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계의 왕 바쿠고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 미도리야로 차원이동물 캇뎈
* 판타지AU 캇데쿠

* 이번 편도 미약한 수위 주의


BGM / Fringe Element

https://youtu.be/hj5IsFtx8tY






Rājā

~ The King ~


<6>










미도리야를 다시 수습하러 돌아온 것은 거인의 아이들이었다.

“아까는 놀랐었지? 다행히 두고 간 연고 덕분에 상처는 씻은듯이 나았… ???? 어, 저기, 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미도리야를 본 거인의 아이들은 그 큰 눈을 흔들며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당황한 건 미도리야였다. 괜찮아, 나는 괜찮다니까? 몇 번을 그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미도리야를 다시 작은 짐승처럼 소중히 안아들고 우리로 돌아갈 때까지도 눈물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었다. 목줄을 다시 창살에 매달고 싶지 않아 울먹이며 망설이는 얼굴을 보았을 땐 어쩐지 미도리야도 코가 시큰거렸었다.

“내가 갇히는 게 걱정이 돼서 그러는구나.”

그 말에 두 아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이번에도 분명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미도리야의 표정과 말투를 살펴보고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듯 했다. 남의 고통을 제 일처럼 공감할만큼 착하고 순한 심성을 가진 덕분일 것이다.
그래도 일은 일이었다. 이 아이들은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미도리야에게 설명해주고 싶어했다.

「우리… 거인의 일족. 미안. 왕의 말, 거역 못해. 이 산에선 모두 거역 못해. 왕의 말, 절대적…」

미도리야의 목줄을 다시 채우면서 내내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들은 우리의 자물쇠를 걸면서 계속 미도리야가 뭔가를 더듬더듬 말하려 애를 썼다.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며칠 지켜본 바로 이 아이들은 말이 짧다. 하기야, 아무리 성인 남자만큼 키가 자랐다 해도 태어난 지는 보름 정도밖엔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미도리야는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은 곧잘 알아들었다. 책에서 그 단어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아이들의 덕이었다. 지금도 분명 같은 단어를 들었다.

“Raja? 왕? 그 바쿠고 카츠키라고 하는, 잘 생겼는데 성질 험악하고 눈이 이렇게 째진 남자?”

미도리야가 창살 바깥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양쪽 눈꼬리를 홱 치켜뜨는 흉내를 냈다. 박수를 치며 미도리야를 가리킨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동네에선 재미없는 너드라고 소문나 있었는데.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여기선 거인들을 웃겨보네…
덕분에 신이 났다. 바쿠고의 표정이라면 굳이 이 세계의 왕이 아니어도 잘 알고 있었고, 미도리야가 손짓과 표정으로 그 얼굴을 흉내 낼 때마다 거인의 아이들은 그 큰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배를 잡았다. 이 세계의 왕이 소꿉친구랑 닮았다는 점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할 줄은 전혀 몰랐다.

“어디에서 웃음소리가 자꾸 들린다 했더니.”

이젠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거인의 아이들도 웃음을 멈췄다. 책을 한 아름 안아들고 나타난 장로장이 허허로운 얼굴로 웃었다. 고작 하루를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미도리야는 그 얼굴이 반가웠다. 그러나 가장 반가웠던 것은 사실 그 품에 안겨있던 책이었다.

“이쪽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들어서 책을 챙겨왔습니다. 열심히 읽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장로장이 들고 온 책더미를 우리 바로 앞에 내려놓던 동안에도 미도리야의 눈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미도리야는 정말로 이 책이 절실했다. TV나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닌 이런 세계에선 독서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특히나 이렇게 짐승이나 가둘 법한 우리 안에 구금되어 있는 신세이니 바람을 쐬러 가거나 산책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감사해요. 사실 진짜 심심했거든요, 하하…”

잘 읽을게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약간 민망해진 미도리야가 장로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맨 위에 놓여있던 책부터 우리 안으로 가져와 펼쳐 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장로장이 잠시 어두운 얼굴을 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 미도리야님, 불편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젯밤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마음이 쓰여서요.”

책장을 바라보던 숲색 눈이 장로장을 올려 보았다. 어젯밤? 어젯밤… 어젯밤에 내가 뭘 했더라.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점점 더 투미해졌다.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도 희미한 간밤 기억 속에 뚜렷한 것이라곤 그저 캇쨩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었어요.”

미도리야가 말했다. 장로장이 눈을 크게 열었다. 예상했던 대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목소리라니… 무슨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겁니까.”
“그걸 잘 모르겠어요, 하하…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여자분의 목소리였어요. 귓가에 계속 속삭였거든요. 가라고, 가야한다고, 여기서 나가야한다고.”

