

말대로, 바쿠고 카츠키라는 바리어가 사라져 버린 미도리야 이즈쿠는 힘없는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간이 부었네. 녀석들은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미도리야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개중에는 대놓고 입맛을 다시는 녀석들도 있었다. 핥듯이 꽂혀오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의자를 당겨 앉는 미도리야의 손끝은 자꾸만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이걸 생각을 못 했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안온한 비호 속에 있었는지,
바쿠고 카츠키라는 이름이 얼마나 강한 방벽이었었는지.

흡혈귀는 인간보다 계급의식이 강했고, 그 계급은 모두 핏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아무리 탐이 나는 인간이 보여도 그 인간에게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순혈이라면 흡혈귀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순혈 중에서도 토도로키 쇼토, 더불어 바쿠고 카츠키는 같은 순혈들조차도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는 핏줄이었다. 그 순혈의 사육인간에게 눈길을 주고 추파를 던진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게다가 바쿠고는 이미 어릴 적부터 유명했다. 자기 사육인간을 얼마나 끼고 도는지, 거의 집착이라고 말할 정도의 애착이라고.
그렇다고 인간을 향한 당연한 욕망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바쿠고가 곁에 있었으니 억지로 인내한 것뿐이지, 미도리야의 피 냄새는 수업 도중에도 수시로 교실을 떠돌았었다. 바쿠고에게 행여 들켜 험한 일이라도 당할까봐 학급의 다른 녀석들은 책에다 얼굴을 박고 몰래 군침을 삼키기 일쑤였었다.

그런데 그 미도리야 이즈쿠가 혼자라니,
바쿠고 카츠키가 없는 미도리야 이즈쿠라니.

“어디서 자꾸 빨고 싶은 냄새가 나는데.”

한 녀석이 입가에 고인 침을 슥 닦으면서 비척비척 미도리야를 향해 걸어왔다.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어떡하지. 숲색 눈이 천천히 떨기 시작했다. 도망 가야할까? 이럴 거면 그냥 캇쨩 옆에 있을 걸, 혼자 오지 말걸. 온갖 생각에 미도리야가 꽉 입술을 깨물었지. 녀석의 비릿한 눈길이 점차 가까워지던
그때였다.

누군가 비어있던 미도리야의 옆자리에 툭 앉았다. 미도리야가 제 옆에 앉은 얼굴을 향해 둥그런 눈을 꿈벅꿈벅 했다. 토도로키였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비척비척 걸어오던 녀석을 날카롭게 뚫어보며 말했다.

“여긴 오늘 내 자린데, 무슨 용무라도.”
“어?! 아, 아니! 전혀! 하하, 용무는 무슨!”

과장된 소리로 크게 웃은 녀석이 잽싸게 등을 돌려 시야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여태껏 노골적으로 미도리야를 바라보고 있던 녀석들이 후다닥 급하게 눈길을 돌려버렸다. 망했다, 토도로키는 못 이긴다고. 몇 줄 앞에서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그리고 토도로키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우물거렸다.

“고맙습니다.”
“별말을.”

색이 다른 눈동자는 그 정도로만 무심히 대꾸하고 말았다. 미도리야가 소리 없이 웃음을 삼키며 교과서를 펼쳤다. 수업이 시작되었지.

수업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오히려 바쿠고가 있을 때보다도 집중하기가 쉬웠다. 바쿠고는 틈만 나면 손바닥이나 목덜미를 빨아대니까.
반면에 토도로키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덕분에 미도리야는 종일 수업에 맘 편히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날도 처음이었다. 어차피 미도리야는 사육인간이라 다른 학생들처럼 시험을 보는 것도, 성적표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읽거나 배우는 일을 좋아했다. 바쿠고도 그런 미도리야에게 편히 드나들라고 오래 전부터 서재의 열쇠를 주었었지만 학교에선 미도리야의 수업보다도 미도리야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더 즐겼고 좋아했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오늘이 참 좋았다. 바쿠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미도리야는 이젠 알 것 같았다. 토도로키가 왜 제 곁에 앉아주었는지.

“부탁받으신 거죠? 캇쨩한테.”

점심이었고, 미도리야는 언제나처럼 옥상에서 요리사가 따로 챙겨준 도시락을 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쿠고가 아니라 토도로키와 함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미도리야가 눈길을 깔며 우물거렸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잠깐 미도리야를 돌아봤다, 이내 가볍게 대답했다.

“딱히.”

