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계의 왕 바쿠고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 미도리야로 차원이동물 캇뎈
* 판타지AU 캇데쿠

BGM / Fringe Element

https://youtu.be/hj5IsFtx8tY






Rājā

~ The King ~


<9>










숲색 머리를 등에 업은 거인 아이가 깊은 숲 위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정오였다.

거인 아이의 등에 업혀 바깥으로 빠져나온 후에야 미도리야는 자신이 어느 장소에 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짐작했던 것처럼 낡은 석조 건물은 오래 전에 버려진 모양인지 곳곳이 훼손되어 있었고, 그나마 얼기설기 얽힌 나무줄기와 뿌리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듯 했다. 인적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지 수백 년은 된 것 같았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그 거대한 빈 터에 휘감겨 있었다. 때문인지 미도리야는 그 터가 어쩐지 무덤처럼 느껴졌었다.
미도리야를 업은 거인 아이가 숲으로 나온 후에 폐허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이 폐허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것 같았다.

여기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리고 그 마녀는 대체 왜 이런 곳에 나를 데리고 온 걸까?

거인 아이의 등에 업혀 미도리야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직 다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거인 아이에게 말을 걸만큼의 기력은 돌아와 있었다.
저기… 저도 모르게 동네의 말로 운을 떼던 미도리야가 아차 싶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또 버릇처럼. 흐, 웃음을 삼키고 이번에는 말을 고쳐 물었다. 어설펐지만 그래도 분명 이 세계의 말이었다.

「여기… 뭐하는 곳이야?」

어제보다 더 자란 선량한 눈망울이 미도리야를 잠시 돌아보았다.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고 뿌리와 나무 밑동이 어지럽게 뒤얽힌 숲 위를 쿵쿵 걸어가면서 거인 아이가 다물린 입술을 뗐다. 아무리 키가 자랐어도 그 천진한 말투만큼은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여기, 용. 용의 신전.」

이번에도 똑바로 알아들었다. 용을 섬기던 곳이구나. 용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도 있었다. 인간이 용을 죽였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미도리야가 아이의 두꺼워진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으며 다시 물었다. 아이는 이제 어림잡아 3미터 정도는 자라 있었다.

「용은… 어떻게 됐어? 어디 있어?」
「이제 없어. 용, 죽었어. 모두. 왕이, 죽였어.」
「……」
「이 산, 본래 용의 것. 용이 주인이야. 인간이 빼앗았어.」

그림에서 보았던 내용 그대로다. 생각에 빠진 숲색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정리해보면 그런 건가? 이 산은 본래 용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이 찾아와 용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 왕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책에 그려진 삽화만 떠올려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색이 밝은 머리칼과 불길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내가 아는 얼굴과 똑같은 그 남자.
한 달 전 같았으면 미도리야는 이런 얘기를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젠 전부 이해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마녀를 피해 태어난 지 몇 주 밖에 되지 않았다는 아이의 등에 업혀 이런 게임에나 나올 것 같은 숲을 지나갈 일이 있을 거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까.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최대한 마녀로부터 멀어져 도망치는 일이 우선이었다. 거인의 아이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서, 저주에 걸렸어.」

역시 놓치지 않고 모두 이해했다. 저주라니, 누가? 미도리야가 이번에도 어설픈 이 땅의 언어로 더듬더듬 물었다. 거인의 아이가 대답했다. 왕Raja.
아. 미도리야가 소리 없이 입술 끝을 꼭 씹었다. 그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와 같은 얼굴,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바쿠고 카츠키라는 이름의 왕. 그런데 저주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저주에 걸렸다는 것치고 너무 혈기왕성하던데, 그 남자. 그래도 궁금은 했다.

「왜 저주에 걸렸어?」
「왕… 용을 죽였어. 왕의 조상, 용을 벴어. 용은 화났어.」
「저주, 용이 준 거야?」

미도리야가 꼭 안고 있던 거인 아이의 머리가 끄덕끄덕 흔들렸다. 그렇구나. 알겠어. 생각에 빠질 때면 늘 그렇듯 미도리야는 버릇처럼 입을 모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위화감이었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 말을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지?