이 땅에는 널 가둘 수 있는 것도, 널 막을 수 있는 것도, 널 해칠 수 있는 것도 없어.

맞아. 분명히 그런 말을 들었었어. 미도리야가 입술을 모았다. 생각에 깊게 빠질 때면 흔히 이런 얼굴을 했고, 그때마다 바쿠고에게 웃기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타박을 들었었다. 장로장이 다시 물었다.

“혹시 얼굴도 보셨습니까?”
“아뇨. 목소리만 들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 저도 모르는 몽유병이 있었나봐요, 하하…”
“……”
“그런데 어떻게 밖으로 나갔던 건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내가 가장 알고 싶어. 온천수가 커튼처럼 쏟아지던 그 아름다운 정원에서 바쿠고를, 그러니까 이 땅의 왕을 만나 붙들리기 전까지 미도리야는 계속 그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편안했다.

“꼭 오랫동안 알고 있던 목소리 같았거든요. 뭐라고 하면 될까, 어… 되게 그리운 느낌이었어요. 제가 이런 표현이 서툴러서 똑바로 말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흐.”
“……”
“예전부터 계속 옆에 있던 친구 같은… 맞아요. 소꿉친구처럼.”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는 걸까? 아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장로장은 그나마 이 낯선 세계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낯선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아마 나는 이러다가 이 분에게는 캇쨩에 대한 얘기까지 술술 털어버리지 않을까… 지금도 사실 위태롭기는 했다. 보고 싶어서, 지금도 네가 수시로 그리워서.
장로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다 미도리야가 슬슬 어색한데 다시 책을 읽을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던 그 즈음에야 비로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미도리야님, 저는 그저 신을 섬기고 그 분의 예언을 받을 뿐인 미력한 자인지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장로장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어두웠다. 아니, 그 빛은 차라리 수심에 가까웠다. 알고 싶지 않은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어른들은 흔히 이런 얼굴을 했었다.

“제 생각에 당신을 부른 것은 아마도 그 땅 밑의…”













*

토가 히미코는 암흑숲에서 가장 영악한 마녀였다. 더불어 가장 불길한 주술사이기도 했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토가 자신조차 몰랐다. 가장 강한 마녀가 암흑숲에 버려진 토가를 주웠고, 걸음마는 커녕 말 한 마디 할 줄 모를만큼 갓난 여자아이였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녀들은 본래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타인의 나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은 수십 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하고는 했다.

그 마녀는 한동안 토가를 책임지고 이끌다, 토가가 성인 여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무렵에 왕의 왕비가 되어 암흑숲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토가는 그녀를 대신해 자신을 맡아주었던 마녀의 주술서와 귀한 약제를 몽땅 훔친 후에 암흑숲에서 도망쳤다.
암흑숲을 떠나있던 10년동안 토가는 산 아래를 가림 없이 떠돌면서 남을 저주해 죽이는 일로 돈을 버는 한편, 세상에 숨어있던 수많은 금지된 주술들을 익혔다. 그녀가 다녀간 후에 거인의 땅에서는 사람의 사지를 비틀거나 부수는 주문서가 사라졌고, 법사의 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일으키는 주문이 적힌 고서를 도둑맞았다.

다시 암흑숲으로 돌아왔을 때 토가 히미코는 더 이상 예언과 지혜의 선량한 길을 따르는 마녀가 아니었다. 하기야, 그녀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스스로 선량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주술서를 도둑맞았던 마녀는 혼내줄 요량으로 벼락을 부르다 다음 날 독의 살을 맞아 거멓게 탄 시체가 되어 연못에 떠올랐다. 주술서, 약제, 다음으로 마녀의 집을 빼앗고 앉은 토가는 그곳에서 돈만 받으면 무엇이건 했다.  가령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지 않을만큼 팔다리가 비틀리도록 만들거나, 영원히 악몽에 시달리도록 만들거나.

돈을 준다면 무엇이건 한다. 토가가 산사태로 험해진 길을 넘어 사흘만에 왕의 성채를 찾아온 것도 역시 키리시마가 건네준 금화 세 자루 덕분이었다.

「영원히 범해지는 꿈을 꾸게 만들고 싶은 자가 있으시다구요.」

발까지 치렁치렁 떨어지는 검고 낡은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토가가 바쿠고에게 절을 했다. 왕좌에 턱을 괴고 앉아 바쿠고는 잠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어린 얼굴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양쪽으로 둥글게 올려 묶은 머리의 색은 밝았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은 아직 성년도 맞지 못했을 것처럼 어려 보였다.
허나 마녀들이 절대 자신의 진짜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쿠고는 암흑숲의 딸이었던 어머니를 통해 알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어도 토가 역시 이미 50년은 족히 살았을 것이다.