하기야. 미도리야는 생각했지. 둘 다 서로에게 대놓고 부탁을 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애당초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도리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홀로 두지 않는 바쿠고가 드물게 미도리야만 학교에 가라고 보낸 이유는 토도로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점에 한해서는 서로 믿고 있는 게 아닐까.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생각을 우물거리며 미도리야가 샌드위치의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지 토도로키가 잠깐 돌아보았다가 이내 다시 펼치고 있던 책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옥상은 조용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침묵이 정오의 햇살처럼 평화롭게 내려앉았다. 날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어색하네, 좀. 미도리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나. 토도로키가 침묵을 깼다. 여전히 책을 향해 있던 색이 다른 눈동자가 남아있던 말을 담담히 밀어냈다.

“어제 네 주인이 결행할 날짜를 골라보라고 하던데.”
“결행? … 아아, 네.”

미도리야가 프 웃었다. 그러게요, 결행… 부스스 웃으며 미도리야는 입가에 묻은 샌드위치의 소스를 꾸물꾸물 닦아냈고, 토도로키가 잠깐 눈을 들어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쿠고는 어제 이 녀석을 애인이라고 불렀었다. 이 녀석도 자기 주인을 이제 애인이라고 부를까. 잠깐 궁금해졌지만 토도로키는 이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서로 어떻게 부르건 그건 알 바가 아니다. 그래도 토도로키는 죽어도 바쿠고를 녀석의 애인이라고 지칭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방학식이 어떨까. 네 주인에게도 이미 말했지만.”
“아, 좋아요. 방학식날이면… 이틀 뒤네요.”
“괜찮은가, 너는.”
“……”
“그 계획을 실행해도.”

색이 다른 눈동자가 이번에는 미도리야를 정확히 뚫어보며 물었다. 숲색 눈이 둥그렇게 휘어졌다. 하얀 뺨을 긁적거리며 미도리야는 우물거렸다. 너무 그렇게 빤히 보시면 약간 부끄러워지는데… 그 말에 토도로키가 헛기침을 큼큼했다. 미안, 결례를 했다. 미도리야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더불어 덧붙였다.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역시… 괜찮아요. 제가 결정한 일이니까.”
“……”
“캇쨩도 그렇지만 쇼토 도련님도 꽤… 걱정이 많은 성격인 가봐요. 괜찮냐고 계속 물어, 두 사람 다.”

토도로키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잠시 언짢은 얼굴을 했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바쿠고와 동급으로 엮지 말라는 말이 좁아진 눈썹 사이에 숨어 있었다. 서로 진짜 싫어하는구나, 도련님이나 캇쨩이나.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는 또 습관처럼 흐 웃어버렸다. 그러다 어, 했다. 잊고 있던 게 돌연 생각 난 탓이었다. 맞다.

“어제 집에 돌아갔는데 무슨 명함이 한 장 있더라구요.”
“명함?”
“네. 그런 적은 처음이라 신기했어요. 아, 캇쨩 일도 혹시 그것 때문인가? 그 명함을 본 이후로 얼굴 표정이 계속 좋지 않았거든요. 자꾸 딴 생각 하는 것처럼.”
“……”
“요양원… 무슨 요양원이었는데. 아, 분명히…”
“……”
“세인트 블랑 요양원.”

담담히 미도리야를 향해 있던 색이 다른 눈동자가 돌연 크게 열렸다. 동시에 우뚝 굳었다. 미도리야가 겸연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토도로키의 눈빛은 미처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메이드 중 한 분이 가지고 계시던 거였나 봐요. 메모도 적혀있고 중요한 명함처럼 보이던데… 캇쨩이 지금쯤 아마 그걸 돌려주고 있을지도 모를,”
“다시 말해봐.”

말을 멈춘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를 돌아보았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미도리야는 짐짓 놀랐다. 그런 토도로키는 처음이었다.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얼른! 미도리야의 손을 잡으며 토도로키가 드물게 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방금 어디라고…”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꽉 깨물었다, 놓았다. 여름 바람 같은 목소리가 천천히 대답을 담고 밀려나왔다.

