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BBS

* 제목 그대로의 캇데쿠

* 서른살 알파 x 서른살 오메가의 역할리킹 로코 (를 지향합니다)

* 실시간 연재는 포타에서 https://2nd-stage.postype.com/category/ing

* 미약한 수위 주의







오메가 미도리야가 알파 바쿠고 사오는 썰

#Backup (09~12)








옥 같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보석, 그야말로 금지옥엽.

미도리야 이즈쿠를 올마이트, 즉 야기 토시노리가 얼마나 귀애하며 살아왔는지는 부를 때의 호칭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연중 절반 이상을 세계 여러 지구들을 순방하며 보내는 연합정부의 수장은 그만큼 바빴으나, 바쁜 중에도 항상 하루에 두 번은 꼭 아들에게 홀로그램 영상 통화를 걸어오고는 했다. 행여 귀하디귀한 내새끼 자는 시간을 방해할까 시차까지 꼬박꼬박 계산하는 정성이니 그 사랑이 오죽할까. 미도리야에 대한 야기의 총애는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순방 기간동안에도 야기는 두 부자의 다정한 사진과 함께 미도리야가 갓난 시절에 신고 있었던 작은 양말을 잊지 않고 짐에 챙겨 넣었다. 처음 미도리야를 보육원에서 보았을 때부터 신고 있던 그 양말은 그간의 세월동안 하도 세탁한 통에 해져 있었지만, 야기는 그 양말을 부적처럼 꼭 지니고 다녔다.


“왜냐면 너를 만난 그 일이 내겐 기적이었기 때문이지, 미도리야 소년. 그런데 어떻게 내게 보물이 아닐 수가 있겠니.”


공항에서 귀국해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의전차량에 오르던 순간에도 야기의 자켓 속엔 그 작은 양말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아예 본격적으로 무릎 위에 꺼내놓고 감상하는 야기의 두 눈 가득히 사랑이 넘쳐났다. 그 사랑의 목적이자 당사자인 미도리야만 그저 쑥스러울 따름이었다. 리무진 뒷좌석에서 야기와 마주 앉아 있던 숲색 눈에 쓴 웃음이 걸렸다. 파파, 제발 좀.


“제 나이가 이제 서른이에요. 아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 양말은 조금… 아니, 어!  싫다는 뜻이 아니구요!”


말을 꺼내놓기가 무섭게 야기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걸렸다. 진짜! 싫다는 얘기가 아니었어요, 진짜로! 당황한 미도리야가 몇 번이나 양손을 흔들며 변명을 한 후에야 야기가 다시 얼굴을 풀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껄껄 울려 퍼졌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이 나이 먹고도 아들이 그렇게 좋으냐고 내 보좌들도 늘 잔소리를 하거든.”
“아뇨, 파파. 저는 그냥 좀 부끄러워서...”
“괜찮아, 괜찮아. 아빠는 다 이해한단다. 근데 어쩌겠니. 이렇게 똑똑하고 다정한 아들이 내 아들인데, 아끼지 않고 참을 수가 있나. 하하하. 안 그런가, 아이자와!”
“…예, 예.”


중간 좌석에 이이다와 나란히 앉아 있던 비서실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고 검은 이 남자의 이름은 아이자와 쇼타다. 올마이트와 군 입대 동기라는 이유 하나로 보좌관을 거쳐 비서실장이 되어 지금까지도 줄곧 곁을 지키고 있다, 는 신상은 일단 생략한다. 지금 미도리야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 평생을 봐온 아이자와 아저씨도, 나이 서른이 된 아들의 갓난아이 시절 양말을 애지중지하고 있는 파파도 아니었다.

