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오랜만에 씁니다.
* 원작 기준 11년 후, 바쿠고랑 미도리야가 빌런 x 프로파일러로 재회하는 이야기
* 이번 편은 약간 길어요(mm 총 1만 5천자..

BGM / Dark Horses <Alone>


http://youtu.be/dAAi3wT7XOM






손은 말하지 않는다

@ruka_tea




09





여기서부터 창고까지는 30분 남짓 걸린다고 했다.
택시를 잡은 건 미도리야였다. 지원 요청부터 하는 게 좋을 것이네. 택시에 오르며 올마이트는 말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차창을 따라 기울어진 가로등빛이 은퇴한 영웅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뱉으며 올마이트는 잠잠히 덧붙였다.

“나는 이제 힘이 없으니까.”

10년 전, 미도리야가 기억을 잃던 바로 그해에 영웅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었다. 때문에 스물일곱의 미도리야 이즈쿠는 올마이트가 어떤 영웅이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었는지 체감하지 못했다.
올마이트는 미도리야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힘을 물려준, 유일한 존재였다고 말했었다. 빌런 B, 아니, 바쿠고 카츠키가 사실 자신의 인생에 너무나 큰 존재였다는 진실만큼이나 미도리야는 이 지점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믿게 되겠지. 내가 B, 당신을 발견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을 삼킨 미도리야가 차창 쪽을 향해 힘껏 입술을 씹었다 놓았다. 이제 슬슬 저물기 시작한 벚꽃 잎이 건조한 바람결에 휘말려 거리 위로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자네의 그 눈을 참 좋아했지.”

차창을 바라보던 숲색 눈이 목소리를 따라 다시 안쪽으로 움직였다. 한때는 스승이었을 남자가 온화하게 웃었다. 아마 그는 자신을 향해 자주 이렇게 웃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웃음을 보았던 기억은 이번에도 나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네. 나는 직감했었지. 이 소년이 가진 것은 개성이나 단순한 힘이 아니다, 그보다 더 먼 길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 힘으로 언젠가 더 큰 것을 바꾸고 말 거다, 그렇게 믿었었네.”
“……”
“그래서 내가 가진 전부를 물려주고 싶었지. 내 명성, 내 힘, 내 위치와 내 상징까지.”
“하지만 올마이트, 저는…”

우물거리던 말을 멈추면서 미도리야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미도리야가 꾸벅 버릇처럼 말했다. 울렁거려 그랬다. 그보다는 올마이트의 말이 아직도 다 믿기지 않는 탓이었다.

“사실 제가 당신의 제자였다는 게 지금도 잘 믿기지가 않아요. 왜냐면… 그렇잖아요. 저는 힘도 없고, 약하고, 결정적으로 개성도 없고…”
“아니, 자네는 가지고 있네. 그걸 쓰는 방법을 잊어버렸을 뿐이지. 사라져 버린 기억들과 함께 봉인 되었을 뿐이네.”
“……”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말을 멈춘 올마이트의 눈길이 다시 차창 쪽으로 향했다. 그뿐이었다. 창 바깥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끝내 다물어 버린 말들이 지나온 10년의 시간만큼 아득하게 걸려 있었다. 미도리야가 볼 안쪽을 꾹 씹었다. 당신의 눈 안에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도 있을까. 내가 유실해버린 조각들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미도리야는 확신했다. 올마이트는 자신이 기억을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황상 그랬다. 하지만 올마이트는 지금껏 미도리야가 어떻게 기억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올마이트가 준 진실은 B, 바쿠고 카츠키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두 사람의 교집함이 무엇인지, 인생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겹쳐 있었는지, 내가 잃은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은 은폐할 이유가 있을 때 진실을 숨긴다. 올마이트가 말하지 않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끔찍해서, 혹은 어떤 외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자네를 위한 일이었었지.”

올마이트가 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도리야가 흠칫 어깨를 좁히며 저도 모르게 올마이트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빛에 비친 길고 짧은 그림자들이 올마이트의 얼굴 위에 빠르게 번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실수였네. 올마이트가 힘없이 웃었다. 더불어 덧붙였다. 그래도 결국 알게 될 걸세,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네를 안내하는 것뿐이네. 나머지는 스스로 찾아야하지. 그러나 찾을 수 있을 걸세. 자네에겐 그런 힘이 있으니까. 일이 어떻게 시작되어도 결국에는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힘이 있었지.”
“……”
“거의 도착했군.”

