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뱀파이어 헌터 바쿠고랑 뱀파이어 미도리야 이야기
* 약수위 주의해주세요
* 8편은 맨 끝에 있습니당XD


BGM / Jill Andrews <Tell That Devil>

http://youtu.be/JNKfVoJsANY



뱀파이어 헌터 x 뱀파이어로 캇데쿠.ssul (5~8)
@ruka_tea


(05)


흔히 귀렵수들의 암살자라고 불렸었다. 시가라키 토무라의 별칭이었다.

미도리야는 한때 이 남자와 같은 팀을 이뤄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 남자와 기질적으로 맞았던 기억이 없었다. 흡혈귀는 인간보다도 야성이 강하며 야생에 가까운 존재들이라 난폭한 속성을 띠고 있다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시가라키는 그 흡혈귀중에서도 잔인함으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난폭하며 자비를 몰랐다. 무엇보다 시가라키는 인간을 경멸했다. 그 점에 대해선 야생 상태에 있던 이 자를 발견해 노스페라투 요원으로 길러냈었다는, 소위 올포원이라는 남자와 꼭 같았다.
먹이. 시가라키는 인간을 딱 그 정도로만 불렀다. 명이 아니라 한 마리, 두 마리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참 대단해. 어떻게 이런 냄새를 견디면서 먹이들하고 어울려 사는 건지, 너나 올마이트나.”

보통 흡혈귀들은 인간들 틈에 있을 때엔 송곳니와 ‘표식’을 철저히 감춘다. 시가라키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들이 제 송곳니를 알아보고 겁을 먹어주길 바라는 것이겠지만. 생각하며 미도리야가 가볍게 웃었다. 웃는 입매는 부드러웠지만 정면을 바라보는 숲색 눈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마치 버러지라도 만난 것처럼.

“저는 시가라키씨와는 다르게 사회화가 잘 된 편이거든요. 올마이트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요.”
“아, 그래. 인간하고도 친구를 먹고 말이야. 오늘 귀렵수가 된다는 그 건방진 꼬맹이가 그쪽의 소꿉친구라던데.”
“……”
“바쿠고… 카츠키랬나, 뭐랬나.”

호선을 그리고 있던 미도리야의 입술에서 돌연 웃음이 사라졌다. 제 뒤를 흘깃 노려보는 숲색 눈은 온화했지만 차가웠다. 아, 방금 나 혹시 약점을 건드린 거? 너스레처럼 시가라키가 흉터 앉은 입술로 히죽 웃었다. 의례가 시작된 모양인지 앞쪽엔 이제 불경을 읊고 있던 주지의 모습도, 손님을 맞고 있던 이 집 어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이 그러던데. 미도리야 이즈쿠가 이 집 아들을 다섯 살 때부터 점찍어놨다고 말이야. 우리 쪽에선 소문이 자자하거든. 어느 젊은 흡혈귀가 얼굴반반한 귀렵수를 기둥서방 삼겠다고 딱 찍었다는 뭐, 그런 얘기… 웃기는 소리야. 그치? 그 인간 애라도 벤 것처럼 군다나, 뭐라나.”
“귀렵수만 골라서 죽이는 도착증 환자보단 좋은 취미 생활이죠.”
“귀렵수와 우정 놀이를 하는 흡혈귀보단 덜 변태적이지 않나 싶지만, 뭐.”
“…1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저한테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언제나 관심이 있지. 아, 물론 너말고 네가 물려받은 ‘힘’ 말이야.”
“……”
“그게 왜 너나 올마이트 같은 변절자들한테 가 있는지, 차암, 웃기는 일이지.”

미도리야가 무릎 위에 가볍게 포개 놓았던 주먹을 소리 없이 꾹 쥐었다, 놓았다. 만약 이 자리가 얼굴도 모르는 다른 귀렵수의 의례 자리였다면, 적어도 바쿠고 카츠키 본인이 아니었더라면 미도리야는 진작 뒤에 앉은 사내의 목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인간들의 기억이야 그냥 지워버리면 된다. 미도리야는 그럴만한 ‘힘’을 물려 받았다. 인간의 정신으로 틈입해 혼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기억을 조작하고 끝내 내 편이 되도록 세뇌하고 마음을 사로 잡는 능력.
그 힘은 개인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 올마이트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죄송해요, 올마이트. 저는 이미 그 힘을 제 자신을 위해 쓰고 있어요. 오로지 한 소년을 가지기 위해서, 12년 전부터.

“뭐, 싸우자고 온 건 아닐 테니까… 그쪽이나 이쪽이나.”

시가라키는 그렇게만 말을 매듭 지었다. 그 점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 당신을 죽이려고 온 게 아냐. 이 자리에 온 건 당신 같은 버러지보다 더 중요한 존재 때문이지.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등 뒤에서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미도리야는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조만간 또 보자, 울보. 시가라키가 말했다. 미도리야가 뒤도 보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네, 얼마든지요.

“다음에는 좀 더 조용한 곳에서 봬요. 둘이서만.”
“난 올마이트의 후계자랑 둘이 만날만큼 멍청하지 않은데, 뭐… 나랑 자줄 거면 생각해보고.”
“어쩌죠, 흐… 전 차가운 체온은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 그보다 더 뜨거운 쪽이야. 뜨겁고, 단단하고, 거칠고 잔인한… 그런 눈을 가진 소년을 알고 있었다. 그 눈길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고여서 미도리야는 시가라키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마른 울대를 밀며 미도리야가 정면 쪽을 향해 눈을 들었다. 밀실 문을 열고 나온 사찰의 주지스님이 붉은 글씨가 씌여진 얇은 종이를 제단 앞에 놓여있던 화로에 던져 넣었다. 주지가 목탁을 두드렸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명복을 빌었다. 익숙한 이름 넉자가 붉게 타들어 가고 있던 종이를 향해 미도리야가 두 손을 마주 모으며 합장을 했다.

부디 명복을.

미도리야가 길게 감았던 눈을 뜨며 하늘로 날아오르던 이름을 바라보았다. 바쿠고 카츠키의 이름이었다.








*



자. 할아버지가 바쿠고의 눈을 가렸던 무명천을 풀어내며 말했다. 이제 너는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누가 너의 적인지, 누가 너의 사냥감인지.

바쿠고의 ‘관’이 뒷문으로 빠져 나가면서 공식적인 의례는 종료되었다. 진짜 관은 아니었다. 어차피 의식에 불과한 장례라 관 안에는 바쿠고의 이름을 새긴 지푸라기 인형을 넣어두었다. 인형은 오늘 자정을 넘어갈 때 사찰에 딸려있는 소각로에서 관과 함께 불타게 될 것이다.
크게 헛숨을 들이켠 바쿠고가 심호흡을 하며 밀실 문을 밀었다. 이제 모든 의례가 끝이 났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사찰의 너른 마당에는 이름을 태웠던 습자지가 하얀 재가 되어 날고 있었다.

“캇쨩!”

