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중세풍 판타지AU로 캇뎈
* 성에 갇힌 바쿠고 왕자님을 구하고 싶은 용사 지망생 미도리야 이야기
* 가볍습니다.
* 그냥 상중하로 스스삭

http://youtu.be/wRcSMMgFCG4





Dear My Prince

@ruka_tea















한 번 뱉은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바쿠고 가문의 오랜 가언(家言)이었다.

바쿠고 가문이 전쟁에서 올마이트를 도와 공을 세운 대가로 이 영지를 하사 받게 된 지 벌써 200년이 흘렀고, 이 가르침은 그때부터 오래도록 가문의 후대들에게 대를 거듭하며 전해져왔다.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올마이트는 검은 용을 처치하러 향하던 오랜 원정길에서 그만 고블린들이 쳐둔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고블린들은 오래도록 용의 하수인들이었다. 모험 시작부터 올마이트와 함께했던 바쿠고 검사는 우여곡절 끝에 올마이트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가다 고블린들과 결탁한 사악한 도적 무리와 마주쳤다. 바쿠고는 서둘러 올마이트를 커다란 상자 안에 몸을 숨기도록 하고 그 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도적들의 대장이 물었다.
「불꽃에서 태어난 붉은 눈의 칼잡이야. 네 몸 밑에 깔고 앉은 것이 뭐냐?」
바쿠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악어를 숨겼지. 상자를 여는 순간 네 놈들 팔다리를 전부 잘라 먹을 거야.」
도적들은 깜짝 놀라 바쿠고에게 역성을 들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 네 놈이 강의 괴물을 포획했을 리가 없어!」
상자 위로 올라온 바쿠고가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멍청이들.
「지금부터 똑똑히 잘 보라고.」
때마침 배 곁을 지나고 있던 악어에게 달려들며 바쿠고는 힘껏 검을 꽂았다. 검날은 철갑 같은 껍질을 파고들며 악어의 심장을 꿰뚫었다. 깜짝 놀란 도둑들은 줄행랑을 쳤고 바쿠고는 올마이트와 함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 가언은 오래도록 가문의 후대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내뱉은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라.

첫 번째 영주였다는 바쿠고 검사처럼 색이 밝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져 이름도 똑같이 지었다던 바쿠고 카츠키에게 이 가언은 법보다도 강한 규칙이었다. 그 말이 참이건 거짓이건 상관없었다. 바쿠고 영주의 하나 뿐인 후계자는 거짓을 말한다는 사실보다 이 말을 지키지 못할 것이 더욱 무서웠다.

「말에 책임을 못 지면 벌을 받아 불지옥에 떨어져 버리거든.」

엄마는 자주 그렇게 겁을 줬었다. 더불어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어린 영웅을 위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성 안에 갇힌 왕자님이면 우린 널 가둔 사악한 마법사겠네, 아하하하― 세상에, 재밌잖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이 상황을 유난히 즐거워했다. 늘 어른인 체 허세를 부리던 아들에게 또래 친구가 생긴 게 좋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곤란한 게 즐거운 건지. 어쨌건 엄마와 아빠는 이 거짓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조력자였다. 바쿠고에겐 두 사람의 도움이 매우 절실했다. 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한다. 더불어 바쿠고는 영웅을 지망한답시고 성에 쳐들어온 이 꼬마 멍청이가 사실 퍽 맘에 들었다.

「너는 이제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성으로 찾아와야 해.」

사악한 마법사처럼 웃으면서 엄마는 미도리야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내 아들… 아니아니, 카츠키를 구하고 싶다면 말이지. 아하하하…!」