목소리를 따라 숲색 눈이 정면 쪽을 쳐다보았다. 택시가 속도를 줄였다. 큰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에 간판도 없는 높고 휑한 건물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냈다. 출동까지는 10여분이 걸릴 것 같다는 선배의 메시지를 눈으로만 짧게 확인하고 미도리야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창고는 짐작했던 것보다 꽤 높고 컸다. 20층 정도 되는 높이를 눈으로 헤아리는 사이에 택시는 천천히 정차했다. 올마이트가 문을 열었다.

“가볼까, 미도리야 청년.”

미도리야는 그때도 창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해일처럼 울렁거렸다. 귀밑이 쿵쿵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상해요, 올마이트.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버릇처럼 말아쥐며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낯설지가 않아요. 여기가.”

분명 와본 적이 있었다.






*

창고 A의 빈바닥을 바라보던 시가라키의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크레인에 연결된 사슬은 끊어졌고, 누군가 며칠 밤낮을 매달려 있던 자리에는 폭발에 그을린 흔적만 남아 있었다.
미끼가 달아났다.

“대장! ‘손님’이 창고 입구에 지금 진입했다고 상황실에서…”

문을 젖히고 헐레벌떡 달려오던 빌런이 시가라키의 얼굴빛을 보곤 무의식적으로 볼륨을 죽였다. 개성처럼 덕지덕지 붙은 손 위로 드러난 탁한 눈동자는 깜박이는 법도 없이 바쿠고가 사라진 자리를 뚫어보고 있었다. 사라졌다, 도망쳤다… 시가라키가 요란하게 목을 긁기 시작했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살갗을 후벼 버릴 것처럼 손의 속도가 빠르고 격렬해졌다. 빌런은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잠자코 숨을 죽였다. 이럴 때의 시가라키는 선생조차 통제할 수 없다. 기어이 목덜미에 핏물이 맺힐만큼 긁어댄 후에야 시가라키는 겨우 손을 멈췄다. 양손은 아직도 분노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토끼는 토끼굴에 들어왔다. 하지만 덫에 걸었던 미끼는 사라져 버렸다. 안돼, 미끼가 없으면. 영영 토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잖아. 이때를 위해 10년을 기다렸다. 그 건방진, 재수 없는 주둥이를 짓뭉개고 싶은 걸 10년이나 참아줬단 말이야.
선생한테 혼나면 어떡하지. 선생이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나무라면 어떡하지. 생각을 좀처럼 통제할 수가 없어 시가라키는 자꾸만 어수선하게 제 양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나를 쫓아낼지도 몰라. 나를… 더이상은 사랑해주지 않을 지도 몰라. 다른 무엇보다 시가라키는 그게 가장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냥 죽여버릴걸.”

차라리 죽여서 시체를 박제해둘 것을 그랬다. 토끼는 멍청해서 금방 속아버렸을 텐데. 10년 전에 속아버린 것처럼 저가 얼마나 약해빠졌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었을 텐데. 하지만 선생은 그 녀석이, 바쿠고 카츠키가 온전히 살아있기를 바랐다. 선생이 얼마나 그 녀석의 개성을 탐냈었는지는 시가라키도 잘 알고 있었다.
찾아야해. 겁에 질린 탁한 눈이 바쿠고가 사라진 자리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찾아야 한다. 선생이 알기 전에, 선생이 나를 미워하기 전에 찾아야 해. 죽여야 해. 그제야 분노로 눈이 멀어 있을 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린 체인을 따라 뚝뚝 떨어진 핏방울은 비상계단 쪽으로 향해 있었다.
찾아. 시가라키가 말했다.

“찾아… 찾아, 찾아, 찾아! 당장!”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개가 필요하다. 사냥이 끝나면 토끼는 잡아먹히고, 용도를 잃은 사냥개도 주인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거야. 시가라키가 다시 요란하게 목을 긁기 시작했다.






*

창고에 들어오는 건 예상처럼 어렵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감시조차 없었다.
아무 것도 없으니 도리어 이상했다. 함정일까? 반신반의 하면서 미도리야는 올마이트보다 앞서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창고는 낡아버린 상태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본래 용도는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있었다. 미도리야가 어깨를 움츠리며 주춤주춤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갔다. 가슴이 자꾸만 쿵쾅거렸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부터 줄곧 이랬었다.

“괜찮은가, 미도리야 청년?”

