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첩보원 바쿠고와 미도리야 이야기
* 역시 별로 밝지는 않습니다.
* 중간에 약수위 주의
* 오늘은 꽤 깁니다U///U

* BGM / Gotan Project <Diferente>

http://youtu.be/1vbNm5gnGAc





※ 글 속에 등장하는 지명, 시대 등 배경은 전부 허구입니다.




IMITATOR
@ruka_tea







中3








스물세 번째 첫눈을 보았던 그날, 미도리야는 북쪽에 있었다. 11월 21일이었다.

북쪽은 미도리야가 버려지고 자랐던 남쪽과 달리 겨울이 빨랐다. 잎을 절반 이상 떨궈버린 나뭇가지에는 이르게 찾아온 겨울이 앙상하게 매달려 있었다. 폭격으로 부서져 버린 도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 색이 없는 죽음의 도시에서도 M은 혼자가 아니었다.


“준비해.”


바쿠고가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하얗게 눈발이 날리던 거리 저편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을 그르쳐선 안 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지난 2개월을 지옥 속에 보냈었다. 입술을 꼭 깨문 미도리야가 절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껐다.
남자는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가장 먼저 바쿠고와 악수를 나눴다. 꽤 오랜 거리를 걸어왔는지 남자의 갈색 코트에는 눈이 하얗게 앉아 있었다. 지붕 밑으로 들어온 남자가 무심한 눈으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겨울용 수트에 검은 롱코트를 걸쳐 입은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모습도 남자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이쪽 분이 카츠야마 반, 그리고 이쪽 분이 야미쿠모 마사토… 당신들이 기술원의 그 유명한 B와 M이군요. 아, 소식은 들었습니다.”


남자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동성간 연애가 발각되면 사형이라니… 어떻게 사랑이 죄가 될 수 있습니까? 연합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결심 잘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기술은 분명 연합국을 도와 냉전을 끝내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겁니다. 자, 저를 따라 오시죠.”


남자는 성미가 급했다. 그리고 말이 많았다. 모자를 깊이 쓰십시오, 혹시라도 발각되면 큰일이잖습니까. 묻지도 않은 말을 두런두런 늘어놓으며 남자는 눈 속으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선홍색 눈이 미도리야를 돌아보았고, 미도리야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짓을 교환한 후에야 둘은 남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도리야가 헐거워져 있던 노란색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며 얼굴을 파묻었다.
들켜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더불어 실패해서도 안 된다. 오버홀이 내린 마지막 지령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제국대학에서 소식이 왔어. 그쪽의 유능한 인재 되시는 카츠야마군과 야미쿠모군이 이 나라의 가장 큰 금기를 어겼다고, 그래서 기술원에 둘 수가 없게 되었다고.’


언젠가 자신들을 태우고 북쪽 마을로 향했던 택시가 기술원 뒷문에 나타났을 때부터 미도리야는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만든 건 본인들이었다. 술을 마셨고, 연구실 문을 열지 않았고, 실수인 척 실험기구를 깨며 시선을 불러 모았고, 취한 척을 했다. 말하자면 일부러 발각당했다.
큰 소리에 당황한 동기 연구원이 연구실에 찾아왔을 때 미도리야는 반쯤 벗겨진 상태로 바쿠고의 지퍼를 열고 블로잡을 하고 있었다.

우당탕 주저앉은 동기를 향해 바쿠고는 가볍게 입 끝 비틀었다. 문 닫아, 멍청아. 그리고 제 것을 물고 있던 미도리야의 뒷머리를 젖히며, 그 젖은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며 덧붙였었다. 내 애인한테 좆대가리 세우지 말고, 씨발 새끼야.

제국에서 동성간 추문은 신의 교리를 어긴 중죄다. 소문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기술원 전역에 퍼져 나갔다. 원장이 둘을 불렀고, 밤이 되자 기숙사 명패에서 카츠야마와 야미쿠모의 이름이 사라졌다.
이 상황을 오버홀이 간과할 리 없었다. 딱 B와 M이 바라던 그대로였다.


‘아주 잘 했어. 우리는 덕분에 모두 잃었고. 아직 명단에 남아있는 녀석들을 암살할 기회, 기껏 기술원에 잘 녹아준 우수한 잠입 요원… 뭐, 기술원이 대수겠어. 사형을 당하게 생겼는데.’


어두운 숲속을 1시간동안 달린 택시는 오도카니 서있는 별장 앞에 둘을 내려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치사키는 드물게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고, 반쯤 취해 있었다. 이후 일이 바라던대로 풀려나간 것도 어쩌면 그 덕일 것이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치사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다음 행동은 일부러 애정행각을 들켰던 바쿠고도, 이 모든 계획을 세웠던 미도리야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캇쨩!’


성큼성큼 걸어온 치사키의 손이 바쿠고의 뺨을 매섭게 후려 갈겼다. 대리석 바닥을 그대로 우당탕 구른 바쿠고가 책장에 등을 찍고 쓰러졌다. 매서워진 숲색눈이 순간 위치를 잊고 제 상관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마, 미도리야.’


치사키가 주저앉은 색 밝은 머리를 구둣발로 꾹 눌렀다. 아니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이 흘긋 미도리야를 향했다.


‘니가 직접 처리할래? 그거면 안 말릴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실수는 캇쨩이 아니라 제가,’
‘니 실수 아닌 거 알아. 물론 이 녀석 실수가 아닌 것도 알고. 뭐… 사랑이 그렇잖아. 인정받고 싶고, 못 참겠고, 감추기 싫고.’
‘……’
‘그래도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바쿠고.’


바쿠고는 방어할 의지가 애초에 없었다. 퍽퍽 내려박히던 구둣발을 수동적으로 받아내던 새에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졌다. 회유하고 설득하던 미도리야의 목소리는 곧 애원이 되었다. 또 한 번 긴 다리를 들어 올리던 치사키가 제 몸을 끌어안고 있던 숲색 머리를 무심히 돌아보았다. 치사키를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비명처럼 떨고 있었다.


‘…보더 라인 넘겠습니다.’


치사키가 멈칫 했다. 그만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미도리야가 굳게 다문 입술을 다시 뗐다. 이미 합의했던 대사였지만 자꾸만 목이 멨다.


‘국경을… 넘겠습니다. 저랑 캇쨩.’


제국 정보국에서는 오로지 라인을 잃고 승진에서 밀려나간 요원들만이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연합국으로 넘어가 발각당하면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처리한다. 정보전달, 여론조작, 나아가 주요인사 암살과 테러까지.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흐음. 헛숨을 들이마신 치사키가 바쿠고의 어깨를 짓이기던 오른발을 다시 왼발 옆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바쿠고가 컥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흰 대리석에 붉은 피가 툭 떨어졌다. 불길한 눈송이처럼.


