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고전에_알오버스로_캇데쿠
* 알파 귀족 x 오메가 황태자 이야기


http://youtu.be/2-9CnV_cLsE




태자가 독을 삼켰다.

의관부에 속해있는 의관들 중 직책이 높고 직무가 막중한 이들은 모두 가림없이 별궁으로 향했다. 길고 긴 진맥이 시작되었고, 별궁 주방에서는 약을 달이는 냄새가 쉼 없이 흘러 나왔다.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임시로 수의관의 역할을 대리 중인 의관부의 수의관보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내관장의 앞에 엎드렸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수의관보가 고개를 조아렸다. 주름진 눈을 좁히던 내관장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다. 수의관보도, 함께 동석해 있던 다른 의관들도 그저 내관장이 걱정이 깊어 그런 것이려니 했다. 이즈쿠 태자를 곁에서 가장 가까이 뫼셔온 자였으니 그 심려도 깊을 것이라며, 모두 그리만 생각했었다. 그저 키리시마만이 그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내관장이 물었다.

“전하께서 자신 것이 무엇이냐.”
“전하께서 삼키신 것은 그 증상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오두烏頭, 투구꽃인 듯 합니다. 오두는 본래 사람의 혈맥을 떠돌며 기운을 왕성하게 하여 맥을 어지럽게 하다 호흡을 막고 숨통을 누르는 맹독입니다. 다행히 미량을 삼키시어 당장은 목숨을 건지셨습니다만…”

수의관보가 말을 흐렸지만 내관장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루 나절동안 기운을 가라앉히고 열을 진정시키는 온갖 약재들이 동원 되었어도 결국 태자의 의식을 깨우는 데엔 실패했다. 이대로 두면 목숨이 위중하다. 공교롭게도 이 나라 안에는 이만한 맹독을 다스려본 의관이 아무도 없었다.

“야기 의관께서 계셨더라면 분명 이 열을 다스리실 수 있었을 텐데…”

수의관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눈치를 살피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관장은 그 말에 문책을 하거나 꼬투리를 잡는 대신 주름진 눈 사이를 깊게 좁혔다. 그보다는 태자가 어떤 연유에서 이 맹독을 삼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지가 급했다.
태자가 먹고 삼키는 식사와 탕약은 모두 이 별궁의 주방과 의관부의 약재소에서 오는 것이고, 의관부에서는 법도에 따라 매일 약재의 출납 일지를 적어가며 엄중히 관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두는 궁에서는 오래 전에 사용이 금지되었다. 실수로 찻잔에 섞여 들어갈만한 약재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약을 태자전하께서 드시는 찻잔 안에 몰래 섞어두었다. 이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자는 의관부를 제외한다면 오로지 한 사람 밖에는 없었다.

미도리야는 그 시간, 바쿠고와 함께 있었다.

“예, 그때는 분명히 정위께서 태자전하와 함께 계셨습니다. 저희는 차를 올려놓고 두 분이서 계시라 자리를 비켜드렸지요.”

사건의 내사를 위해 별궁으로 온 내정부의 관리들은 내관장의 진술을 듣는 내내 얼굴이 어두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속해 있는 내정부의 정위가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 받는 상황이라 더욱이 그랬다. 처음에는 찻잔을 들고 나섰다는 붉은 머리의 젊은 의관도 용의선상에 있었으나 곧 제외 되었다.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던 바쿠고의 대례복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관리들은 검은 대례복 안에서 투구꽃의 말린 뿌리와 잎을 넣어둔 금빛 주머니를 발견했다.

“언쟁을 하셨었지요.”

내관장이 진술했다. 분명 그 성을 내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했다.

“항상 사이가 가깝던 두 분이 어떤 연유에서 다툼을 하셨는지는 소인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허나 평소와 달리 두 분이 언쟁하시는 소리가 이 늙은이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단 말입니다. 저는 혹여 정위께서 태자전하께 해코지를 하시지는 않을까 마음이 염려되어 문도 열지 못하고 바깥에 내도록 서있었습니다. 정위께서 영리하고 현명하시나 그 성질이 불같으시고 쉽게 화를 잘 내시는 심성이라… 그것은 같은 내정부에서 일하고 계신 두 분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바쿠고의 입버릇과 성격에 대해서는 내정부는 물론이고 궁에서 녹을 받는 관리들과 가신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었다. 평소의 성격과 행실은 관리들의 의심을 지워주는 결정적인 개연성을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그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나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해칠만한 명분과 이유를 가장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저도 지금껏 짐작도 못했습니다.”

내관장이 비탄에 일그러진 눈가를 가만히 손등으로 훔쳤다.

