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유곽주인 바쿠고, 춘화 그리는 화가 미도리야로 캇뎈
* 고전풍AU
* 약수위 주의
* 무거운 분위기는 아닙니다
* 여는 글을 먼저 읽어주셔요 http://rukaruka.kr/208843




난춘탐려亂春貪戾


@ruka_tea






온 사방이 지옥처럼 불타고 있었다.

아비규환과 다름없는 지경이었다. 비명소리, 곡소리가 한 데 얽혀 아이의 고막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깊은 어둠을 가르며 불화살은 쉼 없이 떨어졌고, 사람들은 짐을 챙길 사이도 없이 맨발로 거리에 뛰어나와 울며 소리 지르며 사방을 달리다 운이 나쁘면 살에 맞아 맥없이 쓰러졌다.

그 지옥 속에 미도리야는 있었다. 일곱 살, 봄이 저물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촌장이 망루에 매달린 종을 흔들며 대피령을 날리기 전에 이미 적병敵兵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아빠와 엄마의 시신 밑에 깔려 몸을 숨겼던 덕에 미도리야는 목숨을 건졌다. 우는 법도 모르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부모의 시신 밑에서 그저 덜덜 떨고 있던 미도리야를 끌어내준 건 동무의 손이었다. 고사리 손으로 그보다 더 작은 제 친구의 손을 꽉 움켜잡고 녀석은 이를 꽉 악물며 말했었다.

도망쳐, 멍청아.

그날, 그 밤의 기억은 선명하면서도 군데군데 토막처럼 끊어져 있었다. 반쯤은 제 소꿉동무의 손에 끌려나온 채로 미도리야는 생지옥과 다름 없는 거리를 정신없이 달렸었다. 어디로 향해 달리는 건지, 평화롭던 고향이 왜 이렇게 불타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다 이해할 수도 없을만큼 미도리야는 겁에 질려 있었다. 살 하나가 날아와 바로 곁을 달리던 여인의 등을 꿰뚫었다. 기겁을 한 미도리야가 그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동무는 꽉 움켜잡고 있던 미도리야의 손을 놔주지 않았었다.

화염에 휩싸인 기둥이 두 꼬마의 앞으로 기울어졌다. 미도리야가 비명을 질렀다. 캇쨩―!

가까스로 몸을 굴린 동무가 불길을 피했다. 그래도 옷섶에 붙은 불길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쯤은 울면서, 미도리야는 불길에 데여 다 까지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맨손으로 덮어가며 제 친구의 옷섶에 붙은 불을 끈다고 덤벼들었다. 다행히 불길은 금세 잡혔지만 동무의 가슴팍에는 어지럽게 짓무른 붉은 화상이 남았다. 미도리야가 훌쩍 코를 들이켰다.

울지마, 멍청아. 소년이 불길에 그슬린 미도리야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이딴 건 하나도 안 아파.

그대로 서로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잡은 소년들이 어둔 밤길을 냅다 달렸다. 얼마를 달렸는지도 모른다. 불타버린 마을을 지나, 좁은 도랑을 지나고 이따금씩 둘이 어울려 놀다가 해가 지는 것도 잊어버리곤 했던 마을 뒷산의 험한 숲길을 지나갔다. 도랑을 뛰어 넘다 미도리야는 그만 신발을 잃어 버렸고,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것이 없다면서도 소년은 미도리야를 등에 업고 발목까지 차오르던 도랑의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이윽고 새벽 푸른 하늘 저편에서 햇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 무렵에야 이웃 마을에 도착했다.
급하게 차려진 구호소의 천막 밑은 마을을 떠나온 피난민으로 북적거렸다. 자꾸만 훌쩍훌쩍 눈물을 떨어뜨리는 미도리야더러 시끄럽다 타박을 주던 소년은 잠깐 어른들이 있는 편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어디에서 사탕 하나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땅콩맛이 나던 사탕은 달고 맛있었다. 미도리야는 그때만큼 맛있던 사탕을 후에 나이를 먹고 난 후에도 먹어보지 못했다. 왜 캇쨩 사탕은 없냐고, 왜 나만 주냐고, 어른들하고 무슨 얘길 그렇게 오래 했느냐고 묻는 걸 까먹어버릴만큼 맛있고 달콤한 사탕이었다. 소년이 저멀리 해가 뜨는 하늘 동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데쿠.

벌써 20년이 지나버린 지금에도 미도리야는 그때 소년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의 온전한 이름 넉자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그때 소년의 얼굴에 대해서는 전혀 까먹지 않았다.  천천히 밝아오던 햇살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그 근사한 옆얼굴… 날카로운 눈매를 촘촘하게 덮고 있던 속눈썹은 빛을 받아 옅은 갈빛으로 반짝거렸고, 얇고도 선이 준수했던 그 입매는 다 자란 어른처럼 깊은 음영을 그리고 있었다.
제 오른손 안에 잡혀있던 미도리야의 손을 소년은 오래도록 꽉 움켜잡고 매만지작 거렸다. 마치 그 손을 오래 기억이라도 할 것처럼, 오랜 이별을 앞두고 이 손을 잊지 않겠다고 제 기억 속에 또렷하게 새겨 놓기라도 하는 것마냥.

