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첩보원 바쿠고와 미도리야 이야기로 캇뎈
* 여전히 별로 밝지는 않습니다.

* BGM / Gotan Project <Diferente>

http://youtu.be/1vbNm5gnGAc





※ 글 속에 등장하는 지명, 시대 등 배경은 전부 허구입니다.




IMITATOR
@ruka_tea







中1






스물세 번째 가을이 무르익던 그날, 바쿠고는 외출하지 않았다. 9월 9일이었다.

매년 돌아오는 제국의 건국기념일이었다. 더불어 보안 때문이라는 이유로 감금과 다름없이 생활하는 국가 기술원의 연구원들이  허가 없이 맘껏 외출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저녁 6시가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저마다 멋을 내고 시내로 향했다. 그저 극소수의 연구원들만이 텅 빈 기술원을 지켰다.

카츠야마 반勝山 絆은 기술원에 남은 그 극소수의 연구원이었다. B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3년간 얼굴이 익은 동료들에겐 공동연구 과제가 남았다는 핑계를 댔다. 그들은 모두 카츠야마를 그저 천재적인 분자학 연구원으로만 대했다. 제국대학 분자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 기술원을 선택한 최고의 영재.
그는 입학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 공동연구를 구실 삼아 외출하지 않은 것 역시 B, 즉 바쿠고 카츠키 뿐만이 아니었다.

걸어 잠긴 연구실 안쪽에서 젖은 입술이 깊게 겹쳐졌다.


“흐읍, 우읍… 으응,”


공동으로 사용하는 2인 연구실 앞에는 B와 M이라는 머릿글자가 붙어있을 것이다. B와 M은 3년 전에 함께 들어온 젊은 과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실적이 좋았다.
지난 달에도 B와 M의 기술로 개발된 세 번째 미사일이 테스트를 끝내고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B도, M도 논문을 직접 작성해본 적은 없었다. 이곳에서 그들이 해야할 일은 연구나 무기 개발 같은 것이 아니었다.

M이, 미도리야가 단단히 얽혀있던 입술을 가까스로 뗐다.

자신과 똑같은 하얀 가운을 걸쳐 입은 너른 등에 미도리야의 팔이 감겼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홍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미도리야의 입술이 버릇 같은 웃음을 흐, 밀어냈다.


“이러자고 남았던 건 아니었는데…”
“지랄한다. 먼저 부빈 새끼가 누군데.”
“그건…! 늘 말하지만 불가항력 같은 거야. 가운 입은 캇쨩을 보면 나도,”


기울어온 입술이 미도리야의 말을 또 한 번 틀어막았다. 겹쳐진 두 콧날 사이에서 검은 안경이 덜그럭거렸다. 안경, 좋은데, 방해되잖아. 볼멘 소리를 우물거리던 미도리야의 뺨을 커다란 손이 다시 움켜잡고 본격적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아, 진짜. 결국 미도리야가 백기를 들었다. 두 눈을 꽉 눌러 감은 미도리야의 손이 바쿠고의 등을 힘껏 끌어 안았다.

두 설육이 다시 한 번 질척하게 뒤얽혔다.

망할 키스를 얼마나 해댔더라. 부딪친 입술의 각도를 틀며, 미도리야의 가운 밑을 더듬으면서 바쿠고는 잠시 생각해봤다. 잘 모르겠다.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근 게 30분 전이었으니 대략 그 정도는 됐을 것이다.
하기야, 시간과 숫자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틈이 날 때마다 수시로 입을 맞췄다.  3년 전, 기차 안에서 녀석을 좁은 화장실로 밀어 넣으며 문을 닫았던 그날 이후부터 줄곧 그랬다.


“우읍, 흐… 캇쨩, 혀, 좀만 더… 읍,”


그 3년동안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이 연구원의 B와 M으로 살았다. 정체가 발각된 적은 없다. 분자학을 공부한 적도, 제국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B와 M은 최고의 이미테이터들이었다. 신분증과 대학재학증명 서류는 위조했다. 치사키가 사람을 시켜 보낸 자료집을 한달간 독파한 후 그럭저럭 다른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전문지식을 화제로 대화할만큼은 됐다.
연구 논문은 역시 두 번을 정교하게 포장한 후 다른 원서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배달해주었다. 그 논문을 누가 쓰는 것인지, 누가 제공해주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B와 M의 진짜 이름으론 발표되지 않는다. 그저 정체에 대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더 중요한 건 논문이나 원서와 함께 섞여오는 다른 문서다.