엄마의 연기가 얼마나 실감 났으며, 사실 영주 부인이 아니라 왕립 극단의 배우가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바쿠고의 소회는 잠시 미뤄두도록 한다. 중요한 게 아니니까. 바쿠고가 왕자라고 믿어버린 것처럼 미도리야는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어버렸다. 대체 어느 동화의 사악한 마법사가 자신이 가둔 인질과 인질을 구하러 온 용사에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쿠고는 그런 설정의 오류 같은 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성에서 또래를 만나본 적이 없었던 영주의 아들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미도리야는 일주일에 세 번씩 성으로 찾아왔다. 엄마의 말 그대로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도리야는 이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무엇이건 싫증을 잘 느꼈던 바쿠고와 달리 미도리야는 끈기가 있었고, 저가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선 언제나 완고했다. 미도리야의 세계 속에서 바쿠고는 성 안에 갇혀버린 왕자님이었고,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매일 찾아와 얼굴을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처럼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미도리야는 왕자님을 가둔 사악한 마법사의 요리사가 구워준 맛있는 쿠키를 먹으면서, 사악한 마법사가 왕자에게 마련해준 채광 좋고 널따란 방 안에서 바쿠고와 퍼즐 맞추기를 하거나 칼싸움 상대가 되어주다 저녁을 먹기 전이면 돌아갔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친구놀이와 다름없는 게 가끔 기가 막히긴 했지만 바쿠고는 단 한 번도 미도리야에게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퍼즐 맞추기나 칼싸움은 같이 해줄 상대가 없으면 영 심심한 것이었다. 성안의 따분한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언젠가 자신을 구하겠다는 꿈에 취해있는 어린 영웅 쪽이 바쿠고는 훨씬 더 재밌고 흥미로웠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왜 왕자님이라고 부르면 안돼?」

미도리야가 두 번째로 다시 성에 찾아왔을 때, 바쿠고는 먼저 존대와 자신에 대한 호칭부터 조정했다. 미도리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 큰 눈을 끔벅거리면서 바쿠고를 항변하듯 쳐다보았었다. 그 눈에 마음이 약해질까봐 괜히 딴 데다 눈을 돌리면서 바쿠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이번에도 거짓말이었다.

「멍청아, 잡혀온 왕자한테 계속 왕자라고 부르면 날 잡아가둔 마법사가 좋아하겠냐? 너도 봤지. 얼마나 못되게 생겼는지.」

못되게 생긴 사악한 마법사란 당연히 영주의 부인이자 이 영지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이라던 엄마를 일컫는 것이었다. 까닭을 알 리 없는 미도리야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풀죽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왕자님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된 훗날까지도 미도리야는 자신이 좋은 것에 대해 감추거나 부끄러워하는 법을 몰랐다. 부끄러운 건 오히려 그 칭찬의 주체가 되어 있던 바쿠고 쪽이었다. 미도리야가 일관적이었던 것처럼 바쿠고는 녀석의 칭찬에 대해선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도무지 내성이 생기질 않았다. 일곱 살 때부터 여덟 살이 되고 열 살을 지나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들던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캇쨩은 진짜 왕자님 같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 그렇게 보여.」

열다섯 살은 그저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을 줄만 알았던 어린 나무가 모양을 갖춰가는 때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던 변화들이 조금씩 소년들의 안에서 비밀스러운 씨앗처럼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변했고 키가 자랐다. 미도리야도 미도리야였지만 바쿠고는 둘 사이에 미미했던 간격을 조금씩 더 벌려 놓았다. 미도리야는 저보다 키가 부쩍 자라고 골격이 변하기 시작한 바쿠고를 자주 올려다보았다.
이젠 칼을 맞대고 싸움을 해도 힘과 체격에서 승부가 갈렸다. 아무리 미도리야가 용사를 꿈꾸며 매일매일 수련을 해도 이길 수 없을 뭔가가 바쿠고에게 있었다.

「하, 데쿠새끼는 그렇게 약해빠져서 마법사 쓰러뜨릴 수나 있겠냐?」

바쿠고가 열다섯 살 생일을 지날 무렵부터 둘은 자주 뒤뜰에 나가 놀았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에게 매일 같이 떠밀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다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대장간 아저씨가 깎아준 나무 검을 바쿠고에게 휘둘렀다. 그래도 좀처럼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바쿠고가 걸음마를 뗄 적부터 이 성에서 가장 용맹한 검사라는 기사단장에게 매일매일 검술을 배우고 있다는 걸 미도리야는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바쿠고가 갇혀있는 왕자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캇쨩은 이렇게 검을 잘 쓰는데 왜 마법에 걸려버린 걸까?”

