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계의 왕 바쿠고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 미도리야로 차원이동물 캇뎈
* 판타지AU 캇데쿠

BGM / WHEN THE SHADOW REVEALS YOU

https://youtu.be/nH1wowgc_Ko






Rājā

~ The King ~


<11>










이 세계의 모든 영혼은 두 개란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모두 그래. 모든 게 다 두 개란다. 붉은 달과 푸른 달, 하늘과 땅, 인간과 용… 지금 여기에 없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눈에 보이지도, 갈 수도 없지만 저 너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날, 바쿠고는 오랜 산의 호수에서 색이 고운 물고기를 물에서 건져 성채까지 가져왔다. 살던 곳을 떠난 물고기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정리해드리겠다는 시종들을 모두 사납게 물리치고서 바쿠고는 물그릇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하얗게 떠오르고 둥둥 떠오른 물고기를 고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는 상심에 잠긴 아들을 위로하는 대신 그저 옛 설화에 대해 얘기했다. 돌이켜 보면 그 물고기가 열 살의 바쿠고에겐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숲의 색을 그대로 닮은 물고기는 푸르고 깊은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녀석도 저쪽 세계의 강에서는 행복하게 헤엄치고 있겠지? 여기에서 죽는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냐, 울보 아들.」
「…안 울었어.」

씨근거리면서도 바쿠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코를 훌쩍 들이키며 물그릇 안을 뚫어보았다. 배를 하얗게 드러내고 축 떠있던 이름 모를 물고기는 이미 그 생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엄마가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울 필요가 없어. 죽는다고 해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니까.」

세상의 섭리라고 했다. 이쪽 세계에서 죽어도 저쪽 세계의 영혼은 남는다. 저쪽 세계의 영혼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영혼은 전혀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영혼은 이름은 물론 생긴 것과 성격조차 동일하게 태어난다. 운명도, 숙명도, 그 가문에 내려진 저주까지도.

「저쪽 세계의 너도 ‘어둠’을 안고 있겠지.」

엄마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바쿠고가 눈살을 구기며 되물었었다. 뭐가. 대답 대신 엄마는 웃었다. 그저 알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왕’은 자신을 죽인 자를 결코 떠나지 않으니까,
원수의 곁에 태어나 원수의 삶에 뿌리 내리는 것이 그의 운명이니까, 또한 그게 너의 숙명이니까.

뭐라는 거야. 바쿠고가 솔직히 씨근거렸다. 엄마의 말은 너무 어려웠다.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억지로 이해하는 대신 바쿠고는 물그릇만 줄곧 뚫어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 보내주렴.」

엄마가 말했다. 욕심이 많고 자존심이 강한만큼 고집이 세던 아들을 설득하는 법을 엄마는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물고기를 빼앗길까봐 물그릇을 양손으로 꼭 잡으며 자신을 노려보던 아들을 향해 엄마가 눈을 찡긋 했다.

「대신 재미있는 비밀을 하나 알려줄 테니까, 이 예쁜 물고기의 육신은 이제 이 산에 돌려주자.]

그날, 바쿠고는 물에서 건져낸 색이 고운 초록 물고기를 용의 정원에 묻었다. 시종들이 저들이 하겠다 나섰지만 축 늘어진 몸을 갈음해 흙구덩이를 파고 묻는 일까지 모두 스스로 했다. 묻힌 자리에 엄마가 해돋이꽃을 정제한 물을 뿌리며 주술을 외웠다. 저쪽 세상에서 더욱 행복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주술이라며 엄마는 여전히 고집스레 입을 닫고 있던 아들의 머리를 가만히 헝클였었다. 그리고 말했다. 카츠키.

「너는 이 세계의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 어떻게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지 알고 있니?」

엄마가 달빛처럼 낮게 속삭였다. 그 비밀은, 신전의 장로들조차 모르는 그 영원하고도 유일한 방법은…











그 초록빛의 물고기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흔들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깊은 두 눈의 색이 바쿠고에겐 꼭 그렇게 보였었다.