3주 전에도 우편물이 왔다. 두툼하게 포장된 논문 사이에는 누군가의 사진이 한 장 꽂혀 있었다. 바쿠고와, 아니, 카츠야마 반과 이따금 휴게실에서 탁구를 함께 치는 생명학 연구원의 사진이었다.


“야, 데쿠. 슬슬 7시 되기 전엔 나가야,”


시계를 흘끔 바라보던 바쿠고가 아쉬운 입술을 떼어냈다. 흐트러진 가운을 수습해주면서 잔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이번엔 미도리야 쪽에서 입술을 부딪쳐왔다. 또, 등신 새끼가. 눈살을 울컥 구긴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뒷목을 힘껏 움켜 안았다.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거다.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이 할 일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 연구원을 암살하는 건 M의 몫이다. 하지만 미도리야는 아직 그 녀석을 죽이지 않았다.

3년 전부터 그랬다. 어떤 지령에도 불복하는 법이 없던 M은 그날 이후 변해버렸다. 이런저런 핑계들로 하루이틀씩 암살을 미룬다. 약을 끊었고, 담배를 줄였지만, 악몽을 꾸고 수면제를 달고 살았다.
오늘 새벽에도 바쿠고는 옆 침대에서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던 미도리야의 턱을 움켜잡고 입을 맞추며 수면제를 밀어 넣었다. 결국 그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식은땀에 젖은 몸을 닦아준 후에야 미도리야는 겨우 잠들었다.

그 지친 얼굴을 보면서 바쿠고는 오늘, 결심했다. 이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걸 B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야미쿠모군, 안에 있어?”


가벼운 버드 키스로 마무리하면서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그래놓고도 잔뜩 아쉬운 눈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도리야의 가운을 여며주고 있던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쾌활한 여성의 음성은 바쿠고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아. 서둘러 흐트러진 옷을 마저 수습한 미도리야가 문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열게!
야미쿠모 마나토闇蜘蛛 万南斗. 여기서는 M을 모두 그렇게 불렀다.


“미안해. 선반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자료가 모두 뒤섞였는데 나 혼자선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아, 카츠야마군도 있었구나.”


미도리야가 잠겨있던 문을 열어주자 긴 갈색머리의 서글서글한 미인이 쑥스럽게 웃으며 들어왔다. 시마우라 리코島浦 利光는 2년 전에 이곳에 합류한 분자학 연구원이다. 분야가 겹치는 덕인지 시마우라는 다른 연구원에 비해 둘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았다. 논문 실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항상 연구에 빠져 있었다. 오늘도 역시 외출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바쁠 텐데 방해해서 미안해. 야미쿠모군을 잠깐 빌려가도 괜찮을까? 그래도 우리 과에서 야미쿠모군만큼 정리를 잘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타겟의 패턴을 정리하고 루트를 짜는 건 본래도 M의 특기였다. 허나 시마우라는 그게 첩보원으로서의 재능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일이 생기면 시마우라는 항상 야미쿠모를 찾아왔다. 단순한 호의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그래도 바쿠고는 야미쿠모, 즉 미도리야에게 호의를 보이는 시마우라를 딱히 견제하지 않았다.

선을 긋는 외려 미도리야였다. 활짝 웃는 시마우라를 향해 미도리야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거렸다.


“어쩌지, 시마우라군. 난 지금부터 카츠야마군이랑 할일이 있어서…”
“진짜? 아, 내가 너무 곤란할 때 찾아왔구나.”


시마우라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당황한 미도리야가 손사레를 쳤다.


“아냐아냐. 그런 건 아닌데!”


네가 왜 선을 긋는지 안다. 정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언젠가 시마우라 리코라는 이름이 우편물 속에 섞여 배달되는 날이 올까봐 두려운 것이다. 지난 3년동안 석 달에 한 번씩 지령이 올 때마다 B와 M은, 정확히 카츠야마와 야미쿠모는 이곳에서 동료들을 살해했다. 치사키는 그들이 이곳에서 연합국과 결탁해 기술을 빼돌리는 자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배신자이긴 한 걸까? 오늘 새벽에도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팔 안에서 몇 번이고 그렇게 물었다. 캇쨩.

