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원작 기준 11년 후, 바쿠고랑 미도리야가 빌런 x 프로파일러로 재회하는 이야기


* BGM / Fleurie - Hurts Like Hell

http://youtu.be/pUlX8ltm_JU






손은 말하지 않는다


@ruka_tea






08





유에이에 가보게. 올마이트는 말했다. 바쿠고 소년의 개인 짐이 보관되어 있을 테니까.

‘버리지는 못했을 걸세. 이 기록을 아예 세상에서 지우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지. 가보게. 영장은 필요 없을 걸세. 자네의 존재가 신원을 보증해줄 테니 말이네.’
‘……’
‘지금은 자네도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다녀오게. 일단 다녀오면 자네 생각에도 갈피가 생기겠지.’

기억을 되돌려줄 수는 없다고 올마이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감히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했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후 숨을 가다듬는 미도리야의 손에 올마이트는 낯선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도쿄에서 머물고 있는 임시 거처라고 말했다.

‘자네의 마음이 모두 정리가 되면, 알고 싶은 것이 보다 더 명확해지면… 그때 나를 찾아오게.’
‘왜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말했잖은가. 나는 빚이 있다고. 자네와 바쿠고 청년에게 매우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
‘여긴 내 스승이 머물던 곳이야. 한 달은 머물고 있을 것이네. 언제든 편히 찾아오게.’

그날, 남은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미도리야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 퇴근 후에 저녁도 먹지 않고 호텔로 돌아와서도 미도리야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거의 잘 수 없었다. 마치 과부하가 걸린 기계 같았다. 송두리째 잃어버린 열일곱 살 이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해일처럼 닥쳐오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었다. 분하고 화가 나서 미도리야는 젖은 입술을 깨물며 몇 번이고 침대 안에서 뒤척거렸다.

나는 왜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걸까.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미도리야는 선배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연차를 신청했다. 그래, 일이 많았으니 너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그렇게만 말해주는 선배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미도리야는 조만간 밥 한 번 사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 길로 호텔을 나서 택시를 잡아탔다. 유에이로 향하는 길목 중간에 미도리야가 태어나 오래도록 자라왔던 동네가 있었지만 들르지는 않았다. 엄마와 마주칠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아니,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왜 숨겼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왜 ‘캇쨩’을 내게서 감춰버렸는지.

유에이는 여전히 높다란 담장으로 굳건하게 싸여 있었다. 경찰 배지를 보여주고 용건을 얘기하자 경비는 잠시 곤란한 얼굴을 하다 어딘가에 인터폰을 걸기 시작했다. 기다리는동안 미도리야는 한참 수업 중인 운동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체력테스트를 진행하는 모양인지 익숙한 파란 체육복을 입은 소년과 소녀들이 트랙을 따라 돌고 있었다.
교학처로 가시면 됩니다. 통화를 끝낸 경비가 말했다. 교학처는 중앙 본관에 있었다.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미도리야는 직선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본관을 향해 걸었다.
교학처에는 직원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내용을 미리 전달 받은 모양인지 이미 상자 하나를 챙겨 들고 있던 직원이 미도리야를 반겼다. 양도 절차는 생각보다 간소했다. 직원이 미도리야의 신분증을 복사하는동안 건네받은 서류에 서명을 했다. 서류에도, 상자에도 바쿠고 카츠키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당신에게 맡겨진 상자니까요. 직원이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여기, 서류 위쪽에 적힌 이름 보이시죠? 미도리야 이즈쿠… 애초부터 당신에게 맡겨진 상자예요. 근데 희한하다. 10년 전부터 여기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수령자라는 이 사람이 나타나야 말이죠. 아, 저희끼리 내기를 했었거든요. 이 사람이 오는지, 안 오는지.’

근데 진짜 오긴 오네요. 직원이 볼을 긁적거렸다. 작년 봄부터 유에이 교학처에 근무하기 시작했다던 직원은 이 상자를 누가 맡겼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미도리야는 알겠노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자는 양팔로 안기에는 약간 컸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가벼운 그 무게에 미도리야는 잠깐 목이 멨다.

당신은 이 상자 안에 열일곱 살 때까지의 모든 삶을 버렸을 텐데 이게 당신이 남긴 전부라니, 당신이 남긴 삶의 무게가 고작 이뿐이라니.

