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캇데쿠 옴니부스 단편 3부작, 마지막 이야기
* 이 편은 약간 깁니다






착着
@ruka_tea




1


시간이 멈췄다. 착각처럼.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차치하고, 일단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때 갓 스물이 된 두 청년은 도시 외곽에 있는 폐쇄된 변전소를 수색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촉망받는 에이전트로 들어가 사이드킥이 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맡겨진 임무였다.

「며칠 전에 그 안에서 고등학생 남자애들 둘이 사라졌거든.」

합동 수사팀을 지휘하던 경찰본부 팀장은 그렇게 전했다.

「녀석들이 왜 그런 흉물스러운 장소에 찾아간 건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또 모르지. 그 동네 사람들은 본래부터 그 변전소가 이상한 곳이었다고 하더라고. 왜, 버려진 변전소나 학교 같은 데는 흔히 그런 괴담들이 따라다니지 않는가. 귀신이 나온다더라, 과학에 미친 빌런이 숨어들어서 괴이한 실험을 하고 있다더라… 그런 곳은 모험심을 들끓게 하니까.」

사춘기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왕성한 나이다. 어린 혈기로 그 괴이한 장소를 한 번 탐험해보겠다면서 들어간 게 분명하다고 팀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지. 감쪽같이. 귀신한테 홀린 것처럼.」

팀장이 눈을 부릅떴다. 꼭 심야 특집 공포 영화라도 소개하는 어느 유튜버의 얼굴과도 같았다.

「아니면 뭐, 다른 공간으로 가버린 걸 수도 있고. 거기가 원래 전자코일을 이용한 공간 자기장을 만들던 실험실이 있던 곳이거든. 그 뭐냐, 빌런 연합 쪽에 이런 공간 이동 개성을 쓰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이 실험실 출신이랬나, 뭐랬나.」

청년들은 경찰본부를 빠져 나와 현장으로 향하면서도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의견 한 마디 교환하지 않았다. 의견은 커녕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로 두 청년은 변전소로 향하던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아 서로 고개를 돌리곤 다른 방향의 창문 너머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이름은 바쿠고 카츠키,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두 사람은 꼭 1년 전에 같은 유에이 고등학교의 히어로과를 졸업한 동기동창이었고, 더불어 날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라온 소꿉친구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끔 외려 너무 오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색한, 모르는 것보다도 더 불편한 사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잘 부탁해. 미도리야가 바쿠고에게 건넸던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 말조차도 무시해버린 바쿠고가 먼저 변전소 안으로 앞장서 걸어 들어갔다. 변전소는 언제 무너져도 좋을만큼 낡았고 위태로웠다. 위층으로 통하는 길은 막혀 있었고, 앞장서서 걷던 바쿠고는 자연스럽게 지하로 내려가는 낡은 계단으로 향했다. 미도리야가 그 뒤를 말없이 따라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낡고 오랜 철제 계단은 두 젊은 영웅이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둥그런 원통을 따라 돌 듯 빙글빙글 꼬여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삐걱거리는 위태로운 쇳소리가 적요한 침묵을 밀어냈다.
오래지 않아 변전소의 가장 맨 밑바닥에 닿았다. 이곳에 변전소의 실험실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소년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시간 이동이라도 해버린 게 아닐까?”

머리 위에 걸린 거미줄을 떼어내면서 미도리야는 지나가는 말처럼 우물거렸다. 변전소로 들어와 처음으로 제대로 꺼내본 말이었다. 잠깐 바쿠고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선홍색눈은 미도리야기 왜 저런 질문을 했는지 의도를 파악하느라 신경질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바쿠고는 이번엔 딱히 무시하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개소리지. 그게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2년만에 다시, 제대로 던진 첫 번째 말이었다.

“별별 개성이 다 있는 세계라지만 이론적으로 시간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책벌레 너드새끼가 그딴 것도 모르냐.”
“알아. 그래도 그냥 그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였어. 사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 사람들의 개성이 모두 과학적인 건 아니잖아. 설명되지 않는 개성도 아직 많아.”
“그래도 최소한의 논리는 있지. 시간이동만 빼고, 등신아.”
“몸의 체액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 진화하지 않았던 50년 전 과학으론 불가능한 거였어, 캇쨩.”
“……”
“…오랜만에 불러보니까 좀 어색하네.”