“흐읍, 웁, ㅇ…”

멈추지 못한 입술이 쉼 없이 맞붙었다. 그 언젠가 색이 곱고 눈망울이 깊어 오랜 호수에서 건져왔던 물고기처럼 짙은 초록의 홍채가 눈앞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눈빛이 바쿠고의 가슴 안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각도를 틀며 연거푸 입술을 겹치면서도 바쿠고는 일부러 눈을 감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그 까닭 없는 깊이를 알고 싶었다. 이 녀석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하. 슬며시 떨어진 잇새로 바쿠고가 낮은 호흡을 밀어냈다.

귓가로 붙은 입술이 또 한 번 속삭였다. 데쿠.

물고기의 비늘처럼 짙던 홍채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두 눈을 꽉 눌러 감은 미도리야가 바르르 몸을 떨며 바쿠고의 목을 끌어안았다. 계속 불러줘. 이미 젖은 숲색 눈에서 흘러 떨어진 눈물이 양뺨을 서럽게 적셨다. 기어이 그 이름이 다시 한 번 미도리야의 입술을 비집을 때 바쿠고가 숲색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턱을 젖히고 입술을 겹쳤다.

“캇쨔ㅇ… 웁,”

그 녀석은 누구일까. 캇쨩이라고 불린 그 이름은 네 인생에서 대관절 어떤 존재일까. 겹친 입술을 사납게 헤집으면서도 바쿠고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너는 그 이름을 발음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것을 꿈꾸는 얼굴이 된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가장 애틋한 것을, 가장 원하는 것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단단히 겹쳐진 입술 틈에서 설육을 휘저을 때마다 미도리야가 목울대를 낮게 울렸다. 그 기척이 좋아 입맞춤은 보다 더 깊어졌다. 그 점에 바쿠고는 잠시 우월감을 느꼈다.
그 캇쨩이 누구이건 상관없었다. 여기 있는 것은 나다. 손 안에 잡힌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크게 젖히면서 바쿠고가 보다 깊이 입술을 겹쳤다.

이 녀석은 물고기와는 다르다. 절대 죽게도, 저 세계로 돌아가게도 두지 않을 것이다. 내 것이다. 이 안에 담긴 것이 설령 이 땅에서 가장 불길한 것이라 할지라도.

틈없이 맞붙어 있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제야 뒤늦게 피맛을 느꼈다. 찢어진 미도리야의 입술을 흘깃 바라보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두 시선이 말없이 뒤엉겼다. 눈길을 돌리는 법도 잊어버린 채로 바쿠고는 잠시 자신을 향해 둥글게 열려있던 숲색 눈을 뚫어 보았다. 그 색이 오랜 산의 호수처럼 깊고 아득했다.

「여전히 무엇이 잠겨있는지 모를 눈을 하고 있는데.」

슥 뻗어간 손이 주근깨가 흩어진 뺨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흥미가 생겨버린다고.」

쓸데없이. 혀 밑으로 삼켜버린 말은 작았다. 그 말을 곧장 알아듣지 못한 모양인지 미도리야가 잠시 두 눈을 둥글게 열다, 이내 물었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 왕님…」

억양은 조금 전보다도 자연스러웠다. 바쿠고는 그 점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전혀 다른 말을 쓰던 녀석이다. 그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하여도 이만큼 자연스러운 억양을 구사하기에, 이 녀석의 언어와 이 땅의 언어는 얼핏 들어도 판이하게 달랐다. 헌데 대관절 무슨 연유일까. 눈 사이를 예리하게 좁히다 바쿠고는 이내 생각을 흐려 버렸다. 부쩍 능숙해진 녀석의 기이한 학습 능력보다도 왕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쪽이 바쿠고는 더욱 언짢았다. 자연히 되돌려주는 말투가 곱지 않았다.