‘첫사랑이죠?’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미도리야를 향해 직원은 말했다. 미도리야는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답을 하는 대신 옅게 웃어준 후에 미도리야는 교학처를 빠져 나왔다.
아까까지 체력 테스트를 하고 있던 학생들이 시끄러웠다. 테스트에 미달되었는지 훌쩍훌쩍 울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을 지나 미도리야는 천천히 교문을 향해 걸었다. 머리 위로 벚꽃잎이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완연히 봄이었다.

바쿠고 카츠키는 4월 20일, 벚꽃이 저물 무렵에 태어났다고 했다.

태어난 산부인과조차 같았었다. 이제 이 상자를 열어 본다면 당신과 내 생의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교집합처럼 겹쳐 있을까. 그 단서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미도리야는 도망치듯 유에이의 교문을 벗어났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상자는 미도리야의 무릎 위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바쿠고 카츠키가 남겨놓은 마지막 단서였다. 흔들리는 차창에 머리를 깊게 기대면서 미도리야는 제 무릎 위에 놓여있는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왜 이 상자를 나에게 맡겼을까.

올마이트는 바쿠고의 소꿉친구가 자신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났고,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장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같은 곳을 다녔다. 그럼 우린 가깝고 친했을까.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을까.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더듬었다. 이 입술에 머물렀다 급하게 사라졌던 입술이 생각났다. 당신이 내게 했던 그 기이한 키스를 떠올렸었다.

정말 친구, 그뿐이었을까.

택시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요금을 치르기가 무섭게 미도리야는 상자를 안고 그대로 택시에서 튀어나와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미도리야는 상자 위에 단단히 붙어 있던 TOP SECRET 표찰부터 떼어냈다. 상자를 여는 손이 온통 서툴고 급했다. 찾고 싶었다. 그보다 알고 싶었다.

당신과 나는 정말 친구였는지.

상자를 다 열기도 전에 눈이 먼저 속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유에이의 교복, 그리고 히어로 코스튬으로 추정되는 검고 붉은 옷과 복면이었다. 꼭 불꽃같은 코스튬의 디자인에 미도리야는 왠지 웃음이 났다. 이런 옷도 당신은 근사했을 거야. 빌런이 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런 코스튬을 입고 사람들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었을 것이다. 옷을 걷어내자 노트와 교과서 몇 권이 보였다. 노트 속은 깨끗했고 수업 시간에 지루하다고 손장난이라도 했던 모양인지 몇몇은 귀퉁이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이론 성적도 좋았으면서…”

10년 전의 당신은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몇 배를 노력하면서 그 노력을 티내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수업시간마다 엎드려 자는 척을 하거나 딴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당신을 모두 보았을까. 바쿠고가 턱을 괴고 조는 모습, 필기를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생각을 흐려 버렸다. 슬퍼서 그랬다. 어쩌면 가슴이 아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이 모든 순간을 나는 알고 있었을 텐데 나는 왜 당신의 사소한 순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는 걸까.

노트와 교과서를 들어내고 미도리야는 다시 상자 속을 헤집었다. 상자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어 가던 그 즈음이었다. 밑바닥을 쑤시던 손끝에 둔탁한 종이뭉치가 툭 걸렸다. 미도리야가 제 손에 걸린 종이뭉치를 상자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불룩 부풀어 있던 종이봉투였다.

“엽서나 편지 같은데…”

미도리야가 봉투 안에 손을 밀어 넣고 손끝에 걸리는 얇은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올마이트의 모습이 그려져 있던 작은 엽서였다. 엽서의 하얀 면에는 크레파스를 꾹꾹 눌러 쓴 글씨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캇쨩.
- 데쿠 씀

엽서를 바라보던 숲색 눈이 크게 열렸다.