언젠가 꼭 찾아낼 거니까.

소년이 떨리던 입술 끝을 꽉 씹으면서 말했다. 미도리야는 그때 소년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캇쨩은 근사하고 멋졌으니까, 늘 나보다 더 강했으니까, 우는 법을 모르는 멋진 친구였으니까.

살아있어. 어떻게든.

그 말을 남기고 소년은 오래도록 잡고 있던 미도리야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잡을 새도 없이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 발 늦게 미도리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쁘게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캇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에 미도리야를 데리러 온 상점의 어른들이 둘을 다 거둘 수가 없었노라고 말해주었다. 눈이 붉은 소년이 제 친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었다. 가게 일을 돕는 데엔 저보다 저 녀석이 적격일 것이라며, 저 녀석의 이름은 미도리야 이즈쿠라고,

내가 아는 일곱 살 중에 가장 씩씩하고 용감한 녀석이라고.

“캇쨩…”

젖은 속눈썹을 들어올리며 미도리야가 번쩍 눈을 떴다. 곧장 침상을 털고 일어나는 대신 커다란 두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던 것은 제 시야에 보인 천장이 낯설었던 탓이다. 늘 보던 것과 달리 금실로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등이 천장의 설주에 매달려 바람결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부스스 까치집이 앉은 덤불 같은 머리칼을 헤집어 보다 미도리야는 아, 했다. 이제 자신이 누워 잠을 청하는 이곳은 더 이상 우라라카의 작업장이 아니었다. 미도리야가 붉은 문양이 난잡하게 얽혀 있는 둥그렇고 좁은 창을 쳐다보며 우물거렸다.

“난춘정…”

난하고 잡한 봄을 파는 곳이라고 하였었다.

기녀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기루妓樓, 주인이 기거하는 본채와 그밖에 별채까지 난춘정은 크게 세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별채는 새로 드는 기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장소라고 알려준 사람은 머리가 붉은 어떤 사내였었다.
기루의 경호를 맡고 있다던 남자는 키리시마 에이지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기루의 경호를 맡고 있다던 키리시마는 그 호쾌한 인상만큼이나 붙임성이 좋았다. 안내를 받아 별채로 향하는 동안 미도리야는 이 난춘정이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은 이 성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기루로 성장했는지에 대한 역사 제반을 전해 들었다. 그 녀석이 워낙 수완이 좋아서. 문을 열어주면서 키리시마는 쑥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덧붙였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었다. 그 녀석은 최고가 아니면 절대 자기 주머니를 열지 않으니까.

난춘정의 주인은 자신을 그저 바쿠라고만 소개했었다.

「어차피 본명 같은 거 알아봐야 서로 쓸데없으니까.」

물건이 서느냐거나 의복 아래부터 까보라는 무례한 소리를 했던 것과 달리 주인은 공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는 칼 같았다. 쓸데없는 질문도 없었다. 미도리야의 본명이 무엇이며 어느 지역의 출신인지를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주인은 금화 한 주머니를 발치 앞으로 툭 던지며 무심한 투로 말했다.

「대가리 새빨간 건달패 녀석이 네 놈이 묵을 곳이 어디인지 알려줄 거다. 쓸데없는 건 물어보지마. 뒤진다. 괜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마. 그래도 뒤진다.」

기루에는 본래 사연 없는 이들이 없고, 그네들에 대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품는다거나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바닥의 오랜 법칙이었다. 그간 춘화란 걸 그린답시고 이런저런 여인을 다 만나보았으니 미도리야도 그 정도 쯤은 알고 있었다. 선금이랍시고 던져준 주머니를 주섬주섬 챙겨드는 미도리야의 모습을 흘끔 바라보다 주인은 이내 발길을 돌려 버렸다.
가서 쉬어, 멍청아. 본채의 마루에 오르면서 주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일부터는 정신도 없이 바쁠 테니까.

주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도리님 맞으시지요? 다른 기녀들을 물리치고 오느라 많이 힘들었답니다. 제가 미도리님의 그림을 워낙 좋아해서요. 그런데 어머나, 이렇게 귀여우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호호…”

별채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어디에서 소식이 알려진 것인지 잠옷 차림의 여인이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방에 걸려있던 희고 단정한 장옷에 팔을 꿰고 있던 미도리야는 갑작스러운 여인의 습격에 그야말로 질겁을 했다. 여인은 벗은 몸을 가리느라 야단이 난 미도리야를 보면서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천천히 하시라면서도 여인은 자신의 사심을 딱히 감추지 않았다.