“세인트 블랑 요양원…”

토도로키가 신음처럼 입술을 씹었다. 엄마가 머물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

하녀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숨을 죽였다. 아침에 인간 소년 혼자 학교에 갈 때만 하더라도 단정히 정리되어 있던 도련님의 방은 강도라도 든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의자는 모두 넘어가 있고 커튼은 찢겨 있었으며 침대의 매트릭스도 전부 뒤집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방에 모인 네 명의 하녀들과 하녀장은 다시 또 정리해야할 방에 대한 걱정보다도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이 서있기만 한 붉은 눈의 도련님이 몇 배는 더 무서웠다.
겁에 질린 하녀들을 흘깃 살펴본 하녀장의 눈길이 도련님을 향해 돌아갔다. 반쯤 넘어가 있는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서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도련님은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하녀장은 이 오만하고 준수한 도련님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저택의 일을 돌보며 곁을 지켜왔다.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는 것보다 자신들을 불러놓고 말조차 하지 않을 때 얼마나 더 무서운지를 하녀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폭풍 직전의 고요 같았다. 벌써 하녀들 중 몇은 울음보가 터졌다. 하녀장이 끝내 고개를 숙이며 운을 뗐다.

“저, 카츠키 도련님…”

대답 대신 선홍색 눈이 날카롭게 하녀장을 향했다. 눈길을 피하며 하녀장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언짢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마뜩찮은 점이 있으시다면 이 아이들 말고 저에게…”
“하나가 안 보이는데.”

도련님이, 바쿠고 카츠키가 툭 말을 잘랐다. 우물거리던 하녀장이 입을 다물었다. 본래 바쿠고의 방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모두 다섯이다. 겁을 먹은 얼굴로 벌벌 떠는 네 하녀들을 흘깃 바라본 하녀장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바쿠고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아이는… 고향에 일이 생겼다면서 급하게 편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곧 새로운 아이를 부를,”
“어. 그딴 건 확인해보면 알 일이지.”

말을 짓씹은 바쿠고가 돌연 설명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하녀에게 확 다가붙었다. 목덜미를 향해 기울어지는 얼굴에 하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다 합 입을 틀어막았다. 바쿠고가 잠깐 하녀를 흘깃 올려다봤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역시 설명도 없이 바쿠고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하녀들 목덜미 체취를 맡기 시작했다. 하녀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바쿠고가 옆에 선 하녀로 걸음을 옮기며 툭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투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누가 씨발, 내 방에서 건방지게 사냥을 했거든. 여기선 데쿠새끼 피냄새만 나야 정상인데, 존나 불쾌한 잡혈 냄새가 섞여 있어서. 근데 내가 그 냄새를 맡아봤다 이거지.”
“……”
“분명 너희 중 하나의 냄새인데.”

두 번째 하녀 앞에 멈췄던 걸음이 다시 천천히 이동했다. 바쿠고의 얼굴이 목덜미로 기울여 질 때마다 하녀들은 시선을 돌리거나 양손으로 홧홧해진 얼굴을 가렸다. 세 번째도 아니었다. 이제 남은 하녀는 하나뿐이었다. 이 하녀만 아까부터 조용했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하녀의 얼굴을 잠시 흘깃 바라본 바쿠고가 목덜미 쪽으로 천천히 기울다, 우뚝 멈췄다. 선홍색 눈이 서늘하게 웃었다.

“너구나.”

세 하녀와 하녀장이 동시에 네 번째 하녀를 돌아보았다. 하녀의 얼굴은 납빛처럼 질려 있었다. 비명도, 숨소리조차 똑바로 내지 못한 채 하녀가 제 얼굴을 감싸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웃음기를 지운 바쿠고가 하녀 앞에서 가볍게 걸음을 떼어냈다. 그리고 주저앉은 하녀의 앞에 뭔가가 툭 던져졌다. 하녀가 비명이 터질 뻔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작은 단추 같은 장치들이 얼기설기 얽혀있었다. 도청기였다. 이번에도 바쿠고는 웃지 않았다.

“내가 설마 내 집에서 그 찢어죽일 약쟁이집 냄새를 맡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 도련님… 저는… 저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하녀는 황급히 변명을 더듬었지만 어느 것 하나 똑바로 된 소리로 나오지는 못 했다. 바쿠고가 열려있던 문 바깥으로 손짓을 하자 하인들이 달려 들어와 하녀의 팔을 결박했다. 놔! 하녀가 팔을 떨치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쪽을 잠시 흘깃거렸다, 바쿠고는 바닥에 놓인 도청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도청기는 아직도 멀쩡히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것처럼 파란 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살펴보던 바쿠고가 도청기에 대고 입매 끝을 비틀었다.
듣고 계시죠?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저한테 장갑을 제대로 던지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
“목 잘 씻고 기다리시라고, 씨발.”

바쿠고가 바닥에 툭 떨어뜨린 도청기를 구두 뒷굽으로 짓이겼다. 퍽, 소리와 함께 도청기는 더 이상 푸른빛을 끔벅거리지 않았다. 하녀는 하인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로도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하녀가 말했다. 바쿠고가 하인들에게 가볍게 턱짓을 했다.