“설마…”

다급해진 손길이 봉투째로 내용물을 침대 위에 우르르 쏟았다. 침대 위에 흩어진 엽서와 카드, 편지는 눈길로 얼핏 훑어도 서른 통이 넘었다. 잡히는대로 뒤집고 펼치면서 미도리야는 적혀있는 편지의 내용들을 확인했다. 어떤 글씨는 올마이트의 엽서처럼 어렸고, 어떤 글씨는 좀 더 나이를 먹은 소년이 쓴 것처럼 단정했다. 어떤 편지는 구겨진 것을 꼼꼼히 펼쳐 클립을 끼워 놓았고, 어떤 편지는 반으로 찢겨진 것을 다시 붙인 듯 셀로판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모두 한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 찢겨졌다 다시 붙은 편지를 더듬어 읽어보던 미도리야의 눈이 지진처럼 일렁거렸다. 이 글씨를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 글씨야…”

색이 덜 바랜 편지와 엽서일수록 낯이 익었다. 찢겨진 편지는 함께 적힌 날짜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라면… 미도리야가 가만히 시기를 헤아려보았다. 열다섯 살,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때다.
편지의 내용은 평범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로 주저하면서 시작을 연 편지는 유에이에 꼭 합격하길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미도리야가 눈앞에서 찢어진 편지를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너는 왜 이 편지를 찢었을까. 스스로 찢었을 편지를 왜 다시 꼼꼼하게 붙여 보관했을까. 이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였을까. 나는 왜, 당신과 만든 이 순간들을 단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는 걸까.
미도리야가 크게 마른 세수를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억은 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분했다. 화가 났다. 데쿠라는 애칭도, 이 필체의 주인도 모두 자신이다. 그런데도 나는 기억할 수가 없어. 당신과 만들었을 수많은 순간들 중 단 하나도 기억해낼 수가 없어. 그 점을 미도리야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편지만 보아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당신과 공유했던 걸까.
일생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당신과 함께 만들었던 걸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가슴이 불에 덴 듯 크게 울렁거렸다.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미도리야는 침대 위에 흩어져 있는 편지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이건 단순한 편지들이 아니다. 미도리야가 통째로 상실해버린 열여섯 살 이전 생의 조각들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 상자를 나에게 남겼을까.

“설마 내가 기억을 잃을 걸 알고 있었다거나…”

흐, 웃던 숲색 눈이 돌연 크게 열렸다.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 그거다. 흩어져 있던 미싱링크가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느낌이었다. 바쿠고 카츠키는 자신이 기억을 잃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린’ 사건과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그때 미도리야는 빌런 연합의 비밀 아지트 중 한 곳에 열흘동안 갇혀 있었다고 했다. 구출된 미도리야는 히어로들에게 단 한 마디를 남기고 정신을 잃었었다. 제 친구, 친구가 이 안에 있어요.

“혹시 그 친구가 바쿠고 카츠키라면…”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의 의지로 빌런이 되었을까?

미도리야의 손길이 또 한 번 다급해졌다. 단서, 뭐라도 좋으니 단서를 찾아야 한다. 내가 남긴 편지 속에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십수 장에 이르는 편지와 엽서들을 헤집고 뒤집으며 미도리야는 그 안에 적힌 내용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맨 아래에 깔려있던 붉은 봉투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미도리야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이건…”

봉투는 다른 편지와 달리 스티커 한 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열어본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 봉투만… 우물거리면서 미도리야가 뒷면을 보이고 있던 봉투를 뒤집었다. 동시에 우뚝 멈췄다. 호흡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입술이 앞면에 쓰여 있던 그 문장을 천천히 발음했다.

“데쿠에게…”

바쿠고 카츠키가 남긴 편지였다.









*

창틈을 비집은 햇살이 칠이 벗겨진 바닥 위로 부옇게 반짝거렸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빛을 따라 꽉 감겨 있던 선홍색 눈이 천천히 열렸다. 햇빛 탓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낮은, 그러나 정중한 목소리가 소리를 죽여 떠들고 있었다.

“…닥터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의 신체는 이미 한계점을 돌파했어요. 이 사실을 아래 녀석들이 알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시가라키씨. 지금도 당신의 지위를 의심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알아, 안다니까.”

선홍색 눈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창고의 입구가 있는 오른쪽 방향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주체는 둘이다. 둘 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바쿠고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한 녀석은 시가라키, 한 녀석은 한때 시가라키의 오른팔을 자처했던 그 안개 녀석일 것이다.
무슨 얘기지. 바쿠고가 다 열 힘도 없는 눈꺼풀을 힘껏 일그러뜨리며 생각했다. 말투로 짐작해보건대 지금 시가라키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편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아아, 진짜. 그때 그 남자가 나서서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그 무개성의 기억을 지우지만 않았어도.”

