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오랜만에 고전풍 AU로 캇뎈
* 폐위된 태자 바쿠고와 칼 만드는 미도리야 이야기









도원 刀園
1







아름다웠다. 허나 차갑고 황폐했다. 마치 칼날과도 같았다. 그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전에 황제가 별장으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했다. 남쪽에선 이것만큼 크고 웅장한 건축물이 없었다. 열 간이 넘는 본채를 포함하여 별채만도 4채에 이르렀고,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머무는 숙소 역시 100명은 너끈히 잘 수 있을만큼 컸다. 사방을 에워싼 화원은 그 수종이 어찌나 다양하며 얼마나 무성한지, 마치 깊은 숲과도 같아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다 자주 길을 잃었다.


“허나 그 아무리 화려한 화원을 가졌다 하여도 돌보는 이가 없으면 그 색이 바래는 법이지.”


미도리야의 곁에 서 있던 야기가 쓰게 웃으며 정면에 보이는 본채를 넌지시 가리켰다. 부모를 잃고 시장통에 버려진 일곱 살 미도리야를 거두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키워온 스승의 얼굴에 연민의 빛이 언뜻 어렸다 사라졌다.
3대 전 황제는 이곳에서 아들을 잃었다. 그후부터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황가는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았다. 황제가 찾지 않으니 관리들도 돌보지 않았고, 자연히 버려지며 황폐해졌다. 미도리야가 두 눈을 들어 본채를 바라보았다. 한때 황궁에 버금갈만큼 화려했을 붉은 기와와 황금을 입힌 벽화들은 이제 색이 바래 본래의 모습조차 알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이 별장에 어린 황태자의 귀신이 붙어 있다고 했다.


“귀신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야. 이제 산 것이 살 곳이 아니게 되었는데…”


야기가 목소리를 흐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미도리야는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손 안에 들린 검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스승을 도와 보름을 꼬박 지새우며 만들었던 검이다. 좋은 철은 쓰지 못했다. 그 점이 부끄러워 미도리야는 검을 받든 양손이 자꾸만 무겁게 느껴졌다.
올라가자꾸나. 야기가 미도리야의 등을 툭 두드렸다. 열 걸음 앞에 오래도록 닫혀 있었을 본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미도리야가 양손에 쥔 검을 품으로 갈음하며 앞서 걷는 스승을 허겁지겁 뒤따랐다. 그때도 무쇠를 벼려 만든 검은 차갑고 무거웠다. 그 검자루에 새겨진 이름 넉자만큼.

바쿠고 카츠키. 미도리야의 검을 가질 주인의 이름이었다.

황제와 황후가 한날한시에 살해당했다. 이튿날 아우가 형과 형수를 대신해 옥좌에 오르고 황제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밤, 궁에서만 100명이 넘는 자가 목숨을 잃었으나 누구의 습격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다. 무차별적인 살인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책상과 탁자 밑에 숨느라 바빴던 내관과 궁녀들은 그저 검은 변복變服을 한 자들이 앞을 막아서는 자들은 모조리 베어 죽였노라고만 했다. 그들은 어둠처럼 나타나 귀신처럼 칼을 휘두르고 그림자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허나 그날, 황제의 내실까지 통하는 성문들이 모두 열려있었다. 죽은 이는 모두 황제의 외척이거나 황제의 측근들이었다.

아우가 황제가 되기 위해 형과 형수를 죽였다. 허나 그 소리를 입 밖에 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황태자만이 그 환난을 피하고 살아남았다. 황태자는 갓 스물이었고, 성인이 된 황태자가 보위에 오르기 위해 전국의 병영을 돌며 경험을 쌓는 것은 이 나라 황가의 오랜 관례였다. 그 관례가 황태자의 목숨을 구했다. 허나 그저 죽지 않았을 뿐이다. 아우는 심성이 유약한 형보다도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조카를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서쪽 병영에서 검술 훈련을 참관하던 도중에 병사들이 들이 닥쳤고, 그 길로 검을 빼앗기고 구금되었다. 죄목은 역모였다.
당연히 도성의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이름 없는 벽보가 나붙었고, 누군가는 겁도 없이 황궁에 돌을 던지며 천륜을 어긴 황제에게 천벌이 내릴 것이라며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다음 날 그의 목이 성벽에 걸렸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누구도 폐위된 태자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바쿠고 카츠키라는 이름 넉자조차 그들에겐 금구가 되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구금되었던 바쿠고 카츠키의 유배지가 결정되었다. 오래 전에 버려진 남쪽의 별장이었다.