「뭐.」
「…왜 입을 맞춘 건가요?」

겹쳐진 몸을 떼어내던 선홍색 눈이 멈칫 했다. 또 한 번 소리 없이 시선이 부딪쳤다. 사실 할 말이 없어 그랬다. 바쿠고가 무의식적으로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낫기 위해서.」

생각해낸 핑계는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은 것은 망할 엄마가 심어준 마녀의 힘 덕분이다. 허나 아예 타격이 없던 것은 아니다. 미도리야의 다리 위에 겹쳐져 있던 발목은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았고, 마녀의 힘으로도 이 상처는 막지 못했다. 하긴,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인가.
마녀의 힘을 회복하면 상처는 나을 것이고, 마녀에게서 온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 어차피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녀석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선홍색 눈이 잠시 미도리야의 입술을 뚫어 보았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끝엔 여전히 핏물이 맺혀 있었다.

“…? 윽, 무슨… 아파, 아프다고!”

바쿠고가 손을 뻗으며 찢어진 자리를 엄지로 아무렇게나 문지르자 미도리야가 눈 사이를 괴롭게 좁혔다. 그대로 손을 떼어낸 바쿠고가 엄지에 묻은 미도리야의 피를 할짝 핥았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뒤로 물러나던 미도리야를 두고 그대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걸어갈 힘은 회복했다. 가야할 길이 멀었다.

「볼 일 끝났으니까 일어나, 게으름뱅이. 두고 간다.」

무심한 투로 툭 뱉듯이 말하며 바쿠고가 건물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벌어진 옷자락을 수습하며 미도리야가 뒤늦게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이 땅의 말은 아니었지만 바쿠고는 지적하지 않았다.

“순 자기 멋대로 진짜… 키스한 게 누군데.”

어차피 욕하고 있겠지. 소리 없이 픽 입매를 민 바쿠고가 이내 웃음결을 흐렸다. 헌데 저 녀석이 떨어지던 순간에 내 눈에 보였던 것은 대관절 무엇이었을까. 가지 말라고, 사라지지 말라고 소리를 치던 것은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답이 없는 생각을 흐리면서 바쿠고가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형체를 한 눈에 다 알아볼 수도 없을만큼 거대한 짐승이 낡은 천장 속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용이었다.














*

오래 전, 이 땅에는 용이 살았다. 그리고 용을 섬기던 자들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을 모두 신의 은혜도 모르는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왕이 홀연히 나타나 용을 베어 죽이기 전까지만 해도 용은 이 산에서 가장 흉포하고 잔악한 존재였다. 용은 산을 돌며 수시로 인간들의 농토를 불태우거나, 인간들이 사육하는 달소를 사냥했다. 인간들은 저 멀리에서 용이 검고 어두운 초록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마다 동굴에 숨어 그저 언젠가 저 용을 무찔러줄 자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Raja. 미도리야가 바라보던 벽화에도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신전은 같은 동족인 인간들에게 박해 당한, 용을 섬기던 자들이 지은 것이다. 그들이 떠나면서 신전은 황폐해졌지만 여전히 곳곳에 이 산의 역사를 기록한 벽화들이 남아 있었다. 열 걸음을 앞서 걷는 바쿠고를 부지런히 쫓아가면서 미도리야는 종종 양쪽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가 나타날 때마다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선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용이 있었다. 강한 인간이 나타나 용을 베어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산 깊은 곳에 숨어 용을 섬기던 자들은 그날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야, 저 사람은.”

숲색 눈이 앞서 걷는 붉은 털망토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다리가 많이 좋아진 모양인지 바쿠고는 더 이상 걸음을 절지 않았다. 회복이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마 내 입술에서 난 피를 마신다는 의미인줄은 몰랐지만… 미도리야가 찢어졌던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피는 이제 멎어 있었다.

“이젠 슬슬 배도 고픈데…”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마녀에게서 떠나온 이후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한 배가 요란하게도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앞서 걷던 바쿠고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이런 소리를 감추기에는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눈이 마주친 미도리야가 어색한 입꼬리를 쓰게 밀었다.

