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고전풍 AU로 캇뎈
* 폐위된 태자 바쿠고와 칼 만드는 미도리야 이야기









도원 刀園
2







한 달을 주지. 단단히 겹친 입술을 떼어내며 바쿠고가 서늘한 투로 낮게 속삭였다. 그 밀려나온 호흡에도 온 살갗이 바르르 떨려 미도리야는 그저 제 옷깃만 꽉 움켜 쥐었다.


“네 놈이 아무리 단단히 벼렸다 하더라도 이만한 검으로는 사람의 목을 벨 수 없어. 내 최대한의 자비를 발휘해 다시 말해주지. 만들어. 네 놈조차 살갗이 베일까 두려워 함부로 만질 수도, 탐낼 수도 없는 예리한 칼. 내게 딱 어울리는 검을 만들라 이 말이다.”
“……”
“쇠는 사람을 시켜 보내도록 하지.”


말을 끝낸 바쿠고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미도리야의 발치로 툭 던졌다. 황금이었다. 딱 제 손바닥만한 금속붙이 두 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미도리야의 눈길이 혼란스러웠다. 눈 앞의 이 자는 황태자다. 허나 폐위되었다. 자리를 숙부에게 빼앗기고 남방의 버려진 별장에 쫓기듯 유폐된 황태자에게 이만한 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 점이 의문스러워 미도리야는 이번에도 입술을 굳게 다물지 못했다.


“저… 이 금은 제게 너무 많습니다.”
“알아. 이런 촌구석의 대장장이에겐 과분한 치사지.”
“허면 전하, 거둬주십시오. 저는 받을 수가 없습…”
“두 번째 검을 만들기 위한 선금으로 치든가. 아니면 입을 맞춘 화대로 여기든가.”
“……”
“받고 잊어.”


일순 긴장으로 당겨진 뺨이 확 붉어졌다. 기껏 잊고 있던 입맞춤을 떠올린 탓만은 아닐 것이다. 수치심에 물든 뺨이 부르르 떨렸다. 입술을 꼭 깨물면서 미도리야가 흥미를 잃고 돌아서는 색이 밝은 머리칼을 잠자코 뚫어 보았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외향적이거나 대담한 성격은 아니었다. 허나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심성도 되지 못했다. 불룩거리던 입술이 제 멋대로 툭 열렸다.


“전하께서는…”


돌아서던 선홍색 눈이 소리를 따라 답없이 미도리야를 돌아 보았다. 그 눈길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움츠러 들었다. 허나 볼 안쪽을 굳게 씹은 미도리야가 남은 말을 다시 밀어냈다.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미, 흥미, 아니면 여흥. 뭐, 심심풀이일 수도 있겠고.”
“……”
“용무가 끝났으면 곱게 돌아가라.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발가벗겨져 범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무슨…!”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 아무리 상대가 황가의 아들이고, 자신이 야장이라 하여도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허나 신분의 벽은 너무도 컸다. 부르르 떨리던 주먹을 꼭 움켜쥐면서 미도리야가 혀끝에 걸린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예,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우물거린 대답에도 바쿠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책상 쪽으로 돌아선 검은 장옷에는 거대한 호랑이가 앞발을 뻗치며 하늘 쪽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위용조차 그 옷을 걸친 자에게는 제 몸인듯 꼭 어울렸다. 이런 상황인데도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시 말하지. 한 달이다.”


벼루에 내려놓았던 붓을 의미없이 들어올리며 바쿠고가 그만큼 무상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때까진 자주 들러. 네 놈에게 차를 내줄 궁녀도 없을 테지만.”
“예… 예?”
“어차피 손에 맞는 검을 벼리려면 나를 보러 와야 할 것 아니냐고, 멍청아.”


멍하니 끔벅이던 숲색 눈이 아, 했다. 맞는 말이다. 그제야 숲색 머리가 등을 돌리고 선 색 밝은 머리를 향해 숙여졌다. 분부대로 하겠노라며 답을 하면서도 미도리야는 이 황태자의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검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원하는 것인지.


“그것뿐이다. 가보거라.”


나였으면 좋겠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당신이 탐나는 것이. 그때 솔직히 그리 생각했다.









종종 들르라는 말은 분명 빈 말도, 거짓도 아니었다.


“야장에게 쇠를 직접 내려주신다는 것은 그만큼 네 실력을 인정하셨다는 뜻이지. 하하, 다행이지 않느냐.”