가짜 조문객들도 대부분 빠져 나간 썰렁한 자리에서 숲색 머리가 이쪽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답답한 넥타이부터 풀어헤치고 있던 바쿠고가 이 쪽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미도리야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매를 픽 밀었다. 등신 새끼, 그걸 못 참고.
다 끝났어? 질문을 하는 미도리야의 하얀 양 뺨이 불긋불긋 상기되어 있었다. 어쩐지 미도리야는 의식을 치른 당사자인 바쿠고보다도 더 흥분한 듯 들떠 보였다. 어. 짧게 대답을 삼킨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숲색 머리칼을 무심히 헝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도리야의 목에 팔을 걸며 어깨동무를 했다. 의식이 다 끝난 덕인지 바쿠고의 얼굴은 아까 전보다는 훨씬 홀가분한 기색이었다.

“야, 데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저녁? 어, 나는 좋지만 캇쨩은… 식구들하고 같이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뭘 씨발, 대단한 일이라고 가족끼리 저녁이야.”
“그래도 어…”
“아, 존나 말 많다. 사준다고 할 때 먹어, 등신아.”

미도리야가 둥그런 숲색 눈을 끔벅거렸다. 캇쨩이 사주는 거야!? 그 얼굴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뚫어보다 그만 홱 눈길을 돌려 버렸다. 의례를 하러 들어가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혀 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바쿠고가 발 앞에 놓여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주말에 뭐 하냐, 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답지 않게 씨발, 이게 무슨 짓인지. 생각을 삼킨 바쿠고가 남아있던 손으로 색이 밝은 머리칼을 크게 헝클였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면서 무작정 어깨동무를 한 팔을 끌어 당기는 바쿠고에게 끌려가면서도 미도리야는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하얀 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다 하얀 재를 따라 바쿠고를 바라본 미도리야가 어, 했다. 하얀 재가 바쿠고의 뺨 위에 툭 앉았다.

“어, 캇쨩. 얼굴에 재가…”

내가 떼어줄게. 걸음을 멈춘 미도리야가 팔에 안겨있던 채로 바쿠고를 향해 돌았다. 무심코 가까워진 거리에 흠칫 하면서도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밀어내거나 팔을 풀어내지는 않았다. 미도리야의 손이 슬며시 바쿠고의 뺨을 향해 다가왔다.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던 건 바로 그때였다.

「제 아무리 뛰어난 흡혈귀라고 해도 말이다. 절대 감출 수 없는 표식이 있거든.」

미도리야의 오른 손등을 무심코 바라보았던 선홍색 눈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처럼, 세상이 무너져 버린 것처럼.







흔히 ‘표식’이라 부른다고 할아버지는 말했었다.

「흡혈귀가 맨 처음으로 다른 흡혈귀에게 물린 자리지. 그 상처는 그 어떤 술수를 부려도 사라지지 않아.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지만 말이다.」

흡혈귀는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본래 인간이었던 존재가 다른 흡혈귀에게 물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그 흡혈귀의 피를 마시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흡혈귀에겐 누구에게나 그 첫 번째 상처가 존재한다고 했다.

「오로지 귀렵수만이 피부 밑에 파묻혀 있는 그 상처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귀안(鬼眼)이라고 부른다. 귀안 중에서도 으뜸은 붉은 눈이라고 했으니, 너는 아마 나나 네 애비보다도 그 식별하는 힘이 더욱 탁월하겠지.」
「……」
「자, 이제 네 눈을 가리도록 하마.」

할아버지가 무명천으로 눈을 가렸고, 외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신의 축원을 받은 물을 뿌렸다. 잘 보도록 해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했다.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귀신인지.

「네가 죽여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







존나… 바쿠고가 소리 없는 신음을 삼키며 남아있던 손으로 제 얼굴을 크게 쓸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존나, 씨발, 말도 안 된다고. 이런 엿 같은 일.

미도리야의 손등 위에 선명히 찍힌 잇자국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미도리야를 떨쳐내지 못했던 것은 너무 놀란 탓이었다. 그보다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호흡이 멎어버릴 것만 같아서 애꿎은 빈 볼만 꽉 씹고 있던 바쿠고를 미도리야가 고요히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만히 바쿠고의 귓가로 기울어온 입술이 흐 웃으며 얕게 속삭였다. 정말이지, 이 말을 12년동안 너무 하고 싶었었다.

“이제 알았구나, 캇쨩. 내가 누구인지.”
“……”
“맞아, 내가 네 사냥감이야.”

네게 송두리째 잡아먹힐,
너의 첫번째 적.




(06)


가. 뒤도 보지 않고 바쿠고는 그렇게 말했었다. 꺼지라고, 씨발아.

「내가 지금… 하, 대가리가 전혀 안돌아서, 씨발.」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시 본가로 돌아가신다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도 없이 2층에 있는 방으로 쿵쾅쿵쾅 올라가 버리는 바쿠고를 향해 엄마가 잔소리를 했지만 할아버지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둬라, 생일도 못 즐기고 귀렵 의례를 받는다고 종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할아버지는 그렇게만 소회했다.
아니, 정신이 없는 게 아니라고. 바쿠고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워 피가 베일만큼 제 입술을 힘껏 씹었다. 할 수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죽여야 할 존재가 너였다니.

흡혈귀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틈에 섞여 사는 건 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간다. 송곳니와 표식을 감출 수 있는 흡혈귀의 평상시 외모는 얼핏 보아서는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페로몬을 느껴도 어디선가 달콤하고 좋은 향이 난다고, 누가 향수를 뿌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말 뿐이다. 단 한 가지, 인간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흡혈귀들은 통상적으로 5년마다 주거지를 옮겨 다닌다고 했었다.
아, 그래, 씨발. 그러고 보니. 천장을 뚫어보고 있던 선홍색 눈이 다시 지진처럼 흔들렸다. 생각해보면 미심쩍은 단서는 이미 느꼈었다.

기억을 못 했었다. 데쿠새끼랑 대체 어떻게 친구가 되었었는지.

미도리야 이즈쿠도 보통 흡혈귀와 같다면 분명히 5년마다 이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쿠고의 기억 속에서 자신과 녀석이 친구가 된 건 다섯 살 때, 즉 12년 전의 일이다. 흡혈귀가 한 마을에서 12년 동안 머물 수 있을 리 없다.
특히나 미도리야처럼, 겉 보아선, 성인이 아니라 십대 중반 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는 소년일수록 더욱 더 불리하다. 그 나잇대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바뀌어가며 성장이 달라져야 정상이다. 더군다나 미도리야가 그 12년동안 자신의 곁에서 정말 ‘함께 자란’ 친구였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바쿠고가 손에 잡히는 베개를 힘껏 집어 던졌다. 씨발, 존나, 엿 같은, 씨발.

속은 거다. 아니, 조작 당했다. 그것도 지난 12년분의 기억을 몽땅 다. 다른 무엇보다 바쿠고는 이 점을 가장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속였어, 이 개 같은 새끼가.”

5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은 모두 미도리야 이즈쿠가 직접 조작한 것일 테다. 너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씨발, 지금과 똑같은 얼굴이었을 테니까. 무슨 힘을 발휘한 건지는 모른다. 흡혈귀는 저마다 쓸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고, 이 기술은 저마다 다르다고 배웠었다. 뭐건 빌어먹을 힘이 있어서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할 리가 없는 12년간의 기억을 너는 정교하게 조작했겠지. 그 점이 기어코 부서져 버린 유리 조각들처럼 바쿠고의 가슴을 힘껏 후벼왔다.