「저… 배가 고파서요, 하하…」
「그 주인만큼 멍청한 위장이군.」
“뭔 말만 하면 멍청하대, 진짜.”
「…또 나를 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요? 에이, 설마요.」

눈치는 하여튼 귀신이다. 저런 것도 캇쨩이랑 진짜 똑같아. 생각을 하면서 미도리야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쪽을 흘깃 노려본 바쿠고가 돌연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가란 말도,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바쿠고는 부서진 석벽 너머로 잠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 안에 둥글고 붉은 열매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쪽으로 던져진 것을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받은 후에야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다녀온 석벽 너머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이제 제법 밝아진 하늘 아래에 키가 낮은 어둔 색의 덤불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지금은 잡초들이 무성했지만 건물 바로 옆에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신전에서 쓰이던 정원인 모양이었다.

“사과처럼 생겼는데…”

미도리야가 손에 잡힌 붉은 열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독 든 거 아닐까? 코를 대보니 단내가 껍질 너머로도 짙게 풍겼다. 먼저 한 입을 베어 문 바쿠고가 킁킁 냄새를 맡고 있던 미도리야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툭 말했다.

「안 죽어, 멍청아.」

뜨끔한 울대가 또 한 번 움찔했다. 눈치 하나는 하여튼 귀신이었다.

「눈의 열매다. 가장 추운 땅에서만 자라는 유일한 과실이지. 네 놈도 먹어봤을 테고.」

무너진 기둥 위에 털썩 걸터앉으면서 바쿠고가 부연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도리야가 손 안에 잡힌 과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전에 거인 아이들이 들고 오던 식사에 비슷한 향내를 가진 과일이 있었다.
같은 거였구나. 그제야 안심한 미도리야가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찢긴 입술 끝이 아직 아팠지만 아픔조차 잊을만큼 맛있었다. 이런 추운 데서 자라는 과일인데도 열매는 즙이 많고 달았다. 이것 하나면 당분간 허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두 입을 연거푸 베어 물면서 미도리야가 주춤주춤 바쿠고가 앉아 있던 기둥 끝에 앉았다. 적막한 실내에 아삭아삭 열매 베어 무는 소리만 들렸다. 석벽 너머로 언뜻 보이던 하늘은 이제 조금 전보다 푸르고 밝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저 궁금한 게…”

한 입을 베어 문 과일을 꿀꺽 넘기면서 미도리야가 슬그머니 운을 떼다, 다시 이 나라의 말로 고쳐 말했다. 이제는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 나라 어휘로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슥 이쪽을 노려보는 선홍색 눈길에 아차 싶었다. 맞다. 질문하는 걸 귀찮아했었는데, 이 사람… 하지만 좀 전에 열매를 건네줄 때는 짧았던 말이 다소 길었었다. 허기가 가신 덕인지, 아니면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번에도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말을 그저 무시하지는 않았다.

「내 집, 멍청아.」

그래, 이 말투는 아무리 이 세계의 인간으로 태어나 있어도 어쩔 수 없구나…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같은 영혼의 힘이란. 바쿠고가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신전 안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배운 내용이 맞다면 이 빌어먹을 신전은 이 산을 가로질러 지어져 있을 테니까. 길이 무너진 바깥보단 여기가 백배는 더 안전하다고.」
「그 말인즉, 이 신전을 따라 쭉 걸어가면 이 산을 빠져 나갈 수 있단 말인가요?」
「아마도. 이제 네 놈 질문은 됐어. 내가 물어볼 차례니까.」

순순히 대답해주는가 싶더니 됐단다. 진짜 이렇게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익숙한 황당함에 입을 떡 벌리던 미도리야가 제 쪽을 바라보는 바쿠고의 눈길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눈길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눈길이 아닌 것을 잊게 만드는 힘.
당신이 짐승이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사로 잡혀 스스로 목덜미를 내보였을지도 몰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미도리야가 긴장한 울대를 꿀꺽 밀었다.

「그 캇쨩이란 녀석, 지금은 어디에 있어.」
“에… 예?”


당황해서 순간 또 이 땅의 말을 잊어버렸다. 하필 딱 떠올리고 있던 이름을 들은 탓이었다. 어… 미도리야가 주근깨가 흩어진 뺨을 버릇처럼 긁적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캇쨩한테 관심이 많은 거지, 대체?