“감히 태자전하를 해치고 그 보위를 물려받으실 생각을 하시다니요. 황제폐하의 하나뿐인 후계를 해치려 드시다니요. 사람 생각은 알 수가 없다더니, 참…”
“……”
“이즈쿠 태자께서 쓰러지시면 다음으로 황위를 물려받게 될 사람은 바쿠고 정위가 아니십니까.”

말마따나 바쿠고가 이 나라 제 1의 가신이자 황태자와 사촌지간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관계와 위치, 당시 말다툼을 했다는 정황을 따져 보아도 살해 동기는 확실했다. 바쿠고 카츠키는 황제가 되는 야망을 품고, 미도리야 이즈쿠를 독살하려 했다. 하루가 꼬박 걸린 조사와 정리 끝에 내정부에서는 사건을 보고하는 문서 안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붉은 봉투에 봉해진 보고서는 곧장 태휘전으로 향했다.

“내정부의 정위, 바쿠고 카츠키가 이즈쿠 태자를 독으로 음해하려 하였습니다.”

내정부의 관리들과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도 황제는 그들의 얼굴을 또렷이 보는 대신 제 손으로 구겨버린 보고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나 황제는 곧장 말이 없었다. 관리들이 다시 한 번 절을 올렸다. 부디 폐하.

“이 나라 지엄한 법도에 맞춰 가감 없이 처벌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이즈쿠는…”

굳게 닫혀있던 황제가 이윽고 침묵을 깼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천천히 떨리던 것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 황제의 울대가 느리게 밀렸다. 떨린 호흡을 가다듬으며 황제는 가까스로 다시 말을 이었다.

“태자는… 어찌 되었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허나 의관부에서 해독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중이니 기다리신다면 곧…”
“살려. 아니면 너희를 모두 효시하여 궁 밖에 걸어둘 것이다.”
“……”
“그 녀석은… 하, 자식은 본래 아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더니.”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 죽였을 것이다. 그것을 바란 것이 아니다. 황제가 빈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견뎌야지. 어떻게든 너는 살아야지. 이제 와 얼굴도 보지 않고 별궁에 구금한 아들에게 부정父情이 있을 리 만무하니 이것은 연민이나 동정은 아닐 것이다. 황제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불길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가장 위대하며 찬란한 태양조차 가슴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억누르지는 못했었다. 하다못해 야기라도 있었더라면… 허나 6년 전에 의술을 전파하겠다며 나라를 떠난 야기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소식조차 조정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황제는 생각했다. 고한 것처럼 카츠키가 범인은 아닐 것이다. 고동치는 가슴께를 꽉 누르며 황제의 선홍색 눈이 날카로워졌다. 직접 권했던 다음 대의 후계 자리를 스스로 거절했음을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황제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미도리야를 독살하여 그 죄를 카츠키에게 덮어 씌웠다.
허면 이유가 무엇일까. 이 나라에서 태자는 분명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선 카츠키 역시 마찬가지다. 황제가 신경 쓰이는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왜 하필 그 두 아이였을까.

이런 미심쩍은 기분을 분명 이전에도 느꼈었다. 19년 전, 한 여인이 해를 품었던 그때, 미도리야 이즈쿠가 태어나던 바로 그때…

당연히 양인일 것이라던 모두의 짐작과 달리 이즈쿠는 음인이었다. 이 여인을 폐비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대신들 중 오로지 수의관 한 사람만이 이 일에 의심을 품었었다. 세월이 흐른 뒤, 수의관은 자리를 내려놓고 의술을 베풀겠다며 국경을 넘어 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황비를 폐비시킬 때에도, 갓난 이즈쿠를 별궁으로 쫓아낼 때에도, 수의관이 떠날 때에도 늘 같은 자가 황제의 곁에 있었다. 지금 별궁을 돌보고 있는 내관장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은 아니겠지. 허면 누구를 불러 물어보면 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선홍색 눈을 예리하게 좁히다, 황제는 이내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보고서에서는 그날, 이즈쿠 태자가 독을 마시고 쓰러지던 순간에 바쿠고 카츠키와 내관장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했다. 그 자의 이름을 황제는 이미 한 번 들어 알고 있었다.

키리시마 에이지로…

그 의관은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지. 보고를 위해 앉아 있던 내정부의 관리들이 잠시 이 편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황제는 별 내색 없이 몸을 돌려 앉았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들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말이었다.

“바쿠고 카츠키를 입옥入獄시키도록 해라.”