전부 가짜였다. 네 웃음, 네가 나를 따르던 기억, 울면서도 내가 좋다면서 뒤를 종종 쫓아오던 그 우습고 귀엽던 얼굴까지도 전부.

하.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며 힘없이 웃었다.

“존나… 엿 같은 생일이네, 씨발.”

차라리 바쿠고가 아닌 다른 성을 달고 태어날 걸. 그랬으면 그 멍청이가 흡혈귀건 데쿠 새끼건 아무 관계도 없이 살았을 것이다. 영원히 네 존재를 모른 채로 살 수 있었겠지. 귀안인지 뭔지, 날 때부터 제 이름 앞에 박혀있던 성씨 두 글자가 바쿠고는 태어나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더 생각하는 것도 짜증이 나고 괴로워서 바쿠고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바깥에서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며 똑똑 노크를 했다.

“카츠키, 벌써 자니? 얘가 오늘따라 왜…”
“……”
“생일 케이크는 받아야지, 응?”
“……”
“카츠키!”

그래도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귀렵수는 흡혈귀를 죽여야 한다.

그게 사명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었다. 흡혈귀는 어둠에서 태어난 귀신이고 변종이다. 까딱 마음이 약해졌다가는 죄없는 인간들이 흡혈귀의 사냥감이 되어 죽어버리고 말 거라고,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고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성토했었다.
하지만 아빠의 의견은 달랐었다.

「그래도… 그들도 한 때 인간이었으니까. 세상 어딘가에는 흡혈귀가 인간이었을 때를 기억하는 가족들도 있을지 몰라. 물론 그들을 사냥해 죄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게 우리의 일이지만…」

아빠는 확실히 할아버지의 말대로 마음이 약했고,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성격이 불같은 할아버지에게 아빠는 좀처럼 거역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흡혈귀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른 일에는 아빠보다도 할아버지의 편을 더 자주 들었던 엄마도 이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살다보면 용서해줘야 할 때도 있을 거야. 그 자가 아무리 밉고, 네가 사냥해야할 흡혈귀여도…」

아버지는 서글서글한 얼굴로 흐, 웃으며 자주 그렇게 말했다.

「그 흡혈귀가 혹시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족일지 모르니까…」

아니, 씨발. 바쿠고가 세면대 거울을 힘껏 후려쳤다. 그딴 건 없어. 용서해야할 흡혈귀, 죽이지 말아야 할 흡혈귀, 흔들려도 괜찮은 그런 흡혈귀 같은 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멍청아.

갑작스레 유리가 와르르 깨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 노크를 하며 말을 걸었다. 괜찮니? 아빠의 목소리에 바쿠고는 짧게만 대꾸했다. 어, 존나. 그리고 선홍색 눈이 산산이 박살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밤새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조각난 거울 속에 흩어져 있었다.
마음은 이미 정했다. 이만하면 씨발, 고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을 삼킨 바쿠고가 후 숨을 가다듬으며 곁에 걸린 수납장에서 붕대를 꺼내 피가 뚝뚝 떨어지던 오른손에 칭칭 동여 감았다. 4월 21일,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이었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 이즈쿠… 이즈쿠는 곧 전학을 갈 거야. 이즈쿠 아버지에게서 연락을 받았거든.”

녀석의 자리는 종일 비어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텅 비어 있던 대각선 앞자리는 자꾸만 바쿠고의 눈에 밟혔다. 결국 다른 일이 있는 척 교무실 앞을 서성거리다 마침 지나가고 있던 담임에게 물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곧 수속을 하러 올 테니 그전까지는 쉬면서 집 정리를 도울 예정이라던데. 담임은 그렇게 덧붙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학이라니.

아니, 당연히 그러겠지. 그 망할 새끼는 이제 씨발, 나한테 정체를 들켰으니까. 바쿠고가 붕대가 감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모든 정황들이 마치 오래도록 준비해온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정체를 들키고 다음 날 전학을 간다… 이게 우연일 리 없었다. 바쿠고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었다. 귀렵 의례에 오고 싶어 했던 것도 미도리야 본인이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 새끼는 일부러 들킨 거다.

결론을 얻으니 이제는 다른 것들이 바쿠고를 혼란스럽게 흔들었다. 씨발, 네가 망할 흡혈귀인 것도 알겠고 나를 12년간 속인 것도 알겠어. 근데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씨발. 이 답을 해결하지 않고 이대로 녀석과 헤어진다면 두고두고 이 순간을 후회하겠지, 나는. 생각하며 바쿠고가 옥상문을 열어 젖혔다. 근데 어디에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하지. 나는 씨발, 이 새끼 집 주소도 정확하게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옥상의 시멘트 바닥을 딛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철망으로 얽은 난간 앞에 누군가 등을 지고 서 있었다. 숲색 머리였다.

“하, 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 덕에 인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난간 쪽을 바라보고 있던 숲색 머리가 뒤를 향해 돌았다. 옥상 앞에 오도카니 서 있던 바쿠고를 발견한 미도리야가 잠시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열었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놀라서 지은 얼굴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쿠고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캇쨩한테 메시지를 보내볼까 했었는데, 흐… 아까 교실에는 없어서 찾았거든.”
“……”
“너무 그렇게 귀신 보듯 쳐다보지는 마. 그래도 진짜 귀신은 아닌데…”

숲색 눈이 둥그렇게 허물어지며 부슬부슬 웃었다. 그 얼굴에서 바쿠고는 눈길을 좀처럼 돌릴 수가 없었다. 떨리는 입꼬리를 짓씹으면서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붕대가 감겨 있던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완전히 바쿠고 쪽으로 돌아선 미도리야가 난간에 가볍게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미도리야가 목소리처럼 담담하게 웃었다. 지금껏 보았던 열일곱 살 소년의 서툰 얼굴은 분명 아니었었다.

“날 죽일 거야?”
“…죽이면, 씨발, 곱게 죽어 주냐?”
“뭐, 그건 캇쨩이 내 심장을 꺼낼 수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흐… 할 수 있겠어?”
“……”
“못할 것 같은데.”

하. 바쿠고가 입꼬리를 가볍게 비틀었다. 이 씨발 새끼가.
동시에 바닥을 박찬 바쿠고가 순식간에 미도리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잡지는 못 했다. 빈 철망을 움켜쥔 손아귀 곁에서 어느 틈엔가 몸을 피한 미도리야가 흐물흐물 웃었다. 내가 아무리 네 눈엔 데쿠고 등신이어도 일단은 흡혈귀인데, 흐… 우물거리며 바쿠고를 돌아보다 미도리야는 순간 흠칫 했다. 바쿠고를 바라보던 숲색 눈의 빛이 다른 어떤 때보다 짙고 요요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짐승의 그것처럼.
그때 바쿠고는 단박에 눈치를 챘다. 이 새끼가 뭘 보고 있는지. 어떤 것을 느끼고 이렇게 탐욕스러운 눈길을 하고 있는 건지.

“캇쨩…”

슥 몸을 기울이는 미도리야의 눈이 나른하게 깜박거렸다. 조금 전까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단내가 일순 공기를 달게 물들였다. 약에 취한 듯 붉은 입술이 흐, 웃었다.