‘그 말은 즉, 연합국 상대 대외 공작 임무를 자원하겠다는 뜻인데.’


교묘해진 치사키의 눈길이 미도리야의 얼굴을 향했다.


‘연합국에 잠입했다 지금까지 살아 돌아온 녀석은 없어, 미도리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넘어갈 핑계도 없고.’
‘가짜 망명을 신청할 겁니다.’
‘……’
‘카츠야마 반과 야미쿠모 마사토의 신분을 그대로 이용해서요.’


애정을 나누는 모습을 일부러 동기에게 들키기 전까지 보름동안 수도 없이 수정하고 보완했던 시나리오다. 헉헉, 호흡을 고르던 바쿠고의 눈길이 잠시 미도리야를 뚫어보았다. 그 눈은 일부러 바라보지 않았다.
절대 의심을 사면 안 된다. 지금 속여야 하는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버홀이었다. 제국 최고의 이미테이터인 B와 M을 발탁하고 손수 키워낸 자. 미도리야가 내색 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츠야마와 야미쿠모는 제국 최고의 과학자였지만 현재 애정행각을 발각당해 사형까지 선고 받을 상황입니다. 하지만 연합국에선 동성간 연애는 물론 결혼까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망명을 위한 핑계로는 충분합니다.’
‘그래. 그 점에 대해선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잠입한 후엔.’
‘그쪽의 국가 연구원과 접촉할 겁니다. 연합국에서도 이런 기술자를 외면하진 않겠죠. 카츠야마와 야미쿠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가장 뛰어난 무기들을 개발해온 과학자들이니까요.’
‘그리고.’
‘보안 기술 자료를 빼돌리는 겁니다.’
‘……’
‘올포원… 그러니까 수상께서 전부터 연합국의 기억 조작 기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시가라키 국장님도 언젠가는 이 기술 정보를 훔치기 위해 잠입할 요원들을 설계할 생각이라고 하셨었구요.’
‘……’
‘저희가 하겠습니다. 작업.’


수상, 즉, 올포원이 연합국의 기억 조작 기술을 탐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제국정부 일에 깊게 관여한 인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정보국의 국장인 시가라키는 진작부터 그의 오른팔이었다. 연합국 기술원에서 기술을 빼돌릴 방법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손목도 잘라 바칠 사람이었다.
오버홀은 바로 그 시가라키의 수족이다. 그래도 도박이었다. 단 한 발의 탄창만 비어있는 러시안 룰렛을 돌렸던 거다. 치사키가 취해 있지 않았다면, 재고해볼 여지조차 없이 미도리야는 결국 바쿠고의 목덜미에 칼날을 박아 넣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곧바로 바쿠고의 총을 제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좋아. 그렇다면.’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기다리던 답이 떨어졌다.


‘마지막 기회야.’


치사키가 미도리야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그 커다란 손에 고여 있던 열기가 취기인지, 아니면 분노인지는 미도리야도 알 수 없었다. 이쪽을 주시하던 바쿠고가 잔뜩 터진 입술을 꽉 악물던 것을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모르는 척 보지 않았다.


‘그럼 나도 너희를 도와줘야지.’


치사키의 눈길이 예리하게 둘을 뚫어보았다.


‘가짜 망명을 위한 연락책은 내 쪽에서 붙여줄게.’


그가 바로 눈앞에서 걷고 있는 이 남자였다.


“여기서 1km 정도 거리에 숲이 있어요. 국경이 그 숲을 가로질러 지나가죠. 연합국 요원들은 보통 이 루트로 제국에 잠입합니다. 그 숲 깊은 곳에 현지인들도 모르는 샛길이 있거든요. 벼랑을 따라 뻗어있는 길이라서 순찰을 도는 군인들도 몰라요. 망루에서 망원경으로 쳐다봐도 보이지 않죠.”


남자는 제국에 잠입한 연합국 요원들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책이었다. 낌새를 챈 제국의 군인들이 그를 검거했고, 3주간 심문을 했으나 별달리 수상한 점이 없어 풀려났다고 했다.
하지만 군부와 달리 정보국은 남자를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은밀히 사람을 붙였고, 끈질기게 감시한 관찰한 결과 그가 연합국의 연락책임을 알게 됐다. 남자를 죽이는 대신 치사키는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했다. B와 M이 단순히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연락책을 통해 망명한다면, 연합국에서도 의심을 사지 않을 터였다.
비어있던 집으로 들어간 남자가 검은 망토 3벌을 꺼내왔다. 그 중 두 벌을 둘에게 건네주며 남자가 턱짓을 했다. 눈발은 아까보다 굵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조용히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국경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숲은 깊고 어두웠다. 혹시라도 근처 초소의 군인들이 수상하게 여길까 싶어 빛은 켤 수 없었다.
그래도 잠행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달빛 하나 없이 잔뜩 흐린 하늘은 굵은 눈발을 흩뿌리며 절벽을 따라 걷는 세 그림자를 은밀히 감춰주었다. 좁고 축축한 벼랑을 지나 또 어둡고 가파른 숲길을 한참동안 걸었다.
서너 시간을 걷고 또 걸은 후에야 간신히 평지가 나타났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낡은 저택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지만 바쿠고와 미도리야가 남자와 접촉했던 그 마을처럼 이곳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남자가 오랜 행군으로 지치고 어두워진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얼굴을 향해 활짝 웃었다.


“환영합니다, 여기가 바로 연합국입니다.”


끝이구나.

미도리야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렵지는 않았다. 순찰을 도는 군인들과는 실수로도 마주치지 않았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국경을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너무 시시하게 걸어왔다. 모든 게 다, 너무 쉬웠다. 생각을 하자 순간 뒷목이 선득해졌다.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었다.

미도리야가 순간 바쿠고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선홍색 눈 사이가 예리하게 좁았다. 바쿠고가 어떤 때에 그런 얼굴을 하는지 미도리야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때도 둘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집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둘을 향해 돌아선 남자가 코트에서 총을 꺼냈다. 잠금이 풀린 8구경 리볼버의 탄창이 쇳소리를 내며 탈칵 돌아갔다.


“오버홀이 당신들을 살려두지 말라고 해서요.”


아. 미도리야가 입술을 꽉 씹었다. 두달 전에 치사키가 왜 규율에 따라 자신들을 곧장 죽이지 않았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


「헛된 희망을 준 거지.」

아이자와가 쓰디쓴 입 끝을 밀었다.

「절망하라고.」
「그래, 씨발. 그 새끼는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젖혀져 있던 라이터를 탁, 소리 나게 닫으며 바쿠고가 눈살을 사납게 좁혔다. 그 얼굴을 흘깃 바라보던 아이자와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정보국 안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경력 25년 베테랑 요원의 눈이었다.

