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결국 중1....
* 역시 히어로x빌런으로 캇뎈합니다

* BGM / !!! <Yadnus>

http://youtu.be/pfAd6lG8TSM








좋아해. 녀석이 숲색 눈을 떨며 말했다. 선홍색 눈의 소년이 대답했다. 꺼져.

일렁거리던 숲색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소년은 눈길을 돌려 버렸었다. 다 알고 있었다. 소년은 좋았던 머리만큼, 강했던 개성만큼 눈치가 빨랐다. 언제부터 녀석이 자신을 그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소년은 다 알았었다.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열여섯 어린 마음은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호감에 예민했고, 그 감각이 주는 이기심에 흠뻑 취해 있었다. 자만을 닮은 감정이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나를 좋아할 거라는 믿음, 끝내 너는 나를 미워하지 못할 거라는 자만.
어리고 서툴렀던 소년은 녀석의 마음보다 자신의 기분이 더 중요했었다. 녀석의 말에 지레 찔렸었다. 전날에도 소년은 싫다는 녀석을 제압해 겁간하는 꿈을 꾸었었다. 그래서 소년은 녀석의 말이 무서웠다. 녀석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저처럼 올곧고 순진하지 못한 자신이 추해서, 그 떳떳하지 못한 욕망이 더러워서 소년은 날선 칼처럼 오랜 친구의 가슴을 도려냈었다.

내가 좋다니 씨발, 더럽게.

아니, 사실 그 말은 네가 아니라 나를 향했어야 했다. 소년은 그 말에 10년동안 악몽처럼 붙들려 있었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소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몇 번을 후회해 봐도 그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예리하게 잘린 유리조각처럼 소년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찔린 자리에서 피를 흘렸던 건 자신이 아니라 그 녀석이었을 것이다.
응. 녀석이 말했다. 금세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흠뻑 젖은 숲색 눈을 흔들면서, 애써 울지 않으려고 입술 끝을 꼭 깨물면서도 녀석은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소년은 그 속없는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눈을 피한 소년을 향해 녀석은 흐, 웃으며 인사를 했다. 봄바람처럼, 이제 저물어 영영 사라져 버릴 그 흐린 바람결처럼, 곧 떠나버릴 사람처럼.

생일 축하해, 캇쨩.
……
그동안 고마웠어.

다음 날, 녀석은 유령처럼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10년 전, 4월 20일이었다.