오늘 저녁, 뉴스에서는 올마이트의 귀국과 함께 미도리야 이즈쿠의 결혼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인터넷은 이미 점심 때부터 난리였다. 실시간 검색어는 진작 장악했다. 미도리야 결혼, 미도리야 결혼 상대부터 알파 소꿉친구, 결정적으로 캇쨩까지. 정작 올마이트의 귀국은 저녁 뉴스 시간에만 반짝 순위가 올랐다 사라졌다.
상식적으로 이런 소식을 과연 올마이트가 모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올마이트는 단순한 사업가도 아니라 이 세계의 연합정부를 다스리는 수장이다. 중대한 이슈가 없을 때에도 아이자와는 1시간에 한번씩은 꼭 갱신된 뉴스를 정리해 올마이트에게 보고를 한다.
게다가 아이자와가 누구인가. 아직 오메가를 천대하던 시절에 스스로 자원해 알파들과 베타들과 어울려 군 생활을 하고, 능력만으로 온전히 중령까지 올랐다가 올마이트의 부름을 받아 정치에 입성한 비서실장이다. 올마이트가 묵는 호텔의 수건이 배치된 각도까지 신경 써서 정돈하는 완벽주의자 비서실장이 비행 중이었다고 보고를 잊었을 것인가. 이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알고 계셔, 분명. 100프로.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꿀꺽 울대를 밀었다. 정황상 그랬다. 하지만 올마이트는 배웅 나온 미도리야를 힘껏 끌어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한달동안 이 관계가 너무 좋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에게 올마이트라는, 세계 최고의 파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면 30년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군. 우리 이즈쿠가 세상에서 파파가 제일 좋다면서 손을 꼭 잡아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하.”


나무라실까? 아니, 그러진 않을 거다. 적어도 미도리야가 평생을 보고 자라온 올마이트는 자식에게 결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지금껏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는 사람이다. 피가 섞인 친자식보다 얼마나 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왔는지는 당사자인 미도리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미도리야는 십대도 아니었다.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가 있다고 밝히면 누구보다 지지해주고 응원해줄 사람이 바로 올마이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알파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와 평범히 재회해 연애를 한 게 아니었다.

알파 경매에 참가했고, 돈을 지불했고, 그래서 법을 어겼다. 미도리야가 초조해진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 끝을 꼭 물었다. 한달 전엔 미처 여기까지 생각을 못했었다. 세상을 속여야 한다는 것은 즉 올마이트도 속여야한다는 뜻임을.

숲색 눈이 기어코 크게 흔들렸다. 들키면… 어떡하지?

게다가 오늘은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미도리야가 익숙하지 않은 터틀넥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캇쨩은 왜 하필 오늘 안 하던 짓을 했는지, 왜 하필 오늘 나를 물었는지… 자국은 깊지 않아 어차피 며칠 후면 다 없어질 테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이었다.
다행히 날이 부쩍 추워진 탓인지 올마이트는 미도리야의 차림새를 보고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느냐는 걱정으로 가볍게 지나갔었다.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언제 터질 지 모를 폭탄이라도 안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대체 캇쨩은… 나를 왜 물었지?


“…그래도 두 달만에 돌아오니 날씨가 변한 게 확 느껴지는구나. 네 차림도 그렇고 말이다, 이즈쿠.”
“……”
“이즈쿠?”
“네? 아, 네! 그러게요, 흐.”


끝까지 해주지도 않으면서 느닷없이 목은 왜 물었을까. 아까는 깜짝 놀랐었다. 각인을 하는 줄 알고. 아니, 어차피 메이트 될 생각으로 만나는 건데 각인 해도 곧장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들로 바쁘게 머리를 굴려보다 야기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황급히 대답을 하며 부스스 웃는 아들의 태도에 대해 야기는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아들을 바라볼 때면 더없이 다정한 미소가 평온하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미도리야는 눈치를 챌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 자,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할까, 이즈쿠. 귀국편에 비서실장에게 전해들은 얘기인데 말이다.”


야기가 아들을 향해 부드럽게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단단한 깍지를 껸 그 어깨가 다른 어떤 때보다 강건하고 높아 보였다. 아버지라는 그 이름처럼.
아. 뒤늦은 눈치가 그제야 촉을 울렸다. 올게 왔다.


“우리 아들에게 결혼을 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고?”


역시 그랬다.





*

파티에 초대해야겠다고, 야기는 말했다.


‘명색이 내가 우리 이즈쿠의 아버지인데 말이다.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게다가 나도 어떤 청년인지 궁금하기도 하거든. 물론 우리 이즈쿠가 반한 상대이니 틀림없겠지만, 하하!’


하필 야기의 귀국 기념 자선 파티가 이번 주 토요일이었다. 아직도 반군이 남긴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학살 피해 지역을 돕기 위한 자선 파티는 매년 두 번씩 열리는 정기 행사였고, 취지가 좋은 덕분에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모두 참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겐 인맥을 만들기에 이보다 좋은 자리가 없었다.
문제는… 너무 갑작스럽다는 데에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 최고의 수퍼 파파는 가끔,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일을 저지른다. 그 점만큼은 부자가 똑닮았다고 아이자와 아저씨는 종종 평하고는 했다.