이튿날, 쇠를 가득 실은 수레가 들어왔을 때까지도 미도리야는 아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야기가 기쁜 얼굴로 다가와 어깨를 흔들지 않았더라면 종종 신세를 지는 농부가 맡겨둔 쟁기가 그대로 아궁이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 버렸을지 모른다.
제자의 얼굴이 유독 어두운 것을 보고 야기는 잠시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지만 미도리야는 그저 언제나처럼 흐흐 웃고 말았다. 야기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제자에게 알려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스승의 얼굴에 가득 걸려 있었다.


“걸음마보다 검 쓰는 법을 먼저 익힌 분이네. 그 분의 첫 번째 검을 내가 직접 그 작은 손에 쥐어 드렸었지. 허니 스무 해 평생동안 얼마나 귀한 검들이 그 손을 거쳐 갔겠느냐. 너는 그토록 안목이 깊은 분이 인정한 야장이다.”


선대보다도 그 검술 실력이 유독 뛰어나 궁에서는 검황劍皇이라 불리었다 했다. 대륙에서도 가장 솜씨가 좋은 야장이 만든 보검 두 자루가 바쿠고 카츠키의 손에 있었다. 이런 입장이 되기 전까지 각지의 제후들은 태자가 생일을 맞았거나 궁에 무슨 경사가 생길 때마다 앞을 다투어 가장 좋은 검을 구해 진상했었다.
검을 다루는 솜씨만큼 검을 보고 검을 고르는 솜씨 역시 좋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 이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야기는 자신이 칭찬을 받고 다시 벼슬을 얻은 양 몹시 기뻐했다. 쑥스러움에 그저 발그레 물든 뺨을 긁적거리기만 하는 미도리야의 등을 퍽퍽 두드리며 야기는 연신 호탕하게 웃었다.


“좋은 징조야. 게다가 네게 좋은 검을 만들라고 이렇게 좋은 쇠까지 내려주시니 이것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느냐. 너도 이제는 봬서 알겠지, 미도리야 소년. 그 분은 본래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에 매우 인색하시지. 뭐, 워낙 쑥스러워 그러실 테지만, 하하.”


예, 쑥스럽다기보다는 폭군에 가까운 심성이지만… 그 말이 혀 밑까지 치밀었지만 미도리야는 하지 않았다. 야기가 눈을 접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허니 힘을 내렴, 미도리야 소년. 자부심을 가지도록 해라. 너는 그 까다로운 검황에게 인정받은 야장이니까.”
“……”
“자주 찾아뵙는 것이 좋겠구나. 좋은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검을 쓸 상대를 알아두어야 한다. 아, 이 참에 그 분의 검술 상대가 되어 드리는 것도 좋겠지. 유배라는 건 꽤나 무료한 일이니까.”


그 칭찬과 격려가 미도리야는 싫지 않았다. 때문에 물을 수도 없었다. 폐위된 태자께서 이토록 귀한 쇠와 황금붙이를 저에게 하사할 여유가 어찌 있으신지, 혹 무리하는 것은 아니신지, 그 연유를 스승님께서는 알고 계시는지. 혹여 너무 좋은 검을 만들어 드렸다가 황궁에서 책을 잡는 것은 아닐는지.
걱정이 많았다. 그만큼 고민이 깊었다. 허나 그 어떤 것도 직접 그의 얼굴을 보러 가는 일만큼 심란하지는 못했다.


“……”


높게 뻗은 계단을 바라보던 미도리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활짝 열린 대문 안쪽에 성큼성큼 다가와 있었다. 가을이었다.

별장의 높고 낡은 계단을 따라 오르는 미도리야의 걸음이 무거웠다. 허나 전처럼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다. 이 별장에 드나든지도 벌써 열흘이었다. 이 부지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여기 사는 이들만큼 익숙해졌다. 정문을 건너 본당으로 가는 대신 미도리야는 담벼락 밑으로 붙어 좁은 수로를 따라 걷는 길을 택했다.
며칠 전에 이른 가을비가 쏟아진 덕에 말라붙어 있던 수로에는 작은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며 졸졸 흘러 나가고 있었다. 전에는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던 수로를 잠시 내려다본 미도리야가 훌쩍 발을 벌리며 한걸음에 뛰었다. 벌써부터 붉고 노랗게 물든 잎새 몇 장이 개울을 따라 천천히 흘러 다녔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었다.
후 숨을 고른 미도리야가 등에 맨 짐꾸러미를 고쳐 매고 오른편의 동그란 석문을 지나쳤다. 오늘도 만나 봬야할 이는 본당이 아닌 이곳, 안쪽 정원에서 먹을 갈고 있을 터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바쿠고 카츠키가 검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첫날에 미도리야가 진상한 검을 검집에서 잡아 뽑았던 것이 유일했다. 벌써 열흘을 매일 같이 드나들었지만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눈앞에서 단 한 번도 검을 잡지 않았다. 첫날을 제외하곤 본채가 아닌 별채에 있었고, 대부분 그 앞에서 붓을 놀리며 글씨를 쓰고 있거나 했다.
오늘도 다르지는 않았다. 정원 안쪽으로 성큼성큼 걷던 미도리야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열 걸음 앞에 놓인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 종이폭을 펼치고 앉은 바쿠고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그 눈동자의 색처럼 붉은 장포를 입었다. 정원의 절반을 덮을만큼 무성하게 자란 은행나무의 잎처럼 색이 밝은 머리칼이 거기 있었다.