지친 듯 반쯤 감겨 있던 바쿠고의 눈이 번쩍 열렸다. 주어가 없어도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는 빤히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소리 없이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데쿠다. 데쿠 녀석의 이야기다. 시가라키가 벅벅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땐 예측을 못 했단 말이야. 올마이트가 주동해서 자기 제자 기억을 지워버릴 거라곤…”
“이쪽에서 먼저 머리를 열고 해마를 건드렸으니 그들 딴엔 수가 없었겠지요. 아시잖습니까, 시가라키씨. 닥터는 아직도 원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때 방해를 받지 않고 ‘수술’을 그대로 진행했다면 원포올의 작동 원리를 샅샅이 분해해 그대로 선생께 이식할 수도 있었을 거라구요. 그랬다면 선생도 지금처럼 힘을 잃어버리진 않았겠지요. 올포원은 무한한 개성이 아니니까요.”
“……”
“지금은 저나 시가라키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선생께서… 그러니까 올포원이 힘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머지않아 알려지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모두 탈주하고 연합은 와해될 겁니다. 11년 전, 선생이 잠시 검거되던 때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가라키씨, 올포원의 개성을 다시 되살릴 세포는…”
“원포올을 계승받은 녀석들만 갖고 있지. 알아, 안다니까. 잘난 척은.”
“……”
“뭐, 됐어. 그 무개성은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니니까.”

못쓸 뿐이지. 시가라키가 킬킬 웃었다. 기억을 봉인 당해서 쓰는 방법을 잊었을 뿐이다. 그럼 되살려주면 되잖아. 시가라키는 덧붙였다. 그 자신의 생김처럼 생기를 잃은 탁한 목소리가 고요히 우물거렸다.

“우리는 ‘미끼’를 가지고 있거든. 그 새끼를 여기로 불러들일 미끼, 귀찮게 파묻혀 있는 기억을 다시 재생시킬 미끼…”

바닥을 향해 기울어 있던 바쿠고의 눈이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알 것 같아 그랬다. 데쿠 녀석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을 거다. 바쿠고가 사슬에 묶여 허공에 들려있던 빈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시가라키가 킥 웃었다.

“근데 아쉬워. 10년동안 참 쏠쏠하게 썼는데. 강했잖아, 저 녀석. 뭐든지 펑펑 터뜨려 버리고, 입은 거지같아도 말도 잘 듣고, 사람도 잘 죽이고, 건물도 잘 부수고…”
“……”
“이제 저것도 선생에게 흡수 되어야 한다는 게 좀… ”

아까워, 진짜 아까워. 시가라키가 입맛을 쩝 다시듯이 우물거렸다. 쿠로기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죠, 시가라키씨? 시가라키가 대답했다. 아니.
올 걸. 진짜. 진짜로.

“저런 쓰레기를 구하겠다고 두 번이나 목숨을 걸었었으니까, 그 무개성.”
“……”
“나머지는 뭐… 나타난 후에 생각해볼까.”

알겠습니다. 쿠로기리가 대답했고,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겹겹이 높게 쌓여있던 드럼통 위까지 검은 안개가 크게 펄럭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곧 이어 시가라키까지 뚜벅뚜벅 발소리를 남기고 멀어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바쿠고는 후 숨을 고르면서 기울어 있던 고개를 들었다. 시가라키도, 노우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는 바쿠고 자신뿐이었다. 바쿠고가 사슬에 묶여있던 손목을 천천히 흔들었다.

기회는 지금 뿐이다.