미도리야가 물어볼 때마다 바쿠고는 뜨끔했지만, 지난 8년동안 거짓말은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진화해 있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미도리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암만 검을 잘 써도 마법이랑은 관계없어, 멍청아. 것도 모르냐? 올마이트처럼 강한 용사도 사악한 마법사한테 죽을 뻔 했잖아.”
“아, 그렇구나! 맞아. 그랬었지!”

이젠 더 이상 일곱 살 꼬마가 아니어서 미도리야도 바쿠고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무작정 믿지는 않았다. 그래도 올마이트 얘기만 꺼냈다 하면 미도리야는 일단 믿었다. 하물며 바쿠고의 말이었다. 미도리야가 그 큰 눈을 끔벅거리면서 저에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려줄 때마다 바쿠고는 점점 더 거짓말에 능숙해졌다. 조금씩 더 주도면밀해지던 바쿠고의 거짓말만큼이나 미도리야는 궁금한 게 늘 많았다.

“캇쨩은 언제부터 이 성에 있었어?”
“날 때부터.”
“그럼 날 때부터 저주를 받은 거야?”
“아마.”
“캇쨩은 왜 갇힌 거야?”
“잘 생겨서.”
“맞아, 캇쨩은 진짜 잘 생겼으니까…! 미남도 고생이 많구나.”

…그걸 믿냐, 너는? 그런 소리를 하는 대신 바쿠고는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귀가 뜨거워서 그랬다. 거짓말이 들키는 것보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이 제 귀가 붉어져 있던 걸 알아차리는 게 바쿠고는 몇 배는 더 싫었다.
얼른 구해주고 싶은데. 숲색 눈이 서글프게 웃었다. 또 한 번 양심의 가책이 가짜 왕자의 가슴을 크게 후려쳤다.

“캇쨩도 이 성을 나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같이 숲에서 사냥도 하고, 더 먼 곳으로 모험도 함께 갈 수 있을 텐데.”

미도리야는 유난히 눈이 컸다. 그 큰 눈을 흔들며 울기 시작하니 거절을 못해 결국 편지를 들고 왔다던 행정관의 마음을 바쿠고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숲색 눈은 너무 크고 깊었다. 마치 수많은 비밀들을 숨기고 있는 깊고 깊은 연못 같아서, 너무 많은 말과 감정들이 그 수면 깊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만 같아서 바쿠고는 그 눈에 파문이 일 때마다 마음이 온통 소란해졌다.
일곱 살 때 처음 만나 이젠 녀석이 성을 드나든 지도 8년이 되었지만 이 눈만큼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눈이 젖어들기라도 하면 바쿠고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마다 진실을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이 혀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다 말하고 싶었다. 멍청아,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캇쨩을 진작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흐… 미안.”

나는 사악한 마법사에게 감금된 왕자 같은 게 아니라고, 네 놈이 살고 있는 영지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라고. 용 같은 건 만난 적도 없다고. 다 허풍이고 거짓말이었다고.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 나는 너를 속였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제는 8년이나 지나버렸다. 돌이키기에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에도 너무 긴 세월이었다. 거짓말을 할 바엔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온 바쿠고의 15년 평생에 이만큼 오랫동안 속여 본 상대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미도리야만이 유일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매일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얼굴을 보고 싶은 것도.
그래도 심적 부담과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이젠 한계점을 돌파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은 작은 것에도 민감해지고 부풀리게 되는 시기다. 대체 언제까지 이 망할 거짓말을 계속해야 할까. 바쿠고가 저만치에서 등을 돌리고 바닥에 떨어진 자기 검을 집어들던 숲색 머리칼을 말없이 뚫어 보았다. 둥그렇게 휘어진 등을 따라 일곱 살이 아닌 열다섯 살 소년의 뼈대가 마치 빚은 것처럼 선명히 그 골격을 드러냈다, 이내 사라졌다.

“그래도 매일 캇쨩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

숲색 눈이 이 편을 돌아보며 흐, 웃었다. 그 바람에 바쿠고는 몰래 훔쳐보던 시선을 돌려놓는 타이밍을 그만 놓쳐버렸다. 좋기는 뭐가, 등신 새끼가. 괜히 뜨끔해서 바쿠고는 일부러 콧잔등을 울컥 구기며 역정을 냈다. 한 박자 뒤늦게 눈을 돌린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데쿠 주제에, 아직도 꿈만 꾸는 저 등신 멍청이가,

대체 언제 저 따위로 자랐지.