“죽여.”
“제발 도련님, 자비를 …! 그 사람이 저희 언니를! 저희 언니를 죽여 버릴 거예요! 저는 죽이셔도 좋아요. 하지만 저희 언니를… 제발, 카츠키 도련님!”

살려주세요, 제발! 언니만은 제발! 질질 끌려 나가던 하녀가 오열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 어떤 소리에도 바쿠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데쿠 새끼 점심은 먹었겠지. 생각에 바쿠고가 비식 웃었다. 별일은 없을 것이다. 반푼이 새끼가 혼자 팔푼이처럼 돌아다니도록 두지 않았을 테니까.
딴 새끼도 아니고 그 새끼한테 또 신세를 지는 건 엿 같은 일이지만 수가 없었다. 믿지 못했다면 미도리야를 결코 혼자 보내진 못했을 것이다. 넌 내 욕심에 끌려 여기 있었겠지. 내가 어떤 쓰레기여도, 어떤 폭군이어도 상관없어. 그래도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오늘 미도리야를 굳이 홀로 학교에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귀찮겠는데, 이제. 바쿠고가 생각을 흐리며 셔츠 앞에 꽂혀있던 명함을 잡아 뽑았다. 좀 전에 맡은 하녀와 비슷한 피 냄새가 아직도 명함에 옅게 남아 있었다. 바쿠고가 명함에 박힌 이름을 다시 거듭해 뚫어보았다.

세인트 블랑 요양원.

모두들 그곳을 흔히 흡혈귀들의 무덤이라고 불렀었다.






*

벽에 부딪친 수신기가 산산이 조각났다. 엔데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건방진 녀석이 감히…”

박살난 수신기는 더는 바쿠고 저택의 어떤 소리도 전해주지 못했다. 완전히 조각조각 부서진 수신기를 바라보며 엔데버는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엔데버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대기 중인 고용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회장님. 엔데버가 대답했다.

“기사를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어디로 향하실 예정이십니까.]

피처럼 붉은 눈이 탐욕스럽게 웃었다.

“세인트 블랑 요양소.”




*

“어머니가… 거기 계신다구요?”

숲색 눈이 물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담담히 대답했다. 어. 미도리야가 크게 눈을 흔들었다. 이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보다 강한 흡혈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 악마의 저주라던 백색병. 차라리 죽기를 바랄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병은 흡혈귀의 모든 세포를 좀먹고 죽음의 축복조차 앗아간다고 했다. 백색병에 걸린 흡혈귀들은 미라처럼 온몸의 물기가 바싹 말라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의식 없이 잠만 잔다고, 그리고 가족들과 격리되어 면회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감옥 같은 병원에 갇혀 링겔 하나에 의지해 화분처럼 살아간다고. 그러다 입원 환자들이 넘쳐 침대가 부족해지면 병원에서는 그들을 산 채로 뒷산의 묘소에 안치해버린다고, 그곳엔 이름 없는 묘소들이 즐비하다고, 가히 유령의 땅이라고, 악마들의 무덤이라고.
그곳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다고, 토도로키는 말했다. 오래 됐어. 쓰게 웃으며 토도로키가 제 얼굴을 크게 쓸었다. 그리고 꽉 악다문 입술이 한 이름을 밀어냈다. 저주처럼, 죽여야 할 단 한 존재의 증거처럼.

“내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때 미도리야는 처음으로 이 흡혈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NEW#29)

세인트 블랑 요양원은 그야말로 무덤이었다.

수도를 벗어나 30분은 더 달려야하는 호젓한 산기슭에 그 무덤 같은 요양원이 있었다.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을 따라 오르고 있으면 멀리서도 홀로 우뚝 서있는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고는 했다. 근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10Km 바깥에나 있었고, 방문객도 적은 이곳은 언제나 죽은 자들의 도시처럼 고요했다.

이곳을 처음 세운 것은 토도로키 쇼토의 증조할아버지였다.