숲색 눈이 흐, 웃었다. 평생을 이렇게 불렀는데 고작 2년을 안 불러봤다고 이렇게 어색해지다니. 다시 불편해진 공기에 미도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 구덩이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지하의 한 중간에 딱 사람 넷이 누울 수 있을만한 크기의 구덩이가 둥그렇고 깊게 뚫려 있었다. 미도리야가 실눈을 뜨고 구덩이의 깊은 어둠을 내려다보다 돌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아, 저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가락질을 따라 눈길을 떨어뜨렸다. 10여미터는 됨직한 바닥에 교복으로 보이는 회색 블레이저를 입은 소년 둘이 서로 엉켜 있었다. 사라졌다는 소년들이 틀림없었다.
바닥이 있다면 지금 서있는 이 지하 아래에 한 층이 더 있단 소리고, 그렇다면 분명 내려갈 곳도 있을 거야.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흩어져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벽을 짚고 바닥을 두드려보던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불렀다. 그 말도 아마 2년만에 처음이었을 것이다.

“야, 데쿠. 이거 같은데.”

벽에 붙은 레버는 문의 손잡이 같기도 했고, 두꺼비집의 스위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곁에는 설명이 인쇄된 금속 패널이 붙어 있었지만 그을리고 녹이 슬어버린 탓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저걸 당기면 혹시 숨겨진 문이라도 열리는 게 아닐까? 아니면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라도 열리든가… 그래, 꼭 시간 이동 게이트 같은. 미도리야가 잠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바쿠고는 이미 그 스위치를 당기고 있었다. 그 레버 앞에 서있던 것이 바쿠고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미도리야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바쿠고가 스위치를 완전히 내렸을 때에야 비로소 반 박자가 늦어버린 걱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거 혹시… 위험한 거 아닐까?”

미도리야가 온전히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었을 때 내뱉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부터의 기억은 섬광처럼 빠르고 어둠처럼 투미하다. 어디선가 우르르 땅이 꺼지는 소리를 들었다. 뒤늦게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돌아보았을 때 색이 밝은 머리는 이미 와르르 무너지던 바닥과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지면은 순식간에 지구의 중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름 한 번 부를 틈도 없이 두 젊은 영웅의 몸은 바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아, 씨발, 존나. 바쿠고가 악다구니처럼 욕지기를 했다. 삽시간에 주변이 요란해졌다. 무너지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떨어지고 부딪쳐 깨지는 소리, 추락하는 소리, 뭔가가 뚝 부러지던 소리, 그리고…

갑자기 모든 소리가 정지했다.

미도리야가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꽉 눌러 감았던 숲색 눈을 천천히 떴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그보다 뭔가 이상했다. 떨어지고 깨지던 돌들이, 피어오르던 흙먼지가 모두 허공에 멈춰 있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자라온 평생에서 가장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아.”
“……”
“아니… 멈췄어. 틀림없이.”

다섯 걸음 앞에서 부러진 오른발목을 움켜잡고 있던 바쿠고가 울컥 일그러진 얼굴로 미도리야를 쳐다보았다. 뭐…? 대답 대신 미도리야는 제 쪽을 향해 파도처럼 기울어져 있던 거대한 돌판을 올려보았다. 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그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딱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채 멈춰 있었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캇쨩.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우린 이제 죽게 될 것 같아. 시간이 다시 흐르면…”

한참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후 2시, 오래고 낡은 변전소에서 예고 없이 시간이 멈췄다.






2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은 무료하고 공허하다.

“야, 데쿠. 노래라도 불러.”
“…아는 노래가 없는데.”
“그럼 수다라도 떨든가, 등신아. 네 놈 특기잖아.”