Morality Play

@ruka_tea





中1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너무 맑았고, 햇빛은 차라리 구토가 날만큼 어지러웠다.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을 만난 사람처럼 바쿠고는 비척비척 거리를 걸었다. 택시 기사가 뒷좌석에 뛰어오르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승객을 잠시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야 바쿠고는 가까스로 행선지의 이름을 댔다. 기사가 사무소 쪽을 향해 핸들을 틀었다. 그때도 눈을 덮고 있던 바쿠고의 양손은 잘게 떨고 있었다.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삼켜서는 안 될 약을 삼킨 것처럼 온몸이 두통처럼 욱신거렸다. 이 진동과 이 통증이 단순히 숙취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쿠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씨발, 홀려 버린 게 아닐까.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이제 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 너는 죽었다. 눈이 유난히 크고 깊어 표정도 참 다양했던, 언제나 울거나 실없이 웃고 있었던, 쑥스러울 때는 괜히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을 긁적거리던, 캇쨩이라는 그 우습지도 않은 애칭을 불러주었던 소년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바쿠고가 바싹 마른 입술 끝을 세차게 씹었다. 동시에 현실이 울컥 숨통을 조였다. 모든 증거가 오로지 한 이름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바쿠고가 아직도 옅게 떨고 있던 제 손을 뚫을 듯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유령을 만졌었다. 데쿠라는 이름의 유령이었다.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바쿠고가 얼굴을 크게 쓸었다. 감정에 휩쓸리는 십대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협동심을 갖추지 못한 대신 핀치에 몰릴 때 의외의 침착성을 발휘한다는 넘버 원 히어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의 떨림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택시를 박차고 로비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바쿠고는 몇 번이고 제 입술을 세차게 씹어 물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빌런 연합에서 닮은 녀석을 이용해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 유에이 재학 시절에 우연치 않게 납치를 당하면서 바쿠고는 이미 10년 전부터 빌런 연합의 표적에 들어 있었다. 연합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전처럼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있는 게릴라 집단이 아니라 사업 조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지만, 녀석들은 그때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야비하고 비열했다. 올마이트가 은퇴한 지금, 바쿠고 카츠키는 가장 주목 받고 있는 히어로였다. 보안 게이트를 통과한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어차피 개수작이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개꿈을 꾼 거다. 아니면 내가 씨발, 아직도 술이 덜 깼거나. 생각을 삼키면서 바쿠고는 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정확하게 회의가 예정된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곧 열릴 회의에서 바쿠고는 경찰국 특별 수사본부와 히어로 연합회의 책임 있는 간부들 앞에서 현재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빌런을 제압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될 터였다. 히어로, 그중에서도 남성만을 공격하는 빌런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한달 전이다. 그 한 달 동안 벌써 네 명의 히어로가 녀석에게 당해 임무불능 상태가 되었다.
녀석의 빌런 네임도, 나이도, 성별도, 심지어 개성에 대해서도 모른다. 피해를 입은 히어로를 진단한 의사는 개성이 아닌 약물에 의한 의식불명이라고 결론지었었다. 첫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미 경찰본부와 히어로 연합회는 재빨리 합동 본부를 꾸려 수사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별 진척은 없었다. 다만 경찰 본부에서는 임의로 그를 M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건 현장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히어로의 가슴팍에 붉은 립스틱으로 새겨져 있던 M이라는 머릿글자 때문이었다.
어차피 미친 새끼겠지. 바쿠고는 가볍게 소회했다. 바쿠고는 히어로지 프로파일러가 아니었다. 하필 체격 좋은 남성 히어로만 노리는 점이나 립스틱을 사용해 남겨놓는 다잉 메시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바쿠고는 오늘 주어진 뇌의 용량을 이미 가볍게 돌파했다. 오늘 아침 러브호텔의 침대에서 가슴팍에 붉은 립스틱으로 적어놓은 그 망할, 캇쨩이라는 애칭을 보았던 순간부터.
립스틱이라니. 회의실 문고리를 돌리던 바쿠고의 손이 멈칫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바쿠고가 남아있던 손으로 제 입술을 버릇처럼 더듬다, 이내 색 밝은 머리를 세차게 헝클였다. 씨발, 오늘은 이미 용량 오버라고.

“아, B… 아니, 바쿠고군! 마침 시간 맞춰 잘 왔네. 안 그래도 자네가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닐까, 차가 막히는 것은 아닐까 걱정 돼서 지금 자네 집 앞에 우리 쪽 기사를 보내려던 참인데…”

회의실은 이미 만석이었고, 빈자리는 하나 뿐이었다. 주름이 자잘한 눈가를 부슬부슬 접으면서 아들뻘인 히어로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히어로 연합회의 회장을 가볍게 무시하고 바쿠고는 제 이름이 박힌 자리에 대충 걸터앉았다. 이미 모인 사람들끼리 가벼운 정보라도 주고받고 있던 모양인지 회의실 스크린에는 유튜브의 로고가 찍힌 동영상 파일이 정지해 있었다.
어차피 서로 어색하니까 별 쓰잘데기 없는 영상이나 하나 켜놓고 열심히 일하는 척이라도 있었겠지. 바쿠고가 입매 끝을 노골적으로 비틀었다. 합동 수사본부가 지난 한 달 간 그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쿠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중요한 제보가 있었는데요… 스크린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어린 형사가 주춤주춤 일어나며 우물거렸다. 바쿠고는 그때도 이미 스크린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는 선홍색 눈을 두고 형사도, 히어로 연합회의 늙은 회장도, 그 누구도 딱히 지적을 하지 않았다.
선홍색 눈이 핸드폰을 떠난 건 멈췄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던 바로 그때였다.