귀한 손님이 내려오시니 검을 만들라고 명한 것은 다름 아닌 야기였다. 남는 쇠를 써도 좋으니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검을 만들라고 했다. 쇠를 다루는 야장冶匠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는 스승의 말은 법도며 진리다. 게다가 버려진 자신을 거두어 키워준 아버지와도 다름없던 야기의 말에 미도리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군소리를 하지 않고 기쁘게 따랐다. 허나 이번만큼은 스승의 마음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바쿠고 카츠키는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별장으로 내려왔다. 태자의 권위이자 상징이었던 보검조차 빼앗겼다. 그를 위한 검을 만들라는 것은 그야말로 경을 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


야기가 문턱을 넘으며 혼잣말을 했다. 보름 전에도 미도리야는 야기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다. 허나 이번엔 보름 전처럼 그 말을 공손히 참지 못했다. 미도리야가 꾹 다문 입술을 뗐다. 인내하고 있던 말이 기어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허나 스승님, 황가에서 알면 경을 칠 일입니다. 역모를 꾀했다는 태자께 이런 검을 함부로 만들어 주었다가는 행여…”
“그래, 미도리야 소년. 너는 믿느냐? 태자께서 역모를 꾀했다는 그 말 말이다.”


둥글게 열린 숲색 눈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아뇨… 대답하는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았다. 야기가 것 보라는 듯이 껄껄 웃었다. 어차피 주변에는 이런 얘기를 듣고 밀고할 자는 커녕 문 앞을 지키는 병사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궁에서 이곳은 너무 먼 곳이지. 폐위된 태자께 동네 대장장이가 검 한 자루를 만들어 선물해줬다 한들 누가 보름동안 말을 달려 황제에게 이 일을 고하겠느냐. 염려가 많은 것은 네 장점이지만 또한 단점이다, 미도리야 소년.”
“허나 스승님, 저는…”
“그래서, 너는 그 검을 허투루 만들었느냐? 폐위된 태자에게 선물할 검이 아니더냐.”
“그…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검은 한 자루를 만들어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 배웠다. 검의 주인이 폐위된 태자이건, 누구이건 간에 만들겠다 마음을 잡았으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지난 보름동안 미도리야는 검댕이 날리는 아궁이 앞에 앉아 먹고 자며 쉼 없이 검을 벼리고 풀무질을 했다.
허면 되었다. 야기가 또 한 번 사람 좋게 웃었다. 그 풍채만큼 호탕한 웃음소리가 본채의 텅 빈 복도를 호쾌하게 울렸다.


“내 하나 장담하지, 미도리야 소년. 자네가 만든 검이 부끄러워질 일은 없을 걸세.”


역시 지키는 이 하나 보이지 않는 본채의 방 문고리를 잡으면서 야기가 말했다. 오래도록 돌보지 않은 방문의 살은 곳곳이 벌어지고 갈라졌으나 그래도 그 문에 그려진 형상만큼은 과거의 위용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문을 여는 스승의 등 너머로 미도리야가 문에 새겨진 문양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검에도 저 문양과 같은 맹수를 새겨 넣었었다. 검을 쥔 손에 절로 꾹 힘이 실렸다. 호랑이였다.


“직접 뵙도록 하게.”


문을 크게 떠밀면서 야기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문 너머에선 긴 복도가 가장 안쪽 방까지 이어져 있었다. 미도리야가 눈을 둥글게 떴다. 스승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직접 뵈라니… 저만요? 스승님은요?”
“자네가 만든 검 아닌가. 태자께서도 나보다는 그 검을 만든 자를 더욱 보고 싶어하실 게야.”


아.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야기가 이 쇠락한 남쪽 도시에서 대장장이로 살아가기 전에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었다는 이야기는 종종 놀러오는 아이자와 아저씨에게 전해 들었다. 하긴, 그리 생각하면 검 한 자루를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듣기로 황태자는 걸음마를 뗀 후부터 야기에게 검 쓰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저를 바라보던 도제徒弟의 눈 안에 얽힌 이야기들을 눈치 챈 야기가 잠자코 미도리야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보게. 더불어 덧붙였다. 자네의 검을 가질 주인에게.