허공에는 여전히 완전히 추락하지 못한 돌들이 별처럼 떠 있었고, 콘크리트 파도는 언제라도 미도리야의 숨통을 짓눌러 버릴 기세로 머리 위에 멈춰 있었다. 희부옇게 피어오른 채로 멈춰버린 흙먼지 속에는 아까 위에서 내려보았던 두 소년의 모습이 언뜻 보였지만 바쿠고도 미도리야도 그 쪽으로 선뜻 다가서진 못 했다. 그보단 침묵을 더 견디기 힘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구덩이 안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공기의 흐름까지 모두 멈춰버린 것 같았다. 시멘트벽에 대충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바쿠고는 다리가 부러진 것치고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바쿠고는 부러진 다리에서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조차도 시간이 멈춘 탓이 틀림없었다.

“기분 존나 이상하네.”
“자극이 뉴런을 타고 뇌에 닿아야 아픔이라고 느끼는 거니까… 그런 것도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아. 아까부터 심장이 안 뛰거든.”
“송장도 아니고, 씨발.”
“어쩌면 이미 죽은 걸지도 모르지만, 흐…”

바쿠고가 확 인상을 썼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마, 등신 새끼야. 미도리야가 부슬부슬 사과를 우물거렸다. 미안… 그 목소리조차도 아까와 달리 밋밋하고 인공적이었다. 마치 스테레오가 지원되지 않는 모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미없고 따분한 음성처럼.

“무슨 얘길 하면 좋을까… 아. 다음 달에 정식으로 데뷔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 캇쨩.”
“축하는 무슨, 때 되면 어련히 다 하는 데뷔가 뭐 별 거라고.”
“그래도 우리 중에선 캇쨩이 제일 빠르잖아. 우리…라고 부르니까 어색하지만, 흐.”
“……”
“되게 오랜만이다, 우리.”

어. 짧게 말을 삼킨 바쿠고가 색이 밝은 머리를 시멘트벽에 툭 기대 놓았다. 그래도 누군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분위기가 좀 전처럼 엿 같지는 않았다.

“너는.”
“나?”
“그래, 등신아. 너는… 이사 갔다던데.”
“……”
“올마이트가.”
“올마이트한테 아직 이사 갔단 얘기 안 했는데…”
“……”
“좋아. 역에서도 가깝고, 마트도 옆에 있고, 가차샵도 있고… 근처에서 우라라카군이 자취하거든…! 그래서 가끔 만나. 이젠 만나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나이들이잖아, 흐… 잘 마시진 못하지만.”
“……”
“캇쨩은… 술은?”
“…너보단 잘 마시겠지, 등신아.”
“그러게. 캇쨩은 늘 나보다 앞서갔으니까…”
“……”
“우린 아직 술도 한 번 못 마셔봤구나.”

숲색 눈이 어둠 속에서 흐, 웃었다. 등신 새끼. 바쿠고가 입매를 픽 밀었다. 그딴 건 그냥 마시자고 해, 멍청아.
그러게.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정말 그러게.

“그거 어렵지 않은 건데, 되게 쉬운 건데… 우린 왜 이렇게 불편해져 버렸을까? 우린 왜 인사 한 번 하기도 어려울만큼 멀어졌을까…”
“……”
“그래도 제일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
“우린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그 말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3

착각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

처음 놀이터에서 말을 먼저 걸어준 것도 그 녀석이었다. 바쿠고는 그때 네 살이었다. 맞벌이인 아빠와 엄마는 하나뿐인 외아들에게 사랑보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먼저 알려주었고, 바쿠고는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일찍 터득해버린 웃자란 꼬마였다.
외로움을 견디려면, 외롭지 않으면 된다. 외롭지 않으려면, 외로움을 모르면 된다. 친구 같은 거 어차피 필요 없어. 동네엔 올마이트가 얼마나 멋지고 끝내주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가득했다. 그런 놈들하고 놀 바엔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나았다.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귀찮은 놈들 뿐이다. 그런 놈들을 무시하면 된다. 자기가 먼저 무시했다고 생각해버리면 외롭지 않았다. 적어도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향적이었던 꼬마는 외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일찍부터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멋대로 말을 걸어준 건 그 녀석 뿐이었다.

