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1년만에 이 시리즈를 이어봅니다 (mm
* 이계의 왕 바쿠고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 미도리야로 차원이동물 캇뎈
* 판타지AU 캇데쿠

* 초반 수위 주의해주세요


BGM / Fringe Element <Road Less Traveled>

https://youtu.be/hj5IsFtx8tY






Rājā

~ The King ~




<3>







햇님처럼 반짝이던 머리칼, 노을을 꼭 닮았던 그 붉은 눈.  그만큼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손을 좋아했었다.

‘데쿠새끼, 앞에 똑바로 안 보지?’

미도리야는 늘 걸음이 느렸다. 세상에는 신기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반짝이는 여름 햇살, 유난히 키가 높던 공원의 푸른 나무들, 공원 입구에 서있던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트럭… 그런 것들에 한눈을 팔다 수시로 넘어지는 통에 미도리야의 동그란 무릎에는 항상 상처가 앉아 있었다. 그래도 앞서 걷던 바쿠고가 불쑥 손을 내밀어주면 눈물이 쏙 들어갈만큼 좋았었다.

‘하여튼 맨날천날 넘어지고 그러니까 니가 데쿠인 거라고.’
‘?… 데쿠가 뭐야?’
‘것도 모르냐? 이즈쿠는 데쿠라고도 읽는다고. 너처럼 둔한 녀석들을 데쿠라고 부르거든.’

나이가 좀 더 들고 난 후에야 놀리는 말인 것을 알았다. 그래도 데쿠라고 부르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익숙해서, 소꿉친구여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알고 있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근사한 소년이었다. 못하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었다.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믿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것은 용이 살고 있다는, 다른 세계의 모험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구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만 있는 게 아니라고. 데쿠 새끼는 그런 것도 모르지?’
‘거기엔 뭐가 있어? 공룡이 살아?’
‘아니, 멍청아. 거기엔 용이 있어.’

그때 둘은 멸종해버린 공룡만큼이나 모험과 마법에 열광하던 다섯 살 꼬마들이었다. 바쿠고가 좋아하던 책 속에는  이 지구보다도 더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 검을 든 영웅들은 악마들과 전투를 벌이거나 인질로 잡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악하고 욕심이 많은 용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나도 언젠가 용을 잡는 모험가가 될 거야.’

바쿠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꼭 검을 든 용사라도 된 것처럼 플라스틱 야구 방망이를 붕붕 흔들던 바쿠고가 미도리야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용감하다고 생각했었다.
데쿠새끼도 같이 데려는 가줄 테니까.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그리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태어나 열일곱 해를 살아오는 동안 미도리야는 단 한 번도 그 손을 좋아하지 않은 적도, 두근거리지 않았던 적도 없었었다.

‘꽉 잡아.’

마주 잡은 손을 단단히 움켜잡으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다.

‘절대 놓지 말라고, 멍청아.’

맞아, 나는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도리야의 다리 사이를 파고든 익숙한 ‘손’이 가장 은밀한 살집을 힘껏 움켜잡았다. 악력에 저절로 턱이 들렸다. 두 번째 밤이었다.

“잠, 그렇, 그렇게 만지면… 읏,!”

오늘 밤에는 삼키던 순간 정신을 잃었었던 정체불명의 물약은 먹지 않았다. 차라리 그 약이라도 있었더라면… 미도리야가 타액으로 번들번들 젖어있던 입술을 꽉 씹었다. 이미 한 번을 도달했던 두 무릎 사이는 제 것이 아닌 액체가 어지럽게 뒤엉켜 온통 끈적끈적 젖어 있었다. 창 너머로 떠오른 두 개의 달이 오목한 산봉우리까지 서서히 솟아오르던 동안 미도리야는 이 손의 주인에게 벌써 두 번을 꿰뚫리며 도달했었다.
하. 귓가로 기울어온 입술이 달아오른 호흡을 잇새로 밀어냈다. 그 숨결에도 미도리야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약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받아내는 모든 접촉들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생생하고 맹렬했다. 허나 미도리야는 자신을 거침없이 꿰뚫던 그의 존재감보다 그 기척에 하나하나 예민하게 곤두서는 자신의 몸이 몇 배는 더 두렵고 무서웠다.