우리가 죽인 사람들이 진짜 죽여야 할 적이었을까?

3년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다. 이 기술원은 하필 그 호젓한 마을에 지어져 있었다. 어쩌다 창 너머로 그 마을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미도리야는 떨리는 눈길을 돌리며 아닌 척을 했다. 그 얼굴을 바쿠고는 3년동안 수도 없이 보았다. M이 자꾸 핑계를 대며 암살을 미루는 이유도, 그렇게 미루다간 결국 어떤 일을 초래하게 될 지에 대한 것도 바쿠고는 전부 알고 있었다.


“됐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좀 도와줘라. 나는 외출할 거니까.”


바쿠고가, 아니, 카츠야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미도리야가 아닌 야미쿠모의 등을 툭 떠밀었다. 크게 열린 숲색 눈이 바쿠고의 등을 쫓아왔지만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문을 훌쩍 열어젖히며 바쿠고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이따 밤에 보자.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 차라리 이대로 살까? 카츠야마 반과 야미쿠모 마나토로.

악몽에 취해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미도리야는 그런 말을 했다. 진심일 것이다. 동시에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녀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삶은 어차피 가짜다. 진짜가 아닌 삶은 영원할 수 없다.
하기야, 우리에게 진짜가 있기는 했었나. 입 끝을 비튼 바쿠고가 기술원 앞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바쿠고가 권총과 소음기를 찔러 넣은 항공점퍼를 단단히 여미며 무심히 대꾸했다.


“시청.”


해는 이미 저물었고, 공식 행사가 끝난 시청 앞은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지나 바쿠고는 번화한 골목 입구에 있던 첫번째 술집으로 들어섰다. 자리는 빈 곳이 없었다. 한 데 모여앉아 있던 무리들이 건배를 나누다 바쿠고를 바라보곤 아는 체를 했다.


“카츠야마, 못 온다더니!”
“야미쿠모는?”
“시마우라한테 잡혀서. 야, 나 좀 앉자.”
“잘 왔어. 거기 빈 의자 갖다줘!”


못 이기는 척 자연스럽게 자리에 섞여 앉았다. 기술원 연구원들이 자주 드나드는 이 술집의 맥주는 저렴한만큼 좋은 품질은 아니었다. 유난히 씁쓸한 맥주로 건배를 하면서도 바쿠고는 대각선에 앉아 있던 녀석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검은 머리, 좁은 회색눈의 녀석은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치사키가 3주 전에 보내온 사진 속에 찍혀있던 얼굴이었다.

아, 나 잠깐 화장실 좀. 녀석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남아있던 맥주를 단번에 들이켠 바쿠고가 의자를 밀었다. 그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같이 어울려 술에 취하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얼굴조차 쉽게 잊어버린다. 타겟이 사람들을 해치며 뒷문으로 통하는 좁은 복도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화장실로 통하는 쪽문 너머로 녀석이 사라지는 것을 바쿠고는 잠시 지켜봤다. 그리고 화장실 문앞에 놓여있던 간판을 가볍게 뒤집었다. 청소중.

오늘의 청소부는 사실 B가 아니었다.


“아. 카츠야마. 내가 좀 취해서,”


변기 앞에 서있던 녀석이 아는 체를 하는 것보다 총을 뽑는 속도가 더 빨랐다. 실탄은 한 발이면 족했다. 단숨에 항공점퍼에서 뽑혀나온 권총이 녀석의 이마 한 중간을 꿰뚫었다. 비명 한 번 지를 시간도 없었다.
다시 총을 점퍼 속에 찔러넣고, 바쿠고는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목덜미를 잠시 짚어보았다. 맥이 없었다. 확실히 죽었다.

이걸로 된 거다.

어차피 누가 죽였건 상관없다. B와 M은 팀이었고 파트너였다. 그러니까 이걸로 끝난 거라고. 이를 악문 바쿠고가 조용히 화장실을 빠져 나왔다. 청소중 간판은 그대로 뒀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날, 카츠야마 반이 뒷문으로 빠져 나가 택시를 잡는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기술원은 또 한 번 술렁거렸다.


“우에다군이 갑자기 그만뒀대. 남부에 계시는 어머니가 많이 위독하신가봐.”


