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때가 되어 슬그머니 백업을 해봅니다.
* 인간 x 뱀파이어로 캇뎈 / 뱀파이어 헌터 바쿠고랑 뱀파이어 미도리야 이야기
* 딱히 개성은 없는 현대
* 약수위 주의
* 4편은 맨 끝에 갱신되어 있습니다XD



BGM / Jill Andrews <Tell That Devil>

http://youtu.be/JNKfVoJsANY



뱀파이어 헌터 x 뱀파이어로 캇데쿠.ssul (0~4)
@ruka_tea


(0)


캐슬베니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꽂혀버려서ㅠ.ㅠ.ㅠ.ㅠ.ㅠ.ㅠ 이번에는 인간 바쿠고랑 흡혈귀 미도리야를 보고 싶다... 바쿠고는 뱀파이어 헌터, 미도리야는 그 헌터한테 사냥 당하는 입장인 뱀파이어. 그러나 둘은 소꿉친구임. 서로 정체는 (특히 바쿠고는) 모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일단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흡혈귀는 아주 오랫동안 전설로만 여겨졌다. 지금에 와서 흡혈귀나 드라큘라에 대한 전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다들 그저 영화나 소설,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픽션의 소재라고 생각해왔다. 늑대인간이나 마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흡혈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정체를 은밀히 숨기고서.

흡혈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역사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밝혀진 바는 없다. 심지어 흡혈귀들조차 자신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랐다. 흡혈귀란 본래 인간과는 달라서 결속력이 약하고, 사회 집단을 이루지 않으며, 아이를 가질 수가 없으니 가족을 만들지도 않는다. 철저히 개인적인 집단이었다. 사자를 제외한 고양이과의 맹수들이 흔히 그렇듯 흡혈귀는 단독적으로 활동하며, 다른 흡혈귀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고, 혹여 침범하게 되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러나 딱 한 번, 이 흡혈귀들이 조직적으로 활약했던 시절이 있지. 20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풍문으로는 이렇게 전해진다. 급작스러운 산업화로 인구가 폭발하면서 흡혈귀들은 이전처럼 사람들 틈에서 정체를 숨기고서 자유롭게 사냥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흡혈을 하지 못한 흡혈귀들은 도태 되거나 죽어버렸지. 20세기로 넘어오던 무렵, 흡혈귀의 인구는 매우 줄어 있었다.
이때 1차 세계대전을 주도했던 독일 나치의 연구원들이 우연히 남유럽의 오래된 성城에서 흡혈귀의 존재와 그들의 능력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은 은밀히 정보망을 이용해 흡혈귀들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 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인간 이상의 능력을 이용해 가장 은밀하고 위험한 요원들을 양성했다.

시대에 도태되어 있던 흡혈귀가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흡혈귀들은 20세기 역사 전반에 걸쳐 곳곳에서 활약했다. 세계 어느 정부에서도 흡혈귀의 존재를 대놓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열강이라고 불릴만한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흡혈귀를 비밀 요원으로 양성하는 기관을 두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을 은밀히 노스페라투라고 불렀다.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가고 나치가 패망한 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냉전시대... 그 모든 역사의 그늘 뒤에 노스페라투가 있었다. 노스페라투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후각과 청각, 반사신경과 운동신경을 이용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첩보전을 벌였다. 교란, 사기, 음모, 증거조작... 게다가 흡혈귀는 그 심장을 통째로 도려내지 않는 한 죽지도 않는 존재였다. 그 어떤 상처를 입어도 스스로를 자가 치유할 수 있는, 매우 진화한 형태의 피부 세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가 흡혈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노스페라투는 세계 곳곳에서 은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활약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홀로 도태되었던 흡혈귀가 이제 완전히 도시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는 단 한 가지, 인간과는 다른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피에 대한 욕구였다.

흡혈은 흡혈귀를 흡혈귀답게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양립할 수 없게 하는 속성이었다. 동물의 피로 허기는 달랠 수 있었지만 흡혈귀는 그 누구라도 인간의 피를 가장 좋아했다. 아무리 도시화가 되었어도, 그 아무리 노스페라투라는 엘리트 요원이 되어 국가가 제공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숙소에서 수많은 부를 쌓으면서 겉으론 정체를 숨기고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다 하여도 인간에 대한 흡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늙지도, 죽지도 않는 흡혈귀의 불로불사不老不死와 더불어 인간 세계에 완전히 섞여 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간혹 누군가 실종되어서 찾고 있다는 기사나 글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해에 한 나라에서 보통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에 달한다는 실종자들 대부분은 모두 흡혈귀의 짓이다. 그렇게 보아도 좋을만큼 흡혈귀의 흡혈 욕구는 문제가 많았다. 더불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건 성욕이나 식욕 같은 것이니까. 더군다나 흡혈귀는 인간보다 더 자제력이 없었다. 이 점에 한해서는.
장황한 얘기지만 어찌 되었건.

이렇기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들 사이에선 신기한 직업이 하나 있었다. 동양에선 흔히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귀렵수鬼獵手.

어쩌면 뱀파이어 헌터라는 말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그들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 유럽에서는 앞 다투어 마녀 사냥을 하던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동양에서는 중국 명나라 시절부터 첫 번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본래 음양술을 공부하던 도사들이 한때 흡혈귀를 사냥하는 귀렵을 함께 겸했다고 하나, 현재는 음양술은 사라지고 귀렵수라는 직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일단은 도술보다 과학이 앞서는 21세기니까.
귀렵수마다 흡혈귀를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각각 다르다. 누군 채찍을 쓰고, 누군가는 검을 쓰기도 했고, 누군가는 현대답게 소음기를 장착한 총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과정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막판에는 의식을 잃거나 힘을 소진한 흡혈귀의 틈을 노려 제압한 후 심장을 뽑는 것으로 사냥을 마무리하고는 했다. 여담이지만, 흡혈귀의 심장은 뽑아내는 순간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사라진단다. 그리고 심장을 뽑힌 흡혈귀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심장처럼 한 줌 재가 되어 세상에서 아예 소멸된다. 그것이 흡혈귀의 ‘진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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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는 이 길고 지겨운 이야기를 바쿠고 카츠키는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왔었다.

태어났더니 성이 바쿠고였고, 바쿠고 가문은 일본에서도 이제 몇 남지도 않은 귀렵수 가문 중 하나였다. 나기를 이런 집에 나버렸으니 바쿠고로서는 선택권도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었다. 어머니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이름뿐인 이사를 전전하며 허허실실 웃고 있는 중년 샐러리맨 같이 보이는 아버지도 일단 진짜 직업은 귀렵수였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성실했지만 귀렵수로서의 실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귀렵수를 하기에는 마음이 약하고 여린 것이 일단 아버지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이렇다 보니, 할아버지는 손자인 바쿠고 카츠키가 태어날 때부터 매우 큰 기대를 걸었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장난감 대신 채찍과 플라스틱 베레타 총신을 만지작 거리면서 놀았던 아이는 여섯 살 무렵에는 다섯 걸음 앞에서 이미 BB탄 총으로 집 뒤뜰에 세워져 있는 흡혈귀 모형의 목덜미를 쏘아 맞출 수 있었다. 흡혈귀는 목덜미 위쪽, 귀 밑을 맞추면 죽지는 못해도 비틀거렸고 귀렵을 할 땐 보통 그 부분을 공략한 후에 제압을 해 심장을 뽑는 것이 관례였다.

여섯 살 생일 때 할아버지는 바쿠고의 머리를 잡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카츠키는 우리 집안 최고의 귀렵수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1등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던 어린 귀렵수에게는 배워야 할 게 진짜, 욕이 나올만큼 너무 많았다. 타고난 재능도 우수했지만 지는 것도 싫어했던 이 소년은 욕에 욕은 다 달고 살면서도 어쨌건, 제 일이라고 하니, 귀렵수가 되는 일에도 최선을 다 했다. 21세기에, 씨발, 뱀파이어 헌터라니. 존나 쪽팔리고 가오 팔려서 어디 대놓고 얘기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저에게 주어진 일이니 하여튼 완벽해야했다. 어릴 적부터 바쿠고는 그런 성격이었다. 암만 이딴 집에 본가 적통 후계자로 태어난 게 거지같기는 해도, 어쨌건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한다. 할 거면 완벽하게 한다. 제대로 못하는 게 더 쪽팔리니까.
모든 것은 언젠가 정식으로 귀렵수로 공식 인정받게 되는 그 날을 위한 일이었다. 열일곱 살 생일, 그날을 위해서.

그리고 이야기는 바쿠고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그때부터 시작된다.







*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그렇듯, 본래 이런 특수한 가업을 이어받는 인물들에겐 친구가 잘 없다. 학업과 가업에 대한 공부만으로도 빠듯한 삶에 친구는 그야말로 사치와도 같은 것이다. 바쿠고는 특히 그랬다. 날 적부터 너는 천재고 우수한 귀렵수가 될 것이라며 떠받들어진 재능에 일찍부터 오만을 배웠던 소년은 게다가 완벽주의자였다. 더불어 입이 험했다. 아마 이건 상황보단 천성이 그런 것 같지만, 어쨌건, 가뜩이나 사람들과 사귀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에다 말 한 번 똑바로 곱게 하는 법이 없으니 그 준수한 외모에 끌려 다가왔던 녀석들도 얼굴을 붉히거나 울면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세상에 망하란 법은 없다고, 이런 주제에, 친구가 하나 있기는 했다.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이름이었다.

참 희한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바쿠고는 그 녀석에 대해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그 커다랗고 울망울망한 숲색 눈과 자주 붉어지던 주근깨 흩어진 뺨처럼 맘도 여리고 눈물도 남들보다 몇 갑절은 많은 녀석이었다. 당연히, 남들보다 더 잘 울었다. 아마도 미도리야 이즈쿠를 가장 많이 울린 건 자신일 테지만, 바쿠고에게 그 무슨 험한 악담을 듣고 울망울망 훌쩍거려도 미도리야는 제 뒤를 일관적으로 졸졸 잘 쫓아다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쫓아내는 보람도 없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부끄러움도 몰랐다. 확 꺼지라고 윽박지르면 어깨를 움츠리곤 울먹거리면서도 기어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우물거리고는 했었다. 그래도 난 캇쨩을 좋아하니까…

그러다 보니 바쿠고는 어느 틈엔가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게 됐다. 심지어 익숙해졌다. 쫓아와서 귀찮게 하건 말건, 집에 갈 때 뒤를 졸졸 따라오건 말건, 묻지도 않은 오늘 점심 메뉴 같은 걸 저 혼자서 계속 떠들고 있건 말건…
진짜 어쩌자고 이딴 새끼랑 알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는지. 바쿠고는 자주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그때마다 좀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게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미도리야 이즈쿠하고 대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제 정식 귀렵수가 될 때를 얼마 안 남겨둔 지금 시점엔 특히나 자주 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이 녀석이랑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건 알고 있다. 이 녀석이 나를 귀찮게 쫓아다닌 것도, 같은 소학교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정보도 잘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디테일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머리 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투미하게 흐려지고는 했다.