물론 책을 읽으면서 공부도 했고, 거인 아이 역시 말을 어렵게 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쉬운 단어들을 더듬더듬 조합해 꺼내는 문장들은 이제 말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서툴고 간단했다. 그 덕에 몇몇 단어들을 발음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나? 설마 내가 언어 천재였나? 그런 생각을 해보다 미도리야는 이내 말았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그밖에 다른 언어에 능통한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모르는 단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미도리야는 그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마치 아주 오래 전에 썼던 언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숲색 머리가 또 한 번 좌우로 흔들렸다. 어쩌면 마녀가 먹인 약 중에 뭔가 특이한 힘을 가진 것이 있었는지 모른다. RPG 게임 속에 등장하는 별별 희한한 이름과 능력을 가진 물약들처럼. 그래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가운 일인 줄은 몰랐다.

「우리는 어디로 가?」

미도리야가 물었다. 거인 아이가 함박 웃었다. 그 얼굴이 꼭 신이 난 어린 아이 같았다. 덩달아 미도리야도 마음이 들떴다. 지금껏 이 세계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처음으로 가신 것 같았다. 게다가 대화를 나눌수록 문장은 어쩐지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이 숲, 벗어날 거야. 왕에게 돌아갈 거야.」
「하지만 이 숲, 깊어 보여. 멀어 보여.」
「아냐, 길 안 잃어. 나, 찾아가. 내 형제를 따라서.」

형제? 고개를 갸웃하다 미도리야는 그게 누굴 가리키는 말인지 금방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항상 둘이 함께 다닌다. 쌍둥이인 건지 얼굴은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 이쪽 아이가 조금 더 키가 컸고, 파란 눈을 가진 형제와 달리 눈동자는 회색이었다. 회색의 순한 눈동자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저쪽에 있어.」

아이가 손가락으로 숲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복잡하게 뒤얽힌 가지 너머 저 멀리에 우뚝 솟아있던 높고 가파른 벼랑이었다.
멀지 않다고 아이는 말했다. 언제 도착해? 미도리야가 조금 전보다 유창해진 억양으로 물었다. 아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질 무렵! 그리고 덧붙였다. 거기에 있어, 같이.

「…왕.」

나, 빨리 갈 거야. 일찍, 데려다줄 거야. 아이가 속도를 높였다. 쿵쿵 걷는 아이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목을 더 꽉 움켜잡으면서 미도리야는 아이가 가리켰던 벼랑 쪽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가 저기에 있을 터였다. 나를 죽이고 싶어 했던 이 땅의 난폭하고 야만적인 왕.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칼과 가장 뜨거운 입술을 가진 사람. 너의 얼굴과 너의 이름을 가진 남자.
미도리야가 붉어진 얼굴을 거인 아이의 뒷목에 푹 파묻었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그 탓에 미도리야는 거인 아이의 오른쪽 발목에 앉아있던 작고 검은 것을 보지 못했다.
거미였다.













*

성채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눈표범은 거인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내달렸고, 바쿠고가 말을 타고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추격조는 일부러 간소하게 꾸렸다. 눈표범과 거인 아이, 바쿠고 자신을 제외하곤 키리시마와 병사 네 명이 전부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키리시마의 충고를 받아 들였다. 경비대를 모두 동원하기에는 서쪽 벼랑을 달리는 길은 너무 좁고 가팔랐다. 게다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도 적은 인원이 보다 편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바쿠고도 같은 의견이었다. 어차피 마녀를 죽이기 위해 가는 원정이 아니었다. 그저 마녀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된다. 그뿐이었다.

두 개의 달빛을 따라 밤이 새도록 말을 달렸다. 바쿠고는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거나 쉬지 않았다.

눈표범이 선두에, 표범을 무서워하는 거인의 아이는 맨 뒤에서 따르도록 했다. 줄곧 풀 한 포기 없는 풍경이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아침이 될 무렵에야 비로소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복잡하게 뒤얽힌 숲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키리시마의 말대로 산사태가 심하게 났던 모양인지 길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고, 발 아래로 뻗은 벼랑은 바닥이 어디인지 가늠이 안될만큼 높았다. 그래도 그 험한 길에 희미하게 찍혀 있던 수레 자국을 바쿠고는 똑똑히 보았다.

