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원작 기준 11년 후, 바쿠고랑 미도리야가 빌런 x 프로파일러로 재회하는 이야기

BGM / Royal Deluxe - I'm a Wanted Man


http://youtu.be/HrzZEdPx5A4






손은 말하지 않는다


@ruka_tea




07





영웅은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기에 완전하지 않다. 아무리 강한 영웅이라고 해도 어차피 인간이다. 그 영웅의 개성이 무엇이건, 타고난 힘이 얼마나 강하건 상관이 없다. 실수를 하고, 누를 범하며, 과오를 저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미도리야가 앞서 걷는 왜소한 사내의 등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한때 세상은 이 남자를 신이라고 불렀다.

단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던 영웅은 10년 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아직까지도 올마이트가 왜 은퇴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은퇴회견장에서도 올마이트는 그저 건강과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입장을 밝혔을 뿐 기자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명하지 않은 부분은 고스란히 소문이 되어 남았다. 인터넷에서는 아직도 올마이트의 은퇴를 둘러싼 소문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사실 몰래 결혼한 여자가 있었다거나, 그리하여 이젠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은퇴했다는 제법 훈훈한 이야기에서부터 은퇴 압력을 받았다는 음모론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소문 두 가지는 미도리야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올마이트가 빌런에게 구금된 자신의 제자를 구출하려다 실패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전부터 올마이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경찰본부 윗선에서 압력을 넣어 은퇴를 종용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믿고 싶어 했다. 올마이트는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었고,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는 완전한 존재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믿는다는 후자 쪽이 그랬다. 올마이트는 경찰청장이 오랜 지인이라고 말했었다.

“굉장히 오랜 사이지. 그 남자가 신출내기 형사였던 시절부터 얼굴을 봤으니까 말일세, 하하.”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올마이트가 지하 맨 마지막 층의 버튼을 누르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비록 체구와 느낌은 달라졌어도 그 웃는 얼굴만큼은 한참 때와 다름이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미도리야가 제 방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 포스터 속의 호탕했던 모습처럼.

“오랜만에 도시로 나왔더니 좀 갑갑하군.”

전에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던 건지 모르겠군. 올마이트가 미도리야를 향해 쓰게 웃었다. 말을 우물거린 얼굴이 천천히 숫자가 가라앉는 엘리베이터의 상단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미도리야는 퍽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네는… 그래, 조금 갑작스럽겠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긴장한 얼굴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미도리야가 눈 끝을 떨어뜨리며 부슬부슬 웃었다.
이해하네. 올마이트는 그렇게만 말했다. 이미 그 속을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나는 은퇴한 후로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자네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도 일부러 궁금해 하지도 않았었지. 그게 자네들에 대한 예의이자 속죄라고 생각했네. 나는 이제 자네들 앞에 나설 자격을 상실해버렸으니까.”
“……”
“자네는 내 상상 이상으로 근사하게 자랐군, 미도리야 청년. 그렇게 작은 소년이었는데 말일세.”

지금은 나보다도 키가 크군. 올마이트가 눈을 휘어트리며 껄껄 웃었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마치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자식을 다시 찾은 아버지처럼 올마이트는 한동안 미도리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지하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 곧 1층이었다.

“자네는 궁금하겠지. 10년 전에 은퇴한 히어로가 갑자기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지목했으니 당황스러웠을 거야. 자네에겐… 아마 내 짐작대로라면 어떤 정보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 말일세.”
“그건 설마, 올마이트 혹시…”

뒷말을 다 물어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먼저 걸어 나선 올마이트의 뒤를 황급히 따르다 미도리야는 그제야 자신이 도착한 곳이 지하 5층임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수사 기록, 법정 기록 등 경찰 본부의 모든 기록물이 보관되는 자료실이었다. 숲색 눈이 느리게 끔벅거렸다.

“자네에게 열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자료실의 보안 게이트 앞에 멈춰선 채로 올마이트는 담담히 말했다. 미도리야가 잠시 흡 숨을 들이켰다. 놀라서 그랬을 것이다. 묻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었다. 10년 전보다 그늘이 깊어진 두 눈이 쓰게 웃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할 말이 없는 사람이네. 아니, 자격이 없지. 이 점에 대해서는 차차 알게 될 테지만…”
“……”
“미안한데 문 좀 열어주지 않겠나?”