“야, 멍청아. 너 나랑 어떻게 만났었지.”

이상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바쿠고는 자주 그렇게 물었다. 그때마다 미도리야는 알려준 것을 왜 또 물어보느냐는 의아함과 귀찮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앞두고 있는 곤란함이 뒤얽힌 얼굴로 부슬부슬 웃고는 했었다. 캇쨩, 요즘 왜 그래… 그러면서도 미도리야는 늘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다섯 살에 말야.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 타면서 놀고 있던 캇쨩한테 내가 가서 그랬잖아. 내가 그네 밀어줄까? 나 그네 잘 미는데…”
“언제. 기억 안 나거든, 등신아.”
“……”
“아니, 것보다는…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존나 흐려.”

꼭 누가 지우개를 대고 본래 있던 것을 슥 지워버리고 새로 뭔가를 덧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씨발 이 좆같은 느낌이 대체 뭐냐고. 생각에 잠길 때마다 미도리야는 양손을 저으면서 그 생각을 부정해주었다. 타이밍은 언제나 바쿠고의 의문보다도 빨랐다. 먼저 선수라도 치는 것처럼.

“설마. 너무 어릴 때라 잊어버린 거 아닐까, 하하… 게다가 캇쨩은 본래 잘 잊어버리잖아. 내 생일이 언제인지도 잊으면서…”
“어디서 사기를 쳐, 망할 너드. 7월 15일이잖아. 니 생일은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것도 모르냐?”
“와, 진짜… 너무 못됐… 아냐아냐! 농담! 농담이야, 캇쨩!”

헤드락을 걸기가 무섭게 미도리야가 얼굴을 흔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 웃는 얼굴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바쿠고는 일부러 제 팔 밑에서 버둥거리는 그 몸을 놔주지 않았다. 그러다 못 이기는 척 팔을 풀어주자 재빠르게 팔 아래에서 빠져 나온 미도리야가 비뚤어진 교복 넥타이부터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바쿠고를 향해 흐, 웃었다. 숲색 머리 위로 기울고 있던 해가 너무 크고 붉었다. 그림처럼.
그 바람에 말하지 못했다.

“캇쨩, 우리 아이스크림 먹고 갈까? 오늘은 내가 살게.”

나는 잘 잊어버리는 성격이 아니라고, 멍청아.
혀 밑까지 치밀었던 말을 꾹 눌러 삼키고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따라 해가 지는 거리 위를 비척비척 걸었다. 망할 귀렵수 승급이 코앞이라 그렇다. 공부해야할 것도, 준비해야할 것도, 수련해야할 것들도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뿐이라고. 기억을 되짚을 용량이 없는 것뿐이라고. 바쿠고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존나 제일 비싼 거 먹어주지. 농담처럼 입매를 씩 밀어올리고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지나쳐 성큼성큼 앞을 향해 걸었다. 그 바람에 이번에도 보지 못했다. 색이 밝은 뒷머리를 쳐다보던 미도리야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바쿠고는 몰랐다. 왜 그 숲색 눈에는 가끔 열일곱 살이라기엔 너무나 조숙하고 깊은 빛이 어리는지, 왜 가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망할 어른들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건지 짐작도 못했듯이.

바쿠고의 뒷모습을 뚫어보던 미도리야가 제 입술 끝을 츱, 물었다 놓았다. 입맛이라도 다시는 것처럼.







*

형이랑 하나만 약속해줄래?

그네를 힘차게 떠밀고 받아주면서 소년이 앉아 있던 꼬마에게 물었다. 열일곱 남짓이나 되었을 소년은 꼬마보다 키도 크고 팔도 길어서 그네도 재미있게 잘 밀어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꼬마는 부끄러워서 일부러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뭔데. 소년이 천천히 그네를 멈추며 꼬마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색이 밝은 머리 위로 숲색 머리칼이 깊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형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그래서 네가 형 나이만큼 자랄 때까지 기다릴 거야. 기다려서, 친구가 될 거야. 마치 우리가 이날 이때부터 처음 만나 함께 자란 것처럼… 왜냐면 형에겐 너 같은 친구가 필요하거든.’
‘……’
‘그러니까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너랑 나만의 비밀인 거야. 약속할 수 있지?’

숲색 눈이 둥그렇게 웃으며 덧붙였다. 응, 캇쨩?
꼬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바쿠고 카츠키는 다섯 살이었다.





(01)


흡혈귀들에겐 독특한 체향이 있다고 했다.

「흔히 페로몬이라고들 하지. 카츠키, 네 놈은… 어, 너무 어려서 아직은 모르겠다만.」

할아버지는 한때 일본 전국에 현존하고 있다는 귀렵수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불렸었다. 때문인지 자신의 아들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순하고 마음이 여린 아들보다도 자신의 심성과 재능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손자를 매우 아꼈다. 물론 바쿠고는 그다지 살가운 손자는 아니었다. 방학 때마다 수련과 공부를 겸해 할아버지가 계시는 본가로 찾아갈 때마다 입이 댓발쯤 튀어나와선 늘 구시렁거리기 일쑤였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배워야 하는 것임은 분명했지만 너무 길고 지겨웠다.
그래도 흡혈귀에 대한 얘기는 재미있었다. 귀렵수가 어떻고, 우리의 의무는 무엇이며 의식이니 귀렵 방법이니 하는 따분하고 고루한 얘기보다도 훨씬.

「페로몬은 나도 알아. 개미들한테 있는 거잖아. 애취급 하고 있어, 할배 주제에.」

할아버지는 아들에게도 마음이 약해 꾸지람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하고도 달랐다. 되바라진 소리를 할 때마다 바쿠고는 할아버지에게 알밤을 맞고는 괜히 꽥 소리를 지르곤 했다. 왜 때려! 그래도 할아버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럴 때는 자기 며느리, 그러니까 바쿠고의 엄마와 기가 막히게 똑같았다. 방학 때마다 무슨 요령을 피워도 바쿠고의 등을 걷어차면서 무조건 할아버지 댁에 가야한다던 망할 엄마처럼.
흡혈귀들의 페로몬은 그런 귀여운 게 아니거든, 이 망할 손자야.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 체향은, 뭐랄까, 희한한 것이지. 어떤 녀석은 달콤하고, 어떤 녀석은 차갑고, 시큼한 것 같기도 해서 과일이나 꿀 같은 것과도 비슷해. 대체적으로는 좋은 냄새가 나지. 그래서 그 향을 맡아버리면 이상한 끌림 같은 것을 느껴버려. 그래, 사람을 미혹하지. 마치 최면처럼…」
「……」
「뭐, 열 살짜리가 뭘 알겠냐마는. 나이를 먹으면 네 놈도 알게 될 거다. 네 놈의 몸이 변하고 2차성징이란 걸 겪으면 말이지.」

더는 그 몸이 아이가 아니게 될 때, 2차 성징이라는 걸 겪고 아침마다 젖은 속옷과 달라진 모양새에 당황하게 되는 사춘기가 찾아올 무렵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조심해, 이놈아. 할아버지가 거듭 덧붙였다.

「그 페로몬에 끌려갔다간 귀렵은 커녕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테니까.」

이제는 바쿠고도 그 페로몬이 뭔지 안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나이를 먹고 2차성징이라는 걸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페로몬과 비슷한 향은 맡아본 적이 없었다.
사회화에 성공한 흡혈귀들은 향수를 이용해 체향을 숨긴다. 게다가 흡혈귀는 아무리 예전보다 번성했다 하여도 인간보다는 그 수가 월등히 적었다. 자연 생태계의 피라미드 같은 것이다.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맹수는 언제나 자신의 사냥감이 되는 초식동물보다 그 수가 적다. 인간을 사냥하는 흡혈귀의 객체 수가 인간보다 적은 것도 이와 비슷했다.

이렇다 보니, 바쿠고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흡혈귀를 만나보지 못했다.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포획해온 흡혈귀가 처형당하는 모습은 집안 뒷마당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때의 흡혈귀는 대체적으로 귀렵수들에게 제압을 당하고 난 후라 페로몬을 풍기기는커녕 제 몸 하나 똑바로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서 묶여 있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흡혈귀의 체향, 즉 페로몬이라는 건 바쿠고에게 그저 막연한 정보로만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달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시큼하기도 한 과실이나 꿀을 닮은 향…



그러니까 꼭…
데쿠새끼 같은.



“야, 멍청이. 이거 무슨 냄새냐.”

옥상의 하얀 회벽에 기대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고 있던 미도리야가 멈칫 했다. 점심시간이었고, 둘 외엔 아무도 없던 옥상은 고요하고 조용했다. 바쿠고를 돌아보는 숲색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끔벅거렸다. 무슨 냄새? 바쿠고가 슥 턱짓을 했다. 네 놈 목덜미.
냄새나? 진짜? 이상한 거!? 미도리야가 기겁을 하면서 제 목덜미를 문질러 댔다. 바쿠고가 두 눈 사이를 확 좁히면서 말했다. 아니, 그딴 거 말고. 문질러진 탓인지 냄새는 좀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아무리 맡아봐도 바디클렌저나 로션 같은 화학적이고 인공적인 향은 아니었다.

“단내 같은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목덜미 위로 슥 얼굴을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좁아진 거리감에 미도리야가 어색하고 어정쩡한 얼굴로 웃었다. 뭐하는 거야, 캇쨩… 손가락 한 마디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미도리야의 하얀 피부 위에서 바쿠고가 흡, 깊게 숨을 들이켰다. 탐색.
그러니까 과일이나 꿀 같은… 바쿠고가 우물거렸다.

“달단 말이지.”
“달다니, 뭐가… 그냥 로션이나 바디클렌저 냄새 아닐까?”
“하, 아니거든. 어디 개코 앞에서 약을 팔아.”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래, 냄새도 잘 맡아서 좋겠다… 그리고는 민망한 모양인지 미도리야가 바짝 붙은 바쿠고의 이마를 슥 손끝으로 떠밀었다. 야. 버티고 있던 바쿠고가 느닷없이 입을 떡 벌렸다. 하나 내놔, 미트볼.
진짜 치사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도리야는 도시락 속에 있던 미트볼 하나를 집어다 바쿠고의 입안으로 쏙 밀어 넣어줬다. 그제야 바쿠고가 볼을 우물거리면서 미도리야에게서 떨어졌다. 지난주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월요일 점심이었다. 바쿠고가 울대를 크게 밀며 새파란 하늘을 올려보았다.