“지금껏 미도리님이 그린 화폭은 한 장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답니다. 어찌나 구하기 힘들었는지 몰라요. 특히 월야지인은 제가 무척 좋아하는 그림이어요. 달빛 아래에서 후배위로 교접을 하는 남녀라니, 아아, 얼마나 낭만적인지…! 미도리님께서 이 난춘정에 기거하시면서 그림을 그리신다면 그 첫 작품은 응당 이 난춘정의 으뜸 꽃이라는 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 이리 오세요. 제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개점만 했다 하면 반 식경만에 동이 나곤 했다 하였으니 이 난춘정에 그림 한 점 안 산 여인이 없을까 싶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미도리야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 했었다. 여인은 목까지 빨개진 미도리야의 반응엔 아랑곳 하지 않고 손목까지 잡아끌며 채근을 했다. 손목을 끌려 거처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곳곳에서 문이 열리며 기녀들이 분한 얼굴로 여인을 시샘했다. 여인은 의기양양했다. 개선장군이 따로 없을 걸음걸이로 제 방의 문을 열어젖힌 여인은 미도리야가 화구통을 다 펼쳐놓기도 전에 스르륵 허리끈을 풀었다. 눈둘 데를 잃은 미도리야의 앞에서 색이 고운 입술이 교태롭게 웃었다.

“사내를 부를까요, 아니면… 저 홀로?”

그대로 그 방에서 세 장의 그림을 그렸다. 이런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해 허둥거리던 미도리야도 화폭을 펼치자 이내 평상심을 되찾았다. 여인 홀로 그린 첫 장을 다 그릴 즈음에 단골이라는 사내가 방으로 찾아왔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통속적인 춘화대로 남녀의 교접을 담아냈다. 단단히 겹쳐진 두 남녀가 가쁜 호흡을 반복하는동안 미도리야는 벼루에 먹을 갈고 빈 화폭에 부지런히 붓을 놀렸다. 완성된 그림을 확인한 여인이 옷차림을 정돈할 틈도 없이 반색을 했다.

“어머나, 이렇게 색이 고운 그림이라니… 역시 미도리님이셔요. 세상에 이토록 난잡한 광경을 이만큼 곱게 그리는 분이 또 계실까…! 이 그림을 제 방에 걸어두어도 될까요? 가격은 어찌 되지요?”

여인도, 오후에 들른 다른 방에서도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여인들은 미도리의 새로운 그림을 위해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고, 미도리야는 기루의 일을 돌보는 일꾼들이 미리 쳐준 붉은 장막 뒤에 숨어 방해하는 일 없이 맘껏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도 장안 최고라는 난춘정은 가히 최고의 공간이었다. 여인이 옷고름을 풀고 사내 혹은 드물게 같은 여인과 어울리며 살을 겹칠 때마다 미도리야는 숨을 죽이고 장막 뒤에 웅크려 앉아 붓을 놀리며 바쁘게 그 광경들을 화폭 안에 담아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며칠이 흘러가면서 미도리야는 기루에서의 작업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머무는 환경 역시 이전과는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기녀들은 언제나 협조적이었고 적극적이었다. 아침마다 키리시마가 별채에 들러 혹시 부족한 것이 없는지 꼬박꼬박 확인했고 어떤 때는 말을 하지 않아도 종이와 먹물을 사다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바쿠님요? 그 분은 늘 바쁘셔요. 게다가 기루에는 얼씬도 안 하시거든요. 이런 일을 하는 분이시면서 엄청 싫어하신다니깐…”

처음 문을 열 때부터 난춘정에 있었다던 기녀는 나이만큼 지혜롭고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이곳에 드나들던 손님과 사랑에 빠져 이제 다음 달이면 일을 그만두고 그와 함께 혼례를 올리기로 했노라던 여인은 밝은 인상만큼 미도리야에게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여인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난춘정과 얽힌 일이라면 저자의 사사로운 소문과 사대부 집을 은밀히 떠도는 뒷이야기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보통 바깥에 정인이 있거든. 일은 내버려두고 바깥에 있는 정인 만나느라 얼굴을 안 내비치는 거야. 근데 바쿠님은 아니에요. 진짜 이상하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고 기루의 주인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인을 둔 적이 없다니까? 아, 물론 여인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죠. 근데 즐기질 않는달까, 마음을 주질 않는달까… 그래서 그런 소리도 있었어요.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호호… 왜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잖아요. 우리 기루에 남자아이는 없지만.”
“……”
“바쿠님 연모하는 애들만 안 됐지, 뭐. 저런 성격인데도 늘 애간장 태우는 애들이 있다니깐. 꽤 미남이잖아요? 근데 아무리 연심을 표현해도 눈 하나 까딱을 안 해. 아, 난 바쿠님 같은 남자는 별로예요. 화가님이나 우리 애인처럼 귀여운 남자가 좋은걸, 후후.”