‘중요한 얼굴들이 많이 참석하는 자리니 그 청년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지 모르지. 아, 그래서 그 청년 이름이 바쿠고 카츠키라고? 이름까지 멋지지 않은가. 안 그런가, 아이자와!’
‘…모르겠는데.’


어쨌건.

올마이트는 아이자와에게 한 소리를 들을망정 한 번 내린 결정을 철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엔 아직 당사자에게 묻지도 못한 파티 참석이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꼭 얼굴을 보여주렴. 제 방이 있는 별채로 향하던 미도리야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올마이트는 거듭 말했다. 그때는 미도리야도 조금 울고 싶었다.


‘그렇게 멋진 소꿉친구가 있었다니, 하하. 이것 참 나도 감쪽 같이 속았구나.’
‘……’
‘그래도 우리 아들이 반한 알파니까 분명 멋진 청년이겠지?’


네, 맞아요. 멋져요. 못하는 게 없거든요, 캇쨩은. 요리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 해요.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얼굴이에요. 몸은 두말할 것도 없구요. 그만큼 잘난 알파는 저도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죄송해요, 파파. 저는 거짓말을 했어요.

사저의 주치의는 입이 무겁다. 절대 파파에겐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주치의는 약속을 지켰을 것이고, 올마이트는 미도리야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모를 터였다. 친자식이 아닌 자신을 자식 그 이상으로 아껴주고 보듬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올마이트에겐 수많이 신세를 졌다.
이 이상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근 미도리야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 시켰다.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솔루션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괜찮아. 문제는 없을 거야. 내가 그저 몇 가지 사소한 거짓말에 익숙해진다면야.

버릇처럼 심호흡을 한 미도리야가 답답했던 터틀넥을 벗어던졌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목덜미엔 아직도 잇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거울을 쳐다보던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남겨진 자국 위를 더듬었다. 올마이트와의 과제는 해결했다. 남은 과제는 이것 뿐이었다.

그래서,
캇쨩은 대체 왜 나를 물었을까?


“…이번 달 러트도 지나갔을 텐데.”


심지어 진짜 러트 때도 이런 건 안 했었다. 달아올라 몸 곳곳을 질근거리긴 했지만 그때도 바쿠고는 목덜미만큼은 교묘하게 피해 갔었다. 러트의 열기에 사로 잡혀서도 어떻게든 각인만큼은 안 하려고 애쓰던 알파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은 왜… 상의만 벗어던진 미도리야가 쿠션을 끌어안고 그대로 3인용 소파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어쩌면 나를 작정하고 이용하는 걸 수도 있고.

당연한 거다. 이쪽은 돈을 줬고, 그쪽은 돈을 받았으니까. 바쿠고가 단순히 생계 곤란으로 경매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할만큼 미도리야는 어리고 순진한 나이가 이미 아니었다. 이쯤 되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된다. 세상이 얼마나 차갑고 건조한지, 정 같은 게 없어도 돌아가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지.
지금껏 미도리야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 내가 올마이트 아들이라서, 올마이트의 뒤를 이어 정치가가 되는 꿈을 꾸고 있어서 어떻게든 연이 닿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 선의인 척 다가와 친구가 되자며 악수를 건네도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원한다. 자신을 통해 성공하는 것, 자신을 이용해 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서운할 이유도 없었다. 그들의 성공에 다리 한 번 되어준다고 해서 내가 닳는 것도, 내 인생이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천장을 바라보던 숲색 눈이 쓰게 웃었다.

그럴 거면 너도 아예 차라리 나를 제대로 이용하면 좋을 텐데.

네가 바란다면 나는 뭐라도 들어줄 거야. 네가 요구하는 게 있다면 나는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바쿠고는 벌써 한 달이나 관계를 이어 오는동안 미도리야에게 단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나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서로 편하잖아.”


네 마음을 정말 모르겠어, 캇쨩. 나랑 어쩌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 나를 대놓고 이용해도 나는 전혀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정작 너는 히트사이클 기간에조차 이성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유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은 건지. 나를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넌.
입술을 꽉 씹은 미도리야가 손을 들어 목덜미를 스르륵 매만졌다. 이건 약간 미웠다. 물지를 말든가.


