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이계의 왕 바쿠고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 미도리야로 차원이동물 캇뎈
* 판타지AU 캇데쿠

* 약수위 주의


BGM / Fringe Element <Road Less Traveled>

https://youtu.be/hj5IsFtx8tY






Rājā

~ The King ~


<4>








세상이 어두웠다. 악몽에 먹혀버린 꿈처럼.

비슷한 기분을 미도리야는 예전에도 느껴봤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 한여름에 소꿉친구와 공을 차며 놀다가 더위를 심하게 먹었을 때. 그날은 폭염경보가 내릴만큼 무덥고 뜨거웠지만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게 신나고 좋아서 미도리야는 공을 주우러 이리저리 뛰면서도 더위를 잊고 있었다. 날아온 공에 헤딩을 하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아픈 줄도 몰랐었다. 그때도 멍청한 데쿠라고 놀리면서도 엄마를 불러와준 건 캇쨩이었다.

미열에 들뜬 몸이 훌쩍 열린 방문을 넘었다.

본격적으로 눈보라를 흩뿌리기 시작한 하늘은 두 개의 달빛마저 거멓게 삼켜버렸다. 찬바람이 매섭게 창을 흔들었다. 족쇄를 벗어난 하얀 발이 차갑게 식은 돌계단을 느릿느릿 밟아 내려갔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추위도,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돌아다니는 자도, 걷는 자도, 미도리야를 향해 고함을 치는 자도 없었다. 경비병들은 복도에서 검과 창을 끌어안고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다.

‘이것이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란다.’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땅에서는 그 무엇도 너를 해칠 수 없어. 네가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단다. 믿기 어려울 거야. 네가 갑자기 이 세계로 돌아오게 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네가 믿건 믿지 않건 진실은 변하지 않아.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그래, 이계의 사랑스러운 아가야. 나는 거짓을 모르는 존재니까.’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가 편안했다.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와 같은 익숙함이 있었다. 그래, 마치 이 세계의 왕이 내게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목소리의 말처럼 미도리야의 발길을 잡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닫혀있던 문들은 미도리야가 다가서면 잠금을 풀고 스스로 활짝 열렸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중에도 미도리야는 그게 어쩐지 신이 났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 거지?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목소리가 대답했다. 너와 나, 우리의 근원. 이 땅의 비극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 인간의 탐욕이 우리를 더럽힌 그곳…

‘내가 있는 곳이란다.’

그 남자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꿈인데도 미도리야는 잠시 그런 걱정이 들었다. 장로장의 말로 짐작컨대 그 남자는 결코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족쇄를 채워 그런 방에 가두었던 것도, 자신의 방에 찾아와 그런 행위들을 강요하는 행위도 결코 선의는 아닐 것이다.
미움 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캇쨩도 자기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었다. 지는 것만큼이나.
물론 거기에 있는 너는 이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를 취하지 않았지만… 아니, 허락 받지 않은 키스였으니 비슷비슷한가. 모르겠다. 사실 미열 때문에 그보다 더 깊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하, 그 남자.’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순간 사나워졌다. 생각하지마. 여자가 다시 달래듯이 속삭였다.

‘너처럼 고결한 존재와는 다르단다, 아가. 그는 포악하고 잔인하지. 그에게도 그의 조상들처럼 추하고 천박한 욕망이 그 피 속에서 흐르고 있어. 그런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거야. 고작해야 500년의 시간으로는… 절대 변하지 않지.’

자,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계속 걷자꾸나. 목소리가 속삭였다. 오랜만에 가벼워진 하얀 맨발이 마지막으로 두껍고 거대한 성채의 뒷문을 넘었다.

조금 전보다 거세진 눈보라가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을 때렸다. 횃불도 모두 꺼져 버린 모양인지 달빛마저 사라진 바깥은 컴컴하고 어두웠다. 지키는 이 하나 없는 좁다란 돌길 위를 미도리야는 그저 목소리를 따라 멍하니 걸었다. 어디선가 벽을 타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폭포가 있는 걸까? 미도리야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아가.’