안색을 살펴본 올마이트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요. 조도가 낮은 형광등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하얀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슴이 뛰어 그래. 입술 끝을 질끈 물었다 놓으면서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고동은 좀 전보다 더 심해지고 있었다. 흥분이나 두려움 같은 성질의 감정은 아니었다. 기시감이었다.

이 창고에 와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른다. 아니, 와봤다는 사실조차 뚜렷하지 않다. 다만 기분이 그랬다. 바쿠고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기분처럼 속이 메스꺼울만큼 크게 울렁거렸다. 샷을 추가한 커피를 급하게 들이켠 느낌이었다. 미도리야가 습관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미도리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올마이트가 잠시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체념과 죄책감이 복잡하게 얽힌 목소리였다.

“우리 몸은 머리보다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네. 어쩌면 자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곳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
“자네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
“아뇨.”

미도리야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숲색 눈이 올마이트를 돌아보며 거듭 말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계속… 가주세요.”
“……”
“저는 이제 숨지 않을 거니까.”

나는 이제 달아나지 않을 거야.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볼 안쪽을 힘껏 씹고, 미도리야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 저편에 <창고 A>라는 표지판이 걸린 문이 보였다.
선배는 5분 정도 후면 도착할 거야.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총이라도 한 자루 들고 올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 버렸다. 빌런 연합이 기를 쓰고 덤벼든다면 어차피 총은 소용이 없다. 선배가 기동팀과 함께 가장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영웅들을 불렀을 테니 그때까지만 신중하면 될 일이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길. 미도리야가 기도처럼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

가슴을 움켜잡은 손 밑에서 펑, 불꽃이 튀었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이 멎었다.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몸을 떠밀면서 바쿠고가 잠시 자신이 서있는 장소를 크게 둘러보았다. 낡고 바랜 시멘트벽 한쪽엔 십수 대의 CCTV 화면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관제실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17층쯤은 되겠지. 3층만 더 올라가면 목적지다. 바쿠고가 크게 얼굴을 쓸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 끝이 피식 조소했다.

“지금쯤 씨발, 난리가 났겠지.”

시가라키는 눈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안 봐도 빤했다. 그 대디이슈 파파보이 새끼는 선생한테 미운 털이 박힌다고 생각하면 아주 머리가 돌아버리니까. 지금껏 시가라키가 자신을 살려둔 이유도 순전히 선생이, 그러니까 올포원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올포원은 진작 죽었어야 하는 존재다. 은퇴하고 후계인 시가라키에게 모든 과업을 물려준 척 숨어 있었지만 그는 몸이 완전히 고장나버린 3년 전까지 줄기차게 숱한 히어로와 빌런들의 개성을 흡수했다.
문제는 육신이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하다고 해도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다.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개성이건 무개성이건 태어난 순간부터 모두 공평하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다 결국에는 숨을 거둔다. 올포원은 그 섭리에 순응하지 못했다.
올포원은 이미 송장이다. 이 탐욕스러운 송장에게 다시 힘을 되찾게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같은 가지에서 갈라져 나간 반대 쪽 힘, 즉 원포올을 이어 받은 자 뿐이었다.

“나는 존나 그걸 위한 미끼고.”

바쿠고가 잠시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일그러진 검은 티셔츠 한 복판에는 Plus Ultra라는 말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처음부터 제 것 같았던 이 셔츠를 산 게 누구인지 안다. 그 녀석이 누굴 생각하면서 이 셔츠를 샀는지도 알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너를 두 번 잃을 자신이 없는 겁쟁이니까.

어차피 네 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내 숨이 붙어 있기 때문에 너는 영영 자유로울 수 없겠지. 생각을 삼키다 바쿠고는 이내 힘껏 볼 안쪽을 짓씹었다. 이런 감상은 지금은 쓸모없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했다고, 이딴 구질구질한 신파는. 지금은 갈 길이 멀었다. 입꼬리를 밀며 바쿠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3층만 올라가면 옥상이다. 입구는 어차피 시가라키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니 차라리 옥상 쪽으로 올라가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는 편이 더 승산이 있었다.
사라져야 한다. 생각하며 막 돌아서던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구석에 박혀 있던 CCTV 한 대가 바쿠고의 눈길을 다시 화면으로 돌려놓았다. 정확하게는 창고 A의 문을 열고 나타난 양복 차림의 남자 때문이었다. 선홍색 눈이 힘껏 일그러졌다. 숲색 머리였다.
저 새끼는 씨발 기억이 있으나 없으나 존나.

“진짜 사람 귀찮게 하지.”