주인… 그 말이 주는 울림이 여상스럽지 않아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그리고 망설이던 걸음이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어떤 사람일까? 낮인데도 어둔 복도를 자박자박 걸어가면서 미도리야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은 직접 보지 못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본 나이 지긋한 내관 한 사람과 궁녀 셋을 데리고만 왔다던 황태자는 이 별장에 온 지가 벌써 한 달이었지만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야장의夜長衣를 새로 지어 입히기 위해 서너 번 이 별장을 드나들었던 포목점의 주인만이 태자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가 전한 소식은 소문이 되어 손님들의 입을 타고 미도리야의 귀에도 전해졌다.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올해 스물이 되었고, 검을 잘 다루는만큼 글에도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과 검을 빼앗긴 후로는 붓질로 소일을 하고 있다 하였다.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성질은… 분명 더럽댔고.”


폐위된 태자 주제에 말이야, 어린놈이 얼마나 시건방진지. 포목점 주인이 흥분해서 떠들던 목소리는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미도리야에게도 똑똑히 들렸었다. 딴에는 친근하게 안부도 물어보고 인사도 건네 보았는데 태자는 그 말을 죄 무시했던 모양이다. 수다가 많은 자신의 단점이 사교적인 성격이라며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포목점 주인이 기분이 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폐위되기 전에도 그리 심성이 곱고 다정한 자는 아니었다. 미도리야의 얼굴이 절로 울상을 지었다. 손 안에 들린 검이 자꾸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역시 좀 더 좋은 철을 썼어야 했다.


“욕 먹으면 어떡하지…”


그 아무리 폐위된 태자라 하여도 이 검은 그를 위한 것이고, 보름이나 정성을 다한 검에 싫은 소리를 듣는 일이 반가울 리 없었다. 야장으로서의 경력이 좀 더 길었다면 욕을 해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허나 스승님을 도와 내내 풀무질만 하다가 직접 손님을 받고 쇠를 두드릴 수 있게 된 지 이제 겨우 1년이었다.
게다가 본래 좋은 검을 썼던 이에게 이런 무겁고 투박한 검이 마음에 찰 리도 없었다. 좋은 철은 이보다 더 가볍고 유연하다. 벌써 코앞까지 다가온 방문을 쳐다보면서도 연방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이 검은 내가 만들었어. 미도리야가 결심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야장은 자신이 만든 검에 책임을 다해야한다. 질책도, 비난도 모두 검을 만든 야장이 감당해야할 책임이었다. 어디서 이딴 쇠를 썼느냐는 욕이 날아오더라도 별 수 없지, 뭐. 어깨를 으쓱한 미도리야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닫혀있던 문을 천천히 떠밀었다.

열린 문틈으로 쇠를 닮은 탁하고 무거운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먹 냄새였다.

방은 미도리야가 짐작했던 것보다도 넓었다. 하기야, 아무리 오랜 세월 버려져 있었다고 해도 애초에 황제의 별장으로 지어진 곳이다.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은 다섯 간 규모의 너른 방의 양 벽에는 창호지를 바른 창문들이 줄지어 붙어 있었고, 몇몇은 환기를 할 요량이었는지 열려 있기도 했다. 가구 역시 그 옛날에 쓰이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호랑이의 형상이 섬세하게 새겨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놓인 의자도, 도자를 장식해놓은 장식장도 비록 낡아 먼지가 앉았으나 모두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허나 미도리야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그 화려한 가구들도, 높다란 천장에 줄줄이 걸린 붉은 갓등도 아니었다. 온 사방에 붉은 글씨를 휘갈겨 놓은 하얀 화선지가 바람결을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먹 냄새는 아마 저기에서 풍겨오던 것일 터다. 쓰인 글자는 죄 똑같았다.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 글자를 우물거렸다.


“칼 도…”


어렵지 않은 글자다. 허나 그 단순한 글자의 획에는 눈길을 쉬이 돌리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굵은 점에서 시작된 획은 망설임도 거침도 없이 종이를 가로지르며 지난 자리마다 붉은 먹을 뿌려 놓았다. 쓰인 것은 글씨인데 미도리야는 어쩐지 그 획에서 검을 느꼈다. 검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꾹 실렸다. 이 글씨를 누가 썼는지 알 것 같아 그랬었다.

중앙에 걸려있던 화선지가 바람결에 크게 흔들렸다. 그 너머에서 검은 장옷이 펄럭 춤을 추었다. 누군가 있었다. 보는 순간 미도리야는 그가 누구일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저절로 울대가 밀렸다.