「아마.」

애매한 얼굴로 말을 흐리며 바쿠고가 턱을 괸 손을 풀었다.

「저주에 한해서는 이 땅에서 너를 따를 자가 없다던데.」
「제 소문이 어찌 이 산을 다스리는 존엄한 분의 귀에까지 닿았을까요? 허나 저주엔 돈이 많이 든답니다, 바쿠고님. 특히나 꿈 같은, 정신을 조종해야하는 주술일수록 더욱 값이 비싸지요.」
「네 놈이 하는 것을 봐서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그깟 돈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한때 용의 둥지였던 이 성채에는 아직도 용이 남긴 유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점을 토가 역시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암흑숲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토가가 스스로 주술을 쓰면서까지 성채에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돈 때문이다. 바쿠고 역시 그 점에 대해선 짐작하고 있었다.

「정말로… 무엇이건 다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노란 빛을 띤 황금색 눈이 요요하게 번뜩였다. 마녀의 제안은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곁에 서있던 키리시마가 바쿠고를 잠시 불안한 얼굴로 돌아보았으나 말리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쿠고는 이 간악한 마녀가 기껏해야 용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마법서나 고대의 보석 따위를 요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토가가 요구한 대가는 바쿠고도, 그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용의 뼈를 제게 주시지요.」
「……」
「500년 전에 당신의 조상이 죽인, 그 용말이에요. 아직 이 지하에 온전히 남아있는 것을 제가 어찌 모를까요?」

용, 이라는 말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그 홀에 모여있던 모두가 똑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용이라니 저 마녀가 용이라고 했어? 벽에 붙어 서있던 병사들이 저희끼리 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허나 토가는 태연했다. 조금 전의 여유를 완전히 지워버린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역시 너 정도 되는 마녀가 아무 속셈도 없이 이 성채까지 왔을 리가 없지.」
「속셈이라니요, 후후. 저는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혜에 관심이 많을 뿐이랍니다.」
「암흑숲의 마녀가 이 땅에서 용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도 없을 테고.」
「그것을 제가 가진다고 해서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요. 바쿠고님의 어머니 되시는 미츠키님이라면 모를까, 저는 그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연약한 마녀인 걸요.」

이 말이 거짓인 것은 벽을 지키고 선 병사들조차 모두 알 터였다. 토가의 주문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 저주를 받거나, 혹은 죽거나. 차갑게 굳은 바쿠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토가가 싱긋 입매를 밀었다.

「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바쿠고님. 저를 이 자리에서 물리치시고 다른 마녀를 찾아보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용의 뼈를 내주겠다 약조를 하시고 바라던 자에게 영원히 범해지는 꿈을 꾸도록 하시거나. 알고 계시겠지만 제 저주는 실패한 적이 없답니다. 저라면 능히 해드릴 수 있어요.」
「……」
「조금 더 바라신다면 범해지는 저주에 그칠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 꿈속에 가둬드릴 수도 있지요. 영영 돌아가지 못하도록. 그 이계 소년이…」

표정이 사라졌던 선홍색 눈이 미미하게 흠칫 했다. 그 작은 기척을 토가가 놓칠 리가 없었다. 토가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 땅에서 바쿠고님이 이계의 소년을 잡아 가두시었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는 걸요. 그 소년을 그리 아끼신다구요. 족쇄까지 채우시고서.」
「…이 자리에서 혀를 잘리고 싶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주지.」
「마녀에게 함부로 칼날을 댈 수 없다는 건 아마 바쿠고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요? 미츠키님의 아들이시잖아요?」
「……」
「저라면 그 소년을 영원히 이 세계에 예속시킬 수 있답니다. 당신의 꿈 안으로, 당신이 다스리는 이 산에서, 당신에게 범해지며 찢기는 꿈 안에 갇혀 오로지 당신만을 부르도록.」

선홍색 눈 사이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용의 뼈다. 바쿠고조차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그 근처에 직접 가보지 못했다. 한때 돌무덤이 있었던 지하는 용이 목을 베일 때 무너져 내렸고, 용의 정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입구가 막혀 버렸다. 이후 그 뼈를 함부로 만진 자는 지금껏 저주를 받아 모두 죽었다. 신전의 장로들은 용이 남긴 마법이 그 뼈대에도 아직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했었다.