여인은 늘 애인과 함께 있을 적마다 미도리야를 불렀다. 곧 차릴 신방에다 몇 폭 걸어두고 싶노라며 미도리야의 눈앞에서 애인과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면서도 여인은 궁금해하는 것에는 언제나 그 이상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바쿠님도 미도리님의 그림이라면 좋아하실 거야.”

애인의 배 위에서 천천히 허리를 저으면서 여인이 말했다.

“미도리님의 그림은, 후후… 최고거든요. 정말, 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정사처럼…”

난춘정에 온 지 열흘이 다 되었지만 미도리야는 아직까지 주인에게 그림을 보이지 못 했다. 선금은 지불 받았고, 그림이 팔릴 때마다 기녀들이 개인적으로 요금을 찔러주어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터였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궁금했다. 그 남자는 내 그림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직접 데려온 사람이니 분명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한 번쯤은 그 입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싶은만큼.

그리고 드디어 안채에서 기별이 왔다. 미도리야가 난춘정에 들어온 지 꼭 열흘 째가 되던 날이었다.

“색기가 없는데.”

눈매만큼 날카롭던 눈썹 사이를 깊게 좁히면서 바쿠고는 자신의 감상을 그렇게 소회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모아 앉아 있던 미도리야가 눈을 움찔 떨었다. 들고 있던 기다란 담뱃대를 한 모금 깊게 빨면서 바쿠고는 병풍 쪽으로 등을 기대면서 들고 있던 그림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뭐가 모자란가 했더니. 다시 그림을 탁상 위로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눈썹 사이를 또 한 번 버릇처럼 일그러뜨렸다. 선홍색 눈이 세 걸음 앞에서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미도리야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야, 너. 그리고 물었다.

“진짜 안 서냐?”

잔뜩 긴장해 있던 미도리야의 어깨가 돌연 축 늘어졌다. 기가 막혀 그랬다. 바쿠고를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샌님, 멍청이, 등신. 여인하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쑥맥에 재미 더럽게 없는 서생. 평생 이딴 데는 와본 적도 없는 벽창호. 빤하다고. 불결한 짓이라며 제 손으로 수음 한 번 똑바로 해본 적도 없겠지.”
“……”
“틀리면 어디 반박해보시든가.”

대답 대신 미도리야의 두 눈에 쓴웃음이 걸렸다. 반박할 말이 없어 그랬다. 그래, 난 어차피 경험도 없는 쑥맥이야. 미도리야가 훌쩍 코를 들이켰다. 그래도 지금까지 문제없이 그림은 잘만 팔았는데… 아니, 내 그림이 맘에 든다고 이 기루에 와서 그리라고 말한 건 당신이었잖아. 생각을 하니 억울해서 미도리야는 대거리를 하는 대신 입술을 꼭 깨물고 탁상 위에 펼쳐진 제 그림만 가만히 뚫어 보았다.
어디가 맘에 안 드는 걸까. 미도리야로서는 그 점을 알아차릴 도리가 없었다. 난춘정에 들어와 기녀들의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벌써 20점의 춘화를 그렸다. 작업의 질도, 그릴 수 있는 소재도 이전보다 만족스러워 평소보다 작업 속도가 빨라진 덕분이었다. 스스로 소회해보아도 썩 나쁘지 않았고, 그림의 대상이 되어준 기녀들도 모두 미도리야가 그려준 그림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왜, 대체 뭐가 부족해서…
바쿠고가 길게 뻗은 담뱃대 끝을 깊게 빨면서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면 그려주는대로 처받을 것이지 뭘 씨발 별로라고 지랄이냐는 얼굴인데, 지금.”

숲색 눈이 소리 없이 움찔 떨었다. 찔려서 그랬다. 뭐, 상관은 없지. 말을 삼키며 바쿠고가 비스듬히 기댔던 자세를 똑바로 돌려놓았다. 오늘도 검고 화려한 장옷 자락의 벌어진 틈을 따라 드러나 있던 붉은 문신이 미도리야의 눈앞에서 언뜻 보였다 다시 옷자락 밑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건 장사라고, 멍청아.”

바쿠고가 탁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이딴 건 저잣거리에선 여전히 먹히겠지. 근데 나는 내가 팔 물건이 고작 이 따위 수준이면 존나 곤란하거든. 이딴 걸 그리라고 그쪽하고 그 볼 뻘건 장사꾼 여자한테 금화를 한 상자나 준 게 아니라고, 씨발.”
“예, 그건… 그렇지요, 네.”