백색병 환자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기관이었다. 인간에게 블러드 바이러스가 있다면 흡혈귀에겐 백색병이 있었다. 인간과 달리 흡혈귀는 자가치유가 발달해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지만 오로지 단 하나, 백색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감염되며 어떻게 전파되는지조차 알려진 적이 없었다. 블러드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때에 처음 이 병이 나타났고, 가끔 운이 나쁜 흡혈귀들이 이 병에 걸렸다. 원인을 모르니 치유할 수도 없다. 만약 이 병이 블러드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는 종류였다면 흡혈귀는 자신들의 영화를 누려보기도 전에 진작 멸족했을 것이다.
감염되면 흡혈귀는 가장 먼저 피를 거부한다. 피냄새만 맡아도 구토와 구역질이 나고, 피를 마시지 못하니 조금씩 말라간다. 병균은 흡혈귀 체내에서 변이작용을 일으켜 이 속도를 더욱 가속시킨다. 정상적으로 흡혈을 하지 못한 뱀파이어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말라가고 앙상해지며, 2주일만 지나도 눈꺼풀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죽지는 않는다. 병균은 일종의 기생체와 같다. 자신이 기생하고 있는 몸에 미량의 에너지를 공급하며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둔다. 어떤 생태로 백색병의 바이러스가 에너지를 얻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흡혈귀들에게 이 병은 저주였다. 죽음의 축복조차 내려주지 않는 이 병을 그들은 가장 두려워했다.

세인트 블랑 요양소는 바로 이, 미라와도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흡혈귀가 머무는 마지막 장소였다.

해가 기울 무렵이 되자 캐딜락 리무진 한 대가 요양소에 나타났다. 일찍 업무를 마무리하고 관사에서 쉬고 있던 원장이 낯익은 차를 보곤 부랴부랴 마당까지 뛰어나왔다. 뒷좌석을 열고 내리는 수트와 중절모 차림새의 중년 사내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원장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남자는 토도로키 엔지, 엔데버였다.

“회장님이 방문해주시는 건 올해는 처음이네요, 하하… 사모님은 건강하십니다. 여전히 차도는 없으시지만요. 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원장이 앞섰고, 엔데버와 수행비서가 그 뒤를 따랐다. 엔데버는 토도로키 재단의 회장이었고, 재단에서 운영하는 이 요양소의 서류상 최고 관리인이기도 했지만 결코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엔데버는 언제나 이 무렵, 모든 업무가 끝난 밤 시간이 될 때에나 요양원을 찾아오고는 했다. 원장은 요양원의 예산 서류만 처리하면 감사하고 족할 엔데버가 연에 두 서너 번 이곳에 방문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토도로키 엔데버의 부인, 즉 토도로키 쇼토의 어머니가 오래도록 입원해 있었다.
2층의 입원실로 오르자 눈치 빠른 원장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원장이 계단을 내려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엔데버가 조용히 수행비서에게 눈짓을 했고, 비서는 먼저 왼쪽 복도로 말없이 사라졌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엔데버가 뚜벅뚜벅 정면을 향해 걸었다. 수행비서가 걸어간 자리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복도 맨 끝 방에 와서야 엔데버는 우뚝 멈췄다. <토도로키>라는 이름이 쓰여있는 명패를 잠깐 흘깃거리고 엔데버는 방으로 들어갔다. 노크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노크 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올해는 처음인가. 당신은 전보다 더 끔찍해졌어.”
“……”
“그래도 내 옆에 있을 때보다는 보기 좋군.”

엔데버가 독실 한 가운데에 오도카니 누워있던 그림자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링겔을 꽂고 잠들어 있는 형체는 살아있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만큼 비쩍 말랐다. 머리카락도 하나 남지 않았고, 이목구비의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비쩍 마른 모습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이 어려웠다.
엔데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 여인도 제 곁에서 아름답게 나이 먹으며 자신의 심성을 꼭 닮은 아들이 장성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감히 그 인간을 감싸며 나서지 않았더라면.

“뭐, 자매와 같은 사이였었지, 둘 모두.”

엔데버가 가볍게 우물거렸다.

“당신도 그 고집을 꺾었더라면 나와 함께 쇼토 녀석이 얼마나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으로 성장했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군. 아, 하기야. 그 녀석의 고집은 어쩌면 당신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어. 유전이라는 건 참 무섭지.”
“……”
“괜찮아. 아들이야 또 만들면 되니까.”

당신 몸이 죽은 것은 아닐 테니까. 엔데버가 소리를 죽이며 고요히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이 여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말하고 웃으며, 나를 손가락질하고 도망치지 않겠지. 당신은 괴물이라고, 당신은 추악하다고, 당신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며 더는 나를 경멸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씹으며 엔데버가 소리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난 당신을 죽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새로운 아이가 필요하다. 이번 아이는 실패했어. 중얼거리며 엔데버는 잠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한때는 아내였던 미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틀어막으며 인사 없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아내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수행비서가 꾸벅 인사를 했다. 어떻게 됐나. 엔데버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수행비서가 역시 같은 음량의 목소리로 고요히 대답했다. 처리했습니다. 엔데버의 입꼬리가 가볍게 비틀렸다. 잘 됐군.

