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정말로 오랜만에 이 캇뎈을 백업 합니다

* 서른살 알파 x 서른살 오메가의 역할리킹 로코 (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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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약한 수위 주의







오메가 미도리야가 알파 바쿠고 사오는 썰

#Backup (13~16)








미도리야는 그때, 바쿠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성질은 더럽지만. 아니, 조금! 진짜 조금!」


이제 막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로비로 나오다 토도로키와 마주쳤다. 오랜만이라 반갑다는 말은 가벼운 포옹으로 대신했다. 영화 촬영은 어땠느냐며 미도리야는 짧게 물었고, 토도로키는 다 끝나서 홀가분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근사한 미소를 덧붙였다.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안부가 이어졌다. 그 멋진 얼굴이 미도리야의 결혼 소식을 들었노라며 바쿠고를 언급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솔직히 누가 보아도 애인 자랑이었다.
 

「요리도 잘해. 이태리 요리부터 중식까지… 믿어져, 토도로키군? 내가 집에서 꿔바로우랑 마라샹궈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곤! 아, 물론 좀 맵긴 했지만, 흐. 캇쨩이, 아니, 그러니까 내 남친… 아니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 어, 하여튼 그 사람이 매운 걸 좋아하거든. 그래도 내 몫으로 덜어준 요리에는 마라를 덜 넣었대. 대단하지 않아? 우리집 요리사보다 더 맛있는 중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니! 아, 그렇다고 물론 요리 때문에 맘에 든 건 아니지만…!」
「그렇군. 하지만 조금 천천히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이즈쿠.」
「어? 아, 그러게. 맞다, 운동도 못하는 게 없어서…」
 

만약 미도리야에게 진짜 소꿉친구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수시로 나눌 수 있는 다른 상대가 있었더라면 토도로키를 붙잡고 그렇게 오래도록 수다를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도리야에겐 그런 이가 없었다. 올마이트는 당연하고, 공적 관계로 묶여있는 이이다 역시 이런 얘길 나눌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 중에 그나마 막역한 토도로키가 먼저 소식을 물어봐주니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수다스럽다는 사실을 미도리야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내버려뒀으면 아마 선 자리에서 밤이라도 샜을 것이다. 바쿠고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수다를 떨게 만든 것도, 그 수다를 멈추게 만든 장본인도 모두 한 사람이었다.
 

“캇쨩, 대체 왜 그러는… 캇쨩!”

 
만찬장으로 쓰이는 다이닝룸 하나가 하필이면 비어있었다. 한 손으론 미도리야의 손목을, 한 손으론 벽을 더듬으며 거침없이 걸어나간 바쿠고가 제 손에 걸려 흔들리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을 둘러볼 틈도 없이 미도리야는 그대로 불도 켜지 않은 창 쪽으로 밀어붙여졌다. 40인석 테이블보다도 넓은 창문에 붉은 커튼은 반만 쳐져 있었다. 커튼에 파묻힌 얼굴을 옆으로 돌리다 창 너머를 발견한 미도리야가 기겁을 했다. 창 앞은 파티장이었다. 하필.
 

“캇쨩, 우리… 이런 데 말고 룸 잡고 제대로 하자. 응? 여기서는 누가 보기라도 하면,”
“닥쳐.”
 

귓가에 붙어온 입술이 사납게 속삭였다. 뒷머리를 짓눌리며 우물거린 말들이 다시 삼켜졌다. 얼굴을 더듬어온 손가락들이 그대로 굳은 입술을 매만지며 턱을 눌렀다. 하. 바쿠고가 입 끝을 비틀었다. 밀려나온 숨결이 오싹했다. 저도 모르게 움칫 몸을 떤 미도리야의 귓불을 질근거린 바쿠고의 손이 곧장 가슴팍으로 향했다. 오른손은 여전히 바쿠고의 손 안에 단단히 짓눌려 있었다. 그 악력이 너무 셌다. 뼈라도 부러뜨릴 것처럼.
 

“내 꺼라고.”
 

타이를 풀어헤치던 손이 미도리야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꽉 힘이 실린 손이 울대를 뭉근히 눌러왔다. 숨이 막혔다. 욕망에 잔뜩 뭉개진 말이 젖은 귓불 옆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못 건드린다고, 아무도.”
“아무도… 읏, 아무도 그런 짓 안 해. 그러니까 일단 진정 좀… 힉,!?”
 

가슴 앞을 움켜잡은 손이 그대로 타이와 셔츠를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튕겨 날아간 단추들이 대리석 바닥 위로 툭툭 떨어졌다. 간만에 맘에 드는 셔츠였는데… 숲색 눈이 짧게 쓴웃음을 삼켰다. 스타일 팀장이 자주 만나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일부러 콜렉션에서 빼다준 셔츠라고 했었다.
시판도 안 되는 물건이니 아마 한두 푼은 아니겠지? 그런 딴 생각을 잠시 했다. 어지러워 그랬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랬었다. 그대로 셔츠 안쪽을 파고 든 손이 판판한 가슴팍을 거침없이 쓸어내렸다. 아플만큼 꽉 움켜쥐는 그 감각이 괜한 생각들을 단번에 몰아냈다.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꽉 씹었다.

오늘 바쿠고는 이상하다. 분명히 평소와 달랐다.

입으론 갖은 소리를 다 했어도 바쿠고는 지금껏 결코 정도를 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러트를 겪고 있었으면서도 옷을 벗겨내고 제 것을 빨아주며 곳곳을 주물러오던 손길은 딱 즐기기 좋은 정도로만 난폭했었다. 그조차도 초심자란 말에 멈춰 섰던 남자다. 이럴 리가 없어. 커튼에 짓눌려진 미도리야의 고개가 바쿠고를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캇쨩, 이러지 말고 룸… 룸이라면 내가 잡아달라고 할 테니까… 읍,”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맥없이 턱이 잡히며 입술이 사납게 겹쳐왔다. 겹친 입술을 마주 열 틈도 없었다. 반쯤 벌어진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틈입해온 설육이 거침없이 미도리야의 입 속을 비집고 뒤엉켰다. 혀뿌리가 뽑힐 듯이 감겨오는 힘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튕긴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가슴팍을 크게 떠밀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동시에 느껴서도, 느낄 리도 없는 것이 강렬히 후각을 흔들었다. 이 냄새를 한 달 전에도 맡았었다. 곧 범람할 것 같은 강물처럼 깊은, 삭은 꿀처럼 끈끈히 흘러내리는, 그래서 차라리 온몸을 죄여오는 그물과도 같은.
러트다. 크게 열린 숲색 홍채가 옅게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도 안돼, 러트라니.

이미 지나갔잖아.
 

“흐웁, 읍, 흐… 웁,”
 

러트라고 인지한 것과 동시에 두 다리가 덜덜 떨었다. 힘이 사라져 버린 주먹이 바쿠고의 가슴팍에서 맥없이 미끄러졌고, 그 손을 잡아챈 바쿠고가 깍지를 얽으며 단단히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각도를 바꾼 입술이 조금 전보다 깊숙이 겹쳐왔다.
틈이 벌어질 때마다 잔뜩 달아오른 설육이 온 입안을 샅샅이 핥아 없앨 것처럼 뒤엉켰다. 각도를 틀며 연신 제 콧날에 비벼지는 바쿠고의 호흡이 잔뜩 달고 거칠었다. 그 호흡이 다른 날엔 반가웠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죽을 것 같아. 미도리야가 막힌 입술 안쪽으로 헐떡였다. 진짜 죽을 것 같아.


“캇쨩… 제발, 그만, 읍… 그만하라고, 진짜,!”


뻗어나간 손이 다시 겹쳐오는 입술을 가까스로 막았다. 순전히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바쿠고가 제 얼굴 절반을 덮은 미도리야의 손가락 틈으로 스르륵 눈을 들었다. 초점이 흐렸다. 저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 선홍색 눈이 낮게 웃었다.
 

“데쿠.”
 

맞붙은 손가락 틈으로 입술이 나른하게 미끄러졌다. 낮게 밀려나오는 호흡들이 뜨겁고 농밀했다. 이건… 안돼, 위험해. 미도리야가 제 입술을 꽉 악물었다. 페로몬이 짙어 지고 있었다. 숨이 막힐만큼.
 

“손 풀어.”
 

손가락에 붉은 혀가 뱀처럼 감겨왔다. 검지와 중지의 갈라진 틈을 츱 핥아 올린 바쿠고가 그 자리에 입술을 덮으며 깊게 빨았다.
 

“키스하게 해줘.”
“……”
“멍청아, 얼른.”


들어가고 싶다고. 손등에 떨어진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 안에. 만져진 자리들이 덜덜 떨렸다. 젖은 손가락에 비벼지는 오똑한 콧날에서 비져 나온 호흡이 잔뜩 달고 거칠었다. 저를 핥을 듯 뚫어보던 그 붉은 눈을 보았을 때부터 미도리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안돼.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냐, 이건.

바쿠고의 입술을 막고 있던 손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잔뜩 붉어진 선홍색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착하네.


“잘 했어, 멍청아.”
“……”
“그럼 벌려. 들어가게.”
 

그 달콤한 목소리에 기어이 마지막 나사가 날아갔다. 마지막 무게중심을 지키지 못한 젠가처럼 품 안으로 쏟아진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등에 팔을 두르며 매달리며 입술을 벌렸다. 기껏 멀어진 입술이 다시 겹치며 혀가 섞였다. 벌어진 셔츠를 파고든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가슴팍을 풀어헤치며 주무르고 돌기를 억세게 짓이기자 참지 못한 미도리야가 막힌 입 안쪽에서 기어코 헐떡였다.

어지럽게 한참을 뒤얽힌 입술이 가느다란 실을 남기며 떨어졌다. 턱을 타고 미끄러진 입술을 따라 미도리야가 턱을 젖혔다. 귓불 밑과 목덜미를 가림 없이 질근거릴 때마다 간단히 열이 올랐다. 잔뜩 달아오른 수트 팬츠 안쪽이 답답했다. 하고 싶어. 손가락이 미끄러지고 살갗이 주물러질 때마다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이대로 하고 싶어, 가지고 싶어. 흠뻑 젖은 숲색 눈이 헐떡였다.


“캇쨩…”
 

벌어진 셔츠를 잡아당기며 드러난 어깨죽지에 입술을 묻고 있던 바쿠고가 눈길만 들어 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바쿠고의 어깨를 타고, 탄탄한 가슴팍을 따라 미도리야의 손가락들이 앞을 향해 미끌어졌다. 바쿠고를 올려보는 숲색 눈의 빛이 잔뜩 탁했다.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개인이 아닌, 제 알파의 러트에 잔뜩 안달이 난 오메가가 벌써 불편하게 부푼 앞을 스르륵 쓸어내렸다.
 

“오늘은… 해줄 거야? 끝까지?”
 

열이 잔뜩 오른 선홍색 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걸 보고 있을 뿐인데도 척추 쪽이 찌릿했다. 등신새끼. 가볍게 입매를 비튼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뺨을 아플만큼 꽉 쥐었다.
 

“가지게 해주는 거야, 너를…?”


잠시 시선이 얽혔다. 무심코 입술이 닿을만큼 바싹 붙은 두 입술이 거칠어진 호흡을 몰아쉬며 서로를 뚫어보았다. 그러나 바쿠고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미도리야가 바랐던 것도,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미도리야의 둥근 이마에 달아오른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열기가 잔뜩 얽힌 붉은 눈이 사납게 속삭였다. 이건 씨발, 내 의지가 아니니까. 너랑 이딴 식으로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전화해. 사람 불러.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헉헉 호흡을 몰아내면서 달아오른 입술이 미도리야의 이마를 타고 눈가와 콧날을 어지럽게 문질렀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러트를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알파는 없다. 경험이 없어도 미도리야는 그 정도 상식쯤은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랑 하기 싫어하는 거야?

그 말이 혀 밑까지 치밀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하지만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콧날을 타고 떨어진 바쿠고의 입술이 미도리야의 입술에 부드럽게 겹쳤다 멀어졌다. 이마와 콧날보다는 조금 더 길게.


