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오랜만에 이어봅니동. 그 김에 번호도 정리
* 고전풍 AU로 캇뎈

* 폐위된 태자 바쿠고와 칼 만드는 미도리야 이야기









도원 刀園
3







잎새마다 가을이 무르익는다. 계절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것 또한 잎새뿐이 아니었다. 마음이 잔뜩 소란해졌다. 위쪽으로 뻗어온 손이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였다. 조금 전까지 뼈대 곳곳을 난폭하게 매만졌던 그 손길처럼 선홍색 눈도 그때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신기하군. 술이 없어도 주정을 부릴 수 있다니, 하.”


바쿠고가 입매를 픽 밀었다. 그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바쿠고를 바라보는 숲색 눈이 돌이라도 던져진 연못처럼 떨고 있었다.


“이제 무시로 이 손길이 떠오르겠지. 망할 쇠를 두드릴 때마다 내 생각이 날 테고.”
“……”
“그 마음으로 만들어. 날 떠올리면서. 내가 아닌 것은 감히 담지도 말고.”


굳어버린 손에 바쿠고의 손이 얽혀왔다. 상처가 앉은 자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손을 제 입가로 들어올렸다. 입술이 닿았을 때는 숨이 막혔다. 문지른 입술을 떼어내며 눈길을 낮춘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뚫어 보았다. 또 그 눈이었다. 단단한 무쇠조차 녹여버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를 아득아득 삼켜버릴 것 같던 그 눈. 그 선명히 붉던 눈.


“하, 떨기는.”
“……”
“이래서야 농도 못치겠군.”


바쿠고가 픽 입매를 밀며 얽힌 손을 풀었다. 그제야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음을 깨달았다. 잡혀있던 손을 화드득 치웠다. 얼굴이 홧홧했다. 그 얼굴을 바쿠고는 두 번은 돌아보지 않았다. 눈만큼 선명한 붉은 장포가 뒤를 향해 펄럭 돌아섰다.


“용무 끝났으니 가보거라. 다음에는 완성된 걸 들고 와.”
“저, 하지만 자주 들르시라고 태자전하께서 분명 하명을…”
“……”
“아니. 아닙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물거리기가 무섭게 선홍색눈이 미도리야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런 눈빛을 안다.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정한 것에 토를 달지 말라는 엄명이다. 변덕스러워. 알만하다. 궁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생스럽게 했을지는. 그 말을 소리 내어 꺼내는 대신 미도리야는 꾸벅 인사를 했다. 허나 입구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손등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날, 미도리야는 온몸이 떨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약주를 한 잔 하고 진작 자리에 누운 야기가 건넌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분명 그 탓이 아니었다. 바쿠고의 손이 지나간 모든 뼈대들이 욱신거렸고, 뜨거웠다. 모로도 누워보고, 몸을 뒤척거려도 봤지만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대장간에 딸린 방 3칸짜리 살림채는 야기의 나이보다도 오래 되었고, 외풍이 심해 날이 추워질 무렵이면 꼭 솜이불을 덮고 자야 했었다. 허나 선득한 가을바람마저도 달아오른 몸의 열을 식혀주진 못했다.

그 손이 나를 만졌다. 그 손이 나를 파고들어 내 몸에 새겨진 뼈대들을 더듬고 덧그렸다.

그 감촉을 떠올릴 때마다 무릎 사이가 덜덜 떨렸다.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우물가로 달려 나갔다. 손이 시릴만큼 차가워진 물로 몇 번 세수를 하니 그제야 열이 식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거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살며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눈빛을 읽어본 적도 없을 터다. 그 타는 듯이 붉은 눈과 마주쳤을 때 미도리야는 호흡이 멈췄었다.

제 안의 무엇이 변했다. 형태가 달라졌다.

달궈진 쇳물처럼 그렇게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이대로 당신의 품으로 쏟아져 내린다면, 나는 모양조차 당신을 닮아버릴 것이다.
허나 미도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지 못했다. 눈치를 챈 건 오히려 스승인 야기였다.


“요즘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그날도 미도리야는 손잡이용 주물틀을 세공하다 손등을 다쳤다. 하던 일을 내던지고 득달같이 달려와 마른수건을 상처에 눌러주면서도 야기는 끌을 놓친 제자를 꾸지라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어두웠다.


“혹 태자전하께 좋지 않은 소리라도 들은 게냐?”