분명 이런 냄새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그래도 흡혈귀의 체향이나 페로몬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바쿠고는 으레 미도리야의 체취에 대해서 떠올리고는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수수해빠진, 힘도 하나 보이지 않는 녀석이 흡혈귀처럼 보인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우스워서 바쿠고는 잠시 소리없이 허, 입꼬리를 비틀었다. 상상도 안 된다.

데쿠새끼가 흡혈귀라니.

물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바쿠고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직 도시락도 다 먹지 않은 미도리야의 무릎 위로 꾸물꾸물 몸을 눕혔다. 야, 다리 펴봐. 숲색 눈이 이번에도 기가 막힌 듯이 흐물흐물 웃었다. 그래도 저리 비키라거나 이러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캇쨩, 곧 생일이네.”

미도리야가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바쿠고를 보면서 물었다. 바쿠고가 짧게 대꾸했다. 어.

“난 다음 주면 열일곱 살이라고. 그러니까 형이라고 불러라, 데쿠새끼.”
“또 그런 의미 없는 소리를, 하하…”
“의미없기는, 멍청아. 몇 달이라도 일찍 태어난 건 엄청난 거거든. 연륜 모르냐, 연륜? 더 많이 산 쪽이 원래 더 지혜로운 거라고.”
“글쎄, 나이 먹어봐야 좋을 것도 없는데… 하하. 벌써 열일곱 살이나 됐구나, 캇쨩도…”
“……”
“생각보단 금방 자랐네.”

다행이야. 미도리야가 뒷말을 삼키며 흐 말꼬리를 흐렸다. 말이 어째 이상했다. 다행이긴, 개뿔. 데쿠새끼, 지는 열일곱 살 아닌 것처럼. 한 마디 해줄까 하다가 바쿠고는 이내 말았다. 하늘은 파랗고 기분은 좋았다. 어쩌면 베고 있던 무릎이 좋아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도 자꾸 그 냄새가 났었다. 달고 시큼한, 그래서 한 번쯤 괜히 그 하얀 목덜미를 만져보고 싶은…

“올해 선물은 또 뭐가 좋을지 고민해봐야겠어, 흐. 작년엔 욕만 먹었… 캇쨩?”

그 곧은 목을 졸라보고 싶은, 손등의 힘줄이 단단히 일어설만큼 움켜쥐고 싶은, 멍이질 만큼 물어뜯고 들이마셔 보고 싶은, 그리하여 가장 깊고 은밀한 틈을 비집고 닿고 싶은, 가지고 싶은, 취하고 싶은…

“캇쨩!”

부르는 목소리에 바쿠고가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미도리야의 목덜미로 뻗어가고 있던 양손이 우뚝 멈췄다. 하, 씨발. 미도리야의 무릎 위에서 몸을 일으킨 바쿠고가 제 머리를 크게 헝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지금.

범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너를.

“…? 캇쨩, 어디 가?”
“화장실.”

그대로 자리를 턴 바쿠고가 홱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미도리야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쿠고는 그대로 옥상 문을 힘껏 닫았다. 철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으면서 바쿠고는 제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하, 씨발. 선홍색 눈이 불편하게 부푼 교복바지 앞을 경멸처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은 꿈이나 망상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존나 쌓였나보네, 씨발.”

아니고서야 느닷없이 이럴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너를 상대로 그럴 리도 없지. 입술을 질끈 씹은 바쿠고가 다시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구관 4층 남자 화장실은 언제나 쓰는 사람도 없이 비어 있었다. 빼고 가야지. 존나, 빼면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이고 볼 안쪽을 힘껏 씹으면서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가 변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그때 바쿠고만 몰랐었다.








*

그날 밤, 바쿠고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첫 몽정을 할 때부터 꾸었던 그 꿈이었다.

‘더… 깊게, 세게… 응, 그렇게, 그렇게… 아, 좋아, 아ㅎ…ㅅ!’

꿈은 늘 어둡고 짙은 안개를 헤집으면서 시작되고는 했다. 무엇을 더듬어 찾고 있는지는 그 꿈을 꾼지 벌써 5년이나 되어가는 지금에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꿈의 패턴은 늘 비슷했다. 어둠을 더듬고 있던 바쿠고의 몸 밑에서 나타난 하얀 팔이 바쿠고의 목을 감는다. 입술이 겹친다.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뜨겁고 습하게 귓속질을 한다. 얼만큼 섰어? 그리고 스르륵 미끄러진,제 것이 아닌 손이 바쿠고의 앞을 감싸쥐고 천천히 문지르며 황홀처럼 몸을 떤다. 아.

진짜, 먹고 싶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전부 다.

낯설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내가 이 목소리를 씨발, 분명 어디에서 들었는데… 꿈 속의 바쿠고는 그런 생각을 해보다 기억이 나지 않아 이내 관두고는 제게 안겨오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는다. 그리고 하얀 발목을 움켜잡고 무릎을 밀면서 허리를 힘껏 붙인다. 아. 누구인지 모를 그림자가 검은 안개 속에서 턱을 젖힌다. 비좁게 저를 조여오는 압박감과 녹을듯이 뜨거운 체열에 꿈속에서도 바쿠고는 윽 눈을 좁힌다.

근데 이게 씨발, 늘 너무 생생하다고.

이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또 이 꿈 때문에 몇 번이나 속옷을 적셨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다리 사이가 얼얼할만큼 덜덜 떨리고는 했다. 마치 진짜 누군가와 밤새 질펀하게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단단히 부푼 앞은 바쿠고가 양치를 하고 면도를 하는 동안에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그 정체도 모를 녀석과 꿈속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면서 뒹구는지 디테일한 것들은 잘 모른다. 눈을 뜨고 나면 언제나 감각만이 남아있고는 했다. 여자라기엔 판판한 가슴팍과 잔근육들이 보기 좋게 갈라져 있던 복근 위를 난폭하게 더듬었던 촉감과 귓가에 달고 뜨겁게 헐떡이던 어느 호흡… 내 목에 감긴 손끝에 힘을 주고 상처를 내면서도 내 목덜미에 바짝 붙어 도무지 떼지 못하던 입술, 만지고 탐해질 때마다 비틀리던 그 유려한 뼈대들과 끝끝내 몇 번이고 꿰뚫었던 가장 습하고 뜨거웠던 그 틈의 감촉과 현기증 같은 둔통. 그리고…

‘다 줘, 너를 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다… 내게, 다…’

애원처럼 헐떡이며 속삭이던 그 붉은 입술과 하얗게 벌어지며 예리하게 반짝이던,
송곳니.

존나, 씨발, 이딴 엿 같은 꿈.

이런 꿈을 대체 왜 꾸는지는 모른다. 정식 귀렵수 의식을 앞두고서 받는 스트레스가 흡혈귀에게 흡혈 당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빌어먹을 사춘기라 이딴 꿈을 꾸는 건지. 꿈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바쿠고는 그저 제게 달려드는 그 건방진 몸을 힘껏 열며 격렬히 범했다. 어차피 꿈이다. 헐떡이는 녀석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바쿠고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어차피 개꿈이라고, 이딴 거. 깨고 나면 기억도 못할 이딴 거.

‘맞아, 이딴 거. 이딴 개꿈.’

팔 밑에 깔려 헐떡이던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그보다 더 오랜 예전처럼.

‘이런 건 기억하지 않아도 돼, 캇쨩.’

그리고 다가온 송곳니가 푹, 바쿠고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하, 씨발… 헉, 허억…”

바쿠고의 몸이 침대 위에서 크게 요동을 쳤다. 꼭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가위에라도 눌렸거나. 그 모습을 어둠 속에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숲색 눈이 조금 쓰게 웃었다. 그때는 이 ‘인간’에게 조금 연민을 느꼈었다.
괜찮을 거야, 캇쨩. 땀에 흠뻑 젖은 바쿠고의 뺨을 손으로 더듬으며 미도리야가 고요히 속삭였다. 너는 이제 곧,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가지게 될 테니까.

“내가 거짓말을 한 걸 알면 올마이트는 실망하실 텐데…”

그래도 벌써 12년이나 공을 들였으니까 좀 봐주세요. 전 이제 이 인간이 없으면 안 되니까… 혼잣말 같은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흐, 허공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쿠고의 입술 위로 얼굴을 기울였다. 잘자, 내 사랑. 악몽처럼 굳어 있던 바쿠고의 입술 앞에서 길게 돋은 송곳니가 하얗게 반짝 거렸다.

“우리는 곧, 정식으로 만나게 될 테니까.”

얼른 빨고 싶다. 미도리야가 츱, 혀끝을 핥았다. 얼른 네 체액으로 나를 적시고 싶어. 하지만 좀 더 기다려야겠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미도리야는 그제야 바쿠고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자물쇠가 걸려있던 창을 비집은 달빛이 숲색 눈 위로 요요히 기울고 있던 밤, 자정이었다.





(02)

12년을 기다렸어. 꿈속의 ‘악마’가 달뜬 숨결을 잇새로 몰아내며 그렇게 속삭였다. 우린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어지러운 입맞춤들이 바쿠고의 입술에 꽃잎처럼 살며시 닿았다 떨어졌다. 작별처럼.
안녕, 내 사랑.

꿈은 언제나 그쯤에서 끝이 나고는 했다.

핸드폰 알람이 울릴 때부터 바쿠고는 진작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아직 꿈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천장을 올려보며 멍하니 입버릇처럼 욕을 하고 있다가 알람 소리가 시끄럽다며 고함을 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겨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 알았다고, 망할 할망구! 소리를 높여 화답해준 바쿠고가 그제야 이불을 걷어내면서 주춤주춤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불편하게 부풀어 있던 제 다리 앞을 내려다보고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하, 씨발.

또 그 망할 꿈 때문이었다.

근데 씨발, 그 꿈 내용이 도무지 생각나지를 않는단 말이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는 동안에도 열심히 꿈의 내용을 돌이켜 보았지만 이번에도 영 기억나지는 않았다. 일어날 때마다 몸 컨디션이 늘 이 지경인 걸 보면 일단 잊어버린 게 존나 속터질만큼 야한 꿈인 건 알겠다. 게다가 왠지 늘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꿈 내용이 자세하게 떠오르지를 않아 확신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오늘은 한 가지는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세면대를 뚫어보고 있던 바쿠고가 제 목덜미를 더듬더듬 매만져 보았다. 이제 제법 남자의 태가 나기 시작한 수려하고 단단한 목선은 아무 상처 없이 멀끔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흡혈귀가 여기에 이를 박았는데, 분명히.

츱, 하고 피를 빨리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게 현실이었다면 분명 이 목에 시커멓게 멍자국이 퍼져 있었을 것이다. 아직 정식 귀렵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흡혈귀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바쿠고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지금껏 흡혈귀에 대해서는 나름 성실하게 공부했었다. 흡혈귀의 힘을 유지하는 것은 피, 그중에서도 인간의 피고 힘이 강한 흡혈귀일수록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피를 원한다. 힘이 강한 흡혈귀일수록 식탐이 강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바쿠고가 쯧, 혀끝을 찼다.