“아침부터 뭘 한 거야, 대체…”
“……”
“상처 났잖아.”

스르륵 다가온 손이 붕대가 감겨 있던 바쿠고의 손등 위를 덮어왔다. 이 미친 짐승 새끼가. 이를 갈며 미도리야의 손을 힘껏 떨쳐내려다, 바쿠고는 이내 주춤했다.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그랬다. 망할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씨발, 그냥 너라서 그랬는지.

아니, 이 녀석을 죽이지 않을 다른 핑계가 떠올라 그랬을 것이다. 흡혈귀는 피에 약하다. 그 피를 마시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좋을만큼.

바쿠고는 말이 없었다. 잠자코 서있는 바쿠고가 당장 자신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걸 읽은 모양인지 미도리야는 보다 더 대담해졌다.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입술이 바쿠고의 입술 곁에서 더운 숨을 몰아냈다. 참을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쾌락에 그대로 허물어져 버린 것처럼.

“한 입만…”

유난히 축축해진 숲색 눈이 젖은 속눈썹을 나른하게 깜박거렸다. 단내는 눈앞이 어지러울만큼 짙어져 있었다. 통제를 잃은 손으로 바쿠고의 손등 위를 난잡하게 더듬으며, 제 허리를 바쿠고의 몸에 느른하게 비벼대며 미도리야는 자꾸만 애원처럼 속살거렸다. 제발, 딱 한 입만.

“…빨아보게 해줘.”

어지럽게 미끄러진 미도리야의 손바닥이 잔뜩 불편해진 바쿠고의 앞섶 위를 스르륵 더듬었다. 제발.

“그게 꼭… 피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하, 존나.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었다. 비트는 입매 끝이 어쩐지 떨렸었다. 저도 모르게 울대를 느리게 밀며 마른 침을 삼킨 바쿠고가 제 얼굴에 바짝 붙어 있던 미도리야의 숲색 머리칼을 힘껏 움켜잡았다. 윽, 짧은 신음을 삼키면서도 미도리야는 그 동작에도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어깨를 예민하게 부르르 떨었다. 그때만큼은 12년간 알고 있던 소꿉친구 데쿠 새끼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을 존재 같았다. 이대로 나를 다 삼켜버릴, 이대로 내 몸의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모두 빨아 마시겠다는 가장 탐욕스럽고 요염한 괴물처럼.

절대 흡혈귀에게 흔들리지 마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존나, 좆까라고, 씨발.”

바쿠고가 움켜쥐고 있던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힘껏 제 허리 쪽으로 찍어 눌렀다. 순식간에 힘에 눌린 미도리야가 다리 힘을 풀며 반쯤 주저앉았다. 날 이렇게 취급하는 인간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우물거리며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내 손에 뒤질 주제에 엿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씨발. 바쿠고가 입매 끝을 픽 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망할 흡혈귀 새끼가, 씨발.

“빨고 싶지, 씨발아.”
“……”
“내 꺼.”

나른하게 흐려져 있던 숲색 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리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마른 입술을 혀로 느리게 훔치면서 미도리야가 제 뺨을 바쿠고의 앞섶에 천천히 문질렀다. 진짜, 엄청.

“빨고 싶어… 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
“제발, 캇쨩… 한 입만, 한 입만…”
“하, 데쿠새끼 지금까지 내숭 존나 떨었네. 이제 보니 변태 새끼잖아.”
“맞아. 지금 당장에라도 네 바지를 내리고 얼굴부터 박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거야, 나는.”
“……”
“그러니까 한 번만 빨게 해주라… 조건이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선홍색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그 말을 기다렸었다. 생각을 삼킨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뒷머리칼을 힘껏 헤집으며 제 앞섶에 파묻혀 있던 미도리야의 얼굴을 제 쪽으로 젖혀 놓았다. 사납게 일렁이던 선홍색 눈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럼 빨아, 멍청아.

“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지킬 수 있다면.”
“……”
“대답해, 씨발아.”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절할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다. 너를 발견한 12년 전부터.





(07)


와. 사냥꾼이 말했다. 매일 방과 후, 여기로.

아.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단순히 만나서 수다나 떨자는 건 분명 아니었다. 네가 내 정체를 알기 전에 종종 네게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희희덕거리던, 그런 소꿉친구 놀이 같은 것도 아니겠지.
미도리야가 이미 불편하게 부풀어 있던 앞섶의 지퍼를 끌어내리며 흐, 웃었다. 캇쨩.

“나랑 하고 싶은 거야? 그거라면 난 언제든 좋은, 윽.”
“닥치고 할 거나 해, 씨발아.”

너무 하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 손짓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감정적이었고 거칠고 난폭했다. 소꿉친구라고 믿고 있었을 때도 입은 험했었지만 제 머리를 무심히 헤집던 손길은 그래도 부드러웠었다. 지금은 바쿠고의 몸짓 그 어디에도 그때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넌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울 때마다 화를 내니까. 생각을 삼키면서 미도리야는 벌어져 있던 지퍼의 앞섶에 입술을 묻었다. 뒷머리를 옥상의 철망에 기대면서 바쿠고가 볼 안쪽을 질근 물었다.

막힌 호흡이 짙게 헐떡였다. 금세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무릎을 꿇고 기울어 있던 숲색 머리는 해가 정수리를 따갑게 내리쬐어도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붉고 습한 입술이 벌어지며 다시 다물어질 때마다 젖은 물소리가 났었다. 철망에 비스듬히 기대 선 채로 손 안에 잡힌 숲색 머리칼을 힘껏 움켜잡으면서 바쿠고가 잠시 제 앞에 웅크려 있던 그 얼굴을 흘깃 내려 보았다. 주근깨가 흩어진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찢어질 듯 부푼 입술 곁으로 다 삼키지 못한 젖은 타액들이 실을 그리며 미도리야의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변태 같은 새끼가, 씨발. 바쿠고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욕을 했다. 그래도 그 얼굴을 떼어내지는 못 했었다. 그게 사방에 진동하는 단내 탓인지, 그래도 소꿉친구라고 착각하던 새끼한테 제 물건을 물려놓고 있는 이 배덕적인 상황 탓인지, 그냥 존나 이 짓을 하고 있는 게 너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머금은 채로 츱, 미끄러진 혀끝이 단단히 긴장한 살갗 위를 스르륵 미끄러졌다. 하, 씨발. 바쿠고가 제 입술 끝을 질끈 씹었다. 이 새끼는 보통 잘하는 게 아니었다.

“참지마, 캇쨩.”

입술을 스르륵 풀어내면서 미도리야가 낮게 속삭였다. 혀처럼 발갛게 젖은 입술이 햇볕 아래 유난히도 요요하게 반짝거렸다. 츱, 입술을 붙이면서 미도리야는 덧붙였다. 입에 해도 괜찮으니까.
존나 또라이 같네, 씨발. 바쿠고가 긴장으로 굳은 입술 끝을 일부러 픽 비틀었다.