별장에 다녀온 날로부터 사흘째였고 별다른 일도 없었으니 달리 짚일 일이 없었을 터다. 헛다리를 짚은 것도 아니었다. 미도리야는 이 일로 야기가 마음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에게 맡겨진 소임이니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아닙니다. 부슬부슬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결 얼굴을 풀면서도 야기는 눈빛에 남은 걱정까지 다 지우지는 못했다.


“힘든 일이지. 이해한다. 다른 분도 아닌 태자전하잖느냐. 본래 어릴 적부터 까탈스럽기로는 남달랐지. 처음 나를 보았을 적엔 내가 가져온 목검이 맘에 안 든다고 면전에서 던져버렸어. 그때가 태자께서 일곱 살이 되던 때였지.”


야기는 덕이 높았고 사려가 깊었다. 인자한 스승은 워낙에 성실한 제자가 제 일에 집중하다보니 부담을 느낀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미도리야는 야기의 충고를 잠자코 들었다.
괜찮아. 야기가 미도리야의 다친 손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분명 그 분의 마음에 꼭 들 테니까.


“카츠키는, 태자전하는 빈말을 하지 않는 분이시지. 네 검이 맘에 든다 하였으면 그런 것이다. 좋은 얘기는 진심이어도 좀체 하지도 않는 녀석이거든, 하하.”


늘상 말을 조심하면서도 야기는 옛 이야기를 할 때면 카츠키라는 이름으로 바쿠고를 불렀다. 바쿠고는 태자라는 직분을 떠나서도 야기에게 그만큼 의미 있는 존재였다. 미도리야가 그러하듯 바쿠고 역시 그랬다. 그 관계를 확인할 때마다 미도리야는 어쩐지 죄책감을 느꼈다. 기실 이 괴로움의 원인은 그런 건전하고 떳떳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잠을 설쳤다. 자다가도 제 몸이 뜨거워 미도리야는 불에 덴 듯 화드드 일어나곤 했다. 자연히 별장에는 발길을 차츰 끊게 됐다. 밤마다 내 살갗 밑에 고인 열기와 함부로 만져진 뼈대들이 당신을 기억한다. 그 아무리 경험이 일천하고 눈치가 늦되다 하여도 이것이 얼마나 불경한 감정인지는 미도리야도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이상을 자꾸 꿈꿀 것 같아. 당신의 그 눈을 볼 때마다.

바쿠고는 다음에는 완성품을 들고 오라 했다. 옳은 말이다.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얼른 끝을 내야한다. 내 끌과 망치가 멈추고 검이 완성되면 이 기묘한 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사념이 마음을 혼탁하게 흐릴 때마다 미도리야는 대장간에 나가 불앞에 앉았다. 주형틀에서 꺼낸 검을 꺼내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 즈음 마을에 새로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미도리야가 대장간에 구어박힌지 딱 보름째가 되던 때였다.







*

미도리야를 대장간 밖으로 내보낸 것은 야기였다.


“심부름을요?”


오늘도 미도리야는 아침 해가 나기도 전에 눈을 떴다. 전날 바람결에 식혀놓았던 검은 이제 제법 검날에 윤을 띠었으나 며칠은 종일 담금질을 반복해야할 터였다. 사흘쯤 쉼없이 두드리고 난 후에는 또 사흘동안 칼날을 벼리고 갈아야한다. 얼른 일을 시작할 요량으로 살림채의 좁은 들마루에 앉아 밥그릇에 절임반찬을 얹어 대충 요기를 하고 있으려니 야기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것으로 요기가 되겠느냐며, 제자의 부실한 아침을 한참 뚫어보던 야기가 미도리야의 눈앞에 금전 세 닢을 내놓았다. 심부름값이라 했다.


“포목점 주인이 가위를 부탁했었는데 갖다주는 것을 깜빡 잊었거든. 나도 늙어서 이젠 머리가 둔해졌어, 하하하.”


야기가 호방하게 웃었다. 그리곤 아직 영문을 몰라 눈을 뎅그렇게 뜬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덧붙였다.


“다녀오려므나. 나간 김에 시장통에서 가츠동이라도 한 그릇 비워도 좋겠지. 요즘 통 외출 없이 대장간에만 있었지 않느냐.”
“허나 스승님, 저는 태자전하의 검을...”
“잠시 쉰다 하여 그 검이 달아나기라도 하겠느냐. 만일 달아난다치면 내가 잽싸게 잡아주마.”


어찌 들어도 농이다. 야기가 어찌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지, 미도리야는 알고 있었다. 다녀오너라. 야기가 거듭 말했다. 사실 심부름은 핑계고, 덧붙은 이 말이 진짜 이유인지도 몰랐다.