「어, 올마이트 열쇠고리다!」

덤불 같은 숲색 머리칼에 색이 깊던 숲색 눈은 그때도 쏟아질 것처럼 커다랬었다. 바쿠고는 귀찮아서, 어쩌면 이미 그렇게 남을 무시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녀석의 말에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때도 주눅 드는 법을 몰랐다. 혼자 발을 구르며 그네를 삐걱삐걱 흔들고 있는 바쿠고를 요리조리 둘러보던 숲색 눈은 바쿠고의 주머니에 걸려 있던 올마이트 열쇠고리를 향해 있었다.
민망해진 바쿠고가 괜히 열쇠고리를 주머니 안쪽으로 주섬주섬 밀어 넣었다. 그래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와, 진짜 신기하다. 이 동네에서 올마이트를 좋아하는 건 나뿐인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은 모두 올마이트가 재미없는 영웅이래. 불꽃이나 폭발 같은 화려한 기술도 쓸 줄 모른다고…」
「…어떤 멍청이가 그래.」
「어! 말했다!」

아무리 조숙해도 진짜 어른은 아니어서, 바쿠고는 자신이 좋아하던 영웅에 대한 험담을 참지 못했다. 녀석은 그것보다는 처음으로 바쿠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다. 이름이 뭐야? 녀석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열면서 물었다. 나는 미도리야 이즈쿠인데! 그리고 흠뻑 웃었다. 꼭 수많은 별들과 은하수를 품은 것처럼 일렁이던 녀석의 얼굴이 꼭 밤하늘 같아서,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그 눈을 오래도록 뚫어 보았다.
바쿠고 카츠키.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린 소리에 녀석이 흐, 웃었다.

「그럼 캇쨩이라고 불러도 돼?」

그 말이 좋았다. 아빠랑 엄마도 나를 카츠키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내 이름을 멋대로 줄여 불러주지 않았는데. 녀석이 부르던 캇쨩이란 어감은 어쩐지 녀석의 생김새를 닮아 있었다. 둥글고 부드럽고 서툰데, 이상하게 자꾸 듣고 싶은. 자꾸만 귓가에 감기던, 자꾸만 생각나던 그 울림처럼,

너는 내 마음에 그렇게 착륙했다. 예고 없이.

「캇쨩이 내 첫 번째 친구야.」

그때 난 너의 모든 처음이 나일 거라고 착각했었다. 앞으로도 나일 거라고, 영원히 나뿐일 거라고,

너는 나를 절대 미워하지 못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4

누구나 착각을 한대. 공중에 멈춰있던 돌을 올려다보며 미도리야는 말했다. 저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혹은 저 사람이 날 미워한다고.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거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공감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대. 우리 뇌가 그렇게 진화했다는 거야. 기린이 더 높은 나무의 잎을 먹기 위해 목이 길어지고, 펭귄이 헤엄을 치기 위해 날개를 포기한 것처럼…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잖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대.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대. 그래서 혼자가 되면 우린 외로움을 느끼는 거야. 그리고 그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해서 남에게 공감하려고 애쓰는 거지.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
“그러다보면 가끔 착각을 하는 거야. 저 사람은 분명히 날 좋아해. 아님, 저 사람은 날 싫어해, 틀림없어. 분명히 날 싫어하는 거야, 날 미워하는 거야…”

아무 말이라도 떠들어 보라고 했던 바쿠고의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을만큼 미도리야는 성실한 성격이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랬었다. 가벼운 안부, 일상을 지나 이야기는 수많은 화제들을 뜬구름처럼 떠돌아 다녔다. 시간은 너무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멈춰있는 주제에 쓸데없이 길고 무료했다.

“그래서 나도 착각을 했어.”

숲색 눈이 흐리게 웃었다.

“캇쨩이 날 좋아한다고, 날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날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고.”
“……”
“날 상처주지는 않을 거라고.”

바쿠고가 대답 없이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박동을 멈췄을 심장이 그때는 아팠었다. 불에라도 덴 것처럼.






5

착각한 적이 없었었다, 그 애에 대해서는.

처음 놀이터에서 말을 걸기 전부터 미도리야는 그 애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한 번도 친구다운 친구를 가져보지 못했던, 그래서 외로웠던 미도리야에게 바쿠고 카츠키는 가장 이상적인 친구였다. 색이 밝은 머리칼은 햇볓처럼 반짝거렸고, 하얀 피부에 선홍색 눈은 동화에서라도 튀어나온 왕자님마냥 예쁘고 멋졌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가던 바쿠고가 주머니에 항상 올마이트 열쇠고리를 걸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도리야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불을 덮어쓰고 첫인사를 연습했다. 인사를 받아주었을 땐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었다.