길이 바뀌었다. 차가운 돌 대신 잔디의 보드라운 감촉이 미도리야의 하얀발을 감싸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위를 정성껏 세공한 벤치와 잘 정돈된 수목들을 보아하니 여기는 정원인 것 같았다. 넓다.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이런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석벽들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었고, 한 면은 그대로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딛었다간 구름과 안개 때문에 끝도 보이지 않는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질만큼 벼랑은 높고 가팔랐다. 그래도 높은 석벽을 타고 떨어져 그 옆으로 흘러가는 세 줄기의 폭포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얗게 흩날리던 포말이 미도리야의 뺨을 적셨다. 따뜻했다. 여기도 성 안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온천수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빼앗기기 전에는 이곳이 나의 집이었지.’

아련해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자, 이제 머지않았단다. 아가, 조금만 더 힘을 내자꾸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속살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미도리야의 발이 저절로 폭포 안쪽으로 움직였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때도 미도리야를 떠밀고 있었다.

‘가운데 폭포가 보이니? 저 따뜻한 물줄기 안쪽에 동굴이 있단다. 그 동굴로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빙글빙글 꼬여있는 계단을 따라 걸어내려오렴.’

미도리야는 이제 폭포가 만든 둥근 연못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하얀 맨발이 연못가를 따라 하얗게 피어있던 이름 모를 꽃을 스르륵 짓밟았다. 자, 천천히. 내게 오렴, 아가. 여자가 속삭였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곳, 네가 다시 돌아갈 품으로…

그럼 당신은 나를 돌려보내줄 수 있나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나를 오해하고 있을 그 소년에게 나는 돌아갈 수 있나요? 당신을 따라가면 나는… 다시 캇쨩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순간 목소리가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부터 뻗어 나온 팔이 거칠게 미도리야의 허리를 낚아 안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왕께서 화가 나셨다는 말을 심부름꾼에게 전해 들었을 때부터 장로장은 뭔가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눈보라를 뚫고 빛 한 점 없는 비탈길을 심부름꾼의 등만 본 채 달려내려와 허겁지겁 성채의 가장 깊은 방으로 뛰어 들었을 때는 무릎을 꺾는 법조차 그만 잊어 버렸었다. 뎅겅 잘려나간 경비병의 목이 장로장의 발 앞으로 굴러왔다. 그렇게 참수된 이만 벌써 셋이었다.

「도망쳤다.」

등을 돌리고 서있던 바쿠고가 입을 열었다. 피에 젖은 그 겨울곰의 하얀 털외투와 손에 움켜쥔 검자루만큼 서늘한 목소리에 장로장의 등골이 절로 얼어붙었다.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은 종일 기도에 바빠 그 분의 방에 들르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바쿠고님께서도 오늘은 그 아이를 들이시라 딱히 기별이 없으셨으니 저는 단 한 번도…」
「그래, 네 놈이 감히 내 포로를 도망치게 풀어주진 않았겠지. 내 아비의 개가.」

장로장을 돌아본 선홍색 눈이 벽난로의 빛에 선득하게 번뜩였다.

「헌데 이상하지. 그 발로 이 눈보라를 뚫고 산을 내려가지는 못했을 테니 분명 이 성채 어딘가에 쥐새끼처럼 숨어있을 텐데 씨발, 봤다는 새끼가 없거든.」

서쪽의 성채를 샅샅이 뒤졌다던 경비병은 다시 바쿠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성채의 홀과 뒷문 쪽을 둘러보러 떠났었던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바쿠고의 검에 차례로 목이 베였다.
뭔가가 이 성채를 더럽힌 것이다.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좁아졌다. 그렇다면 셋 중 하나였다. 산 아래 법사들의 마법이거나, 빌어먹을 마녀들의 주술이거나, 신을 섬기는 자들의 신력이거나. 선홍색 눈이 장로장의 얼굴을 사납게 뚫어보았다.

「오늘 눈폭풍 때문에 달이 보이지 않아 신력을 부릴 수 없는 날이 아니었다면 네 놈은 진작 죽었을 것이다.」
「……」
「허나 네 놈이라면 이 성채에서 무슨 빌어먹을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그 녀석은 분명 이 성채 안에 있다.