좁은 벼랑 위를 힘차게 내달리던 눈표범이 돌연 멈춰 섰다. 그리고 스무 걸음 뒤에서 말을 달리던 주인을 위해 크고 높은 소리로 포효했다. 바쿠고가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춰 세웠다. 거기에 수레가 한 척 버려져 있었다. 사람 하나를 눕히기에 좋은 크기였다. 바쿠고가 짐작한 대로였다.

「수레를 버렸다는 건 여기서부터 걸어갔다는 뜻이겠지?」
「아마.」

키리시마의 질문에 바쿠고가 말 위에서 내려서며 짧게 대꾸했다. 토가는 영리한 마녀다. 추격을 당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수레를 여기에 버렸다는 것은 여기서부터는 걸어갔다는 뜻이다. 선홍색 눈이 바닥에 희미하게 찍혀있던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이라기엔 그 크기가 거대했다. 그러나 발자국이 주욱 찍혀있던 길은 열 걸음 앞에서 무너져 있었다.

「하, 역시.」

바쿠고가 입 끝을 차갑게 비틀었다.

「길을 없앴군, 그 마녀.」

길은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인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까딱 발을 잘못 내딛었다가는 그대로 실족할 게 빤했다. 그래도 이 길이 어디로 뻗어있는지는 눈에 보였다. 바쿠고가 끊어져 버린 길을 따라 눈길을 주욱 훑었다. 길은 벼랑 아래에 있던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버려진 신전, 즉 용의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바쿠고가 찾는 것은 아마 저 깊은 숲 안에 버려져 있을 터였다.

스스로 직접 거두러 올만큼 가장 귀한 전리품을 마녀는 용을 섬기던 자들의 신전 안에 숨겨놓았다. 이유야 빤히 안다. 마녀들은 언제나 주술이 벌어지는 장소에 집착한다. 그래야 그 장소의 기운을 얻어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은 500년을 버려져 인적조차 끊어진 곳이니 숨기기에는 더욱 안성맞춤이다. 만약 자신이 마녀의 입장이었어도 분명 같은 곳에 녀석을 숨겼을 것이다. 발길 끊긴, 복잡한, 저주가 내렸다던, 그리하여 그 누구도 함부로 찾아올 수 없는.

「하지만 길이 이래서야 돌아가야겠는데…」

같은 곳을 바라보던 키리시마가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바쿠고가 가볍게 입끝을 비틀었다. 어차피 같은 생각이었다.

「길이야 찾으면 많겠지. 저렇게 거대한 도시에 들어오는 길이 하나였을 리가 없을 테니까.」

용과 더욱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은 산 아래의 인간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고,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이 산의 바위를 깎고 터를 다져 신전이라기엔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신전의 장로들조차 모른다.
그러니 분명 다른 길은 있다. 저만한 규모의 신전을 짓기 위한 자재들이 이런 좁은 샛길로 드나들었을 리도 없었다. 다만 여기서부터 더 이상 눈표범은 쓸 수 없었다. 숲은 너무 많은 냄새를 가지고 있다. 눈표범의 후각이 이 산의 모든 동물 중 가장 뛰어나다고는 하나 이 숲에선 무용지물이다. 바쿠고가 거인의 아이를 데려온 건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허나 물어볼 것도,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행렬의 맨 뒤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온 거인의 아이가 벼랑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이의 푸른 눈이 반가움과 생기로 반짝거렸다.

「저쪽…]

손끝을 따라 바쿠고가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이리 오고 있어.」

성채의 가장 높다란 탑 하나만큼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뭔가가 쿵쿵 걸음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인의 아이였다.











*

하루종일 눈구름에 뒤덮여 있던 하늘이 서서히 붉어졌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숲은 거의 빠져 나왔다. 머리 위를 울창하게 덮고 있던 가지들 틈으로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를 저물 무렵에 데려다 주겠다던 거인 아이의 약속은 틀리지 않았다.
저쪽… 거인 아이가 벽처럼 사방을 에워싼 높은 벼랑 어딘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회색눈의 아이가 거듭 우물거렸다. 저기 있어, 왕.
아.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이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벼랑에 서있던 붉은 망토가 바람을 따라 크게 펄럭거렸다. 왕Raja이었다.