선홍색 눈이 잠시 머리 위를 살펴보았다. 손목을 결박한 사슬은 창고 천장까지 닿을만큼 높다란 크레인 끝 갈고리에 걸려 있었다. 조금만 팔을 흔들어도 사슬은 절그럭절그럭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쓸데없는 움직임은 금물이다. 바쿠고가 후 숨을 가다듬었다. 동작은 최대한 신속한 게 좋다. 그 채로 바쿠고는 뒤로 묶인 양손바닥을 천천히 펴고 오므렸다. 손톱을 뽑혀버린 자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제 손과 팔뚝을 따라 벌건 피딱지로 앉아 있었다. 손톱을 뽑힌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피딱지로 덮인 제 손바닥 안쪽에 땀이 고이게 하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선홍색 눈이 다시 한 번 흘깃 사슬이 묶인 쪽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씩 흔들어 댄 덕분에 크레인에 걸린 사슬 끝부분은 이제 갈고리 끝에까지 밀려 있었다. 몇 번 정도만 더 흔든다면 사슬은 완전히 갈고리를 벗어나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쉬웠다. 이 길고 무거운 사슬을 팔에 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 폭발로 적당히 끊어야 한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다.
시가라키도 노우무도 머지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들키면 모든 게 끝이다. ‘인질’인 덕분에 지금껏 숨을 붙이고 있었지만 녀석들은 필요하다면 약이라도 주사해 반쯤 뇌사상태로 만들어 놓은 자신을 계속 이 창고에 전시할 지도 몰랐다.
그렇게 쉽게 죽어줄 수는 없지. 바쿠고가 우득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홍색 눈이 픽 웃었다. 이미 한 번을 해봤는데 두 번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멍청아, 나는 이미 한 번은 네게 내 목숨을 걸었는데.

“그 등신새끼…”

그 ‘남자’는 만났을까. 미도리야의 맨션에 찾아가기 전에 겨우 그 남자의 은신처를 알아냈지만 연락은 닿지 못했다. 어린 소년이 전화를 대신 받았고, 바쿠고는 자신의 이름이나 연락처 대신 약속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전화를 끊었었다. 회신은 다시 여기에 끌려오는 동안에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뉴스에서 그 요란을 부려준 게 다행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남자가 탈주한 자신이 다른 곳도 아닌 미도리야 이즈쿠의 집을 찾아갔었다던 뉴스를 봤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만났다면, 너는 모두 들었을까. 내가 묻혀버린 자리를 너는 발견했을까. 그렇다면 그 성격에 바닥을 볼 때까지 파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파고 파고 또 파다 너의 삽날에 커다란 상자 하나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을까. 그 상자를 열었을까. 그 안에 내가 묻은 것을 너는 보았을까. 내가 남긴 말을 너는 읽었을까. 내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너는 들었을까. 들었다면 너는… 너는…

하, 씨발.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등신 새끼가.

“존나… 보고 싶네.”

너의 자리들을 나는 다시 더듬어 볼 수 있을까. 내게 안길 때마다 숨을 들이키던, 긴장하던, 그럼에도 내 옷자락을 꽉 잡고 고집을 부리던 너를 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올랐다. 코밑에서 흔들리던 그 숲색 머리칼, 그 언저리에서 달콤하게 피어오르던 너의 체취, 너의 체온… 귓불 밑을 가볍게 매만지면 너는 양뺨을 붉게 물들이고 가끔은 잔뜩 긴장해선 히끅 딸꾹질을 했다. 입술을 겹칠 때면 미간부터 꽉 찡그리던 습관, 가늘게 떨리던 속눈썹, 떨어지면 죽어버릴 사람처럼 내 목을 꽉 안고 매달리던 팔, 부끄러울 때마다 흐물흐물 웃어버리던 그 눈, 그 색이 깊던 눈… 턱을 젖히고 헐떡이면서도 너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몇 번이고 말했었다. 좋아해, 캇쨩.

진짜,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바쿠고가 볼 안쪽을 꽉 씹었다. 힘줄이 불거질만큼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놓으면서 예리해진 선홍색 눈이 다시 주변을 살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손 안은 이미 충분히 땀에 젖어 흥건했다.
천천히 힘줄을 따라 펼쳐진 혈관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도 환청처럼 그 목소리를 들었다. 나를 부르던, 나를 향해 웃던, 나 때문에 자주 울던, 그럼에도 내게 목숨을 걸었던, 몇 번이고 나를 구했었던, 끝내 내 경계를 뚫고 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닿았던, 내가 두고 온, 내가 놓쳐버린, 내가 가장 미워했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

데쿠.
 
미도리야의 손끝이 떨며 편지 위에 새겨진 글자 위를 더듬었다.

사랑한다, 이 멍청아.






*

고요했던 주택가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밤 7시를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올마이트, 손님이 찾아 오셨나봐요!”