우물거리며 미도리야가 소리없이 눈 끝을 휘어트리며 웃었다. 당황해서 그랬다. 그렇게까지 돈을 많이 받았다고는 말 안 했었잖아, 우라라카군…
그래도 모르겠다. 미도리야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색기가 없다고 말해봤자, 내 그림의 어디에서 색기가 부족한 건지 나는 모른단 말이야. 말마따나 이런 쪽의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냈을 뿐이니 미도리야로서는 바쿠고가 제시한 그 색기란 게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부족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선홍색 눈이 입술을 꼭 모으고 제 그림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미도리야의 옆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돌연 무슨 변덕이 돋았는지 느닷없이 자리를 털고는 앉아있던 미도리야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됐고 일어나.”
“? 예? 하지만 바쿠님, 이 그림이 맘에 안 드신다고…”
“아, 말 존나 많다. 일어나라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사람은… 예측을 다 해볼 사이도 없이 또 한 번 옆구리를 걷어차인 미도리야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장비 챙겨. 먼저 몸을 돌린 바쿠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안채의 문을 크게 떠밀면서 선홍색 눈이 가볍게 픽 웃었다.

“극락을 보여줄 테니까.”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을 곳이었다.

바쿠고의 등을 따라 허겁지겁 좁은 계단을 타고 기루의 지하로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짙은 사향내가 후각을 찔렀다. 햇볕 하나 똑바로 비치지 않는 지하에서 의지할 빛이라곤 복도를 따라 걸린 붉은 등갓뿐이었다. 칸칸이 나뉘어 있는 위와 달리 지하는 넓었고, 붉은 장막을 사위에 덧댄 칸들이 정가운데의 너른 터를 향해 열려 있었다. 칸마다 이미 자리한 이들이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였지만 입구의 반만 가려둔 장막 탓에 얼굴까지는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훤히 열린 정가운데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연회장이다. 한 눈에 알아본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굳은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기루마다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와본 바는 없었다. 기루에도 한 번 들러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연회장도 미도리야에게는 처음이었다. 칸 안쪽으로 언뜻 보인 발은 사내의 것이 가장 많았지만 더러는 여인과 함께, 혹은 여인끼리 있는 듯도 했다.

“저기 바쿠님, 여기는 대체…”

미도리야가 앞서 걷던 바쿠고의 등 뒤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어쩐지 소란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아 절로 목소리가 오그라들었다. 바쿠고가 비어있던 칸의 장막을 손끝으로 걷어내며 가볍게 대꾸했다. 내 돈줄.

“아무나 드나드는 데는 아니지. 영광으로 알아, 멍청아.”
“아니, 저는 딱히 이런 데는… 힉!?”

우물거릴 사이도 없이 그대로 손목을 잡혀 장막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힘에 떠밀려 반쯤 주저앉는 바람에 미도리야는 하마터면 들고 온 화구들을 죄 마루 위로 엎을 뻔 했다. 용케 바쿠고의 가슴팍 쪽으로 쓰러진 덕에 참사는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한 것이 미도리야의 귓가에 낮게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감히 나랑 접을 붙고 싶으면 속옷 정도는 벗고 덤벼야지, 멍청아.”

후 낮은 숨결이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간질이듯 쏟아졌다. 힉. 어깨를 좁힌 미도리야가 새붉어진 제 목덜미를 오른손으로 황급히 가리면서 부리나케 바쿠고의 가슴팍에서 떨어졌다. 그 반응에 바쿠고가 입꼬리 끝을 픽 밀었다. 암만 봐도 놀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쿠님은 저를 놀리시면 재밌으신가요…?”
“어, 존나.”
“……”
“됐으니까 넌 그 잘난 붓이나 놀리라고. 시작한다.”

어찌 그렇게 제멋대로냐고, 그런 걸로 사람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고 두어 마디 해보려던 말이 그대로 미도리야의 혀 밑으로 쏙 숨어 버렸다. 바쿠고의 턱짓을 따라 숲색 눈이 무대처럼 훤한 지하의 정중앙을 쳐다보았다. 모든 손님들의 입장이 끝난 모양인지 복도 쪽에 장막을 내린 일꾼이 정가운데로 나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흔들고 물러났다. 무대 뒤의 그늘 쪽에서 검은 머리칼을 어여삐 틀어 올린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미도리야가 긴장한 손끝으로 붓을 쥐고 화폭을 펼쳤다. 극락의 시작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그 탓인지 여인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더러는 침을 삼키거나 헛기침을 하기도 했고, 어디에서는 벌써 불이라도 붙은 모양인지 옅은 교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먹을 가는 시간도 아쉬워서 벼루에 검은 먹물만 짜놓으면서도 미도리야의 눈은 여인에게 온통 집중해 있었다.
여인이 은사銀絲로 뜬 얇고 투명한 옷감을 천천히 몸에서 끌어내렸다. 다른 어떤 때보다 미도리야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감질날 듯 천천히 끌어내리는 옷자락을 따라 드러나는 하얀 굴곡, 조금은 긴장한 듯 발갛게 상기된 여인의 얼굴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욕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웠다.
사람은 의복을 벗어던질 때 가장 솔직해진다. 의복으로 꾸밀 수 없는 그 몸의 굴곡과 근육의 짜임, 뼈대의 생김만큼 성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마른 침을 삼키면서 미도리야가 벼루에 찍은 붓을 천천히 화폭 위로 가져왔다. 무대 한쪽에서 일어선 일꾼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이제는 완전히 알몸이 된 여인의 허리를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반짝 불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바쿠고가 새로 채운 담배에 불이라도 붙인 모양이었다.