요즘 들어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에 자꾸만 눈이 갔다. 이를테면, 데쿠 녀석의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고 곧다든가 녀석의 셔츠를 조이는 끈이 유난히 헐겁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망할 셔츠는 어떤 거지같은 직공이 만들었는지 미도리야에게는 대체적으로 품이 조금 컸고, 미도리야는 답답한 게 싫은 모양인지 가슴팍을 고정해주는 끈을 늘 헐겁게만 묶어두었다. 체구에 비해 손과 발이 약간은 컸던 소년은 뼈대의 모양도 짙고 깊었다. 미도리야가 호흡을 뱉고 삼킬 때마다 끈이 헐거워 살짝 벌어진 셔츠 틈 위로 쇄골은 짙은 뼈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바쿠고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낯선 기분에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밤하늘보다 깊은 아득한 눈빛을 숨겨놓은 것처럼 미도리야의 옷자락 밑에는 뭔가 여상스럽지 못한 것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가장 불온한 비밀이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바쿠고가 울대를 크게 밀었다. 하마터면 욕을 할 뻔 했다. 이런 미친.

벗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저 데쿠새끼를.

진짜 몹쓸 마법 같은 거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저 등신이 하도 마법에 걸린 왕자 어쩌고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홀려 버린 지도 모른다. 이런 걸 현자의 탑 마법사들은 뭐라고 하더라… 그래, 최면. 최면에라도 걸린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용사놀이에 맞춰주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졌다 거나.
거짓말을 너무 해서 대가리가 돌아버린 거지.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의아한 얼굴을 한 미도리야를 그대로 두고 바쿠고는 훌쩍 몸을 돌렸다. 미도리야가 대꾸 없이 뒤뜰을 벗어나는 색 밝은 머리칼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머리 위로 석양이 짙게 퍼지고 있었다. 돌아서던 누군가의 귀처럼 붉은 하늘이었다.









*

미도리야는 이제 더 이상 용사를 꿈꾸기만 하는 일곱 살의 어린 꼬마가 아니었다.

일곱 살에겐 너무 무겁고 버거웠던 목검은 이제 제 몸인 것처럼 가벼웠다. 군살이 사라질 날이 없던 손은 또래보단 거칠었지만 대신 몸 곳곳에 노력의 증거처럼 희미한 근육들이 맵시 좋게 나타났다. 샘물까지 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이전과 달리 숲을 넘어 더 먼 곳까지 달려갈 수 있었고,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어 봐도 손이 닿지 않던 집 앞 떡갈나무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침마다 미도리야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그 나무 위로 올라가 숲의 물결을 뚫고 솟아오르는 일출을 바라보고는 했다.

열다섯은 그런 나이였다. 지금껏 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변화들이 안팎에서 바람처럼 불어오는 나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괜히 웃음이 나는 그런 나이.

이제 미도리야는 막연히 꿈만 꾸던 꼬마가 아니라 그걸 이룰만한 힘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소년이었다. 해가 저물고 다시 뜰 때마다 미도리야는 조금씩 더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키가 자랐고, 사냥을 배웠다. 그래도 사악한 마법사의 저주를 어떻게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선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캇쨩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지금껏 몇 번이나 해봤지만 미도리야는 바쿠고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바쿠고는 날 때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말했다. 아마 기억도 하지 못할 거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미도리야가 저주를 푸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된 건 열다섯 살, 생일이 며칠 남지 않았던 7월의 초순이었다.