“여기 있어서 가장 엿 같은 일은,”


몇 걸음 앞에서 인사를 해야할까, 때를 재던 미도리야가 흠칫 멈춰 섰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바쿠고였다. 허나 장포처럼 선명히 붉은 그 눈길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붉은 먹이었다.


“술이 없다는 것이지. 날이 좋아 미쳐버릴 것 같은데도 미쳐버릴 핑계가 없어.”


넋두리인지, 농인지, 혹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가 대관절 무엇일까.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서 미도리야는 그저 잠자코 두 눈을 멀뚱거렸다. 획 하나를 깊고 길게 휙 내지른 바쿠고가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떠올라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그 탓에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혀를 걷어차며 삼키던 말을 듣지 못했다.


“이딴 날씨에 네 놈 같은 녀석을 만나는 게 이 유배의 유일한 낙이라니.”
“전하, 오늘도 날씨가 좋습… 예?”
“잊어. 혼잣말이다.”


쥐고 있던 붓을 벼루로 툭 던지듯이 내려놓은 바쿠고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제야 적고 있던 글자가 또렷이 보였다. 번이었다.
오늘도 그 획에는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었다. 종이 가득 뻗어나간 불꽃이 머리를 덮었다. 그야말로 불꽃에 삼켜지는 형국이다. 허면 당신은 저 불꽃으로 누구의 머리를 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당신의 숙부일까. 허나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생각을 오래 잇지는 못했다.


“어디까지 만들었느냐.”
“네? 아, 네. 검의 형태는 모두 잡았습니다. 이제 오늘 밤에 주물 형틀을 만들어 쇳물을 부을 예정입니다.”


당황한 탓에 말을 한 번 더듬었다. 이 남자 앞에 서면 괜스레 한 번을 더 긴장하게 된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빳빳이 세우면서 미도리야가 버릇처럼 입술 끝을 질근거렸다. 뺨에 와 닿는 시선이 홧홧했다. 절로 울대가 밀렸다. 저 붉은 눈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수시로 근육이 당겨질만큼 긴장하게 만드는 힘,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그런 힘.
때문에 미도리야는 이따금 바쿠고의 앞에선 달아날 데를 잃은 사냥감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흡사 호랑이 앞에 선 토끼 같았다. 꽉 쥔 손 안이 또 한 번 버릇처럼 축축이 젖어 들었다.


“어, 그리고… 강철은 모두 골라 두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손 크기에 맞춰 자루의 본만 떠 두면 됩니다.”


일부러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어제는 작업이 더디다 하여 한 소리를 호되게 들었었다. 무슨 소리까지 들었었지. 그래, 손이 더딘 것이 아니라 머리가 더딘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었다. 그 탓인지 작업 진행을 고하면서도 미도리야는 자꾸만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허나 오늘 바쿠고의 표정은 어제처럼 차갑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첫날에 언뜻 보였던 얼굴이 입매를 픽 비틀며 낮게 웃었다.


“확실히. 돈 준 값은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군.”
“예, 전하. 소인 책임을 다해…”
“손은.”
“……”
“그 멍청한 손은 어쩌다 그리된 것이냐.”


손? 갑자기 내 손은 왜… 둥글게 열린 숲색 눈이 말을 따라 배 앞에서 가만히 마주 잡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쇠를 다루는 야장의 손은 언제나 상처가 가실 날이 없다. 이미 자잘하게 흉터가 앉은 손등에는 새롭게 그어진 생채기가 서너 개 앉아 있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도 미도리야는 공방 안에 앉아 바쿠고의 검에 쓸 강철을 골랐었다.