그날, 바쿠고 가문의 고택에 초병들이 들이 닥쳤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며 미츠키 공주가 초병들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까지 뽑아들고 앞을 막아서며 한참 시끄러웠으나, 곧 바쿠고 카츠키가 스스로 나타나 오라를 받으며 소란은 가라앉았다. 순순히 손목을 묶여 끌려가는 제 아들 앞에서 공주는 울었으나 바쿠고의 얼굴은 담담하고 평온해 보였다고 그 자리에 있던 하인들은 회고했다. 마치 모두 잃은 사람처럼, 이제 세상사 모든 것을 다 그 손에서 놓아버린 사람처럼, 심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것을 그렇게 잃은 것처럼.
해가 높고 날이 좋았다. 미도리야 이즈쿠가 독을 삼키고 쓰러진 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를 보았다
@ruka_tea



12









정위의 잘못이 아닙니다. 쓰러진 미도리야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으며 머리가 붉은 의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었다. 허나 바쿠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다른 내관들에게 등을 떠밀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놓으면서도 같은 생각에 어지러웠다. 숨이 막혔다. 차라리 심장이 멎은 것 같았었다.

막을 수 있었다. 데쿠가 그 독을 마시기 전에.

조금만 더 일찍 눈치를 챘어야 했다. 키리시마라는 이름의 그 의관이 아까와 달리 불안한 얼굴을 할 때부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미도리야를 불편한 얼굴로 쳐다볼 때부터 어렴풋이 불길한 징조는 느꼈었다. 허나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미도리야는 어릴 적부터 어차피 눈치가 늦고 둔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쿠고는 자기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그 잔을 쳐냈더라면, 그리하여 네가 아예 그 잔을 입에 댈 수도 없었더라면, 그 망할 차를 아예 마시지 않았더라면.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넋이 나간 바쿠고를 쫓아 별채로 올라오며 몇 번이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었다. 그 말에 대꾸할 기력도, 정신도 없어서 바쿠고는 엄마의 코앞에서 세차게 방문을 닫아버리곤 그대로 의복도 갈아입지 않고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누가 때려죽여도 곁에 있을 걸 그랬나… 몇 번이나 그 생각을 해봤지만 그때마다 허탈한 웃음이 머릿속을 흐려 놓았다. 감히 그 곁을 지킬 염치도, 자격도 없었다. 양손으로 덮은 눈 밑으로 하염없이 쓴웃음만 터졌다. 메마른 양뺨이 자꾸만 따끔따끔 당겼었다.
지키기는 개뿔. 따끔한 뺨을 타고 기어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연거푸 밀리는 울대 안쪽이 너무나 아팠었다. 차마 소리 내서 울 수도 없을만큼.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피가 베일만큼 씹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악몽처럼 제 곁에 누워있던 숲색 눈이 지진처럼 떨었다.

캇쨩… 눈물을 툭 흘리며 미도리야가 비명처럼 애원했다. 살려줘.

그 밤 내내 바쿠고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며 단 한 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밤새도록 네가 죽는 꿈을 꾸었다. 나를 바라보던 숲색 눈과 그 떨리던 시선,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과 새파랗게 빛을 잃어가던 너의 손… 귀를 바짝 붙여 제대로 듣지 않으면 알 수도 없을만큼 숨결은 희미했고, 자신을 더듬으며 꼭 끌어안던 그 체온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운 손에 밤새도록 바쿠고는 목을 졸리거나, 놓쳐버리는 꿈을 꾸었다. 바깥에서 엄마가 초병들에게 소리를 지르던 소리가 들려 올 때도 바쿠고는 여전히 그 꿈 안에 갇혀 있었다. 제 손목에 초병들이 밧줄을 묶을 때에도, 이윽고 창문 하나 없는 좁은 감옥의 독방에 갇힐 때에도 바쿠고는 순순했다. 그 기질을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던 감옥의 간수들은 바쿠고의 이런 태도를 영 의아하게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평온할 수가 있어? 진작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텐데.”
“저러니 더 수상한 거지. 지금껏 공주마마와 가문 덕분으로 호의호식하며 잘만 살았는데 이제 역적으로 황제폐하께 목이 달아날 지경이 되었으니, 쯧쯧…”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와, 나는 정말 짐작도 못했네. 아무도 찾지 않는 태자전하랑 어울려준 유일한 사람이었잖아. 아무리 외사촌이라지만 대단한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허 참…”
“권력 앞에 우정이 어디 있겠어? 그렇게 드나들면서 기회를 노린 거지, 뭐. 사이도 별로 안 좋았다던데? 그날도 둘이 말싸움하는 걸 별궁 내관들이 다 들었다잖어.”
“참, 사람 일 알 수가 없다니까. 저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어우.”