시마우라가 조식으로 나온 빵을 길게 찢으며 담담히 소식을 전했다. 요새 계속 갑자기 그만두는 녀석들이 많네. 우물거리는 시마우라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도리야도, 바쿠고도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숲색 눈이 잠시 옆에 앉은 선홍색 눈을 뚫어보았다.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는 빤히 알고 있었다.

왜? 미도리야가 소리 없이 물었다. 왜 그랬어?


“수프 식는다. 아침 안 먹냐?”


바쿠고의 손이 숲색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이걸로 된 거다. 바쿠고는 생각했다. 이걸로, 이번 것도 잘 끝난 거라고. 이를 꽉 악무는 바쿠고의 얼굴을 미도리야가 잠시 올려다봤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식어가는 수프를 다 비울 수는 없었다.






#

사랑. 아이자와가 머금었던 연기와 함께 그 말을 다시 한 번 발음했다. 사랑. 그 투가 마치 시를 읊는 시인 같았다.


「사랑이란 게 참 골치 아픈 놈이지. 선을 넘게 만들거든. 하지 않던 짓을 하게 하고, 할 필요가 없는 짓을 대신 하게 만들고. 게다가 3년동안 지령 외엔 딱히 감시도 받지 않았을 테니 눈에 뵈는 게 없었겠고.」
「……」
「네 놈이 조용하다는 건 인정한다는 뜻이겠고.」
「…꺼져, 씨발.」
「하여튼 저 주둥이는 재앙이야.」


아이자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눠 피웠던 담배 한 곽은 이제 마지막 한 대 밖에 남지 않았다. 피우든가. 아이자와가 턱 짓으로 그 한 대를 바쿠고에게 권했지만, 바쿠고는 피우지 않았다.
그럼 말든가. 아이자와가 망설임 없이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런 주둥이를 가졌으면서 상관 돗대엔 손대지 않는 예의가 있어. 희한한 놈이야.」
「염병, 상관도 아니잖아.」
「그래. 네 놈들의 진짜 상관만큼 엄격하진 못했지. 나나 야기 녀석이나.」
「……」
「그 상관은 네가 미도리야를 대신해서 그 새낄 죽여준 걸 그냥 넘겨줬을 리가 없을 테고.」
「어.」


딸깍, 또 한 번 버릇처럼 라이터를 열어젖힌 바쿠고의 입매가 씩 밀렸다. 하지만 그건 분명 웃음이 아니었다.


「절대.」
「……」
「망할, 딱 이틀 뒤였지.」











*

제국 대학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경리부의 사환이 전해줬을 때 그가 누구일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타날 사람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기술원에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재직 중인 연구원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만나게 해주지 않았었다.


“오랜만이야, 내 후배들. 세상을 구하느라 수고가 많아.”


치사키는 B와 M, 아니, 카츠야마와 야미쿠모의 대학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모양이었다. 급히 갖다줘야할 서류가 있어 찾아왔노라며 면회를 요청하는 점잖은 남자를 입구에선 전혀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치사키 카이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평상시엔 그저 키가 크고 점잖은, 호감형의 미남이다. 그가 얼굴을 굳힐 때 얼마나 잔인하고 차가운 인상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그 얼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게다가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치사키와 번갈아 포옹을 하면서도 미도리야는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인 건 3년만에 처음이었다.


“전화로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교수가 너희의 서명을 꼭 직접 받아와야 한다고 해서.”


연구동과 달리 외부인을 접객하는 1층 휴게실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얇은 유리문 너머에서 로비의 직원들은 계속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런 연기에는 바쿠고도, 미도리야도 익숙했다. 여전히 연기를 하면서도 대화 속에 칼을 숨기는 일.


“일찍 제출하라고 했잖아.”


예리한 칼날이 깊숙이 둘의 가슴을 찔렀다.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진 숲색 눈이 크게 떨렸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버릇처럼 꽉 씹었다. 치사키가 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난 약속 어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것도 3주씩이나.”


무엇을 지적하는지 자명했다. 암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흘 전에 바쿠고는 지령을 받은 타겟을 시내의 펍에서 홀로 처리했다. 3주를 늦었다. 그냥 넘길 리 없다는 것도, 조만간 움직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치사키는 항상 모르는 게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도 그냥 넘겨줄 수는 없고 말이야.”