보통 식탐이 강한 게 아니었다고, 그 새끼.

불행히도 얼굴은 보지 못했다. 계속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던 것 같은데 그 내용과 그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았었다. 다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기억과 제 목에 입술을 묻고 허겁지겁 흡혈을 하던 그 감촉만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동물의 어린 새끼가 살기 위해서 죽을 듯이 젖을 빠는 것처럼 츱츱, 연신 빨면서 녀석은 이따금씩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슬부슬 웃었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머금고 있던 녀석의 틈이 힘껏 조여오던 기척이, 탐욕스럽게 꿈틀거리던 그 뜨겁고 습한 속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염병할 흡혈귀 새끼가. 바쿠고가 울컥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 앞을 다시 내려 보았다. 기껏 가라앉았던 앞이 다시 한 번 단단히 부풀어 있었다. 크게 마른세수를 한 바쿠고가 곁에 있던 변기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앉았다. 허겁지겁 끌어내린 바지가 발목까지 툭 떨어졌다. 그래, 인정한다, 씨발.

개같이 꼴렸었다. 그 흡혈귀 새끼한테.

“카츠키, 학교 안가니!? 얘가 오늘따라 진짜!”

복도 저편에서 엄마가 잔소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꾸하는 대신 바쿠고는 남아있던 왼손으로 바로 곁에 있던 세면대를 움켜쥐었다. 망할 할배가 알게 되면 씨발, 나를 호적에서 파버리겠지. 순간 달아오른 호흡을 잇새로 헉헉 밀어내면서 바쿠고는 다시 한 번 오른손에 속도를 붙였다. 연방 욕이 터졌다. 존나, 엿 같은, 빌어먹을, 염병, 개 같은, 씨발. 그러다 하얗게 손 안이 젖을 때 선홍색 눈이 돌연 크게 열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순간 데쿠 새끼가 떠올랐었다.

진짜 미쳐버린 거지, 나는. 투덜거린 바쿠고가 세면대의 물을 틀면서 입술 끝을 꽉 씹었다 놓았다. 빌어먹을 귀렵수 의식만 지나가면 이딴 스트레스도 이제는 끝이다. 바쿠고가 하얗게 젖은 손을 벅벅 씻었다. 4월 20일을 꼭 일주일 정도 남겨둔 어느 날이었다.








*

미도리야 이즈쿠는 학교에서 딱 한 블록 옆에 있는,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바쿠고도 몰랐다.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도리야의 말마따나 다섯 살에 저희 동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바쿠고는 단 한 번도 미도리야의 집에 가보지 않았다.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애초에 바쿠고는 남자애들 둘이 방에 처박혀 꽁냥거리고 있는 걸 싫어했다. 그게 뭐냐고, 쪽팔리게, 씨발.
그래도 미도리야가 누구와 살고 있고,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어제는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바쿠고 인생에서 이런, 관심도 없는 남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용해준 유일한 존재였다. 이런 걸 보면 어쨌건 소꿉친구는 소꿉친구였다.

“아, 좀 늦게 잤거든. 아빠 병원 좀 다녀오느라, 흐…”

간신히 지각을 면하고 교실에 골인했을 때 미도리야는 가장 먼저 바쿠고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얼굴이 대체 왜 그래? 눈 밑이 퀭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바쿠고는 어이가 좀 없었다. 니 얼굴이나 먼저 보고 말해, 너드 새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밤이라도 샌 것인지 미도리야의 얼굴은 유난히도 하얗게 질려 핏기가 없었다. 그 말에 미도리야가 하얗게 질린 제 뺨을 꼭꼭 누르며 저렇게 대답했었다.
아, 그랬지. 바쿠고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있다고 들었던 기억은 있었다. 딱히 오라고 한 적이 없으니 병문안을 가본 적도, 직접 뵌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요즘 많이 좋아지셨어. 간호사들 말로는 조금씩 맥박도 좋아지고 있대. 아, 우리 아빠 심장이 안 좋으셨잖아.”

사진으로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것도 미도리야가 반쯤 억지로 자신에게 한 번 봐보라면서 핸드폰에 찍힌 사진을 밀어준 덕분이었다. 노란 머리에 체구가 왜소했던 남자는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아도 미도리야하고는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새끼는 엄마 닮았나 보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바쿠고는 그때도 가볍게 넘겼었다. 돌이켜 보면 미도리야는 엄마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바쿠고는 어릴 적부터 눈치는 빨랐다. 아버지 혼자 키우신 거지, 뭐. 맥락을 보면 딱 답이 나와서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암만 개차반에 제 멋대로에 가끔 친엄마에게 마저 성질머리 좀 고치라는 말을 들어도 바쿠고는 무례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요즘 가끔 궁금하기는 했다. 사람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는 이 녀석이 왜 자기 집이나 아버지 병문안에 대해선 한 번도 오라고 했던 적이 없는 건지.

“근데 캇쨩은?”

느닷없이 말의 방향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뭐가, 뭐, 너드새끼. 지레 찔린 바쿠고가 괜히 씨근거렸다. 이런 화법엔 이미 익숙하다는 듯 미도리야는 담담한 얼굴로 묻고 싶던 것을 꿋꿋이 물어보았다. 얼굴…

“요즘 계속 기운이 없어 보여. 혹시 감기에라도 걸렸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아니, 존나 멀쩡하거든, 멍청아.”
“근데 얼굴은 그렇지가 않은 걸.”

눈 밑이 퀭 해. 미도리야가 양손 검지 손가락으로 제 눈 밑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아니라고. 바쿠고가 짧게만 대꾸하고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답할 말이, 그보다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염치가 없어 그랬다.
너 같으면 솔직하게 말하겠냐, 씨발. 밤새 몽정하고 자위하느라 정신이 나갔다고. 근데 내가 마지막에 떠오른 게 소꿉친구란 네 놈 얼굴이었다고, 씨발, 입이 비뚤어져도 말할 수 있겠냐고.

“집안 일 때문인가 보지, 뭘, 씨발.”
“집안일… 아. 맞다. 집에서 다음 주에 굉장히 큰 제사 같은 게 있다고 했었지?”

대충 핑계처럼 둘러댔던 말에 미도리야는 다행히 걸려주었다. 절이란 건 힘들구나…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이럴 땐 본가보다도 외가의 환경이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외할아버지는 태고종 계열 사찰의 주지 스님이었고, 엄마는 그 주지 스님의 맏딸이었다. 방학 때 할아버지에게 끌려 수련을 떠나거나 혹은 그밖에 귀렵과 관련한 여러 가지를 배우느라 바쁠 때마다 바쿠고는 절집인 외가의 핑계를 대곤 했었다.
물론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귀렵수가 되는 정식 의식을 주관하는 곳도 절이었고, 주지인 외할아버지가 바쿠고를 위한 축원을 읊어줄 것이었다. 흡혈귀를 사살하는 귀렵사와 죽은 존재들의 넋을 성불하여 좋은 곳에 보내는 절은 필연적으로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파트너다. 듣기로 엄마도 젊은 시절에 귀렵 후 흡혈귀의 성불을 돕기 위해 바쿠고 가문에 찾아왔다가 젊고 서툰 귀렵수였던 아버지에게 첫눈에 반해 연애를 하고 결혼에 이른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에 반해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그만큼 귀렵사와 절의 관계는 깊었다.

이 새끼는 절대 짐작도 못하겠지만.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흘깃 쳐다보며 생각했다. 절이라 고생이 많겠다면서 걱정을 하는 숲색 눈을 볼 때마다 거짓말을 하는 데에 대한 죄책감이 약간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21세기다. 흡혈귀를 사냥한다느니, 귀렵이느니 하는 직업을 어느 누가 진지하게 들어 주겠냐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귀렵에 대해서 이 순진해빠진 너드새끼를 설득해야하는 게 바쿠고로서는 몇 배는 더 귀찮았다.

어찌 되었건.

평소라면 이쯤에서 넘어갔을 것이다. 미도리야는 지금껏 그 이상 바쿠고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절에서 하는 행사인 거지? 저기 캇쨩,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도 가서 구경해도 괜찮을까?”
“니, 니가 왜 와, 멍청아!”

말을 더듬은 건 당황해서 그랬다. 암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해도 바쿠고는 애초에 거짓말을 잘 하는 심성은 아니었다. 이 새끼가 둔해 빠져서 다행이지, 눈치가 조금이라도 빠른 녀석이었다면 진작 걸렸을 법한 허술한 투였었다. 그래도 미도리야는 언제나 제 이야기라면 진지하게 들어줬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녀석이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해도 그냥 냅뒀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별 뜻이 있는 건 아니라 궁금해서…! 캇쨩도 알고 있겠지만 난 절에서 하는 의식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교회를 다녀서…”

이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일본인처럼 생겨서 일본에서 제일 드물다는 크리스천이라니. 꼴에 세례명도 있는 모양이었다. 라파엘.

“얌전히 구경만 할게.”

숲색 눈이 슥 바쿠고를 향해 기울어 왔다. 바쿠고가 저도 모르게 홱 어깨를 뒤로 물렸다. 그때도 그 향기가 났었다. 달고 짙은, 시큼하고 아련한 그 체취.

“미쳤, 미쳤냐!? 니가 왜…”
“한 번만, 응?”

기울어온 몸이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제발 캇쨩… 숲색 눈이 애원처럼 속삭였다. 대답할 타이밍을 잃어버린 바쿠고가 바짝 마른 입술 끝을 저도 모르게 질끈 씹었다. 조용히 볼게, 진짜, 조용히. 귓가로 다가온 미도리야의 입술이 낮게 속살거렸다. 달고 짙은 향기가 어지럽게 허공을 떠돌았다. 꽃인 듯이.

“한 번만 보고 싶어.”
“……”
“게다가 그날 캇쨩 생일이잖아.”

하, 씨발. 바쿠고가 제 머리를 크게 헝클였다. 집요한 새끼, 하여튼 은근히 고집 센 새끼. 씨근거린 바쿠고가 결국엔 마지못해 대답을 툭 던졌다. 오든가, 그럼.
미도리야가 번쩍 만세를 했다.

“진짜? 정말? 가도 돼?”
“아, 존나 두 번 말하게 하네. 오든… 이 너드 새끼가 씨발, 어딜 끌어안아! 뒤지기 전에 안 떨어지지, 어!?!”
“캇쨩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
“진짜, 제일 좋아.”

느닷없이 제 목을 끌어 안아오는 숲색 머리를 향해 꽥 소리를 지르던 선홍색 눈이 허, 기가 찬 듯이 웃었다. 그래, 씨발. 맘대로 해라, 등신 새끼야. 주변에 흩어져 있던 반 애들이 둘이 그러고 노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잠깐 쳐다봤다 이내 익숙하다는 듯 눈을 돌려 버렸다.