“흡혈귀는 존나 발정난 개새끼들이라더니.”
“인간보다는 욕구가 강하니까, 흐… 그러니까 괜히 참고 아끼지 말아주라. 난 네가 내 입 말고 다른 데다 쏟아버리면 좀 화가 날 것 같아, 캇쨩.”
“갈 데까지 혀나 제대로 써보고 지랄하든가. 존나 못하잖아, 씨발새끼야.”

아니, 사실은 조금 전부터 가고 싶은 걸 참느라 볼 안쪽에 피가 맺힐 지경이다. 흡혈귀의 페로몬을 허투루 보지 말라던 할아버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야가 흐릴 정도로 열이 올라서 바쿠고는 몇 번이고 버릇처럼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부아가 치밀어서 그랬다. 이 새끼 입에 이렇게까지 욕정하는 내가 씨발, 한심하고 같잖아서.

어차피 나는 너를 죽이게 될 텐데.

둥그렇게 휘어진 숲색 눈이 잠깐 바쿠고를 올려보며 고요히 웃더니 다시 얼굴이 파묻혔다. 코끝으로 헐떡이는 숨결만큼 앞뒤로 흔들리던 숲색 머리칼에도 조금씩 더 속도가 붙었다. 하, 개같은. 욕을 삼킨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허겁지겁 움켜잡고 제 허리 쪽으로 힘껏 몰아 붙였다. 헉헉 밭은 숨을 잇새로 뜨겁게 몰아쉬며 색이 밝은 머리가 하늘 쪽을 향해 젖혀졌다.

근데 나는 씨발, 뭘 하고 자빠져 있는 거지.

미친 것 같았다. 속아서 그렇게 믿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꿉친구라고 여기고 있던 녀석이었다. 한때 친구였던, 이제는 배신감과 분노로 가장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가 된 녀석의 입 안에서 단단히 부풀면서 비벼지는 제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성의 어딘가가 통째로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이 충동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개 같은, 씨발, 존나, 엿 같은. 연방 욕을 삼키며 바쿠고가 끝내 울컥 눈사이를 좁혔다.

“흐 … 우읍,!”

바쿠고의 몸이 크게 경직된 것과 동시에 미도리야가 읍, 막힌 신음을 꿀꺽 삼켰다. 이런 때의 반응은 남자라면 다 똑같다. 빌어먹을 긴장, 경직, 그리고 이완. 하, 느린 호흡을 가다듬으며 선홍색 눈이 제 앞에 웅크려 앉아 있던 숲색 머리를 돌아보았다.
목울대를 느리게 울렁거린 미도리야가 입술을 풀며 그제야 바쿠고의 바지 앞에서 멀어졌다. 반쯤 주저앉은 미도리야의 입술은 옅게 헐떡이던 신음처럼 턱이며 목까지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었다. 하. 바쿠고가 기가 막힌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 새끼.

진짜 삼키다니.

“아, 맛있었어.”

조금 전보다 긴장이 풀어진 숲색 눈이 흐, 웃었다. 부스스 웃는 붉은 입술 틈으로 하얀 송곳니가 언뜻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별미라도 맛본 듯한 얼굴로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크게 훔치다, 미도리야는 아직도 우뚝 굳어 있던 바쿠고를 스르륵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때 바쿠고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긴장이나 충격 같은 것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보단 자기혐오에 가까웠다.

흔들렸다. 솔직히 그랬다. 그래서 이렇게 됐다.
뭐든지 들어주겠다던 그 말에.

“이래도 날 죽일 수 있겠어?”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면서 미도리야는 그렇게 물었다. 절로 욕이 터졌다. 지랄한다, 씨발 새끼가.

“뒤지고 싶으면 말로 하든가.”
“뭐… 그날이 오늘은 아닐 것 같지만, 흐.”
“이 개새끼가 진짜 죽고 싶…”
“그래서, 싫었어?”
“……”
“역시 캇쨩, 거짓말은 못하는구나.”

분을 못 이기고 멱살을 잡겠다고 달려들었던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지며 홱 눈길을 피했다. 이제 좀 전의 송곳니가 사라져버린 입술로 미도리야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긴, 넌 그랬었어. 거짓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너였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남에게 속는 일에 대해선 인내가 없다. 도무지 참지를 못한다. 알아.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네가 지금 나에게 얼마나 화가 나있을지는. 바쿠고가 제 입술을 힘껏 짓이겼다. 그 잇새로 흘러나오는 말이 혼잣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미도리야는 약간 헷갈렸다.

“용서 안 해, 씨발.”

절대, 용서 안 한다고, 씨발. 꽉 악문 입술 끝이 떨면서 연거푸 욕을 씹었다. 그리고 사납게 돌아온 선홍색 눈이 숲색 눈을 그대로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이젠 다시 멱살을 잡힐 타이밍 아닐까? 생각에 미도리야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바쿠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나야.”

자리에서 일어나던 미도리야가 소리를 따라 철망 쪽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다이렉트로 물어올 거라곤 짐작 못 했는데. 생각을 삼키던 미도리야를 향해 바쿠고가 다시 한 번 입술 끝을 힘껏 악물었다.

“네 놈이 씨발, 가짜 소꿉친구 놀이를 한 게 왜 하필 나냐고, 이 씨발 새끼야.”
“글쎄, 흐…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하하…”
“……”
“그냥, 맘에 들었었어.”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다섯 살이었다.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친구도 없이 혼자 그네를 밀고 있던 색이 밝은 머리칼과 선홍색 눈을 가진 꼬마를 보았을 때 미도리야는 어쩐지 말을 걸고 싶었었다. 그땐 네 성이 바쿠고라는 사실도, 네가 이 나라에서 최고라는 귀렵수 가문의 하나뿐인 외아들이라는 사실도 몰랐었다. 그냥 말을 걸고 싶었었다. 네가 너무 쓸쓸 해보여서, 외로워 보여서,

네 모습이 꼭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처럼 익숙해서.

근데 그게 누구였는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아… 분명 내 인생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껏 몇 번을 되짚어 봤지만 미도리야는 그 점에 대해선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잊어버린 거겠지.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면 흡혈귀가 되기 전, 인간일 때의 기억이거나.
역시 그냥 잘 생겨서 맘에 든 걸지도. 미도리야는 그렇게만 결론지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근사하게 자랄 거라곤 생각을 못 했지만…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아직까지도 옅게 부어있는 제 입술 끝을 츱, 빨았다. 네 체액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환상적이었다. 아직도 혀끝이 얼얼할 만큼,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 가장 예민한 틈까지 젖어버릴 만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얘기는 됐고.”

미도리야가 아직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은 사나운 선홍색 눈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내가 이런 존재라는 걸 알게 돼서 당황스러울 거 알아, 캇쨩. 혼란스러울 것도 알고 있어. 본의 아니게 12년동안 속인 건 미안해. 하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지금 얘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 솔직하게 말해봤자 화만 더 부추길 뿐이다. 아무리 조작된 기억으로 만들어낸 가짜 소꿉친구라고 해도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성격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당연하잖아. 그래도 12년동안이나 널 계속 지켜봐왔는데.
바쿠고는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쪽을 조용히 노려보다 바쿠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역시 대화하는 것도 싫은 거지, 지금은.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자꾸 말을 걸고 싶은 것도 역시 너라서 그럴 거였다.