[안녕, 못난이들? 히미코예요― 우리 영상 잘 보고 있어? 우리 벌써 10회나 됐다? 히미코가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걸 준비했는데…]
“아, 이 영상은 30분 전에 빌런 연합의 채널에 새로 등록된 건데요. 전격 빌런 인터뷰라고, 토가 히미코가 빌런들을 인터뷰하는 영상입니다.”
[오늘은 히미코가 제일 좋아하는 빌런을 데리고 왔어. 있잖아, 히미코가 제일 결혼하고 싶은 빌런! 있지, 너무너무 귀여운 빌런이야. 히미코는 이 남자만 보면 막 덮쳐버리고 싶어― 근데 되게 무서운 빌런이다?]
“벌써 10회나 됐고 매회 챙겨보는 구독자들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근데 오늘 게스트가…”
[자. 우리 못난이들한테 인사해, M.]

M, 이라는 말이 들렸을 때 선홍색 눈이 홀린 듯이 스크린을 향해 움직였다. 회의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화면 속에 비친 건 세라복 차림의 토가 히미코, 그리고 카메라를 비스듬히 등지고 있던 어느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조명을 일부러 끈 것인지 남자의 얼굴은 반쯤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 순간 똑똑히 봤다. 선홍색 눈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언뜻 드러나는 남자의 하얀 목덜미에 익숙한 잇자국이 붉게 박혀 있었다.

“아마 오늘 점심 때 찍은 영상인 것 같습니다.”

젊은 형사가 부연했다. 히미코가 화면을 가리키며 씩 웃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망할, 저 굽슬대는 머리칼.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어제 저 하얀 뒷목을 들이마시며 이를 박았었다.

[얼굴 안 보인다고 뭐라 그러기 없기! 우리 M씨는 되게 중요한 존재라서 히미코만 알고 있을 거야. 그치?]
[뭐, 하하… 딱히 중요한 존재도 아니지만요.]
[에이, 그게 뭐야. M씨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데― 맞아, M씨 벌써 히어로를 넷이나 못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어디에서 촬영된 영상인지는 모릅니다. 영상 업체에는 일단 수사 협조 신청을 넣어 놓기는 했는데, 적용되는 법이 저희랑 달라서 큰 도움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내일 오전까지 음성과 신체 분석을 의뢰한 결과가 나올 예정인데…”

형사의 말도, 영상 속에서 제 멋대로 떠들고 있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다. 이를 악물고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바쿠고는 몇 번이고 거듭 생각했다. 그 새끼일 리가 없다고.
핸드폰이 진동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액정 위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아이콘이 연달아 끔벅거리고 있었다.

“일단 저희 팀의 키 카드는 B씨니까요. 내일 오전까지 음성 분석과 신체 분석이 끝나면 아마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 정보는 우선 원활한 검거를 위해 B씨에게 전달해드릴게요.  아무래도 이젠 B씨가 움직여주셔야… 바쿠고씨? 저기, 저희 아직 회의 중인데!”

브리핑을 하던 형사가 돌연 의자를 박차는 바쿠고를 다급한 목소리로 붙잡았다. 대꾸 한 마디 없이 바쿠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손 안에 쥐어진 메신저 창에는 세 개의 동영상 파일이 수신되어 있었다. 동영상의 썸네일은 작고 흐릿했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 흐릿한 썸네일 속에 뒤엉켜 있던 두 실루엣이 누구의 것인지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차렸다. 오늘 아침 제 가슴에 붉은 립스틱으로 말을 걸었던 유령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통화 버튼을 더듬으며 바쿠고는 버릇처럼 이를 악물었다. 이젠 부인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었다.

“이 씨발 새끼가.”

유령이 돌아왔다.










*

담배 연기가 새파란 하늘 위로 하얗게 날아올랐다. 유령처럼.