「약을 안 써도 씨발, 이제 즐길만큼은 풀려 있는데.」
“그만… 앗, 자꾸 이렇게… 만져대면… 하, 더는… 하읏,…!”
「여전히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하, 모르겠고.」

이 나라의 언어는 되고 센 소리가 유난히 많다. 탁음처럼 낮게 갈라지는 발음이 귀밑에 속삭일 때마다 흠칫흠칫 어깨가 떨렸다. 어쩌면 이 언어를 발음하는 남자의 목소리 탓인지도 모른다. 캇쨩이랑 똑같은 목소리… 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와 전혀 다른 억양. 그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에는 삼키지도 않은 미약에 취한 것처럼 의지를 몽롱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아니, 이 남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감미롭지 않았어도 나는 진심으로 반항하진 않았을 거야. 허리를 움켜 안고 자세를 뒤집는 손길을 따라 순순히 바닥으로 엎드리면서도 미도리야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당신이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장로장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이계인이 전부 너처럼 부드럽고 뜨거운 속살을 가진 건지. 아니면 하, 네 놈 몸만 유달리 탐욕스러운 것인지.」

오늘도 이 남자는 해가 기울기가 무섭게 방으로 찾아왔다. 목욕 시중을 들던 거인의 아이들이 자리를 피할 틈도 없이 침대 위로 곧장 올라온 남자는 미도리야의 로브 자락을 풀어 헤치고, 다 마르지 않은 곱슬 머리칼에 코를 묻고서는 당혹감에 버둥거리는 양 다리를 밀어 열었다.
직전에 목욕을 하면서 거인의 아이들이 준 정체모를 연고가 아니었다면 전날의 상처가 다 가라앉지 않은 밀부가 진작 남자의 것에 쓸리고 찢어져 피를 보았을 것이다. 허나 연고는 꽤 효과가 좋았다. 심지어 다 스며들지 못한 연고가 윤활 역할을 했던 모양인지 스스로도 당혹스러울만큼 남자의 것은 아주 손쉽게 벌어진 다리 틈을 가르며 미도리야의 틈을 꿰뚫었다. 허리가 다붙으며 속을 갈라올 때마다 남자의 어깨에 얹어진 미도리야의 발목에서 족쇄와 사슬이 연신 잘그락잘그락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침상이 타액들로 흠뻑 젖을만큼 꿰뚫리고 도달하면서도 미도리야는 남자의 얼굴만큼은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약을 삼키지 못해 정신이 또렷한 지금은 더욱이 그랬다. 눈빛도, 얼굴도, 머리의 색도, 차라리 뼈를 부러뜨릴 듯 주물러 오는 손의 생김도, 심지어 다른 세계의 언어를 쓰는 그 목소리와 이름마저도 모두 너와 똑같았다.

바쿠고 카츠키. 그것이 용을 제압해 이 산의 주인이 되었다던 이 가문에서도 가장 강하고 야만적인 젊은 왕의 이름이었다.

남자가, 바쿠고가 엎드려진 미도리야의 뒷목을 꽉 움켜잡고 속도를 붙였다. 침상에 반쯤 파묻혀 옆을 향해 돌아가 있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헐떡거렸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 앞쪽, 그만… 잠ㄲ, 그렇게 찌르면, …아으, 응,!”
「감히 제발 멈춰달라는, 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발, 헉, 그, 아ㅅ… 더는, …그만, 그, 으읏,!”
「신기하다고. 어찌 이리 접을 못하나 싶을 만큼 서툴기 짝이 없는데, 씨발, 관두기가 싫고.」
“아, 그, 빨, 너무, 빨ㄹ, 제발 천, 천천ㅎ… 아, 하ㅇ,!”
「곤란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던 주제에 이렇게, 안쪽을 비벼대면 더 삼키고 싶다고 온몸으로 안달을 내고,」
“그, 아, 갈 것, 그만, 그ㅁ… 아아ㅅ,!”
「물고서 씨발, 놔주질 않거든. 네 놈의 그 욕심 많은 몸이.」

피가 몰릴만큼 입술을 꽉 깨문 미도리야가 허겁지겁 팔을 뻗어 남자의, 바쿠고의 팔목을 간절하게 움켜잡았다. 선홍색 눈이 만족감에 엷은 웃음을 그렸다, 이내 흐려 버렸다.
마침내 집요하게 같은 자리를 짓뭉개던 이물감이 몸 안을 빠져 나갔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 미도리야는 그대로 쓰러지듯 침상에 파묻힌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꾹 감았다 다시 뜬 눈을 타고 고여있던 눈물 한 줄기가 떨어져 뺨을 적셨다. 뼈에 사무칠만큼 그리운 이름이 툭 입술을 비집었다. 이 남자와 같은, 하지만 이 세계가 아닌 나의 세계에 있을 너의 이름.