「그래. 너희가 따라갔던 그 남자는 우리 쪽에선 진작 변절자였어. 내 동기 셋이 그 남자와 함께 작전을 하다 제국 녀석들에게 머리가 날아갔었지.」
「……」
「그런데 말이다, 바쿠고. 나는 그 대목이 이상하거든. 네 놈과 미도리야 녀석은 어떻게 의심 한 번 없이 그 남자를 따라갔을까. 그냥 요원도 아니고 정보국 최고의 엘리트들만 모아놓은 이미테이터팀에서도 가장 우수한 실적을 달성했다던 B와 M이.」
「……」
「방심을 한 건지, 진짜 사랑의 도피를 한다고 멍청이들처럼 들떴던 건지. 하긴, 스물세 살이면 도피 중에도 서로의 몸뚱이가 신경 쓰이는 나이이긴 하다만.」
「지랄을 하네, 씨발.」

입 끝을 일그러뜨린 바쿠고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이자와가 혀를 쯧 걷어찼다. 꼴에 지적질은 싫어가지고. 하지만 이 부분은 분명히 멍청했다. 명석한 머리와 뛰어난 감을 있는대로 발휘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너희가 정보학교에 입학한 게 열세 살이랬나. 그때부터 총을 만졌겠지. 제국은 특히나 실전을 중요하게 여기니 날아가는 새나 정 붙였던 강아지 한두 마리 정도는 쏴봤을 테고. 그러면서 정을 주지 않고 의심하는 법을 가르쳤을 거야. 그런데 그 정도로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는 제국에서 가장 엘리트로 손꼽히던 요원들이 자신들을 데려다주는 연락책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배신하기로 결심한 자기 상관이 붙여준 연락책을?」
「……」
「미미쨩도 처음 보는 사람이 따준 캔은 먹지 않아, 바쿠고. 그러니까 내 고양이.」
「……」
「아. 지금 혹시 내가 미미쨩이라고 했나. 잊어.」


하. 바쿠고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딴 걸 2년동안 상관이라고. 정작 그런 말을 듣는 아이자와의 표정엔 어떤 파문도 없었다.


「뭐, 그래. 네 놈 얘기는 잘 들었고.」


물론 이미 알고 있던 얘기이긴 하지만. 덧붙인 아이자와가 탁자를 열고 새 담배를 꺼냈다. 비닐 포장을 가볍게 잡아 뜯으며 아이자와가 다시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내 얘기를 해보도록 할까.」


그러니까 그날은 2년 전, 첫눈이 내리던 11월 21일이었다.








*

그날, 야시 토시노리와 아이자와는 국경에서 새로운 잠입 요원을 배웅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어 적국에서 여론을 공작하고 정보를 빼돌릴 대외 잠입 요원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제국도, 연합국도 마찬가지였다. 야기는 잠입요원들을 보낼 때마다 늘 직접 배웅을 했다. 국장이라는 중직에 오른 후에도 이 점은 변하지 않았다.


“눈이 오는군. 잠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야.”


젊을 때는 야기의 파트너였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야기의 직속팀 팀장이 된 아이자와가 수행을 위해 동행했다. 야기는 잠입 지점까지 차로 이동하던 동안 젊은 요원의 옆에 앉아 내내 손을 잡아주었다.
이윽고 잠입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운전을 하던 아이자와도 차에서 내렸다. 부담과 긴장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던 요원을 끌어안아 다독여주었고, 그가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는 유품을 받아 소중히 코트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가 눈보라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야기 토시노리. 모두 그를 올마이트라고 불렀다. 그를 코드네임이 아닌 성으로만 부르는 이는 정보국 내에서도 오직 아이자와 뿐이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 건 야기 네 놈 정도지. 운전을 해야 하는 나는 짜증이 나고 말이야.”
“아, 그게 또 그렇게 받아들여지나… 하하, 미안하네. 돌아갈 때는 내가 운전할까?”
“꿈도 꾸지마. 여기까지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딴 걸로 죽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러고 보니 우린 참 여기까지 버텨왔군.”


첫눈 치고 눈발은 굵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려다 아이자와는 야기의 얼굴을 보곤 라이터를 다시 집어 넣었다. 눈을 바라보는 야기의 얼굴이 꼭 꿈을 꾸는 듯 했다. 내버려둔다면 몇 시간이고 여기 서서 추억에 잠겨 있을 것이다.
아이자와가 아는 한 그 추억은 별로 좋은 것들이 아니었다. 국장이 되어 현장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지금에도 야기는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다시 악몽에 빠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아이자와의 손이 야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눈 구경은 됐어. 춥다고. 돌아가자.”
“아, 참. 그래. 자네는 추위를 잘 탔었지, 아이자와. 내 목도리를 빌려줄까?”
“필요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늙은 요원의 체온이 아니라 보드카 한 잔이라고. 그만. 몸 돌려.”


여전히 숲을 바라보고 서있던 야기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알겠다며, 돌아간다며 대답을 하면서도 야기는 답지 않게 늦장을 부렸다. 생각해보면 그날 모든 일들이 그랬었다. 유난히 길었던 작별시간, 옛 추억에 잠기기에 충분했던 흐린 하늘과 굵게 흩날리던 눈발,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던 오랜 파트너.


“그래도 나는 자네가 있어 여기까지 견딘 거야, 아이자와.”


뒤에서 던져진 목소리에 운전석을 열던 아이자와가 멈칫 했다. 그렇게 시간을 한 번 더 지체했다. 그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야기 네 놈은 오늘따라 그런 쓸데없는 소릴…”


그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

「뭐, 그때도 이상하긴 했어. 거긴 접경지역이긴 해도 폭격으로 무너져버린 마을이라 우리도, 제국도 초소를 세우지 않는 곳이었으니… 그런 소리가 들릴 일이 없거든.」

아이자와가 새로 뜯은 담배곽에서 담배 한 대를 끄집어 냈다. 바쿠고의 콧날이 또 한 번 마뜩찮은 듯이 일그러졌다.


「하여튼 촉은 더럽게 좋아, 씨발.」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이 짓 하면서 이 나이까지 살아있긴 어렵지. 나나 야기 녀석이나.」


어쨌건. 말을 받으며 아이자와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빌릴까 싶어 바쿠고의 손 안을 건너다 봤다가 아이자와는 이내 눈길을 내리깔며 자기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저 라이터는 함부로 빌려갈 물건이 아님을 아이자와도 알고 있었다.


「똑똑히 들었지. 그때.」
「망할 총소리.」
「그래.」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아이자와가 깊게 감았던 눈을 천천히 열었다.


「두 번.」







*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에 필요한 실탄은 딱 두 발이었다. 탕, 그리고 탕.