“이대로 해버리면 씨발, 내가 너무 좆같거든.”
“……”
“나를 용서 못할 거라고, 내가.”

 
무슨 말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것도 이젠 세상에도 소문이 다 난 사이에서 좆같을 건 뭔데? 허벅지에 바짝 닿은 바쿠고의 앞섶은 저조차도 알 수 있을만큼 잔뜩 달아 있었다. 순간 가슴에 치받친 설움이 페로몬으로 흐려져 있던 몽롱함을 미약하게 밀어냈다. 조금 전보다 더 흐트러진 호흡을 헉헉 밀어내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셔츠 밑을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행동과 말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안경새끼, 헉, 불러. 억제제, 들고 오라고 해.”
“대체 왜… 잠, 캇쨩, 그렇게 갑자기 앞을 쥐면… 으,ㅅ”
“나는, 씨발, 하. 자제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오늘은.”


팬츠 속을 쑤셔 들어온 손이 빳빳이 부푼 앞을 우악스럽게 주물러댔다. 아파, 캇쨩, 아파, 좀…! 숲색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난 러트 때는 이렇지 않았었다. 분명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러트를 할 때가 아닌데, 지금은. 생각한 순간 미도리야가 두 눈을 번쩍 열었다.

누군가 약을 썼다. 바쿠고 카츠키에게.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오메가들은 보다 거칠고 스릴 있는 섹스를 위해 일부러 알파가 러트를 겪을 때를 노려 관계를 가진다고. 하지만 히트사이클이 그렇듯 러트 역시 원할 때 겪는 것이 아니다. 오메가가 히트사이클을 겪으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알파도 영향을 받아 러트를 맞게 되지만, 이미 러트가 지났다면 반응하지 않는다. 바쿠고의 이 러트도 마찬가지다. 일어나지 않아야 정상이다. 지금 이 러트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런 경우를 위해 일부 오메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미도리야도 알고 있었다.

유도제를 썼다.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오메가의 난교파티라도 열리고 있으면 모를까, 올마이트가 공식적으로 주최하는 정부 파티다. 짐작이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경험 많은 오메가들하고도 친분을 잘 쌓아뒀어야 하는데. 생각에 쓰게 웃던 숲색 눈이 일순 크게 열렸다. 한참 가슴을 달게 빨고 있던 바쿠고가 젖은 입술을 혀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버릇처럼 숨이 막혔다.

아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제 목덜미를 바라보던 흐릿한 선홍색 눈을 똑똑히 봤다.


“캇쨩… 안돼. 절대 안돼. 목은 안돼.”
 

조금 전보다 빛이 흐려진 선홍색 눈이 비죽 웃었다.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야단났다. 완전히 러트에 사로 잡혔어.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꽉 씹었다. 서러움에 북받쳐 잠시 잊었던 페로몬이 다시 농밀하게 공기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바쿠고가 몸을 겹치며 흘러내린 미도리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시선과 그 입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깨달은 미도리야가 기겁처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안돼, 지금 이런 데서 각인을 해버리면 캇쨩이…!”
 

미도리야의 귀 밑으로 기울어온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끝났어. 미도리야가 체념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각인은 무섭지 않다. 어차피 결혼하고 싶었던 마음도, 특정한 상대도 없었다. 다른 알파와 사랑에 빠져 너와의 각인을 후회할 일도 없겠지. 난 어차피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불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쿠고를 향한 걱정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오메가에게 각인을 새기는 일은 불법이다. 잡혀갈 거야. 너를 퍽 마음에 들어 했던 파파조차 이 관계를 반대하며 나서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각인만큼은 피해야 한다. 미도리야가 페로몬에 취해 축 늘어져 있던 제 주먹을 가까스로 움켜쥐었다. 막아야했다. 어떻게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나는 아직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캇쨩.

 
“그만… 캇쨩, 그만!”

 
어깨를 잡은 양손이 발버둥을 치던 미도리야를 창문 위로 또 한 번 거칠게 떠밀었다. 등 뒤에서 커튼이, 유리창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번쯤 돌아볼만큼 요란한 소리에도 바쿠고는 멈추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기울어오는 얼굴을 가까스로 막아낸 미도리야의 손등에 힘줄이 곤두섰다. 하. 손바닥에 가로 막힌 반듯한 이마 아래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흐릿한 선홍색 눈이 또 한 번 미도리야를 뚫어보았다.

 
“그러니까 전화하랬지, 멍청아. 안경 새끼한테.”

 
바쿠고가 제 이마를 누르며 막고 있던 손목을 간단히 낚아채 미도리야의 얼굴 옆으로 찍어 눌렀다. 버둥거리는 손에 깍지를 단단히 얽어 다신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면서 입술이 곧장 목덜미로 기울었다. 오싹 소름이 끼친 미도리야의 살갗 위를 부드럽게 문지른 입술이 또 한 번 비틀렸다.


“억제제 가져 오라고. 날 멈추라고.”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 밀려나온 뜨거운 호흡이 예민해진 피부 위에 쏟아졌다. 벌어진 잇날이 살갗 위를 꾹 눌러왔다. 끝났어. 미도리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벌어진 잇날이 살갗 위를 꾹 눌러왔다.

그때였다.


“나도 씨발, 나를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안경 새끼 부르라고, 내가,”
“예, 안 그래도 그럴 작정입니다만.”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뒤에서 나타난 이이다가 바쿠고의 어깨에 주사제를 깊게 찔러 넣었다. 아픔에 눈살을 일그러뜨린 바쿠고가 그대로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미도리야가 제게 쓰러지는 바쿠고를 반사적으로 부축하듯 받쳐 안았지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 어깨로 기울어진 색 밝은 머리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미도리야는 고개를 들었다. 이이다를 바라보는 숲색 눈엔 웃음기가 없었다.

 
“이이다군.”


그 목소리도 역시 그랬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이 사람은 내 알파야. 진정제를 쓸 필요까진 없잖아.”
“아뇨, 도련님. 정확히는 진정 성분이 포함된 러트 억제제입니다.”
“알고 있어. 범죄자한테 쓰는 약을 쓰지 말란 뜻이었어.”
“그것도 아닙니다. 토도로키님의 감사한 제보 덕분에 테러리스트를 진정시켰으니까요.”
“테러라니, 이이다군! 그게 대체 무슨…”
“미도리야님. 미도리야님은 그냥 오메가가 아니라 이 세계를 통치하는 연합정부 수장의 후계자이자 하나 뿐인 아드님입니다.”
“……”
“그리고 방금 동의 없는 각인을 당할 뻔 하셨고요. 러트 중인 알파에게.”
“그건 사정이…!”

 
입술을 달싹이던 미도리야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이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도 동의 없는 각인은 중죄다. 게다가 그 상대가 하필이면 다른 누구도 아닌, 올마이트의 아들이라는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세계 정부의 유일한 후계자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니 정부보안법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 역시 일종의 테러다.

후. 숨을 가다듬은 미도리야가 의식을 잃고 제 몸에 기울어져 있는 바쿠고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담담히 떨어졌다.


“…누군가 러트 유도제를 썼어.”

 
안경을 밀어 올리던 이이다의 손이 멈췄다. 예?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얼굴을 향해 미도리야가 거듭 덧붙였다. 맞아, 러트 유도제.

 
“그랬으니 이미 지나간 러트가 왔겠지. 이게 정상적인 러트가 아니라는 건 이이다군도 잘 알고 있잖아. 캇쨩에게 억제제를 가져다 줬었으니까.”

 
이번엔 이이다 쪽에서 입을 다물었다. 이이다는 우직하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FM이었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면 정직하고 신속하게 인정한다. 버릇처럼 안경을 바로잡는 이이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당한 거군요.”
“응, 아마.”
“저 성격에 직접 썼을 리도 없을 테니까요.”
“맞아. 캇쨩은 러트 때도 나를 피했었어. 너에게 억제제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서까지.”
“……”
“찾아야겠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꼭 폭탄을 던지고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만이 테러는 아니다. 의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이다의 말마따나 자칫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이 일 역시 연합정부를 향한 테러다. 하마터면 바쿠고가 그 오해를 뒤집어 쓸 뻔 했었다.

평범한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선 그저 각인미수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미도리야는 그저 그런 평범한 오메가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고른 알파 역시 평범한 알파일 수는 없었다. 물론 자신이 올마이트의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미도리야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맹한 데쿠가 아닌, 올마이트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정치연구소의 수석 연구원다운 얼굴이 이번에도 거기 있었다.


“유도제는 난임 진단을 받은 정식 부부 사이에서만 병원을 통해 구매할 수 있어. 이렇게 쉽게 쓰일 약물이 아냐.”
“하지만 관계의 여흥을 위해 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부 오메가들 사이에서요.”
“맞아. 하지만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돼. 적어도 이런 비싼 약물을 쉽게 빼돌릴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겠지. 게다가 오늘 파티는 파파가 주최했어. 연합 정부의 이름을 걸고, 올마이트가. 그럼 표본군은 더 줄어드는 거야.”
“……”
“초대 명단을 봐야겠어.”
“……”
“하지만 그전에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이이다군… 캇쨩 키가 나보다 커서…”

 
숲색 눈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미도리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보다 체구가 큰 바쿠고를 부축하는 통에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아 비틀거렸고, 이이다가 달려와 미도리야를 도왔다. 고마워. 바쿠고의 오른쪽을 끌어안으며 부축한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반대쪽 팔을 어깨에 두르고 있던 이이다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아까도 진심이긴 했지만.

 
“이 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이다가 물었다. 어떻게 하냐니…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얼굴이었다.

 
“데려다줘야지.”
“어디로요.”
“집에…”
“도련님, 제 말 뜻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해도 도련님을 이런 장소에서 모욕 주려고 했던 사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친절을…!”
“이젠 억제제도 맞았잖아.”
“미도리야님.”
“괜찮아.”
“……”
“내 알파잖아. 아무리 가짜 연애라고 해도.”

 
내 눈으로 살펴보고, 내 손으로 직접 골랐어. 그런 상대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스쳐가는 다른 알파들과 똑같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보다 커서 힘들긴 하네. 자꾸만 제 몸에서 미끄러지는 바쿠고를 다시 똑바로 부축하면서 미도리야가 쓰게 웃었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이이다가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도리야는 유순한 성격이다. 하지만 한 번 고집을 세우기 시작하면 자신이나 올마이트는 물론이고 이 나라, 아니, 이 세계의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 그게… 조심해야할 건 내가 아니라 캇쨩일 것 같은데…”
“예?”
“아니, 흐. 이이다군 말이 맞아.”

아냐, 사실…

미도리야가 남은 손으로 제 목덜미를 은근히 더듬었다. 알파의 농밀한 페로몬이 완전히 가셔버렸는데도 그 자리만 여전히 뜨거웠다. 어느 아름답고도 잔인한 알파의 잇날이 박혔다 떨어졌던 그곳. 하마터면 영원히 그의 것으로 종속될 뻔 했던 그 자리. 그 사나운 숨결이 어지럽게 떨어졌던 그 목덜미 언저리.
사실 이대로 물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대로 네 이가 내 살갗을 꿰뚫길 바랐었다. 네 것이 되길 난 원했었어. 그렇다면 내 안의 이 이유 없는 불안도 가시지 않을까 해서. 너를 보면 괴로운 내 마음의 진동도 멈춰줄까 해서.

 아. 미도리야가 잔뜩 괴로워진 입술 끝을 꽉 씹었다. 큰일났어,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
“예?”
“진짜…”
“……”
“사랑일까, 이게? 진짜? 말도 안돼. 내가?!”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꽉 감긴 선홍색 두 눈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맹수처럼.