캇쨩.
너는 그 이름으로 내 마음에 착륙했다.

올마이트는 동경이 닿기엔 너무 멀었다. 그 이상적인 동경을 바쿠고가 채워주었다. 멋졌고, 좋았고, 알고 싶었다. 개성조차 그 자신처럼 화려하고 강한 폭발이었다. 아직 미약한 불길을 손바닥 안에서 펑펑 쏘아 올릴 때마다 미도리야는 작은 주먹을 흔들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나도 캇쨩처럼 근사한 개성을 가지고 싶어! 캇쨩은 정말 올마이트 같아! 그 말에 녀석은 늘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찬사들을 언제나 좋아했다. 네가 최고라는 말, 네가 1등이라는 말, 네가 가장 강하다는 말, 네가 유일하다는 말. 다른 친구들보다 미도리야의 칭찬에 유난히 웃음이 많았던 녀석을 미도리야는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모르는 게 없어서, 미도리야는 조금씩 멍이 들었다. 너에 대해선 모두 다 알고 있어서, 너의 마음을 난 전부 다 알고 있어서.

외로운 사람일수록 더 많은 칭찬에 의존하게 된다. 유치원에 가면서, 더 넓은 집단에 속해 더 많은 녀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바쿠고는 조금씩 미도리야와 멀어졌다. 둘뿐이던 무리는 어느 틈엔가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다. 그 무리에서 바쿠고는 항상 앞장서서 걸었고, 미도리야는 늘 맨 뒤에 서서 부지런히 그 뒤를 좇아갔다. 다른 녀석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바쿠고에게 가끔 서운하기도 했지만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캇쨩은 대단한 사람이니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게 당연해. 늘 사람들의 응원 속에 둘러 싸여 활약하는 올마이트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정도 견딜만 했다. 그래도 눈물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대놓고 서운해 할 수 없어서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앞에선 유난히 눈물이 많아졌다. 괴롭힐 때마다, 어리고 서툰 맘에 심한 소리를 할 때마다 미도리야는 눈물이 났다. 그 말을 한 게 너라서, 나는 항상 아팠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냐. 눈물을 참는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냐.

바쿠고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착각한 적이 없었다. 모두 알고 있었다. 네게 친구가 나뿐이었던 때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때에도, 네가 날 좋아해주었던 때에도,
네가 내 노트를 태웠을 때에도, 네가 날 못 마땅해 할 때에도 나는 너에 대해 단 한 번도 착각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너를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니야. 그래서 난 네가 밉지도, 싫지도 않았었다. 착각을 한 적도 헤맨 적도 잃은 적도 없어. 너를 동경하는 마음, 너를 좋아하는 마음.

「좋아한다니, 미친… 돌았냐?」
「……」
「기분 나쁘게, 씨발.」

그냥 나 혼자 아팠었다.







6





시간을 되돌린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미도리야가 물었다. 벽에 기대 있던 바쿠고가 흘깃 눈을 열다, 귀찮은 듯 눈길을 돌리며 툭 대답했다. 2년 전, 멍청아.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어떤 걸?”
“……”
“캇쨩.”

바쿠고는 그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7

착한 사랑은 왜 시간이 흘러가도 불행한 걸까.

미도리야는 가끔 신이 미웠다. 하늘이, 운명이, 과거가, 추억이 밉고 싫었다. 너를 만난 과거가 미웠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네 살 때로 돌아가서 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놀이터에 숨어있던 나를 어떻게든 구슬려 집으로 다시 돌려보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지 않았다. 밉지도 않았었다. 너는 내게 늘 그랬었다.

나와, 멍청아. 저녁 7시에.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미도리야는 일찍부터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방에 처박혀 베개가 흠뻑 젖도록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 미도리야는 바쿠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고, 차였다. 현실은 순정만화보다도 아프고 냉혹한 것이어서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되돌려준 무심한 말들에 몇 번이나 가슴을 베이고 피를 흘렸다. 노트를 불태우던 때보다, 너 같은 건 안 된다던 소리를 들을 때보다도 괴롭고 힘들었었다.