처음 호숫가에서 주워왔을 때에도 이곳의 지리와 날씨를 몰라 얼어 죽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녀석이다. 맑은 날에도 험한 길을 녀석이 아무도 없이 이 눈보라를 뚫고 내려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처음 녀석이 사라졌음을 보고하러 왔던 경비병이 녀석의 발목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가져 왔었다. 거인의 아이들도 힘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족쇄다. 누군가 마법이나 신력, 주술 같은 힘을 쓰지 않고서야.

신의 예언에서는 분명 녀석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냥 샌님 새끼인 줄 알았는데.」

방심했다. 예언이 틀렸다고만 생각했었다. 바쿠고가 입 끝을 비틀었다. 허면 나는 너를 살려둘 이유가 없지. 아직은 기회가 있다. 녀석의 안에 그 어떤 빌어먹을 힘이 숨어 있든 간에.
자, 그럼 눈이 고운 이계의 소년아. 너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서쪽 성채와 본채, 그리고 뒷문 쪽을 다녀온 녀석들만 투미한 눈빛을 하고 기억을 잃어버린 채 돌아왔다. 서쪽 성채는 녀석의 방이다. 본채를 지나 뒷문을 열고 나가면…

「용의 정원이로군.」

허나 이상했다. 그곳은 이 성채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다. 달아날 길이라곤 맑은 날이면 오랜 산의 봉우리와 풍요의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벼랑 쪽 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탈출을 하겠다고 그런 곳에 뛰어들 녀석은 없을 것이다. 생각하던 바쿠고의 붉은 눈 사이가 울컥 일그러졌다. 가장 불쾌한 가정이 떠올라 그랬었다.

설마 죽겠다고 간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자 속에서 불길이 치밀었다.

「네 놈은 여기에서 시신이나 치워.」

검을 고쳐잡은 바쿠고가 장로장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로 널브러진 시신을 넘었다. 누구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내 눈으로 직접 볼 터였다. 네가 무슨 맹랑한 짓을 저질렀는지, 어떤 사특한 술수로 인간의 왕이 정복한 이 성스러운 성채를 더럽혔는지. 아니, 그런 것은 사실 지금 이 불쾌한 분노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너를 결코 편히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살기 위해 달아난 것이라면 어떻게든 너를 찾아내면 된다. 너의 행방을 알 때까지 신전의 장로들을 하나씩 참수한다면 그 중 한 녀석 정도는 신의 힘을 빌어 네가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입을 열겠지.
하여 너를 찾아내 맹수의 우리 안에 너를 가둘 것이다. 내 눈 가장 가까운 곳에 갇히고도 달아나겠다는 허튼 꿈을 꾼다면 그때는 네 발꿈치의 근육을 도려내야지. 처음에는 왼쪽, 그 다음에는 오른쪽… 그리고 겁에 질려 떠는 네 몸에 올라타 너를 몇 번이고 범하고 취할 것이다. 헌데 감히 죽겠다는 꿈을 꾸었다… 내가 다스리는 이 산에서. 살겠다고 달아난 것보다 바쿠고는 그 점을 가장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를 열어.」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방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 맹수의 우리를 열었다. 눈보라 탓인지, 아니면 허공에 떠돌던 피냄새를 맡은 탓인지 병사에게 목줄을 잡혀 우리 밖으로 걸어 나오던 눈표범은 유독 다른 때보다 사나웠다. 하마터면 배를 물어뜯길 뻔한 병사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목줄을 놓쳤다. 곧장 주인에게 달려온 눈표범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바쿠고가 낮게 말했다. 자, 사냥할 시간이다. 그리고 눈표범의 코앞에 뭔가를 들이밀었다. 호수 근처에서 처음 보았을 때 녀석의 목에 걸려있었던 기묘한 생김새의 붉은 천조각이었다.

「이 냄새를 쫓아.」

크게 포효한 눈표범이 냄새를 따라 곧장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눈폭풍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난로 위에 뒤집어 놓았던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툭 떨어지던 그때,

미도리야는 막 용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

색이 밝은 머리칼, 어둠 속에서도 핏빛처럼 붉고 뜨겁던 선홍의 눈동자.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 팔의 주인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그 이름이 미도리야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캇쨩?”