 

 

 

*

알파라고 모두 오메가와의 관계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오메가가 알파와의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이렇게 하는 거 처음이야? 자긴 그렇게 안 생겨서 의외로 보수적이구나?」


살면서 단 한 번도 섹스를 즐긴 적은 없다. 하물며 바쿠고에게 그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끔찍했다. 대연회장이, 엘리베이터가, 카펫이 깔린 복도와 스위트룸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래도 의식은 또렷했다. 아니, 옷깃이 스친 것만으로도 온몸의 혈관들이 쿵쾅거렸다. 제대로 작정하고 조합한 최음 마약을 복용한 것처럼.


「일찍 가면 안 되니까 묶어줄게. 옳지… 후후. 얼마나 잘난 새끼길래 마담이 그렇게까지 꽁꽁 숨기나 했더니, 아. 좋아. 진짜, 아. 너무 좋아.」


J는 진작부터 마담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순화해 말하자면 하드한 취향 탓에 잠자리 매너가 별로 좋지 않은 거고,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쾌감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존재였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막물가내로 지퍼를 끌어내리는 J가 끔찍했지만 의지와 달리 알파의 몸은 오메가의 몸에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날, 그때 결심했다. 오메가 새끼하곤 절대 돈 이외엔 섹스하지 않겠다고.


「3번을 뽑아줘도 죽질 않네? 저기 자기야, 나랑 나중에 따로 볼까? 응? 너희 마담은 고객이 히트 사이클일 때는 예약을 안 받아주잖아.」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역겨움이 수시로 치밀었었다. 그래도 구토는 할 수 없었다. 러트 유도제는 최음 마약과 비슷하다. 페로몬이 약해지는 대신 흥분은 올라가고, 몸이 통제를 잃어버리는 대신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전쟁 때는 러트 유도제를 자백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전장에선 선천적으로 신체가 발달한 알파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러트 유도제만한 것이 없었다. 의식은 또렷하고 몸은 통제할 수 없으니 알파들은 한 번 당했다 하면 조그만 자극에도 비밀을 술술 불었다.

다행히 J를 상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진 않았다. 우선 바쿠고에겐 숨길 것이 별로 없었다. 알파로 태어나 이딴 오메가들의 데이트메이트로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자신뿐일까. 그저 모든 게 엿 같았다. 이딴 약에 취해 멋대로 허리를 찍어대는 제 몸뚱아리도, 이 더러운 상황을 전부 생생하게 기억하는 제 머리도.

하지만 러트 유도제는 깰 때가 제일 기분이 더러웠다. 역시 마약처럼.


“……”


눈을 뜨자마자 바쿠고는 어떻게 집으로 멀쩡히 돌아왔는지에 대한 의구심보다 두통을 먼저 느꼈다. 머릿속엔 쇳덩어리가 든 것 같았고, 어디서 흠씬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유도제는 깰 때도 마약과 비슷했다. 극심한 편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 마치 몸살과 유사한 이 증상은 오늘 점심이 될 무렵까진 지속될 것이다. 금단증상이 없다는 점은 마약과 달랐지만.
그래도 망할 정신부터 차려야한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우득 씹었다. 일단 데쿠새끼한테 연락을 해야했다. 다 잊어버렸다면 좋았겠건만 유도제는 공교롭게도 몸의 통제를 상실시킬 뿐 정신은 외려 더 또렷해지는 각성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안경 녀석이 나타나 자신에게 뭔가를 주사하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또렷했다. 그게 문제다.

어제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를 뻔 했다. 것도 하필 딴 놈도 아니고 데쿠새끼한테. 하. 바쿠고가 입 끝을 밀며 헛웃었다. 웃는데도 혀끝이 썼다.


“안경새끼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야 되나.”


이이다가 적절한 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명 데쿠 녀석의 목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각인을 남기는 것은 징역도 각오해야하는 중범죄다. 강간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전과까지 달 뻔 했다. 씨발, 가뜩이나 인생도 거지같은데. 아니, 사실 딱히 처벌조항이 없었더라도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바쿠고는 자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쿠고의 인생에서 알파가 알파라는 생물학적 형질을 이용해 오메가를 휘두르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일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바로 그 알파로 태어나버린 탓이겠지만.

전화를 해야 한다. 사과에는 씨발, 소질이 좆도 없지만.

생각을 삼키며 바쿠고가 무거운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제 가슴팍에 얹어져 있던 뭔가가 툭 떨어졌다. 그게 누군가의 손이란 걸 알아차린 것과 동시에 또 한 번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번엔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대체 전화를 걸어서 무슨 소리부터 먼저 해야할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 새끼는 씨발, 팔자가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베개에 반쯤 파묻혀 있는 숲색 머리가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달게 잠들어 있었다. 남의 침대에 무단 침입한 주제에 여벌 티셔츠는 잘도 꺼내 입었다. 왼손은 자신 쪽에, 오른손에 핸드폰을 꽉 움켜쥐고서 이불은 저 혼자서 몽땅 가져가 다리에 감고 있었다.
어쩐지 춥더라니. 드로즈 뿐인 맨다리에 감긴 이불을 슥 내려다본 바쿠고가 미도리야 쪽으로 슥 몸을 기울였다.


“야, 잠벌레.”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에 녀석이 반사적으로 움찔 감긴 눈 사이를 좁혔다. 그래도 깨진 않았다. 이상하게 그 팔자 좋은 얼굴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바쿠고가 둥근 귓바퀴를 가볍게 매만졌다. 아침이라 낮은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귓가에서 탁하게 갈라졌다.


“내 이불까지 다 가져갔으면 니 체온으로 데워놔야지, 어디서 겁도 없이 잠들어.”
“흐으… 으응.”
“꼴에 잠꼬대는. 야, 데쿠.”
“응, 캇쨩…”
“일어나라고.”
“으응… 나, 어… 가츠동… 가츠동으로 할래…”


갈수록 가관이었다. 누가 봐도 잠꼬대다. 입에 침이나 닦고 깬 척 하든가. 저도 모르게 픽 입매를 밀다, 바쿠고는 황급히 눈을 좁히며 표정을 지워버렸다. 꿈쩍도 없이 제 쪽을 향해 누워 잠에 빠진 숲색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바쿠고의 손이 귀를 떠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뺨과 턱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덧그리는 것처럼.


“하여튼 신기한 새끼라고, 넌.”


둥근 콧망울을 지난 손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에선 여전히 채취가 없었다. 말을 하고 밝히지 않는다면 오메가인지 베타인지도 모를 녀석이다. 오메가 중에서도 열성이겠지. 빤하다. 페로몬도, 채취도 거의 느껴지지 않으니 알파로서 녀석에게 자극을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손이 간다. 자꾸 만지고 싶어진다. 자꾸만 움켜쥐고 싶다. 한 번 힘을 줘 잡으면 놔주기 싫었다. 무심코 네 그 곧은 목덜미에 이를 세워버리고 싶을만큼.


“오메가다운 매력이라곤 쥐좆만큼도 없고.”
“흐으, 응…”
“사람을 끝없이 속 터지게 하는데,”
“……”
“짜증이 안나.”
“……”
“그게 씨발, 제일 짜증나고.”


만일 이 녀석과 자신이 가짜 설정대로 진짜 소꿉친구였으면 어땠을까. 최악이었을 것이다. 수시로 구박하고 윽박지르고 소리를 질렀겠지. 녀석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다 속터지고 답답해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돈이라도 걸려 있으니 이만큼 상냥해질 수 있는 거겠지. 적어도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속도조절을 전혀 모르는 이 녀석의 불도저 같은 행동력을 받아주고 있는 것도, 어제 파티장에서 그 알파 배우 놈을 보고 열이 뻗쳤던 것도. 어쩌면 쉽게 자버리고 싶지 않은 것도.

하지만 그건 제 얘기다. 이 새끼는 왜 내게 이러는 걸까. 고용 관계의 갑이면서도 을인 자신에게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욕망을 감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태도와 무례에 대해 수시로 사과하는 녀석이다. 솔직히 일일이 사과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이 새끼만큼 순해빠진 게 대체 어디 있다고.

궁금하다. 동시에 더럽게 신경이 쓰인다. 이 새끼는 대체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야, 데쿠.”


미도리야의 벌어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바쿠고가 희미하게 입 끝을 밀었다. 이번엔 억지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너 나 좋아하냐?”
“……”
“아니라고 하지마.”


아니, 그냥… 아예 대답을 하지마. 말을 삼킨 바쿠고가 몸을 깊게 기울였다. 이마가 맞닿을만큼 바싹 다가온 선홍색 눈이 잠시 미도리야의 얼굴을 뚫어보았다. 지금 보니 눈만 더럽게 예쁜 게 아니라 속눈썹도 길었다. 하기야, 이것도 억울했다. 이 새끼는 눈 빼고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암만 봐도 못 생겼는데.”


바쿠고가 우득 볼 안쪽을 꽉 씹었다. 역시 억울해서.


“…이게 귀여워, 씨발.”


그러니까 이 정도 스킨십은 너도 좀 이해하라고. 우린 ‘애인’ 사이니까. 바쿠고의 오른손이 굽슬거리는 숲색 머리칼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손 안에 감기는 체온이 따뜻했다. 그대로 그 얼굴을 끌어당기며 바쿠고가 천천히 각도를 틀며 입술을 겹치던,
그때였다. 미도리야의 손 안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떨기 시작했다. 숲색 눈이 열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 헉, 이이다군, 나 지각이야!?! 늦었…”


번쩍 열린 숲색 눈이 부산스럽게 정신을 차리다 제 앞에 있던 바쿠고를 발견했다. 어… 더딘 의식으로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미도리야가 천천히 볼륨을 죽였다. 하필 타이밍은 이번에도 끝내줬고, 바쿠고는 손을 빼낼 때를 놓쳐버렸다. 한참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미도리야가 제 입술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는 얼굴을 향해 천천히 말을 우물거렸다. 어, 그니까…


“캇쨩 혹시 나한테 지금… 키스 하려던 거야?”
“……”
“…다시 잘까?”


이불을 가르고 날아온 바쿠고의 다리가 미도리야의 장딴지를 퍽, 걷어찼다.







#

키스라면 지금껏 수도 없이 했다. 삽입에 준하는 유사 행위도 한달동안 지겹도록 해댔을 것이다. 그래도 함께 보내는 아침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캇쨩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니…”


걷어차인 미도리야가 핸드폰을 확인하면서 욕실로 사라지던 동안 바쿠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뒤늦게 정리했다. 턱시도는 그 가격이 울고 갈만큼 형편없이 던져져 있었고, 바쿠고는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수시로 눌러 삼켰다. 하기야. 딱 봐도 살림 재능은 없는 새끼다. 여기까지 저를 끌고 와 어떻게든 옷을 갈아입혀 눕혀놓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다. 물론 저 혼자서 하진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건.

미도리야의 뒤를 이어 가볍게 몸을 씻으러 간 바쿠고가 샤워를 끝마치고 다이닝룸에 들어갈 때까지 미도리야는 계속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간단한 팬케이크를 구워 꿀에 절인 바나나와 버터를 얹고 구운 베이컨과 시금치를 곁들여 내놓은 후에야 미도리야는 냄새를 따라 홀린듯이 식탁에 앉았다. 그때만큼은 내내 붙잡고 있던 핸드폰도 쳐다보지 않았다.


“진짜… 캇쨩이 우리집 요리사보다 나은 것 같애.”


큼직하게 썰어낸 팬케이크와 베이컨과 시금치를 한 입에 쑤셔 넣으면서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주근깨가 앉은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그 얼굴이 도토리를 잔뜩 쑤셔 넣은 다람쥐처럼 보였다. 또 무심코 웃음이 터지는 걸 가까스로 참아낸 바쿠고가 하, 입 끝을 비틀었다. 이번에도 일부러 그랬다.


“그게 뭔 대단한 일이라고, 등신아.”
“으이아… 이아! 이아오…!”
“삼키고 말해. 식사예절 안 배웠냐? 올마이트 후계자란 새끼가.”