그래도 인사도 없이 나를 피하던 네가 1주일만에 보내온 메시지였다.

1시간을 망설이다 젖은 얼굴에 세수만 하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 엄마에게는 학교에 책을 두고 왔다고 핑계를 댔다. 우리집을 나와서 너를 처음 만났던 놀이터를 지나, 너의 집 앞을 지나, 너와 다닌 소학교 담장을 돌아, 너와 자주 채집을 하러 떠났던 숲의 좁은 길을 가로 질러 나는 걸었다. 약속 장소는 어둠 속에 버려진 유령처럼 오도카니 서있었다. 낡고 무거운 쇠문을 밀고 들어가 나는 삐걱거리는 철 계단을 빙글빙글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점점 속도가 빨라졌고, 달리듯 내려가다 마지막 계단은 건너뛰었다.
바닥으로 툭, 착륙했을 때 지하실 한 가운데에 서있던 색이 밝은 머리를 보았다. 그때도 그 지하실은 유령처럼 고요하고 적막했었다.

「일주일을 존나 고민해봤는데,」

그 언젠가 자신을 따라오라며 불러냈던 기숙사에서의 그 밤처럼 너는 담담히 말했다.

「야, 데쿠.」
「……」
「아니… 이즈쿠.」
「……」
「멍청아, 나는 널 한 번도…」

어디선가 쿵, 소리가 들렸던 건 바로 그때였다. 돌이 무너지는 것처럼, 바닥이 무너지는 것처럼, 이윽고 이 욕심 많은 지구가 자신의 중력 속으로 그 지면을 산산이 빨아들이던 소리처럼,

발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8

“만약에 말야, 캇쨩.”

시멘트 벽 뒤에 엉켜 있던 두 소년을 바라보던 숲색 눈이 천천히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시간을 잃은 말들처럼, 길을 잃어버린 소년처럼.

“우리도 저렇게 사라질 수 있었을까? 저 아이들처럼, 이 무너진 변전소 안에 갇혀서…”
“또 무슨 헛소리야, 씨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흐.”

부슬부슬 웃음을 삼킨 미도리야가 다시 흙먼지 속에 누워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소년들을 쳐다보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년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시간이 멈춰 있으니 살았다고 해도 확인할 길은 어차피 없을 것이다. 이 공간 안에선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안겨 있던 소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둘 중 키가 좀 더 컸던 소년이 그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도 품에 파묻힌 소년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이렇게 가정해보면 어때? 미도리야가 물었다. 그 목소리 끝이 어쩐지 목이라도 맨 것처럼 조금 떨렸었다. 뭐라도 떠들라고 한 건 너였으니까.

“들어봐, 캇쨩. 이렇게 생각해볼게. 너랑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 약간 불편하기는 해도 지금처럼 서로 남인 것마냥 피하진 않았을 때… 그때 우린 여기에 왔었던 거야. 넌 내게 할말이 있어서 나를 불렀고, 난 네게 들을 말이 있어서…”
“……”
“난 너를 찾아 지하로 내려왔고, 넌 지하에서 날 기다렸고… 그러다 뭐 때문인지 바닥이 무너졌고, 우린 함께 이 바닥과 함께 떨어지고… 근데 눈을 떠보니까 난 다친 데가 하나도 없는 거야. 넌 의식이 없는데, 떨어지면서 다리라도 다쳤는지 온통 괴로운 얼굴을 하고 눈도 뜨질 못하는데… 두 팔로는 나를 이렇게 꽉, 안고서. 저 소년처럼 저렇게 나를 힘껏 끌어안고서…”
“……”
“그래서 난 그래. 캇쨩, 괜찮아? 괜찮으면 대답해줘. 제발 괜찮다고 말해줘, 잠들지마. 제발, 정신차려. 제발, 제발…”
“……”
“개자식아, 이런 게 어딨어. 말해준다고 했는데, 할말이 있다고 그랬는데. 나는 너 때문에 울기만 했는데, 너한테 아직 미안하단 사과도 못 들었는데…”
“……”
“그러다가 난 네 가슴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는 거야. 아직 네 심장 소리가 쿵쿵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종교가 없는데, 난.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밤하늘별처럼 일렁거리던 숲색 눈을 따라 눈물 한 줄기가 툭, 떨어졌다. 그래도 미도리야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조차 이 공간에선 희미했다. 모두 먼 꿈같았다.