그날 미도리야는 성에 들어오기 전에 대장간 아저씨에게 검 한 자루를 선물 받았었다. 지금까지의 가짜 목검이 아닌, 진짜 검이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열다섯 번째 생일을 위한 선물인데 너무 일찍 만들었노라며 아저씨는 괜히 코끝을 긁으며 딴전을 피웠고, 미도리야는 너무 기뻐서 검을 끌어안고 그대로 성으로 달려오다 돌부리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었다. 얼른 바쿠고에게 이 검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올마이트도 부럽지 않았다.
이제 이 검으로 캇쨩을 구할 수 있어. 미도리야의 가슴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계단 두서너 개씩 한꺼번에 건너뛰며 바쿠고의 방으로 가는동안에도 설렘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사악한 마법사를 무찌르고 왕자님을 구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캇쨩은 저주 푸는 방법을 모를 텐데… 그것 하나가 미도리야에겐 유일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바쿠고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니, 멍청아. 알고 있는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새로운 검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무심한 투로 말했다. 쏟아질 듯 크게 열린 숲색 눈이 바쿠고를 향해 끔벅끔벅 했다. 당황하거나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마다 미도리야는 흔히 이런 얼굴을 했었다.

“알고 있다니, 캇쨩… 저주 푸는 방법? 진짜? 근데 왜 얘기 안 해줬어?”
“아, 귀찮으니까.”

뭘 그딴 걸 물어보느냐는 얼굴로 바쿠고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보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새로운 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검날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며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데쿠새끼 주제에 존나 좋은 거 받았네. 중얼거리던 바쿠고가 검날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샛길로 굴러 떨어졌던 화제를 다시 길 위로 돌려놓았다.

“저주 푸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있지.”

미도리야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뭔데? 쏟아질 듯 크게 열린 숲색 눈을 담담히 돌아보며 바쿠고가 남아있던 말을 툭 밀어냈다.

“키스.”
“……”
“키스라고, 멍청아. 동화책도 안 보냐?!”

아, 그러고 보니. 미도리야가 멍하니 열려있던 숲색 눈을 끔벅거렸다. 동화책에서 저주를 받은 공주님은 어쩐지 늘 키스를 받으면서 눈을 떴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이제 바쿠고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버리는 어리고 순진한 일곱 살 꼬마가 아니었다. 영주의 아들이 사악한 마법사에게 납치당해 갇혀버렸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을 지언정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렇게 쉽다고?”

세상에. 믿을 수가 없었다. 저주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풀리는 거였다니.

“진짜? 정말로? 사악한 마법사를 이겨야 한다거나,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저주의 성물 같은 걸 부숴야 한다거나, 험하고 험한 산을 몇 개씩 넘어가서 저주를 풀어줄 물건 같은 걸 찾아오거나 그런 게 아니고?”
“아, 진짜라니까 뭐. 왜. 싫냐? 안 믿기냐? 안 믿기면 말든가.”
“아니, 어… 말겠다는 뜻은 아니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억울했다. 그럼 나는 이제까지 대체 뭘 한 거지? 갈피 잃은 숲색 눈이 지진처럼 진동했다. 숲색 눈에 번지는 파문을 말없이 뚫어보다 바쿠고가 그때껏 들고 있던 미도리야의 검을 한쪽으로 툭 던져 놓았다. 그리고 슬며시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미도리야 쪽을 흘깃거리던 선홍색 눈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였다.

“못 믿겠으면 직접 해보든가.”
“……”
“뭐건 안 해보는 것보단 낫잖아, 멍청아. 주제에 날 구해준다고 오만 난리는 다 치더니 그것 밖에 안 되냐?”

미도리야는 밝고 씩씩한만큼 차분하고 신중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극이 들어오면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들어보니 바쿠고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맞아, 나는 캇쨩을 구하겠다고 했는데.

널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나 간단한 거였다니.

마침내 미도리야는 마음을 정했다. 아직 퍽 믿기지는 않았지만 뭐건 안 해보는 것보다는 시도라도 해보는 쪽이 더 나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떼면서 결의를 삼킨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도 의심의 싹은 아직 완전히 다 가시지는 않았다.