손이 또 한 번 멋대로 미도리야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혀를 쯧 걷어차면서도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시럽을 엄지로 무심히 문질러 닦아냈다. 숲색 눈이 잠시 크게 열렸다. 그러다 이내 울대를 꿀꺽 밀면서 흐 웃었다. 그 얼굴에 잠시 시선이 멎었다. 그러다 멋대로 입이 열렸다. 사실 이걸 제일 먼저 묻고 싶었다.


“…왜 안했어.”
“? 뭘?”
“신고.”
“신고? 뭘… 아.”


의미를 알아차린 숲색 눈이 흐 웃었다. 그냥… 우물거리며 미도리야가 팬케이크를 큼직하게 썰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캇쨩도 당한 거잖아. 피해자고. 캇쨩이 러트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 진 알고 있어. 그런 걸로 오메가를 억누를 생각을 했으면 러트 때 날 피하진 않았을 거잖아.”


약간 목이 멨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까지 할 작정일까.


“게다가 프라이빗한 룸도 아니었고. 정황상 캇쨩이 썼다기보단 당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지. 무엇보다 그럴 사람 아닌 걸 내가 잘 알고 있잖아. 나는 캇쨩을 믿으니까.”
“……”
“그래도 고마우면 키스해주면 되겠다, 흐.”
“……”
“아니, 지금 이 말은 그냥 농담…”


이미 늦었어, 등신아.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멋대로 의자를 밀고 일어난 바쿠고의 손이 숲색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미도리야가 포크를 놓쳐버린 것과 동시에 그대로 입술이 기울었다. 망설이던 입술이 열리면서 두 혀가 가볍게 뒤얽혔다. 키스는 길지 않았지만 깊었다. 입술을 떼어낸 바쿠고가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훔쳤다.


“그놈의 꿀, 더럽게 달아.”
“그러게, 흐. 맛있어서 계속 먹다보니… 헹굴까?”
“아니. 난 단 거 좋아해, 멍청아.”
“거짓말. 지난번에 레스토랑에서 디저트 다 남겼으면서,”


할말은 다 하는 그 입술이 건방져서 또 한 번 찍어 눌렀다. 이번엔 예상을 했던 모양인지 입술이 열리는 타이밍이 빨랐다. 보다 깊게 두 혀가 엉키며 자연스럽게 각도를 비틀고 눈을 감았다.

미도리야의 손이 바쿠고의 목을 끌어안고,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뒷목을 더듬으며 천천히 척추를 따라 흘러내렸다. 제 것임에 빤한 티셔츠는 녀석에겐 품이 컸다. 벌어진 틈을 따라 둥근 어깨를 매만지자 미도리야가 막힌 입술 안쪽으로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 올 때 식탁은 대리석으로 골랐어야 했는데. 거침없이 미도리야의 몸 위를 쓸어내려간 바쿠고의 손이 허리를 붙잡고 식탁 위에 앉히려던 그때였다.

식탁 위에서 뭔가가 드르륵 몸을 떨었다. 하. 입술을 떼어낸 바쿠고가 눈 사이를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저 망할 핸드폰.


“자꾸 기자들한테 연락이 와서… 미안, 캇쨩. 알잖아. 기자들은 본래 이런 일에 공사 구분이 없어서, 하하.”


측은하게 눈 끝을 떨어뜨린 미도리야가 떨고 있던 핸드폰을 주섬주섬 제 앞으로 끌어왔다. 받아도 되느냐고 묻는 듯한 눈길에 바쿠고는 몸을 돌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물어볼 자격이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무슨 일인데.”
“어? 아. 우리 결혼 때문에…”


하. 선홍색 눈이 솔직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다.


“이러니까 급하게 소개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미안. 그래도 알려진 이상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최대한 수습할게. 괜찮아. 어차피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괜찮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던 숲색 눈이 잠시 바쿠고를 향해 흐 웃었다. 진짜로. 거듭 덧붙이면서 다시 액정으로 되돌아간 미도리야의 얼굴에서 또 한 번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제도 저런 얼굴을 봤었다. 저가 아닌 데쿠가 아닌, 세상이 기억하는 올마이트 후계자의 얼굴이다. 세상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오메가 중의 오메가, 권력 중의 권력.
나는 저딴 얼굴 모른다고, 씨발. 속이 뒤틀렸다. 저 얼굴은 저가 아는 데쿠새끼가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통이 뒷머리를 지끈지끈 눌러댔다. 멋대로 입이 열린 건 순전히 그 탓이었다.


“무시하지마.”


액정을 두드리며 메시지들을 삭제하던 미도리야의 동작이 멈췄다. 놀란 듯한 눈길이 그대로 바쿠고를 향했다. 이번엔 바쿠고 쪽에서 웃지 않았다.


“대답해. 곧 결혼한다고.”
“……”
“그 잘난 소꿉친구를 놓치기 싫어서, 이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두른다고.”
“어… 응.”


버릇 같은 추임새를 우물거리면서 미도리야의 눈길이 액정 속으로 되돌아갔다. 메시지창에 조금 전에 들은 문장을 그대로 토닥토닥 두드려대다가 미도리야는 뒤늦게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상에. 숲색 눈이 쏟아질 것처럼 크게 열렸다. 방금, 지금…


“캇쨩, 지금…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랬어?!”


선홍색 눈이 슬쩍 눈길을 피했다. 응이라고 대답하기 싫어서 그랬다. 와. 미도리야가 입을 떡 벌렸다. 이럴 수가.


“아니, 어… 그럼 기자가 문제가 아니라 변호사를 불러야…! 아니, 웨딩 플래너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헉, 아니지, 누구부터 불러야… 힉!?”
“야, 이 등신아, 조심 안 하지!?!”


급하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숲색 머리가 그대로 뒤로 벌러덩자빠졌다. 바쿠고가 급하게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야야, 내 엉치뼈…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미도리야가 인상을 잔뜩 썼다. 그래도 숲색 눈은 웃고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래서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이 결혼은 1년만 유지될 것이라고.


“아냐. 알 것 같아. 누구한테 제일 먼저 전화하면 되는지.”


어차피 이 관계는 정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억지로 러트를 끌어낸 유도제와 비슷한 것이다. 너는 돈을 냈고, 나는 그 돈에 팔렸다. 그렇다면 나는 그만큼의 의무를 다하고 너를 최대한 이용한 후에 챙길 것들만 챙겨 떠나면 되겠지.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다시 핸드폰을 열고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옆눈으로만 흘깃 바라보면서 바쿠고는 생각했다. 1년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그보다 더 길어지면 내가 너를 놔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집착하는 건 질색이다. 평생을 오메가에게 의존해 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애초에 바쿠고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엔 취미가 없었다. 이 시나리오는 이렇게 흘러가야한다. 1년간 완벽한 관계를 연기한 후에 후회 없이 헤어지고 갈라선다. 이 새끼는 이 새끼대로, 나는 나대로. 미도리야의 등 뒤에서 바쿠고가 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핸드폰을 잡고 있던 숲색 눈이 흠뻑 웃었다. 그 얼굴이 오늘따라 어쩐지 마음에 박혔다. 죄책감처럼.


“아, 닥터? 죄송해요. 어제는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죠, 저희. 점심요? 아, 잘됐다. 마침 제가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갈까 싶었거든요. 물론 저희 집 주치의도 좋은 분이시지만 오메가의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선 닥터만한 전문가가 없으시잖아요. …아,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파트너랑 같이 오래. 갑자기 이쪽을 홱 쳐다본 미도리야가 소리를 죽여 그 한 마디를 남겨놓곤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전의 자책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설명도 없이 뭔 소리지, 저건 또. 저 미도리야 이즈쿠란 이름의 데쿠가 얼마나 사고를 잘 치고 다니는지는 지난 한달동안 수도 없이 겪어봤다. 선홍색 눈이 예리하게 좁아지던 그 순간이었다.


“네, 내일 봬요.”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닥터 J."


순간 뭔가가 뒷목을 크게 쳤다. 선득할만큼, 악몽처럼.





*

미도리야가 형질클리닉에 연락을 했던 건 관례 때문이었다.

오메가들, 그중에서도 0.1프로에 속한다는 상류층 오메가들은 알파와 결혼을 할 때 흔히 변호사를 입회시켜 계약서를 작성한다. 흔히 혼인계약서라 부른다.
적게는 서너 쪽, 많게는 100쪽도 가볍게 넘어가는 이 계약서에는 대체적으로 오메가의 권익을 보호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었다. 아무리 이런 세상이 되었어도 오메가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하려는 알파들이 아직 도처에 존재하는 탓이다. 결혼상대였던 알파가 결혼 직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이혼을 요구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챙겼다더라, 상속자의 생물학적 아버지란 이유로 아이를 이용해 거액의 유산을 가로챘다더라 하는 사례는 실제로도 종종 있었다.

이렇다보니 상류층 오메가들은 결혼할 때 흔히 계약서를 썼다. 결혼 준비 절차부터 혹시 모를 이혼에 대한 사항까지 세세하게 적는 이 계약서는 이젠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선 관례가 되어 있었다. 미도리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우리 쪽 계약서에는 형질 검진을 필수로 첨부하게 되어 있거든.”


미도리야가 변함없이 옆자리에 앉은 바쿠고를 바라보며 흐, 웃었다.


“내가 스무살이 됐을 때 파파의 개인 변호사가 작성해준 거야. 법원에서 공증까지 이미 받아둔 상태라 새로 쓸 시간은 없어서...”


혼인계약서는 상대가 없어도 미리 작성해두는 것이 역시 관례다. 법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법원에서 공증을 받는 과정이 꽤 복잡하고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류층 오메가들은 당장 결혼 계획이 없어도 미리미리 혼인계약서를 작성해두고 일찌감치 공증을 받아둔다. 대부분 집안에서 변호사에게 등을 떠밀려 작성한다. 미도리야 역시 그랬다. 결혼상대가 될 알파는 그저 변호사의 입회 하에 미리 작성된 서류를 검토해보고 서명만 하면 된다.


“아,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혼인계약서엔 별로 까다로운 내용은 없어! 캇쨩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냥 기본적인 것들이야. 이를테면 불륜을 하면 안된다든가, 50만 골드를 위자료로 지불해야 한다든가, 지불할 수 없다면 거기를 잘라버리... 아니, 이건 수정 전에 있던 항목이야, 하하. 신경쓰지 않아도 돼.”


이쪽을 바라보는 선홍색 눈이 일순 울컥 일그러졌다. 이미 신경을 쓰는 얼굴이었다.
어쨌건. 미도리야가 흠흠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대화를 돌려놓았다.


“입회하려면 형질에 대한 진단서를 첨부해야해.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우리집 주치의한테 맡길 수는 없어서... 불공평하잖아.”


그 때문이었다. 굳이 이렇게 월요일 점심 시간을 이용해 함께 형질 클리닉에 향하고 있는 것도.


“미안. 불편한 건 알지만 캇쨩, 그래도 우리집 절차가 그래서...”
“됐어. 그만 떠들어, 멍청아.”


무심히 건너온 바쿠고의 손이 숲색 머리칼을 툭 헤집고 멀어졌다. 낮은 목소리가 담담히 덧붙였다. 별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 정도쯤은 다 알고 있으니까.”


의외의 반응이었다. 불편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도리야가 말없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리 관례상 절차라고는 하나 정서적으로는 얼마든지 불편할 수 있는 문제다. 그저 둘이 마음에 들어 결혼하면 될 일인데 상대의 형질이 정확히 알파가 맞고 오메가가 맞는지, 2세를 가지기에 문제가 없을만큼 건강한지 일일이 따지고 들면 의심을 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바쿠고는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이 상황이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아니. 내색하지 않는 걸까? 뭐가 되었건 이것조차 보통 알파들의 태도는 아니었다. 미도리야의 입매가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

단언컨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야. 이렇게 완벽한 알파.