헌데 그 뼈를 다른 이도 아닌 마녀가 탐을 내다니. 분명 진짜 속내는 따로 있을 것이다. 허나 거절하고 물리기에 바쿠고는 이미 토가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지를 묶여 악몽에 짓눌려 헐떡이면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년… 그 소년은 당신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 무력하고 약해지겠지요.」

하, 씨발. 기어이 바쿠고가 꽉 입술을 꽉 악물었다 놓았다. 그래도 썩 내키지는 않아 솔직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네 놈의 주술이 만족스럽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네 놈을 으스러뜨려 그 뼈 곁에 묻어주지.」
「아하하, 그저 그 소년을 범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셔도 될 텐데.」

농담이에요, 뭘 그리 노려보실까? 토가가 활짝 웃었다. 황금색 눈이 들녘의 불길한 짐승처럼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검은 스커트 자락을 들어올리며 바쿠고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용의 산을 정복한 권능의 왕이시여.

「그 기대를 반드시 만족시켜드리지요.」
「……」
「자, 이제 그 이계의 소년을 볼 수 있을까요?」













*


“당신을 부른 것은 아마도 그 땅 밑의…”

장로장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색이 밝은 머리칼이 나타났다. 그 바람에 장로장은 화급히 입을 다물고 우리 곁에서 물러섰다. 허나 바쿠고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작은 체구의 여자를 발견한 장로장이 아연실색을 했다. 미도리야마저 눈길이 갈만큼 여자를 발견한 장로장의 얼굴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상에, 저 자는… 바쿠고님, 어찌하여 이 신성한 성채에 마녀를 들이십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 그리고 네 놈이 섬겼던 그 대단한 우리 아버지가 광증으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도 마녀였지. 나는 그 왕과 마녀의 아들이고.」
「……」
「이대로 참수당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 혀를 놀려보든가.」

드문드문 알게 된 단어들이 들렸지만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공기를 읽었다. 입을 합 다물고서 잠자코 한 발을 물러서는 장로장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대로 우리 쪽을 향해 곧장 걸어온 바쿠고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미도리야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이 땅의 연고가 이놈에게 잘 듣는 모양이야. 이 상태라면 의식을 그대로 진행해도 문제없겠는데.」
「허나 바쿠고님, 이 아이는 이계에서 존재라 이 땅의 주술을 잘못 걸었다가는 행여,」
「입을 닥치라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장로장.」
「……」
「네 놈 혀를 잘 지켜야지. 이놈에게 내 땅의 말로 살려달라는 애원이라도 가르치려면.」

숲색 눈을 뚫어보며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분명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오늘은 제발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미도리야가 마주친 선홍색 눈을 향해 흐, 쓰게 웃었다. 나는 너처럼 시도 때도 없이 해댈만한 체력이 없단 말이야, 이 자식아…
허나 그 순간 미도리야의 시선을 사로잡은 존재는 따로 있었다. 바쿠고의 등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여자 아이가 우리 쪽을 향해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미도리야는 두 가지에 흠칫 놀랐다. 일단 너무 작고 어렸다. 두 번째는 자신을 뚫어보던 그 여자 아이의 두 눈이었다.

우리를 들여다보는 노란 두 눈이 섬뜩하리만큼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나, 바쿠고님…」

토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움도, 공포도, 경멸과 혐오도 아니었다. 광증을 닮은 흥분과 환희가 토가의 두 눈 안에 흠뻑 걸려 있었다.

「이리 불길하고 탐나는 것을… 어디에서 얻으셨을까요, 우리 왕께서는?」

한 번만… 토가가 목소리처럼 덜덜 떨리는 손끝을 우리 안으로 천천히 뻗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도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본능적인 위험을 느낀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전에 바쿠고가 창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토가의 손목을 움켜잡고 사납게 밀쳐냈다.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은 토가가 악 비명을 질렀다. 선홍색 눈이 엄살을 부리는 마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함부로 만지지마. 내 것이다.」
「……」
「한 번만 더 이 녀석에게 손을 대면 그땐 거인의 아이들을 시켜 네 몸을 갈갈이 찢어 놓아주지.」

네 할 일이나 하고 꺼져. 바쿠고의 말에 콧날을 짧게 찡그린 토가가 이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미도리야 뿐이었다.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앳된 얼굴의 마녀가 우리 안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겁을 먹고 우리 안쪽으로 깊게 물러나 흠칫 몸을 말고 있던 미도리야는 흡사 도살 직전의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

「그럼 저 아이를 우리에서 꺼내는 일도 우리 존엄하신 왕께서 도와주셔야겠네요. 손을 대지 말라셨으니까요. 그렇지요, 바쿠고님?」
「……」
「우선, 저 아이를 침대에 좀 묶어주셔야겠어요.」