“헷갈리잖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대놓고 물어볼까? 미도리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시 소파 위로 쓰러졌다. 아니, 그렇지만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전화하기도 애매하고… 아냐, 참! 파티 얘길 하면 되잖아?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미도리야가 이번엔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냐, 딱 봐도 파티 같은 거 엄청 싫어할 성격인데…
오늘 오후에도 들었던 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미쳤냐?!


“맞아, 미쳤나봐.”


미도리야가 주섬주섬 곁에 던져놓았던 옷더미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은 자정에서 딱 30분이 모자랐다. 지금 자고 있으려나? 번호를 찾을 것도 없이 즐겨찾기에 찍어놓은 ‘캇쨩’이란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거린 미도리야가 통화가 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대기음이 딱 다섯 번 울리고도 안 받으면 끊는 거야. 미도리야가 긴장한 울대를 꿀꺽 밀었다. 뚜르르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을 울리던 신호음이 돌연 뚝 끊어졌다.


[…왜, 멍청아.]


첫 인사는 여보세요도, 뒤지라는 말도 아니었다. 늦은 시간인 탓인지 목소리는 유난히 탁하고 낮았다. 그 목소리에 미도리야는 곧장 대답할 타이밍을 잠시 놓쳐버렸다. 어…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뭉개면서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이상하게 목덜미가 뜨거웠다. 이 낮은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렸던 딱 그 자리가 자꾸만 두근거렸다.
그 탓이다. 이 미친 소리를 하게 된 건.


“캇쨩, 어… 우리 내일 데이트할래?”
[……]
“아니아니, 데이트가 아니라 쇼핑! 옷 사러!”


말을 해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미쳤나봐. 데이트는 뭐야, 대체?! 미도리야가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래서야 멍청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데이트라니, 세상에. 이제 욕 한 바가지 오지게 날아 오겠지. 뒤지라든가, 꺼지라든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허를 찔렀다.


[오밤중에 데쿠새끼 존나 뭔 소리를 해대나 했더니, 하.]
“……”
[…내일 몇 시.]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설마 받아줄 거라곤.









*

정말로 데이트가 아니라고 미도리야는 말했다. 10번쯤은 더.


“이번 주말에 엄청 중요한 자리가 있어서... 게다가 계절도 바뀌었잖아. 그 김에 캇쨩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흐. 아니, 왜냐면 쇼핑은 혼자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오메가들은 쇼핑을 좋아한다. 기질적으로 열에 아홉은 그렇다. 데이트메이트랍시고 자신을 천  골드에 콜해놓고 갑자기 전시상품이 제 취향이라며 3시간동안 백화점을 도는 오메가를 바쿠고는 지금껏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다. 멋 내는 걸 딱히 즐기지 않는, 열에 하나 있는 오메가가 미도리야 이즈쿠다. 그 정도는 바쿠고도 알고 있었다.
물론 옷 입는 센스는 나쁘지 않다. 약속대로 7시에 링컨 리무진에 실려 짐에 나타난 미도리야는 가볍게 롤업한 일자 청바지에 패턴 셔츠를 덧댄 초록 가디건을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나름 쇼핑을 간다고 TPO에 신경을 쓴 태가 났다. 컬러도, 핏도 그 몸에 딱 맞는 게 보기 좋았다. 게다가 명품 브랜드의 이번 시즌 신상이라던 컬러풀한 스니커즈까지.
바쿠고는 옷을 보는 눈이 까다로운 편이다. 본래도 원체 스타일이 좋았던 데다 마담이 스타일 트레이너를 따로 붙여 교육 시켰으니 그 수준이 오죽했을까. 그 눈에도 미도리야의 스타일은 항상 완벽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딱 티가 났다. 전문적인 스타일러가 만져주는 룩이라는 것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

7시에 리무진 뒷좌석에 올라 하이레벨 쇼핑지구로 향하는 동안에도 미도리야는 말이 많았다. 오늘은 연구원에 새로운 이슈가 떠서 아침엔 정신이 없었다느니, 점심에는 오랜만에 동료들하고 구내 식당에서 가츠동을 먹었다는 둥 평소엔 별로 하지도 않던 제 일상을 줄줄이 늘어놓더니 급기야 깜깜한 창밖을 바라보며 날씨 좋지 않느냔 소리까지 했다. 딱히 지적은 하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들떴고, 수다스러웠다. 한달동안 뒤뚫는 것 빼곤 다 해본 사이다.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 경매장에서 호텔로 넘어올 때도 미도리야는 이렇게 말이 많았었다.