아니, 아냐. 이 남자는 캇쨩이 아냐. 미도리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상하게 조금 전까지도 함께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던 미열도 없었다.
그제야 추위가 닥쳐왔다. 하얗게 드러난 발이 얼어붙을 것 같아서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확 어깨를 움츠렸다. 허나 남자는 결코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남자의 등 뒤에서 눈표범이 이쪽을 바라보며 사납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 화가 많이 나신 것은 알겠는데 제가 지금 많이 추워서요…”

추위 탓에 잘 움직이지 않는 입매를 밀면서 미도리야가 어떻게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다. 남자의 남은 한 손에 검이 들려 있던 것을 미도리야는 똑똑히 보았다. 이 탁한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던 검의 표면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남자는 분명히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 제가 달아나려고 한 건 아니구요…! 그냥 잠들었다 일어나보니까 이런 곳에 와 있어서…! 그러니까, 어,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저도 설마 제게 몽유병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

아니, 아냐. 몽유병 같은 게 아니었어, 그 꿈은.

우물우물 거리던 목소리가 저절로 줄어들었다. 태어나서 그런 꿈은 처음 꿨다. 그 꿈에서 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어. 그 목소리는 분명 이 남자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는데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내내 발목을 결박하고 있던 족쇄가 풀렸고, 모든 문들이 눈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꿈같았었다. 동시에 꿈이 아닌 것도 같았다. 마치 예전에 내가 이 낯선 성채를 이렇게 드나들면서 이 정원에서 자주 휴식을 취하며 잠들었던 것 같은…

어. 정말로 이상했다. 이것조차 낯설지 않았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지금 나를 바라보는 이 남자의 눈빛처럼.

“저기, 어… 그렇게 보지만 말고 뭐라도 말씀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하하…”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피가 몰릴만큼 입술을 악물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화를 내면 되잖아. 답답함에, 어색함에 미도리야가 어색해진 눈길을 돌리던 그때였다.
슬며시 눈길이 다른 곳을 향해 돌아가던 것과 동시에 억세게 턱을 잡혔다. 순간 신음이 컥, 터질만큼 억센 악력이 미도리야의 턱을 움켜잡았다. 숨이 막혔다. 등골이 오싹 했다. 이 남자에게 억지로 범해질 때도 이만큼의 공포를 느끼지는 못했었다.

「어쩐지 말을 빨리 배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캇쨩이란 이름…」

서늘해진 목소리가 낮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미도리야는 이번에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절로 울대가 밀렸다. 이 남자는 진짜 나를 죽일지도 몰라.

「내가 아니었군.」
“……”
「눈을 피하면서 부르는 이름이 나일 리가 없지.」

선홍색 눈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턱을 움켜쥔 손이 살갗을 억세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내 허락도 없이 죽겠다고 결심한 것만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데, 씨발, 하. 다른 녀석의 이름일 거라고는.」
“저, 윽, 숨이… 숨이 막, 컥…!”

턱 밑을 미끄러진 손이 미도리야의 목을 조르듯 움켜잡았다. 죽을 거야.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살아야 해. 머리보다도 살겠다는 본능적인 방어가 남자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허나 몸을 돌리고 제대로 달아나기도 전에 남자에게 뒷목을 억세게 잡히며 바닥에 턱을 찍었다. 얇게 눈이 깔린 잔디는 푹신했지만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 탓에 흠칫 움츠러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엎드려진 미도리야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대로 다리 틈을 파고든 손이 바지의 솔기를 우악스럽게 부욱, 뜯어냈다. 셔츠와 베스트는 벗기지도 않았다. 로브를 입고 침대 위에서 꿰뚫리던 지난 두 번의 밤보다 미도리야는 지금이 몇 배는 더 서럽고 치욕스러웠다.

「죽고 싶어서 씨발, 귀여운 짓을 하고 있는데.」
“하지… 하지마, 싫어, 싫어…!”
「어디 하나 부러져야 입을 다물겠어.」

남자가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던 양손목을 오른손으로 힘껏 움켜잡고는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찍어 눌렀다. 벌어진 바지의 솔기 틈을 비집고 타는 듯한 이물감이 그대로 속을 꿰뚫었다. 온몸의 뼈를 통째로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에 미도리야는 눈을 홉뜨곤 비명조차 똑바로 지르지 못했다. 눈보라가 눈앞을 어지럽게 흐려 놓았다. 하지만 속을 가르며 거침없이 비벼대는 자리가 너무 아프고 뜨거워서 미도리야는 금세 춥다는 감각조차 잊어 버렸다. 일그러진 숲색눈에서 눈물이 툭 굴러 떨어졌다.