하기야, 은근히 어릴 때부터 말은 더럽게도 안 들었다. 생각을 삼키다 바쿠고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입꼬리가 느슨해진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시시덕거릴 때가 아니었다. 네가 결국 어떻게든 와버린 거라면 더더욱 그랬다.

“네가 나를 기억하는 장소가 여기면 안 된다고, 이 씨발아.”

기껏 파묻은 상처가 다시 벌어질지 모른다. 그걸 너는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을 짓씹으며 바쿠고는 그대로 관제실을 빠져 나갔다. 숲색 눈이 잠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멀어지던 순간이었다.





*

카메라 렌즈를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움찔 떨었다. 자켓 안쪽에서 떨리던 핸드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아, 네, 선배. 네, 저는 안쪽에 있어요.”

거대한 크레인 한 대만 덜렁 서있던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크레인을 올려다보는 올마이트를 잠시 두고 미도리야는 통화를 하며 안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선배는 야단이었다. 현장에 도착했다는 소식보다도 미도리야가 그 안쪽에 있다는 게 더 큰일인 모양이었다.

[넌 대체 안 그렇게 생겨서 왜 그렇게 무모해? 현장 요원도 아니고, 무기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먼저 진입해 있으면…]
“그게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 하하… 죄송해요.”
[죄송한 건 너한테 죄송해야지, 그러다 일 나면 어쩔래? 야, 나는 또 어떡하라고… 아니, 이런 건 일단 됐다. 무사하면 됐어. 별 일 없지? 괜찮지? B는? B는 어떻게 됐어?]
“아직요.”

안을 휘둘러보던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사적인 이유로는 절대 기동팀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B의 이름을 댔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바쿠고 카츠키와의 관계가 무엇이건 공적으로는 빌런이다. 경찰이 도주 후 행방이 묘연해진 빌런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찾아도 못 찾았는데 넌 B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안 거야? 선배가 푸념처럼 투덜거렸다. 이 질문은 약간 난감했다. 급한 마음에 일단 지원요청부터 하긴 했지만 핑계가 마뜩찮았다.
뭐라고 하지… 미도리야가 고민하던 차에 올마이트가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내 핑계를 대게. 아무래도 주변이 조용한 덕분에 통화 내용이 저쪽까지 가닿은 모양이었다. 숲색 눈에 화색이 번졌다. 고마워요, 올마이트.

“올마이트를 만났어요.”
[올… 뭐? 올마이트? 인마, 언제적 올마이트… 아, 혹시 청장님이 소개해준 손님이… 허, 참. 올마이트라면 B의 정보를 알고 있을 법도 하지. 근데 B는. 정말 거기 있는 건 맞아?]
“그건 저도 좀 더 살펴봐야…”

우물거리며 눈길을 돌리던 미도리야가 돌연 우뚝 멈췄다. 한 곳에 시선이 빼앗긴 탓이었다. 아까부터 눈길을 사로잡던 크레인 밑에 뭔가 있었다. 아니, 뭔가 묶여 있던 흔적이 보였다. 엉키고 토막 난 사슬, 말라붙은 핏자국… 그러다 사슬 끝이 그을린 자국을 보았을 때 숲색 눈이 번쩍 열렸다. 수사원으로서의 감이었다. 아니, 가슴이 뛰는 속도가 더 빨랐었다.

시가라키의 측근 중에 불과 비슷한 개성을 가진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순식간에 귀밑이 시끄러워졌다. 여기에 바쿠고 카츠키가 있었다. 끌려갈 때 분위기가 험악했던 걸 미도리야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에 묶여 있었고, 도망쳤다. 그제야 미도리야는 여기까지 들어오는동안 왜 아무도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가라키와 다른 빌런들은 지금 바쿠고 카츠키를 찾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입구 쪽에는 바쿠고는 커녕 다른 빌런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되짚던 숲색 눈이 크게 열렸다.

“옥상…”
[뭐? 옥상이라니 갑자기 무슨…]
“선배, 옥상! 옥상이에요! 옥상으로 보내주세요!”
[아니, 이유도 없이… 미도리야?]

선배의 대답을 다 들을 틈도 없이 급하게 전화부터 끊고 계단 쪽으로 달렸다. 한 발 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올마이트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미도리야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옛 영웅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상구로 뛰어 오르는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가슴이 뽑힐 것처럼 뛰었다.
이 길을 달린다면 당신이 있을 거야. 이대로 쭉 올라가면 옥상이다. 달리고, 뛰어오르며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통하는 계단은 없어. 이 계단을 따라 쭉 달려 오르다 20층에서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뛰어간 후에 문을 열면…
어. 미도리야가 불현듯 우뚝 멈췄다. 까마득하게 뻗은 계단을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지진처럼 떨기 시작했다.