“캇쨩…”

허리를 물리고 스스로 풀어헤친 바지의 앞섶을 여미던 선홍색 눈동자가 미도리야에게 가 닿았다. 눈살을 일그러뜨리는 바람에 미도리야는 그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참았던 울음이 섧게 터져 나왔다. 왕에게는 낯선 이계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번에도 낯설지 않았다.

“카츠키…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너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이 세계의 시간이 만약 너와 내가 살고 있던 세계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면 네 눈앞에서 내가 사라져 버린 지는 오늘로 한 달쯤 되었을 거야. 트럭이 달려들 때 바로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던 네 목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네 얼굴 한 번 돌아보지 못하고 이런 곳에 왔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계로 떨어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네 말에 대답이라도 나는 했어야 했어.

“좋아해…”

젖은 입술을 비집은 말이 서러웠다. 이 말을 끝끝내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도리야는 가장 아팠다. 진짜 좋아해, 네가 내게 입을 맞추기 전부터. 네가 내게 용이 사는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붉은 눈을 반짝거리던, 그 어린 날부터. 사랑하지 않은 때가 단 한 번도 없었을만큼 너를.
쓴웃음을 삼키는 미도리야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남자가 무슨 변덕이 돋은 건지 미도리야의 시선 앞에 나란히 누웠다. 그 채로 남자는 턱을 괴고 한참 미도리야의 젖을 얼굴을 뚫어 보았다. 그때도 미도리야는 어쩐지 남자의, 바쿠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역시 네 놈 안의 모든 길을 내 모양대로 만들어야 성이 풀리겠어.」
“……”
「죽이는 건 그 후로 미뤄도 괜찮겠지.」

이 말이 나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면 좋겠어. 그래도 너를 닮은 이 얼굴에 죽고 싶진 않으니까… 슥 뻗어온 손가락이 미도리야의 젖은 뺨을 가만히 매만지작거렸다. 평생을 보고 자란 낯익은 얼굴이 픽 입매를 비틀었다. 웃을 때의 얼굴조차 남자는 바쿠고와 같은 사람이라 해도 좋을만큼 닮아 있었다.

「내 이름 다시 불러봐, 멍청아.」
“…? 응? 아니, 어… 뭐라고 하시는 지 잘 모르겠는데, 하하…”
「또 뭔 소린지 모르겠고.」
“…”
「뭐,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 너는 그 목이 갈라지고 잠기도록 밤새 내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탁한 이계의 억양이 미도리야의 귓가에서 낮게 속삭였다. 대꾸할 틈도 없이 뻗어온 손이 곳곳에 붉고 푸르게 멍든 미도리야의 살갗 위를 거칠게 매만지며 무릎을 움켜잡았다.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이 남자는. 벌어진 다리 틈을 문질러 오는 단단한 살집에 미도리야는 잠시 기겁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 이상 하면 제 몸이… 그런 말을 우물거리던 입술이 다가온 입술에 깊게 삼켜질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의 촉감까지 너와 같을 필요는 정말 없을 텐데.

그래서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어. 생각을 삼키면서 구내를 어지럽게 헤집던 혀에 어설피 제 혀를 마주 얽었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막힌 입새로 픽 웃음을 삼킨 남자가 본격적으로 미도리야의 허리 위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좀 전보다도 다리가 수월하게 벌어졌다. 미도리야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살아야해. 이 세계의 풍습을 배우고 말을 익혀야 한다. 나를 다시 되돌려 보내 달라는, 그 말 한 마디를 부탁할 수 있을만큼 이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해.
두 개의 달이 천천히 겹치며 긴 그림자를 그려놓았다. 깊고 깊은 밤이었다. 흐릿해진 눈길을 일그러뜨리며 미도리야가 허공을 향해 턱을 젖혔다.

“아, 그래도 조금 천천ㅎ… 아아,…!”

그때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

봉우리를 뚫고 솟아오른 태양이 석벽의 성채에 찬란한 광채를 흩뿌렸다. 아침이었다.