아. 둥그렇게 눈을 연 미도리야가 보안 패드에 사원증을 가져다 댔다. 고맙네. 올마이트가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열린 게이트 안쪽으로 성큼 앞서 걸어 들어갔다. 다시 챙긴 사원증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미도리야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근데 왜 자료실에 온 걸까.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은퇴한 영웅이 3년차에 접어든 프로파일러와 함께 경찰 본부 자료실에 찾아올만한 용무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묻지도 못했다. 타이밍을 빼앗긴 탓이었다.

“여긴 여전히 좁고 복잡하군.”

한때 최고였던 영웅이 주변을 둘러보며 잔주름이 앉은 눈가를 부드럽게 휘어트렸다. 자료실에는 구석에서 사건 기록을 정리 중인 사서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침묵을 담담히 가르면서 올마이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영원히 자네 앞에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네. 그래야 한다고 여겼지. 하지만 며칠 전 뉴스를 보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설마 자네 이름을 다시 그 친구의 이름과 함께 보게 될 줄이야…”
“그렇다는 건 즉,”

미도리야가 흡 숨을 들이켰다. 숲색 눈이 올마이트를 담담히 쳐다보았다. 올마이트의 눈빛은 평온했다. 이미 무엇을 물을 것인지 짐작하고 있다는 듯 잠잠한 그 눈을 향해 미도리야가 남은 말을 천천히 이어 붙였다.

“B, 아니… 바쿠고 카츠키에 대한 일이군요.”
“그래.”

올마이트가 맨 마지막 책장의 높은 모퉁이를 따라 왼편으로 돌았다. 5년에서 10년 전의 자료들이 보관되는 섹션이었다. 더불어 막다른 곳이었다.
벽에 딱 붙어 서있는 빽빽한 두 개의 책장과 기록들을 제외한다면 이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막다른 책장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 올마이트를 미도리야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책장을 살펴보다 올마이트는 돌연 손을 뻗어 오른쪽 세 번째 책꽂이의 아래판을 가만히 더듬었다. 동시에 영원히 그곳에 붙박여 있을 것 같았던 책장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을 물러섰다. 이런 곳에 문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 문을 열 수 있는 건 나와 몇몇 친구들뿐이지.”

올마이트가 말했다. 책장이 회전한 공간을 따라 나타난 좁은 통로 안쪽은 이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10년만이라 전기가 제대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군. 올마이트가 약간 자신을 잃은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우뚝 굳어 있던 미도리야를 바라보았다.
미도리야 청년. 올마이트가 말했다. 아직도 영문을 몰라 둥그렇게 열려있던 숲색 눈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올마이트.

“들어가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네만, 미도리야 청년.”
“네.”
“왜 바쿠고 카츠키는 자네를 찾아왔을까.”

미도리야가 잠시 입술을 습관처럼 짓이겼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탓이었다. 그보다 숨이 막혀 그랬다. 그 이름을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 어지러웠다. 가끔은 가슴이 쿵쾅쿵쾅 소란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열흘동안 스스로에게 쉼 없이 던져보았던 질문이기도 했다.

바쿠고 카츠키는 왜 나를 찾아왔을까.

“그건… 제가 담당 수사관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보복을 위해서요.”
“자네 상관들은 그렇게 말했지. 뉴스에서도 그렇게 들었네. 하지만 자네는? 나는 자네 의견이 궁금하네. 어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미도리야 청년.”
“……”
“바쿠고 카츠키는 정말 보복하기 위해서 자네를 찾아간 걸까.”

숲색 눈이 바람을 만난 잎새처럼 옅게 흔들렸다. 입술을 힘껏 씹었다 높으며 미도리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일렁거리는 눈길을 천천히 떨어뜨리며 미도리야가 연거푸 우물거렸다.

“아닐 거예요, 분명히.”
“그럼.”
“아는 사이였던 것 같아요.”
“……”
“근거는 없어요. 단서도 없구요.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냥,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랬던 것 같은… 그래요, 그런 기분이 들어서…”
“……”
“제가 바쿠고 카츠키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오래, 굉장히 오래.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유를 뚜렷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분이 그랬다. 익숙했었다. 탈옥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던 바쿠고 카츠키가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부터 열흘동안 미도리야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기억에 없는 단서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내 몸에는 컸지만 당신에겐 꼭 맞았던 티셔츠, 언젠가 먹어본 기억이 있던 가츠동, 나를 데쿠라고 부르는 당신, 하필 내 스케치북에 쓰여 있던 애칭으로 나를 불렀던 당신…

그게 다 우연일까?