“어퍼몰엔 나도 오랜만에 와보지만, 흐. 아, 저녁부터 먹을까? 여기 5층에 스테이크 진짜 잘하는 이태리 퀴진이 있거든! 아, 그 집은 와인도 진짜 괜찮은데 이탈리아 반도 남부 나폴리에서 주인이 직접 공수해서...”


누가 보면 팟캐스트 켜놓은 줄 알겠다. 그래도 바쿠고는 내버려뒀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된다. 내버려두면 쇼핑에 취미도 없는 주제에 왜 여길 오자고 했는지 불겠지.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미도리야와 잠자코 보폭을 맞춰 걸으면서 바쿠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쉼없이 들떠있는 녀석이 딱히 귀찮지도 않았다. 그 오물거리는 입술이 맘에 드는 사료를 볼이 터져라 씹고 있는 작은 토끼 새끼 같기도 했다. 아니, 새끼 토끼.


“그래서.”


에스컬레이터 앞에 멈춰선 바쿠고가 홀로 튀어나가려던 미도리야의 팔을 지그시 잡아 당겼다. 그제야 말을 멈춘 미도리야가 둥그런 숲색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 눈을 또렷이 내려보며 바쿠고가 흘러내린 숲색머리칼을 미도리야의 귀 뒤로 넘겨줬다. 이건 솔직히 일부러 그랬다. 좋게 말할 때 불라고.


“밥을 먹잔 거야, 아니면 씨발 망할 구두 보러 가잔 거야.”
“어? 아, 그거야 당연히 캇쨩 수트부터 보러... 헉.”


미도리야가 합 입을 다물었고, 바쿠고가 씩 입매를 밀었다. 역시 스킨십이 효과가 있기는 했다.


“내 수트를 왜 사, 멍청아.”
“아니, 그게 어... 그냥 사주고 싶어서? 하하..”


좁아진 선홍색 눈 사이가 꿈틀했다. 들으니 모든 인과가 연결됐다. 자기 구두 사겠다는 소리는 백프로 핑계다. 이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수트라면 바쿠고도 이미 스무 벌은 넘게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열 벌을 더 보태놓은 건 지금 살고 있는 복층 로프트를 선물해준 눈앞의 이 녀석이다. 직접 받진 않았다. 로프트로 거처를 옮겨놓고 보니 드레스룸에 이미 열 벌의 서로 다른 무드의 수트들이 단정히 걸려 있었을 뿐이다. 기계식 손목시계 5개와 장인의 심벌이 붙은 수제화 구두 다섯 상자도 함께.
그런데 그걸 준 장본인이 또 수트를 사주겠단다. 것도 페라리 3대 값으로 자신을 산 인간이. 그냥 선의로 주는 것이라 생각하기엔 수상쩍은 게 너무 많았다. 잡힌 팔목을 확 잡아 당긴 바쿠고가 그대로 미도리야를 옆에 있던 벽으로 밀어붙였다. 동시에 미도리야가 힉, 묘한 소리가 터진 제 입을 틀어막았다.


“똑바로 말해.”
“어...? 캇쨩, 무슨 소릴..”
“뭘 숨기고 있어, 데쿠 새끼.”


눈을 둥그렇게 뜬 미도리야의 머리 옆을 짚으면서 잔뜩 낮아진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주변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둘을 알아보곤 웅성거렸다. 저기, 미도리야 아냐? 숲색눈이 곤란한 듯 쓰게 웃었다.


“그래도 캇쨩, 여긴 보는 눈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 자리를 옮겨서...”
“붙어먹는 상대 있다고 전세계에 다 까발린 주제에, 씨발, 뭘 이제와서.”
“붙어먹는 상대라고까진 말 안 했는데, 하하. 수트도 그냥 사주고 싶은 거고...!”
“어. 너 지금 눈 피했거든, 등신아.”