다 들린다, 씨발 새끼들아. 바쿠고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그러나 그 소리에 일일이 대거리를 하고 덤벼들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을 항변할 힘도 없었다. 나는 아니라고. 내가 씨발, 그 새끼를 어떻게 죽일 수가 있겠냐고. 어차피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멋대로 떠드는 말이다. 얼굴을 양손으로 덮은 바쿠고가 소리없이 입매를 밀었다. 자꾸만 실없는 헛웃음만 비져 나왔다.
황제께선 어찌 나오실까. 나를 가두라 명했다 하니 만약 태자가 이대로 위중하여 숨을 거두게 되면 목을 치라는 하명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기야, 그것도 그것 나름 나쁘지는 않았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 것은 하나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바쿠고가 힘없는 몸을 추스르며 흙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그 등신 새끼.

“목숨은 하, 존나 질길 줄 알았는데.”

삼킨 즉시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니 보통 맹독이 아닐 것이다. 뭐였을까, 적어도 투구꽃은 아니었을까. 의관은 아니었으나 바쿠고도 얻어 들은 지식으로 그 약재가 가장 독성이 강하여 금지되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투구꽃은 단지 뿌리 하나만으로도 그것을 삼킨 자의 사지를 마비시키고 의식을 흐리게 만든다. 들판에 먹이를 먹겠다고 나선 소들이 그 꽃을 뜯어 먹고 죽어 나자빠지는 통에 농가에선 그 꽃의 싹만 돋았다 하면 무조건 뽑아 불태워 버린다고 했었다. 허니 매우 구하기 어려웠다. 자신 같은 일개 대신이 돈만 있다 하여 구해올 수 있는 약재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지금껏 감정으로 흐려져 있던 투미한 머리가 찬 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천천히 평온해졌다. 이대로 순순히 죽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이 약재를 구해올 수 있는 자가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혐의를 덮어 씌웠다. 틀림이 없었다.

그 자가 누군지 찾아야 한다. 돌아누운 흙벽을 뚫을 듯 노려보며 바쿠고는 생각했다. 너는 황제가 되고 싶어 했었다. 그딴 것도 살아서 하는 거지, 멍청한 새끼야. 그깟 차 한 잔에 쓰러져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맬 거면 지금까지 황제가 되겠다고 버티긴 왜 버텼냐. 억울하지도 않냐고. 허나 지금 바쿠고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독방은 개인적인 면회가 금지되어 있어서 이 나라의 공주인 엄마조차 자신을 찾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정황상, 감히 황태자를 시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니 더욱 더 엄하겠지.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죽지 말아야 한다. 소리 없이 볼 안쪽을 힘껏 씹은 바쿠고가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간수들은 이제 제 얘기엔 흥미를 잃었는지 지난 초일절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며 낄낄 웃고 있었다. 저 자들을 어떻게 구워삶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어떤 묘안도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죽지 않기를, 내가 어떻게든 죽을힘을 다 하여 이 감옥을 빠져 나갈 때에도 변함없이 네가 거기 있기를. 그때는 꼭 말할 거다. 바쿠고가 픽 입매 끝을 밀었다.

“짝인 걸 알면 분명 펑펑 울겠지, 등신 새끼…”

이번만큼은 운다고 타박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살아 있어라, 멍청아. 생각하며 바쿠고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믿어보지 않았던 이 나라의 해와 달에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빌고 싶었다. 미도리야 이즈쿠가 쓰러진 지 만 하루, 전날보다 이지러진 달이 떠오르고 있던 저녁이었다.









*

저 멀리 둥그렇고 훤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태양보다 눈부신, 태양보다 찬란한. 그 둥그런 달을 가리키며 제 곁에 앉아 있던 숲색 눈이 흐, 웃었다. 그 얼굴이 달보다 아름다워서 바쿠고는 그만 꿈인 것을 잊어버릴 뻔 했었다.

‘캇쨩, 저기 봐. 보름이야. 어찌 달이 저리 곱지?’

녀석의 머리에는 관이 없었고, 늘상 무겁게 그 몸을 짓누르던 곤룡포 대신 옥색의 간편한 장옷 차림이었다. 바쿠고는 그 차림새를 보고 이것이 꿈임을 알아차렸다. 허나 태자의 관도, 태자의 곤룡포도 걸치지 않은 미도리야는 제 평생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자유롭고 홀가분해보였다.
게다가 녀석은 달을 단 한 번도 좋아하지 않았다. 음인에게 달은 원하지 않는 발정으로 밀어붙이는 광기光氣의 징조이며, 짐승처럼 날뛰게 하는 저주스러운 존재다. 그럼에도 달빛을 올려보는 그 얼굴이 너무 고와서 바쿠고는 꿈인데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궁이라는 감옥도, 태자라는 족쇄도, 달이라는 광기도 온전히 벗어난 너는 그저 너였다.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개인이 온전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것 봐, 달에 있는 저 그림자… 꼭 토끼처럼 생겼, 캇쨩? 잠깐, 또 이렇게 만지면, 흐… 간지러워, 간지럽다니깐.’