어제도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집에 혼자 보내지 않았다. 아침도 잘 얻어 먹었고, 캇쨩이 괜찮아진 것도 확인했으니 기사를 불러야겠다던 미도리야 앞에서 바쿠고는 말없이 옷부터 챙겨 입었다.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손목을 잡혀 지하주차장에 끌려 내려온 후에야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뭘 할 생각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안 타냐? 새붉은 마세라티의 운전석을 열어 젖힌 바쿠고가 조수석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대로 조수석에 앉아 집까지 오는동안 무슨 얘길 했는지도 모르겠다. 운전대를 잡은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상상했던 것보다 딱 10배는 더 멋있었다.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오고, 집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아쉬움이 커졌다. 정말 내리기 싫었다. 그때는.
앞으로도 기사님은 그냥 부르지 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수석으로 건너온 손이 가볍게 미도리야의 벨트를 풀어냈다. 그리고 가볍게 뺨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 탓에 미도리야는 벌써 집에 다 왔다는 사실도 그만 새카맣게 잊을 뻔 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정말 큰일났다. 운전까지 잘하자면 어쩌자는 걸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진짜로. 거듭 덧붙인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손을 흘끔바라보다 황급히 창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다 어제 밤에도 잠을 설쳤었다. 몸이 달아서.


“진짜.”


미도리야가 홧홧해진 귀를 양손으로 꼭 눌렀다. 그래도 흐물흐물 밀려올라가는 입꼬리까지는 다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에.


“결혼이라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바쿠고가 픽 입매를 밀었다. 등신 새끼.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들떠 있었다.
바쿠고의 표정을 읽지 못했던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

J 클리닉은 알파와 오메가, 그중에서도 VIP만 상대하는 대표적인 형질 센터였다.

당연히 예약은 기본이다. 100퍼센트 회원제로 운영되는 J클리닉은 일단 한 번 진료 예약을 하면 무조건 프라이빗한 룸으로 안내되며, 진료실까지 가는동안 다른 손님과 마주칠 걱정도 없었다. 상담 및 진료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다. 때문에 집안의 주치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오메가들이 흔히 이곳을 이용했다.

물론 미도리야가 하필 이곳을 찾아온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 클리닉 원장님이 우리집 주치의의 인턴이었거든. 개원하신 이후로는 일부러도 종종 왔었어. 그냥 가벼운 건강검진만 받고 갔었지만.”


배당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곧장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예약을 확인했다. 직원을 따라 진료실로 향하는동안에도 미도리야는 연신 바쿠고에게 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그만큼 들떠 있었다. 바쿠고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벼운 추임새로만 말을 받았다.


“형질 검사를 받으러 오는 건 나도 처음이라서, 흐. 조금 떨리네.”


결과에 대해선 어차피 예측하고 있다. 여기라고 해서 주치의가 내린 진단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임신이 어려운 열성 오메가. 그럼에도 자꾸 들뜨는 것도, 주책 없이 가슴이 뛰는 것도 이게 결혼을 전제로 한 진료라 그렇다.
이쪽입니다. 복도 끝에 있는 진료실로 안내해준 직원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마주 인사하며 직원을 보낸 미도리야가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갈까? 미도리야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바쿠고가 먼저 한 걸음을 성큼 떼며 진료실 문을 열었다.

설렐 수 있었던 건 딱 거기까지였다.


“하.”


안을 들여다본 바쿠고의 얼굴이 사나웠다. 잇새로 터지는 목소리가 유독 낮았다.


“씨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 뭘?”
“...아니. 혼잣말.”


말을 삼킨 바쿠고가 대꾸 없이 진료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탓에 미도리야는 되물어볼 기회를 놓쳐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기다리고 있던 연보라색 머리의 의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얀 가운에는 그의 이니셜이 단정하게 박혀 있었다. J.


“설마 미도리야님께서 저희 클리닉에 형질 검진을 의뢰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아,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약혼 축하드립니다.”


J는 인상만큼 이 업계에서 평판이 좋은 의사였다. 제약회사를 경영중인 집안을 잇는 대신 유럽지구로 유학을 떠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미도리야의 주치의 밑에서 인턴을 끝마치자마자 곧장 자기 클리닉을 개원했다. 이만한 시설의 클리닉을 개원할 수 있었던 건 집안의 투자가 있었던 덕분이다. 허나 J가 금수저임을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료를 하는 J의 태도는 늘 정중하고 깔끔했다.
가볍게 입끝을 밀어올리며 미도리야가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았다. 복도를 걸어오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던 오메가의 얼굴은 이번에도 거기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파티날 본의 아니게 시선을 좀 끌었죠. 닥터도 아시겠지만 저희 아버지가 워낙 이벤트를 좋아하셔서요.”
“그만한 추진력이 있는 분이니 연합 정부도 문제 없이 이끌어가시는 것 아니겠어요? 멋진 분이시죠. 제게 그런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어떤 일에든지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거예요. 자식에게 격려와 신뢰보다 좋은 약은 없죠. 그런데 확실히,”


J의 눈길이 바쿠고를 향했다. 얇은 입매에 우아한 미소가 걸렸다.


“자랑할만하네요. 이 정도로 눈길을 끄는 알파라면.”
“...”
“저희 초면이죠? 인사가 늦었네요. J라고 불러주세요.”


미도리야와 악수했던 손이 바쿠고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바쿠고는 미도리야처럼 그 손을 마주잡지 않았다. 어머나. J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이 이상한 공기에 대해서.


“얼굴값도 하시고.”
“아뇨. 캇쨩, 아니, 제 애인이 낯을 가려서요.”


미도리야가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했다. 미도리야의 손에 끌려 자리에 앉는동안 바쿠고는 인사를 하는 법도,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바쿠고의 태도를 읽지 못할만큼 둔한 성격은 아니다. 숲색 눈이 잠시 말없이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었잖아.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이보다 더 무례한 알파분들도 많이 뵀거든요. 다들 결혼이라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긴장하게 되니까요. 하물며 오메가 의사한테 형질 진료를 받는 게 달가울 리도 없죠.”


오히려 J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기야. 알파에게는 얼마든지 불편할 수 있는 절차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이해한다고 그랬으면서, 그 정도쯤은 다 알고 있다고 그랬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일단 오늘 검사에 대해 간단히 안내해드릴게요. 검사는 어렵지 않습니다. 두 분의 생식 세포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명기된 형질이 확실한지, 우성이고 열성인지를 전반적으로 체크할 거예요. 결과는 오늘 중에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미도리야님께서 예약을 해주셨으니 그 편으로 전달해드리도록 할 거구요. 검사는 한 번이면 됩니다. 제가 두 분께 채집을 위한 도구를 하나씩 드릴 겁니다. 어렵지는 않아요.”


아니면 혹시 내가 말실수를 했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미도리야의 머리는 복잡했다. 너무 들떠서 실언을 했던 건 아닌지, 때문에 캇쨩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놓고도 눈치를 못 챘던 건 아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그 탓에 미도리야도 J의 설명을 반쯤은 흘려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든 건 그 다음 말 때문이었다.


“사정하시면 됩니다.”


그렇구나. 사정. ...어?
둥그렇게 열린 숲색 눈이 J를 향했다. 설마 저 사정은 혹시, 그 사정일까요?


“시간은 30분 드립니다. 저기 보이는 저 룸에서 하시면 돼요. 발기를 도와드릴 도구라면 얼마든지 준비 되어 있으니 맘껏 쓰셔도 상관 없습니다. 방음도 완벽하구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건 저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만.“


하하...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 사정 맞구나.

J가 곧장 서랍을 열어 은박으로 포장된 물건 두 개를 꺼내놓았다. 누가 봐도 콘돔이다. 각각 알파용, 오메가용이라고 적힌 콘돔을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눈앞으로 밀어주며 J가 말했다.


“삽입은 안됩니다. 블로잡도 가급적 삼가주시구요. 하시는 도중에 많이들 삼키시는 것 같아서요.”
”...”
“꼭 가득 채워서 들고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꼭 깨물었다. 하필 분위기가 이럴 때. J가 여전히 말이 없던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잊었다는 듯 덧붙였다. 이번에는 미도리야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아. 그 전에 알파분은 잠시 따로 저를 좀 보실까요?”
“...”
“여기는 오메가 전용 클리닉이라 알파분들은 필히 작성해주셔야 하는 서류가 있거든요.”


그때는 미도리야도 똑똑히 봤다. J를 올려보는 바쿠고의 눈길이 사나웠다.









*

진료실에 딸려있던 프라이빗룸은 들었던대로 없는 것이 없었다. 의료 시설치고는 쿠션감이 지나치게 좋아보이는 퀸사이즈의 라텍스 침대, 북커버를 한번씩 덧씌운 도색 서적, 불순한 라벨들이 붙어있는 보관함까지.

호기심에 이끌려 <Super Large>라는 라벨이 붙은 보관함을 열어봤던 미도리야는 그 안에 들어있는 딜도들을 보고 황급히 놀라 문을 닫았다.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냥 라지도 아니고 수퍼라지가 붙어 있나 했더니... 그건 문자 그대로 흉기였다. 크기부터 생김새와 굵기까지 모두.


“그러고보니 캇쨩이 딱 저만했던 것 같은...”


우물거리던 미도리야가 볼륨을 줄였다. J에게 붙잡힌 바쿠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10분이 지나 있었다.


“서류 작성이 길어지나.”


그렇다면 더욱 더 미안해진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알파에게는 충분히 불편한 상황이다. 그런데 오메가 전용 클리닉이라서 따로 서류까지 작성해야 한다니, 이런 건 차별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방어했어야 했는데. 나라도 나서서 이럴 필요 없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 진짜 안되겠어.”


결국 미도리야가 벌떡 일어났다. 이건 항의를 해야한다. 혼자 멋대로 열린 보관함을 다시 꽉 닫고 미도리야는 성큼성큼 문쪽으로 걸음을 뗐다. 허나 그 문을 열 필요는 없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힉. 비명을 삼킨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진짜 놀랐다.


“캇쨩, 갑자기 그렇게 문을 열면...”


놀라잖아, 라는 뒷말을 삼켜버린 건 하필 바쿠고의 얼굴을 봐버린 탓이다. 서류를 작성할 때보다 바쿠고의 얼굴은 더 어두웠다. 아니, 화가 난 거다. 잔뜩 불쾌하게 좁아진 선홍색 눈이 어정쩡하게 서있던 미도리야를 뚫어보았다. 그 얼굴에도 미도리야는 미안했다.


“괜찮아?”


미도리야가 물었다. 걱정이 됐다. 이러지 말 걸 그랬다. 절차 같은 건 사실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대답 대신 바쿠고는 뒤로 손을 뻗어 열려있던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삽시간에 걸음을 좁힌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허리를 감아왔다.


“?! 캇쨩, 잠, 잠깐, 잠깐!”


막아설 틈도, 멈춰 세울 시간도 없었다. 뼈대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힘껏 옭아온 팔이 무게를 실으며 미도리야를 침대 위로 떠밀었다. 그대로 허리를 타고 올라온 바쿠고가 거침없이 미도리야의 셔츠를 밀어 젖히며 혁대를 잡아 뽑았다.
설마 또 러트가 왔나? 하지만 그것치곤 제 몸이 멀쩡했다. 뒤를 적시는 습기도, 온몸이 달아 없어질 것 같은 압도감도 없었다. 허공에도, 바쿠고에게서도 러트 때마다 느낄 수 있는 페로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맨정신이다. 그럼에도 붉은 두 눈이 유난히도 선명히 타올랐다. 그 점이 미도리야의 등골을 더욱 오싹하게 했다.


“캇쨩, 잠깐, 콘돔... 콘돔부터,”


그대로 몸이 침대 쪽으로 젖혀졌다. 시트에 반쯤 파묻힌 미도리야의 얼굴을 짓누르며 바쿠고는 남은 손으로 미도리야의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버둥거리는 두 무릎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넣으며 능숙하게 벌린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주머니에서 밀려나온 콘돔을 집어 들었다. 찌익, 포장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을 땐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그 콘돔은 바쿠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잠... 캇쨩, 잠깐, 차가워, 차갑다니깐, 읏,!”