캇쨩, 이 세계는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

네게 돌아가지 못할 거라면 나를 범하는 이 남자의 얼굴이라도 달랐어야 했어. 이런 순간에도 이 남자는 너와 너무 똑같다. 평생을 알았고, 평생을 동경했고, 평생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너를 알아, 캇쨩. 아무리 나를 한심하고 멍청한 데쿠라며 놀려도, 내게 심한 말로 타박을 줄 때가 더 많았어도 너는 항상 나에게는 마음이 약했었다. 오히려 상처를 준 건 난데, 겁에 질려 도망을 쳐버린 것도 난데.

“…하지ㅁ, 그, 아으,…! 싫어, 싫, …!”

남자가 퍽퍽 허리를 다붙일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악에 받쳐서 미도리야는 이번만큼은 참지도, 삼키지도 않고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거잖아. 미도리야가 젖은 볼 안쪽을 힘껏 씹었다. 이 남자는 캇쨩이 아냐. 당신이 캇쨩일 리가 없어. 속을 쉼 없이 갈라오는 격통에 미도리야가 남자의 몸 밑에 깔려있던 발끝으로 젖은 잔디를 몇 번이고 밀어댔다. 서럽게 젖은 숲색 눈이 남자를, 왕을 노려보았다.

“당신 진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왕이, 바쿠고가 입 끝을 차갑게 비틀었다.

「날 죽이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진짜, 헉… 당신 같은, 사람… 싫, 아ㅎ, !”
「그래, 씨발. 맘껏 해보라고. 빌어먹을 신의 예언이, 그 정도는 맞아줘야지.」
“싫어, 싫ㅇ… 헉, 죽일, 죽일 ㄱ… 아아,…!”

다붙는 허리의 속도가 높아졌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어지럽게 쏟아내면서 미도리야가 젖은 눈을 힘껏 감았다. 퍽퍽 속도를 높이면서 미도리야의 위로 남자가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귀밑으로 다가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 키스만큼은 이상하게도 부드러웠다.

「그러니까 살아, 멍청아.」

귓가에 바싹 붙은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그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는 감히 내 허락 없이 죽겠다는 결심조차 못할 테니까.」

어차피 뭐라는지 몰라, 개자식아. 미도리야가 젖은 숲색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다, 이내 맹렬히 찍어오는 허리에 입술을 씹으며 흠뻑 젖은 잔디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람이 잦아들었는지 사방에는 조금 전보다 송이가 굵어진 눈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도 보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보고 싶은 것도, 안기고 싶은 것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캇쨩.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입술을 꽉 씹은 미도리야가 크게 턱을 젖혔다.











*

마지막으로 피에 젖은 곰의 가죽을 둘둘 말아 시종들에게 건네던 장로장은 문 앞에 나타난 바쿠고를 보고 소리 없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바쿠고의 품에 안겨 축 늘어진 소년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인의 아이들이 직접 입혀주었을 바지의 재봉이 뜯기고 찢긴 것만 보아도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왕은 감히 달아났다 잡혀온 이계의 소년을 죽이지 않았다.

「목줄을 가져와. 눈표범은 한동안 동쪽의 축사로 보내라.」

의식을 잃은 소년을 소파 위에 내려놓으면서 바쿠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를 비워.

그 우리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 누구의 목에 목줄을 걸 것인지 묻는 대신 장로장은 잠자코 알겠노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은 소년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많이 지쳤던 모양인지 소년은 몸을 웅크리고는 소파에 누워 미동조차 없이 잠들어 있었다. 바쿠고가 그 앞에서 발끝으로 장작 하나를 툭,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아, 그리고.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이 바쿠고가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던 장로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날이 밝으면 이 녀석이 방에서 용의 정원까지 가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알아내.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는지.」

분명 주술의 흔적은 성채 어디에도 없었다.