“쇠를… 쇠를 고르다 조금 다쳤습니다.”
“……”
“하지만 이 정도는…!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마땅히 감내해야할 일이고, 전하를 위해서라면… !?”


힉, 말꼬리가 튀었다. 동시에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손 안에 덥석 잡힌 제 손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쳐다보았다. 돌연 걸음을 좁혀온 탓에 뿌리치거나 피할 틈도 없었다. 멍청하긴. 바쿠고가 쯧, 입 끝을 비틀었다. 허나 미도리야는 그때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들킬까, 그게 가장 겁이 났다.
잡힌 손이 너무 뜨거웠다.


“어디가 조금이냐, 멍청아. 살갗이 패였잖아.”
“아니, 어…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게다가 태자전하의 검이니까…!”
“……”
“가장… 좋은 쇠를 골라 드리고 싶어서…”


바쿠고가 보내준 철은 광산으로 이름이 높은 중부지방의 것이었다. 만져지는 촉감과 떼어진 형태를 보고 미도리야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중부지방에서는 날이 갈라진 곡괭이를 쓰기 때문에 떼어진 철광석의 끝이 유난히 날카롭다.
폐위되어 모든 것을 잃은 태자가 어찌 이리 좋은 철을 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자신에게 내린 황금의 출처를 굳이 스승에게조차 질문하지 못한 채 열흘을 흘려보낸 것처럼 미도리야는 이 의문 역시 가슴 안에 묻어 두었다. 그저 골랐다. 그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만을 고르고 싶었다. 숲색 머리가 단단히 잡힌 손을 향해 기울어졌다.


“가장 좋은 검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당신은 그래야한다. 당신에게는 그런 것이 어울린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 그리하여 오로지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 당신이 그 검으로 무엇을 벨 지, 무엇을 베고 싶어하는 지에 대해선 솔직히 모른다. 들어도 듣지 않은 것이다. 알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당신이 내게 만들라고 명을 했다. 가장 완전한 검, 가장 강한 검. 이 세상에 없는 가장 잔인하고 예리한 검.


“물론 제 솜씨가 미천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궁에 있는 야장들에 비견할 바가 못 되는 것도 압니다. 허나 그저 제게 만들라고 하셨으니까…!”
“……”
“저를… 선택하셨으니까.”


태자의 검을 만들라고 명한 이는 스승인 야기였다. 야기는 본래 황태자가 어렸을 적에 검술을 가르쳤던 검 스승이기도 했고, 이 열악한 남부에서 대장장이로 이름이 높은 것도 역시 미도리야가 아닌 야기 토시노리다.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첫 번째 검은 그랬다 치더라도 두 번째 검은 야기에게 부탁할 수 있었을 터다. 허나 바쿠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기뻤었다.
미도리야가 입술을 꼭 씹었다 놓았다. 또 괜한 소리를 했다. 이번에도 이마에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불길에 덴 것처럼 홧홧했다. 하. 바쿠고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에도 미도리야는 또 한 번 버릇처럼 와르르 떨리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처음 볼 때도 같은 소릴 했었지만…”


미도리야의 손 위를 덮고 있던 바쿠고의 손바닥이 스르르 움직였다. 그 작은 기척에도 흠칫 어깨가 떨렸다.


“정말로 웃기는 놈이군. 궁에도 너 같은 놈은 없어.”
“저 태자전하, 허면 우선 이 손은… 좀 놓아주심이 어떠하신지요. 오늘은 전하의 손을 탁본으로도 떠두어야 하고, 제가 할 일이…”
“잘됐군. 탁본이라.”


꽉, 힘을 주어 움켜잡은 손이 돌연 휙 멀어졌다. 대신 손목을 잡혔다. 전하? 책상 쪽으로 끌려가면서도 위화감을 느낀 미도리야가 돌아선 등을 몇 번 불러 보았다. 그 부름에 대꾸하는 대신 성큼성큼 책상으로 걸어간 바쿠고가 남은 손을 뻗어 벼루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호랑이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벼루에는 곱게 갈린 먹물이 여전히 붉게 번져 있었다. 그 위에 바쿠고가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깊게 찍었다. 숲색 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렸다. 행동의 저의를 도저히 알 길이 없어 그랬다.