닫혀있던 우리가 다시 열렸다. 성큼성큼 우리 안으로 들어서는 바쿠고를 보고 미도리야는 소리를 질렀지만 달아날 데 없는 몸은 이번에도 간단히 그 팔 안에 갇혀버렸다. 미도리야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고 그 등을 퍽퍽 두드려도 바쿠고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품에 안겨 그대로 침대 위로 던져졌다. 버둥거리는 그 몸 위로 익숙하게 올라오면서 바쿠고가 무게를 실어 미도리야를 짓눌렀다. 그 무게조차 이제는 익숙했다. 미도리야는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이 가장 무서웠다.

“놔, 대체, 또 뭘 하려고,… 놔, 이거 놔!”
「하여튼 더럽게 시끄러워.」

미도리야의 목줄을 가볍게 짓누르며, 바쿠고가 입매를 픽 밀었다. 묶을 걸 가지고 와. 짧게 떨어진 말에 고개를 떨군 장로장이 커튼을 묶는 붉은 끈 뭉치를 집어다 바쿠고의 손 안에 건넸다. 거인의 아이들이 침대 밑에 놓여있던 번거로운 가구들을 들고 방을 나갔고, 토가는 가구가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서서 단도로 손을 긋고 제 손에 스스로 피를 냈다.
발버둥을 치던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곤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비명을 삼켰다. 단지 저 어린 소녀가 자해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낯선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험하고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입을 좀 막아주시겠어요, 바쿠고님? 혀를 깨물 수도 있거든요.」

토가의 말에 바쿠고는 가장 먼저 붉은 끈으로 미도리야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커튼을 묶기 위한 끈은 굵은 밧줄을 닮았고, 혀를 깨무는 일을 막아주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다음은 두 팔, 마지막은 다리였다.
읍읍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던 미도리야의 사지를 커다란 침상의 양 귀퉁이에 단단히 동여 묶은 후에야 비로소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숲색 눈엔 옅게 눈물이 비쳐 있었지만 그 깊고 또렷한 빛은 여전했다. 자신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도, 아닌 척도 못하는 그 색 깊고 고운 눈이 바쿠고는 이번에도 마음에 들었다.

이 땅의 그 어떤 보석도 이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었다.

탐욕스러운 용이 온 산을 돌며 모았다던 이 성채의 보석들 중 그 어떤 것도 이만큼 찬란히 빛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눈 안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한 번은 돌아보게 만드는, 무심코 시선이 붙들리는, 그리하여 이보다 더 깊고 내밀한 속내를 알고 싶어지는 기이한 힘.
네가 만일 다른 이의 손에 있었다면 나는 그 자를 죽여서라도 너를 취했을 것이다. 손 안에서 비틀리는 손목을 힘껏 꽉 움켜잡으며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매를 밀었다. 신기한 녀석이다. 더불어 궁금했다. 마녀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축복받은 삶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주술과 마법에도 현혹되지 않았는데,

이 힘없고 수수한 이계 녀석의 무엇이 나를 움켜잡는 것인지.

「음험한 안내자, 독의 아버지, 모든 죽음을 다스리시는 어머니시여. 금지된 이름을 허락 받은 당신의 종이 청하오니…」

진을 모두 그린 토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명랑하던 앳된 목소리 대신 탁한 목소리가 허공을 날카롭게 긁었다. 바쿠고의 몸 밑에서 버둥거리던 미도리야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또렷했던 숲색 눈을 스르륵 내려감은 미도리야의 고개가 베개 위로 툭 떨어졌다. 목이 부러진 새처럼.

하얗고 곧은 목과 팔다리에 검붉은 문양들이 나타났다. 이것이 무엇인지 바쿠고는 알고 있었다. 저주의 인장이었다.

저주는 모든 주술 중에 가장 강력하며, 특히나 토가의 저주는 이 땅에서도 악명이 높다. 그 힘을 반증하듯 문양은 유난히 짙고 붉었다. 꼭 살갗이 불길에 타는 것 같았다.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한 바쿠고가 손목을 움켜잡은 손에서 좀 전보다 힘을 풀고 미도리야의 몸에 나타나는 변화를 잠자코 뚫어 보았다. 절로 울대가 밀렸다. 얌전히 누워있던 미도리야가 흡, 숨을 들이켰다. 그 호흡이 조금 전보다 달고 뜨거웠다. 바쿠고가 입매를 밀었다. 무심코 손이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읍, 흐… 흐윽, 후ㅇ,…”