“생각났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

그날, 소년을 바깥으로 불러낸 것은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안 가면 안 되겠니, 이즈쿠?」

토요일이었고 소년은 ‘친구’에게 메일이 오기 전까지 엄마와 오랜만에 TV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다정하고 마음이 약했다. 아들이 바라던 유에이 입학에 성공하게 된 후부터 자주 아들 걱정에 잠을 설쳤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소년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엄마가 현관까지 쫓아오며 소년을 붙잡은 건 2학년에 진급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현관에 앉아 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화의 끈을 힘껏 조이며 소년은 둥그런 눈으로 흠뻑 웃었다. 엄마를 안심 시키고 싶었었다.

「별일 아닐 거예요, 엄마. 요즘 빌런 연합도 잠잠하잖아. 올포원이 잡혀간 후로는 벌써 반년이 넘도록 소식도 없는 걸요. 괜찮아요.」
「하지만 이즈쿠, 거긴 너무 위험하고 게다가 너 혼자선…!」
「구해달라고 했어요. 캇쨩이.」
「……」
「아시잖아요. 갈 수 밖에 없는 거.」

저녁에 돌아오면 가츠동 해주세요. 그렇게만 말하고 소년은 집을 나섰다. 엄마도, 한 발 늦게 엄마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스승도 모두 소년을 만류했다. 그래도 소년은 가야했다. 갈 수밖에 없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는 자신의 친구가, 아니, 이미 친구라는 이름이 아니었던 ‘소년’이 처음으로 먼저 보내온 메일이었었다.

‘소년’은 창고 앞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주웠다. 소년이 엄마와 인사한 후에 친구가 보내온 메일을 따라 창고로 찾아간 지 딱 1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제자이자 후계자인 소년을 찾아 현장으로 달려가던 스승은 놀이터 앞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던 붉은 눈의 ‘소년’을 보고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창고로 찾아 갔노라며 스승은 말했고, 지원을 요청하라는 스승의 충고를 다 듣기도 전에 소년은 창고로 달렸다. 창고 앞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은 액정이 박살나 있었지만 전원이 꺼지지는 않았었다. 맨 위에 수신 된 메일을 열어본 소년은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메일을 보낸 적이 없었다.

「함정일 걸세.」

함께 있던 스승이 말했다. 스승에게는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더 급했다. 자칫하다가는 다른 의미에서 아끼는 또다른 제자까지 잃을 판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말에 성실히 대꾸하지 않았다. 붉은 눈이 힘껏 일그러졌다.

「어, 근데 그 새끼는 나를 구했을 거잖아. 데쿠새끼는 씨발, 그렇게 했을 거잖아.」
「……」
「또 날 구한다고 설치다 잡혔다 이거지. 하, 너드새끼. 꼴좋다.」
「……」
「어디서 건방지게 나대고, 지랄이야, 씨발.」

소년이 힘껏 이를 악물었다. 잡을 새도 없이 색이 밝은 머리가 스승의 시야를 벗어나 창고를 향해 달렸다. 처음으로 ‘친구’가 소년을 구하러 달리던 그때였었다. 그날이었었다.

올마이트는 그날, 제자 둘을 잃었다. 10년 전 봄이었다.






*

손에 떠밀린 철문이 이윽고 크게 열렸다. 옥상이었다.

옥상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바람이 바쿠고의 머리칼을 세차게 헤집었다. 절뚝절뚝 안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바쿠고는 먼저 주변부터 눈으로 확인했다. 다른 녀석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안 보이는 거겠지만.”

비죽 입꼬리를 밀면서 바쿠고는 난간 곁에 붙어 옆 건물을 살펴보았다. 딱 제 허리까지 올라오는 난간 아래로 옆 건물의 옥상이 편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높이는 대충 3미터에서 4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발아래에서 경광등이 번쩍거렸다. 등신이 혼자 오진 않았네. 바쿠고가 픽 입매 끝을 비틀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뒤질 일은 없을 거다. 이것 역시 이만하면 됐다.
만약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자수할 생각이었다. 몇 년을 받게 될지는 모르겠다. 최소 종신형 아닐까. 하기야, 지금껏 지옥에서 살았는데 교도소 정도는 천국이지. 실수인 척 네 놈 때문에 잡혔다고 이름 정도 흘려주면 승진은 할 수 있겠지, 그 멍청이. 그러다 우연찮게 다른 죄수들을 면담 한답시고 들락거리는 멍청한 얼굴이라도 먼발치에서 볼 수 있다면 그 거지 같은 교도소 생활도 버틸만은 할 거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생각하며 바쿠고가 난간을 움켜잡았다.