「저쪽… 제가 온 세계에 있어요. 거기서 저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함께 자랐거든요. 소꿉친구라서, 하하…」
「……」
「…물론 저한테는 그냥 친구가 아니었지만.」

캇쨩, 나는 너와 같은 이 사람 앞에서 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아. 그리움도 지나치면 고통이 된다는 걸 이 세계에서 확실히 깨닫게 됐다. 수시로 그리웠다. 수시로 보고 싶었다. 만약 아까 전에 이 남자가 키스를 하다 멈춰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먼저 옷을 벗고 안아달라고 애원했을 지도 모른다. 미도리야가 자신을 뚫어보던 얼굴을 향해 흐 웃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랬다.

「엄마들끼리도 엄청 친했어요. 항상 같이 다녔거든요. 나이 들면서 살짝 멀어지긴 했었지만, 하하… 그래도 저한테는 언제나 최고였어요. 캇쨩은 못하는 게 없었거든요.」
「……」
「좋아했어요. 아마… 친구 그 이상으로.」
「그 녀석은.」
「……」
「너를 좋아했나?」

곧장 대답을 못한 것은 목 안쪽이 떨려온 탓이었다. 호흡을 삼키는 것도 괴로웠다. 그날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랬다. 네가 내게 키스하던 순간, 그런 너를 밀쳐내고 달아나던 나를 향해 너는 처음으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이런 낯선 곳에서도 그 얼굴이 수시로 떠올랐다. 미안했다. 그만큼 아팠다. 미도리야가 시큰거리는 눈가를 괜히 손등으로 슥 문질렀다. 이번에도 억지로 웃었다. 바쿠고가 뼈대만 남은 과일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져 버렸다.

「안돼요, 왕님. 질문이 두 개잖아요.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셔야 해요. 어, 맞다!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저… 왕님은 언제 왕이 되셨어요?」
「……」
「어… 그러니까 왕님은 왕치곤 좀… 젊고, 어리고…」

슥 몸을 붙여 다가오는 바쿠고를 보며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목소리를 줄였다.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근사한 얼굴에 우물거리던 말이 혀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니까… 저를 뚫어보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도리야가 꿀꺽 울대를 밀었다. 잡지 못한 말이 꿈결처럼 입술을 비집었다.

「근사하고, 멋지고…」
「……」
「그러니까 어… 약간 가슴이, 술렁거리고…」
「……」
「반해버릴 것 같,」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뒷 머리칼을 헤집어 온 손바닥이 그대로 미도리야의 얼굴을 끌어 당겼다. 눈을 닫을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쳤고, 틈을 비집고 들어온 설육이 부드럽게 뒤엉켰다. 아. 미도리야가 눈 사이를 괴롭게 좁혔다. 이 키스가 제일 나빠. 맞댄 입술은 상냥했고 다정했고 뜨거웠다. 그 맞닿은 자리가 너무 달았다. 입술이 떨어진 것조차 잊어버릴만큼.

「더…」

저도 모르게 젖은 입술을 츱, 뭉개면서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더, 조금만 더.
하고 싶어. 그 말에 바쿠고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럴 기운이 있으면 걸어. 그리고는 미련도 없이 또 한 번 홱 몸을 돌려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저도 모르게 아쉬운 듯 쳐다보다가 남은 과일을 허겁지겁 깨물면서 미도리야가 뒤를 따랐다. 그래도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었다.

「좋아했을 거예요.」

바쿠고가 멈춰서며 말을 따라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저를, 캇쨩이. 밀려나온 남은 말에 바쿠고가 가볍게 입 끝을 밀었다. 그랬겠지.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
「걸어.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출구 쪽이다.」

석벽 너머로 걸린 하늘이 이제 제법 환했다. 아침이었다.














출구가 머지않았다는 바쿠고의 말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미도리야가 천천히 멈춰 섰다.