목줄에 옥죄인 곧은 목덜미가 헐떡였다. 판판한 가슴팍이 넘친 호흡을 따라 들썩거렸다. 목줄이 채워진 목덜미를 따라 스르르 미끄러진 바쿠고의 손가락들이 붉게 달아오른 살갗을 쓸어내리며 미도리야의 옷섶 속을 파고들었다.
거인의 아이들이 기껏 여며준 단추들이 하나씩 툭툭 벌어졌다. 단추를 넷쯤 풀었을 때 가슴팍과 쇄골이 완전히 드러났다. 검붉은 문양이 제법 짙게 올라온 살갗은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 피부를 뚫어보며 바쿠고가 혀로 제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ㅎ, 흡, … 흐ㅇ,…!”

주술을 외는 토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 탁한 소리를 따라 미도리야의 호흡도 보다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습하고 뜨겁고 난잡했다. 이 녀석은 지금 무슨 악몽을 꾸고 있을까. 바쿠고가 몸을 붙이며 잔뜩 눈살을 구긴 괴로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땀에 젖은 살결을 매만지는 손길이 둥글지만 꽤 탄력이 있는 근육 위를 습하게 미끄러졌다.

이 땅의 어떤 육신이 이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을까.

짐작보다는 꽤 근육이 있는 몸이다. 둥글고 판판한 흉근胸筋을 따라 덧그리듯 손을 놀리면서 바쿠고는 그 자리를 태울 듯 뚫어 보았다. 검붉게 번진 문양은 녀석의 목줄기와 쇄골을 지나 가슴팍을 어지럽게 휘어 감고 아래편을 향해 뻗어 있었다.
땀에 젖은 가슴팍에 찍힌 유실은 이미 흠뻑 서있었다. 젖은 자리를 매만지다 검지와 중지로 그 자리를 꽉, 쥐었을 때 미도리야의 몸이 발작처럼 크게 뛰었다. 허나 사지가 묶인 탓에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몸 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영영 결박당한 것처럼.

「이제 당신의 차례랍니다, 바쿠고님.」

주문을 멈춘 토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취하세요. 범하세요. 살려달라고 빌어도, 그만하고 싶다고 울어도 멈추지 마세요. 이 소년의 정신까지 남김없이 취하고 품으세요. 하여 이 소년의 악몽이 되세요.」
「저주를 푸는 방법은.」
「아예 걸리지 않는 수밖에는 없지요.」

하. 미도리야 쪽으로 기울어 있던 선홍색 눈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본격적인 발작이 시작되었다. 아예 턱을 젖히고 비명처럼 헐떡이는 얼굴을 뚫어보며 몸을 깊게 붙인 바쿠고가 허리춤을 풀어 헤쳤다. 모든 게 붉고 뜨거웠다. 이 손 안에 잡히는 뼈대, 저주에 사로잡힌 살갗과 달게 헐떡이는 호흡…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색이 밝은 머리칼이 젖은 가슴팍 위로 기울었다. 붉게 곤두선 유실에 이를 세웠을 때 기어이 미도리야의 허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젖은 물소리가, 헐떡이는 호흡이 어지럽게 뒤얽혔다.

이 중 오로지 조용한 이는 장로장 뿐이었다. 차마 이 기행을 똑바로 볼 수도, 그렇다고 그냥 두고 몸을 돌려 갈 수도 없어 장로장은 거인의 아이들을 따라 나서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마녀의 주술은 사특한 것이고, 신을 섬기는 장로에겐 그 주술이 행여 해를 끼치는 것을 막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 기이한 광경을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어 장로장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허나 등 뒤에서 날아온 낮은 목소리가 장로장의 발목을 잡아세웠다.

「네 놈은 여기 남아.」

헐떡이는 미도리야의 턱 밑을 깊게 질근거리면서 바쿠고가 말했다.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면서 헐떡이는지 똑똑히 알려줘야지. 빌어먹을 신력을 받아 이계의 말을 하는 은총을 얻으신 고귀한 존재께서.」

재미있다는 듯 토가가 킬킬 소리를 죽여 웃었다. 잠시 그녀를 사나운 눈으로 뚫어보다, 장로장은 이내 체념했다. 이 땅에서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그가 이 땅을 지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땅은 오로지 왕Raja의 것이고, 이 땅에 난 자들은 모두 왕에게 복종하며 그의 힘에 저항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오랜 산의 순리이며 이 세계를 만든 신의 의지였다.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입을 막고 있던 끈을 풀어냈다.