그때였다. 선홍색 눈이 돌연 크게 열렸다. 악취가 나고 있었다.

“……!!”

뒤에서 뻗어온 팔이 단숨에 바쿠고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피할 틈도 없었다. 그대로 난간 바깥으로 몸이 들렸다. 그제야 바쿠고는 제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검고 축축한 살갗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크게 벌어진 입술을 타고 침이 흥건하게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노우무였다. 노우무의 뒤편에서 잿빛 머리칼이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색이 탁한 눈동자가 씩 웃었다.

“안되지, B씨. 우리 아직 볼일이 서로 안 끝났는데.”

노우무가 조른 팔에 힘을 실으며 바쿠고를 번쩍 들어 올렸다. 두 발이 20층 허공 위에서 버둥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노우무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노우무를 이길 수 없다. 시가라키가 낄낄 웃었다. 즐거워 참을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탈출해서 뭐하게? 자수라도 하려고 그랬어? 에이, 그래봐야 범죄자잖아, B씨. 이제 와서 갈 데가 어딨다고, 그치?”
“……”
“걱정하지마. 토끼가 나타나면 이제 모두 끝날 거거든. 토끼가 기억을 찾으면 제일 좋고, 토끼가 기억을 못 찾으면 다 늙어버린 영웅을 잡으면 되고… 그렇잖아? 벌써부터 그렇게 용 쓸 거 없어. 선생이 네 개성을 다 흡수하고 나면 특별히 내가 죽여줄게. 노우무로 재활용 당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엄청 특혜 아냐? 시가라키가 빙글빙글 웃었다. 지겨운 숙제를 끝마친 아이 같았다. 이제 놀 일만 남은 아이처럼 들뜬 눈빛으로 시가라키는 선 자리에서 잠시 폴짝폴짝 뜀을 뛰었다.
멍청한 새끼. 바쿠고가 목을 조르던 노우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수백 번을 상상했었다. 지난 10년 동안.

“사냥할 때는, 등신 새끼야.”

노우무의 팔을 잡고 있던 손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시가라키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바쿠고가 입꼬리 끝을 가볍게 비틀었다.

“미끼가 뒤져 버리면, 끝이라고.”

시가라키가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노우무의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찢을 듯이 갈라놓았다. 양손을 잃어버린 노우무가 길길이 날뛰던, 색 밝은 머리가 20층 아래로 추락하던,

미도리야가 옥상 문을 열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소년은 그날,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창고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색이 밝은 머리는 보이지 않았었다. 빌런들은 소년이 감당하기엔 수가 너무 많았고 너무 강했다. 소년은 늘 지구전에는 자신 있었지만 그날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손목의 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휘둘렀던 주먹을 뻗을 수도 없을만큼 힘이 빠진 후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수면 가스라도 마신 것인지 소년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잠만 잤었다. 자다 더러 아파서, 제 두 개골을 누군가 후비는 것 같아 발작을 하며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팔목에 날카로운 바늘이 박혀왔다.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사이 눈꺼풀은 무거웠고, 현실은 점점 더 꿈처럼 흐리고 멀기만 했었다.

나는 죽는 걸까?

소년은 멍한 머리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가끔 잠에서 깨면 눈앞에서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며 히죽히죽 웃는 의사의 얼굴이 보였다. 넌 좋은 재료가 되어줄 거야. 의사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지만 무엇을 위한 재료냐고,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냐고 물을만한 기운이 없었다.
죽음 같은 잠이 또다시 계속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제 친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빌런에게 잡혀 있다고, 도와달라는 메일을 보냈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었다.

「…멍청이들.」

이쪽을 등지고 있던 색 밝은 머리가 건너편을 향해 말했다. 소년은 친구가 다치지 않아서,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웃고 싶었지만 어쩐지 웃을 수는 없었다. 아직도 몸은 잠에서 다 깨지 않았다. 친구는 소년에겐 관심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동경해왔던 그 등이, 줄곧 쫓으면서 따랐던 그 등이, 그 멋진 등이 흐린 눈결에 걸려 있었다. 녀석이 거듭 말했다. 멍청한 빌런 새끼들.