그를 위해 지난 보름간 이 검을 만들었다. 아무 관도 쓰지 않은 색이 밝은 머리칼이 창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소문대로 갓 스물이 된 그의 얼굴은 젊었고, 창문을 뚫어보는 선홍색 눈은 예리하고 사나웠다. 우습게도 그 얼굴을 또렷이 본 순간부터 미도리야는 저가 만든 검이 걷잡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입술 끝을 꼭 씹으며 미도리야가 혀 밑까지 치민 탄식을 참아냈다.
더 정성을 다해 만들었어야 했어. 보다 마음을 쏟아 당신이 잡을 칼자루에 가장 최고의 걸작을 새겨 놓았어야 했었다. 거기 서있는 자는 그런 자였다. 오만조차 당연할만큼 숨이 막힐 존명이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옷처럼 감싸고 있었다. 그 탓에 미도리야는 남자가 어느 틈엔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홍색 눈 사이가 불쾌한 듯 좁아졌다.


“웬 놈이냐.”


그 낮은 말투조차 소름이 오싹 끼칠만큼 그에게는 어울렸다. 멋지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상황을 깨달은 미도리야가 뒤늦게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늦어 버렸다.


“아, 어… 저는! 저기, 어… 미도리야 이즈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태자전하의 검을 만든 야장입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태자전하께 넋이 팔려서… 아니, 그러니까 너무, 어, 이렇게 근사하실 것이라곤 생각을 전혀 못해서…!”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나는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는 거야, 대체. 조아린 고개 밑으로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1년 전에 똑같은 상황에 처했었다면 분명 법도를 어겼다 하여 참수를 당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나 같은 햇병아리 야장은 감히 눈앞에 선 이 남자의 검을 만들 수도 없었을 테지만.
욕먹으려나? 질끈 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미도리야는 잠시 생각했다. 포목점 주인은 폐위된 황태자의 심성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었다. 설마 내가 직접 만든 검으로 내 목이 베이는 건 아니겠지… 허나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낮은 웃음이 하,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미도리야는 잠시 후회했다. 그 얼굴을 보지 말 걸 그랬다. 이리 숨이 막힐 거였으면.


“왜 야기가 무관직도 마다하고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서 검을 벼리는 대장장이 흉내를 내고 자빠졌나 했는데,”

몸을 돌린 바쿠고가 우뚝 굳은 미도리야의 앞으로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왔다. 한 걸음 앞에서 멈춰선 바쿠고가 가볍게 입 끝을 비틀었다. 아.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연거푸 씹었다. 무심코 가슴이 떨려버릴만큼 근사한 선홍색 눈이 미도리야를 호기롭게 내려 보았다.


“이런 게 있으니 그랬겠어.”
“……”
“기대 되는데. 네 놈이 만든 검도 이만치 재밌을지.”


 얼굴을 살피듯이 요리조리 뚫어보다 바쿠고가 예고 없이 미도리야의 손에 들려있던 검을 낚아챘다. 당황한 미도리야가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저, 그렇게 갑자기! 허나 그 투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바쿠고가 수평으로 잡은 검을 검집에서 그대로 잡아 뽑았다. 선홍색 눈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분명 검자루를 보고 있었다.


“호랑이로군.”


예리하게 벼려진 검날을 뒤집으며 바쿠고가 검 자루에 휘어 감긴 호랑이를 뚫어 보았다. 그 눈길이 조금 전과 달리 서늘했다. 돌아오는 말투도 그만치 낮고 차가웠다.


“호랑이가 황가의 상징인 것을 모르는 멍청이는 이 나라에 없을 테고, 내가 빌어먹을 숙부에게 내 자리를 빼앗긴 걸 모르지도 않을 테고.”
“……”
“나를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태자전하를… 힉,”


허둥지둥 변명을 하던 미도리야의 목덜미에 서늘한 칼끝이 꾹 짓눌렸다. 숨을 삼키는 법도 잊어버린 미도리야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선득해진 선홍색 눈이 낮게 웃었다. 아니면.


“네 놈도 나처럼 역적이 되어보겠다는 뜻이든가.”
“……”
“이제껏 스무 자루도 넘는 검을 만져 보았지만 무쇠를 이만한 칼로 만드는 미친 녀석은 처음 보는군.”