식탁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꼬마가 창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쳤다. 암체어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던 올마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TV의 볼륨을 줄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꼬마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챙겨 들고 식탁에서 일어나 자기 방이 있는 안쪽으로 콩콩 뛰어 들어갔다. 올마이트는 잠시 흐뭇한 얼굴로 꼬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곧 현관 쪽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외시경을 들여다본 올마이트는 현관 앞에 서있는 사람을 확인하곤 체인부터 풀었다.
급하게 문이 열렸다. 현관 앞에 서있던 미도리야가 헉, 밭은 호흡을 몰아쉬었다. 구불거리는 숲색 머리칼은 아직 밤이면 추운 이런 날씨에도 옅게 젖어 있었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 거예요.”

곧장 본론이었다. 올마이트가 숨을 가다듬는 옛 제자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오른손 안에 쥐고 있던 편지를 힘껏 움켜잡으며 미도리야가 굳게 다문 입술을 다시 열었다. 색이 깊은 숲색 눈이 거기에 있었다. 숲처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전 아직도 당신이 저와 무슨 사이였는지,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와주세요.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올마이트.”
“……”
“찾고 싶어요. 다시… 되찾고 싶어요.”

그게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도 올마이트는 묻지 않았다. 크게 열린 현관을 따라 봄바람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미도리야가 등진 밤 어둠 위로 벚꽃 잎이 하얗게 나부끼고 있었다. 영원히 거기 머물러 있을 것처럼 고요히 일렁거리던 숲색 눈이 천천히 감겼다 다시 열렸다. 버릇처럼 힘껏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미도리야는 이윽고 남은 말을 밀어냈다.

“데려가주세요.”
“……”
“B, 아니. 바쿠고 카츠키가 있는 곳.”

내가 너를 잃어버린 그곳. 크게 일렁이던 숲색 눈을 따라 고여있던 것들이 주근깨가 흩어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기에… 모두 두고 온 것 같아요.”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 내가 잃어버린 전부. 



(계속)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썼다 헉헉헉....... 오늘 안에는 도저히 무리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나서 힘을 내보았읍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자세한 후기는 일단 퇴근... 퇴근한 후에............

+ BGM은 피드백으로도 추천을 받았는데 저 진짜 너무 깜짝 놀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편 브금으로 진작 빼둔 곡이었는데 추천해주셔서 넘 놀랐읍니다ㅠ.ㅠ.ㅠ.ㅠ.ㅠ.ㅠ.ㅠ 함께 추천해주신 다른 곡들도 넘 감사해요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중히 듣고 소중히 사용하겠나이다ㅠ.ㅠ.ㅠ.ㅠ.ㅠ.ㅠ

+ 그리고 이제 완결이 머지 않은 시점에서 엔딩에 대해 언뜻 말해보자면 (가리기→) 저는 최애커플로 새드엔딩을 못씁니다^ㅇㅠ.ㅠ.ㅠ.ㅠ.ㅠ.ㅠ.ㅠ 그러니까 믿어주셔도 좋아요 (?) 메리배드도 아닐 듯 합니다.

?
  • ㅇㅌ 2017.04.04 22:03 SECRET

    "비밀글입니다."

  • 키키 2017.04.04 22:06 SECRET

    "비밀글입니다."

  • nagi 2017.04.04 23:58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7.04.05 00:08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7.04.07 09:47
    하..너무좋아요 너무 인생의 빛과소금입니다 루카님 ㅠㅠㅠㅠ애시당초 바쿠고가 빌런인 설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이유로 빌런이 되는건 정말 원작과도 너무 개연성있고 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제안의 바쿠고와 맞아떨어져요 ㅠㅠㅠㅠㅠ 제가 3주전에 첫 입사를 해서 회사를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틧터도못하고 ㅠ그랬는데, 요즘 적응해서 짬내서 들어와보니..역시 루카님은....ㅠㅠㅠㅠ짬짬이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항상 너무 소중하게 한자한자 보고있답니다 ㅠㅠㅠ
  • 조지 2017.04.09 19:34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7.04.12 12:41 SECRET

    "비밀글입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히로아카 2차 소설 BBS. 캇데쿠 중심으로 달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지에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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