아침 기도를 끝내고 신전을 빠져 나오던 장로장은 성채에서 찾아온 심부름꾼에게 조속히 성채로 오르라는 전갈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이 조급했다. 이번 대의 젊은 왕은 선대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현명한만큼 성격이 급하고 인내가 없었다.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목이 베인 자들이라면 장로장도 숱하게 보았다.
게다가 이계에서 온 소년을 살려야 한다고 나선 통에 왕은 자신에게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베이지 않았던 것은 왕 자신의 말마따나 선왕이 아끼던 충신이었던 덕이다. 당장 그 혈기에 무슨 변덕을 부려 자신의 목을 칠지 몰랐다.

걱정을 다 감추지 못한 장로장이 어두운 얼굴로 ‘용의 정원’에 들어섰다.

한때 이곳에는 용이 살았었다. 인간과 더불어 신의 아들로 태어난 용은 본래 이 산을 다스리던 주인이었고, 용은 높다란 벼랑과 온천수 폭포에 감싸인 천의 요새 같은 이 아늑한 자리를 자신의 둥지로 삼았다. 용은 이곳에 세상 곳곳에서 모아온 금은보화와 세상의 비밀이 적힌 석판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인간의 영웅이 이곳에 잠들어 있던 용의 목을 베었다. 그는 용이 살던 성채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다. 금은보화와 석판은 용의 뼈와 함께 성채 깊은 지하에 묻혔고, 다시는 누구도 오랜 산에서 용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폭포를 바라보고 서있던 왕이 고개를 조아리던 장로장을 흘깃 돌아보았다. 허나 그 얼굴빛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그 이계 녀석에게 내 이름 넉 자는 제대로 가르친 것 같던데.」

제 몸을 부비며 아양을 부리던 눈표범의 정수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바쿠고가 입매를 픽 비틀었다. 그 말에 내도록 굳어있던 장로장이 낯빛을 풀었다. 예, 바쿠고님. 거듭 조아리는 장로장의 눈앞으로 금화 한 자루가 툭 날아왔다.

「내 이름을 제대로 가르친 데에 대한 상이다.」

선홍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 산을 다스리는 오만하고도 잔인한 젊은 왕은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에만 드물게 이런 얼굴을 했다.

「내 이름 넉자에서 끝나면 곤란하지. 그 새끼가 퍽 수다스럽거든. 혼자 뭘 열심히 떠들어 대고는 있는데 알아듣질 못하니 씨발,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열심히 익히고 계십니다. 본래 성실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심성이신지 책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게다가 저쪽 세계에서 그 분이 쓰시던 말이 더욱 어려우니 이쪽 말은 금방 익히실 겁니다.」
「어, 제대로 가르쳐.」

그래, 너는 들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너는 알아야지. 네게 속삭이는 이 말들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마다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네 얼굴도 참으로 볼만할 것이다. 수치를 느낄 때마다 네 하얀 살갗은 붉게 물들고, 네 그 깊은 두 눈은 당혹감에 파르르 떨겠지. 그 어떤 요정의 날개를 움켜잡아도 그처럼 나를 매료시키진 못할 터다.

나의 말로 내 이름을 더듬으며 애원하는 너는 어떨까, 이계의 소년아.

아마 볼만하겠지. 바쿠고가 소리 없이 입매를 밀었다. 이 흥미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취할만큼 취하다 질려버리면 나는 오랜 산의 제단에 올라 너를 겁탈하고 너의 숨통을 졸라 신의 예언을 거스를 것이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위협이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더 두고 볼 가치는 있겠지.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다. 그 녀석이 내 목줄기를 조를만한 힘을 숨기고 있거나, 빌어먹을 신의 예언이 틀렸거나.

「설마 네 놈들이 내게 거짓된 예언을 고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선홍색 눈이 차갑게 웃었다. 고개를 조아린 장로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뭐, 좋아. 말이나 똑바로 가르쳐두라고. 당분간 즐길 여흥 정도는 되겠지.」

미약이 없던 교접은 꽤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었다. 몸이 회복될만큼 여유를 주면 그만큼 더 즐거움이 늘겠지. 그때는 네 놈에게 무엇을 할까. 그 좁고 붉은 입술에 달나무의 술을 흘려 넣고 밤 내내 취한 네 틈이 닫히지 않을만큼 너를 범할까, 암흑숲의 마녀를 불러 너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영원히 내게 범해지는 환상을 보게 할까. 아니면 목줄을 채워 나를 품어 달라 내 나라의 말로 애원하고 울 때까지 내 맹수의 우리에 너를 가둘까.