“내가 여자애였으면 캇쨩한테 벌써 스무 번쯤 고백하고 차여줬을 텐데…”

미도리야가 둥그런 눈을 접으며 흐 웃었다. 웃기는 새끼. 바쿠고가 씩 입매를 밀었다. 차일지 안 차일지 어떻게 알아. 그런 소릴 해줄까 하다가 바쿠고는 슥 손을 뻗어 미도리야의 숲색 머리를 그냥 헤집어주곤 말았다.
그러다 문득 딱 하나가 맘에 걸렸다. 이 새끼는 그날이 내 생일인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씨발, 말한 적이 없는데.

기분 탓이겠지. 바쿠고는 이번에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허공에 달고 짙은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꽃처럼, 한 번쯤은 그 청초한 대를 꺾어보고 싶은 가장 여리고 순수한 꽃처럼,
독처럼.










*

집을 나왔니? 독에 이끌린 중년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아저씨랑 같이 갈래? 벤치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던 숲색 머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미도리야는 그때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올마이트의 부탁으로 병원 환자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된 지도, 흡혈을 못 한지도 벌써 2주째였다. 게다가 올마이트가 물려준 힘 덕분에 체력도, 지구력도, 마력도 우수했지만 누군가에게 일주일에 두세 번씩 억지로 ‘악몽’을 꾸게 하는 일은 그런 미도리야에게도 힘들고 벅찬 일이었다. 흡혈귀치고는 자제력이 매우 좋다고 평가 받아왔던 전직 노스페라투도 오늘은 인내의 한계를 느꼈었다. 만약 남자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미도리야는 공원 경비병의 목이라도 물어 뜯었을 것이다.

처음이니? 남자가 미도리야의 청바지를 열어젖히면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제 머리색처럼 짙은 풀밭 위에서 미도리야는 부끄러운 듯 뺨을 조금 붉혔다. 네, 처음이에요.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공원의 수풀 뒤엔 작은 동물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미도리야에게 허리를 붙여오던 남자에게선 땀내와 술이 섞인 역하고 탁한 체취가 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남자에겐 손도 내밀지 않았을 텐데. 미도리야가 숲색 눈 사이를 질끈 좁혔다. 미도리야의 취향은 언제나 이보다 더 고매했다. 힘이 강하고 식탐이 강한만큼 미식에 가까운 취향이었다. 그러니까 이보다는 훨씬 젊은, 싱그러운, 잘 생기고 준수한, 사납지만 관능적인, 색이 밝은 머리칼과 타는 듯한 붉은 눈을 가진…

너 말야, 캇쨩.

남자가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반쯤은 억지로 신음하면서 미도리야는 제 어깨를 멋대로 움켜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제 입으로 가지고 왔다. 남자는 어디에 넋이 빠진 건지 미도리야가 손가락을 우득 씹어도 온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남자의 손바닥에 파묻힌 입술이 쯥쯥, 젖은 소리를 냈다. 남자는 그래도 몰랐다. 제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땀이라기엔 너무 붉었다는 것도, 제 몸 안의 피가 결국 그 붉은 입술 안으로 빠짐없이 빨려 들어갈 때까지도.
안녕. 미도리야가 혈색을 잃고 차갑게 굳은 남자의 몸을 수풀 위로 슬며시 떠밀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움직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미도리야가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지옥에나 떨어지시길.”

네 피는 어떤 맛일까. 미도리야가 붉은 피로 흠뻑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잠시 생각했다. 뜨겁고 달 거야. 너의 그 넘치는 혈기와 너의 그 붉은 눈길처럼. 풀어헤쳐진 옷섶의 매무새를 주섬주섬 정돈하면서 미도리야가 남자의 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낮동안 새하얗게 질려 있던 뺨은 이제 밤인데도 반짝일만큼 생기가 넘쳤다. 이걸로 한동안은 또 버틸 수 있겠지.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버텨야 해.

너의 ‘처음’은 나여야 하니까.

네가 처음으로 증오하게 되는 이름이 나여야 해. 너의 첫번째 적은 나여야만 한다. 우리 인연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게 될 테니까. 생각을 삼킨 미도리야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엿새 남았어. 숲색 눈이 흐 웃었다. 내가 12년동안 기다려온 그날.

“아, 근데 올마이트한테는 또 뭐라고 변명하지…”

하늘 끝이 천천히 파래지던 3시, 새벽이었다.





(03)



귀렵수는 특별한 힘을 타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 힘은 정식으로 귀렵수가 될 때에만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정식으로 귀렵수가 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바쿠고는 일반인치고도 운동 신경이 좋고 머리가 좋아 어릴 적부터 재능이 출중하다는 평을 받아왔지만 그렇다고 당장 귀렵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 가문에서 수백여년에 이르도록 귀렵이라는 가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사명감 때문만이 아니다. 바쿠고 가문엔 특별한 힘이 있었다.

「흡혈귀를 식별하게 하는 힘이지.」

할아버지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물론 네 놈이 정식으로 귀렵수가 되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그전까지는 비밀을 엄수하는 것이 귀렵을 하는 귀렵수 가문의 사명이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렇게 숨겨가며 그 유세를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전해듣기로는 자칫 이 비밀을 흡혈귀들이 알게 될 때를 대비해 그렇게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100여년 정도 전에도 어떤 흡혈귀가 이 비밀을 캐내려고 하다 바쿠고 가문의 선대 귀렵수 중 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하기야, 납득 못할 일은 아니다. 흡혈귀는 페로몬을 쓴다고 하지만 그건 흡혈귀임을 알려주는 사소한 증거 중 하나라고 했다. 흡혈귀들은 페로몬을 숨길 수도 있었고, 아니면 향수를 이용해도 된다. 특유의 체취까지 느껴지지 않으면 흡혈귀는 겉보아선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빛을 보지 못한다든가 마늘을 싫어한다거나 십자가를 보면 괴로워한다는 건 모두 도시전설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활동하는 흡혈귀 중에는 기독교인도 매우 많으니까.
바쿠고 가문의 후계자로서, 귀렵수로서 물려받게 되는 힘은 그런 사소한 게 아니었다.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증거지. 할아버지는 엄숙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네 놈이 정식으로 귀렵수가 된다면.

“근데 이 망할 놈이 의식을 닷새 남겨놓고 이렇게 게으름을 부려!?”

토요일 아침, 바쿠고는 간만에 악몽을 꾸지 않아 늘어지게 자고 있다가 자기 등을 걷어차는 발길질에 욕을 하며 기상했다. 본래 도쿄에 계실 분이 아니시지만 신칸센을 3시간동안 타고 굳이, 분가한 아들내외의 집에 찾아오신 것은 순전히 바쿠고 때문이었다. 칠순을 넘으시고도 어찌나 기운이 좋으신지 할아버지는 침대에서 씨근거리던 자기 손자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만 잡고 방밖으로 끌어냈다. 분명히 이놈이 급한 줄도 모르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것이니 내가 손수 나서서 수련을 도와야겠다는 일념으로 도쿄로 상경한 할아버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아, 일어난다고! 일어난다고요, 망할 할배가 진짜!”
“이놈 새끼가 할애비한테 망할 할배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르장머리냐, 어!?”
“날 때부터 그렇게 불렀고만 뭘 씨발 새삼스럽게 …아, 알았다고! 존나 아프다고요! 뭐 이런 할배가 다 있어!”

결국 등짝에 불이 나도록 후려맞고 난 후에야 바쿠고는 간단히 세수하고 운동복을 챙겨 입은 후에 반쯤 쫓겨나듯 집을 나섰다. 조깅을 하면서도 입으론 욕이 멈추지를 않았다. 어오, 씨발. 진짜 얼마만에 악몽 없이 잠든 주말인데. 그래도 딴 짓을 하거나 요령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수련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귀렵수는 다른 무엇보다 체력이 좋고 강건해야 한다. 무술 실력 역시 당연했다. 인간보다 진화했으며 인간의 능력을 월등하게 뛰어넘는다는 흡혈귀를 제압해 귀렵을 하기 위해서 신체를 단련해야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상식이었다. 바쿠고도 이 점에 대해서는 요령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말마따나 망할, 흡혈귀 새끼들을 만났을 때 힘으로 밀리면 씨발 쪽팔리니까.

본가와 달리 평범한 단독주택 2층집인 자기 집에서는 수련을 하기가 여의치 않아 바쿠고는 주로 도장에서 수련을 했다. 유도는 세 살 때부터 했고 공수도는 이미 열다섯 살에 8단을 땄다. 그밖에도 검도, 태권도에 주짓수를 배웠으니 보유하고 있는 단수만 합쳐보면 30단도 넘을 것이다. 나중에 흡혈귀들 멸종하면 경찰대 들어가서 특공대나 할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종종하기도 했을만큼 바쿠고는, 입은 비록 험해도, 할아버지가 지도해온 귀렵수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었다. 지는 것도 밀리는 것도 싫다. 어차피 할 거면 제대로 해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게 바쿠고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근데 토요일 아침부터 이러는 건 존나 아니지, 씨발.

망할 할배가 왜 하필 주말에 쳐들어와선. 씨근거리면서 바쿠고는 아침마다 늘 달리고는 하던 내리막길을 타박타박 달렸다. 이 내리막길을 곧장 내려가면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그리하여 밤에는 술 취한 아저씨와 비행청소년을 바글바글 끌어 모은다던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데쿠새끼 집이 이 근처 어디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바쿠고가 막 공원 입구가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길 한 중간에 넋을 놓고 서서는 공원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쿠고가 속도를 줄이며 입매를 씩 밀었다. 익숙한 숲색 머리였다.

“야, 멍청아. 뭐 하러 멍 때리고 있는…”
“!?!? 헉, 누구… 아, 캇쨩이구나.”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 미도리야에게 어깨동무를 하던 바쿠고의 팔이 움찔 했다. 돌아보던 미도리야의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격했던 탓이었다. 토끼 새낀 줄 알았네. 뭘 쳐다보고 자빠져 있어서 이렇게 놀래, 데쿠새끼. 씨근거리면서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어깨에 툭 제 팔을 걸며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 그냥… 미도리야가 주근깨가 흩어진 뺨을 둥그렇게 부풀리며 부슬부슬 웃었다. 그 얼굴이 어째 어제와 달라보였다. 발긋한 홍조를 띤 하얀 얼굴이 어제와 달리 너무 혈색이 좋았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하, 존나.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술 끝을 꽉 씹으며 은근히 눈길을 돌려 버렸다. 미도리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했다. 바쿠고의 얼굴에 바짝 붙어 있던 목덜미에서 나는 체취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짙고 달았다.

“아, 나는 그냥 지나가던 길에… 캇쨩 운동 중이었어? 저기 봐봐. 공원에서 어제 밤에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나봐.”