“오늘은 나도 반갑게 환대해야할 벗이 있거든.”


어린 제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사려 깊은 스승에겐 워낙 아는 이가 많았다. 저녁 해가 저물면 잠시 망치를 내려놓고 시장통으로 나가 가깝게 지내는 동네 사람들과 술을 한 잔 걸치는 것이 야기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리 해도 지금껏 살림채로 누군가를 불러온 적은 없었다.
어떤 벗이기에 이토록 은밀히 만나는 것일까. 미도리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사정이 있듯 스승에게도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다. 궁금증을 잠자코 접고 미도리야는 빈 그릇을 치우고 스승이 내민 금전을 양손으로 긁어모으며 꾸벅 감사 인사를 했다. 그래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츠동을 참 맛있게 하는 시장통의 밥집이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새파랗게 높았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포목점 주인은 스승 대신 가위를 들고 온 제자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잘 벼려진 새 가위가 퍽 맘에 드는지 이리저리 날을 살펴보다 주전부리로 먹으라며 잘 말린 어포魚脯를 한꾸러미 담아 미도리야의 손에 들려 주었다. 대여섯 번쯤 허리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한 후에야 미도리야는 포목점을 나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며칠 사이 저잣거리에는 못 보던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여기에서 말을 타고도 열흘은 걸린다는 중부성만큼 거리가 북적거리는 형편은 아니었으나 못 보던 얼굴들이 늘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오색의 화려한 외투를 걸친 자들과 어깨를 부딪치기도 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하던 미도리야는 그들의 뒤에 걸린 벽보를 본 후에야 마을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유랑극단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뿐이야? 동쪽 사막부의 상단商團이 들어왔잖은가. 바다 건너 파람국을 다니는 치들이야. 별에 별 진기한 것들을 다 들고 왔어.”
“허 참, 이 작은 마을에 돈 날 구석이 있나?”
“모르지. 황태자가 유배되어 있다는 소문이라도 들은 것 아냐?”
“황태자가 금이라도 들고 쫓겨 왔대요? 별소리들을 다 하시네. 그냥 중부성으로 가던 길에 들러본 거라잖아요.”


삼삼오오 모여 두런대는 사람들을 미도리야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들려오는 이야기며 화려한 물감으로 칠한 유랑극단의 벽보 같은 것들이 미도리야에겐 약간 낯설었다. 하기야, 대장간을 열고 거리에 나선 것이 보름만이다. 게다가 날까지 좋았다. 느슨해진 입꼬리를 감추지 않고 미도리야는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청명한 가을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때도 그를 떠올렸다.

이렇게 청명한 날에도 당신은 그 별장에 홀로 있을까.

일을 봐주는 내관과 궁녀들이 있으니 완전히 혼자이진 않을 터다. 그럼에도 그리 느꼈다. 이젠 거기까지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해질만큼 여러 번 들러보았으나, 미도리야가 갈 때마다 바쿠고는 늘 홀로 있었다. 하기야, 남에게 방해 받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 듯 했어.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허나 자꾸 마음이 쓰인다. 잠시 입가를 당기며 고민에 빠졌던 미도리야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별장으로 오르는 언덕길이 저만치에 있었다.
첫 번째 대문간을 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익숙한 기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는 걸음이 급했다. 버려진 황족의 별장은 오늘도 고요했다. 잠시 외출이라도 했는지 늘 입구 쪽을 서성거리는 내관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왔노라 떳떳하게 고할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야 바쿠고의 말이 떠올랐다. 발끝을 향해 기울어진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다음 번에 볼 때는 완성된 것을 들고 오라 하셨는데…”


탁본을 뜬 그날로부터 열흘이 흘렀으니 주형鑄型에서 식힌 쇠를 꺼내어 두드리고 식히며 담금질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검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수없이 몰두하고 매만져야 한다. 허나 지난 열흘간 미도리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수시로 잡념에 사로 잡혔다. 쉼 없이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라던, 당신의 그 말은 저주고 예언이었다. 미도리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허탈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불 앞에 집중하고 앉아 있어도 하루하루가 모자란다. 괜히 여기에 있다가 타박을 들을지도 몰라. 여전히 고대 유령의 무덤처럼 거대하고 공허한 별장 안쪽을 흘깃 바라보다 미도리야는 몸을 돌려 섰다. 대문을 다시 넘어가려 할 때 그 소리가 들렸다.
분명 고양이의 울음 소리였다.