제 얼굴을 묘하게 빗겨있던 숲색눈이 움찔했다. 하여튼 거짓말은 더럽게 못한다. 바쿠고가 가만히 몸을 기울였다. 잘못 고개를 돌리면 무심코 입술이 붙을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긴장한 얼굴을 향해 바쿠고가 후 낮은 호흡을 밀어냈다. 그리고 난 알파라고.


“알파랑 오메가 사이에서 옷이나 신발은 함부로 선물하는 게 아니지. 그게 망할 관례거든.”


베타와 달리 생식 기능이 집중적으로 진화한 알파와 오메가는 절대 상대에게 아무 의도 없이 선물하지 않는다. 관례가 그랬다. 대놓고 전하지 못하는 말을 선물에 담아 은근하게 속내를 내비치는 거다. 이를테면 신발은 상대에게 네 모든 걸음을 속박하고 싶다는 의미의 선물이다. 악세사리는 착용하는 부분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반지는 손가락, 팔찌는 손목. 목덜미에 걸리는 목걸이는 당연히 네게 나를 각인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는 상대에게 프로포즈를 할 때 흔히 목걸이를 선물하고는 했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봐야 관례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과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사인이다. 그 중에서도 옷은 단연코 직관적이었다. 옷은 벗기라고 주는 거다. 즉 이런 뜻이다. 난 오늘 당신과 섹스하고 싶어요.

하. 낮은 호흡을 밀어낸 바쿠고의 입술이 미도리야의 귀밑을 가볍게 질근거렸다.


“왜.”


스르륵 미도리야의 허리 뒤로 감겨간 손가락들이 등을 따라 패인 옴폭한 곳을 교묘히 쓸어내렸다.


“나랑 하고 싶냐?”
“응. ...아니아니, 물론 진심으로 늘 캇쨩하고 하고 싶지만! 이번엔 그런 뜻이 아니라... 힉,”


꽉 입을 악문 미도리야의 몸이 흠칫 떨렸다. 두 이마가 단단히 맞붙었다. 긴장한 턱선을 따라 미도리야의 입술 앞에 바짝 다가온 바쿠고의 입술이 낮게 웃었다. 물론 미도리야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 이 새끼는 아직 하나를 더 숨기고 있었다. 수트를 왜 맞추러 왔는지.


“야, 데쿠.”
“...”
“못 걷게 해줄까. 여기서.”


흡,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선명했다. 맞닿은 이마엔 벌써 땀이 송글송글했다. 벽과 제 몸 사이에 단단히 갇혀서 시선 둘 곳도 없이 숲색 눈이 이곳저곳으로 굴러갔다. 떨리는 그 깊은 홍채 안에 곤란함이 가득 걸려있었겠다. 그렇겠지. 체취를 느끼는 거다. 알고 있었다. 러트가 아닐 때도 바쿠고는 제 페로몬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고, 그게 미도리야처럼 난임 문제를 겪는 둔한 오메가에게도 얼마나 유효한지는 한달 전에도 충분히 겪었다.
물론 진짜 페로몬을 개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파가 공공장소에서 페로몬을 개방하는 것은 범죄다. 이 역시 오메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고, 바쿠고는 시도때도 없이 페로몬을 열고 다니는 부류들을 역시나 가장 혐오했다. 진심이 아닌 걸 이 녀석도 모르진 않을 거다. 그런데도 딱 잘라 밀어내거나 똑바른 대답을 안 한다. 분명 숨기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멍청아. 바쿠고가 떨리던 숲색 눈을 다시 똑바로 뚫어보던 그때였다. 불긋불긋 달아오른 숲색 눈 끝이 그렁그렁 젖어 있었다. 하, 존나. 바쿠고가 볼 안쪽을 우득 씹었다. 이건 위험한데.


“그게 사실은, 파티가 있어서!”


순간 기울어질 뻔한 뒷목에 찬물이 쏟아졌다. 흐릿하게 흐려지던 눈에 다시 초점을 맞추면서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쳐다보았다. 그게 왜 하필 수트를 사러 왔는지에 대한 대답이란 사실이란 사실을 바쿠고는 그 얼굴을 뚫어보고 난 후에야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숲색 눈꼬리를 체념처럼 축 늘어뜨린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초대했어. 캇쨩을...”