“바쿠고 경의 성질 급한 외아들도 이런 때는 참 도움이 되지. 자매가 모두 죽었으니 이제 이 일로 입을 놀릴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하지만 아깝게 됐어. 다시 또 바쿠고 저택에 사람을 심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뭐, 그런 것은 천천히 하면 될 일이다. 엔데버가 고요히 말을 삼켰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다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는 엔데버의 뒤를 수행비서가 바쁘게 쫓았다. 수행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그 녀석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그깟 녀석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뭘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지. 그 녀석의 아버지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 원로회 수장이라고 해봐야 허수일 뿐이다. 그런 배경에서 힘도 없는 녀석이 해봤자 대단한 수는 발휘하지 못하겠지.”
“……”
“쇼토 녀석은.”
“딱히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그 녀석은 생각이 너무 많아.”

마치 제 어미처럼. 덧붙은 생각을 엔데버는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차피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엔데버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너의 모럴과 씨름하고 있겠지. 그러나 머지않아 그 손 안에서 놓쳐 버리게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모럴만으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얻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결정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입을 틀어막고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토도로키 쇼토는 다섯 살이었다. 1년동안 잠을 똑바로 잔 날이 없을만큼 마음을 다쳤던 아이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똑바로 대든 일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보러 이 요양원에 오지도 못했던 것처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 엔데버는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너는 겁을 먹게 될 것이다. 그 나이는 본래 그렇다. 어딘가에 선동 당하기도 쉽고, 그것이 자신의 자존이라 착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종막에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아이가 느낀 공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그때가 되면 참 재밌겠어. 생각을 삼키며 엔데버는 로비를 조용히 빠져 나갔다. 원장은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갈 데가 있었다. 이 장소를 떠나기 전에, 다른 이의 눈을 피해서 몰래 들러 봐야할 장소가 거기 있었다. 엔데버가 수행비서를 향해 가볍게 말했다.

“먼저 차로 돌아가 있어. 나는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요양원 뒷산으로 뻗어있는 어둡고 좁은 길로 사라졌다. 거기엔 무덤이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지고 저주 받은 망자들의 무덤.

“오랜만이군.”

엔데버가 석굴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 이름조차 똑바로 달려 있지 않은 석굴 묘소의 입구에는 그저 간단한 이니셜로 이렇게만 새겨져 있었다.

“내 사랑.”

M.






*

하루가 저물고 이틀이 밝았다. 1학기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도리야는 일찍 눈을 떴다. 제 머리를 받쳐주고 여직 달게 자고 있던 바쿠고가 깰까봐 조용히 품에서 빠져 나왔다. 곳곳에 울긋불긋 꽃 같은 상흔이 남은 가슴팍을 잠깐 내려다보다 가운을 걸쳐 입고 미도리야는 욕실로 들어갔다. 너른 욕조에 물을 받는동안 잠깐 콧노래를 불렀고, 물을 받은 후엔 오래도록 목욕을 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데.”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욕실을 나왔을 때 바쿠고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툭 말을 걸었다. 깼어? 인사를 하며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곁에 앉아 허리를 기울였고, 주인보다 성질이 급한 손이 아직 물기로 촉촉한 뒷머리를 헤집으며 미도리야의 얼굴을 제 쪽으로 급히 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또 깊게 부딪치기를 서너 번 반복했다.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멍청이가.

“누구 좋으라고 아침부터 이렇게 씻어.”
“흐, 그러게.”
“……”
“오늘이야, 캇쨩.”

부슬부슬 웃으며 미도리야는 그렇게만 말했다. 바쿠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도리야의 얼굴만 조용히 뚫어보던 선홍색 눈이 옅게 일그러졌다. 그 눈길이 미도리야는 어쩐지 자꾸 마음에 남았다. 화내는 것 같아서, 우는 것도 같아서, 자존심이 강한 네가 내게 애원하는 것만 같아서.
결심을 흐리고 싶지 않아서 미도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 흐, 웃음을 삼킨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양손에 제 손을 끼워넣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옆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던 바쿠고의 몸이 천장을 향했다.
허. 선홍색 눈이 기가 찬 듯 픽 웃었다. 까분다, 데쿠 새끼.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아침부터 이쁜 짓이야.”
“그냥. 잠 덜 깬 우리 주인님 너무 잘 생겨서…”
“……”
“내 애인 좋아서…”
“……”
“키스해도 돼?”