열흘동안 본부에 말도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바쿠고를 숨긴 것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 밀어내고 선을 긋기에 당신은 내게 완벽한 타인이 아니었다. 기분이, 감정이, 마음이 당신을 자꾸 내게 돌려세웠다. 목을 졸렸을 때 미도리야는 곧 죽을지 모른다는 감각보다 그 손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던 자신의 감정이 더 무서웠었다. 그런 손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열일곱 살 이전의 삶에서 당신을 한번쯤 마주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당신은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말문이 닫힌 숲색 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올마이트는 잠시 쓴웃음을 삼켰다. 역시. 그리고 문 안쪽을 향해 돌아서며 다시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10년 전에 나는 참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지. 다시는 자네 앞에 나서서도, 내 존재를 드러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어.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네만…”
“……”
“내가 너무 늦은 게 아닌지도 모르겠군.”

미도리야가 볼을 긁적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대답을 해주는 대신 올마이트는 열린 문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 벽 어딘가를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머리 위에 매달린 전등은 몇 번 끔벅거리기는 했지만 기능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제야 어둠에 잠겨있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숲색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다섯 평 남짓의 방이었다. 변변한 자리 하나 보이지 않는 방 정가운데에는 커다란 모니터 한 대와 데스크탑 한 대만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들어오게. 올마이트가 말했다. 더불어 덧붙였다.

“나는 지금부터 자네에게 한 소년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네.”

미도리야가 주춤주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전원이 켜진 모니터 한가운데에서 로딩을 알리는 원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하단에 박혀있던 로고를 미도리야가 잠시 눈으로 읽었다. TOP SECRET. 올마이트가 로딩이 끝난 시스템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보게, 미도리야 청년.

“세상이 잊어버린, 아니, 지워버린 소년이지.”










*

그곳은 말하자면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장소였다.

오래고 낡은 창고였다. 아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이런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가던 길을 재촉할 것이다. 한때는 어느 제약회사의 개발품들을 보관하고 검사하는 창고였지만 회사가 도산하면서 헐값에 경매로 넘어간 후로는 공식적으로 누가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버려지고 잊혀진 장소였다. 이런 곳에는 언제나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 모여든다. 대부분의 슬럼가들이 그런 것처럼.

퍽, 소리가 창고의 높은 천장을 둔탁하게 울렸다. 바쿠고가 헉, 밭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땀과 먼지가 범벅으로 엉킨 이마를 타고 흐른 붉은 피가 바쿠고의 발치 앞으로 뚝, 떨어졌다.

이런 장소에는 죽은 것들의 냄새가 난다. 늘 뭔가가 썩거나 타거나 젖거나 짓무르고 있었다. 비릿하고 독한 냄새는 아무리 코를 막으려고 해도 비강을 뚫고 감각을 흔들었다. 이 냄새에만큼은 10년이 다 지난 지금도 좀처럼 적응을 할 수 없었다. 바쿠고가 뒤로 들려 사슬로 단단히 묶인 양팔을 무력하게 흔들었다.
길게 뻗은 사슬은 크레인에 연결되어 있었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이렇게 매달린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른다. 낮과 밤이 몇 번을 저물었는지, 며칠이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바쿠고는 알 수 없었다. 팔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힘껏 악문 입술은 피딱지가 앉아 이젠 숨을 삼키는 것조차 괴로웠다.

아, 진짜. 세 걸음 앞에 서있던 시가라키가 짜증스럽게 제 목을 긁적거렸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연거푸 말했다. 재수 없어. 진짜, 재수 없어.

“며칠을 달아놔도 입도 벙긋 안 해. 왜 그래, 바쿠고군. 그렇게 입 닥치고 있는 성격 아니잖아. 안 그래?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면 되는데 얘길 안 하네.”
“……”
“아, 짜증나.”
“……”
“누구한테 전화하셨냐고 물었잖아, B씨. 응? 그 토끼만 만나고 온 거 아니지? 그렇지?”

말해봐, 응? 걸음을 당긴 시가라키가 바쿠고의 발밑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손으로 덕지덕지 덮인 얼굴 위로 회색 눈동자가 탁하게 번들거렸다. 생을 잃은, 죽음 같은 눈동자였다. 하. 지쳐있던 선홍색 눈이 입 꼬리 끝을 힘없이 비틀었다. 나가서 뒤져버려.