치사키가 둘의 눈앞으로 사진 한 장을 슥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가운차림의 B와 M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사진을 보는 미도리야의 얼굴은 이제 핏기가 아예 가셔 있었다. 3년을 방심했다. 그저 연구에만 몰두하는 연구원들이 모여 있는 시설이라고 하나 이런 곳이라고 해서 감시가 없었을 리 없다. 누군가 자신들을 계속 살펴보며 보고를 했다. 틀림없다. 하. 바쿠고가 볼 안쪽을 울컥 씹었다.


“내가 먼저 알게 돼서 참 다행이야. 군부에 넘어갔으면 너희를 재판에서 다시 만날 뻔 했어. 아니면 묘지에서 만나거나. 뭐, 그래도 막아줄 수는 있었을 거야. 너희가 일만 제대로 처리했으면.”
“……”
“하지만 이상하지. 나랑 할 얘기가 있는 건 야미쿠모군일 텐데.”


치사키의 얇은 입매가 가볍게 비틀렸다. 서늘해진 검은 눈이 앞에 선 남자를 똑바로 뚫어보았다.


“왜 네가 일어나는지 모를 일이야, 카츠야마군.”


바쿠고를 올려다보는 숲색 눈이 잘게 떨렸다. 그 눈을 바쿠고는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꽉 악물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상관을 똑바로 바라보는 선홍색 눈이 사납게 일렁거렸다.


“그 건은, 끝났을 텐데요.”
“끝났어. 시간을 안 지켰을 뿐이고. 통조림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법이야. 대출이면 이자가 붙지.”
“하지만 씨발 다 끝났,”
“내가 볼 땐 그게 네 실수라는 생각이 들거든, 야미쿠모.”


시선이 다시 미도리야를 향해 돌아갔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와 달리 그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고 양주먹을 꼭 움켜쥐던 미도리야를 바쿠고는 똑똑히 봤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슬며시 뻗어간 치사키의 손이 바닥을 향한 미도리야의 턱을 넌지시 어루만졌다. 그때조차도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왜 이 유능한 학생이 또 실수를 했을까? 안타까워.”
“……”
“실수는 두 번 하는 게 아니랬잖아.”


스르륵 미끄러진 손끝이 미도리야의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보드라운 귓불을 지분거렸다. 바쿠고가 볼 안쪽을 꽉 악물었다. 그땐 그 손이라도 쳐냈어야 했다. 소리를 질러 사람이라도 불렀어야 했었다.


“오늘 나랑 드라이브나 할까, 야미쿠모?”
“하지만 저는 오늘…”
“아. 외출 허락은 이미 받아뒀어.”
“……”
“가자, 차를 바꿨거든.”


너한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덧붙이며 치사키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치사키에게 어깨를 안겨 비틀비틀 일어나는 미도리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넌 따라오지마.”


치사키의 남은 손이 바쿠고의 어깨를 지긋이 내리 눌렀다. 명령이야. 치사키가 내리 누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말이 바쿠고의 걸음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 규칙이 있었지? 너흰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들이고.”
“……”
“암만 그래도 소꿉친구를 죽이게 되면 좀 힘들긴 할 거야. 그렇지, 야미쿠모?”


대답 없는 미도리야의 뺨에 치사키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모습에도 숨이 막혔다. 돌아서면서도 계속 이쪽을 흘끔거리던 그 숲색 눈에 가슴을 베였다. 무엇보다 움직일 수도, 나설 수도 없는 스스로가 죽도록 미웠다. 그때만큼 이 인생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태어난 인생, 이렇게 살아온 인생. 이 거지 같은 인생.


“그러니까 진작 관두랬더니, 등신 새끼가.”


아니. 내 탓이다. 너는 그냥 날 따라온 것뿐이지. 내가 한다고 하니까 나를 따라 정보학교에 갔다. 내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나를 좇아 요원이 됐다. 하지만 이 길에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바쿠고조차 몰랐었다.
미도리야는 오늘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 씨발. 홀로 남은 바쿠고가 얼굴을 크게 쓸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었다.









*

자정이 넘어도 미도리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일찌감치 방에 처박혀 바쿠고는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 침대에 앉아 숨겨놓았던 위스키를 비웠다. 9시쯤 그럭저럭 뻗었다. 하지만 오래 잠들지는 못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다시 눈을 뜨고 몇 번을 뒤척거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야했다. 차라리 그래야했다.