그딴 건, 씨발. 바쿠고가 질근 입술을 씹었다 놓았다. 묻지마, 멍청아. 급하게 다가온 팔이 미도리야의 뺨을 터질 듯 움켜잡았다. 또 버릇처럼 입술이 겹쳤다. 아랫입술을 흠뻑 들이마신 바쿠고의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질 때, 미도리야는 나른히 눈을 감으며 천장을 향해 턱을 젖혔다. 푹, 이가 박히는 기척이 서늘했다. 더불어 뜨거웠다. 쯥쯥 젖은 소리가 한동안 고요한 허공을 흔들었다. 목덜미에 파묻혀 천천히 흔들리는 색 밝은 머리칼을 가만히 헤집으며 미도리야는 흐, 웃었다. 웃음결이 환희처럼 옅게 떨렸다. 달콤한 신음처럼, 이미 수십 번을 너에게 꿰뚫린 지난날의 증거처럼.

“오늘은 더… 오래, 깊게 빨아줘.”
“……”
“네 몸 안을 내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좋아.”

선홍색 눈이 잠시 위를 흘깃거리다, 픽 웃었다. 데쿠새끼 욕심은. 곧이어 다가온 팔이 미도리야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대로 자세를 뒤집었다. 아, 존나 늦겠네. 바쿠고가 벌어진 가운 틈에 입술을 묻으며 우물거렸다. 무릎을 구부리며 미도리야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게. 그리고 춥, 바쿠고의 아랫턱에 가만히 입술을 부비며 덧붙였다.

“그래도… 멈추지마.”

결국 30분 후에 기다리다 못한 집사가 방문을 힘껏 두드렸다. 부랴부랴 교복을 챙겨 입으면서도 바쿠고는 학교와 집사를 번갈아 욕했고, 미도리야는 귀까지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교시 수업종이 울린 후였다. 그래도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선생님은 묻지 않았다. 별 얘기 없이 학기의 마지막 수업이 시작됐다. 학생들이 칠판을 향해 고개를 들 때 책상 밑으로 뻗어온 손이 미도리야의 손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바쿠고의 귀 끝이 울긋불긋했다. 미도리야가 책상에 엎드렸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오늘이 지나면 영영 너를 못 볼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좋았다. 네가.

3교시가 끝나자 담임이 들어왔다. 학기의 마지막이니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방학동안 학교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고 건강히 지내라는 단조롭고 빤한 인사가 잠시 있었다. 교실은 서로 인사를 하는 학생들로 잠깐 소란스러웠다. 짐을 챙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가방을 챙겨들고 앞문을 열고 나가는 토도로키의 뒷모습을 흘끗 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눈길을 떼어냈다. 오래지 않아 교실은 텅 비었다. 조용해진 후에야 미도리야는 잠자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바쿠고는 아까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아직도 바쿠고의 오른손은 미도리야의 왼손을 잡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교실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양호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어.”

토도로키 도련님이. 미도리야가 덧붙였다. 바쿠고가 짧게 대답했다. 어. 돌연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아, 씨발. 남은 손으로 색 밝은 허리를 크게 헝클이며 욕을 한 바쿠고가 툭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아침부터 그 눈 안에 계속 걸려 있었던, 그러나 말하지 못했던 바로 그 얘기였는지도 모른다.

“안 하면…”
“……”
“이거 안 하면 안 되냐, 너.”

예상하고 짐작하고 있던 말이었다. 미도리야가 대답 대신 소리 없이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마지막까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내키지 않는지.
이 계획을 처음에 세웠던 건 미도리야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계획에 계속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대놓고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럽고 심란할지 미도리야는 알고 있었다.
괜찮아. 미도리야가 말했다. 가볍게 다가온 입술이 바쿠고의 입술에 짧게 겹쳤다, 떨어졌다. 이럴 거라곤 생각을 못 했는지 드물게 당황한 선홍색 눈을 보며 미도리야가 남은 말을 마저 이었다.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어차피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야. 내가 하지 않으면 캇쨩이 할 거잖아. 이제 나는 그게 싫어.”
“……”
“지금껏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겨줬는지 알아. 뭘 걱정하는지도 알고 있어. 캇쨩은 자기가 하는 말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누가, 씨발.”