멀리 그림처럼 걸려 있는 도쿄타워를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테라스 난간에 좀 더 깊게 몸을 기울였다. 도쿄에서도 전망이 가장 좋다던 호텔의 스위트룸다운 풍광은 차라리 어느 화가의 작품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아름다웠다. 금세라도 쏟아질 것처럼 새파란 하늘에 듬성듬성 솜털처럼 걸린 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필터 끝을 질근거리며 미도리야가 반쯤 남은 담배를 깊게 머금었다. 들이마시고 다시 훅 깊게 뱉어낼 때 유난히 촘촘한 속눈썹 밑으로 숲색 눈이 천천히 감겼다, 다시 열렸다. 사실 이 순간을 꽤 좋아했었다. 영원히 해독되지 않을 독을 들이키고 내쉬는 순간, 그리하여 서서히 죽어가는, 이 순간.
등 뒤에서 손발이 묶인 남자가 온몸을 괴롭게 비틀었다. 아, 맞다. 그제야 미도리야가 쥐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숲색 눈이 다시 룸 안쪽을 향해 돌았다. 한바탕 몸싸움이 지나간 객실은 온통 깨지고 넘어져 어지러웠다. 눈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구둣발을 바라보던 남자가 두 눈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손발을 모두 뒤로 묶인 남자의 맨가슴팍에서 붉은 글자가 불길처럼 꿈틀거렸다. M이었다.
지난 달 히어로 랭킹에서 3위를 했던 남자는 팬이라면서 자신의 호텔방으로 찾아온 청년을 모르는 척 지나치지 못했다. 그런 존재니까요, 히어로는. 미도리야가 남자의 눈앞에 몸을 굽히며 흐 웃었다. 바보처럼.

“히어로니까 남을 배려한다, 남을 위해 희생한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도와주면 반드시 보답이 돌아오잖아요. 인기, 명성, 뭐 그런 것들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히어로들은 다 받는 데 익숙하더라구요.”
“……”
“아, 죄송해요.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흐 웃음을 흐리며 미도리야가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다. 미도리야가 자켓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던 순간까지도 진동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액정에 박힌 번호를 보았을 때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여전할 수 있을까. 생각을 뭉개면서 미도리야는 엄지로 가볍게 통화 버튼을 밀었다. 맵시 좋은 입술이 걸려있던 웃음만큼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인사는 아니었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전화를 걸어온 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놀랐나? 아니, 말문이 막힌 거겠지. 정말 충격을 받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일에 직면할 때 너는 욕을 하는 대신 늘 입을 다물었었다. 테라스 쪽으로 찬찬히 걸으면서 미도리야는 다시 담배곽을 열고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제야 수화기 너머에서 꽉 눌린 목소리가 낮게 욕을 했다. 이런 개 같은. 미도리야가 입매 끝을 슥 밀다, 이내 웃음을 지웠다. 그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서 무심코 진심으로 웃을 뻔 했었다.

“나는 그 영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어땠어? 목소리 좋더라. 하이라이트는 세 번째 영상이야. 계속 데쿠를 찾는 네 목소리가 너무 우습고 귀여워서 일부러 그 부분만 잘라봤어.”
[……]
“세상은 뭐라고 할까? 넘버원 히어로가 지금 가장 위험하다는 빌런과 섹스한 걸 알면.”
[……]
“왜 말이 없어. 이렇게 조용한 성격 아니잖아, 카츠키.”
[너 뭐야.]

낮은, 잔뜩 눌린 목소리가 툭 물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그 소리가 꼭 한숨처럼 들렸었다. 참 오래고 길었던 지난 10년처럼.

[너는 … 죽었는데.]
“……”
[씨발, 니 유품 정리한 게 난데. 니 교복 태운 게 난데.]
“하하, 글쎄. 그런 거 아닐까?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
“그래도 어젠 좋았어.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서 도망도 못갈 뻔 했거든, 흐… 잘하더라. 한동안 다른 남자랑은 못 잘 것 같아.”
[이 씨발, 데ㅋ…]
“우선 하나는 확실히 할게. 나는 데쿠가 아냐. 등신도 멍청이도 아닌 것처럼.”
[……]
“이제 서로 그런 우습고 유치한 애칭 부를 사이 아니잖아, 카츠키.”