“찌질한 새끼.”

시가라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득달 같이 몸을 튕겨 일어난 것과 동시에 시가라키의 무릎이 바닥을 향해 기울어져 있던 바쿠고의 얼굴을 힘껏 갈겼다. 퍽, 퍽, 탁음이 침묵을 연거푸 흔들었다.
바쿠고가 컥, 핏물이 섞인 구토를 했다. 그제야 시가라키가 무차별적으로 찍으며 걷어차던 구타를 멈췄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시가라키는 다시 바쿠고의 시선 밑으로 쪼그려 앉았다. 바닥으로 기울어진 얼굴은 곳곳이 터져 엉망진창이었다. 코와 입을 타고 떨어진 핏물을 보며 시가라키가 히, 웃었다.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있잖아, B씨. 네 개성은 폭발이잖아. 땀 말고 피를 줄줄 흘려도 폭발할 수 있지 않을까? 보고 싶네. 이 손톱을 하나하나씩 모두 떼어내서 피가 뚝뚝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아, 그럼 손을 못 쓰려나.”
“……”
“웃어. 웃어봐, 바쿠고군.”
“……”
“와, 얼굴 무서워. 진짜 악당이네.”

사람 죽이겠어. 시가라키가 어깨를 떨며 엄살을 부렸다. 어떻게 들어도 조롱이다. 10년 전에는 이런 말에 일일이 핏대를 올리며 덤벼들었었다. 이젠 그러지 않는다. 화를 잘 내고 이기는 것에만 연연하던 소년은 10년 전 이곳, 이 창고에서 죽었다. 대답을 삼킨 바쿠고가 입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을 퉥 뱉어냈다. 그 모습이 딴엔 재밌었는지 시가라키가 킥,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운 얼굴이 바쿠고의 얼굴을 바짝 올려다봤다. 색을 잃은 탁한 눈동자가 죽음처럼 속삭였다.

“근데 왜지? 왜 그 새끼는 너를 숨겨줬을까?”
“……”
“왜 이딴 쓰레기를 신고도 안 하고 숨겨준 걸까…”
“……”
“이제 이 쓰레기가 자기 소꿉친구였다는 사실도 기억 못할 텐데, 왜 널 열흘씩이나 봐준 걸까.”

이상해. 시가라키가 연거푸 말했다. 진짜 이상해. 이마를 타고 흐른 피에 절반이 흠뻑 젖은 얼굴을 뚫을 듯 올려보다 시가라키는 돌연 자리를 털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바쿠고를 바라보며 색을 잃은 눈이 씩 웃었다. 이미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낸 듯한 얼굴이었다. 새 장난감이 떠오른 아이 같았다.

“뭐, 그딴 건 됐어. 선생이 널 죽이지는 말래. 재미없지? 근데 뭐… 널 살려놔야 그 무개성 새끼가 쫓아온다나 뭐라나. 그럼 그 남자가 나타날 거라나, 뭐라나.”
“……”
“걱정하지마. B씨는 그냥 뭐, 미끼 같은 거잖아.”

10년동안 계속.

귓가에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선홍색 눈이 흠칫 열렸다. 그뿐이었다.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얼굴로 시가라키는 바쿠고의 시야를 저벅저벅 벗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얼핏 올려보다 바쿠고는 픽 입꼬리 끝을 비틀었다. 멍청한 새끼.

“그 새끼는 안와.”

멈칫 멈춰선 시가라키가 잠시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요란하게 걷어찬 드럼통이 바쿠고의 눈앞까지 굴러왔다. 시가라키가 또 한 번 습관처럼 목을 사납게 긁어댔다. 손에 덮인 입술이 그제야 짧게 대답했다.

“아니, 올 거야.”
“……”
“그러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응? 바쿠고군.”

창고 뒤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노우무였다.







*

일급 기밀을 보관하는 장소라고, 올마이트는 말했다.

“본부의 간부급들도 모르는 곳이네. 아마 자네도 몰랐을 테지만, 미도리야 청년.”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기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기밀은 보통 두 가지 목적에 의해 지정된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서, 혹은 완벽한 은폐를 위해서.
둘 중 어느 쪽인가요? 미도리야는 물었다. 올마이트가 화면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은폐. 주름이 앉은 영웅의 눈이 쓰게 웃었다.

“10년 전, 이곳에서 한 소년에 대한 기록이 삭제되었지.”