아.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역시 이 사람이라면 들고 있는 검이 철도 아닌 무쇠임을 알아볼 것이라 이미 짐작했었다. 50년이 넘는 전쟁 끝에 소국들을 제압하고 대륙을 통일한 바쿠고 황가는 예로부터 검술을 주요한 소양으로 여겨왔고, 황태자라면 말마따나 평생 스무 자루도 넘는 검을 만져보며 검법을 익힌다.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목덜미에서 떼어낸 검을 허공에 힘껏 그었다. 칼자루를 발견했을 때처럼 사나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무슨 짓을 했어.”


검자루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며 바쿠고가 지나는 듯한 투로 물었다. 뚜렷이 짚어주진 않았으나 검을 이르는 말임을 미도리야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미도리야가 버릇처럼 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보름 밤낮을 두드렸습니다.”
“농 치지마. 황궁의 야장들도 검 한 자루를 그만큼 오래 붙잡고 있진 않는다.”
“저는 그리 했습니다. 알고 계시는 바처럼 무쇠라서… 무쇠는 철보다 다섯 배, 열 배는 두드려야 검을 벼릴만큼 단단해집니다.”
“허면 이 장식은.”
“그것도 제가… 물론 세공사들에 비하면 미천한 솜씨입니다! 허나 태자전하께 그저 그런 것을 진상하고 싶지 않아서…”
“……”
“호랑이는… 죄송합니다.”


숲색 머리가 이번엔 보다 깊이 땅을 향해 기울었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깊게 숙인 머리칼 밑으로 미도리야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아직 뭐라 이를 말을 몰라 여전히 태자전하라고 칭하고는 있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1년 전에 관을 잃고 폐위 되었다. 폐위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황가의 일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헌데 황가의 상징인 호랑이를 장식으로 새겨 놓았으니, 자신이 같은 입장이라 하여도 충분히 오해할만 했다.
자루를 떼어내라고 하시려나. 미도리야가 잠시 짐작했다. 아니면 아예 다른 것으로 바꿔 통째로 다시 만들라고 하거나… 그렇지만 이제 더는 남는 쇠가 없을 텐데. 이렇게 쇠락해버린 마을에서 하나 밖에 없는 대장간인데다 본래 남쪽은 철이나 쇠 같은 금속이 풍요로운 지역도 아니었다. 허나 바쿠고는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면 네 놈 보기에는 어때.”


이번에도 역시 지나는 듯한 투였다.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예리한 검날에 선홍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검날을 바라보던 미도리야가 크고 둥근 눈을 두어 번 끔벅거렸다. 이번에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그랬다.


“예? 무엇을…”
“이 검. 네 놈이 만든 이 망할 검. 대답해보아라. 이 칼이 얼마나 예리한지.”
“어, 저는 검법에 서툴러 잘은 모르지만… 철로 벼린 검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밤낮없이 보름을 두드렸고, 사흘을 숫돌에 갈았다. 스승의 검수도, 자체적인 시험도 모두 끝났다. 검을 검집에 넣기 전에 미도리야는 제 손으로 직접 이 검을 쥐고 화선지를 갈랐었다. 칼의 예리함은 종이를 갈라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또렷해진 투로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향해 덧붙였다.


“적어도 무엇이건 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건, 그게 어떤 것이건.”
“예,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가를…”


자신 있던 말투가 또 한 번 꼬리를 흐렸다. 바쿠고의 손 안에 쥐어져 있던 검 끝이 종이가 아닌 미도리야의 옷섶 매듭을 돌연 툭, 끊었다. 과연. 당황한 미도리야의 얼굴을 뚫어보며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벌어진 옷섶을 타고 살갗 위를 미끄러지는 칼날을 닮아 있었다.


“무엇이라도 벨 수 있다,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차가운 검 끝이 미도리야의 가슴팍을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 날선 촉감이 차갑고 생경해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불편한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까딱 힘을 잘못 주었다간 분명 살갗이 베일 것이다. 허나 바쿠고는 검 끝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가슴팍을 타고 미끄러진 칼날이 흉골 한중간을 서늘하게 눌러왔다.


“허면 사람도 충분히 벨 수 있겠군.”
“……”
“내 숙부도.”

황제.

숲색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렸다. 동시에 바쿠고의 손에서 떨어진 검날이 챙, 소리를 내며 공기를 날카롭게 흔들었다. 검을 잡고 있던 손이 그대로 미도리야의 턱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뺨을 파고드는 강한 악력에 미도리야가 읍읍 막힌 소리를 냈다.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야, 칼쟁이.