“우린 그럼 이제부터 친구가 아닌 거야?”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음이 옥상 문 앞에서 우뚝 멈췄다. 하, 존나. 욕을 삼킨 바쿠고가 다시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그 눈길에는 가슴이 좀 철렁했었다.

“너는 씨발, 그게… 할말은 아니지.”
“……”
“내일 와. 방과 후에. 늦으면 진짜 죽는다.”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옥상 문이 세게 닫혔다. 어떡하지. 혼자 남겨진 미도리야가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을 곤란한 듯 긁적거렸다. 방과 후라니, 아빠가 전학 수속을 신청해버렸는데…

“취소하러 갈까?”

어차피 오늘 온 건 그것 때문인데.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알게 된다면 올마이트는 또 실망하시겠지… 그래도 지금은 별 수 없었다. 죄송해요, 올마이트. 미도리야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저는 아직 이 동네를 떠날 수가 없거든요.
12년을 기다렸으니까.

“진짜… 맛있었는데.”

미도리야가 버릇처럼 츱, 입술 끝을 옅게 빨았다. 체액이 이 정돈데 네 피는 대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할까. 그 피를 마실 수만 있다면 네 앞에선 영원히 둔하고 멍청한 데쿠여도 좋을 것 같아. 생각을 삼키고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떠난 철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머리 위로 구름이 하얗게 흘러가던 어느 평화로운, 오후였다.

*

그리고 그날 저녁, 공원 인근 개천가에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노라고, 검시관은 아이자와에게 그렇게 전해왔다.




UPDATE (08)


바쿠고는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오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엎드려 고개도 들지 않는 바쿠고를 두고 반 애들은 미도리야가 없어서 기운이 없는 거 아니냐며 놀려대다가 저희를 매섭게 노려보던 선홍색 눈동자에 모두 입을 다물곤 자리로 돌아갔다. 말마따나 대각선 앞에 있던 미도리야의 자리는 오늘 하루종일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 이후에 또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딴 새끼.

늘 둘이서 함께 걸어오던 길을 지나 늘 둘이서 함께 시시덕거리던 오락실에 들러서 게임을 했다. 달려드는 좀비들을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원샷원킬로 죽여버리는 바쿠고를 보면서 우르르 몰려든 녀석들이 감탄을 해대고 야단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난 원래 사격도 존나 잘해, 등신 새끼들아. 이딴 엿 같은 가문에 태어나서 씨발, 날 때부터 배워온 게 이 짓거리라서, 존나. 맘 같아선 얼굴도 모르는 주변의 멍청이들에게 이런 소리라도 하고 싶었었다. 마지막 스테이지를 놔두고 바쿠고는 총을 기계 안에 꽂곤 오락실을 나왔다. 뭐 하나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새끼가 없으면.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가짜 소꿉친구건 뭐건 씨발.

사람을 이만큼 갖고 놀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 씨발 새끼야.

아니, 잘된 거다.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여야 할 새끼라고, 그 새끼. 외로움도 어차피 한 순간이다. 울망울망 눈을 흔들면서도 등신처럼 내가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던 녀석이 사라져서 허전한 거라고, 며칠이 지나면 다 익숙해질 거라고 바쿠고는 거듭 생각했다. 그래도 끝내 기분은 끝까지 좋아지지 않았다.

현관문을 짜증스럽게 열어젖혔을 때 바쿠고는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앉아 있던 손님을 발견했다. 아이자와 형사였다.

“아, 카츠키! 마침 시간 맞춰 잘 왔구나. 오늘은 웬 일로 이렇게 늦는 건지 연락을 해보려고 했는데…”

바쿠고가 하는 둥 마는 둥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역시 아이자와가 꾸벅 눈짓으로만 받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바쿠고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을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바쿠고는 단박에 깨달았다.
뭔데요. 바쿠고가 툭 끌어낸 가방을 한 쪽에 던지면서 소파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이자와가 사진 한 장을 내밀며 짧게 대답했다. 살인 사건.
아니.

“흡혈.”
“……”
“공식적인 검시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뭐… 빤해. 며칠 전에 공원에서 죽었던 녀석하고 똑같거든. 피는 없었고, 발견된 장소도 공원 근처야. 원래 흡혈귀들은 한 번 사냥터가 정해지면 그쪽에서 배회하는 습성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너희 할아버지한테…”
“근데요.”
“뭔가 좀 달라. 시체를 반쯤 찢어놨거든.”
“……”
“어제 그 공원에서 사냥을 한 흡혈귀처럼 테이블매너가 조신하진 않더라고, 이번 녀석은.”

그제야 바쿠고가 테이블 한 중간에 놓여있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때문에 강제로 봐야했던 온갖 고어 영화와 해부 실습 영상이 아니었다면 바쿠고는 지금쯤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만큼 사진 속 시신의 상태는 참혹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시신은 여성이었고, 얼굴이나 팔 다리가 간신히 붙어 있다고 해도 좋을만큼 전신 곳곳이 찢겨 있었다. 단순한 흡혈만을 즐긴 흔적이 아니었다. 얼마 전 공원에서 발견되었었던 시신에는 한참을 샅샅이 살펴봐야 확인할 수 있을만큼 미세하고 작은 잇자국이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놈이네.”

바쿠고의 말에 아버지와 아이자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사학적으로 봐도 같은 범인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야. 같은 연쇄살인은 살해 방식에도 유사성이 보일 때에만 성립이 되니까.”
“근데요. 그게 가능해요? 흡혈귀는 같은 사냥터를 공유 안 하다고 우리집 꼰대가 그랬는데.”

흡혈귀는 본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인간만큼의 사회성을 가지지 못한 흡혈귀는 차라리 호랑이나 표범 같은 야생의 맹수와 똑같았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혼자 살며 혼자 사냥하고 남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다. 바쿠고는 그렇게 배워왔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확인을 해봐야겠지. 아버지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 얼굴에서 바쿠고는 이미 눈치를 챘다. 왜 아빠가 하필 자신에게 이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이자와 아저씨도 왜 이토록 친절하게 이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는지.

“가서 옷을 챙겨 입거라. 무기 세 개를 전부 가져갈 순 없을 것 같으니 하나만 챙기고, 방에 올라가면 네 엄마가 사다둔 방수처리된 검은 점퍼가 있을 거야. 그걸 입으면 된다, 카츠키.”
“……”
“우리 아들도 이제 데뷔전을 할 때가 되었지.”

첫 번째 사냥이었다.






*

미도리야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옥상에서 내려오던 걸음은 가벼웠고, 교무실로 향하면서도 자꾸만 부슬부슬 웃음이 나와 큰일이었다. 오늘은 쉰다고 하더니 왜 학교엘 들렀느냐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담임도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곤 픽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었다. 이즈쿠 무슨 좋은 일 있니?

“그래, 친구들하고 헤어지지 않고 여기에 남게 되었으니 당연히 좋은 일이겠지. 일단 전입 서류는 아직 올리지 않았으니까 보류해두도록 할게. 그래도 절차는 필요하니까 아버님께 꼭 전화 한 통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렴. 네 보호자시잖니.”