미도리야가 제 어깨를 안고 있던 바쿠고를 향해 눈짓을 하며 작게 소곤거렸다. 어, 어. 바쿠고가 이번에도 눈길을 피하면서 대강 대답을 흐렸다. 그리고 선홍색 눈이 공원 쪽을 향해 돌아간 미도리야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흘깃 뚫어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새끼가 이렇게… 예뻤나?

“아무래도 살인 사건인 것 같아. 경찰들이 저기 서서 계속 지나가던 사람들한테 뭘 물어보고 있어. 우리 동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으…”

아니, 냄새 탓인가. 무의식적으로 허공에 떠도는 냄새를 흡 들이켜 보면서 바쿠고는 생각했다. 체취가 다른 때보다 달아서 그렇게 느끼나. 아, 그래. 짙어지니 이제는 알 것 같다. 약간 복숭아를 닮았어. 그러나 바디클렌져나 샴푸, 비누 같은 화학물에 인공적으로 첨가되어 있는 그런 향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다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허,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탈해서 그랬다.

나는 씨발, 뭐하고 자빠져 있냐. 변태 새끼도 아니고.

“살인사건이건 나발이건 존나 경찰이 알아서 하겠지.”

가볍게 말을 흘리면서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어깨를 감았던 팔을 스르륵 풀었다. 그때까지도 미도리야는 계속 공원 안쪽을 기웃기웃 엿보고 있었다. 대체 뭐 볼 게 있다고 이렇게 쳐다보고 자빠졌냐고. 궁금해진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시선을 따라 괜히 그쪽을 흘긋거렸다 윽, 눈을 구겼다. 스무 걸음 앞, 노랗게 쳐진 폴리스 라인 앞에 서있는 두 남자가 너무 익숙했던 탓이었다. 동시에 같은 것을 알아차린 미도리야가 바쿠고에게 슥 몸을 붙이며 낮게 소곤거렸다.

“아이자와 형사님이랑 같이 계시는 분, 캇쨩 아버님 아냐?”
“하, 존나. 꼰대 둘이 왜 씨발 여기에 같이 붙어있…”
“아니, 카츠키! 일어났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쳐다보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붕붕 손을 흔들었다. 이즈쿠도 같이 있었구나? 아버지가 아는 체를 했고, 미도리야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저 양반은 나보다는 데쿠놈의 아버지 같은 타입인데 말이지. 우리 엄마가 저런 성격에 약한 건지, 그래서 나도 닮은 건지. 씨발, 물려줘도 왜 이딴 걸 물려줬는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던 중에도 곁에 서있던 검은 머리의 형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언뜻 보아선 형사가 아니라 노숙자로 보이던 남자는 바쿠고가 어릴 때부터 자주 집에 드나들며 아주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단박에 바쿠고는 알아차렸다. 아버지와 아이자와 형사가 함께 있을 때는 오로지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이건 그냥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동네에선 최근 5년동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는데. 언젠가 그런 얘길 들었던 것 같아 바쿠고가 옅게 눈 사이를 좁혔다. 그러다 바쿠고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했다.

좀 전까지 코가 달아지도록 짙었던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달고 시큼하던, 마치 복숭아 같던.

“아, 맞다! 아빠 병원에 가던 길이었는데!”

미도리야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딱 쳤다. 가볼게. 미도리야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사건 현장을 보고 있던 아버지와 아이자와 형사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미도리야는 잡을 새도 없이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
이즈쿠는 왜. 검증은 대충 끝난 건지 이 편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며 아이자와가 물었다. 바쿠고가 가볍게 툭 대꾸했다. 바쁘다는데요. 아, 뭐. 무심하고 심드렁한 투로 말꼬리를 느리게 끌면서 아이자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좀 더 편하게 얘기해도 되겠어.”

그리고 아이자와가 담담히 아버지와 바쿠고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 동네 주민이 아닌, 정식 귀렵수와 다음 주면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할 신임 귀렵수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람이 죽었어. 나이는 50대 초반, 남성. 사인은 심장마비. 하지만 손바닥에는 동물에게 물린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고, 체내의 혈액은 30프로도 남아있지 않지.”
“그 말인 즉, 아이자와 자네 생각은…”
“그래, 바쿠고.”

아이자와가 검고 흐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흡혈귀.”










*

미도리야가 1인 입원실의 커튼을 활짝 걷어냈다. 하늘이 새파랗게 반짝이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오늘은 날이 참 좋아요. 몸을 돌린 미도리야가 창을 떠나 1인실 침대 곁에 놓여있던 응접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던 주스병을 열었다. 그래, 정말 그렇구나. 침대 위에 몸을 일으켜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의 몸집은 미도리야와 비슷할만큼 왜소했고, 오랜 입원 생활 탓인지 볼이 폭 패일만큼 말라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양아들을 향해 웃는 남자의 두 눈만큼은 새벽의 별빛처럼 선명하고 찬란히 반짝거렸다.
미도리야는 이 남자를 아주 오랫동안 올마이트라고 불렀다.

“닥터 리커버리가 요즘 올마이트의 컨디션이 참 좋다고 알려주셨어요.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진작 1인실로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나는 사실 사람들하고 섞여 지내는 편을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저로서는 인간들하고 24시간 매일 붙어 있다는 게 상상도 안돼요, 흐… 저도 올마이트만한 자제와 인내를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너 정도면 우리 동족 중에서도 꽤나 신중하고 차분한 편이지. 스스로를 믿는 게 좋아, 미도리야 소년. 동물피를 오랫동안 마시게 되면 인간의 피 냄새에 무뎌지게 되거든. 게다가 인간들의 철분약도 굉장히 품질이 좋으니까 말일세.”

네, 저는 죽었다 깨나도 철분약이나 동물피만 먹고는 못 살 것 같지만… 그런 말하는 대신 미도리야는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오던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온 평범한 오렌지 주스였다.
흡혈귀라고 해서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너지가 되어주지 못할 뿐이다. 인간이 포도당을 에너지로 만드는 것처럼 흡혈귀는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을 섭취해 에너지를 얻는다. 무엇을 영양으로 삼느냐의 차이가 있을뿐 구조적으론 사실 인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채식을 하는 인간처럼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고 오로지 동물 피와 철분약으로만 헤모글로빈을 공급받는 흡혈귀가 존재하듯이.

올마이트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는, 정말로 드문 흡혈귀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도리야의 기억으로는 근 20여년 정도 됐다. 사회적으로는 올마이트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아들 행세를 하고 있으니, 미도리야도 올마이트를 따라 철분약과 동물피를 마시기는 했다. 올마이트는 지금도 미도리야가 사람을 흡혈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도리야는 올마이트만큼의 자제와 인내를 갖추지 못했다. 그 아무리 올마이트의 피와 힘을 이어 받은 존재였어도.
하지만 아마 알고 계실 거야. 두 번째 잔을 채우면서 미도리야는 소리 없이 쓰게 웃었다. 흡혈귀는 인간보다 더 후각이 예민하고,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에게선 반드시 그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난다.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미도리야 이즈쿠가 참고 인내하다가도 한 달에 한 번은 폭주해서 결국 누군가의 살갗을 물어뜯고 그 피를 달게 마시고 온다는 사실을, 올마이트는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 꼭 한 달에 한 번씩은 오래도록 입원해있던 환자 중 누군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것처럼.

그러나 어제 일은 분명, 미도리야의 실수였다.

바깥에서 누군가를 사냥해본 건 10년만에 처음이었다. 이 동네에 이사온 것이 5년이었으니,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저지른 실수인 셈이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요즘 들어 미도리야는 전보다 퍽 자제가 없어졌다.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힘껏 씹었다.

너 때문이야, 캇쨩.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네 피 냄새에 어지러워지는지 모르겠어. 네가 자위라도 한 날이면 네 체액의 체취까지 섞여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 자신이 가진 달큰한 체취가 흡혈귀의 페로몬이라면 인간의 페로몬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는가 한다. 그 기분은 단순히 그 피를 들이마시고 싶다는 흡혈욕구하고는 약간 성질이 달랐다.
맞아, 달라. 단순한 갈증보다 좀 더 치밀하고 관능적인 감각이었다. 아랫배가 스르륵 간질거리는, 혈관을 도는 모든 피들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나조차도 몰랐던 깊은 틈이 천천히 젖어들 것만 같은, 그리하여 불길처럼 단단히 일어선 너를 이 안에 품고만 싶은, 밤이 새도록 이 간지럽고 뜨거운 자리 위로 너를 문질러 비벼대고 싶은, 그 안에서 도달하고 싶은…

“이즈쿠.”

생각에 빠져 있던 숲색 눈이 멈칫 했다. 올마이트가 소년이라는 장난스러운 별칭이 아닌 아래 이름을 부를 때는 보통 두 가지 경우 뿐이다. 화가 났을 때, 화는 나지 않았어도 그에 준할만큼 진지한 충고를 할 때. 그리고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혹시 아직도 그 귀렵수 가문의 소년에게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미도리야가 대답 없이 입술 끝을 꽉 씹었다. 올마이트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제발, 이즈쿠.

“벌써 12년이 지난 일이다. 누구의 탓도 아냐. 올포원과 시가라키에게 습격을 당한 것은 내가 방심한 탓이고, 사경을 헤매던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지. 이즈쿠, 너도 이 사회에서의 불문율이 무엇인진 알고 있지 않니. 무조건적인 복수는 결코 옳은 해결책이 아냐. 그들을 죽이면 우리는 표적이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거다. 게다가 우리는 곧 이 지역을 떠나게 될 텐데…”
“……”
“넌 그렇게 어리석은 아이가 아닐 게야. 그러라고 죽어가던 너를 물어뜯고 내 피를 먹여 동족으로 만들어준 게 아니다.”

아, 존경하는 올마이트. 미도리야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 남자는 언제나 미도리야에겐 아버지 그 이상, 신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창조주나 다름없었다. 나를 다시 만든 것도, 이 세계에 불러준 것도, 내게 새 삶을 준 것도 당신이야.
그래도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아요. 저를 얼마나 염려하고 계시는지두요. 하지만 올마이트, 저는 그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그 말씀엔 솔직히 알겠노라고 거짓말도 못하겠어요.”
“이즈쿠.”
“전 이것 밖에 없거든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짧게, 그렇게만 말하고 미도리야는 몸을 일으켰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미도리야는 병실 문을 닫았다. 복도로 비스듬히 떨어지던 햇빛이 그때도 찬란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머리색처럼 밝고 따뜻한 노랑이었다.
너여야 해. 미도리야가 입을 꽉 악다물었다. 너밖엔 없어. 그리고 기회는 곧 찾아올 터였다.
이제 닷새 밖에는 남지 않았다.







*

사냥을 한 거지. 아이자와가 말했다. 그것도 아주 식탐이 강한, 힘이 강한 녀석이.