혼자 온 것은 아닌 모양인지 뒤에는 미도리야도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붉은 머리의 경비대장과 병사들 서넛이 말을 잡고 서있었다. 거인의 아이도 보였다. 형제의 얼굴을 알아본 푸른 눈의 아이가 벼랑 위에서 거대한 손을 크게 흔들었고, 신이 났는지 회색눈의 아이가 제자리에서 쿵쿵 뛰며 발을 굴렀다. 그 덕에 미도리야는 하마터면 아이의 목을 놓치고 바닥으로 떨어질 뻔 했었다. 다시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더 또렷하고 명료해진 이계의 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형제를 만나서 다행이야.」
「응, 좋아! 나, 좋아!」
“잠깐, 또 그렇게 구르면 나 진짜 떨어지… 힉!?!”

놀란 탓에 이번에는 본래 쓰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가 또 한 번 쿵쿵 발을 구르며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고, 이번에는 정말로 떨어질 뻔 했다. 뒤늦게 자기 실수를 알아차린 거인의 아이가 황급히 몸을 돌려 뒤로 기우뚱 기울던 미도리야를 양손으로 받쳐주었다. 미안해… 미도리야를 내려다보는 회색눈이 글썽거렸다. 그래도 그 얼굴엔 며칠만에 다시 그리운 형제를 만난 반가움이 가득 걸려 있었다.

「기뻐해. 좋아해, 왕도.」
“…어?”

미도리야를 양손으로 끌어안은 거인 아이가 벼랑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이가 거듭 말했다. 왕, 좋아해, 기뻐해.

「너 돌아와서, 좋아해. 왕, 반가워해. 니가 돌아와서 웃어. 좋아해.」
“어? 아니, 어… 나? 설마, 하하… 아니, 그런 게 보여?”

이번에도 당황하니 본래 쓰던 말이 튀어나왔다. 거인들은 시력도 굉장히 좋구나. 나는 여기서 저 남자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그 말이 어쩐지 기뻤었다.

너 때문이야. 자신을 받쳐 든 거인 아이의 손을 꽉 잡으며 미도리야가 입술을 꼭 씹었다. 네가 그리워서,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저 남자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뿐이었다. 거인의 아이는 신이 나 있었다. 데려다줄 거야, 빨리, 나! 아이가 양손으로 받쳐 든 미도리야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쿵쿵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벼랑을 타고 오르라는 소리가 들렸고, 무너진 길 앞에서 망설이던 아이가 미도리야를 더 단단히 가슴팍에 붙이고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도 왕은 벼랑에 서서 미도리야를 똑똑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도 미도리야는 자꾸 눈가가 시큰거렸다.

캇쨩,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천천히 올라와! 자, 얼마 안 남았어!」

거인 아이는 성큼성큼 절벽의 틈을 밟고 가지를 발판 삼아 거침없이 벽을 타고 올랐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붉은 머리 경비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가슴팍에 안겨 거인 아이의 목을 꽉 붙잡고 매달려 있던 미도리야가 목소리를 따라 눈을 들었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경비의 손은 아니었다.

「얼른 올라와, 멍청아.」

손의 주인이, 색이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씩 웃고 있었다. 아.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열었다.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평생동안 지켜보며 동경했던 단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네가 아냐.

「감히 이 내가 여기까지 직접 오게 만들다니, 하. 네 놈도 대단하군.」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만큼 손은 가까웠다. 그 손을 뚫어보며 미도리야는 잠시 망설였다. 이 손을 잡으면 돌아갈 수 없다. 이 손을 잡게 되면 나는 다시 목줄과 족쇄로 나를 옭아매던 그 차가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될 거야. 네가 아닌, 그러나 너와 같은 남자의 허리 밑에서 나는 네가 그리워 울고 있겠지. 그래서 이 남자가 싫었다. 가능하다면 죽여서라도 도망치고 싶었었다. 미도리야가 다시 한 번 입술을 피가 베일만큼 크게 씹었다.