바쿠고는 벼랑의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갈 때부터 남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1시간에 두 번씩 숲을 따라 도는 제국군의 발소리 한 번 듣지 못했을 때부터 바쿠고는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 이미 남자가 인사를 할 때부터 망토 속에서 조용히 권총의 잠금장치를 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탕.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남자의 총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총성이 울렸었다. 그건 남자가 아니라 바쿠고의 총이었다.

지금껏 바쿠고는 목표를 빗 맞춰본 적이 없었다. 치사키와 시가라키마저 인정했던 완벽한 사격솜씨는 남자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남자는 반격 사격을 해볼 틈도 없이 그대로 눈이 쌓인 길 위로 쓰러졌다. 숨이 끊어졌는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너는 항상 완벽했으니까. 미도리야가 흐릿해지는 시야를 천천히 끔벅거렸다. 너는 언제나 내 인생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캇쨩. 가슴이 너무 아파. 돌에라도 맞은 것처럼.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신 바쿠고가 곧장 미도리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등신 새끼가. 욕을 짓씹던 얼굴이 여태까지 본 그 어떤 얼굴 중에서도 급하고 서툴러 보였다. 캇쨩이 이렇게 허둥대는 건 흔치 않은데, 한 번 웃어줘야 하는데…
하지만 입 끝을 밀어 올리는 것조차 미도리야는 할 수 없었다. 허겁지겁 뻗어온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코트를 헤치고 자켓을 벌리며 셔츠를 잡아 뜯었다. 어깨가 뜨거웠다. 가슴이, 돌이라도 박힌 것처럼, 답답했다.

하기야, 난 언제나 이런 기분으로 살았었어. 가슴에 심장이 아닌 돌을 박고서. 진짜가 아닌 가짜를 품고서.

미도리야가 흐릿해진 숲색 눈을 끔벅거렸다. 웃음 대신 밭은기침이 쿨럭 터져 나왔다. 뜯겨 나간 셔츠를 잡아 벌리는 바쿠고의 손길이 사나웠다. 움직이지마, 등신 새끼야. 그리고 벌어진 셔츠 안을 바라본 선홍색 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렸다.


“하, 씨발… 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힘을 잃은 색이 밝은 머리가 눈밭에 주저앉았다. 미도리야의 가슴팍에 떨어진 양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미도리야는 태어나 처음으로 바쿠고가 신을 부르던 소리를 들었다. 빌어먹을, 망할, 엿 같은 신이시여.
단추가 급히 뜯어져 벌어진 셔츠 안쪽으로 미도리야의 가슴이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깨진 실탄조각들에 찢긴 살갗들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실탄이 뚫고 간 셔츠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라이터였다. 정가운데에 구리 실탄이 박힌 라이터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미안, 캇쨩…”


답답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숲색 눈이 바쿠고를 향해 흐 웃었다.


“라이터 망가뜨려서.”
“……”
“그래도 이게 날 살렸네.”


돌이켜보면 너의 모든 순간들이 나를 살렸었다. 너의 등을 따라 오는동안 길을 잃지 않았었고,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동안엔 진짜 나를 잃지 않았어.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데쿠라고 불러줄까. 흐릿하게 일그러진 숲색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등신 새끼가. 바쿠고가 울컥 콧날을 구겼다. 잔뜩 좁아진 선홍색 눈이 그때는 어쩐지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입 다물어, 미친 새끼야.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하지만 라이터가… 캇쨩이 준 건데, 날 위해서 주문해준 건데…”
“닥쳐. 안 샀어. 누가 준 거라고 했지.”


그 말이 거짓말인 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심장을 꿰뚫리지 않았다고 해서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탄 조각에 찢어진 살갗에서 흘러나온 피가 셔츠를 물들였다. 바쿠고가 급한대로 미도리야의 셔츠를 찢고 그 자리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 작은 압박에도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총격의 충격으로 갈빗대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등신아. 멍청하게 뒤지지 말고.”


바쿠고가 힘없이 늘어지는 미도리야의 몸을 등에 업었다. 눈발은 여전히 굵었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에 제 코트를 한 번 더 둘러준 후에야 바쿠고는 눈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피를 흘린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자신을 업은 온기가 좋아 미도리야는 자꾸만 빗장이 풀렸다. 통제를 잃은 입술이 자꾸만 떠들었다. 꿈처럼.


“이렇게 업히니까, 흐, 그때 같다. 캇쨩, 우리 어릴 때 보육원 담장 넘었을 때… 신부님한테 너무 맞아서 나는 똑바로 걷지도 못했는데, 캇쨩이 방까지 업어줬잖아.”
“시끄러워. 그딴 일 오래 돼서 기억도 안 나, 씨발.”
“나는 나는데, 흐. 나는 안 잊었는데.”
“……”
“그때부터 좋아했나봐.”

그게 열 살 때였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이 남자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나를 싫어하고 밀어낸다면 그저 그 뒤라도 조용히 따르며 살고 싶다고. 정보학교에서 훈련 중에 아끼던 강아지를 쏴죽였을 때도,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도 미도리야는 그날을 떠올렸다. 아무리 삶이 괴롭고 끔찍해도 이 남자를 생각하면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죽이고 싶었어.”


바쿠고의 등에 파묻힌 숲색 눈에서 송글송글 눈물이 흘러 넘쳤다. 현기증에 어지러웠다.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캇쨩을 때렸을 때 진짜… 죽이고 싶었어.”


내 평생 가장 빛나는 게 너야. 내 삶에 가장 완전한 게 너야. 이 완전한 보석에 흠집을 내면 그게 누구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죽여버릴 거야. 미도리야가 열에 들뜬 머리로 엉엉 섧게 울었다.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하, 낮은 호흡을 밀어낸 바쿠고가 등 위에 업힌 미도리야를 단단히 고쳐 안았다.


“닥쳐, 멍청아. 자꾸 떠들면 진짜 뒤질지도 모르니까.”
“……”
“죽이고 싶으면 살아서 죽여.”


하지만 과연 우리는 살 수 있을까.

그 말에 대해선 바쿠고도 자신이 없었다. 살아야 하지만 사실 이 이후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산다한들 그 인생 역시 국경 남쪽에 두고 온 것과 같지 않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 수많은 혼란들을 바쿠고는 일부러 한 마디도 꺼내놓지 않았다. 살려야한다. 아무리 이곳에서도 엿 같은 인생을 살게 될 지라 한들, 살려야했다. 죽도록 둘 수 없었다. 차라리 이 길 위에서 둘다 얼어붙어 뒤진다고 해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친 건 바로 그때였다.


“거기 자네들!”


빛을 등지고 선 누군가가 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자동차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체격이 좋은 금발의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하. 그때는 또 한 번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었다.