씨근거리다, 바쿠고가 홱 눈길을 돌려버렸다.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이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미도리야는 잠깐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나는 샬레야. 내 몸 안에 이런 피가 흐르고 있는 한 그 사람은 먼저 날 죽이진 못할 거야. 쇼토 도련님도 곁에 있을 거고…”
“너는 씨발, 그 새끼를 믿… 아니, 됐다. 관두자. 그 새끼를 믿고 안 믿고는 네 놈 자유니까. 근데 씨발, 니가 그 약쟁이 부자한테 제 발로 걸어가는 건 문제가 다르지. 그 새끼들이 취하면, 가지면. 필요한 거 다 얻고 나면 너는!”
“……”
“잘못하면 죽는다고. 뒤진다고.”
“……”
“내가… 없는 데서, 씨발아.”

멍청아, 너는 하나도 모른다. 네가 그 망할 계획을 세운 후부터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말을 참았는지. 하루에도 씨발, 수십번씩 너를 잃는 상상을 하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래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건 그걸 네가 바란 탓이었다.
네가 말했었다. 부탁한다고, 들어달라고. 그뿐이었다. 너는 이제 내가 나서는 게 싫다고 했다. 나를 지키고 싶다고 너는 말했다. 하지만 그 말부터 틀렸다고, 멍청아.

“살려놓고 책임 안 지지, 데쿠새끼.”
“……”
“난 너 없으면 죽는다고, 이젠.”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내 앞을 가리며 총 앞에 뛰어들었던 그때부터 갈피를 모르던 마음이 네게 기울었다. 너는 계산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라서, 마음으로 무작정 뛰어오는 등신이라서 나는 벌써 두 번이나 너로 인해 죽지 않았다. 붉은 달에 취해 미쳐갈 때도 나를 살린 것도 너다. 이때까지도 나는 너로 인해 살았다.

내 온몸의 세포가 넌데, 내 혈관 밑을 도는 피가 넌데.

끝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움직였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낸 팔이 미도리야는 단숨에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캇쨩? 기척에 놀란 미도리야가 잠깐 흠칫 떨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밀어내지는 않았다. 등뼈를 그대로 부술 듯이 힘껏 끌어안으며 바쿠고는 꽉 입술을 씹었다. 뺨이 축축했다. 젖은 입술을 비틀며 바쿠고는 다시 말했다.

“가지마, 멍청아.”
“……”
“두고 가지마. 아무 데도 가지마.”
“캇쨩.”
“가지 말라고, 씨발.”
“……”
“어차피 가겠지만.”

데쿠새끼 말 더럽게 안 들으니까. 씨근거리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어깨 위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그 머리를 미도리야가 조용히 쓰다듬었다. 편안한 침묵이 잠시 내려앉았다. 죽지마. 바쿠고가 젖은 뺨을 툭 문지르며 말했다.

“진짜 죽지마. 죽으면 죽는다.”
“흐, 그런 말이 어딨…”
“내가.”
“……”
“내가 죽어버릴 거라고, 등신아.”

어깨에 파묻혀있던 얼굴이 서서히 떨어졌다. 어느 틈엔가 흠뻑 젖은 선홍색 눈에 미도리야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음이 아파 그랬다. 넌 한 번도 내 앞에선 울지 않았는데. 아, 씨발, 개같이. 욕을 짓씹으며 바쿠고가 손등으로 젖은 뺨을 귀찮은 듯 연거푸 훔쳤다. 그리고 미도리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
“……”
“살아서 같이 살자. 평생 아껴줄 테니까.”

숲색 눈이 흐, 웃었다. 둥그렇게 휘어진 그 눈이 울컥 젖었다. 프로포즈 같잖아. 농담처럼 웃으면서 던진 목소리가 어쩐지 메여서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씹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살아 돌아올 테니까.”

스르륵 다가온 미도리야의 입술이 다시 바쿠고의 입술 위에 천천히 겹쳤다, 떨어졌다. 그대로 달아나는 뒷목을 바쿠고는 그대로 두지 않았다. 단단히 뒷목을 헤집은 손에 이끌려 다시 한 번 두 입술이 깊게 맞붙었다. 이번에는 좀 더 길고 오랬다.
입술을 떼어내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잘해. 바쿠고가 말했다. 미도리야가 대답했다. 응.

“다녀올게, 내 사랑.”

악마를 보러,
그 악마의 숨통을 끊으러.




(계속)


백업을 어느 타이밍에서 할까 하다가 그냥 여기에서 툭 끊어갑니다^ㅇㅠ 다음 편은 아마 두 편 묶어서 완결까지 한 번에 다이렉트로 올라올 듯...  분위기가 확 바뀌는 지점인 것 같아서 브금도 바꿔서 달아둡니다. 이제 두 편 남았네요ㅠ ㅠ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매번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힘내고 있다며ㅠ/////ㅠ 마지막까지도 힘내겠습니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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