“어… 안녕? 길을 잃었어?”


정돈할 사람이 없어 무성한 수풀 앞에 노란 털의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세상에 난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딱 미도리야의 손바닥만한 고양이는 너무 작았고, 뼈와 가죽이 드러날만큼 바싹 말라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던 미도리야가 잠시 멈칫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 손을 탄 고양이는 어미에게 버림 받을 수 있다 들었었다.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돌봐줄 어미가 있었다면 이만큼 마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찌하지?

고민하다 마침 포목점 주인이 싸주었던 어포가 떠올랐다. 부스럭부스럭 하나를 꺼내 내밀자 냄새를 맡았는지 녀석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허나 선뜻 다가오진 않았다. 왜지? 고민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답을 찾아냈다. 미도리야의 손가락만한 어포는 새끼가 먹기엔 너무 크고 거칠었다. 내려놨던 어포를 잘게 찢고 조각을 냈다.
그제야 녀석이 조심조심 걸어와 냄새를 맡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노란 털을 곤두세우고 저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경계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작은 맹수였다. 숲색 눈이 흐 웃었다.


“너도 자라면 참 근사하겠구나.”


무릎을 모으고 웅크리고 앉아 미도리야는 녀석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제 겨우 젖을 떼었을 텐데 녀석은 작은 발톱으로 조각을 움켜쥐고 갓난 이로 잘근잘근 잘도 먹었다. 서두르거나 게걸스럽지 않은 게 희한했다. 품위가 있네. 흐 감탄을 하다 미도리야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고 보니.


“닮았어.”


이처럼 근사한 머리칼을 가진 이를 안다. 맹수는 맹수임을 감출 수 없다. 이처럼 거대하고 쓸쓸한 무덤에 갇혀서도 본래의 존명과 위엄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무리 자신의 산을 떠났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몸을 조금 더 기울이며 미도리야가 한참 식사 중인 녀석을 골똘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 넉자도 참으로 근사했었다.


“바쿠고 카츠키……”


그저 말했을 뿐인데도 혀밑이 타는 듯 했다. 마음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울렁거리는 호흡을 잠자코 가다듬으며 미도리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아이에게도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언제 어미를 다시 만나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거둘 수는 없겠지만, 가끔 이렇게 얼굴을 볼 적마다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저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츠키, 라고 부르면 목이 달아나겠지?”


아무리 폐위되었다 하여도 황족인데.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벌써 두 번이나 불렀다. 누가 들으면 참수 당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그런 성격인데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미도리야가 어깨를 힉 떨었다. 그랬다간 자신이 만들어 진상한 검이 제 목을 치게 될지 모른다. 그럼 들키지 않게 바꿔야지. 생각하자 입술이 멋대로 툭 열렸다.


“그럼… 캇쨩?”


어포에 머리를 박고 열중하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싫진 않은 모양이다. 자신감을 얻은 미도리야가 다시 한 번 같은 이름을 불러보았다. 캇쨩.


“오늘부터 널 캇쨩이라고 부를게. 어때?”
“……”
“맘에 들어?”


녀석이, 캇쨩이 대답처럼 울었다. 덩치는 작았지만 울음소리는 그만한 새끼치곤 꽤 위용이 있었다. 앞으론 종종 너를 보러 들러야겠구나. 미도리야가 느슨해진 입꼬리를 흐, 밀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졌는지 녀석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맛있었어, 캇쨩? 미도리야가 물었다. 허나 녀석은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후다닥 몸을 돌려 수풀 속에 숨었다.

홀로 남아 있던 미도리야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을 땐 등골이 쭈뼛했다. 이곳이 누구의 거처인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캇쨩이라니.”


선홍색 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헐레벌떡 몸을 일으켠 미도리야가 울대를 꿀꺽 밀었다. 난 죽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변명을 해야할까? 아닌 척 둘러대야할까?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얼어있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뚜렷이 바라보며 바쿠고가 픽 입끝을 비틀었다.


“다음에 나타날 때는 완성품을 들고 오라고 했을 텐데.”
“아니, 어… 태자전하, 저는,”
“고양이 새끼랑 노닥거리고 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 필경 내 검은 끝을 낸 것일 테고.”
“아뇨, 그게 어…”


오늘 걸친 장포는 검은빛에 아무 장식도 없었으나 그 탓에 오히려 그 화려한 외모의 태가 살았다. 바쿠고가 성큼 걸음을 좁혀오자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저 얼굴은 어찌 이리 자주 보아도 내성이 생기질 않는 것일까. 허나 몇 걸음 물러나지 못하고 등이 벽에 가로 막혔다. 하. 버릇처럼 입매를 밀어올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뺨이 홧홧했다. 기실 그 붉은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델 듯 뜨거웠다.