다리 사이를 파고든 손이 끝에서부터 낯선 이물감을 덮어 씌웠다. 미끄럽고 축축한 감촉이 문질러질 때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콘돔이 차가운 건지, 내 몸이 벌써 이렇게 달아오른 건지. 모르겠다. 이유를 짚을 틈도 없이 그대로 끝까지 콘돔이 덮였다. 잠시 바쿠고의 손이 멀어진 틈을 타 미도리야는 치밀어 오른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갑작스러운 러트가 닥쳐왔던 그날처럼 무섭다거나 혼란스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서러웠다. 눈물이 날만큼.


“캇쨩.”


헉헉 밭은 호흡을 몰아내며 물기를 띤 숲색 눈이 바쿠고의 얼굴을 돌아봤다. 아니, 사실 노려본 거다. 지금은 그랬다. 화가 나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해?”
“...”
“이런 체위는 불법이야.”
“어. 불법이지.”


하. 입끝을 비튼 바쿠고가 남아있던 콘돔의 포장지를 잇날로 가볍게 뜯어냈다. 그리고 능숙하게 손을 놀리며 색이 밝은 머리칼이 미도리야의 얼굴 쪽으로 기울었다.


“신고하든가.”


유난히 낮아진 목소리가 서늘하게 속삭였다. 후 밀려나온 숨결이 어지러울만큼 뜨거웠다. 주근깨가 흩어져있던 뺨에 가볍게 잇날을 세우며 바쿠고가 덧붙였다. 그 목소리조차 평소보다 낮았다.


“어차피 알파는 뭘 해도 쓰레기거든.”
“그런 소리를 왜,”


뺨을 떠난 입술이 그대로 미도리야의 입술을 덮었다. 숨을 쉴 틈도 없이 밀려 들어온 살덩이가 달아오른 구내를 어지럽게 헤집었다. 억울했다. 내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냐. 이유를 알고 싶은 것뿐이잖아. 하지만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턱을 잡혔다. 그대로 바쿠고는 몇 번이고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달아나고 달아나고 또 달아나도.

본격적으로 허리가 맞붙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든 바쿠고의 손이 격렬히 움직였다. 옆을 향해 돌아간 미도리야의 입술에서 쉼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기분, 이 서러움, 이 감각. 무엇보다 너, 너라는 알파.


“하아, 하.. 캇쨩, 캇.. 하ㅇ,!”


바쿠고가 능숙하게 손을 놀릴 때마다 젖은 물소리가 찌걱찌걱 터져 나왔다. 귓가로 바짝 붙은 입술이 이따금씩 귓불을 씹어올 때마다 미도리야는 행여 목이라도 물릴까 겁이 났다. 이상하게 그때마다 허리 아래는 참을 수도 없이 저릿거렸다. 기어이 바쿠고의 손 안에 스스로 허리를 비비면서, 바쿠고의 것에 제 것을 문지르며 미도리야는 수시로 헐떡였다.


“써. 엿 같은 혼인계약서.”


이미 잇자국이 벌겋게 남은 귓불을 질근거리며 바쿠고가 말했다.


“딱 1년짜리로.”


그 정도면 바라는대로 내 씨는 씨발, 줄 수 있을 테니까. 종마새끼처럼. 낮은 호흡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 말에 미도리야는 숨이 막혔다. 가슴이 괴로웠다.


“이게 싫으면 계약 파기하고 다른 알파 찾아보든가.”


그 말엔 웃음이 나왔다. 하하, 진짜. 숲색 눈에 고여있던 것들이 기어이 뺨을 타고 뚝 흘러 떨어졌다. 캇쨩.


“그 말은 좀, 쓰레기 같았어.”


하. 바쿠고가 낮게 웃었다.





*

그날 저녁, 검진 결과가 도착했다. 우성 알파, 열성 오메가. 건강 상태 양호.
임신 가능성은 0이었다.









*


그날, 바쿠고가 저지른 첫번째 실수는 이 지점이었다. J의 진료실에 남았던 것.

물론 J라고 해서 처음부터 무작정 달려 들었던 것은 아니다. 토요일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탐나는 알파에게 서슴없이 러트 억제제를 찔러넣는 파렴치라 한들, 자신의 직장에서 노골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염치는 없었다. 미도리야가 나가고도 J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동의서를 내밀며 그저 어디어디에 서명을 하면 된다는 안내를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서명할 항목이 많으니까 꼼꼼히 살펴보세요. 알파가, 그것도 혼전에 오메가와 함께 형질 검사를 받으려면 제약이 많거든요. 법이 그래서, 후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 사회에서 알파로 태어나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빽빽하게 적혀 있던 약관들은 거의 읽지도 않았다. 그저 얼른 서명을 끝내고 이 엿 같은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그 탓에 바쿠고는 어느 틈엔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J의 시선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게 두 번째 실수였다. 이 망상증 변태 새끼에게 일말의 여지를 줘버린 것.


“그날, 좋았어?”


J가 완전히 달라진 말투로 말을 걸어왔을 때, 동의서는 세 장이 남아 있었다. 미도리야가 있을 때와 전혀 달랐다. 존대를 쓰지 않은 말투가 나긋나긋했다. 속내가 빤히 읽혔다. 바쿠고는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 둘 뿐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씹지마, 자기야. 어차피 서명 다할 때까진 나랑 둘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 얘기나 해봐. 그날 어땠어? 저 새끼가 아무리 멍청한 오메가여도 러트까지 발라서 주는 알파를 그냥 넘기진 않았을 거 아냐. 어땠어? 재미 좋았어?”
“……”
“쟨 섹스할 때 어때? 잘 빨아? 오럴도 못하게 생겼는데, 아하하. 아, 설마 너 같이 잘난 딜도가 있는데 억제제 먹는 등신짓 하는 건 아니지?”


게다가 하필 미도리야 얘기였다. 거기서 바쿠고는 연달아 실책을 범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를 끝까지 무시하지 못한 것. 그게 세 번째 실수였다.


“어디서 씨발, 개새끼가 자꾸 짖는데.”


사납게 좁아진 선홍색 눈이 J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말투가 저가 느끼기에도 별로 다정하진 않았다.


“의사란 새끼가 대가리 안 도냐? 한번만 더 그 새끼 이름 입에 올리면 죽인다고 했지, 내가.”
“맞아. 나도 그랬지, 자기야. 자기는 욕할 때 제일 섹시하다고. 그래서 자꾸 빡치게 만들고 싶다고.”
“……”
“짜증나. 마담이 제일 아끼던 에이스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
“베타만도 못한 저딴 오메가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정신을 못차릴까, 이 잘난 알파는?”


J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긋나긋 걸려있던 웃음기는 이제 그 얼굴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게 이 새끼의 본성이다. 바쿠고는 눈앞에 있는 이 오메가의 밑바닥을 이미 겪어봤다. 눈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치밀었다. 엿같네, 씨발. 참지 못한 욕이 잇새를 비집었다.


"정신 못 차리는 건 니 쥐좆만도 못한 좆이겠지, 씨발."
"그래? 난 저 새끼만 특별취급 해주는 줄 알았는데. 자기 원래 오메가 싫어하잖아. 오메가는 다 똑같다며?"
"어, 너같이 버릇 더러운 오메가 새끼 때문에."
"근데 미도리야 이즈쿠랑은 결혼한다고 형질 검사까지 받으러 오고? 돈이 좋긴 좋아. 아, 이 좆을 내가 샀어야 했는데."


정말 주먹이 나갈 뻔 했었다. 그래도 무시해야한다. 이 새끼 수법이다. 미친 매저 새끼. 진짜 주먹질이라도 해대면 지 앞을 세우곤 줄줄 울겠지. 존나 역겹다. 눈살을 울컥 구긴 바쿠고가 남은 페이지를 거칠게 잡아 넘겼다. 하지만 J는 바쿠고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근데. 걔도 그렇대?"


서명을 하던 볼펜이 우뚝 멈췄다.


"미도리야 이즈쿠도 인생에 알파가 자기 뿐이래? 설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가늘어진 J의 눈이 뱀처럼 반짝였다. 명백한 악의가 그 눈 안에서 이글거렸다.


“올마이트의 후계자야. 저 새끼 인생에 너만한 몸, 너만한 물건 가진 알파가 정말 너밖에 없을 것 같아? 전혀. 쟤는 우리 같은 오메가하고도 급이 달라. 지금은 좋아하지? 미쳐 죽지? 그래, 자기 그 짓 진짜 잘하잖아. 근데 어차피 질려.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먹으면 물리거든.”
“……”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야, 자기는 딱 나 정도야. 딱 나같은 오메가.”


멋대로 의자가 밀렸다. 통제 없이 뻗어나간 손이 J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래도 J는 여유로웠다. 어이없어, 아하하. 얇은 입매가 조소처럼 비틀렸다.


"이래도 걔가 다른 오메가랑 똑같다고? 정신 차려, 바쿠고 카츠키."


그 말에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그랬다. 이딴 새끼한테 정곡을 찔려서.


"너, 이미 정신 나갔어. 저딴 오메가한테 미쳐서."
"그래, 씨발 새끼야. 어디 한 번…"
“한 번 해보라고 했었지? 맞아. 그래서 해보려구. 난 이렇게 끝내주는 딜도를 그딴 새끼한테 뺏긴 게 짜증나서 잠도 안 오거든. 넌 그런 고귀한 자리는 안 어울려. 이 정도가 딱 네 위치야. 오메가들 꼴리면 황송하게 약처먹고 그 잘난 물건 세워서 딜도 대신 비벼주는 거.”
“……”
“자기도 미도리야한테 딱 그 정도야. 사랑? 그런 거 따지는 오메가가 있어? 오메가한테 알파는 그냥 딜도야. 너는 그중에서도 상판 좀 반반해서 섹스할 맛 나는 딜도.”
“……”
“서명 다 하셨으면 그만 역할에나 충실하러 가시죠, 미도리야님의 약혼자씨.”


J가 멱살을 잡고 있던 팔을 가볍게 떨쳐냈다. 기세 좋게 잡은 것에 비해 손은 쉽게 풀어졌다. J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 면상이라도 갈겼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하는 것도 역시나 그 망할 이름 넉자 때문이다. 미도리야 이즈쿠.여기서 이런 새끼 상판을 뭉개봐야 결국 구설수에 오르는 건 데쿠새끼다.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이름 넉 자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지난 토요일에도, 일요일 아침에도 똑똑히 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올마이트의 후계자다. 여기서 J의 얼굴을 갈긴다 한들 기사에는 어차피 이렇게 나갈 것이다. 미도리야의 약혼자, 형질 클리닉에서 진료 도중 원장 폭행.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다. 피가 몰릴만큼 꽉 입술을 짓씹은 바쿠고가 서명이 끝난 서류를 그대로 책상에 내던졌다. 거칠기는. 돌아서는 바쿠고를 보며 J가 히죽거렸다.  인사 한 번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던 바쿠고의 등에 또 한 마디가 담담히 날아와 꽂혔다.

근데.


“자기넨 이래놓고 임신도 안 되면 어쩔 거야? 헤어지나?”
“……”
“그것도 재밌겠네.”


기분이 이미 너무 더러웠다. 때문에 그 말을 그때 좀 더 새겨 듣지 못했다. 바쿠고의 네 번째 실수는 그거였다.










하지만 가장 큰 실수는 단연코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하, 씨발."


프라이빗룸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감정은 버틸 수 있는 수위를 넘어 있었다.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던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았을 땐 다른 감각이 선을 넘었다. 어지러웠다. 안고 싶다. 만지고 싶다. 이보다 더, 험하게 다루고 싶었다. 품에 안겨 자신을 올려다보던 숲색 눈이 잔뜩 떨고 있었다. 거기서 자제심의 마지막 나사가 날아갔다.

아니. 그딴 게 아니지, 바쿠고 이 개같은 새끼야.
처음부터 이 새끼한테 이러고 싶었잖아.

방심하다 J에게 러트 유도제를 맞았던 그날, 안경 녀석이 억제제를 쓰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가볍게 선을 넘었겠지. 녀석을 위한 다정하고 상냥한 섹스는 분명 아니었을 거다. 경매장에서 저를 보며 넋을 놓던 그 멍청한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이런 충동은 수도 없이 느꼈었다. 맨정신인데도 그랬었다. 자제하지를 못했다. 기분이 더러워서.