올마이트가 말했다. 화면 속에서 시스템 구동 상태를 알려주는 로딩 바는 이제 60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조금씩 차오르는 바를 조용히 뚫어 보았다.
멋진 소년이었지. 올마이트가 그리운 얼굴로 웃었다.

“소년은 남다른 존재였네. 남보다 빼어난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엘 가도 주목을 받았지. 또래들은 늘 그 소년을 추앙하며 따랐어. 모두 소년이 영웅이 될 거라고 여겼었네. 올마이트의 뒤를 잇는 최고의 영웅이 될 거라고, 패배를 모르는 그런 영웅이 될 거라고.”
“……”
“소년 역시 그런 영웅이 되고 싶어 했지. 똑똑하고 욕심이 많은 소년이었네. 가진 것보다 몇 배를 더 노력했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영웅이 되기 위해서… 실제로 소년은 순탄하게 꿈을 이뤄가고 있었지. 소학교, 중학교를 거쳐 드디어 유에이에 합격했을 때도 말이네. 아주 성적이 좋았어. 우수한 재원이었네. 유에이는 소년에게 큰 기대를 걸었었네만…”

올마이트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소리가 마치 멘 것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웠지. 올마이트가 말했다. 우리가 지워버렸네.

“이곳에서 그 소년의 기록을 삭제했지. 정확하게는 소년의 정보를 은폐한 것이지만 우린 그 소년의 인생을 지워버렸어. 비겁한 어른들이, 비열한 어른들이…”
“……”
“소년의 존재가 부끄러워서, 유에이의 자랑스러운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 유에이 출신 빌런이란 타이틀을 주고 싶지 않아서…”
“……”
“소년을 지키지 못한 과오가 부끄러워서.”

처음 듣는 이야기야. 미도리야가 빈 주먹을 힘껏 쥐었다. 모르는 이야기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그럼에도 알 것 같았다. 가슴이 자꾸 울렁거려서 미도리야는 몇 번이고 무심결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지러웠다. 그 파도 같은 현기증을 가까스로 짓누르며 미도리야는 천천히 물었다. 올마이트.

“그 소년이… 저와 관계가 있나요?”
“있지. 더불어 자네는 그 소년의 삭제된 삶을 볼 권리가 있는 유일한 타인이네.”
“……”
“소년에겐 소꿉친구가 있었지. 힘이 없던, 개성이 없던, 약했던, 그러나 그 누구보다 용기 있고 담대했던…”

모니터 속의 숫자가 90을 지나 100에 닿았다. 로딩이 끝난 화면에 수십 개의 네모 박스들이 떠올랐다. 올마이트가 스크린을 터치하며 마치 자물쇠가 걸린 작은 상자 같은 파일들을 헤집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에 파묻혀있던 파일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소개하지, 미도리야 청년.”

닫혀있던 파일이 천천히 화면 위에 떠올랐다.









*

솔직히 말해보자고. 시가라키가 말했다. 이젠 설 힘도 잃어버린 바쿠고의 무릎이 눈앞에서 힘없이 꺾여 있었다.

“너는 악당이야. 쓰레기, 개자식, 악마, 살인마… 죽어봤자 천당에도 못 갈 걸.”
“……”
“못 돌아가. 그치. 다시 예전처럼 못 살잖아. 그리고 내가 볼 땐 바쿠고군, 이 일 엄청 어울리거든. 못됐고, 재수 없고.”
“……”
“아, 손톱은 하나만 뽑을 걸 그랬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끝을 내려다보며 시가라키가 재미있다는 듯 킬킬 웃었다. 바쿠고의 왼손의 검지와 중지는 뭉툭하게 비었다. 힘껏 악다문 잇새를 따라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얼굴을 시가라키는 잠깐 질린 듯 쳐다보다, 이내 말았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재미있어 참을 수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었다.

“근데 바쿠고군, 바라잖아. 감히 주제도 모르고 꿈꾸고 있잖아.”
“……”
“그 새끼가 안 왔으면 좋겠지? 오면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화날 거지? 그래도 오면 좋겠잖아. 오면 기쁠 거잖아. 여기 오면 그 새끼도 위험하고, 그 남자까지 위험해질 텐데도 그러잖아.”
“……”
“돌아가고 싶잖아.”
“……”
“그 무개성이 있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잖아. 다시 옛날처럼 그렇게 살고 싶잖아.”
“하, 누가, 씨발.”