“알다시피 우린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수사할 수 없어. 그래서 네 아버지를 부른 거다. 게다가 들어보니 뭐… 네 놈도 다음 주면 귀렵수가 된다고 하니.”
“……”
“네 놈의 첫 사냥감이 되겠지, 이 흡혈귀는.”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다. 말을 하면서 아이자와가 주머니에서 수첩 한 권을 꺼내 바쿠고에게 툭 던졌다.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탓에 바쿠고는 제 손으로 날아온 수첩을 간신히 떨어뜨리지 않고 낚아챘다. 수첩 속에는 이 지역에서 현재 거주 중인 주민들의 이름 몇몇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지역에 5년 전에 전입해온 주민들의 이름이라고 아이자와는 부연했다.

“뭐, 아침에 사무실에서 불러주는 걸 급하게 받아 적은 거라 빠진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당장 눈여겨볼 정도는 되겠지. 네 놈도 바쿠고 가문의 후계자라고 하니 알고 있을 거야. 흡혈귀들은 보통 5년마다 거주지를 옮겨 다니지. 이 지역에서는 5년동안 흡혈귀로 인한 실종이나 살인 사건이 없었고.”
“하, 존나… 그 말은 그러니까, 새로 어떤 녀석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 이겁니까?”
“거야 모르지.”

선홍색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꼰대는 씨발 알려주려면 똑바로 알려주든가. 투걸거리면서도 바쿠고는 일단 그 수첩을 챙겨 두기로 했다. 아이자와의 말대로 다음 주면 바쿠고는 의식을 거치고 정식으로 귀렵수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은 분명 바쿠고의 손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 바쿠고가 기대감에 떨리는 입매 끝을 비틀었다.

내 첫 번째 사냥감이라니.

아직은 누구인지 모른다. 냄새만으로 흡혈귀를 식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탓이다. 허나 의식을 거치고 나면 ‘증표’를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 증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왜 그런 희한한 힘이 우리 핏줄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때가 되면 감히 내 꿈을 휘젓고 다닌 미친 새끼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겠지.

그래서 그때는 몰랐었다. 가장 위험한 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UPDATE (04)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타일 벽에 기대고 있던 숲색 머리 위로 똑, 떨어졌다.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질끈 물었다. 아, 좀 더, 더…

구부러져 있던 무릎 밑을 파고든 오른손목이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발갛게 벌어진 입술이 헐떡이던 그 달뜬 숨결처럼.

흡혈귀는 인간보다도 체온의 변화가 심하다. 한겨울이면 얼음장처럼 양뺨이 차가워지기도 하고, 가끔은 종일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온몸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이 사회에 포함되어 혈족血族이 된지 100년을 넘겼지만 미도리야는 이 세계의 기준으로는 젊고 어린, 갓 성인이 된 흡혈귀였다. 청춘은 언제나 욕망에 약하고 쉬이 뜨거워진다. 인간의 사춘기와 청춘이 그런 것처럼.
타일벽에 기대고 있던 등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턱을 젖히면서 미도리야가 흐리게 흩어져 있던 숲색 눈을 질끈 구겼다. 더, 조금만 더… 젖어 있던 타일바닥 위에서 발뒤꿈치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더 깊이, 더, 더 세게, 더… 짓뭉개고 있던 입술이 기어이 떨어지며 신음처럼 크게 떨었다.

“아, 캇쨩… 더, 더어…”

가지고 싶어, 너를. 이대로 꿰뚫리고 싶어, 네 그 단단한 칼날에.

“아, 좋아… 흐으, 더… 하아, 더, ㅎ…,”

너를 처음 보았을 땐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 거야. 그때 너는 너무 작고 어렸다. 놀아주는 친구 하나 없이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흔들고 있던 꼬마, 그래도 입술을 꼭 깨물고선 외로운 티를 내지 않으려던 자존심 강한 꼬마. 그땐 네가 이 나라에서 가장 힘이 강하다는 귀렵수 가문의 하나뿐인 아들인 것도 몰랐었어. 그저 순수하게 네게 끌려 말을 걸었다. 색이 밝은 머리칼이, 피처럼 붉던 그 선홍색 눈이 내 눈엔 너무 익숙해서. 그 오래고 긴 시간동안 한 번도 잊지 못했었던 누군가를 닮아 있어서.

맞아, 너를 닮은 단 한 사람.

탐욕처럼 잔뜩 흐려져 있던 숲색 눈이 돌연 둥그렇게 열렸다. 동시에 두 무릎 사이에 묻혀있던 손 안이 하얗게 젖었다. 미도리야가 나른해진 머리를 벽 한쪽에 툭 기대며 흐, 웃었다.

“아, 역시 이런 것보단 진짜가 좋은데…”

12년 전의 어리고 서툴던 꼬마는 이제 세상에 다시 없을만큼 훌륭하고 근사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당장에라도 네게 최면을 걸고 미혹해서 네 품에 달려 들고 싶은 마음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억누르고 있는지 넌 정말 상상도 못할 거야. 힘을 쓴다면 한 번 자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네 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네게 엉망으로 당해보고 싶어. 두 무릎이 후들거려 걷지도 못할만큼, 네가 남긴 잇자국과 멍자국이 온 곳곳에 덕지덕지 남아서 옷을 벗을 때마다 네 손길에 다시 또 온 피가 다 달아올라 참을 수도 없을만큼.
엄청날 거야, 진짜로. 숲색 눈이 흐물흐물 웃었다. 게다가 난 네 짐작처럼 그렇게 순진하고 서툰 데쿠가 아니니까.

사실을 알게 되면 넌 당황할까, 두려울까. 아니면 나를 죽여 버리고 싶을까.

죽이지 않을까? 그래도 어쨌건 귀렵수니까.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미도리야가 샤워기의 꼭지를 돌리며 생각했다. 게다가 보통 귀렵수도 아니었다. 지난 12년동안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아닌 척 해도 너는 완벽주의자니까.
자칫 방심하면 밀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넌 내 목을 조를 수 있는, 최초의 귀렵수가 될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다 미도리야가 다시 한 번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강한 존재는 언제나 매력적인 것이다. 그 존재가 아직 제 능력의 가치조차 또렷이 모르는 거칠고 서툰 원석이라면 더더욱. 미도리야가 기껏 닦아냈던 검지와 중지를 다시 한 번 발간 입술에 머금고 츱, 빨았다.


“한 번만 더 뺄까…?”

넓은 거실에서 알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한 후에 생일 축하한다고 전화해야지. 안 받아주겠지만… 흐, 웃으면서 미도리야는 다시 한 번 벽에 기대며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침, 4월 20일이었다.








*

흡혈귀는 욕망에 약하다. 인간보다 더.

딱히 할일이 없어서 육신의 쾌락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흡혈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늙지도 죽지도 않고, 당연히 인간보다 오래 산다. 페로몬이라는 체향 역시 남의 마음을 교란하거나,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보다 성교를 하기 위해서 진화한 기능인지도 모른다. 흡혈귀를 오래도록 연구해온 귀렵학의 권위자들은 종종 그렇게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흡혈귀는 인간보다도 성욕이 강하다. 피에 대한 식탐이 역시 인간보다 강한만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이놈아.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인생 접은 귀렵수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게다가 네 놈 같이 얼굴은 멀쩡한데 입은 더러워서 연애 제대로 못하는 놈들이 빠지기 쉽단 말이지. 안 봐도 내 뻔하다, 이놈아. 달려들어서 옷부터 벗기고 들면 아주 좋다고 입술 부비고 붙어먹겠지.”

4월 20일의 아침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잔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 바쿠고는 일찍부터 준비를 하고 외갓집에서 운영하는 사찰로 이동했다. 귀렵수 의례는 저녁에 잡혀 있었지만 종일 선대 귀렵수와의 문답이니 시험이니 하는 귀찮은 일정들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그래도 여느 학생이 다 그렇듯, 학교에 안 가도 된다니 신이 났던 바쿠고는 아침에 할아버지와 문답을 시작한 후부터는 이 망할 의례를 도망가지 않고 잘 치러낼 자신이 없어졌다. 차라리 학교가 나을 뻔 했다.
붙어먹기는 누가! 바쿠고가 꽥 소리를 질렀다. 부채를 팔락팔락 거리면서 잠시 콧방귀를 낀 할아버지가 연이어 덧붙였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이 녀석아.

“흡혈귀가 맘을 먹고 미혹하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힘이 강한 귀렵수도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까.”
“……”
“그럼 이 망할 손자놈이 그간 준비를 잘 했는지 테스트를 해볼까!”

시험은 이론과 무술 실재 등으로 나뉘어 치러지는 모양이었다. 사실 뚜렷한 검증 기준은 없다. 심사위원이라곤 할아버지랑 아버지뿐이니까. 기준도 없고, 씨발 뭐 이딴 게 다 있어!?!! 바쿠고가 그래도 만점을 받은 시험지를 집어 던지면서 억울한 듯 항변했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정리했다. 네 놈이 흡혈귀를 만나서 뒤지지 않을 정도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존나, 귀렵 절차라도 알려줬으면 덜 엿 같았을 텐데. 마루 위에 우뚝 서 있던 지푸라기 인형의 목에 발차기를 먹이면서 바쿠고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빡, 소리와 함께 날아간 인형의 목이 넓고 높은 사찰 대당의 천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툭 떨어졌다.

하, 존나. 헐거워진 검은 도복 끈을 다시 조이면서 바쿠고가 입매 끝을 꽉 씹었다. 데쿠새끼 보고 싶네.

외갓집으로 향하던 승용차 뒷좌석에서 미도리야의 축하 전화를 받았을 때 바쿠고는 괜히 밀려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면서 생일은 뭔 생일이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늘 캇쨩은 결석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소리를 아쉬운 듯 우물거리던 녀석이 귀여워서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앞좌석을 걷어찼다가 운전 중이던 엄마에게 욕을 먹었다. 그래도 이 새끼는 대체 뭘 먹고 살아서 이딴 소리를 하는지 가끔은 신기했다. 요샌 왜 그게 왜 귀여워 보이는지 제 자신에게 기가 막힌 것처럼.
몇 시에 가면 돼? 미도리야가 물었고, 바쿠고는 메시지로 남겨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외갓집, 정확하게는 의례를 하는 사찰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 역 이름과 6시쯤 오라는 메시지를 투닥투닥 두드리면서 이모티콘을 붙여줄까, 말까 잠깐 고민해보다 바쿠고는 이내 집어치웠다. 그래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기는 새끼였다. 아침부터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전화해준 거나, 내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아 아쉽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대는 거나, 실없이 흐 웃어버리는 그 둥그렇고 깊은 숲색 눈도 전부 다.
할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저 미친놈이 시험이 빡세다고 아예 넋을 놓고 쪼개고 있네, 쪼개고 있어.”