아니, 멍청아. 그 달에는 네가 좋아하는 연꽃이 가득 피어있을 것이다. 너의 체취처럼 달콤하고도 은은한 향내를 뿌리며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그리며 한가득 피어 있겠지. 그런 감상적인 말들이 꿈인데도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바쿠고는 그저 그 얼굴을 가만히 감싸 쥐며 입술을 찍어 눌렀다. 부끄러운지 주근깨가 흩어진 양뺨을 발갛게 붉히면서도 미도리야는 적극적으로 바쿠고를 피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스르륵 힘이 빠진 속눈썹을 가만히 닫으며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눈높이에 맞춰 가만히 턱을 들어 올렸다. 겹쳐진 입술이 몇 번이고 떨어졌다 다시 닿으며 이내 깊어졌다. 슬며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눈이 마주쳤다. 눈 한 번 더럽게도 깊다. 꿈인데도 바쿠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커다랗고 깊은 푸른 달을 감춘 숲처럼, 곧 무성히 연꽃을 환히 피어 올릴 연못처럼, 그리하여 해를 품을 달처럼. 천천히 떨리며 너는 버릇 같은 웃음결을 흐, 밀어내며 가볍게 웃었다. 그 눈이 어쩐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큰 장마라도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바쿠고의 손에 제 손을 마주 겹치고 만지작거리며 너는 말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참 좋았을 텐데.

‘내가 태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음인도 무엇도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난 캇쨩을 만나지 못했을까?’
‘……’
‘나는 캇쨩의… 달이 되지 못했겠지?’

아니, 멍청아. 네가 무슨 모습이었어도 나는 기어이 너를 만나 너를 내 반려로 삼았을 거다. 네가 음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네가 숲을 지키고 밭을 일구며 사는 촌부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나는 우연히 사냥을 하러 너의 숲에 들어섰다 기어이 너를 보고 그 눈길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졌겠지. 네가 중인이었다면 너의 달이 아닌 너의 몸이 나를 잊지 못하도록 네 몸 안의 모든 길을 수십 번씩 꿰뚫어 나를 새겨 놓았을 것이다.
그 말들이 꿈인데도 다 뱉기도 어려울만큼 벅차서, 바쿠고는 그저 제 앞에서 느리게 눈을 끔벅이던 미도리야를 힘껏 끌어안으며 품 안으로 가두었다. 놀라면서도 순순히 제 품으로 빨려 들어온 미도리야가 바짝 닿은 귓가에서 흐, 웃었다. 그 웃음결에 언제나처럼 열여덟의 서툰 마음들이 와르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허면 나를 포기하지마.’

힘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품 안에 안긴 몸에서 천천히 체온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불길을 소실해버린 여름처럼, 해를 잃어버린 달처럼.

‘살려줘, 캇쨩… 제발, 나를…’

어둠 속에서 선홍색 눈이 번쩍 열렸다.

헉헉 밭은 호흡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던 바쿠고가 제 몸을 내려다보다 잠시 쓰게 웃었다. 죄수들의 허름한 장옷만 걸쳐 입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슴이 화살에라도 꿰뚫린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그래도 마음은 섰다. 바쿠고가 빈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폈다.
살려야 한다. 나는 그 새끼를 저승에서도 건져올 거라고 약조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뇌리에 퍼뜩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갔다. 지금은 이 나라를 떠나고 없는, 그러나 한때 이 나라를 떠나 대륙 최고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나다고 칭송 받았던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그를 스승이라고 불렀었다.

언젠가 그는 황소도 30분 내로 즉사시킬 수 있는 흑사黑蛇에게 물린 어린 아이의 목숨을 구했었다. 해와 달, 양인과 음인의 기질을 훤히 잘 알고 있던만큼 그는 몸을 운용하는 모든 기운에 해박했고, 몸에 해로운 기운을 제거하는 해독술에 특히 능했었다. 그래, 그 남자라면. 선홍색 눈이 고뇌와 번민처럼 예리하게 좁아졌다. 그 남자는 6년 전에 의술을 전파하겠다며 이 나라를 떠나 대륙 각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허나 바쿠고는 황제조차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는 그가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고, 누구에게 원조를 받으며 의술을 행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 존나. 망할 엄마를 만날 수만 있으면 얘기하면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독방엔 그 누구도 면회를 올 수 없다. 그 아무리 황가의 일원이고 공주마마라 하여도 이 일에 한해선 예외가 없었다. 바쿠고가 유난히 더 비죽거리던 색 밝은 머리칼을 크게 헝클였다.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서신이라도 전해야한다. 선홍색 눈이 쥐죽은 듯 조용한 옥사 바깥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복도 끝에서 아까의 간수 중 한 녀석이 멍한 얼굴로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바쿠고가 쯧, 혀를 찼다.
저런 녀석들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좁아졌다. 적어도 궁 바깥의 엄마에게 서신 한 통이라도 전해줄 수 있을, 이 궁에 기거하며 익숙하게 궁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 자. 자신의 직무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어디에건 갈 수 있는 자, 그래도 의심 받지 않는 자…
그래, 그 녀석이 적당하다. 입매 끝을 픽 민 바쿠고가 발끝으로 쾅, 옥살을 걷어찼다. 졸고 있던 간수가 그 소리에 놀라 흠칫 어깨를 좁히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거기 멍청이들. 불쑥 고개를 디민 바쿠고가 선홍색 눈 사이를 괴롭게 좁혔다.