울리고 싶지 않다. 동시에 울리고 싶다.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함부로 취하고 싶었다. 네가 내 이름을 더듬으며 울고 빌다 마침내 두 다리를 스스로 모을 수도 없을만큼 내게 시달릴 때까지.그래도 명백히 실수였다. 그렇게 만져서는 안됐었다. 데쿠 녀석의 말마따나 그렇게 해선 안됐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침대에 축 늘어진 채로 미도리야가 물었었다. 용도가 모두 끝난 콘돔 두 개를 가볍게 묶으면서 바쿠고는 그렇게 대꾸했다. 열뻗쳐서.


'그러니까 너도 적당히 즐기든가, 씨발. 1년은 딜도 노릇 해줄 테니까.'
'캇쨩.'
'...'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진짜 화낼 거야.'


아니, 너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다 안다고, 등신아. 감정 숨기는 일에는 재능이 아예 없는 녀석이다. 그 솔직한 눈을 바쿠고는 아까도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흐트러진 녀석의 옷섶을 수습해주면서도 눈은 똑바로 보지 않았다. 사실 못본 거다. 그 눈을 보면 쓸데 없는 걸 물어보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등신아.내가 진짜 네 인생에 유일한 알파이긴 하냐?


"그럴리 없지, 씨발."


죽어도.

하, 헛웃음을 흐린 바쿠고가 들고 있던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넣고 트레이닝룸의 샤워 부스를 열었다. 차가운 물이 짜임새 좋은 단단한 근육 위로 세차게 쏟아졌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씨발. 흠뻑 젖은 색밝은 머리를 크게 넘기면서 바쿠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는 걸 바쿠고는 그로부터 정확히 4시간 후에 깨달았다.


"……"


잊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저택이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했었는지. 거대한 대문을 올려다보는 선홍색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존나 미쳐버리겠네."


일이 끝나자마자 바쿠고는 가까운 백화점에 들러 수트부터 갈아입었다. 꽃집에는 들르지 않았다. 아무리 오메가와 10만 골드로 계약을 맺고 연애 흉내를 내는 사이가 되었어도 꽃을 들고 알랑대는 짓은 누가 때려 죽여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와인샵에 들러 로마네꽁띠 한 병을 샀다. 와인샵 주인은 뉴스라도 봤던 건지 바쿠고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쓸데없이 부탁도 하지 않은 리본을 병에 달아주었다. 그리고는 바쿠고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오늘, 미도리야군에게 청혼하시는 건가요?

그딴 게 아니라 씨발, 내가 실수를 해서 사과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어쨌건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잘 포장된 로마네꽁띠를 조수석에 태운 채로 바쿠고는 올마이트가 살고 있는 연합정부의 사저로 향했다. 이미 전날 미도리야를 데려다준 덕분에 네비게이션을 찍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정문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초인종 앞에 섰을 때부터 문제는 다시 시작됐다.

지금 바쿠고는 어쩌다 다투고 토라져버린 연인의 집에 찾아온 거였다. 것도 자기 실수로.


“하, 씨발. 이제 와서 전화해서 문 열라고 할 수도 없고, 존나, 어쩌..”
“바쿠고 청년 아닌가!”


그냥 벨 눌러서 데쿠 새끼, 아니, 이즈쿠 도련님 만나러 왔다고 말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뒤에서 가벼운 클랙슨 소리와 함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 매우 익숙하다. 저도 모르게 꿀꺽 울대를 민 바쿠고가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의전용으로 쓰이는 검은 아우디의 뒷좌석에서 몸을 반쯤 내민 풍채 좋은 금발 사내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올마이트다. 하. 바쿠고가 버릇처럼 볼 안쪽을 꽉 씹었다. 즉, 결혼할 상대의 아버지를 만나버렸다. 하필 지금.


"안녕하십니까. 아버...."


일단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아 허리를 숙이는데 이 대목에서 목이 막혔다. 더럽게 어색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바쿠고가 볼륨을 죽여 다시 덧붙였다.


"...아버님."
"하하, 그래. 나도 자네를 보니 반갑군. 퇴근하던 중인데 낯이 익은 미남이 보여서 말을 걸었는데 내 사위일 줄이야! 아, 이즈쿠를 만나러 온 건가?"
"아, 예. 그렇습니다."
"혹시 급한가?"


질문의 뉘앙스가 묘했다. 이건 좋지 않다. 반사적으로 구길 뻔한 눈썹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면서 바쿠고가 내색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아무리 삼라만상 모든 것에 쉽게 짜증을 내는 인성이라 한들 곧 죽어도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뇨."
"그래? 다행이군. 마침 자네와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거든, 하하!"


반군을 제압하고 마침내 세계 연합 정부의 총수에까지 오른 이 대범한 사내는 사위를 대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장 뒷좌석을 열고 내린 올마이트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이자와 보좌관을 향해 먼저 상황을 통보했다. 자네들은 이대로 들어가게.
그리고 척척 다가온 올마이트의 팔이 바쿠고의 어깨에 친근하게 감겨왔다. 매우 불편했다. 적어도 바쿠고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나는 우리 아들의 약혼자랑 잠시 대화도 나눌 겸 걸어서 들어갈까 하거든."


흔히 이 관계를 이렇게 부른다. 예비 장인어른과 예비 사위. 달리 말해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


"여기서 저택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네. 가볍게 걷기엔 좋은 코스지. 자네 맘에도 쏙 들었으면 좋겠군. 이즈쿠가 어릴 적부터 이 정원을 아주 좋아했거든."


닫혀있던 거대한 대문이 열리고 아우디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어깨동무를 풀고 먼저 앞장을 선 건 올마이트였다. 오른손에 든 와인병을 고쳐잡고 바쿠고는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었다. 해가 거의 저문 하늘은 어두웠지만, 길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로등빛이 훤했다. 막상 걷기 시작하자 조금 전과 같은 불편함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 점은 그 녀석과도 닮았다. 거침없고  대담해보여도 결코 선을 넘지 않으며,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 물론 데쿠 녀석이 이 남자를 닮은 거겠지만. 한 걸음 앞서 걷는 올마이트를 흘긋 바라보며 바쿠고는 잠시 생각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한들, 둘은 이제 누가 보아도 진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아, 혹시 담배 피우나? 그냥 피워도 괜찮네."


생각났다는 듯이 올마이트가 바쿠고를 돌아봤다. 색이 밝은 머리가 가볍게 좌우로 흔들렸다.


“아뇨. 끊었습니다.”
“끊었다고?”
“예, 냄새가 싫어서요.”
“허, 참. 볼수록 맘에 드는 청년이군.”


올마이트가 허허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저녁 어스름에 물든 고요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밤공기를 타고 폐부로 흘러 들어오는 풀냄새가 향긋했다. 가볍게 불어가는 바람을 타고 불편함과 어색함이 조금씩 희석된다. 바쿠고가 희미하게 입끝을 밀었다. 왜 데쿠녀석이 이 정원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그랬다.


"나도 이즈쿠를 만나기 전엔 꽤나 골초였지. 그런데 이즈쿠를 만난 후로는 자연히 끊게 되더군. 뽀뽀라도 한 번 해주려고 하면 그 순한 아이가 어찌나 질색을 하던지, 하하."
"그래도 끊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나보다도 이즈쿠가 대단한 거겠지. 자네도 대단하고. 이즈쿠가 왜 자네를 택한 건지도 납득이 가는군.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뭘 해도 다 해낼 사람이니 믿어도 좋다고, 하하."
"..."
"그래도 좀 놀라기는 했지. 그 아이가 누굴 좋다고 말한 건 자네가 처음이야."


올마이트가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후우 길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올마이트는 달을 쳐다보았다. 오늘 달은 다 차지도, 다 비지도 않은 반달이었다. 그래도 세상을 비추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어느 서툰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비추기에도, 아들을 아끼는 어느 아버지의 얼굴을 비추기에도.


"나는 이즈쿠에게 좋은 아빠가 아니었네. 너무 바빴거든. 게다가 이즈쿠가 어릴 때는 지금보다 더 정신이 없었지. 연합 정부가 출범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았겠나, 하하. 게다가 내가 결혼을 해서 파트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
"그래서 그 아이는 늘 외로웠지. 주변에 또래도 별로 없었네.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다보니 대신 철이 일찍 들었어. 대신 친구가 별로 없었지. 그게 나는 늘 미안하네."
"..."
"그런데 이런 좋은 소꿉친구가 있었다니, 하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올마이트가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바쿠고는 불편했다. 죄책감을 느껴 그랬을지 모른다. 소꿉친구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소꿉친구는 말 그대로 둘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세탁하기 위한 거짓 설정이었을 뿐이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도리야 이즈쿠니까.

올마이트의 양아들, 오메가 중의 오메가. 자신이 얼마를 버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할만큼 벌이도 좋고, 능력도 좋다. 그런데도 겸손하고 소탈하기까지 하다. 스스로 인생을 포기해버렸던 알파에게 이 오메가는 너무나 빛나는 존재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인연조차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볼 때는 있었다. 데쿠 녀석이랑 자신이 진짜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결코 좋은 친구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이 곁에 있는 게 자네라 참 다행이야.”


올마이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남을 의심할 줄도 모르는 아이네. 착하고 좋은 녀석이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아들 자랑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네만, 하하.”
“아뇨.”


다물려 있던 입술이 멋대로 툭 떨어졌다. 그 수많은 가짜 설정과 거짓말 중에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엿 같은 러트 유도제에 취해 거의 범할 뻔 했었다. 그런데도 믿어준 녀석이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안경녀석이 했던 말처럼, 그 일은 테러로 간주되어도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녀석은 고집대로 했다. 자신을 변호했고, 수습했고, 믿었다.자기 자신을 강하게 믿는 녀석들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녀석이 딱 그랬다. 결혼이라는 한 마디에 흐물흐물 입꼬리가 풀어지던 녀석의 얼굴을 바쿠고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올마이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 아이가 자네를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거야. 은근히 고집을 부리면서 자네에게 막무가내로 구는 부분도 있을 걸세. 좋은 감정은 절대 감추지 못하는 아이니까. 싫은 것은 감추고 참을 수 있을지언정 말이야. 그 아이가 좋다고 말하면 그건 정말 좋다는 뜻이지.”
"..."
“그 감정을 의심하지는 말아주게. 내 부탁은 그것 뿐이네.”


바쿠고가 빈 주먹을 소리없이 꽉 움켜쥐었다. 사과해야한다. 여전히 사과에는 재능도, 소질도 없었지만.

걷다보니 어느샌가 저택 앞이었다. 내가 눈치도 없이 자네를 너무 붙잡았군. 올마이트가 허허 웃었다. 들어가 보라면서 바쿠고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이 듬직했다. 그때만큼은 연합정부의 총수가 아닌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저택 로비로 성큼 올라서면서 바쿠고가 올마이트를 돌아봤다.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것만큼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꽉 입술 끝을 악문 바쿠고가 희미하게 입끝을 밀었다. 밤 어둠에 비친 선홍색 눈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제가 반한 사람이니까요.”











계단을 뛰어오르는 바쿠고의 걸음이 급했다.

올마이트와는 1층에서 헤어졌다. 이즈쿠의 방은 윗층 복도 끝에 있노라며 넌지시 일러준 후 올마이트는 바쿠고와 악수를 나누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대로 나선형으로 꼬인 계단을 걸어올랐다. 저녁이 다 된 탓인지 고용인들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복도에 오르자 오른쪽 끝에 초록으로 색을 칠한 커다란 문이 보였다. 저기다. 하, 입매를 비튼 바쿠고의 구두 끝이 방향을 틀었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어쩐지 조금씩 급해졌다.