「야, 바쿠고. 들었냐? 오랜 산에 산사태가 나서 사냥터가 다 파묻혔다는데! …아,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정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키리시마의 활기찬 목소리 탓에 회동은 그쯤에서 끝났다. 가봐. 바쿠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말했고, 인사를 올린 장로장이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 나갔다. 꼬리를 흔드는 눈표범에게 손등을 내밀어주면서 키리시마가 의아한듯 눈 사이를 좁혔다.

「좋은 일 있냐?」
「전혀.」

웃고 있는데? 키리시마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가볍게 입매를 비튼 바쿠고가 눈을 들어 폭포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아득한 벼랑을 타고 휘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는 마치 오래 전에 이 산에서 사라진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홍색 눈이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말했다.
야, 멍청한 머리통.

「암흑숲의 마녀가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나 걸려.」
「글쎄, 산사태까지 났으니 아마도 한 나흘…」
「불러.」

너는 나를 두려워해야한다. 감히 네 세계로 돌아갈 꿈도 꾸지 못하도록.

새파랗던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곧 눈 폭풍이 몰려올 모양이었다.










*


산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 아래로 우르르 천둥이 쳤다. 책을 보고 있던 미도리야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창밖을 쳐다보았다. 해가 저물었는지 밖은 이미 어두웠다. 하지만 붉은 달도, 푸른 달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숲색 눈이 흐, 쓰게 웃었다.

“날이 엄청 흐린 모양이네…”

오늘은 장로장을 보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기절하듯 쓰러져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잠들어 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거인의 아이들이 옷단장을 도와주었지만, 장로장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바쁘신가? 하기야, 이런 세계에서 신을 섬기는 일을 하는 분들은 항상 바쁜 것 같던데… 어릴 적에 바쿠고와 함께 열심히 읽었던 판타지 동화책 속에서도 얼핏 읽은 기억이 났다. 그렇다고 딱히 불편한 건 아니었다. 거인의 아이들이 들고 온 식사는 오늘도 고기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맛있었고, 발목에 채워진 족쇄도 적응이 좀 된 건지 첫날처럼 마냥 무겁고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대화 상대가 없다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미도리야는 장로장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늘은 그 남자도 미도리야를 찾아오지 않았다. 너와 똑같은, 너와 같은 이름의 왕.

“안 그래도 오늘 입은 옷은 맘에 들었는데, 하하…”

치렁치렁 몸만 겨우 가리던 얇은 로브 대신 오늘 거인의 아이들이 내밀어준 것은 셔츠와 베스트, 바지로 구성된 평범한 옷이었다. 특히 맘에 든 초록색 베스트를 미도리야는 자꾸 내려다보았다. 아마 그 남자가 왔다면 이 옷도 진작에 찢기거나 벗겨졌겠지…
게다가 오늘은 책도 실컷 읽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두꺼운 그림책도 이제 절반은 읽었다. 미도리야가 무릎에 펼쳐져 있던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겼다. 페이지 왼편에는 앞보다는 좀 더 복잡해진 삽화가 한 장 그려져 있었다. 산, 검을 든 인간, 그리고 용이었다. 산은 첫 장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은 것을 보니 아마도 지금 이 성채가 있는 산을 그린 듯 했다.

“여기에도 용이 살았었구나.”

그래, 장로가 있고 달이 두 개 뜨는 세계니까… 흐 웃음을 삼킨 숲색눈이 오른쪽 페이지로 옮겨갔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왼쪽보다 작은 그림 여섯 장이 조각조각 이어져 있었다. 만화 같았다. 그림 아래에 짤막짤막 적힌 문장에는 그래도 이제 익숙해진 단어들이 더듬더듬 적혀 있었고, 그 덕에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가장 눈길을 잡아 끈 건 세 번째 그림이었다. 용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드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미도리야가 그림을 뚫어질듯 바라보았다. 색이 밝은 머리칼, 붉은 눈을 가진 인간. 그리고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포효하고 있는 녹빛의 용. 그림 밑에는 제목인 듯 짤막한 단어 하나가 이 세계의 글자로 적혀 있었다. 이미 앞선 페이지에서 그 단어를 봤었다. 거인의 아이들은 이 단어를 이렇게 읽었었다.

“…Raja.”

분명 ‘왕’이라는 뜻이었다.