그 한 마디가 겨우 문턱을 넘고 있던 바쿠고를 현실세계로 완벽히 걷어차넣었다. 멍했던 열기가 단번에 싹 가셨다. 파티랬다. 초대했단다. 나를.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크게 쳤다.


“...누가.”
“파파가.”


역시 그랬다.


“캇쨩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래서..”


보통 응석이 많은 자식들이 다 큰 성인이 되고도 아버지에게 파파라고 부른다. 그런 호칭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녀석의 아버지가 자신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올마이트의 후계자란 사실이다. 다 안다. 그리고 왜 이런 흐름이 되었는지도 안다. 이런 미친. 바쿠고가 기어이 선홍색 눈 사이를 깊게 좁혔다.


“그러니까 내가 씨발, 결혼 얘기 벌써 하지 말라고 했지, 어!?!”







의혹의 답은 생각 이상으로 간결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엄청 났다. 수제화 가게의 거울에 비친 선홍색 눈이 감정없이 하 웃었다. 올마이트라니.

올마이트라니, 씨발.


“그니까 캇쨩, 나는 숨기려고 숨긴 게 아니라..! 밥 먹으면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어. 진짜, 진짜로!”
“...알겠으니까 씨발, 구두나 골라.”


어차피 올마이트의 후계자에게 페라리 3대 값으로 팔려갈 때부터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짐작했던 일은 아니었다. 우선 바쿠고는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으며, 설마하니 그 올마이트가 자신을 먼저 소개 받고 싶다면서 초대를 해올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어느 부모가 만난지 이제 겨우 한달이 된 자기 아들의 애인에게 얼굴을 보자고 하겠나. 드라마에선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엔딩으로 갈라진다. 아들 애인에게 헤어지라면서 돈봉투를 내밀거나, 혹은 아들 애인을 죽여버리거나.
이게 얼마나 곤란하며 비상식적인 상황인지에 대해선 미도리야도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러니 숨겼겠지. 결국 지 입으로 불긴 했지만. 수제화 숍의 소파에 앉아 잡지를 펄럭거리던 바쿠고가 하, 입 끝을 비틀었다. 직원이 펼쳐준 구두를 내려다보던 미도리야의 눈이 또 한번 애달픈 빛을 띠었다. 세상 모든 서러움을 다 담은 듯한 그 눈빛이 기어코 우물우물 바쿠고를 돌아봤다.


“미안해, 캇쨩. 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돼서...”


갑작스러운 걸 너도 아니 참 다행이다. 그 소리를 바쿠고는 대놓고 하지 않았다. 그게 저 둔한 오메가 뜻이겠나. 그 놈의 파파인지 빠빠인지 탓이겠지. 하지만 그 파파가 하필이면 이 세계 정부의 수장이라는 올마이트다. 그의 귀국을 겸해 열리는 파티가 어디 보통 파티일까. 아마도 내로라하는 모든 인사들이 다 모이겠지. 인맥을 만들고 디딜 발판을 만들기엔 그만한 자리가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그 기회가 너무 갑작스러운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됐다고, 멍청아. 화 안 났으니까.”


툭 뱉은 말에 그제야 울망울망 흔들리던 숲색 눈이 확 웃음기를 띠었다. 세 번째 구두로 달라면서 직원에게 손짓까지 하는 뒷모습이 확실히 좀 전보다 기분은 괜찮아 보였다. 하여튼 세상에 다시없을 오메가다. 게다가 니가 내 눈치 볼 입장이냐고. 바쿠고가 페이지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미도리야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봤다. 하지만 직원이 돌아온 것과 동시에 눈길은 자연스럽게 잡지로 돌아갔다. 마치 지금 흐물흐물 웃고 있는 저 오메가를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처럼.


“캇쨩, 이거 어때?”


직원은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다른 고객의 계산을 돕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미도리야가 직접 상자를 열고 구두를 꺼냈다. 나름 고심하더니 스트랩이 달린 갈색 옥스퍼드를 고른 모양이다.
턱을 괴고 잡지를 펄럭이면서 잠깐 눈길을 들어 올린 바쿠고가 가볍게 물건의 태를 훑었다. 좋은 가죽은 조명에 비치는 질감만 봐도 그 가치를 안다. 바쿠고는 특히나 그랬다. 눈길로 훑기만 해도 가장 좋은 것을 골라낸다며 마담이 감탄했던 안목이다. 저건 못해도 한 족에 몇 백 골드는 가볍게 넘어가는 물건이다. 앞코가 둥글어 다른 구두보다 세련된 맛은 떨어졌지만 단정한 느낌이 있어 미도리야에게도 잘 어울렸다. 그 모든 감상들을 바쿠고는 그저 짧은 말로 압축시켰다.