“나는 네 놈이 만든 이 건방진 검이 맘에 든다. 허나 이보다 더 예리해질 수 있겠지. 만들어. 이 세상에 없는 예리하고 잔인한 칼. 호랑이 행세를 하고 있는 늙은 여우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수 있을만큼 확실한 칼.”
“읍, 우읍, 읍, ㅇ…!”
“네 놈이 내 공범이 되는 거다. 역적이 되는 거지. 하여 나는 네 칼로 숙부의 목을 베고, 효시한 후에 이 칼을 네가 만들었노라 세상에 고할 것이다. 이 칼이 황제의 칼이 되겠지. 허면 너는 황제의 검을 만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 곁에서.”
“우읍, 읍, 흡,…”
“어때. 말해 보아라. 나의 칼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내게 삼켜져 나를 죽일 독이 될 것인지.”


숨이 막혔다. 눈앞이 어지러워서 미도리야는 그 말에 똑바른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턱을 부술 듯이 꽉 움켜쥔 바쿠고가 손의 힘을 풀기가 무섭게 미도리야가 무릎을 꺾고 주저앉으며 밭은 기침을 했다. 이 남자는 검이다. 이 남자야말로 내 숨통을 베어 죽일 칼날이야. 어지러운 호흡을 헐떡이며 미도리야가 간신히 눈을 들어 바쿠고를 올려보았다.


“왜, 헉, 제게…”


흐려진 호흡을 헉헉 몰아쉬며 미도리야가 남은 말을 간신히 밀어냈다.


“왜 제게 이런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네 놈의 검이 맘에 들었으니까.”


바쿠고가 입매 끝을 가볍게 비틀었다.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다 묻느냐는 그 얼굴에 미도리야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허나 상대는 아무리 폐위 되었다 해도 황태자였다. 형과 형수를 죽이며 옥좌에 오른 황제가 그토록 두려워한다는 조카가 바로 눈앞의 이 바쿠고 카츠키였다. 허면… 미도리야가 남은 호흡을 밀어내며 흐린 눈을 들어 올렸다.


“제가 거절하면… 어찌 되는 건가요.”
“어, 간단하지. 알게 해줄까.”
“무엇을… 읍,”


벌어진 앞섶을 움켜잡으며 미도리야의 몸을 득달 같이 일으켜 세운 바쿠고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순간 너무 놀라 눈을 감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칼날 같은 혀가 벌어진 입술 틈을 교묘히 비집으며 설육을 어지럽게 헤집고는 멀어졌다. 코앞까지 밀려나온 날선 호흡이 미도리야의 입술 위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그런 선택지는 없어, 멍청아.”
“……”
“내가 너의 황제가 될 테니까.”


그 말대로 그때 미도리야는 뼈가 저리도록 깨달았다. 이 남자에게서 달아날 방법이나 벗어날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다.








(계속)







이 야밤에 갑자기 꽂혀서 오랜만에 고전을 두닥두닥 두드려 봅니다..... 대만 다녀오고 또 고전뽕을 참지 못한 것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년엔 지우펀 다녀오고 난춘탐려를 썼고, 올해는 임가화원을 보고 와서 폐위된 태자 바쿠고가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읍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 일단 상중하로 끝내자는 게 목표인데 저는 분량을 못 지키는 멍충이니까요() 그전에 이 뒤를 이어서 쓸 수는 있을는지......

어쨌건 보고 싶은 거 후다닥 써놓고 저는 자러 갑니드아아아 /////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큰절

?
  • ㅌㅎ 2018.09.15 06:04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꼬마 어른 2018.09.15 07:26
    헉 고전풍 사랑합니다♡♡♡♡ 바쿠고 너무 멋있........(츄릅)
  • 이글은 완벽합니다 2018.09.15 14:34 SECRET

    "비밀글입니다."

  • To. 루카님 2018.09.15 18:11 SECRET

    "비밀글입니다."

  • 엘로 2018.09.15 20:17 SECRET

    "비밀글입니다."

  • 미도리맨 2018.09.18 04:16
    와.... 역시 루카님 고전풍은 사랑이죠 정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rio 2018.10.03 13:44 SECRET

    "비밀글입니다."

  • 124 2019.06.15 23:43
    미쳤어요 진짜 ㅠㅠ 너무 재미있어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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