#


「정말 시체를 만난 줄 알았었지.」


아이자와가 솔직히 평했다.


「뭐,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야. 의식을 잃기는 했어도 위독한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 댁들이 아니었어도 뒤지게 안 냅뒀어.」
「그럴 땐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 거다, 바쿠고.」


지적에 바쿠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이 녀석은 지금까지도 감사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이지. 쯧쯧 혀를 찬 아이자와가 담배갑을 끌어 당겼다.


「뭘 대단한 듯 떠들어, 씨발. 댁들도 어차피 이용한 것 뿐이잖아.」


곽을 열어젖히던 손이 멈칫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이자와도 할 말이 없었다. 이를 악문 바쿠고가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기억을 조작해서 지들 편한대로 요원으로 써먹다 역으로 제국에 잠입시키려고 했던 게 누군데, 하.」
「맞아. 이용했다. 그 점에 대해선 부정할 생각 없어. 일종의 보험이었지. 보통 녀석들도 아니고 적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트로 꼽혔던 일급 요원들을 무턱대고 받아주는 멍청이가 있겠냐.」
「……」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 야기는 무관해. 네 놈도 기억이 되살아났으면 알고 있겠지만 이걸 제의한 건 나다.」


머금었던 연기를 후 뿌리며 아이자와의 눈이 바쿠고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너고, 바쿠고 카츠키.」


그날도 바쿠고는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 한 장의 카드 외엔 모두 잃어버린 도박사처럼.





*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그날의 바쿠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2년 전, 12월 24일이었다.


“야미쿠모씨! 진정하세요, 야미쿠모씨! 여기… 여기, 진정제 가져다줘요! 얼른!”


연합국에서 맞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날 바쿠고가 들었던 건 캐롤도, 루돌프의 종소리도 아닌 비명소리였다. 보안 때문이라는 이유로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연합국 국립 병원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던 1인실 병동에 입원했지만, 병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녀석에게 가기 위해선 12개의 병실을 지나가야 했다. 그래도 언제나 악몽에 시달리는 녀석이 내지르던 비명소리는 바로 곁에 있는 듯 잘만 들렸다.
산타는 어차피 믿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괴로움은 알았었다.


“멍청한 새끼가.”


모르는 척 귀를 막고 있던 바쿠고가 기어이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를 빠져 나왔다. 크리스마스라 환자들도 외출을 한 모양인지 문이 열린 병실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울음과 공포에 찬 비명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여기에 입원한 후 보름동안 바쿠고는 밤마다 이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가만히 재워주지 않는 목소리, 어떻게든 녀석의 병실로 가게 만드는 이 끔찍한 소리.

복도 맨 끝에는 익숙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야미쿠모 마사토. 여기서도 둘의 이름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그대로 써먹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건 검고 음침한 눈을 하고 있던 연합국 정보국의 부국장이었다. 아이자와 쇼타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미도리야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던 야기라는 국장과 달리 그는 냉철했다.
자신들이 우연히 국경에서 구해준 청년들이 적국의 가장 뛰어난 엘리트요원이라니. 그 우연을 묘하게 여기면서도 그는 바쿠고와 미도리야가 가지고 있던 가짜 신분증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어차피 미도리야의 회복을 위해서도 입원은 필요했다. 3년간 연기했던 가짜 신분, 그리고 탈출을 위해 구상한 가짜 시나리오는 국립병원 간호사들의 환심을 사는 데에도 아주 유용했다.


“아, 카츠야마씨… 다행이에요. 야미쿠모씨가 또 발작을 시작하셔서…”


병실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미도리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곤란해 하던 간호사가 마음을 놓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녀는 제국에서 금지된 사랑을 한 대가로 사형을 피하기 위해 적국인 연합국으로 도피를 떠난 카츠야마와 야미쿠모를 마음 깊이 동정했다.
그녀는 야미쿠모가 총상을 입은 것도 국경에서 탈출을 할 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탓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매일 악몽을 꾸는 것도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더 설명해봐야 복잡해질 일을 바쿠고는 일부러 먼저 떠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제가 보겠습니다.”
“진짜요…? 아, 감사합니다.”


비어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간 바쿠고가, 아니, 카츠야마가 간호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간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호출을 해달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그녀는 곧장 병실을 빠져 나갔다.
선홍색 눈길이 빈 침대를 잠시 담담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어디에 있을지는 다 알고 있었다. 몸을 숙인 바쿠고가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미도리야는 침대의 가장 구석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데쿠.”


둘만 있을 때는 절대 다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무리 악몽이 심해 정신을 놓을 때도 이 이름을 들으면 녀석에게선 늘 반응이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어둠 속에서 벌벌 떨던 숲색 눈이 이쪽을 홱 쳐다보았다. 그리고 부리나케 무릎발로 기어온 녀석이 다짜고짜 바쿠고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몸을 바로 잡으며 바쿠고가 쯧 혀를 찼다. 등신 새끼.


“잠 안 오면 약 먹으랬지.”
“싫어… 싫어.”
“왜.”
“캇쨩이 끊으랬잖아.”
“줄이랬지 끊으랬냐. 안 그래도 주는 약 안 먹는다고 간호사들이,”


잔소리 좀 하려고 했더니 다짜고짜 입술이 부딪쳐왔다. 입술을 열고 막무가내로 밀어넣는 혀가 어설펐다. 떨지나 말든가. 울컥 눈살을 구긴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뒷목을 가볍게 감싸면서 서툴게 비벼오는 설육을 부드럽게 감아 제 입안으로 이끌었다. 부드럽게 뒤엉키는 혀가 뜨겁고 달았다. 그래도 목을 끌어안은 팔은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침대에 눕혀놓을 때까지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매달리면 못 벗긴다, 멍청아.”
“싫어. 할래. 싫어.”
“그러니까 좀 떨어지라고… 하. 됐어, 씨발.”


국경을 넘어 야기와 아이자와를 만나 병원으로 옮겨진 이후부터 미도리야의 발작은 다시 시작됐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심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지르다 진정제에 취해 기절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잠들면 수도 없이 악몽을 꿨다. 그 증거로 한 달 사이 미도리야는 수척할만큼 야위어 있었다.
이 녀석을 짓누르는 건 죄책감과 공포다. 바쿠고가 이제 제 손 안에 뿌듯이 쥐어질만큼 말라버린 손목을 베개 옆에 붙이면서 잠시 생각했다. 사람을 수없이 죽여온 죄책감, 언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지난 시간동안 그 억눌려온 감정이 국경을 넘어오며 기어이 둑이 터졌다. 그때마다 바쿠고는 끝도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걸 가장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씨발, 아무 것도 없다는 거.