“…진짜 키스만 하면 저주가 풀리는 거지?”
“어. 하, 데쿠새끼. 속고만 살았냐? 존나 못 믿네.”
“근데 키스할 줄 모르는데…”

해본 적이 없어서… 우물거리면서 미도리야가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을 긁적거렸다. 선홍색 눈이 황당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키스할 줄 모른다니, 하여튼 이 세상에 다시없을 열다섯 살이었다. 용사가 되어 왕자님을 구하겠노라며 무작정 성으로 쳐들어오던 일곱 살이 역시 평범한 일곱 살은 아니었던 것처럼.
하는 수 없지. 바쿠고가 짧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미도리야에게 가볍게 턱짓을 했다. 이리와, 가르쳐줄 테니까. 순순히 다가오던 미도리야가 안 그래도 커다란 숲색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가르쳐준다니… 캇쨩은 키스할 줄 알아?”
“야, 씨발, 당연히 모르…  흠흠, 알아.”
“? 하지만 키스를 해봤으면 저주가 풀렸을…”
“아, 또 종알종알 존나 시끄럽네. 하지 말까, 어!? 하지마? 그냥 마법사한테 당해서 아주 뒤져 버려줄까!?”
“아니! 안돼! 그럼 안돼!”

기겁한 미도리야가 양손과 얼굴을 좌우로 부산하게 흔들었다. 키스를 해봤을 리도 없으며, 하인들끼리 몰래 입술을 부비던 모습이나 몇 번 봤을 뿐이라는 사족을 덧붙이는 대신 바쿠고는 걸음을 당겨 가만히 미도리야의 앞에 섰다.
그럼 해, 멍청아. 바쿠고가 말했다. 어떻게? 미도리야가 물었다. 바쿠고의 손가락이 스르륵 미도리야의 입술 위를 더듬으며 말했다.
겹쳐.

“여기를,”

미도리야의 입술을 떠난 손가락이 바쿠고의 입술 위에 닿았다.

“여기에.”

아. 알겠어.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처럼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한 미도리야가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서 바쿠고를 향해 슬며시 얼굴을 붙였다.

두 소년의 입술이 천천히 맞붙었다.

눈을 감은 건 순전히 본능이었다. 시각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가만히 겹쳐있는 타인의 촉각은 그 어떤 것보다 예민하고 선명했다. 심장에 입을 대고 있는 것 같아.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눈짓으로 보아도 맵시가 좋았던 입술은 긴장한 듯 단단히 다물려 있었고, 그 얇게 겹친 면면이 어쩐지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밑이 시끄러웠다. 가슴이 소란스러웠다.

아. 스르륵 눈을 열면서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델 것 같아.

바쿠고는 눈을 감고 있었다. 불길 같은 선홍색 눈을 틈 없이 덮어놓은 속눈썹은 유난히 길고 촘촘했고, 색은 머리칼처럼 반짝이는 모래알을 닮았었다. 그 눈을, 그 언저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시간이 억겁처럼 길었다. 얼마나 더 오래도록 이 입술을 겹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가슴이 너무 뛰었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고 있었다.
저주가 풀리기 위한 징조인 게 틀림없어.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은 걸어둘 때에도, 마침내 풀어질 때에도 흔적을 남긴다고 들었었다. 단 한 번도 마법사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흐,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켜보다 미도리야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술을 겹친 채로 우물거렸다. 서로의 입술에 막혀 반쯤은 뭉개진 말이었다.
저, 캇쨩…

“저주… 풀리고 있어?”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
“저기, 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기분이 조금… 부끄러운데…”
“……”
“뜨거워.”
“……”
“간지럽고…”
“……”
“그니까 언제까지 계속 키스… !?”

마지막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뒷머리를 향해 뻗어온 손이 덤불 같은 머리칼을 힘껏 헤집었다. 동시에 어설피 맞대고 있던 입술이 단단히 맞붙었다. 천천히, 각도를 비틀면서 바쿠고의 입술이 단숨에 얼어붙은 미도리야의 입술을 가만히 벌려왔다. 아.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양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거구나. 이렇게 두근 거리는 거였다니,

키스라는 건 정말 모든 저주를 풀어주는 주문이 아닐까.