“지금 배가 존나 아픈 것 같은데…”

간수들이 곤란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법도상 아무리 중역 죄인이어도 재판을 받기 전까지 끼니를 굶기거나 병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 불러올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러니까요, 이 야밤 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주저앉아서 말입니다. 자, 이쪽입니다. 계단 조심해서 내려오십시오.”

먼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간수가 허겁지겁 옥사로 따라 들어오던 키리시마를 향해 경고했다. 생전 처음으로 들어와 본 감옥은 키리시마의 짐작보다도 습하고 어두웠다. 한참동안 간수의 뒤를 쫓아 좁은 계단을 빙빙 따라 내려가는 동안에도 괴롭게 신음하는 죄수들의 목소리가 왕왕 고막을 쫓아왔다. 나는 진짜 죄 짓지는 말아야지… 키리시마가 어깨를 흠칫 좁히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지하 가장 깊은 층에 내려왔다. 옥사의 독방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했다.

“이쪽입니다.”

맨 끝 방 앞에 멈춰선 간수가 열쇠 꾸러미를 뒤지며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한 걸음 물러서 있던 키리시마가 발뒤꿈치를 들며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지만 맨 끝이라 복도에 걸린 횃불의 빛도 똑바로 닿지 않는 좁은 옥사 안은 매우 어두웠다. 겨우 옥사 앞에 힘없이 툭 놓여 있던 두 발을 보고 난 후에야 환자의 용태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간수가 끌끌 혀를 찼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서는, 쯧쯧…

“바쿠고 정위님, 의원을 불러 왔습니다. 별궁 탓에 의관부가 지금 일손이 부족한데 그래도 수습의께서 잠시 짬이 난다 하셔서… 어이구, 정신이 없으시네.”

아무리 죄수의 신분이라지만 공주마마의 아들이란 감투가 워낙 큰 탓인지 간수는 자연스럽게 경어를 했다. 축 늘어진 몸은 간수가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관님이 한 번 봐주셔야겠습니다. 말을 하며 간수는 열린 문 앞에서 슬며시 비켜섰다. 키리시마가 옥사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간수는 등 뒤에서 문을 걸어 잠궜다.

“허면 저는 저 앞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간수가 힘없이 웃었다. 알겠노라며 짧은 목례를 한 키리시마가 고개를 안쪽으로 돌리자 등 뒤로 뚜벅뚜벅 멀어지는 간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조금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흙바닥에 똑바로 누워 있던 색 밝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키리시마는 이 옥사의 죄수가 정말 병이 들어서, 아픈 곳이 생겨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 알 것 같았다. 이 남자가 무엇 때문에 뚜렷이 살가운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자신을 이곳까지 오도록 만들었는지,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지. 후 호흡을 가다듬은 키리시마가 행여 누가 들을 새라 낮은 목소리로 쓰러져 있던 바쿠고를 향해 조심히 말을 걸었다.

“아직… 의식은 없으십니다.”

시체처럼 고요히 누워있던 선홍색 눈이 어둠 속에서 스르륵 열렸다. 아, 역시. 키리시마가 쓰게 웃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키리시마는 잠시 입술을 꽉 악물었다 놓았다.

“이대로 나흘을 더 넘기시면 목숨을… 잃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바쿠고가 어둠 속에서 눈을 둥그렇게 열다, 이내 일그러뜨렸다. 말에 주어는 없었다. 허나 누구의 목숨을 말하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됐어, 씨발. 볼 안쪽을 힘껏 씹으며 바쿠고가 낮은 말을 잇새로 밀어냈다. 왜 이 의관이 저에게 사죄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자에게 사죄를 받고자 자존심까지 구겨가며 있지도 않은 복통 행세를 하며 간수들을 부른 게 아니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바쿠고가 잠시 옥사 너머를 흘깃 거렸다. 간수는 완전히 본래 자리로 돌아간 모양인지 복도 끝에서 흥얼흥얼 낮은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살릴 사람을 알고 있어.”