“태, 태자전하… 어찌 손을, 손을 더럽히시는…”
“본을 뜬다고 네 놈이 말했잖아. 어차피 더러워질 일이다.”
“허나 전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


잡힌 손목이 당겨지며 몸이 빙글 돌았다. 그 바람에 또 한 번 말꼬리를 잘린 미도리야가 반쯤 쓰러지듯 바쿠고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힉. 헛숨을 들이켠 숲색 머리가 기겁을 했다. 죄송합니다! 허나 소리를 지르고 멀어질 새도 없이 손목을 잡았던 왼손이 미도리야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았다. 졸지에 얼굴이 코앞까지 바싹 붙었다. 바싹 붙은 선홍색 눈이 호기롭게 웃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을 내려다보는 얼굴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내 맘에 든 건 네 놈이 만드는 검이지, 네 놈이 아닐 텐데.”
“……”
“흥미가 생겨.”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낮은 투로 중얼거린 바쿠고의 왼손이 미도리야의 앞으로 돌아와 앞섶을 묶고 있던 매듭을 스르륵 풀어냈다. 첫날 검으로 끊어냈던 것과 같은 자리였다. 숲색 눈이 당혹감에, 그리고 수치심에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신분에 차이가 있고, 계급의 벽이 있다 하여도 두 번이나 같은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저는… 야장이지 창기가 아닙니다, 태자전하.”
“알아. 감히 건방지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명검을 만들어낸 주제에 이딴 촌구석에 박혀 있는 멍청한 대장장이지.”
“…이런 장난이 좋으십니까?”
“네 놈은 내가 호기나 장난으로 이럴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군.”
“……”
“염려 놓아라. 혀를 쓰는 기술도 없는 상대에게 성은을 내려줄만큼 관대한 성품이 아니니까.”


호기도 장난도 아니면 무엇이냐고, 대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틈은 이번에도 없었다. 다시 잡힌 허리가 급하게 책상 위로 밀어 붙여졌다. 아무렇게나 밀려 떨어진 붓들이 바닥 위로 붉은 물을 튀기며 떨어졌다. 기울어진 벼루가 행여 부서질까 반사적으로 움켜잡은 미도리야의 오른뺨이 화선지 위에 단단히 파묻혔다. 눈앞에서 붉은 불이 불길처럼 일그러졌다. 그조차도 제 몸을 짓누르는 이의 눈길을 닮았다고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의복 정도는 벗겨주지.”


버둥거리는 몸을 가슴팍으로 짓누르며, 왼손을 앞으로 뻗어 매듭을 풀어헤친 바쿠고가 말했다. 순식간에 장의가 벗겨지며 곧은 등이 드러났다. 몸을 뺄 틈도 없이 붉게 젖은 오른손이 미도리야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힉. 헛숨을 들이켠 미도리야의 귓가에 기울어온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탁본이라면 기꺼이 도와주지.”


어깨를 움켜잡은 오른손이 꽉, 살갗 속을 파고들었다.


“허니 너는 새겨, 네 놈의 몸으로. 지금부터 똑똑히, 하나하나. 너를 만지는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이 손이 무엇을 잡을 것인지, 기어코 무엇을 가지고 말 것인지.”
“……”
“누가 너의 검을 가질 것인지.”


아. 볼 안쪽을 힘껏 씹은 미도리야가 손에 잡힌 벼루를 꽉 움켜쥐었다.














밭은 호흡이 헉헉, 늦은 오후의 적막을 갈랐다. 비명처럼.


“전하… 전ㅎ, 그렇게는… 아픕니다. 손을, 조금만, 힘을… 아아,…!”


사방에서 젖은 흙을 닮은 먹 냄새가 시큰하게 코를 질렀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른다. 아팠다. 더불어 집요했다. 뼈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붉게 적신 손바닥이 등 곳곳을 움켜쥐고 놓기를 반복할 때마다 미도리야는 그저 버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일뿐인데도 온 몸을 물어뜯기는 기분을 느꼈다. 그 통증은 차라리 화상을 닮아 있었다. 뜨겁고 사나웠다. 그만큼 달아오른 호흡이 미도리야의 귀 뒤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네 놈은 뒤가 꽤나… 하, 약한 모양이군.”


다른 곳은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낮은 말을 삼킨 바쿠고가 또 한 번 견갑골 언저리를 크게 움켜잡았다. 화선지에 파묻혀 있던 숲색 머리가 저도 모르게 번쩍 들렸다. 힉, 숨을 들이켠 미도리야가 턱을 젖히며 비명처럼 애원했다. 제발, 제발.


“아파, 아파요. 전하, 제발… 아ㅎ,!”