「바보냐? 저 새끼 개성은 타고 난 게 아니라고. 머리를 건드리면 못 쓰는 게 당연하지, 씨발.」
「…거짓말 하지마.」
「못 믿겠으면 올마이트한테 물어보시든가. 대가리 존나 나쁘네, 찌질한 새끼가.」
「……」
「그러니까 날 데려가라고.」

흐릿하게 흐려져 있던 숲색 눈이 크게 열렸다. 안돼. 소년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몸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암체어에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돼. 소년이 몸을 흔들었다. 안돼, 말려야 해. 머리보다 마음이, 이성보다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마지막 힘이라도 쥐어짜서 너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도 친구는, 그 색이 밝은 머리칼의 소년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 소리가 이미 다 들릴 텐데도 너는 그랬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알았을 텐데도 너는 그렇게 했었다.

「인질로 삼아.」

너는 말했다. 안돼. 소년이 몇 번이고 마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돼, 그러지마.

「난 저 새끼랑 날 때부터 같이 자랐다고. 나보다 더 확실한 연결 고리는 없잖아. 니들이 머리 속을 건드렸으니 저딴 새끼는 이제 쓸모도 없어. 힘쓰는 법도 잊어버릴 새끼.」

그러지마. 진짜 그러지마, 캇쨩.

「데쿠새끼는 제정신이 돌아오면 나를 찾을 테니까.」

그러게. 마주 서 있던 재색 머리 남자가 히죽 웃었다. 그 남자는 소년이 친구를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엔 구해준 친구가 목숨을 거는데. 남자가 말했다. 안타까워라.

「처음으로 목숨을 걸어주는데 이제 영영 볼 수 없다니.」
「어, 그러니까 씨발, 이제 저 새끼는 냅두…」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년은 영원히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된다고 해도 영영 모를 게 빤했다. 그 부분의 기억은 어쩐지 오랜 필름처럼 낡고 흐렸다. 그 의자를 어떻게 나왔던 걸까. 어떻게 약에서 다 깨지도 못했으면서 의자를 탈출했는지, 어떻게 색 밝은 머리를 향해 기어갔는지 소년은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친구가 말을 줄였고, 사람이 아닌 것이 불쾌한 소리를 질러댔다. 당황한 듯 자신을 향해 크게 열려있던 선홍색 눈을 보았을 때에야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그 손을 잡고 있음을 알았다.

「놔.」

친구가 말했다. 소년이 오른손에 꽉 힘을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놓으면 갈 거잖아. 가버릴 거잖아.」
「놓으랬다. 어!?」
「어떻게 그래, 네 꿈이었는데! 네 꿈이 뭔지 나는 아는데!」
「……」
「영웅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올마이트도 이겨버리는 그런 영웅이 될 거라고 했었잖아, 개자식아!」
「……」
「저 남자를 따라가면 영웅이 될 수 없어… 돌아올 수 없어. 다시는… 다시는 여기로 올 수 없어.」

떠나면 다시는 내가 있는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인생의 궤적이 빛과 어둠처럼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 갈라지고야 말 것을, 빛과 어둠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다는 진리를 소년은 알고 있었다.
당황한 녀석이 팔을 크게 흔들었다. 눈이 탁했던 남자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흥미롭게 쳐다볼 뿐 끼어들지는 않았었다. 가라고, 놓으라고 친구가 소리를 아무리 질러도 소년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소년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곳에선 언제나 고집이 셌었다.
등신 새끼가. 녀석이 볼 안쪽을 힘껏 씹으며 말했다. 한순간 선홍색 눈에 언뜻 비치던 물기를 본 것도 같았었다. 그러나 똑바로 확인할 새도 없이 녀석은 곧 눈길을 피해버렸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소년을 돌아보지 않았다. 차가운 말들이 소년의 가슴을 도려냈었다.