바쿠고도 뚜렷이 누군가를 가리켜 말하지 않았다. 허나 역시 이 머리 붉은 의관은 분명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너는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바쿠고가 낮은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우리 집으로.

“저잣거리 포목점 주인이 가장 믿을만할 거다. 오른쪽 뺨에 범에게 긁힌 흉터를 가지고 있는 자다. 그 자에게 가서 말해. 아드님께서 마님께 전할 말이 있다고.”
“……”
“스승님을 뵐 때가 온 것 같다고.”

키리시마가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다. 분명 말의 내용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선 이해한 모양인지 키리시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전할 용건은 그뿐이었다. 용무가 끝난 바쿠고는 가보라는 짧은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시 흙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허나 키리시마는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간수를 부르지도 않았었다. 뭔가 더 할말이 남은 얼굴이었다.

“두 분께 죄송하고 송구하여 감히 다른 얘기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정위… 저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돌아눕던 바쿠고의 몸이 다시 천천히 키리시마 쪽을 돌아보았다. 복도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빛을 등지고 앉은 붉은 머리 의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도 유독 낮았다. 행여 달별들조차 들어서는 안 되는 비밀을 발설하는 것과 같았다.

“해가 바뀌기 전, 지난 12월… 그러니까 보름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태자전하께 예기치 않은 발정이 닥쳐 괴로워하시던 그때, 그리하여 보름도 되기 전에 별채에 갇히셨던 그때 말입니다. 혹여… 정위께서 밤중에 별궁에 찾아오셨었는지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군. 말을 똑바로 해라.”
“동침하셨습니까.”
“……”
“발정 중이신 전하와… 관계를 가지셨느냐 여쭙고 있습니다.”

훅 찌른 말에 터진 과일처럼 우르르 쏟아진 키리시마의 말에 바쿠고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허나 이 붉은 머리칼의 의관은 제 얼굴 표정을 들여다보고 이미 그 답을 알았을 것이다. …하셨군요. 키리시마가 어둠결에서 쓰게 웃었다. 더불어 고개를 조아리며 거듭 덧붙였다.

“허면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절대 정위께는 이르지 말라 입단속을 하셨지만요, 하하… 제 생각에 정위께선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
“해를 보셨습니다, 태자전하께서.”
“……”
“정위의 아이를… 수태하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전할 말은 이뿐입니다. 키리시마가 쑥스러운 얼굴로 넉살 좋게 웃었다. 그밖에 다른 말은… 일단 지금은 제 목이 달아날 것 같아서요. 그리고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키리시마를 올려다보던 선홍색 눈이 넋을 잃은 사람처럼 우뚝 굳어 있다,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 존나. 바쿠고가 메마른 얼굴을 크게 쓸었다. 아이라니.

네가 내 해를 품었다니.

“죽을 수가 없겠는데, 이건.”

절대로. 바쿠고가 쓴 웃음이 번지던 입술 끝을 세차게 씹었다. 죽을 이유와 명분을 이제 모두 잃었다. 살 것이다. 그리하여 살릴 것이다. 어떻게든 너를 저승에서라도 건져오고 말 거라고, 나는. 굳게 볼 안쪽을 씹으며 바쿠고는 다시 한 번 키리시마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간수를 부르기 위해 몸을 돌리던 키리시마의 걸음을 낮은 목소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허면 네 놈에게 부탁이 한 가지 더 있는데.”
















*

강둑에 앉아 있던 금발의 풍채 좋은 사내가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오늘도 해가 좋았다.

“해를 업은 사람은 용감한 사람, 달을 업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해와 달이 사랑하여 짝이 되었네. 마음의 틈을 채우며 짝이 되었네.”

남자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평화로운 호숫가를 잠시 눈으로 둘러보았다. 남자가 태어나 자라온 고향에서 남쪽으로 3백리는 족히 달려야하는 이 나라는 언제나 봄이 빨랐다. 호숫가에는 벌써부터 성질 급한 들꽃들이 붉고 노란 꽃을 열고 봄바람결에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영 수면에 잠긴 찌는 소식이 없었다. 남자가 풍채만큼 유쾌한 얼굴을 슬며시 구기며 인상을 썼다.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오늘도 한 마리도 못 잡아가면 아이들이 실망할 텐데… 전체 가구가 100호 남짓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남자는 밭일이 바빠 낚시할 틈도 없는 어른들 대신 아이들에게 커다란 생선찜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이곳엔 풍토병 때문에 날 때부터 영양실조를 앓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런 아이들에겐 감초와 함께 푹 고아낸 잉어의 뼈가 매우 큰 보약이 된다.
허니 오늘은 기필코 잡아야 한다. 결의를 다진 남자가 다시 수면을 노려보던 순간이었다. 수면에 잠긴 찌 곁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나 수면 밑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의 그림자가 아님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남자의 인상 좋은 얼굴이 쓰게 웃었다.