“바지 내려.”
“어?”
“하게, 등신아. 이 짓 좋아하잖아.”
“응. 좋아해. 할래. 할 거야.”


입을 맞추고 살을 만지면 너는 기쁜 듯이 나를 끌어안는다. 섹스로 현실을 도피하려던 증상은 전부터 꾸준히 있어왔지만 근래 들어 특히 심했다. 시키는대로 스스로 바지를 끌어내린 미도리야가 베개를 정돈하고 먼저 누웠다. 달빛에 비친 숲색 눈이 찬연히도 반짝거려서 바쿠고는 잠시 숨이 막혔다. 그 얼굴이 늘 더 괴로웠다. 가슴이 온통 어수선하게 어지러워질 때마다 바쿠고는 남자의 제안에 대해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그 남자가 바쿠고를 만나러 왔었다. 아이자와 쇼타라는 이름의, 연합 정보국 부국장이었다.


“캇쨩, 아… 거기, 흐. 더 만져줘. 거기… 읏,”


너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나름대로 고민해 봤는데 말이야. 아이자와는 그렇게 이야기의 첫마디를 열었다. 야기는 없었다. 그가 내민 두툼한 서류 속에는 앞으로 B와 M에 대한 활용 계획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이대로 연합국의 정보국에 흡수시켜 역으로 나중에 제국에 침투시킨다는 내용을 토대로 둘의 처우에 대한 내용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쁘지 않았다. 도청이 되지 않는 아파트, 적지 않은 연봉과 개인 생활의 보장. 하지만 조건이 달려 있었다.

기억을 지워. 아이자와는 그렇게 말했다. 이대로는 너희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


“캇쨩?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


둥그렇게 커진 눈이 자신을 들여다보기가 무섭게 환복 안을 헤집고 들어간 손이 단단히 일어선 앞을 쥐었다. 힉 턱을 젖힌 미도리야의 몸에서 헐거워진 환복을 허겁지겁 끌어내렸다. 급하게 다붙은 허리가 비벼지고, 다리가 벌어졌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헐떡이며 크게 젖혀진 미도리야의 마른 목에 이를 박고 살결을 들이마시며 바쿠고는 격렬히 허리를 찍었다. 미도리야의 손끝이 수시로 바쿠고의 등을 긁어댔다. 와르르 일그러진 숲색 눈에서 굵은 눈물이 쉼없이 뚝뚝 떨어졌다.


“캇쨩… 오늘따라 너무 거칠, 아아ㅎ…!”


기억을 지운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안다. 연합국의 의료 기술은 최고였고, 그중에서도 약물과 최면을 통해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은 올포원조차 탐내고 있었다.
물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서류에도 그 점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약물과 최면으로 인한 효과는 대체적으로 2년간 유지되며, 그 이후에는 다시 추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큰 모험이다. 개소리 하지 말라고 서류를 면전으로 집어던질 때에도 아이자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이자와는 유능했다. 재능이 넘치지만 수시로 혈기에 사로잡히는 젊은 요원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아이자와가 되물었다. 그 녀석은. 검고 예리한 눈이 바쿠고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었다.
그 녀석은 잊고 싶을 것 같은데.


“왜 이러는, 아파, 그렇게 물면 아ㅍ, 캇쨩…!”


헐떡이는 목덜미를 낚아 입술을 문지르며 살갗을 씹었다. 내일이면 이 자리에 검게 멍이 질 지도 모른다. 상관없었다. 그 멍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하, 입술을 비튼 바쿠고가 속도를 붙였다. 울컥 일그러진 눈가가 시큰거렸다.

안다. 무엇이 녀석을 위한 일인지. 기억이 지워지면 적어도 악몽은 꾸지 않게 될 테니까.

품 안에서 잔뜩 달아오른 미도리야의 몸이 긴장으로 빳빳해지며 이내 축 늘어졌다. 곧이어 바쿠고가 허리를 깊이 찍어 넣으며 도달했다.
온몸이 땀과 탁액으로 끈적거렸다. 손으로 훔치며 흔적을 닦는 대신 바쿠고는 그대로 미도리야의 몸위로 쓰러져 한동안 숨을 골랐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뺨을 쓰다듬는 손가락들이 느껴졌다.


“오늘 크리스마스라는데…”


한참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미도리야가 베개 맡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자. 바쿠고가 손 안에 툭 쥐어진 것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실탄에 박혀 찌그러진 라이터였다. 하. 바쿠고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 끝을 비틀었다.


“멍청아, 이건 내가 준 거잖아.”
“준 거 아니라며.”
“……”
“그냥 따로 줄 건 없고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아끼는 걸 주고 싶어서, 흐.”


게다가 내 목숨을 한 번 살렸잖아. 숲색 눈이 부슬부슬 웃었다. 행운의 부적이니까, 그거. 그리고 슥 다가온 미도리야의 입술이 바쿠고의 뺨에 쪽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잠깐 맡고 있어줘.”


꼭 눌러 감은 숲색 눈을 타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중에 돌려주면 되잖아.”


가슴이 철렁했다. 잊고 있었다. 이 녀석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는 사실을. 이를 악문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 시큰거리는 눈가를 숲색 머리카락 안으로 감춰버렸다. 그리고 오래도록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음 날, 바쿠고는 자기 손으로 집어 던졌던 서류에 서명을 했다. 수술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아이자와가 직접 둘의 수술을 참관했다.
야기가 반대를 해서. 아이자와는 그저 그렇게만 소회했었다. 그대로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진료실에 옮겨졌다. 약물을 주입받기 전에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우리 지금 뭐하는 거야? 미도리야가 물었다. 바쿠고가 짧게 대답했다. 치료. 그리고 가볍게 덧붙였다. 한숨 자라.


“이제 망할 악몽 같은 건 안 꿀 테니까.”


그때도 바쿠고의 손에는 찌그러진 라이터가 쥐어져 있었다.






#

찌그러진 라이터가 바쿠고의 손안에서 달칵, 열리고 다시 닫혔다. 잠시 그 손을 흘깃거린 아이자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이야기도 이제는 슬슬 엔딩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흐리게 하는 약물을 주입 받고, 최면을 걸었지. 나는 병실 밖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고. 뭐, 그 이후부터는 다 알고 있는 결말일 거야.」


제국의 유능한 이미테이터였던 B와 M은 연합국에 태어난 요원이 되었다. 평생을 의지하며 기어이 선을 넘은 둘의 사랑은 같은 보육원에서 태어났을 뿐인, 그저 서로가 짜증이날만큼 거슬리는 험악한 감정으로 변했다. 그래도 유효기간은 딱 2년이었다.