시험은 4시를 넘어갈 때 모두 끝났다. 급하게 늦은 점심을 해치우기가 무섭게 바쿠고는 그대로 욕탕으로 던져졌다. 이놈의 망할 의례라는 건 씨발 왜 이렇게 준비해야할 것도 많고, 이 망할 일본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허례허식이 많은지. 벗겨지고 씻겨 지고 다시 입혀지고 하는 사이에 7시에 잡힌 의례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대당에 딸린 곁방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바쿠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괜히 머쓱해진 바쿠고가 불편한 수트의 검은 넥타이를 똑바로 잡으면서 눈길을 돌렸다. 블랙 수트라니 참 별일이었다. 적어도 후리소데에 하카마 정도는 입을 줄 알았는데.

“뭐, 상판이 반반하니 나쁘지는 않군. 그게 네 놈이 오늘 입을 상복喪服이다.”

순간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상복이라니. 이 영감쟁이가 드디어 자기 손으로 친손자를 죽이는 것인가 별 생각이 다 치밀었다. 할아버지가 혼란스러워하는 선홍색 눈을 올려다보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렵수들은 보통 귀렵 의례에 대해서도 전하지 않으니 네 놈은 전혀 몰랐겠지.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온 전통이다.”

귀렵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요즘에야 세상이 바뀌어 귀렵수들도 마냥 흡혈귀에게 당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오래 전에는 흡혈귀의 힘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의식은 그런 배경 속에 생겨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 했다. 즉 이 의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를 귀렵수를 위해 미리 치르는 장례의식이었다.
내 친손자 바쿠고 카츠키는 오늘 죽을 게다. 할아버지가 쓰게 웃었다. 항상 밉살스러웠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때는 바쿠고의 눈에도 어쩐지 좀 서글퍼 보였었다.

“귀렵수가 되는 순간부터 너는 역으로 흡혈귀들의 표적이 되겠지. 녀석들은 너에게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너를 사냥하려 들게야.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우린 손자의 시체조차 볼 수 없을 지도 모르지. 녀석들은 귀렵수를 곱게 죽여주지 않으니까.”
“……”
“그래도 잘 해낼 거다. 네 놈은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놈이니.”

할아버지는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이 할아버지로서는 최고의 격려였음을 바쿠고는 알고 있었다. 살아. 할아버지가 말했다. 바쿠고가 입매 끝을 씩 밀었다. 안 뒤진다고요, 나는.
자, 그럼. 할아버지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이제 곧 있으면 의례가 시작될 테니 네 놈이 가질 능력에 대해서 알려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할아버지의 눈길이 등 뒤편으로 향했다. 뒤편에 놓여있던 유리 벽장에는 크고 작은 십수 개의 상자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뚜껑이 덮여 있지 않았다. 상자 안에 담겨 있던 것은 크고 작은 수많은 크기의 검, 총과 채찍이었다. 하. 바쿠고가 입매 끝을 비틀었다. 이제껏 이 망할 가문에 태어나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골라봐라, 이 녀석아.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 놈을 지켜줄 무기.

“보통 셋 중 하나를 골라서 가져간다. 나는 채찍을, 네 아버지는 검을 골랐었지. 네 놈은 근거리 접근 무술에도 강하지만 손의 감각도 좋으니 총이 어울릴 수도 있겠지.”
“아뇨. 셋 다 가질 건데요.”

상자 위를 흥미롭게 훑어보던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가장 강한 최고의 귀렵수가 될 테니까, 나는. 두고 보라고요.”
“……”
“그러니까 다 내놓으시라고.”

이런 미친 놈. 할아버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네 맘대로 하라며 할아버지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신이 나서 벽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손자를 향해 할아버지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할 때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걸 네 녀석에게 알려주지.”

흡혈귀를 알아보는 힘에 대해서.








*

미도리야가 사찰 앞에 왔다고 문자를 보내온 건 정확하게 6시 10분이었다.

“미안, 캇쨩. 오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흐… 역시 모르는 동네를 오려니… 어.”

사찰 문앞까지 데리러 나왔을 때 미도리야는 얼굴도 똑바로 들지 않고 변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바쿠고를 발견한 미도리야가 선 자리에서 우뚝 굳었다. 우와, 세상에. 숲색 눈이 쏟아질 것처럼 크게 열렸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캇쨩이… 수트를 입었어…!”
“좋아서 입은 거 아니거든, 멍청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바라보는 눈길을 좀처럼 떼지 못했고, 바쿠고는 그 빤히 뚫어보는 모양새에 조금 민망해졌다. 내가 이래서 이딴 허례허식을 존나 싫어하는 건데. 바쿠고가 색이 밝은 머리를 크게 헝클였다. 먼저 몸을 돌려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 바쿠고의 뒤를 바쁘게 쫓아가면서도 미도리야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멋져, 캇쨩.”
“알아.”
“진짜, 진짜로 멋져.”
“안다니까, 등신아.”

칭찬이 싫지는 않아서 선홍색 눈이 솔직하게 씩 웃었다. 의례라는 건 굉장한 거구나… 꿈결처럼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어이도 없고 귀여워서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웃을 뻔 했다. 그게 혼자 민망해서 바쿠고는 괜히 입술을 비죽거리며 씨근거렸다. 굉장하긴 개뿔.

그래도 싫지 않았다. 자꾸 밀려 올라가던 입꼬리처럼.

“의례는 몇 시 시작이야?”
“7시.”
“그건 여기에서 하는 거야, 아니면…”
“아니, 나 혼자서. 넌 여기 있어.”

바쿠고가 마당에 펼쳐져 있던 자리 중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대략 100여명 정도 앉을 법한 자리는 절반 정도 차 있었지만, 그 중 바쿠고가 아는 얼굴이라곤 아빠나 엄마나 외갓집 식구들뿐이었다. 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내 의례 자리에 앉아 있는 거냐고. 콧날을 찡그려보다 바쿠고는 이내 이게 이름뿐인 의례란 걸 떠올리곤 상황에 대해 납득했다. 말이 의례지, 사실은 장례다. 장례 흉내를 내기 위해 어디서 사람이라도 고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앉아 있어, 너드새끼. 바쿠고가 가장 가까운 데에 있던 빈 의자를 당겨주며 말했다.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거린 미도리야가 의자에 앉는 동안 식전 의례가 시작된 모양인지 맨 앞에 설치된 불단 앞에서 외할아버지가 경을 외고 있었다. 이제 7시가 되면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뒤에 있는 밀실로 들어와 내 장례를 주관하겠지. 그리고 그 모든 의식이 끝나면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 자리를, 그 어떤 흡혈귀도 영원히 숨길 수 없는 그 자리를.

“어리바리하게 어디 쳐댕기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바쿠고가 앉아 있던 미도리야에게 몸을 기울이며 낮게 그렇게 말했다. 응.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도 미도리야에게서는 예의 그, 복숭아를 닮은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자와 형사와 아버지가 함께 있던 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짜 로션 냄새였나보지. 바쿠고는 그렇게만 가볍게 생각했다. 안쪽에서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급하게 바쿠고를 불렀다. 아, 진짜 영감쟁이. 콧날을 사납게 찡그린 바쿠고가 대당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탓에 보지 못했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던 순간, 의자 저쪽에서 슥 몸을 일으켜 미도리야의 뒤로 다가가던 재색 머리칼의 남자를.











등 뒤에서 누군가 미도리야에게 인사를 했다.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동네 꼬마에게 건네는 말투처럼.

“안녕, 울보.”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서늘한 체취가 뒤쪽 자리로 다가올 때부터 미도리야는 이미 남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앞을 바라보며 우뚝 굳어 있던 숲색 눈이 천천히 지진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인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말야. 씨근거리던 남자가 흉터가 앉은 입술 끝을 씩 밀었다. 입매 틈으로 하얀 송곳니가 언뜻 나타났다 사라졌다. 유령처럼.

“아빠는 건강하셔? 아, 참… 내가 죽일 뻔 했었지.”
“……”
“인사 좀 해주라. 12년만인데.”

아니, 사실 이 남자가 나타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미도리야가 가볍고 담담한 말투로 인사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여기에 오면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남자의 이름은 시가라키 토무라였다.





(계속)



일단 여기까지만 써놓고 끊어갑니다 ^ㅇㅠ 저는 내일부터 또 컴퓨터 앞에 없기 때문에..... 이 썰 왜 이렇게 꽂혀 있는지 모르겠지만ㅠㅠ생각나는대로 써보자고 열심히 힘을 내본 것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다른 썰들이 그러했듯 피드백은 이 글에 가벼이 달아주시면 매우 좋아합니다 매우 기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 작성하실 때는 글쓴이&비번만 입력하셔도 되어요///// 모바일 이모티콘 사용하시면 댓글이 날아가버리니ㅠ.ㅠ요것만 주의해주시면 된다며///// 무튼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며칠 쉬었다가 다시 돌아올게요>////<

+ 또 수정전 버전이 올라가서 긴급수정;;; 히히히 보신 분들은 얘가 더위를 먹었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가주세요 흐흐흐

?
  • 엉엉 2017.07.27 13:40
    오늘도 이렇게 감동받고 떠나갑니다... 루카님 글은 왜 하나같이 다 아름다운건지 모르겠네요ㅜㅜㅜㅜ정말 보배롭고... 엉엉엉
  • oop 2017.07.27 13:44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 사랑합니다 2017.07.27 17:16 SECRET

    "비밀글입니다."

  • 매번 2017.07.28 00:04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ㅠㅠ 2017.07.28 00:09 SECRET

    "비밀글입니다."

  • 으흐흑 2017.07.28 01:29
    ㄹ루카니뮤 ㅠㅠ ㅠㅠ ㅠㅠ ㅠ ㅠㅠ ㅠ ㅈㅔ가 루카님 글을 보고 광명을 찾았다 아ㅏ닙니까ㅜㅜㅜㅜㅜ 으흐흑 야한 이즈쿠 초ㅣ고에여 ㅜ ㅜㅜ ㅜ ㅜ ㅜ ㅜ ㅜ 이런 배우신분ㅠㅡㅜㅜㅜㅠㅠㅠ
  • 멜팅 2017.07.28 01:38
    소재에 치이고 분량에 두 번 치이고 퀄리티에 무한대로 치이고 갑니다... 루카 님 계신 곳 말씀해 주시면 그쪽으로 절 올리고 싶네요... ♡
  • 루카님흡혈귀체고 2017.07.29 17:35
    제가 루카 님 썰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게 캇쨩 흡혈귀 썰인데... 이렇게 또 데쿠가 흡혈귀인 썰을 주시면 제가 웁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거 같아요 평생 이어주시어요 ㅠㅠㅠㅠㅠ
  • 치스하 2017.08.10 01:09 SECRET

    "비밀글입니다."

  • 쌤 사랑해요 2018.06.10 17:34
    하악 최고ㅠㅠㅠㅠㅠㅠ입ㅂ니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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