이딴 인생을 살고 있다고, 가족에게도 미안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네가 삶에 틈입한 후부터 자꾸만 변해간다. 변하지 않았던 것이 끝끝내 모양을 바꾼다. 이건 바쿠고의 인생계획에는 없던 것들이다. 연연하고, 신경 쓰이고, 미안해지는 것들. 그래도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쿠고가 닫혀있던 문을 이윽고 열어젖혔다. 노크는 하지 않았다.


“…”


미도리야의 방은 짐작했던 것보다도 컸다. 그래도 인테리어는 소박했다. 응접실을 겸하는 너른 홀을 중심으로 듬성듬성 놓여있는 네 개의 문은 아마도 침실이나 서재, 드레스룸과 개인 욕실로 통할 것이다. 패턴이 없는 연두색 변지는 단조롭고 밋밋했고, 가구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조화롭고 따뜻하다. 그 점 역시 이 방 주인을 닮았었다. 단순하지만 화사한, 밋밋하지만 자꾸 마음이 가는. 그 어떤 대단한 장식보다도 눈길을 끌던, 저 숲색머리처럼.


“어… 캇쨩이 왜.”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숲색 눈이 바쿠고를 황급히 돌아봤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황급히 눈가를 비비며 미도리야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제 주머니 속으로 감췄다. 하. 들고 온 와인부터 가까운 탁자에 내려놓으며 바쿠고가 입끝을 비틀었다. 여기까진 솔직히 별로 예상하지 않았었는데.
미도리야의 눈가가 벌겋게 젖어 있었다. 바쿠고가 입술 끝을 꽉 악물었다.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왜 이 새끼는 항상 머리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걸까.


“올 거면 연락이라도 주지 그랬어. 그랬으면 미리 다른 분들께 부탁해서 차라도… 캇쨩!”


이번에도 걸음이 멋대로 그쪽을 향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바쿠고가 꾸물꾸물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미도리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직전까지 보고 있었는지 화면엔 잠금이 걸려 있지 않았다. 선홍색 눈이 미도리야의 손 안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선명히 뚫어 보았다. 똑똑히 봤다. 장님이 아닌 이상 안 볼 수가 없었다.
J클리닉에서 보내온 메일에는 이처럼 적혀 있었다. 검사 결과, 임신 가능성 0%.


“하, 씨발.”


미도리야의 손목에 감겨있던 손가락들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툭 팔을 떨군 바쿠고의 눈에 미도리야의 얼굴이 비쳤다. 흠뻑 젖은 숲색 눈이 흐, 웃었다.


“우리…1년까지 갈 필요도 없겠지?”


그때 알았어야 했다. 홧김에 뱉었던 그 한 마디가 얼마나 예리한 칼이었는지. 그 칼에 너는 또 얼마나 깊게 가슴을 베였었던 건지.


“캇쨩 탓은 아냐. 상대 알파에겐 아무 문제가 없대. 내가…  내가 그냥, 안 되는 것뿐이야. 오메가로서 마땅히 가지고 태어났어야 할 생식세포가 내게 없던 것뿐이야. 내가 그냥, 처음부터 없던 걸 바란 거야. 내가 그냥, 꿈을 꿨던 거야. 혼자서.”
“…”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도리야가 젖은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누구도 섣불리 깰 수 없을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쿠고가 비어버린 주먹을 힘껏 쥐었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다. 사과를 하려고 했다. 언짢은 일이 있었다고, 버러지만도 못한 걸 상대하다 기분이 더러워졌다고 해명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J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해명할 생각이었다. 옛날 데이트 메이팅 일을 할 때 얽혔던 놈이라고, 딱 한 번 잤을 뿐이라고, 러트유도제를 썼던 것도 그 새끼라고, 그러니 다시 보는 게 유쾌했을 리가 없다고 말해야했다.

하지만 사과를 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 역시 미도리야는 주지 않았다.


“계약 파기하자.”


덮었던 손을 끌어내리며 미도리야가 담담히 말했다. 발긋하게 부어오른 젖은 두 눈은 그때도 바쿠고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그 멱살을 붙잡고 욕하고 싶었다. 웃지마, 씨발 새끼야.


“계속 생각해봤는데, 캇쨩. 끝내는 게 옳은 것 같아.”


목이 맬만큼 하기 싫으면서, 이딴 소리 하기 싫으면서 웃지 말라고.


“어차피 진짜 연애했던 것도 아니잖아.”
“하, 씨발.”


굳었던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이런 순간에도 데쿠새끼는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애초에 경매장에서 10만 골드로 시작된 비즈니스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자신을 임신시켜줄 수 있을만큼 강한 알파가 필요하고, 그 강한 알파로 낙점된 바쿠고 카츠키는 바라는대로 임신을 시켜주면 되는 거다.
남들 보기에 자연스러우라고 재회한 소꿉친구 설정을 덧붙였고, 녀석을 평생 키워준 아버지조차 보기 좋게 속여 넘겼다.계약은 조건이 맞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이 계약은 조건이 어긋났다. 그러니 파기되어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허나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근데 그 빌어먹을 기분이 뭔지 나도 모르겠는데, 씨발.


“관두긴 뭘 관둬.”


악다문 입매가 아팠다. 그래도 그 틈을 멋대로 뚫고 나오는 말까지 통제할 순 없었다. 미도리야를 바라보는 선홍색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딴 개같은 소리, 씨발.


“애 없어도 잘 사는 새끼들 널렸어.”
“아니, 캇쨩. 우린 아냐. 애초에 임신을 전제로 시작했던 관계잖아.”
“애초에 임신, 결혼 그까짓게 씨발, 지지율 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니가 잘하면 될 거 아냐, 등신 새끼야.”
“맞아. 내가 잘하면 될 일이지. 알아.”
“그럼 뭐가 문제,”
“내가 그렇게 못하겠어.”


격양되던 말꼬리를 툭 잘라낸 미도리야가 담담히 말했다. 잔뜩 맨 그 목소리가 바쿠고는 어쩐지 울음처럼 들렸었다.


“내가, 캇쨩.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 어차피 1년만 계약하자고 말한 건 캇쨩이잖아. 미안, 나는 그런 말을 듣고도 고집을 부릴만큼 뻔뻔하고 무딘 사람이 못돼. 그게 캇쨩을 불편하게 만들 거잖아. 일방적인 연애가 되어버리는 거잖아.”
“…”
“차라리 진짜 소꿉친구였으면 좋았을 텐데, 흐. 그럼 친구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
“우리 관계는 이제 의미도, 명분도 없어.”


가주라. 젖은 눈길을 내리깔며 미도리야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집이나 계약금은 천천히 정리해줘도 되니까. 그대로 다시 양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미도리야는 아예 표정을 바쿠고의 눈앞에서 감춰버렸다. 끝난 거다. 떨리던 어깨로 손을 뻗다, 거두면서 바쿠고는 거듭 생각했다. 진짜로 선을 그었다. 이 멍청한 데쿠 새끼가. 하지만 혀 밑에 걸린 그 어지러운 말들을 바쿠고는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바쿠고 카츠키와 미도리야 이즈쿠의 계약이 끝났다.
그뿐이었다.








*

그날, 바쿠고는 저택 주차장 앞에 있던 마세라티를 세 번쯤 벽에 긁었다. 그대로 강변으로 뻗은 도로에 접어 들어 있는대로 악셀을 밟았다. 하지만 주행감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차라리 술을 마시고 택시를 부를 걸 그랬다. 이렇게 머리가 깨질 것 같았으면.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을 거였으면.

끝났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뭔가를 제대로 해본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가짜 연애다. 그깟 키스 좀 하고 살갗 좀 부볐다고 정이 든 것도 아닐 텐데.

그럼 차라리 다른 새끼들처럼 즐기고 치우든가, 씨발 새끼야.

알파와 오메가는 본능으로 얽히는 관계다. 아무리 연애니, 사랑이니 포장을 해도 결국은 섹스다. 섹스를 하기 위해 만나고, 섹스를 하기 위해 연애라는 약간의 수고를 들이는 것뿐이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그 새끼의 가장 큰 실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

그래, J. 그 엿 같은 오메가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미도리야 이즈쿠 인생에 정말 네가 유일한 알파일 것 같아?]

끼익, 크게 핸들이 꺾인 마세라티가 도로 위를 날카롭게 미끄러졌다.

도로 위에서 크게 회전한 마세라티는 반대쪽 차선에서 겨우 멈춰섰다. 만약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가 한 대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차도, 바쿠고의 몸도 찌그러졌을 것이다. 하, 씨발. 바쿠고가 움켜잡은 핸들을 주먹으로 힘껏 쳤다.
틀리지 않았다. J는 맞는 말을 했다. 미도리야 이즈쿠의 인생에서 유일한 알파가 자신뿐일 리가 없다. 자신을 10만 골드에 샀듯 녀석은 맘만 먹으면 어느 알파건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녀석에겐 그만한 힘과 능력이 있었다. 알파라면 누구라도 흔들릴만큼. 그게 가장 엿 같았다.

내 인생에 이딴 오메가는 너밖에 없었다고, 멍청아.

지금껏 오메가라면 수도 없이 만났다. 그 누구도 이 녀석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속이 터지진 않았다. 이렇게 향이 옅은 녀석도 없다. 자기가 가진 권력과 사회적 위치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멍청이다. 이런 멍청한 오메가는 세상에 둘은 없다. 러트유도제를 쓸 줄도, 알파의 러트를 이용할 줄도 모르는 오메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 씨발, J 같은 쓰레기들도 있는 판국에…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J 클리닉.”


선홍색 눈이 서늘하게 좁아졌다. 하. 비틀린 입매가 낮게 웃었다.


“…이 씨발 새끼가.”


자기넨 이래놓고 임신도 안 되면 어쩔 거야?

녀석이 말했었다. 그 얼굴을 바쿠고는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이미 기분이 더러워질만큼 더러워진 후였다. 녀석의 웃는 얼굴이 교묘했었다. 바쿠고는 둔해 빠진 어느 오메가와는 기질부터 완전히 달랐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런 얼굴을 하는지 안다.

그 개새끼. 바쿠고가 콘솔 앞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열었다. 잊고 있었다. 애초에 그 새끼를 오늘 왜 만났었던 건지, 데쿠새끼가 진료를 하자며 끌고 갔던 형질 클리닉의 원장이 누구였는지.이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가 누구였었는지.

신호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전화 기다렸어, 자기야.]


핸드폰 너머에서 J가 후후 웃었다. 그 작은 소리에도 구토가 치밀었다. 이상하게도 머리는 놀랄만큼 서늘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진짜 화났나보네. J가 담담히 말했다.


[우리 내일 저녁이나 먹을까? 가볍게.]



J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쿠고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계속)



정말로 오랜만에 이 시리즈를 백업해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이렇게 길어질 예정이 아니었는데 ㅋㅋㅋㅠㅠㅠㅠ 무튼 다음 백업 때는 J를 시원하게 (?) 박살내고 오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해요 U///U

+ 피드백은 역시나 여기에 남겨주시면 제일 보기 편합니동...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글쓴이/비번만 입력하신 후에 작성해주세요//// 항상 시간 내서 피드백 주시는 분들 넘나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진짜 큰힘 받고 있어요 흑흑...

?
  • 솔기 2019.04.08 19:12 SECRET

    "비밀글입니다."

  • 꼬마어른 2019.04.08 19:50
    항상 포스타입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크흡ㅜㅜㅜ 엇나가는 캇뎈 너무 좋아요...ㅜㅜ 사랑합니다ㅜㅜㅜㅜ
  • ㅌㅎ 2019.04.08 22:24
    j를 부수어버릴 것이에요.. ㅠㅠ 맘 정리 다한 이즈쿠 ㅠㅜㅜㅜㅜㅜ 즈쿠야 시원하게 싸워보지 왜 혼자 울구 있니....!! 이즈쿠를 오래도록 지켜보온 아버지와의 산책시간 부분이 되게 좋았습니다...☆★>////<
  • KD happy 2019.04.08 23:05 SECRET

    "비밀글입니다."

  • ㅇㄴ 2019.04.16 00:41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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