그래도 내 머리칼을 넘겨주던 이 손은 다정했었어. 무심코 너와 착각해 버릴만큼.

망설이던 미도리야가 내밀어진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아직 한 뼘 정도가 모자랐다. 조금만 더, 다 왔으니까! 머리가 붉은 경비대장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높이며 독려했다. 거인 아이가 위쪽으로 뻗어있던 틈을 잡으며 천천히 몸을 높였다. 됐어. 미도리야가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더…

어디선가 날아온 단도가 거인 아이의 목을 푹, 꿰뚫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 미도리야는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몰랐었다. 미도리야를 안아주고 있던 거대한 몸이 일순 경직된 것처럼 우뚝 굳더니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위화감에 고개를 돌린 미도리야가 부릅뜬 채 생기를 잃은 회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돼…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소리를 질렀다. 죽지마, 안돼, 이러지마…

“…안돼… 안돼……!”
「잡아, 멍청아! 뭐든!」

거인 아이와 함께 벼랑으로 추락하던 미도리야를 붙잡은 건 머리 위에서 들린 고함 소리였다. 가까스로 버둥거린 팔에 가지 하나가 간신히 움켜잡혔다. 거인 아이는 그대로 숲의 무성한 가지 속으로 쿵,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형제를 잃은 거인의 높고 음울한 울음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허나 미도리야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거인 아이가 떨어진 곳에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던 바쿠고가 눈 사이를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마녀였다.

「알고 계시지요, 바쿠고님.」

두 번째 단도를 꺼내들며 벼랑 위를 노려보던 노란 눈이 차갑게 웃었다.

「암흑 숲의 마녀는 빚을 지지 않고, 말한 바는 반드시 지키거든요.」

번뜩이는 칼날을 치켜든 토가가 자기 목덜미를 날카롭게 그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흥건히 베여 나오게 하기엔 충분했다. 재빠르게 손바닥을 펼쳐 목덜미를 훔친 토가가 붉게 젖은 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바쿠고가 어두워지는 머리 위를 잠시 쳐다보았다. 눈보라가 오고 있었다. 아니. 선홍색 눈이 서늘하게 좁아졌다.
재앙이었다.

「물러서, 모두!」

검을 뽑으며 바쿠고가 뒤를 향해 소리를 쳤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구름에서 내리친 벼락이 맨 뒤에서 말을 잡고 있던 병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땅 밑이 우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자리를 피했던 바쿠고가 황급히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바위를 따라 미도리야가 붙잡고 있던 가지가 조금씩 뿌리를 드러내며 기울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마녀가 노란 눈을 반짝이며 히죽 웃었다. 그 얼굴에는 어찌된 일인지 몰라 그저 정신없이 가지만 꽉 붙잡고 있던 미도리야도 오싹 소름이 끼쳤었다.

「용을 원하는 건 당신만이 아니랍니다, 바쿠고님. 그 용을 범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신만이 아니지요.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실컷 봐두시는 게 좋아요. 후회하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아하하하-」
「……」
「제가 오늘, 그 용을 죽일 테니까.」

용…?

허나 미도리야가 다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또 한 번 벼락이 내려쳤다. 땅이 패일만큼 깊은 벼락에 앞발을 들어 올린 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고, 바닥에 엎드린 거인 아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밧줄을 찾아와! 아니면 묶을 거라도, 뭐든! 키리시마가 소리를 높였다.
그때도 미도리야는 간신히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미도리야가 벼랑에 박힌 가지의 밑둥을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지가 조금씩 더 기울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미도리야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직 거인 아이가 눈앞에서 죽었다는 충격과 슬픔도, 마녀에 대한 공포도 다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매달려 있다고는 해도 약기운이 완전히 가신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매달린 팔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었다. 가급적 아래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미도리야는 눈앞에 뻗친 가지를 더욱 힘껏 움켜잡았다.
하지만 미도리야의 손에 잡혀있던 나뭇가지는 그 뿌리와 뼈대가 너무 가늘고 연약했다.

저대로 두면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바쿠고의 몸이 멋대로 벼랑 쪽으로 기울었다.