열일곱 살에 흡혈을 당해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열일곱 살로 살아왔고, 그 덕에 이점은 있었지만 이럴 때면 가끔 불편했다. 열일곱은 법적으로는 미성년자다. 자신의 전입 서류 하나를 취소하는 데에도 학교와 사회는 부모님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말씀 드려볼게요. 미도리야는 담담히 웃으며 그렇게만 대답했다. 지금은 일단 전입을 보류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 해야 할 미션들은 모두 완벽하게 달성했다. 심지어 덤도 있었다. 그게 미도리야는 가장 좋았다.

정말 맛있었는데, 너는.

복도에서 언뜻 쳐다본 교실 안에서 색이 밝은 머리는 책상 위에 엎드려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잠깐 쳐다보다 미도리야는 교실로 돌아가는 대신 그대로 복도를 지나 학교를 빠져 나왔다. 그때도 자꾸만 혀끝에는 조금 전에 맛보았던 시큼하고 따뜻한 열이 달콤하게 맴돌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달았던, 뜨거웠던, 그래서 불을 닮았던…
아.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미도리야가 곤란한 듯 입술 끝을 꼭 씹었다. 하마터면 이런 데서 젖을 뻔 했어.

가슴이 불을 삼킨 것처럼 울렁거렸다.

미도리야는 그대로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곧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올마이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을 할 자신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실망할 은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도 없어서 미도리야는 천천히 오래 산책을 했다. 사람들은 아직 수업 중일 유에이의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소년을 의아한 듯 흘끔거렸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하곤 눈길을 돌려버렸다. 공원으로 갈 때까지 미도리야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날이었다.

물론 넌 아니겠지만.

하나둘씩 가로등빛이 켜진 공원 벤치에 앉아 미도리야는 문득 흐, 소리 없이 웃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색이 밝은 머리칼이 불현듯 생각난 탓이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 지는 일일이 짐작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더불어 이해할 수 있었다. 맞아, 내가 지금 너라면 나를 찢어 죽이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캇쨩, 네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어.

“백 년동안 이렇게 가지고 싶었던 인간이 없었는데…”

그 점을 모르겠다. 네 곁에 머문 건 실제론 5년이라지만, 그래도 너를 알게 된 지는 12년이나 지났는데… 처음부터 강하게 끌렸었다. 홀로 그네를 밀고 있던 그 색이 밝은 머리칼을 보았을 때 온 시선이 붙들렸다. 그러다 그 선홍색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미도리야는 가슴을 꿰뚫리는 기분을 느꼈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인력처럼, 마치 해일에라도 갇혀 버린 것처럼.
무엇이 자신을 그 소년에게 떠밀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쩌면 바쿠고 카츠키가 타고 났다는, 그 독특한 힘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땐 네가 귀렵 명문이라는 바쿠고 가문의 아이란 것도, 바쿠고 카츠키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었지만.

자신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지금은 그 점이 가장 끌렸다. 마치 곧 불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길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네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분명히 타버리겠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릴 거야. 그래도 그렇게 죽고 싶었다. 어차피 나는 이제 누가 죽여주지 않으면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은 저주 받은 존재인데.
그래도 그게 지금은 아닐 거야, 캇쨩.

“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널 어떻게 해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미도리야가 고민에 잠긴 입술을 츱, 씹으며 뭉갰다. 너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난 내 몸이라도 기꺼이 열 수 있어. 나에 대한 너의 호의도 전부 이용할 수 있어. 지금은 그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어떻게 해야 네가 내게 빠져 줄지,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가지고 싶어 안달을 낼지.
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 지.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냄새’를 느꼈다. 차갑고 미지근한, 동족의 냄새.

“……”

미도리야가 냄새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열 걸음 앞에서 어떤 남자가 어린 소녀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미도리야와 같은 유에이 교복을 입고 있던 갈색 머리칼의 소녀는 겁에 질려 있었고, 이런 낮에도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남자는 꼭 눈치를 보듯이 주변을 히스테릭하게 훑고 있었다. 더럽다.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유난히 혈색이 좋던, 갈색 단발 머리칼의 소녀가 미도리야를 향해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밤이 천천히 깊어가던, 저녁 8시였다.







*

방수 점퍼는 왜. 지퍼를 죽 끌어 올리면서 바쿠고는 아버지를 향해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세탁하기 쉬우니까.”
“……”
“아, 그리고 의례날 아빠가 정신이 없어서 이 얘길 못 했는데 카츠키. 총은 일본에선 위법이야. 알고 있지?”

바쿠고가 허리춤에 꽂았던 38구경 리볼버를 냅다 집어 던졌다. 아오, 쓰지도 못할 건 대체 왜 넣어놨는데! 씩씩 거리다 바쿠고는 결국 단검 세 자루를 골랐다. 욕심을 부려서 세 개를 다 얻어내긴 했지만 암만 생각해도 채찍은 모양이 영 아니었다. 인디아나 존스도 아니고, 씨발.

공원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입구까지 함께 왔던 아이자와 형사는 그쯤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친구 병문안을 가야해서. 그렇게 설명하고 아이자와는 바쿠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름대로는 격려였다.
열심히 해라, 천재 귀렵 소년.

“뭐, 데뷔전에 죽은 귀렵수도 많다고는 하지만.”

이 아저씨는 씨발 이게 격려인지, 저주인지. 씨근거리면서 바쿠고는 앞서 걷는 아버지를 따라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도 공원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벌써 시체가 두 구나 발견되었으니 무리도 아닐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실없이 웃었다. 과연, 이런 장소에 산책을 오고 싶은 간 큰 인간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갈림길이 나타났다. 앞서 걷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갈림길의 표지는 왼쪽의 개천과 오른쪽의 숲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에서부터는 흩어지자꾸나. 아빠는 개천 쪽으로 내려 가볼까 해.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니 아무래도 돌아올 확률도 높겠지.”

흡혈귀는 사냥을 했던 곳에는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사냥터를 지키는 맹수들의 습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위험한 일은 베테랑이 해야지. 아버지가 허허롭게 웃었다. 누가 봐도 벌써 귀렵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귀렵수의 얼굴은 아니었다. 바쿠고는 아버지가 흡혈귀를 제압해 심장을 꺼내는 모습이 아직도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넌 그냥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오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바쿠고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고.

숲길은 개천길보다도 적막하고 고요했다.

바쿠고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아무도 없는 적요한 길 위를 터덜터덜 걸었다.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고양이 몇 마리가 보이긴 했지만 정말로 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생각해오던 것과는 너무 달라서 바쿠고는 자꾸만 짜증이 치밀었다. 언제는 나더러 가장 강한 귀렵수가 될 거라고 그러더니 존나,
이딴 시시한 데뷔전이라니.

“산책만 존나 하다 가겠네, 씨발.”

괜히 단검을 세 자루나 챙겨서 왔다. 이것도 은근히 존나 무거운데. 어차피 오늘 분위기를 봐서는 쓸 일도 없을 게 빤했다. 적당히 길 따라 한 바퀴 돌고 꼰대 보이면 돌아가야지. 바쿠고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이 길을 따라 20여분 남짓 더 걸어가면 아버지가 걸어간 개천이 나온다.
가서 잠이나 처자야지. 바쿠고가 우득 이를 갈았다. 망할, 존나 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나뭇가지라도 밟은 것처럼.