아니, 아픈 게 두려운 게 아니다. 아픔 같은 건 상관없어. 미도리야가 흩어지는 호흡을 삼키며 연거푸 입술 끝을 질근거렸다. 내가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냐. 이 감각이 무서운 거다. 살아생전 알지 못했던 낯선 감각이 온몸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올가미에 걸린 토끼 같았다. 이제 곧 삼켜질 때를 기다리는 사냥감 같았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먹혀지고 싶었다. 이 남자에게, 살갗 하나 남김없이, 뼈 하나 남김없이.
아. 또 한 번 머리를 힘껏 털며 미도리야가 온몸을 크게 떨었다. 목덜미에 박힌 잇날이 어지러웠다.


“쇠를 만지는 재주뿐인 줄 알았는데.”


쇠장이 주제에. 미도리야의 뒷목을 연거푸 씹으면서 바쿠고가 낮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화를 내는 것도 같았고, 혼란스러운 것도 같았다. 또 한 번 등골을 주르르 미끄러진 오른손이 미도리야의 허리께를 크게 잡았다. 힉. 숨을 삼킨 미도리야가 또 한 번 구겨진 화선지에 뺨을 묻었다. 번을 새긴 붉은 획들이 미도리야의 뺨에 어지러운 불길을 그려 놓았다.
열 받는다고. 말을 삼킨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귓등 밑을 힘껏 씹었다. 차마 소리가 되지도 못한 비명을 삼키며 미도리야가 크게 몸을 떨었다. 반쯤 젖은 숲색 눈이 바쿠고를 원망처럼 돌아보았다. 억울해서, 미워서 그랬었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건가요?”


당신은 흥미라고 했다. 심심풀이라고도 했었다. 허나 창기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어. 당신이 원하는 게 검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허나 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허리를 움켜잡던 바쿠고의 오른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미도리야를 내려다보던 그 눈길이 조금 전보다도 복잡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슬픈 것인지. 그저 그 준수한 눈매 사이를 깊게 좁히며 바쿠고는 낮게 이렇게만 대꾸했다.


“원하니까, 멍청아.”


아, 흥이 식었다. 툭 혼잣말을 뱉은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등 위에서 멀어졌다. 허나 미도리야는 곧장 몸을 일으켜지도, 벌어진 옷섶을 추스르지도 못했다. 눈앞에는 붉은 번자가 미도리야의 기분처럼 어지럽게 구겨져 있었다. 번민처럼, 번뇌처럼.


“원하시는 게… 대체 뭔가요?”


어지러운 호흡을 헉헉 밀어내며 미도리야가 간신히 되물었다. 붉게 젖은 오른손을 무명천에 닦으면서 바쿠고가 짧게 대꾸했다.


“네 검.”
“……”
“내 손의 생김도 질릴만큼 알았을 테니 제대로 만들 수 있겠지, 이제.”


아니. 그런 걸 원하는 얼굴이 아니었어, 당신. 그 말을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그저 속으로만 잠자코 삼켜 넣었다. 머리 위로 붉게 물든 하늘이 어지러웠다. 불길처럼.






(계속)









명절현생+건강악화로 연휴를 싹 다 날려놓고 이 야심한 밤에야 꾸물꾸물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이 글을 씁니다.... 원래 더 일찍 쓰고 싶었는데 저는 왜 또 감기를 얻어와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도 잠자기 전에 써서 다행이네용 헤헷/// 무튼무튼/
요즘 원고까지 겹쳐서 이래저래 글이 뜸하네요. 그래도 감사한 피드백 많이 받잡고 힘을 내서 썼습니동99999 아마 이 시리즈는 (역시나 예상한대로) 중3까지 이어지고 하편 나온 후에 완결이 날 듯....

무튼 읽어주신 분들 오늘도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약 먹고 푹 잘 것.....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ㅜ_ㅜ//

?
  • 꼬마 어른 2018.09.27 01:14
    요즘 환절기라서ㅜㅜㅜ 감기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금같은 글 감사합니다ㅜㅜㅜㅜ♡♡♡♡♡
  • 루카님덕후♡ 2018.09.27 03:03 SECRET

    "비밀글입니다."

  • 별✨ 2018.09.27 10:33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ㅌㅎ 2018.09.27 19:27 SECRET

    "비밀글입니다."

  • 캇뎈캇뎈해 2018.09.27 22:42 SECRET

    "비밀글입니다."

  • To. 루카님 2018.09.29 18:01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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