여인이 양팔을 뻗으며 마루 위에 엎드렸다. 남자가 옷섶을 풀어헤치며 단단히 감싸 안은 여인의 뒤로 성난 허리를 단단히 맞붙였다.

미도리야는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이제는 어찌 하려나. 그대로 우선은 뒤로 붙어 교접을 한다면… 그래,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 마침 옆으로 돌아가 있던 여인의 올림머리는 딱 보기 좋게 헝클어져 있었다. 얼핏 구도를 가늠해본 미도리야가 하얗게 비어있던 화폭에 거침없이 선을 그어가기 시작했다. 색은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 따로 작업을 해도 상관없을 거야. 그러니 지금은 이 장면을 쫓으며 눈으로 확실히 기억해두는 게 가장 좋다. 생각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본격적으로 여인의 등 뒤를 애무하기 시작하는 남자의 모습을 똑똑히 뚫어보았던,

그때였다.

“……!?”

뒤편에서 뻗어온 손이 화폭 위로 반쯤 엎드려 있던 미도리야의 허리춤을 스르륵 감아왔다. 이 손의 주인은 이 칸 안에는 오로지 한 사내 외엔 없었다.

“바쿠님, 지금 뭐하시는…”
“입 다물어.”

어느 틈엔가 귓가에 바싹 다가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붓은 화폭 위에서 그대로 오똑 멈춰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 사람은…? 짐작도 가질 않아 반쯤 엎드려 어정쩡하게 굳어 있던 미도리야의 허리에 감겨온 팔이 맞물려 있던 웃옷자락의 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귓가에 바싹 붙은 숨결에선 담뱃잎의 옅은 풀내가 났었다. 그리고 즐거워 보였다. 마치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 안에 쥐게 된 어린 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애욕愛慾이란 녀석은 말이지. 사탕 같은 것이거든. 경험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른다고.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강렬한지. 그리하여 한 번 입을 대보고 나면 얼마나 탐하게 되어버리는지.”

옷단 밑을 비집은 손끝이 허리의 매듭을 풀어냈다. 불편한 긴장감에서 단박에 풀려난 허리가 주저앉을 것처럼 크게 떨었다. 그러나 허리를 물리기도 전에 남아있던 바쿠고의 왼팔이 그대로 미도리야의 가슴팍을 끌어안으며 반쯤 엎드려져 있던 몸을 제 품으로 붙여 놓았다.

“하지, 하지마세요…”

입술 끝을 짓씹으며 간신히 소리를 죽인 미도리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딴 거 안 해, 멍청아. 낮게 속삭인 바쿠고가 그대로 미도리야의 귓불 밑에 입술을 찍었다. 뜨겁고 축축한 입김에 절로 몸이 오싹 떨렸다. 목덜미의 연한 자리에 연거푸 입술을 찍으면서 바쿠고가 바르르 떨던 미도리야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 채로 남아있던 손가락들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천천히 밀어 넣으면서 바짝 닿은 입술이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즐기라고.

“심하게 안 해. 어떤 것도 억지로 안 열어, 멍청아. 그딴 건 씨발, 내 원칙에는 안 맞으니까.”
“……”
“네 몸을 위한 기쁨을 알려주는 것뿐이거든.”

항변할 사이도 없이 불쑥 들이친 손가락들이 돌연 다리 앞을 힘주어 잡았다. 순간 비명이 터지지 않은 것은 허리를 감고 있던 바쿠고의 손이 요령 좋게 미도리야의 입을 틀어 막아준 탓이었다.
아예 안 서는 건 아니네. 힘을 빼며 천천히 요령 좋게 주무르면서 바쿠고가 귀 뒤에서 킥 웃었다. 무대 위에서는 엎드려 있던 여인이 허리를 휘저으며 달게 떨고 있었다. 미도리야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바쿠고의 손가락들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입술 틈을 슬며시 비집었다. 그 기척에도 미도리야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게 이 연회장을 떠돌고 있는 사향내 탓인지, 한참 달아오르고 있는 저 남녀의 교접을 관음하고 있다는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제 몸을 더듬는 이 사내 때문인 것인지 미도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성감이라는 게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
“흐웁, 읍, 읍…”
“사내라고 해도 말이지. 가끔은 열린다고. 비밀 같은 게, 여인에게만 있을 것 같은 그 은밀한 틈 같은 게.”
“웁, 으웁, 읍,!”
“사람 몸이라는 게 참 웃기는 것이지. 수음하는 법도 모르는 서생이라 하여도 몸에 하나쯤은 숨기고 있거든. 가장 예민한, 농밀한, 그리하여 여인처럼 흠뻑 젖어버릴 그런 틈… 그 아무리 철벽 같은 사내라도 달콤하게 녹아버릴 그런 틈… 그런 틈이 열리면 존나, 돌이킬 수가 없다고.”
“……”
“가령 여기처럼.”