그래, 다 꿈인 것처럼.

“캇쨩, 정말 다 꿈인 거 아닐까? 어쩌면 우린 아직도 갇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희미하게 숨만 붙이고서, 언젠가 누가 구해주길 기다리면서,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상상하는 거지. 아,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정말 멋진 히어로가 될 수 있는데. 2년만 지나면 우린 프로가 될 수 있는데, 이미 자격도 있는데.”
“……”
“그럼 우리처럼 이렇게 갇힌 사람들을 모두 다 구해줄 텐데,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게 해줄 텐데…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을 못한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을 텐데. 그 마음을 다시 고백할 시간을 줄 수 있을 텐데.”
“……”
“그럼 캇쨩, 나는…”
“……”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입 다물어, 등신아.”

바쿠고가 꽉 악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미도리야는 그때 늘 저보다 강했던 그 선홍색 눈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쩐지 지금보다도 어려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이상하게도 그랬었다.

“안 죽어.”

우득 이를 악문 바쿠고가 힘껏 미도리야를 끌어안았다. 단숨에 끌려 들어간 숲색 눈이 쏟아질 것처럼 크게 열렸다. 안 죽는다고, 멍청아. 거듭 말을 씹은 바쿠고의 팔에 울컥 힘이 실렸다. 으스러질 듯 끌어안는 그 팔 힘이 아파서, 너무 억세서, 격렬하고 처절해서 미도리야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는.
바쿠고가 말했다.
내가 지켰으니까.






9


그때 다시 멈췄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0


포크레인이 구덩이를 덮고 있던 가장 크고 무거운 돌을 이윽고 걷어냈다.

무너진 변전소는 돌들의 무덤 같았다. 뉴스에서는 누군가 폐쇄된 변전소의 스위치를 건드렸고, 그 바람에 과부하를 일으킨 변전소의 엔진들이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며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설명했다. 어차피 오래 전에 폐쇄된 변전소였다. 사람들은 그 덕에 인명피해는 없을 것이라며 안도했다. 무너진 돌 밑에 사람이 깔려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유에이 고등학교의 남학생 둘이 며칠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경찰이 알게 되었을 때엔 이미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죽었겠죠, 이렇게 폭발이 컸는데. 사람들은 행여 아이들의 부모가 들을새라 소리를 죽이며 그렇게 소곤거렸었다. 모두 시신이나 건지면 다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들은 차라리 시신이 발견되지 않기를 빌었다. 차라리 아예 사라진 것이기를. 그리하여 세상 어딘가에 우리 아들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살다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부모들은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돌을 파헤치고 걷어내도 색이 밝은 머리칼과 덤불 같은 숲색 머리칼은 돌무더기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와보세요, 여기 그 애들이 있어요! 여기 있어요. 살았어요. 숨을 쉬고 있어요.

아직 죽지 않았어요.



(*)






그리하여 이 시리즈 한 줄 요약 : 무너진 변전소에 갇힌 바쿠고와 미도리야가 죽어가면서 계속 시공을 넘나드는 꿈을 꾸다 구조 되는 이야기... (?)

이렇게 해서 이 시리즈도 어쨌건 매조지는 했네요 허허... 불,시,착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서 다른 글 쓰고 싶은 것도 꾹꾹 참고 있었는데 마지막 편이 안 써져서 죽을 뻔 했고....ㅠ 요 며칠 또 계속 바빠서 이제야 이 야음을 틈타 도둑처럼 끼적여 봅니다... 역시 이번에도 모자람이 너무 많지만 보고 싶은 것을 썼으니 후회는 없는 삶...
하여튼 말 못하고 빙빙 돌고 엇갈리고 진심 아닌 헛소리 뱉어놓고 후회 오조오억개 해대면서도 결국엔 어떻게든 전하고 마는 바쿠고는 언제나 너무 좋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이제 이 시리즈를 다 썼으니 저는 잠깐 충전한 후에 밀린 것들 들고 오겠습니다ㅠㅠ////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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