“누가 보면 이곳이 네 놈의 집인줄 알겠군. 어슬렁거리는 들고양이 새끼한테까지 이름을 다 주다니.”
“태자전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오늘 처음 보았을 뿐입니다. 허나 어미를 잃고 홀로 있는 것이 마음 쓰여 그만,”
“어느 놈의 이름이냐.”
“…예?”
“그 캇쨩이란 이름.”


또 한 번 울대가 울렁거렸다. 이실직고 했다간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목숨이다. 바쿠고의 눈길을 은근슬쩍 피한 숲색 눈이 바쁘게 구르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그것은…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대뜸 높아졌다.


“그러니까 어! 제가 좋아하는 이름입니다!”
“……”
“그러니까 어, 그 캇쨩이란 이름을 제가 좋아해서... 본래 귀한 것엔 가장 아끼는 이름을 붙여주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비록 작은 고양이지만 소중한 생명이고, 마침 저를 잘 따르는 것도 같고, 어…”
“……”
“정을 주고 싶어서, 지켜주고 싶어서… 그리 불렀습니다. 제게 중한 이름이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미도리야가 눈길을 떨어뜨렸다. 지금 이 사람에겐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 허나 중한 이름이란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태어나 만난 이 중에 당신보다 존귀한 존재는 없었다. 한 번도 주인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내 검을 가진 이가 당신이었다. 당신의 이름에서 떼어 붙인 것이니 어찌 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쿠고는 말이 없었다. 분명 한 소리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용하니 외려 마음이 쓰이는 건 미도리야였다. 기분이 상하셨나? 내가 또 눈치 없이 마음을 거스를만한 소리를 한 건 아닐까? 미도리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바쿠고의 낯빛을 살폈다. 웃는 낯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가 나거나 언짢아 보이지도 않았다.


“캇쨩이라, 하. 기가 차는군.”


근사한 입매가 낮게 웃었다.

“그래, 귀한 것엔 이름을 붙여야지. 그래야 온전히 내 것이 되거든.”
“……”
“허니 네 놈의 검에도 이름을 주어야겠군.”


무엇이 좋을까. 선홍색 눈 사이가 잠시 깊어졌다. 그 얼굴을 미도리야는 불경인 것도 모르고 저도 모르게 빤히 뚫어 보았다. 이 사람은 생각에 깊이 빠질 때면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그 깊은 굴곡에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궁금해진다. 알고 싶어진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보름간 당신만 생각했는데. 당신의 명처럼 당신 외의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 허나 깊어진 주름이 사라지면서 미도리야의 잡념도 멈춰버렸다.


“데쿠.”


바쿠고가 말했다. 그때도 미도리야를 바라보는 선홍색 눈은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자신을 함부로 매만지며 흐트러뜨렸던 보름 전 그날처럼.


“그래, 데쿠가 좋겠어.”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드문 미소에 잠시 넋을 놓았다 미도리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데쿠라니.


“태자 전하, 아무리 그래도 검에 멍청하다는 뜻의 이름을 붙이시는 것은 약간…”
“네 놈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내가 내 검을 무엇이라 부르건 내 자유거든.”
“허나 그래도 멍청이는 좀…”
“고양이 새끼한테 캇쨩이라고 부르는 어느 멍청이보단 나은 것 같은데.”
“……”
“내 맘이다.”


허.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성격인 것은 이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찌 이리 제멋대로인지. 황족이란 모두 이런가. 허나 그 오만함조차 이 사람에겐 의복인 듯 근사하게 어울렸다. 불만있으면 말하든가. 툭 던져온 말에 미도리야가 고개를 젓고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다. 우물거렸더니 바쿠고의 입매가 또 한 번 밀려 올라갔다.


“허면 네 놈은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겠지.”


이번에도 위쪽으로 뻗어온 손이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그 손이 온통 뜨거웠다. 기껏 잊고 있던 감촉들이 다시 한 번 온몸에서 뜨겁게 되살아났다.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가서 만들어, 멍청아. 하루 속히.”