숲색 눈 위로 눈꺼풀이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넓게 열린 창 너머로 비스듬히 떨어진 햇살이 두 소년의 머리 위로 기울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진 마법처럼, 벗어날 방법이 없는 지독한 주문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하편에서)



흑흑 여러분 진짜 오랜만이지요...ㅠ 업무에 아주 송두리째 먹혀버려서 트위터도 보지 못하고 살던 가운데 틈틈이 끼적거린 걸 스르륵 올려봅니다...ㅠㅠ 사실 다음 주가 휴가라ㅋㅋ.ㅋ.ㅋ.ㅋ.ㅋ.ㅋ 휴가인데 지금 본래 있던 업무에 폭탄이 너댓 개쯤 떨어져서ㅋㅋ.ㅋ.ㅋ.ㅋ.ㅋ.ㅋ.ㅋ아마 또 다음 주초까지도 뜸할 듯 합니다.... 돌아올 땐 이 글의 하편을 들고 올게요ㅠ/////ㅠ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흑흑 ㅠㅠ

?
  • 갓루카님 2017.06.29 00:35
    루카니뮤ㅠㅠㅠㅠㅠ바쁘신 와중에 올려주시다니ㅠㅠㅠㅠㅠ저야말로 넘나 감사하죠 흑ㅎ긓ㄱ흑 루카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ㅜㅜㅜㅜ너무 재밌어요!! 루카님은 증말 금손이십니다ㅜㅜㅜㅜㅠㅠ업무폭탄 흑흑흑....화이또...ㅠㅠㅠㅜㅠㅠㅜㅠㅠㅠㅠㅜㅜㅜㅜㅠ 루카사마 진심ㅁ으로 존경합ㅂ니다..흑ㅎㄱ흑ㅎ넘 좋아효ㅜㅜㅜ
  • 이게모죠ㅠㅠㅠㅠㅠ달군 놀라마맘뮤ㅠㅠㅠ 2017.07.01 03:52 SECRET

    "비밀글입니다."

  • oop 2017.08.07 15:52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7.10.26 12:12
    으아악 사랑해요 루카님 ㅠㅠ 엉엉 둘의 첫키스 너무 옳으다.. 스윗하다.. 뭐라 말 표현할 수가 없네요.T0T!!;;
  • 캇뎈 좋아!!! 2018.01.30 11:49
    이 글 하편 언제나오나요??ㅠㅠㅠㅠㅜ 미도랴가 모든 상황을 알게되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을 보고싶은데!!!!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ㅠㅠㅠㅜㅠㅠㅠ
  • CM 2018.02.13 15:22
    으어어 루카님 ㅠㅠㅠㅠ마지막 부분에서 진짜 탄성이 절로 나왔어요 ㅠㅠ 진짜 사랑합니다..서로의 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 너무나도 예쁘게 그려져서 ㅠㅠㅠㅠㅠㅠ흑흑 오늘도 눈정화 뇌정화 하고갑니다 ㅠㅠ
  • 데쿠 2018.02.13 15:58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ㅜㅜㅜ 2018.07.23 10:32
    루카님 ㅜㅜㅜㅜ!!!!!!!! 정주행 하고 있어요,,, ㅜㅜ ㅜ ㅜ ㅜ 아 데쿠 너무 귀엽고ㅜㅜ,,, 키 키스 지문 최고예요... ㅜㅜ ㅜ ㅜ 하편은 언제 쯤 일까요,,,? ㅜ ㅜㅜ ㅜ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완결 히로아카 게시판 이용 전에 읽어주세요 XD 2016.05.24
166 연재 Baraka / 中1 12 2017.08.20
165 썰外 캇데쿠 수인물로 이런 거 보고 싶다.ssul 4 2017.08.19
164 단편 황제께서 말씀하시되 6 2017.08.17
163 연재 Baraka / 上 3 2017.08.15
162 연재 뱀파이어 헌터 x 뱀파이어로 캇데쿠.ssul (5~8) 7 2017.08.13
161 단편 착着 5 2017.08.13
160 단편 시時 2 2017.08.08
159 단편 불不 2 2017.08.08
158 연재 Baraka / 여는 글 4 2017.08.04
157 연재 뱀파이어 헌터 x 뱀파이어로 캇데쿠.ssul (0~4) 10 2017.07.27
156 완결 난춘탐려亂春貪戾 / 下 12 2017.07.22
155 단편 VIP 10 2017.07.20
154 완결 난춘탐려亂春貪戾 / 中2 6 2017.07.18
153 썰外 (번역) 지옥전차에서 좋은 느낌의 훈남 직장인 둘을 보았다 10 2017.07.17
152 단편 상냥하게 말해주세요 (for.緑谷出久) 8 2017.07.15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