“씨발, 이게 무슨…”

소리를 따라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달려온 그림자가 바쿠고에게 달려들었다. 간신히 팔로 막고 버티면서 바쿠고는 제 앞에서 송곳니를 하얗게 드러내고 있던 남자를 똑똑히 뚫어 보았다. 전혀 보지 못했다. 기척도 느끼지 못 했었다. 씨발, 대체 어디에서… 생각을 삼킬 틈도 없이 남자가, 흡혈귀가 이미 흠뻑 붉게 젖어 있던 송곳니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바쿠고의 목덜미를 향해 입을 벌렸다. 바쿠고가 허리춤을 더듬어 단도 한 자루를 꺼내 흡혈귀의 목덜미에 힘껏 꽂았다. 반은 본능이었다. 살기 위한 본능, 이 녀석을 제압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생존하기 위한 본능.

“……!”

목을 뚫린 흡혈귀가 온몸을 비틀며 괴롭게 비명을 질렀다. 비틀거리는 흡혈귀의 복부를 힘껏 걷어차면서 바쿠고는 가까스로 자신을 제압하던 무지막지한 힘에서 벗어났다. 다시 허리춤을 더듬던 것과 동시에 흡혈귀가 목에 단검을 꽂은 채로 다시 달려들었다. 바쿠고의 손을 떠난 두 번째 단도가 정확하게 남자의 이마를 푹, 꿰뚫었다. 이제 감이 좀 잡혔다.

“개 같은 새끼가, 씨발,!”

흡혈귀가 땅을 박차며 크게 뛰었다. 동시에 자세를 낮춘 바쿠고의 오른손이 정확하게 흡혈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걸렸네. 그리고 지금껏 평생을 배워온 그대로 바쿠고의 오른손가락이 남자의 가슴을 힘껏 꿰뚫었다.

처음으로 만져본 흡혈귀의 심장은 차갑고 물컹물컹했다. 시체의 심장처럼.

만진 순간 온몸이 섬찟했다. 오스스 소름이 끼치는 통에 하마터면 놓칠 뻔한 심장을 바쿠고는 그대로 힘껏 힘을 주며 으스러뜨렸다. 흡혈귀가 내지른 단발마 같은 비명이 날카롭게 밤 어둠을 찢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재로 변한 흡혈귀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그대로 부스스 무너졌다. 그제야 바쿠고가 헉헉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손 안에는 차가웠던 심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 존나. 바쿠고가 떨리던 입술 끝을 일부러 비틀었다. 죽였다니.

흡혈귀를 내가… 죽일 수 있다니.

이러라고 태어난 운명이니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것을 알면서도 바쿠고는 이 모든 게 어쩐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도록 차가웠던 심장, 시신처럼 소름이 끼쳤던 그 한기… 심장을 으스러뜨릴 때는 마치 벌레를 맨손으로 짓누르는 것 같은 불쾌감이 들었었다.
흡혈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새카맣게 탄 재 한 줌만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더라… 바쿠고가 잠깐 눈 사이를 좁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이 재를 챙겨 외할아버지의 절에 보내 성불을 시켰었다. 아무리 사람의 피를 빠는 귀신이라 하여도 편히 잠들 자격은 있는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차피 난 방법을 모르니까 꼰대를 불러야지. 바쿠고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바쿠고는 얼른 아버지에게 이 첫 번째 데뷔전의 흔적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야 언제나 마음이 약했으니까 또 흐뭇하게 웃으면서 수고했다고 칭찬이나 해주겠지. 안 봐도 빤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칭찬이 듣고 싶었다. 그래, 내가 씨발, 이 짓을 하겠다고 평생 그 거지 같은 수련을 견뎠는데.

“아, 전화.”

연락해야지. 바쿠고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그제야 제 가슴팍을 뒤늦게 내려다보았다. 블랙컬러의 방수점퍼가 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좀 전 일이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생각을 삼키면서 핸드폰을 꺼내들다, 바쿠고는 문득 눈을 들었다. 다섯 걸음 앞에 누가 있었다. 소녀였다.
아마 소녀는 바쿠고가 조금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허나 소녀가 꺼낸 말은 그보다 더 다급하고 긴박한 것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동그란 얼굴에 혈색이 좋은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바쿠고에게도 눈에 익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 이런 애가 있었나. 그러나 더 생각해볼 틈도, 통성명을 할 사이도 없이 소녀가 다급하게 피에 젖어 있던 바쿠고의 검은 점퍼 자락을 끌어 당겼다.
사람이 죽어가요. 소녀가 울먹거렸다. 저기에, 저 애가…

“아까 그 사람이 저에게 달려드는 걸 저 애가 구해줬는데… 그래서 저 애가 저를 밀쳐내고 대신 그 사람을 막아섰는데, 근데… 그때 그 사람이, 목을… 목을… 그래서 피가 너무, 너무 많이…”

소녀는 패닉 상태였다. 두서없는 말에 딴죽을 거는 대신 바쿠고는 소녀가 눈짓으로 가리키던 방향을 쳐다보았다.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나무의 깊고 어두운 그늘 밑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목이라도 물어뜯긴 모양인지 흠뻑 피에 젖은 남자의 얼굴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는 교복이 유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곱슬거리던 어두운 머리칼이 어쩐지 낯이 익다고 느꼈을 때 바쿠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 그보다는 숨이 멎을 것 같았었다.
하, 존나. 바쿠고가 제 입술을 힘껏 씹었다. 이런 개같은.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계속)




그냥 한 편을 더 쓰고 백업을 일단 해두자 하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이 썰을 달려봅니다u///u 덕분에 오랜만에 1일 2연성이 된 ㅎㅎㅎ /// 무튼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해요. 피드백 남겨주시는 분들도 늘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피드백은 역시 글쓴이/비번만 입력해주시면 등록되어요u////u♥

?
  • 루카님진짜진짜사랑합니다(?!)/쿠모 2017.08.13 21:29 SECRET

    "비밀글입니다."

  • 이즈쿠 예쁘고 귀엽고 멋지고 다해 2017.08.13 22:47
    루카님 너무 재밌어요 뱀파이어 시리즈 (큰절) 감ㅁ사합니다ㅠㅠ존잘님
  • OOP 2017.08.14 01:11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최고 2017.08.14 02:26
    계속 아끼다 이제서야 몰아봅니다 ㅠㅠㅠㅠ 이즈쿠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이즈쿠 어째요 ㅠㅠㅠㅠㅠㅠ 어쩌긴 어째 캇쨩 피 빨고 회복해야지... ㅎ 오늫도 잘 읽었어요 루카 님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읍니다 ㅠㅠㅠㅠㅠㅠ
  • 루 카 IS LOVE 2017.08.17 10:08
    으아 우리데쿠 ㅠㅠㅠㅠㅠㅠㅠㅠ 루카님진짜 연성 찰지고 너무좋습니다 ㅠㅠㅠㅠㅠㅠ 너무재밌어요 ㅠㅠㅠㅠㅠ
  • 2017.09.30 00:24 SECRET

    "비밀글입니다."

  • 앗 이거 2018.01.08 18:56
    다음편이 시급 하답니도 ㅏ 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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