말과 함께 은근히 치열과 혀를 더듬어 오던 검지가 돌연 입천장을 느리게 긁어왔다. 동시에 바쿠고의 손 안에 잡혀 있던 미도리야의 허리가 펄쩍 뛰었다. 눈앞에 별이 튀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 긴밀한 감각들이 척추를 타고 가장 미세한 혈관들을 광증으로 헤집은 것 같았었다. 제발… 막혀버린 입새로 떨면서 미도리야가 흐리게 떨리기 시작한 숲색 눈 사이를 괴롭게 좁혔다. 젖어버린 바쿠고의 손가락들이 맵시 좋은 미도리야의 입술 틈을 유려하게 틈입하며 추삽을 했다. 그 소리마저 교접을 닮아 있었다. 바쿠고의 손 안에서 서서히 젖어들고 있던 어떤 감각처럼.

“젖었는데.”

바쿠고가 허리춤 안으로 밀어넣었던 엄지 끝을 크게 밀면서 속삭였다. 검지와 중지를 머금고 있던 입술 틈으로 밀려나온 타액이 미도리야의 턱을 타고 뚝 흘러 떨어졌다. 귓가에 붙어있던 준수한 입술이 픽 꼬리 끝을 밀었다.

“네 놈이라면 앞에 달린 물건보다는 뒤를 쓰는 게 어울리겠는데. 소질 있어. 궁금해지거든. 이 새끼 안에는 뭐가 숨었나, 뭘 숨겼기에 씨발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하나…”
“흐웁, 웁,…”
“희한해. 존나 수수하게 생겼는데,”
“웁, 으웁, 흡,!”
“괴롭히고 싶고, 울리고 싶고,”
“으ㅂ, 훕, 으웃,…”
“흥미가 생기거든.”

미도리야의 턱이 천장을 향해 크게 젖혀졌다. 그 바람에 머금고 있던 손가락들을 그만 놓쳐 버렸다. 바쿠고가 흠뻑 젖은 제 검지와 중지를 잠시 쳐다보았다. 흡족한 모양인지 잠시 가늘게 웃던 바쿠고가 그대로 젖은 자리에 입술을 겹치고 미도리야가 머금었던 제 손가락을 크게 빨았다. 밭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잔뜩 흐트러진 숲색 눈이 잠깐 의아한 얼굴로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시 표정 없이 숲색 눈을 뚫어보던 선홍색 눈이 교묘하게 가늘어졌다. 그조차도 즐거워 보였다. 사탕을 쥔 꼬마 아이처럼.

“내숭 떨던 것치고는 좋아 보이는데.”

소리를 죽여 온 말에 미도리야는 젖은 입술만 그저 버끔거렸다. 대답할 말도, 반박할 말도 찾지 못해 그랬다. 돌이켜 보면 거짓말을 잘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곤란한 듯 일그러지는 숲색 눈을 뚫어보며 바쿠고가 하, 웃었다. 좋았네.

“근데 접이라는 게 이대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미도리야가 대답 대신 잔뜩 괴로워진 숲색 눈을 소리 없이 일그러뜨렸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는 알고만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호기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바쿠고의 손 안에서 괴롭게 헐떡이고 있던 제 앞섶처럼.
이런 게 접이라면, 이런 게 정사라면, 이게 정말 육욕의 감정이고 탐심이 주는 쾌락이라면,

이보다 한 발을 더 내딛게 되면
얼마나 더… 기분이 좋을까?

무대 위의 남녀가 자세를 바꾸었다. 대답 없이 바닥을 뚫어만 보고 있던 미도리야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바쿠고가 스르륵 허리춤에서 손을 잡아 빼며 미도리야의 허리를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마주 앉은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미도리야의 턱을 잡으며 바쿠고가 입술을 기울였다. 턱, 콧날, 목덜미, 귓불… 그러나 입술에는 하지 않았다. 입술 바로 아래턱에서 이를 질근거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남은 손으로 제 허리춤을 천천히 풀어 헤쳤다.
설마. 미도리야가 두 눈을 크게 열었다. 붉게 흔들리던 등빛 밑으로 숲색 눈이 소리없이 지진하고 있었다.

“저 바쿠님, 이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것인가요?”
“그게 뭔데.”
“그, 어… 그러니까 저기 어, 저희가 이렇게 만난 목적이라든가… 말씀마따나 색기없는 제 그림에 자주 나오는 그 소재라든가… 어, 그러니까 그게 어…”
“……”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됐, …힉!?”