「어차피 네 놈은 금방 기억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트라우마가 강한 쪽이 본래 최면에 사로잡히기가 더 쉽거든. 상대적으로 미도리야가 기억을 조작당하기는 훨씬 더 수월했지. 의사 녀석들도 그렇게 말하더라고.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아, 물론 네 놈도 지금까진 그랬었고.」
「그럴 거면 차라리 영원히 지워지게 만들든가, 씨발.」
「그 점은 미안해. 하지만 아직 이 기술이 완전하지 않은 걸 어쩌겠냐. 물론 네 놈 기분은 이해해. 본래 약도, 술도 깰 때가 제일 기분이 더럽거든.」
「……」
「뭐, 그래서 나는 2년동안 너희를 대신해 제국과 끈이 연결되게 만들어 줬지. 2년 뒤에 너희가 기억을 되찾으면 다시 제국으로 잠입시킬 예정이었으니까.」
「…이 개 같은 새끼가,」


참지 못한 바쿠고가 단숨에 의자를 밀쳤다. 하지만 멱살을 잡기 전에 허공에서 손목이 잡혔다.


「이런 것쯤은 예상했어. 네 놈은 미도리야랑 다르게 읽기 쉽거든.」


손목을 잡은 손에 꽉 힘이 실렸다. 아픔에 바쿠고가 얼굴을 구기며 욕을 했다. 놔, 씨발. 아이자와가 담담히 웃었다. 그러든가. 그리고 잡혀있던 손목을 그대로 힘껏 떠밀었다.
밀쳐진 바쿠고의 몸이 우당탕 뒤로 밀렸다. 하지만 의자에 걸려 넘어지진 않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아픈 손목을 흔들며 이쪽을 노려보는 선홍색 눈을 아이자와는 이번에도 그저 고요히 쳐다보았다.


「이제 다 아는 얘긴 그만하자고.」


아이자와가 담담히 말했다.


「네 놈들의 이야기는 완벽해. 드라마가 따로 없지. 기승전결도 완전해. 하지만 딱 한 가지가 나는 신경쓰여. 말하자면 논리적이지 못하달까, 개연성이 맞지 않는달까. 뭐, 사소한 오류이긴 한데…」
「뭐, 씨발.」
「왜 한 놈이었을까.」
「……」
「그날, 오버홀이 너희를 죽이라고 했던 그 연락책 말이지. 왜 한 놈이었지? 이상하단 말이야. 너희는 둘인데 암살자가 하나라니, 머릿수가 안 맞거든.」


처음 국경에서 바쿠고와 미도리야를 만났던 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기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이자와는 아니었다. 언제나 냉철한 합리주의자는 이 이야기의 아주 사소한 지점이 2년 내내 거슬렸다. 아니, 이건 분명히 이상했다. 아이자와의 감으로는 그랬다.


「왜 오버홀은 이 정도나 되는 요원들을 암살하라면서 한 놈만 보냈을까. 내가 너희 상관이라면 절대 그런 어설픈 짓을 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 한 놈이야 처리할 수 있지. 하지만 한 놈을 쏘면 분명 남은 한 놈이 가만 있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둘 중 한 놈은 반드시 살아남게 되어 있는데.」
「살았잖아, 씨발. 데쿠 새끼가 맞았고, 그 새끼는 내 손에 뒤졌고.」
「아니, 둘 다 살았지. 뭐… 그래. 상황이야 결과적으로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어. 그런데 처음부터 한 놈만 보내지는 않거든. 보통 이런 경우는.」


잠잠하던 아이자와의 눈이 바쿠고를 예리하게 뚫어보았다. 이 연극은 처음부터 틀렸다. 이야기가 아니다. 배우의 수가 틀렸던 거다.


「더 있었겠지. 그 자리에, 한 사람 더.」


그밖에 다른 정답은 없었다.


「내 촉은 말야. 이렇거든, 바쿠고. 네 놈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미도리야는 누구와 함께 있을까. 누굴 따라갔을까.」
「……」
「그 자리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답이 없던 선홍색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 안에 비치던 것을 아이자와는 똑똑히 보았다. 그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잠시 잊고 있던 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

미도리야가 가장 먼저 느꼈던 감각은 구토였다.

남쪽 국경지대로 향하던 자동차는 결국 도로를 빠져 나와 호젓한 숲길에 들어섰다. 우라라카가 차를 주차하기가 무섭게 조수석 문을 열고 튀어나온 미도리야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속을 게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먹은 것이 없어 나올 것도 없었다. 그래도 토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쏟아낼 것처럼 몸은 쉼없이 울렁거렸다. 숨기고 있던 것도, 잊어버린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까지 모두.

구토, 그 다음은 뇌를 가르는 듯한 끔찍한 두통이었다.


“헉, 허억… 헉,”
“미도리야군? 미도리야군! 이봐요, 괜찮아요?”
“머리가… 머리가, 헉, 아, 아악,……!”


숲색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미도리야가 바닥을 굴렀다. 누군가 굵은 송곳으로 머릿속을 후비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몸이 이런 발작을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다. 끝없이 발작하고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우라라카가 양팔을 붙잡고 찍어누르며 헐떡이는 미도리야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발. 발갛게 달아오른 숲색 눈이 울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하지마. 싫어.

생각나지마.
제발 다시 떠올리지마.

눈앞에서 하얀 빛이 수도 없이 점멸했다. 숲에 있었지만 미도리야는 그 순간 숲에 있지 않았다. 수많은 소리들이 고막에서 되살아났다. 칼날이 살갗을 찢던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뺨을 후려치던 소리, 제 옷을 찢고 구둣발로 가슴팍을 걷어차던 소리…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데쿠.

하얗게 흐려져 있던 잔상이 또렷해졌다. 하얀 전등이 눈이 부셨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빛을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색이 밝은 머리가 보였다. 유난히도 날카롭던 그 붉은 눈이 미도리야를 향해 거기에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날, 그때, 분명히.


‘…약속할 테니까.’


그때 이 거지 같은 인생도 끝나게 될 테니까, 그냥 잠시만 잊어버리면 되는 거니까.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거기 고여 있던 눈물이 미도리야의 뺨 위에 툭 떨어졌다.


‘잊지마, 멍청아. 2년 후에…’


“……!”


감겨있던 숲색 눈이 번쩍 열렸다. 두통이, 토악질이 가라앉았다. 눈앞을 흐리게 하던 환상이 일순 사라졌다. 좀전보다 한결 나아진 호흡을 헉헉 느리게 밀어내며 미도리야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낮은 하늘 밑으로 숲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선홍색 눈의 남자가 아닌, 갈색 단발머리에 단발 눈을 가진 여자였다. 괜찮아? 여자가 물었다. 어… 미도리야가 천천히 떨리는 입술을 뗐다. 괜찮냐는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머리… 잘랐구나.”