냄새를 맡은 눈표범은 바쿠고가 예상한 대로 정확하게 용의 정원 쪽을 향해 뛰었다. 정원까지 가는동안 복도에는 경비들이 단 한 녀석도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산 아래 인간들의 왕국처럼 전쟁이 빈번한 것이 아닌지라 성채의 경비는 그리 삼엄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복도를 훤히 비워놓지는 않는다.
순전히 암흑숲의 마녀를 데리러 떠난 경비대장 녀석이 자리를 비운 탓인가. 그 탓에 기강이 빠진 녀석들이 자리를 이탈했나. 아닐 것이다. 바쿠고는 그렇게 짐작했다. 정원 한복판에서 눈보라를 맞으면서 맨발로 서있던 숲색 머리를 보았을 때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녀석은 뭔가에 홀려 있었다.

어차피 그런 것쯤은 캐물으면 알게 되겠지.

바쿠고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녀석은 산의 말에 서툴고, 자신은 이계의 말을 모른다. 이계의 말을 알고 있는 장로장이라면 녀석도 신뢰하고 있을 테니 그를 통해 캐물을 작정이었다. 더불어 물어볼 것들이 이제는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곧 죽일 생각으로 묻지 않았었다. 녀석이 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감히 나와 착각했던 그 캇쨩이란 이름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나이는 몇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이름… 소년을 내려다보던 선홍색 눈 사이가 옅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의 이름조차 몰랐었다.

「이름.」
「…예?」
「이 녀석, 이름이 뭐냐고.」

문을 나서던 장로장의 몸이 다시 안쪽을 향해 돌았다. 장로장이 문 안쪽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이름입니다, 바쿠고님.」
「……」
「그럼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용의 산을 정복한 왕에게 신의 권능이 임하시길.」

인사를 올린 장로장이 문을 닫았다. 평온한 침묵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미도리야, 미도리야 이즈쿠라… 맴돌던 말을 혀 안쪽에서 거듭 굴려보면서 바쿠고가 누워있던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추위는 가신 모양인지 품 안에서 연신 덜덜 떨고 있던 소년은 난로 쪽으로 몸을 웅크리곤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주근깨가 흩어진 하얀 뺨과 눈가는 아직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즈쿠… 바쿠고가 픽 입끝을 비틀었다.

「멍청한 이름이군.」

그래도 오늘만큼은 저 발목에 다시 족쇄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미도리야 생일을 맞이해서 4편을 이렇게 또 들고 옵니다u////u 사실 생축글을 쓸까 어쩔까 하다가 제 다음 주 일정이 너모나도 헬인지라.......ㅠㅠ 지금 안 쓰면 또 한동안 못쓸 테고 + 겨우 다시 이었는데 또 타이밍 놓쳐서 연중해버릴까봐ㅠ.ㅠ 일단 완결을 내자는 마음에 이 글을 끼적끼적 합니둥... 생축이라고 하기엔 미도리야를 너무 괴롭혀 버렸지만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 그치만 사랑해 이즈쿠.... 진심이야ㅠㅠㅠㅠㅠㅠ 무튼!

1년만에 다시 잇는 글이라 여러모로 자신이 바닥을 쳤었는데 남겨주신 피드백 때문에 너무 힘을 얻었습니다ㅠ.ㅠ.ㅠ.ㅠ.ㅠ.ㅠ 글을 써도 괜찮나? 올려도 되나? 거의 이런 상태였는데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어요......ㅠ.ㅠ 기다려주신 분들, 그리고 1년이나 지났는데도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 고마워서 정말 더 힘내서 꼭 완결내고 말 것이라며99999 히힛 이번에도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ㅜ///ㅜ 다음 편도 얼른 바쁜 것들 쳐낸 후에 들고 오겠다며999

?
  • 루카님사랑해요 2018.07.15 00:38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갓갓루카님 ㅠㅠ 2018.07.16 03:41 SECRET

    "비밀글입니다."

  • 너무 좋아요 2018.07.16 17:47
    ost도 좋구 내용도 굿굿!! 갓루카님ㅜㅜ
  • ㅅㅅ 2018.07.19 03:24 SECRET

    "비밀글입니다."

  • 고먐미 2018.07.23 03:41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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