저 너머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출구였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출구는 절반 정도가 무너져 내렸고, 바닥도 곳곳이 부서지거나 아예 꺼져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려져 있던 벽화들도 이곳에선 훼손 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큰 싸움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천재지변이 있었다든가. 궁금한 마음에 미도리야가 다른 곳과 비교해 유난히 훼손이 심한 출구 근처를 휘 둘러보았다. 앞서 걷던 바쿠고가 돌연 미도리야를 돌아보았다.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멍청아, 발밑을 조심…!」

바쿠고가 외친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미도리야가 내딛은 바닥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대로 건물 한 층만큼 아래로 추락한 미도리야가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돌더미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위에서 이 편을 내려다보는 색이 밝은 머리칼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선홍색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멍청아. 움직이면 뒤진다.」

돌아갈 길을 찾을 모양인지 바쿠고가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저 사람이 뒤진다고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질 않는 걸까. 미도리야가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쓰게 웃었다. 다행히 그밖에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이상하게 여기서는 운이 엄청 좋네, 나는…”

악몽에서 헤맬 때에도, 마녀가 이름 모를 주술을 걸고 있을 때에도,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도 죽지 않았다. 심지어 나를 죽이려던 사람조차 이젠 나에 대한 살의를 잃었어. 이곳에 떨어져 수시로 죽을 뻔 했었지만 그때마다 최악의 수는 피해 갔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에도 미도리야는 얼어죽기 직전에 어부에게 발견되었다. 만일 어부가 조금이라도 미도리야를 늦게 발견했더라면 얇은 교복 하나만 걸쳐 입은 채로 눈 속에 파묻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운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들이 지금까지 꽤 많았다. 내가 이 땅하고 잘 맞는 건지, 이 땅에선 나도 운이 꽤 좋은 편인 건지. 원래 살고 있던 곳에서는 항상 운이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선 죽음을 어떻게든 피해간다.

마치 이 땅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설마 나한테 나도 모르던 대단한 힘 같은 게 있던 거 아닐까? 생각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흐 웃으며 생각을 흐려버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이런 세상에 떨어졌다고 해도 그런 판타지 소설 같은 설정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이미 철이 들어 버렸다.
재미있기는 하겠다. 이계에서 떨어진 평범한 소년이 알고 보니 이 세계를 구원할 영웅이었다든가, 굉장히 귀한 영혼을 가지고 있던 존재라든가. 이를 테면 영웅이라든가, 아니면… 생각을 삼키던 미도리야의 눈길이 문득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지하로 보이는 듯한 길고 어두운 복도 한 켠에 그것이 그려져 있었다.

“용…”

그 어두운 벽 너머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그림자’를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작았다. 아이? 미도리야가 둥그런 숲색 눈을 가늘게 좁히며 어둠 속을 뚫어 보았다. 하지만 더 볼 사이도 없이 그림자는 다시 벽 너머로 쑥 숨어 버렸다.
잘못 봤나? 아냐, 분명 똑똑히 봤었다. 미도리야가 긴장한 울대를 느리게 밀었다. 무서웠다. 겁에 눌린 목소리가 어둠을 향해 툭 물었다. 이 세계의 말은 아니었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벽 너머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분명 누가 있어. 어둠 속을 뚫어보면서 미도리야가 천천히 한 걸음씩 그쪽으로 다가섰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짐승의 그림자도 아니었었다. 미도리야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 세계의 말로 제대로 말했다.

「저기,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안돼.”

미도리야의 걸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 탓이 아니었다. 분명히 들었다. 이 세계의 말이 아니었다. 미도리야는 그 언어를 태어날 때부터 써왔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도 안돼.

석벽 너머에 숨어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너진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무리 속으로 나타난 그림자의 모습에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들려온 목소리대로 여자였다. 작은 체구, 갈색 단발머리를 가진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미도리야를 향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말도 안돼,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쓰던 말을 들은 건 이 세계에 떨어지고 1년 동안 처음이야.”

소녀의 이름은 우라라카 오챠코라고 했다.





*

합쳐지는 거야. 엄마가 달빛처럼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었다. 갈라져 있던 두 개의 영혼이,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던 한 존재의 두 영혼이.