미도리야를 내려다보던 갈색 눈이 조금 떨렸다. 그 눈을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시마우라군.”


우라라카 오챠코가, 아니, 시마우라 리코가 활짝 웃었다. 기억을 되찾아서 다행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응, 잘랐어, 긴 머리는 거치적거려서. 벌써 2년이나 지났잖아. 가장 아끼는 남동생을 바라보듯 다정한 눈빛으로 우라라카가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일어나자. 우라라카가 미도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야지, 이제.


“네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사람을 죽이러.”


숲색 눈이 활짝 웃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즐거움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

선홍색 눈이 씩 웃었다. 오랫동안 숨겨놓았던 것을 일부러 발각당한 사람처럼.


「하여튼 모르는 게 없어, 씨발. 이 나라 상관들은. 맞아. 한 놈이 아니었지. 당연하지. 어떤 멍청이가 둘을 죽이는데 한 놈을 보내냐고.」
「하. 바쿠고 네 놈…」


2년 전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심은 하지 않았다. 항상 감정기복이 없던 아이자와도 이번만큼은 속내를 참지 못했다. 늘 냉철했던 정보국 부국장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너희가 국경을 넘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장본인이군. 시마우라 리코가. 아니, 우라라카 오챠코가.」


그리고 그녀가 B와 M의 배신을 도왔다. 그래, 죽여야할 놈이 둘인데 암살자를 하나만 보냈을 리 없었다. 허나 아이자와는 연합국 정보국의 부국장이다. 모든 정보가 아이자와의 손에 모인 후에 추려지고 정리되어 야기에게 보고된다. 때문에 아이자와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우라라카 오챠코, 즉 우라비티는 그쯤부터 우리나라에 잠입한 제국의 여러 연락책 중 하나였지.」


바쿠고가 이곳에 들이닥치기 직전, 미도리야가 접촉했던 연락책 역시 우라비티다. 지금 미도리야가 함께 있는 자 역시 그녀일 것이다. 미도리야는 [위험]하다며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상황을 본 그녀가 미도리야를 빼돌렸을 테니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네 놈이지, 바쿠고.」


바쿠고를 뚫어보는 아이자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네 놈이 미도리야와 합류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온 이유. 그리고 하필 미도리야와 함께 있는 제국의 연락책이 우라비티인 점.
「……」
「나는 말이지, 바쿠고. 우연은 믿지 않거든. 제국의 연락책은 많아. 하지만 하필 오늘 센트럴역에 나온 미도리야의 메시지를 읽었다며 데려가는 연락책이 하필 너희와 인연이 있던 요원이라… 이건 우연이 아니지. 미리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서야. 하지만 너희는 2년동안 기억을 잃었어. 그럼 대체 누가 연락을…」


설마. 아이자와의 눈 사이가 매섭게 좁아졌다. 2년동안 다른 수많은 것들을 의심했지만 유일하게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B와 M의 기억조작수술. 그 수술의 대가로 2년동안 바쿠고 카츠키와 미도리야 이즈쿠는 서로 사랑한 사실조차 새카맣게 잊고 살았었다.

하지만 아이자와는 잊고 있었다. 눈앞의 이, 바쿠고 카츠키가 제국에서 무슨 일을 주로 하던 요원이었는지.


“모방자imitator…”


아이자와가 신음처럼 우물거렸다. 2년간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유일한 의문이 끝내 노련한 부국장의 입술을 끝내 비집었다.


“위장을 했군, 네 놈. 기억이 지워진 것처럼.”
“……”
“지난 2년동안 나와 야기, 심지어 미도리야까지 속이면서.


바쿠고가 대답 없이 입 끝을 밀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속은 거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래. 그렇다면 곧장 나를 찾아온 것도 납득이 가지. 미도리야가 우라라카와 함께 국경을 넘어가는 동안 시간을 벌 사람이 필요하니까. 우리가 녀석들을 추적할 수 없도록.”
“어, 당신들이 끼어들면 데쿠새끼가 그 의심 많은 새끼 곁에 못 돌아가거든.”
“…오버홀.”
“……”
“그랬군. 하, 네 놈들.”


완전히 당했다. 아이자와가 비틀거렸다. 담배곽을 끌어당기며 바쿠고가 굳어있던 아이자와의 얼굴을 향해 입 끝을 비틀었다. 이번에도 곽 안에는 담배가 한 대 밖에 남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고 곽을 열어젖힌 바쿠고가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 안에서 찌그러져 있던 라이터가 달칵 열리며 불을 붙였다.


“약속을 했으니까.”


바쿠고가 가볍게 대꾸했다. 카츠야마 반이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3년을 살며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었던 제국 최고의 모방자가 거기에 있었다.


“그 새끼를 직접 죽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거든, 내가.”
“……”
“그럼 지켜야지.”


모두 그를 B라고 불렀었다.






(계속)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1.바쿠고는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고
2.기억이 지워진 척 하면서 우라라카와 접촉을 했고
3.2년 후에 미도리야가 기억을 되찾을 즈음이 되자
4.미도리야를 우라라카에게 붙여서 제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5.자기는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아이자와를 찾아온 것

그리고 아마도 바쿠고가 미도리야한테 뭘 약속했었는지는 중2편 말미에 있는 그것....

본래 두 편으로 나눠야마땅한 분량이지만 흐름을 끊기가 싫어서 걍 합쳐봅니다.. 다들 현생으로 바쁘신 와중에 저만 잠깐 짬이 나서 계속 달리네요ㅋㅋㅋㅋㅠㅠㅠㅠ 사실 후반부 쓰면서 이럴 거면 이거 그냥 책으로 낼 걸 그랬나 후회를 오조오억번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저...

무튼 다음 편이 아마도 마지막일 것 같아요U///U 완결은 아마도 바쿠고가 지지해준 미도리야의 복수극... 이 취향 많이 타는 글을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ㅠ.ㅠ


+ 마지막 캇쨩이랑 아이자와 대화 단락의 대사괄호는 실수가 아님을 슬쩍 밝혀둡니다u////u

?
  • 지돌이 2019.04.13 21:10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꼬마어른 2019.04.13 22:50
    아니 미쳤..... 진짜 미쳤.....ㅜㅜㅜㅜㅜ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ㅜㅜㅜㅜ 바쿠고의 얼굴이 그려져서 더더욱 소름돋네요ㅜㅜㅜ
    현생 바쁘신데 이런 걸작을 이어주셔서 감사해요ㅜㅜㅜㅜ 진짜 ㅁㅊ......ㅜㅜㅜㅜ
  • ㅍㅅ 2019.04.14 12:09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은저의파랑새 2019.04.14 23:39 SECRET

    "비밀글입니다."

  • 낭만 2019.04.15 13:35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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