녀석에게 사줬던 수면제 병을 열고 서너 알을 무작위로 손에 쏟았다. 하필 마실 물이 없었다. 욕을 씹으면서 바쿠고는 방문을 열고 숙소 휴게실로 향했다. 어차피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다. 누구와도 마주치지는 않았다. 불도 켜지 않고 창에 비친 빛에 의지해 선반을 열고 잔을 꺼내 물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약을 삼킬 순 없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부축을 받고 걸어오던 숲색 눈이 이쪽을 쳐다봤다. 약을 움켜쥔 주먹에 꽉 힘이 실렸다.


“어… 캇쨩.”

시마우라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했다. 자켓은 구겨졌고, 단추가 모두 뜯긴 셔츠는 여미지도 못했다. 손목에 시푸른 멍이 앉아 있었다. 오른뺨은 퉁퉁 부었고, 흐물흐물 웃는 그 입가는 피딱지가 엉겨있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가슴팍에 퍼렇게 찍혀있던 멍자국은 꼭 누군가의 구둣발 같았다.
그때 바쿠고는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이런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가슴을 서늘하게 옭죄었다.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기숙사 1층에 쓰러져 있었어.”


시마우라가 말했다. 바쿠고를 바라보는 얼굴은 담담했지만 목소리의 떨림까지 다 감추지는 못했다. 시마우라가 제 입술 끝을 질끈 씹었다.


“나야.”
“……”
“너희 상관에게 너희에 대해 보고했던 사람.”


바쿠고가, 부축을 받고 있던 미도리야가 동시에 시마우라를 쳐다보았다. 더불어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 자신들의 논문을 제공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입술을 꼭 깨문 시마우라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버홀이 직접 나를 찾아왔었어. 나는 그때 제국대학의 학생이었고, 내 등록금은 모두 올포원의 장학재단에서 내주고 있었거든.”
“……”
“B와 M이 조직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3년 전에 변해버렸다고, 그래서 너희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그러다 수상한 행동이라도 하면 그 즉시… 죽이라고. 그리고 오버홀이 그러더라.  3년 전에 북쪽선의 종점에서 학교 사람들을 학살한 게 너희라고.”
“……”
“난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랐어.”


선홍색 눈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러나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바닥을 향해 기울어진 미도리야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너희한테 미안하다곤 말하지 않을 거야.”


시마우라가 활짝 웃었다. 갈색 눈엔 흘리지도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카츠야마군, 아니. 바쿠고군.”
“……”
“데려가. 많이 다쳤어. 오늘은 일단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병가에 대해선 내가 내일 대신 말해줄 테니까. 시마우라가 비틀거리는 미도리야의 몸을 바쿠고에게 조심스럽게 떠밀었다. 얌전히 바쿠고의 팔 안에 끌어안길 때도 숲색 눈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시마우라는 다시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빈 복도엔 둘만 남았다. 이젠 더 이상 무너질 수도 없을만큼 무너진 두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등신새끼.”


바쿠고가 꽉 이를 악물었다. 욕은 하지 않았다. 품에 안긴 미도리야의 등이 어지럽게 떨렸다.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복도의 대리석 위로 쉼 없이 툭툭 떨어졌다. 물러터진 새끼, 호구새끼, 하여튼 약해빠진 새끼. 그런 소리를 우물거려보다 바쿠고는 하 웃어버렸다.
아니. 이 녀석은 언제나 강했다. 올곧고 강해서 수시로 부러졌다. 그뿐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멍청할만큼 이타적인 녀석이 넘어져 무릎을 다치면서도 제 뒤를 졸졸 쫓아오던, 그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야, 데쿠.”


꽉 눌린 목소리가 탁했다. 눈가가 빌어먹게 시큰거렸다. 그 눈가를 문지르는 대신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안은 팔에 힘껏 힘을 실었다. 자꾸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맨 것처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냐, 멍청아.”
“…알아.”