말을 다 어물거려 보기도 전에 허리가 바짝 다가붙었다. 느닷없이 가까워진 거리감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좁히다 미도리야는 반 박자 늦게 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두 눈을 크게 열었다. 다리 사이가… 숲색 눈이 천천히 맞붙은 허리 아래 쪽을 향해 기울었다. 그러니까 내 다리 사이가 아니라 어, 이건, 이 단단하고 뜨거운 것은 분명…

“뭐.”

선홍색 눈이 툭 되물었다. 아뇨, 그게…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이런 상황까지 와버렸어도 제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그쪽의 다리 사이가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요, 지금…

왜지? 나야 그렇다쳐도 이 사람은 왜… 난춘정의 주인이 지금껏 정인 한 번 똑바로 두지 않았다고 말해준 건 기루의 기녀들이었다. 그럼에도 침대에서 상대를 다루는 법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노라는 이야기 역시 기녀들에게 직접 들었다. 그렇다면 분명 남색을 하고 비역을 하는 취미가 있는 자는 아닐 터였다. 근데 대체 왜 나한테…
제대로 되물어 볼 틈도 없이 급하게 뻗어온 손이 또 한 번 불편하게 부풀어 있던 앞섶을 쥐었다. 이번엔 너무 급작스러워서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흡, 입을 틀어막은 미도리야의 얼굴을 잠자코 뚫어보며 바쿠고가 입매 끝을 픽 밀었다. 그딴 거 안 한댔지, 멍청아. 그리고 천천히 손을 펼치며 낮게 속삭였다.

“극락을 보여주는 것뿐이니까.”








그날, 미도리야는 몇 번이나 허리를 들썩이며 바쿠고의 손 안을 적셔 놓았다. 턱을 젖히고 헐떡거릴 때마다 바쿠고는 제 것과 제 것이 아닌 살집을 한 번에 움켜잡고 교묘하고 격렬하게 손을 놀리며 미도리야의 목덜미 곳곳에 이를 박았다.
이 잦은 입맞춤은 접을 할 때의 습관인지, 아니면 그냥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짐작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생각을 흐려 버리고 벌어져 있던 바쿠고의 장옷 자락을 힘껏 움켜잡았다. 무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 안은 남녀가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장막 곳곳에서 이제 더는 참지 못한 신음들이 노골적으로 허공을 흔들었다. 절정에 치닫는 듯 점차 높아지는 여인의 교성을 들으며 미도리야는 잔뜩 흐려진 숲색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때도 그 자국들이 눈에 밟혔다. 힘껏 움켜잡은 장옷자락 밑으로 언뜻 비쳐 보이던 붉은 문신, 불꽃처럼 당신의 가슴팍을 붉게 휘어 감고 있던 그 문신… 미도리야가 흡, 입술 끝을 뭉개며 크게 턱을 젖혔다. 끝내 참지 못한 이름들이 빗장을 비집었다.

“캇쨩, 흐, 캇쨩… 캇ㅉ… !”

긴장으로 바짝 등을 당긴 미도리야의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지러웠다. 졸음이 수마처럼 닥쳐와 미도리야는 흐린 눈결을 천천히 내려감았다. 그 탓에 보지 못했다. 제 품으로 풀썩 떨어진 숲색 머리칼을 내려다보던 그 얼굴을,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흔들리던 그 선홍색 두 눈을.

데쿠.

누군가 먼 꿈 너머로 그렇게 불렀었다, 이내 말을 흐렸다. 아니.
너일 리가 없지.

그 말조차 미도리야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중편으로)





왜 이렇게 길었나 했더니 공미포 1만 2천자 ㅋㅋㅋ.ㅋ.ㅋ.ㅋ. ㅜㅠㅜㅜㅜ 수위가 매우 간당간당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15세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스르륵 올려봅니다... 어쨌건 즐겁게 읽어주신 덕분에 생각보단 일찍 들고 왔다며ㅠ0ㅠ999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 다음 편도 힘내오겠심동////// 하지만 이번에도 어쩐지 분량조절에 실패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


+ 아니 왜 애들 나이 헷갈린 ㅠㅠㅠㅠㅠㅜ열 살이 아니라 일곱 살입니다 흑흑...ㅠㅜ

?
  • 라일락 2017.07.09 02:26 SECRET

    "비밀글입니다."

  • 까까 2017.07.09 03:54 SECRET

    "비밀글입니다."

  • 고기방패 2017.07.09 08:28
    헉ㄱㄱ..ㅠㅠ 사랑해오ㅠㅠㅠ
  • 럽잇 달나라군 2017.07.09 16:50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7.07.10 21:50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께 2017.07.11 00:03 SECRET

    "비밀글입니다."

  • 히노 2018.06.03 03:37
    흑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 삶의 원동력이자 인생의목적.. 루카님이 짱먹으셔라...제발 행복하세요...제 행복의 이유가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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