그 검이 내 것이 되도록, 데쿠라는 그 건방진 것을 내가 취할 수 있도록.
아. 미도리야가 기어이 제 목덜미를 손으로 덮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

대장간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봄을 앞둔 늦겨울처럼.

대장간에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준 것은 야기가 아니라 회색 외투를 걸쳐 입은 이였다. 등에 커다란 활을 떠맨 그는 복장을 보아 동쪽 사막 도시의 상단 사람인 것 같았고, 체구는 미도리야만큼 작았다. 목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꾸벅 고개를 숙여 미도리야와 짧게 인사를 나눈 그는 곧 골목 너머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배웅을 나왔던 모양인지 뒤늦게 대문 앞을 내다본 야기가 미도리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찌 이리 일찍 돌아왔느냐. 가츠동은 어찌 이리 금세 먹고?”


밥집 근처엔 가보지도 못했고, 가츠동을 먹는 대신 별장에 들렀다 왔노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미도리야는 포목점 주인에게 받아온 어포 꾸러미를 야기에게 내밀었다. 한 달간 술안주를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되겠노라며, 야기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했다. 다른 때라면 그 말에 저가 더 들떴을 것이다. 허나 오늘 미도리야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잠시 내버려두었던 화롯가에는 아직 다 두드리지 못한 검 한 자루와 세공이 끝난 검 손잡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앉은뱅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미도리야는 잠시 손잡이를 쳐다보았다. 금을 입힌 호랑이가 금세라도 하늘로 뛰어오를 듯 큼직한 앞발을 뻗고 있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도 당신의 옷엔 저처럼 위용 넘치는 호랑이가 꿈틀거렸다. 호랑이는 숨어 있어도, 산을 떠나도 여전히 그 산의 왕이다. 그가 오늘 이 검에 이름을 붙였다.


“데쿠…”
“데쿠? 누가 네 이름을 잘못 읽은 모양이구나.”


목소리가 들렸는지 어포를 질근거리고 있던 야기가 말했다. 놀란 미도리야가 화들짝 스승을 돌아보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잘못 읽었다뇨? 되묻는 말에 야기가 부드러운 투로 대답했다.


“이즈쿠는 데쿠라고도 읽히거든.”
“……”
“허나 좋은 뜻은 아니니 잊어버려라. 허참, 누가 그런 소릴 다 했는지.”


야기가 쯧쯧 혀를 걷어찼다. 역시 한 잔 걸쳐야겠어. 혼잣말을 흘리며 어포를 챙겨들고 야기는 살림채로 향했다. 그 모습에도 다녀오시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그 어포가 참 맛있더라며,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너스레도 떨지 못했었다.
당신은 그 이름을 당신의 검에 붙인다 했었다. 당신의 손 안에 쥘, 가장 귀한 검에 그 이름을 주겠다 했었다.


“데쿠…”


버릇처럼 그 이름을 우물거렸다. 얼굴이 달아 올랐다. 화로에서 붉은 불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주근깨가 흩어진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큰일 났다.


“이제 어떡하지, 나는…?”


오늘 밤도 편히 잠들기는 글렀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도성에 은밀히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폐위된 황태자가 은밀히 자기 세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했다. 산을 떠난 호랑이가 제 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미도리야가 검을 완성한 바로 그 즈음이었다.











(계속)


이 글로는 너무나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그간 격조하였지요... 갑자기 고전뽕이 차올라서 전에 쓴 것들을 쭉 훑어보다 이 시리즈의 플롯을 짜다 만 게 떠올라 부랴부랴 정리를 하고 이렇게 뒤늦게 뒤를 이어 봅니다(uu 플롯 정리하면서 상중하로 끝낼 양이 아닐 것 같아 숫자로 바꾸긴 했지만 길게 가진 않을 것 같아요. 아마 벤데타나 이미테이터 정도의 분량일듯.... 무튼!

간만에 고전쓰니까 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혐생에 여전히 정신이 없긴 하지만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당 /////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주시는 분들 감사해요ㅠ_ㅠ_ㅠ_ㅠ_ㅠ_ㅠ 덕분에 잊고 있던 글도 떠올라서 뒤를 잇게 되는 매직...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ㅜ_ㅜ 복날 삼계탕 같은 분들, 모두 더위 조심하시옵소서 (큰절

?
  • 꼬마어른 2019.08.11 20:52
    아니 대박 캇쨩 멋있어... 역시 글을 뚫고 튀어나오는 루카 님의 필력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습니다ㅜㅜㅜ 사랑해요ㅜㅜㅜ
  • 123 2019.08.12 01:17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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