잠긴 목소리가 우물거렸다. 떨리는 손끝이 바쿠고의 팔을 잡았다. 품에 안긴 숲색 머리가 바쿠고를 쳐다봤다. 그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못 생긴 새끼가. 바쿠고가 젖은 눈 끝을 울컥 일그러뜨렸다. 다 터지고 부어서 말도 똑바로 못하는 주제에 미도리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건 안돼. 캇쨩. 생각하지마. 내가 잘할게. 내가 안 그럴게. 내가, 캇쨩이 대신 그런 일 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할게.”
“……”
“우린 그냥… 이용당한 것 뿐이잖아.”


아니, 멍청아. 이 인생은 처음부터 글러먹었다. 평범히 공업학교를 가서 기술이나 배웠어야 했다. 죽도록 열심히 해서, 위장이 아닌 실력으로 이 연구원에 처박혀 국가 안보에나 이바지하며 살았어야 했다. 세상이 망하건 말건, 씨발, 진짜 카츠야마 반이나 야미쿠모 마나토처럼.
그렇게 살지를 못해서 여기까지 왔다. 이 인생은 가짜 투성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진짜가 부서지는 걸 무엇보다 가장 참을 수 없었다.


“관두자, 씨발.”


뭐…? 바쿠고를 쳐다보는 숲색눈이 온통 떨렸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터진 입가를, 멍이 앉은 눈가를 어루만지며 바쿠고가 볼 안쪽을 울컥 씹었다. 꽉 눌린 말이 천천히 어둠을 흔들었다.


“이딴 나라, 씨발, 관두자고.”


이 녀석이 무엇을 꺼림칙하게 여겼는지 알고 있다. 3년 전부터 줄곧 그랬을 것이다. 올포원의 수상 연임, 그 올포원이 직접 관리하는 정보국과 직접 키워낸 인재라던 시가라키, 그 시가라키가 발탁한 치사키 카이. 이미테이터팀이 움직인 이후부터 올포원의 정적은 사라졌고, 오래도록 국민당을 지지했던 북쪽선의 종점 지역은 투표를 포기했다. 이틀 전에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대신해 죽였던 동기 연구원은 국민당의 당원이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다. 진짜 적은 없다. B와 M이 죽여 온 건 처음부터 올포원의 정적들이었다. 여기는 이미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었다.

방법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머지않은 국경을 넘어가다 총을 맞아 죽든가, 아니면 임무를 이용한다든가. 연합국 잠입 임무를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다. 그래, 지금 이 신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제국의 뛰어난 과학자였던 B와 M이 거짓으로 연합국에 망명을 해 기술을 빼돌리는 임무를 맡는 거다. 연합국에는 젊은 과학자들이 금지된 사랑에 빠져 사형을 피하기 위해 망명을 원한다고 정보를 흘려두면 되겠다.
그러니까 가자고.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힘껏 끌어안았다. 어디건 씨발, 어디로든.


“그 개새끼는 니 손으로 꼭 죽이게 해줄 테니까, 등신새끼야.”
“……”
“오늘만 울어.”


품에 안긴 어깨가 기어이 크게 떨었다.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괴로운 얘기지. 몇 번을 남에게 얘기해도 괴롭고.」


아이자와가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바쿠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손 안에 들고 있던 찌그러진 라이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들이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괴로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야한다. 쇼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럼 이제 슬슬 내가 아는 얘기가 나올 타이밍이군.」
「……」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때 야기 토시노리와 아이자와 쇼타는 국경에 있었다.





(계속)




이렇게 제 글에도 드디어 야미쿠모가 등장하고..

또 주말이라고 토닥토닥 두드려 봅니다U////U 중3까지 나온 후에 하편 나올 것 같아요ㅎㅎㅎ 이럴 거면 연재를 했으면 되는데 대체 왜 분량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건지 ㅜ.ㅜ.ㅜ.ㅜ.ㅜ.ㅜ.ㅜ 무튼 또 머지 않은 시기에 중3편도 들고 오겠습니당///// 저는 이제 외출 준비를 하러 쇼쇽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 감상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큰절

?
  • 꼬마어른 2019.04.06 13:55
    와... 진짜 대박입니다ㅜㅜ 캇쨩이랑 이즈쿠가 어떤 식으로 둘을 만났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네요ㅜㅜ
    보배로운 글 감사합니다ㅜㅜㅜ
  • ㅍㅅ 2019.04.06 15:35 SECRET

    "비밀글입니다."

  • 루카님은저의파랑새 2019.04.14 23:0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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