「내가 씹질은 존나 좀 하나보다. 뒤 좀 뚫렸다고 질질 매달리는 거 보면, 씨발. 나는 너 같은 새끼 언제나 끔찍했다고. 구역질나고, 존나.」
「……」
「아, 속 시원하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
「하, 씨발, 등신 새끼가.」
「……」
「상처 받은 척이라도 좀 하라고.」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아프지 않았다. 밉지 않았었다. 소년은 이미 그 말이 이 소년의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생에 걸쳐 가족보다 더 가깝게 알았던 유일한 존재였다. 네 진심이 아냐. 알고 있어서 그 손을 더 놓을 수가 없었다. 녀석에게 발을 걷어차이면서도 소년은 끝까지 손은 놓지 않았었다.
손을 놓게 만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소년은 마주 잡은 손바닥의 혈맥을 따라 따갑게 번지던 열기를 느꼈었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살이 짓무르고 탄내가 코를 질렀다. 고집스럽게 잡고 있던 손이 끝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오른손바닥은 껍질이 벗겨질만큼 데여 있었다. 그래도 소년은 아픔을 몰랐었다.

「가지마…」

이름을 불러도, 울어도 녀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약이 다시 돌고 있는지 소년은 쫓아가려고 허둥거리다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젠 기어갈 힘조차 없었다. 흐릿해지는 시야가 자꾸만 점멸했다. 소년이 흠뻑 젖은 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찾으러 갈게.

「구하러 갈게.」

발갛게 데여버린 오른손바닥을 힘껏 움켜쥐면서, 소년은 말했다. 의식이 꺼지던 순간까지도 소년은 우물거렸다. 캇쨩, 내가 꼭… 반드시, 내가…






*

선홍색 눈이 지진처럼 크게 떨었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충격보다, 아직도 발이 20층 옥상 위에 떠 있다는 불안감보다 바쿠고는 눈으로 보고 있는 풍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았다.
바쿠고의 왼손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껏 힘줄이 돋아 있었다. 힘이 없는 무개성의 손이 아니었다. 이 손에 안심했었고 이 손에 배신감을 느꼈었다. 손의 주인이 흠뻑 웃었다. 숲색 눈에 고여 있던 것들이 뺨을 타고 입술을 적시며 바쿠고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

“내가… 약속했잖아.”

소년이, 아니, 미도리야 이즈쿠가 말했다. 이럴 리가 없어. 바쿠고는 생각했다. 씨발, 이럴 리가 없다고. 봄 바람처럼 흔들리던 선홍색 눈을 향해 미도리야가 거듭 덧붙였다.

“구하러 올 거라고 그랬었잖아.”
“……”
“캇쨩.”

그때 처음으로 신을 믿고 싶어졌다.






(계속)





드디어 가장 힘들었던 편의 매듭을 풀었네요 허허허허허....ㅠ.ㅠ.ㅠ.ㅠ.ㅠ.ㅠ.ㅠ 마음도 심란하고 봄 제대로 타는지 우울한 가운데 며칠 쉬었더니 겨우 풀 수 있게 된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두 편을 합친 분량과 진배 없지만 이번 편은 꼭 한 편에 써주고 싶었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ㅠ.ㅠ.ㅠ.ㅠ.ㅠ.ㅠ 무튼!
이제 남은 건 완결 뿐인데 1편이 더 있을지 2편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ㅠ.ㅠ.ㅠ 아직 세부 플롯이 안 나와서ㅠㅠㅠㅠㅠ 여튼 이제 정말 가장 큰 산을 넘어갔네요 허허허... 일단 저는 좀 쉬러 가야겠다며ㅠㅠㅠㅠㅠㅠ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더불어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

+ 오늘 브금은 미드 블ㄹ랙리스트 삽입된 곡 중에서 하나... 그 김에 사족 붙이자면 캇뎈 재회하는 장면은 블ㄹ랙리스트 1편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입니둥 u///u 여러분 블리 보세요 넘나 재밌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지나가던캇뎈러 2017.04.15 00:48 SECRET

    "비밀글입니다."

  • 도영 2017.04.15 02:25 SECRET

    "비밀글입니다."

  • 캇데쿠 주례사 2017.04.15 14:33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7.11.23 19:18
    목전에 칼이 겨누어져도 욕을 할 수 있는 바쿠고 카츠키 사랑합니다 ㅠㅠㅜㅜ( 오직 바쿠고 카츠키만이 할 수 있는...^^;;;)루카님 연성이 너무 찰지세요 20층 옥상에서 자신에게 남은 미래를 헤아리는 바쿠고에게 울컥해버렸어요..ㅠ///ㅠ;;(너란..녀석..!!ㅠㅜㅜㅠㅠ;;)저는 시가라키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데 신나서 제자리 뜀을 하는 그가 잠시나마 너무 귀여웠네요..!!^^;;;
  • 착한아이 2018.09.16 23:2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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