미도리야가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너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네 기분은 어떨까? 분할까, 혼란스러울까. 어쩌면 그 둘 다일까. 어느 쪽을 상상해도 짜릿했다. 다시 만난 너는 내 기억보다도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였다. 그 완벽한 존재에게 이만큼 혼란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 기분을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서 미도리야는 무심결에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더 얘기하고 싶어.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네가 당황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통화가 길어지면 이쪽이 위험해진다. 어차피 안부나 나누길 기대한 통화도 아니었다.

“전화 먼저 걸어줘서 고마워. 뭐하고 살았는지, 어쩌다 우린 이런 꼴로 재회했는지 그런 건 서로 설명하지 말자. 구질구질하잖아.”
[구질구질은 씨발, 새끼야, 너 지금…!]
“본론부터 얘기할게. 지금 내가 누굴 납치했거든.”
[……]
“옛정을 생각해서 알려주는 거야.”

또 아무 말이 없었다. 미도리야가 버릇처럼 입술 끝을 잠시 물었다 놓았다. 너무 그렇게 당황하는 티 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좋아서 숨이 멎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미도리야는 필터 끝을 질근거리면서 물려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았다. 핸드폰 너머에서 힘껏 이를 악문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무슨 수작이야, 씨발 새끼야.]
“말 그대로야.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지금부터 내 기사에게 시켜서 이 남자를 트렁크 안에 챙겨서 치바로 갈 생각이야.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밤에 작업하기엔 거기만한 데가 없어서, 흐…”
[……]
“아. 미안, 카츠키. 내가 네 기억하고 너무 달라서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
“9시야.”

통화는 그뿐이었다. 그대로 곧장 전화를 끊었다. 거의 타들어간 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로 미도리야는 핸드폰을 다시 열고 저장되어 있던 번호로 가벼운 메시지를 보냈다. 이 번호 해지해주세요. 전송이 완료된 창을 내려보며 숲색 눈이 흐, 웃었다.

“물론 넌 나를 이렇게 찾지는 않을 테지만.”

노력을 들키는 것조차 부끄러워할만큼 자존심이 센 녀석이었다. 이 번호를 추적해서 차근차근 내가 있는 위치를 찾아오는 방식은 바쿠고 카츠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정면으로 돌파하는 성격이었다.
치바로 오겠지. 생각과 함께 미도리야는 가볍게 담배를 비벼 껐다. 혼자 움직일 거야. 한때 폭살왕이라는, 허세 가득한 네임을 쓰고 싶어 하던 히어로 B는 절대 남과 협동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돋보여야 하고 항상 이겨야만 한다. 하기야, 그 심성이 지금도 너를 넘버원 히어로로 만들어준 거겠지만.

별은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영영 모른다. 그 빛이 사실은 행성을 불태우고 있음을, 그 불길이 결국 그 별을 태운다는 사실을.

너무 흥분해버리면 어떡하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조바심 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할일이 많았다. 미도리야가 아직도 결박되어 웅크리고 있던 남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숲색 눈이 남자를 향해 눈 끝을 접으며 환히 웃었다. 여름처럼, 세상에 태어나 나쁜 일이라곤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천진한 아이처럼.

“죄송해요, 시간이 다 됐네요.”

곧 해가 진다. 오늘 나는 가장 근사한 맹수를 낚을 거야. 지난 10년을 꼬박 기다렸어. 미도리야가 기대감에 부푼 입술을 옅게 짓이겼다. 그래도,
어제 키스는 참 좋았었다.