나머지 그림에 붙어있는 문장들도 더듬더듬 읽을 수는 있었다. 신, 두 아이, 인간, 용, 산, 탄생, 싸움, 도전, 죽음, 영혼… 그림의 내용도 얼추 이해는 갔다. 신이 용과 인간을 만들었다, 용이 산을 지배했다, 인간이 용에게 도전했다, 인간이 용을 죽였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맨 마지막 그림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에게 목이 베어지는 용의 모습 다음에 이어지는 그림 속에는 두 개의 달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다. 앞장과 달리 제법 길게 붙어 있는 문장 속에서 미도리야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Atma. 그러니까 이 단어의 뜻이…

“영혼.”

이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에게 두 개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장로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창 너머에서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그 목소리가 들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이번에도 똑똑히 들었다.

「아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멀지 않았다. 낯선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귓가에 다정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모두 이 세계의 말이었지만 미도리야는 어쩐지 그 말의 뜻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었다.
편하고 포근했다. 천천히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꿈처럼.

「나는 오래도록 너를 불렀단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그 자 때문이야. 여자가 속삭였다. 하지만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그 자의 무지 때문이지. 여자가 깔깔 웃었다.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었어, 이즈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누군가 뒤에서 팔을 슬며시 잡아오는 것 같은 감촉을 느꼈었다. 그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꿈같은, 몽롱한,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어딘가로 스르륵 떠미는 그런 마력 같은 힘.

「자, 이 답답한 곳을 빠져 나가는 거야. 내가 있는 곳까지, 나를 만날 수 있는 곳까지.」

일어나렴. 책을 덮은 미도리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걷는 거야, 저 문까지. 색이 흐려진 숲색 눈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발목에 걸린 족쇄처럼 단단한 자물쇠가 그 문에도 분명히 걸려 있었다.
걱정하지마. 여자가 속삭였다. 너는 열 수 있어, 뭐든지.

「이 땅에서 너를 가둘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단다.」

닫혀있던 자물쇠가 철컥, 열렸다. 처음부터 잠글 수도, 가둘 수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서 얌전히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눈표범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울기 시작했을 때부터 바쿠고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채의 서쪽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었을 때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이계의 소년이 사라졌습니다.」

바쿠고가 무릎 위에 얹어놓았던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 산의 폭풍보다 더욱 차가워진 선홍색 눈빛이 낮게 말했다. 찾아. 그리고 난로에 놓여있던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이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찾아내지 못한다면 너희를 한 명씩 베어 죽일 것이다.」

진작 너의 발목을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바쿠고가 난로 위에 걸려있던 검을 뽑았다. 창밖으로 굵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달아난 짐승처럼, 오래 전에 이 산과 함께 묻혀버린 용의 울음처럼.




(계속)







1년하고도 3개월 만에 뒤를 이어봅니다............ 이렇게 오래 버려둘 생각은 아니었는데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 책 내고 원고하고 다른 시리즈에 꽂히면서 결국 1년을 다 넘긴 지금에야 겨우 이어보네요 허허허..... 요즘 가뜩이나 글을 잘 쓰질 못해서 자신감이 너무 없는데 일단 이걸 이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무튼! 일단은 다시 이었으니 완결을 내자는 게 저의 최종목표....
이걸 쓰겠다고 혼자서 회사에 남은 저는 이제 퇴근을 합니다.,.. 읽어주신 분들, 그리고 기다려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ㅠ_ㅠ///

?
  • 사랑해여 2018.07.11 22:22
    다시 써주셔서 감사해요!!ㅠㅠㅠ
  • 루카님사랑합니다 2018.07.11 22:32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감사합니다ㅠ 2018.07.11 22:36 SECRET

    "비밀글입니다."

  • (말잇못 2018.07.12 00:53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감사해요ㅠㅠㅠ 2018.07.12 00:55
    아ㅏ아ㅠㅠㅠㅠ다시 이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ㅠㅠㅠㅠㅠ 라자 너무 좋아오 짱..
  • ㅌㅎ 2018.07.12 04:53
    뒷 이야기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부름을 받고 떠난 이즈쿠는 어디로 갔을까요...!! ㅠ//////ㅠ 카츠키의 분노로 시체가 즐비해지기전에 어서 돌아오길 바랍니다..!!^///^;;;
  • gnps 2018.07.12 10:46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 광팬 나미 2018.07.12 18:16 SECRET

    "비밀글입니다."

  • 갓갓루카님 ㅠㅠ 2018.07.13 04:25 SECRET

    "비밀글입니다."

  • 고먐미 2018.07.23 03:3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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