꿈을 주는 중에도 답답한 것이 사라져 해방감을 느꼈는지 미도리야가 잠시 몸을 들썩이며 마른 기침을 했다. 기침은 이내 살갗을 매만지는 손길을 따라 달뜬 신음으로 바뀌었다. 괴롭게 일그러진 눈가를 타고 눈물이 툭 굴러떨어졌다. 악몽에 사로잡힌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입새에 괴롭게 흘러나왔다.

“싫ㅇ, 흑, 그만… 싫, 괴로워, 아ㅍ… 읏,”
「뭐라는지 말해.」
「…괴로워 하고 계십니다.」
“싫어, 싫ㅇ, 하아…, 당신 진짜 싫… 흑,”
「그리고. 지금은.」
“죽ㅇ, 죽었으면 좋겠ㅇ, 아읏, !”
「….」

장로장이 입을 다물며 눈길을 피했다. 바쿠고가 픽 입매를 밀었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겠지. 그리고는 그대로 거칠게 몸을 타고 내려간 손이 두 무릎 사이를 힘껏 움켜잡았던,

그때였다.

「우욱, 욱..., !」

조금 전까지 히죽히죽 웃고 있던 토가가 입을 틀어막고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장로장 뿐만이 아니었다. 손을 멈춘 바쿠고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토가는 자신이 그린 주술의 진 위에서 붉은 것을 토해냈다. 피였다. 직전에 주술을 행한 마녀가 피를 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역시 바쿠고는 알고 있었다.
저주가 되돌아왔다. 피를 쓴 주술이 풀려버린 거다.

아니.
선홍색눈이 잠잠해진 숲색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분명…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손대지마.」

숲색 눈이 우뚝 굳은 바쿠고를 올려다보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 땅에선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어. 어떤 저주도, 마법도.」

언어도, 억양도 모두 이계가 아닌 이 산의 말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홍색 눈이 크게 지진했다. 이 녀석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동시에  미도리야의 사지를 묶고 있던 모든 결박과 목에 걸린 목줄이 툭 풀렸다. 토가가 토해내는 피처럼 붉고 붉었던 저주의 문양은 이미 모두 사라져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시푸르게 반짝이던 눈이 스르르 웃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요요한 웃음이 그 둥근 눈매에 걸려 있었다.

「아직도 이 더러운 피가 살아남아 있었구나.」

더러운 피라니. 굳어있던 바쿠고의 눈이 일순 예리하게 좁아졌다. 슥 몸을 당긴 미도리야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이것’은 이 녀석이 아니다. 바쿠고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죽길 바랐는데. 이 성채에는 이제 다스리는 자도, 주인도 없어 공허한 바람만이 주인이 되었어야 했는데 감히…」
「……」
「하지만 너도 곧 죽게 되겠지. 네 아비처럼, 마녀의 아들아.」

저주는 사라지는 것이 아냐.

예리하게 좁아졌던 선홍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머니는 분명히 그렇게 예언했었다. 저주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마녀의 가호가 내려져 있어도 저주는 미뤄질 뿐 영영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저주를 풀 열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의 진정한 왕Raja이 돌아온다면,
이 저주를 건 용Raja의 영혼이 다시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

눈을 크게 홉뜬 미도리야의 몸이 앞으로 푹 쓰러졌다. 가슴팍으로 기울어오는 몸을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뻗어 힘껏 끌어안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가슴팍에 편안히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바쿠고가 뒤를 돌아보았다. 토가는 의식을 잃었고, 장로장은 그 자리에 송장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본 광경을 누구보다 믿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 신을 섬기는 고리타분한 자일 것이다. 바쿠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마녀의 강령인가. 바쿠고가 제 가슴에 기대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는 미도리야를 골똘히 내려 보았다. 아니, 다른 자의 영혼이 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산의 말을 썼으나 목소리는 분명 이 녀석의 것이었다.
방금 전에 본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떤 종류의 마법이고 주술인지도 바쿠고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무엇을 하면 되는 지에 대해서.

「마녀를 성채의 치료사에게 데려가. 그리고 이 방은 모두 정리해라.」

굳어있던 장로장이 호흡을 가다듬고 바쿠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곧 병사들이 나타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토가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장로장이 방을 정리해줄 거인의 아이들을 부르러 간 동안 바쿠고는 그대로 가슴팍에 기댄 숲색 머리를 끌어안고 침상 위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선홍색 눈길이 품에 안긴 녀석에게 자꾸만 기울었다. 맞닿은 녀석의 숨결이 따뜻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고동이 쿵쿵 뛰고 있었다. 바쿠고가 입 끝을 비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는 정말로 이 녀석을 어쩌고 싶은 것인지.