*

벽을 향해 날아간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놀란 청경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바쿠고는 대답 대신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을 뚫어보고 있었다. 그 조각들이 제 기분 같았다. 조각조각 부서지고 쪼개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시절의 과오 같았었다. 아니, 그건 차라리 너를 닮았었다. 이 손으로 상처 냈던,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떠났었던, 사라졌던, 이 손으로 직접 이별했던, 그러다 다시 악몽처럼 돌아온,
데쿠. 바쿠고가 입술 끝을 피가 베일 정도로 힘껏 씹었다.

너는 유령이었다.

회의실로 돌아가는 대신 바쿠고는 지난 일주일간의 휴가동안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제 차에 올라탔다. 잠깐 외근을 나갔다 들어오던 담당 매니저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갔지만 주차장을 요란하게 빠져 나가던 맥라렌을 잡을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머리 위로 고속도로의 이정표가 별처럼 빠르게 멀어졌다. 치바였다. 거기에 그 유령이 있었다. 미도리야 이즈쿠, 아니. 망할 데쿠.

바쿠고 카츠키의 인생에서 가장 사적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찾는 데에 협조나 협력은 애초에 필요 없었다. 적어도 그 녀석은 그랬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빌어먹을, 그 누구를 잃었어도 지난 10년만큼 괴롭지는 못했을 거다. 엑셀을 밟으면서 바쿠고가 볼 안쪽을 버릇처럼 힘껏 씹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릿속엔 망할 물음표가 너무 많이 떠다녔다. 어떻게 된 건지, 왜 죽었다던 네가 되살아났는지, 무개성 주제에 남을 구하고 싶다던 그 멍청한 자식이 왜 개뿔 어울리지도 않는 빌런의 이름을 덮어쓰고 나타났는지, 너는 왜 나를 만났는지, 왜 나와 잤는지.

너는 씨발, 왜 또 나를 속였는지.

“이 개 같은, 씨발 새끼가.”

다른 무엇보다 이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런 녀석이었다. 웃음이 많았다. 눈물도 많았었다. 겁이 많아 조금만 큰소리가 들리면 흠칫 어깨를 좁히고 물러서면서도 그 입으로 잘난 듯이 훈계를 하던 녀석이었었다. 사람을 돕고 싶다고 했었다. 씨발아, 내가 기억하는데. 캇쨩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유에이에 갈 거라고, 히어로가 될 거라고 겁도 없이 떠들던 게 넌데.

그런 주제에 빌런이라니,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좆도 안 어울리네, 씨발 새끼가. 울컥 욕을 짓씹으며 바쿠고가 항구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향해 크게 핸들을 꺾었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도로는 한산했다. 이미 대부분의 업무가 모두 끝나 텅 비어버린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바쿠고는 그제야 콘솔에서 끔벅거리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50분이었다.
하, 씨발. 바쿠고가 크게 마른세수를 했다. 미쳤다. 머리가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진짜로 오고 자빠졌냐, 씨발.”

히어로는 경찰본부의 통제 하에 움직이는 존재다. 자칫 통제 없이 현장에 뛰어 들어 무작정 빌런과 대치하다간 일반 시민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 빌런이 나타나면 시민이 신고를 하고, 신고를 접수한 경찰본부에서 등록되어 있는 히어로들의 위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적절한 히어로들을 배치한다. 어떤 히어로도 경찰본부의 사전 배치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선홍색 눈길이 그제야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적막했다. 황량하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만큼 넓은 주차장과 하역창엔 사람의 기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바쿠고가 문을 밀며 차에서 내렸다. 주변에는 바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존나… 귀신 나오겠네, 씨발.”

하기야, 귀신은 귀신이지. 데쿠 귀신. 입꼬리 끝을 픽 비틀고 바쿠고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하역창으로 향했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하역창의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본래 그런 방침인지, 아니면 누가 일부러 열었는지. 의심을 삼키며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어둠을 뚫어 보았다. 그래도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속았나. 생각에 바쿠고가 하, 웃었다. 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신에 홀린 게 틀림없었다.

“그딴 새끼를 씨발 뭘 믿고 여기까지…”
“그러게. 뭘 믿고 여기까지 왔을까?”