「인마, 야! 그러다 너까지 죽는다고!」

머리 위에서 토가가 불러낸 검은 구름이 또 한 번 크게 원을 그리며 커지고 있었다. 그전에 살려야 한다. 키리시마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바쿠고가 벼랑 끝을 잡고 아래쪽 틈에 발을 디디면서 아래로 내려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지금은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밧줄도, 밧줄을 대신할만한 다른 것을 구할 시간과 여유조차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벼랑 아래에서 토가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싫어! 건드리지마! 내 꺼야, 내 꺼라고!」

또 한 번 벼락이 바위를 때렸다. 그 바람에 손을 놓칠 뻔 했던 바쿠고의 발에 채인 돌 하나가 숲색 머리 위로 툭 떨어졌고,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있던 미도리야가 고개를 들다 그제야 바쿠고를 발견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숲색 눈이 둥글게 열렸다. 허나 왜 직접 왔느냐는 말을 물어볼 여유도, 왜 너 같은 걸 구하러 직접 벼랑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지에 대해 변명할 여유도 둘에게는 없었다.

조금만 더. 힘줄이 돋을만큼 바위 틈을 힘껏 움켜잡은 바쿠고가 천천히 벼랑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좀 전보다 숲색 머리가 가까웠다. 허나 녀석은 아직도 바쿠고의 손끝에서는 너무 멀었다.

“하하, 자꾸… 헉, 손에서 힘이…”
「버텨.」
“버티라는 것 같은데, 흐… 이게, 자꾸 떨어지고 있어서요, 하하…”
「버티라고, 등신 새끼야!」

내 생에 이렇게 간절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 선홍색 눈이 크게 열렸다. 이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 가슴 안쪽에서부터 힘껏 걷어차고 있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박동, 온몸의 척추가 쭈뼛할만큼 소름이 끼치는 공포. 공기의 흐름이, 머리 위의 해가,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숨을 죽이고 멈춰버린 것 같은 감각. 다른 생각은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한 가지만 간절히 바라면서 손을 뻗던 기억…

죽지마.
제발,
가지마, 등신 새끼야.

분명히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인데도 분명히 처음 겪는 느낌이 아니었다. 바쿠고가 몸을 벼랑 쪽으로 더 기울이며 힘껏 손을 뻗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바쿠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도리야의 손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잡혀 있던 가지가 기어이 뿌리를 완전히 드러냈고, 숲색 머리가 바닥으로 추락할 때 몸이 먼저 그쪽을 향해 기울었다. 가까스로 손을 움켜잡았던 그 찰나에 바쿠고는 어쩐지 웃음이 났었다.

아, 나는 이 녀석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군.

그리고 손을 마주잡은 두 그림자가 그대로 벼랑 아래로 추락했다. 무너진 벼랑 끝에는 더 이상 왕도, 이계의 소년도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낮았다.











(계속)





오늘도 역시 1만자를 넘었고, 바쿠고랑 미도리야는 토가 때문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고......
8편하고 9편은 전개상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라 스토리를 중점적으로 풀다보니 애들 붙어먹는() 뭐가 없네요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 하지만 조만간 또 주구장창 붙어먹게 될 것 (.... 무튼무튼.
내일부터 또 주말동안 가족 모임 겸 여행을 떠나는지라ㅠ 그전에 쓰고 싶었었는데 목표 달성해서 뿌듯합니동...ㅠ///ㅠ 다음 편이 벌써 10편이라니 ㅠ0ㅠ 잘 쉬고 잘 놀고 또 돌아와서 열심히 달리겠습니당/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큰절

?
  • 살려줍매 2018.08.17 17:38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꼬마 어른 2018.08.17 21:04
    눈팅만 하다가 처음 댓글을 답니다. 다른 할 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사랑합니다 진짜로!!!
  • 엘로 2018.08.17 23:56 SECRET

    "비밀글입니다."

  • 지나가던시민 2018.08.18 15:30 SECRET

    "비밀글입니다."

  • dd 2018.08.19 21:15
    여행 잘다녀오세요!!ㅎㅎ 다음스토리도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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