이 녀석은 불길하다.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이 환술이건, 강령이건 무엇이건 간에 이 산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뭘까. 이 안에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바쿠고가 잠이 든 녀석의 눈가를 조용히 뚫어보았다. 그래도 그 속눈썹은 길고 섬세했다. 무심코 툭 건드려보고 싶어질만큼.

「…내 표범조차 이 자리에 눕혀준 적이 없었는데.」

내일은 우리를 치울 것이다. 이 녀석을 어찌할 것인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품에 안긴 숲색 머리는 이 성의 그 어떤 짐승보다도 보드랍고 따뜻했다. 슥 손을 뻗은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숲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기울어진 입술이 정수리에 닿았다 떨어져도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뺨을 타고 내려간 손이 축 뻗은 팔을 지나 손목에 닿았다. 손 끝에 닿은 손목을 툭툭, 장난을 치듯 두드리며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오래도록 뚫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이 겹쳤다, 떨어졌다.
 
「하, 꼴에 사내라고 작은 손은 아니잖아.」

그것조차 퍽 마음에 들었었다.



(계속)







이번 편도 역시나 일주일이 지나서야 스르륵 들고 오네요 ㅎㅎㅎㅎㅎ 지난 주부터 이번 주까지 왜 이렇게 헬인지 흑흑 ㅠㅠㅠㅠㅠㅠ 그래도 빡세게 일 쳐놓고 부랴부랴 써서 또 들고 오는 것입니동.... 해를 보았다 쓸 때랑 똑같네요ㅠ_ㅠ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 편은 쓰자는 마음으로 힘내고 있습니덩...
무튼 바쿠고는 아직 지 맘이 뭔지 모르고, 미도리야는 이 세계의 바쿠고를 너무 미워하고 있지만ㅠㅠ이제 슬슬 둘 사이에 뭔가가 시작될 것 같고 다음 편부터는 이제 진도를 좀 빼야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미도리야 비밀도 아마 조만간 밝혀질 것 같고 그렇습니당... 아마 눈치채실 분들은 다 채셨겠지만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쨌건! 오늘도 참 날이 무더웠어요. 이 더운 날씨에 또 이렇게 시간내서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또 시간 내서 피드백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해요ㅠ_ㅠ_ㅠ_ㅠ_ㅠ_ㅠ 다음 편도 이챠이챠 힘내서 들고 오겠습니드아아압

+ 이번 편은 특히나 감사한 선물을 받아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허락을 받고 감사히 업어옵니동....


출처 : https://twitter.com/xiro_k/status/1020364017603207168
지로님께서 그려주신 라자 캇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흑흑흑 저는 죽어서도 지로님 계시는 곳으로 머리를 놓고 죽을 것....... 덕분에 헬게 같은 이번 주도 힘내서 6편을 쓸 수 있었다며ㅠ.ㅠ.ㅠ.ㅠ.ㅠ.ㅠ.ㅠ 보약 같은 연성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더욱 힘낼 것 ㅠ0ㅠ99999

?
  • ㅎㄹ 2018.07.28 00:47 SECRET

    "비밀글입니다."

  • 만화광 2018.07.28 00:50
    으아아아아!!! 루카님 최곱니다ㅠㅠ
    이즈쿠가 범해지는 꿈 내용도 너무 보고싶네요^^ 이즈쿠 꿈 내용 포스타입 버전으로 도 보고싶어요!!!ㅠㅠ
  • 갓갓루카님 ㅠㅠ 2018.07.28 02:38 SECRET

    "비밀글입니다."

  • bbb 2018.07.28 07:53
    우와 이번편도 감사해요!!! 너무너무 잘보고있어요!!!
  • 으앙 ( ˃ ⌑ ˂ഃ ) 2018.07.28 10:35 SECRET

    "비밀글입니다."

  • rio 2018.07.28 10:45
    앗앗... 숨도 못쉬고 읽었어요 ㅠㅠ 미도리야는 용이군요... 이야기를 어떻게 끝 맺으실지 넘 궁금해요 지금으로서는 애증이 두드러진 관계라 비밀이 밝혀지고 ㅠㅠ 바쿠고도 좀 솔직해지고 둘다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루카님 더운데 모쪼록 건강 조심하시구 힘내셔요!
  • 나는현재기분이좋다 2018.07.29 13:15 SECRET

    "비밀글입니다."

  • 행복행복 2018.08.03 15:09
    루카님 사랑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 메롱 2019.05.10 13:55
    진짜 너무너무 좋아요ㅠ 바쿠고가 이즈쿠 손바닥을 잡은 의미가 ㅠㅠ 하 정말 행복하네요 ㅠ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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