“오늘은 종일 낚시만 하고 앉아 있었을 생각이었는데…”

손님이라니. 남자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수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공이 송구한 낯으로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른쪽 뺨에 깊게 패인 흉터를 가지고 있던 사내가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허나 아마 여기에 계실 것이라며 촌장께서 알려주시는 바람에…”
“아니, 괜찮네. 자네가 기다리지 않고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인 모양이군, 허허. 하기야, 3백리를 달려 왔을 테니 말이네. 그래,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 반나절은 달렸을 텐데…”
“예, 덕분에 좋은 여정을 했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사내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뒤늦은 인사를 했다. 낚싯대를 놓고 일어난 남자가 바지춤에 슥슥 문질러 닦은 손을 내밀며 멀끔한 관리 차림의 사내에게 악수를 청했다. 남자가 풍채처럼 호방한 얼굴로 껄껄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자네를 여기서 만나니 반갑구먼. 이게 몇 년 만이지… 6년만인가?”
“예, 카츠키 도련님과 태자전하께서 열두 살이 될 때 떠나셨으니 딱 6년이 된 것 같습니다.”
“자네는 여전히 바쿠고 댁에서 일을 돕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공주마마는 무탈하신가? 아, 지난달에 보내주신 금전은 요긴하게 잘 썼네. 매달 공주마마 덕분에 이곳 아이들도 점차 좋아지고 있어.”
“마님께서도 어르신의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늘 기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 허허. 6년동안 꾸준히 연통을 넣어주시고 도와주시는 유일한 분이 아니시던가. 감사한 일이지. 카츠키는? 그리고 태자전하는 잘 지내고 계신가? 벌써 올해로 열여덟이 되었겠군. 내가 즉위하실 무렵엔 꼭 찾아가겠다고 약조를 드렸었는데 말이야, 허허.”

남자의 호방한 웃음에도 사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하는 대신 사내는 곤란한 얼굴로 눈길을 피했다. 잠자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실 사내가 나타나 자신을 찾을 때부터 좋은 일이 아닐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헌데 편지가 아니라 자네가 직접 찾아온 걸 보니 그 댁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아니면 태자전하의 안위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거나.”
“…예, 어르신. 송구스럽게도 그러합니다. 저희를… 아니, 카츠키 도련님과 이즈쿠 태자 전하를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츠키 도련님께서 직접 저에게 언지를 넣어주셨습니다. 스승님을 뵙고 싶다고.”
“……”
“이 나라, 아니, 이 대륙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술을 가진 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어르신. 사내가 굳어버린 남자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태자전하께서 지금 위중하십니다.”
“……”
“오두의 독을… 삼키셨습니다.”

남자가 신음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이름은 야기 토시노리였다.







(계속)




이번 주말에도 글을 못 쓰려나 싶었는데 어떻게든 쓰긴 하네요 허허허허… 이번 편에는 미도리야가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ㅠ.ㅠ.ㅠ.ㅠ.ㅠ.ㅠ.ㅠ 무튼, 모든 분들이 개강과 개학으로 바쁘신 와중에 저는 얼른 매조지를 하겠다고 이챠이챠 힘을 냅니다9999999 말씀드렸듯 완결까지 이미 결론은 다 나왔고, 엔딩은.... 아마도 손말이나 명왕 같은 다른 시리즈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러분 저를 믿어 주세여nnnnn
그럼 저는 또 이 글을 올려놓고 이제 남은 주말 휴식을 하러....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 그 덕에 늘 안 놓고 열심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흑흑 ㅠ.ㅠ.ㅠ.ㅠ.ㅠ힘내서 열심히 완결 짓겠습니둥 9999

?
  • 눈누난나 2018.03.11 20:59 SECRET

    "비밀글입니다."

  • 아지 2018.03.11 21:07
    세상에 루카님 이번 글도 너무 좋아여ㅠㅠㅠㅠ 데쿠 죽지 말고 잘 이겨내야 할텐데요ㅠ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ㅇvㅇ!
  • OOP 2018.03.11 21:50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8.03.11 22:07 SECRET

    "비밀글입니다."

  • rio 2018.03.12 22:14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 사랑해요ㅜㅠㅠㅠㅠㅠㅜ 2018.03.14 22:21 SECRET

    "비밀글입니다."

  • 등잔밑 2018.03.17 21:45 SECRET

    "비밀글입니다."

  • 꿀떡 2018.04.06 19:43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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