등 뒤편에서 돌연 말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바쿠고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리를 뗄 수는 없었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인력이 발전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었다. 선홍색 눈이 목소리가 들린 어둠을 사납게 뚫어보았다. 어둠 속에 반쯤 묻혀 있던 숲색 눈이 달처럼 스르르 웃고 있었다. 절로 이가 갈렸다. 이 씨발 새끼가.

“…죽고 싶지, 씨발아.”
“응, 할 수 있다면 그래줄래? 그거 되게 짜릿하더라. 너 때문에 죽는 거.”
“……”
“함부로 움직이지마. 네 발밑에 있는 친구가 성질이 많이 급해서, 흐… 잡고 있는 먹이가 도망가면 뼈를 으스러뜨릴지도 모르니까.”

친구라니. 선홍색 눈길이 자연스럽게 아래를 흘깃거렸다. 다른 곳과는 다른 묘한 그림자가 덩어리처럼 바쿠고의 두 발 밑에 엉겨 붙어 있었다. 자세한 건 더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아서 바쿠고는 이내 눈을 돌려 버렸다. 어차피 빌런 새끼들 중 하나겠지. 울컥 이를 악문 바쿠고가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다섯 걸음 앞에서 바람결을 탄 숲색 머리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본 영상과 똑같았다. 숲색 머리, 잔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있던 뼈대를 맵시 좋게 감싸고 있는 블랙 수트. 더불어 어제의 기억,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억과 여전히 똑같았었다.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 바다에 비친 달빛처럼 유난히 깊던 숲색 눈… 그러나 웃지는 않았다. 이제는 아예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인질은 어디 처박았어, 이 범죄자 새끼야.”

목이 메서, 속이 울렁거려서 바쿠고는 부러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범죄자 새끼는 좀… 미도리야가 잠깐 눈 끝을 끌어내리며 쓰게 웃었다. 오래지 않아 그 웃음조차 얼굴에서 사라졌다. 표정 없는 얼굴이 담담히 대답했다.

“인질이라니, 카츠키.”
“……”
“그런 거 없어.”

뭐? 선홍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밤 어둠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두 발은 아직도 어둠에 삼켜진 것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딱 한 걸음만큼의 간격을 남겨두고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마주보고 똑바로 섰다. 그 얼굴에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무슨 수작질이냐고 묻고 싶었다. 이제와 나타난 이유가 뭐냐고, 너는 왜 나를 속였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었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 말 중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미도리야가 바람결에 흔들리던 제 머리칼을 손으로 조금 쓸어 올렸다. 덤불 같은 머리칼 밑으로 붉은 잇자국이 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하필 그때 바쿠고는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눈치 챈 숲색 눈이 그제야 옅게 웃었다. 그 비틀리는 입꼬리에서, 그 입술에서도 바쿠고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배덕감이 해일처럼 영웅의 가슴을 흔들었다. 어제 저 입술에 나를 쑤셨었다. 몽정을 하며 몇 번을 반복해 꾸었던 그 언젠가의 꿈처럼.

“카츠키.”

미도리야가 눈끝을 접으며 얕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뻗어 우뚝 굳어 있던 바쿠고를 끌어안았다.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몰랐구나, 바보처럼.

“내 타겟은 너야.”

10년 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계속)


+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은 캇뎈입니다
+ 이 캇뎈의 최종목표는 아마도 역감금....


결국 야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질렀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 시간.............. 집에 이즈쿠가 기다리고 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연휴 전에 완성했으니 내일 푹 쉬어야겠어요 흑흑 ㅠㅠㅠㅠㅠㅠㅠ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피드백 달아주신 분들 넘나 감사합니다ㅠ.ㅠ.ㅠ.ㅠ 이제 황급히 올려놓고 저는 집으로... 이즈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도리야 넨도ㅠㅠㅠㅠㅠㅠㅠㅠ흑흑 기다려 내새끼 엄마 금방 갈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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