헉, 날선 숨을 잇새로 몰아내며 바쿠고가 힘껏 입꼬리를 비틀었다. 안 원해. 안 바란다고, 그딴 거, 씨발. 시가라키가 킬킬 웃었다.
거짓말.

“내가 다 아는데, 내가 다 봤는데?”
“……”
“너나 그 새끼나 그냥 ‘친구’ 아니었잖아.”










*

모니터를 바라보던 숲색 눈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그 얼굴에, 그 이름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미도리야는 그대로 우뚝 굳었다. 미도리야가 화면 상단에 떠있던 그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가슴이 도려지는 것 같았다.

바쿠고 카츠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당신에 대한 정보가 그토록 미약했는지,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당신에 대해서는 그 이상 알 수가 없었는지.

“바쿠고 카츠키는, 아니, 빌런 B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무렵부터 빌런 연합에 합류했네. 유에이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을 공식적으로 모두 지워버렸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빌런 B의 정보가 그곳에 있었다. 생일, 출신지역, 출신학교와 성적제반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는 17세 이후로는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이 자료를 진작 볼 수 있었더라면 미도리야는 이미 진작 빌런 B에 대한 개인 프로파일링을 끝마치고 탈옥 후에도 소재지를 바탕으로 행동패턴을 분석한 후 출몰 지역을 예측해 전담팀에 전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도리야는 프로파일링에 대해서도, 수배 중인 빌런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고향이 같았다.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모두 자신과 겹쳐 있었다. 그중 6번이 같은 반이었다. 증명사진 속의 B는, 바쿠고 카츠키는 미도리야가 입었던 것과 같은 교복을 입고 다소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겹쳐있었다. 너무 많은 우연들이 겹쳐 있었다. 숲색 눈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올마이트, 혹시…”
“그래. 자네 짐작이 맞네.”

올마이트가 자료 속 바쿠고 카츠키의 사진을 보며 쓰게 웃었다. 씻지 못할 과오를 저지른 어른의 얼굴이었다.

“나는 저 소년과 약속을 했었지. 그리고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군.”
“……”
“자네가 알아야 하네. 그리고 자네는 알 권리가 있어. 저 삶의 대부분은 모두 자네와 함께 만든 것이니까. 달리 말하면 자네가 잃어버린 가장 큰 기억이기도 할 테지.”

올마이트가 천천히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미도리야는 차마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못이 박혀버린 것처럼 우뚝 굳어있는 얼굴을 뚫어보며 올마이트가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미도리야 청년.

“자네일세.”

바쿠고 카츠키가 잃어버린 유일한 것.




*





「하나만 약속해요.」

소년이 힘껏 이를 악물었다. 속눈썹까지 흠뻑 젖은 선홍색 눈은 그때도 제 스승을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었다.

「나는 잊고 살 거라고, 이딴 새끼. 얼마든지 씨발 잊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이 녀석 인생에서 나를 지워. 전부.」
「……」
「데쿠 따위가 뭐라고, 존나. 이깟 새끼가 내 인생에 뭐라고, 하.」
「……」
「근데 그래도 안 되면,」
「……」
「내가 못 참으면, 보고 싶어서 씨발 머리가 돌아버리면, 그러다 결국에 씨발 이 새끼를 찾아가면, 그게 이 녀석에게 위협이 되면, 그 미친 새끼들이 이 새끼를 찾아내면 그땐…」

등을 지고 선 소년의 등이 가늘게 떨렸다. 잔뜩 멘 목소리가 간신히 남은 말을 더듬었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말하지 않았던 유일한 말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고개를 숙여본 유일한 순간이었었다.

「도와줘, 당신이.」
「……」
「제발… 도와줘요.」

스승은 그때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했다. 미안해서, 염치가 없어서, 부끄러워서.



(계속)



현실에 계속 치이던 중에 2기 뽐뿌 받고 요것을 스스슥 씁니다........ 이제 좀 뭔가 풀리는 것도 같고 ㅠ.ㅠ.ㅠ.ㅠ.ㅠ.ㅠ 2기도 시작했으니 요것도 힘내서 얼른 쓰고 싶은데 대체 왜 저는 왜 이렇게 바쁠까요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늘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 덕분에 힘내서 쓰고 있숴요 흑흑 ㅠㅠ


+ 오타 지적해주신 분 감사해요ㅠ/////ㅠ 알림 받자마자 빛과 같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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