「두 개의 달 중 하나의 달이 사라지는 날, 하늘에 달이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날… 그날, 달의 특별한 힘을 이어 받은 사람만이 두 영혼을 하나로 합칠 수 있지. 그럼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고 있니, 카츠키?」
「……」
「닫혀있던 ‘문’이 열린단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문,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소 달라서 바쿠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짐작했던 것보다 단촐한 방법이었다. 들리는 소문처럼 거인의 목이 백 개쯤 필요한 것도, 암흑숲에서 갓난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 특별한 힘을 물려받은, 그 강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어린 바쿠고는 더 궁금했다.
누가 할 수 있는데. 바쿠고가 불퉁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그 말에는 그저 애매하게 대답을 흐렸다. 글쎄, 누가 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그 주술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야. 이곳에서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을만큼.」
「……」
「그래도 그 ‘힘’을 가진 사람은 그 주술을 한 번쯤 써보고 싶겠지… 이 세계의 영혼을 포기해도 좋을만큼 간절하고 유일한 것이 저쪽 세계에만 존재한다면 말이야, 후후.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거기에 있다면, 저주를 풀 유일한 열쇠가 그곳에 있다면…」

이 세계에선 ‘사라져 버린’ 용이 그곳에 있다면.

마지막에 덧붙은 말은 작았다. 똑바로 듣지 못한 바쿠고가 되물었지만 엄마는 그저 아들의 머리칼을 장난처럼 헤집어 놓곤 그대로 돌아섰다. 그 탓에 바쿠고는 끝내 답을 듣지 못했다. 달의 힘을 이어 받아 세계의 문을 열 수 있을만큼 강한 사람이 엄마냐고, 엄마에겐 그만큼 강한 힘이 있느냐고 물어볼 기회를 바쿠고는 영영 놓쳐버렸다.
그리고 엄마는 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었다.








(계속)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동.... 히힛 그간 격조 했지요u/////u 1주일동안 트위터랑 애스크도 지우고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펑펑 놀다가 슬그머니 들고 오는 11편.......
정말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듯이 의욕이 죽어버려서 글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서 좀 쉬다 왔습니당 y////y 그래봤자 1주일이지만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튼무튼!
푹 쉬고 왔더니 기분 최고 좋네요ㅋㅋㅋㅋㅋ 게다가 내일부터 휴가라 더욱 기분 좋은 것....ㅠ.ㅠ.ㅠ.ㅠ.ㅠ.ㅠ.ㅠ 일단 글부터 스르륵 올려놓고 저는 한국땅을 며칠 뜨기 위해(?) 또 짐을 싸러 갑니당. 걱정해주신 분들 죄송하고 감사합니동 ㅠ/////ㅠ 그리고 사랑해요 히히히

?
  • 루카님알럽뷰 2018.09.09 14:27
    헤헤 푹쉬고 오셨다니 다행이네요!! 게다가 이렇게 다음편까지ㅠㅠㅠ 감사합니다!
  • Rimp 2018.09.09 14:28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꼬마 어른 2018.09.09 16:45
    헐 너무너무 기다렸어요ㅠㅠ 혹시 아프신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잘 쉬다 오셨다면 다행이네요ㅜㅜ
    우라라카 등장이라니 너무 보배롭습니다ㅜㅜ 오늘도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ㅜㅜ
  • 미도리맨 2018.09.10 03:24
    와 ..... 루카님이 푹 쉬었다니 다행입니다 ㅠㅠㅠㅠ 오늘편은 특히나 우라라카 오챠코가 나왔을 때 양쪽 팔에 소름이 돋았었어요...! 우라라카를 묘사하는 듯한 말이 나왔을 때 설마?!! 했었는데 우라라카 오챠코 라고 하자마자 소름이 ㅠㅠㅠ 정말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ㅠㅠ ♡♡
  • me 2019.02.25 19:15
    추리하는 건데 예전에 이세계에 오지않은 캇쨩과 데쿠를 설명(?) 하던때에 나온 실종된 소녀가 우라라카였군요!!
  • 메롱 2019.05.11 12:44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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