“사.”
“아, 그럴까? 이게 제일 낫다는 뜻인 거지?”


다행히 저 둔한 녀석은 귀찮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쿠고의 말투에도 그저 흐물흐물 웃었다. 한 번 신어보고 싶은 모양인지 미도리야가 끈을 풀어헤치고 오른발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끈을 묶는 손이 영 어설펐다. 하필 직원들은 제대로 된 진상이라도 만났는지 매니저까지 죄다 카운터로 몰려가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소파 앞엔 신발 끈을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미도리야만 오도카니 서있었다.
하, 씨발. 바쿠고가 기어이 펼친 잡지를 덮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여튼 더럽게 손 많이 가는 오메가다, 이 새끼.


“구두 벗어.”

“어?”
“구두 벗으라고, 멍청아.”


웅크리고 앉아 낑낑 거리던 미도리야가 영문 모를 얼굴로 허리를 폈다. 행여 아직 계산도 하지 않은 상품에 흠집이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벗은 구두를 바쿠고가 가볍게 집어 올렸다. 어설프게 꼬여있던 끈을 검지 하나로 한 번에 풀어헤친 후에 바쿠고가 몸을 굽혔다. 갑자기 제 앞에 몸을 숙이는 색이 밝은 머리를 보고 미도리야가 기겁을 했다. 여기까진 저도 예상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할 수 있어, 캇쨩.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읏,”


우물거리는 소리가 귀찮아서 발목을 움켜잡았더니 힉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괜찮다며, 저가 하겠다며 발목을 비틀며 꼼지락거리니 어쩐지 약이 올라서 바쿠고는 아예 오른 무릎을 직각으로 세우며 제 다리 위에 녀석의 발을 꽉 눌러 놓았다.
손 안에 잡히는 뼈대는 바쿠고의 생각보다 곧았고, 발목엔 의외로 자잘한 흉터들이 많았다. 곱게만 큰 줄 알았더니. 어릴 때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이곳저곳 찍어 박는 데쿠 녀석을 떠올리니 어쩐지 좀 웃겼다. 그때는 어땠을까. 그때도 이 미역뭉치 같은 머리칼에 여전히 눈은 더럽게 깊고 컸겠지. 세상에 공표한 가짜 설정처럼 정말 이 녀석과 같은 보육권에서 자랐더라면 그 모습을 질리도록 봤을 것이다. 맨날 픽픽 엎어지면서도 저랑 놀아달라고 졸졸 쫓아다녔겠지.
절로 느슨해지려는 입꼬리를 팽팽하게 잡아 내리면서 바쿠고가 그 발에 그대로 구두를 끼워 넣었다. 고개를 들자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떨고 있던 숲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오메가였다. 지금 입고 있는 그 망할 옷도 아침에 다른 사람이 골라준 게 분명했는데.

손이 스칠 때마다 어깨를 좁히며 일일이 떤다. 발목까지 붉게 물들이고선 이 대접을 어쩔 줄 몰라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저랑 삽입 빼곤 다 해본 새끼인데.


“이미 충분히 익숙하실 텐데요, 미도리야님. 왜 긴장하십니까.”
“캇쨩, 갑자기 왜 그런 말투로…”
“재밌어서요.”


존대를 썼더니 조금 전보다 확연히 당황하는 게 매우 볼만했다.  이렇게 일일이 반응하는데 놀리고 싶지, 그럼 놔두겠냐고. 기왕 놀리는 거 이 참에 제대로 하자 싶어 바쿠고는 밀려 올라가던 입꼬리에서 남은 웃음기를 싹 지워버렸다. 능숙하게 손을 놀려 단단히 끈을 묶고 매듭을 지은 바쿠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끝났습니다.”


그 말을 따라 미도리야가 제 아래에 웅크려 있던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미도리야는 이번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깜박거리는 법도 잊어버린 숲색 홍채 앞에서 색이 밝은 머리가 구두 위로 기울었다.
그리고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맘에 드십니까, 미도리야님.”


부드럽게 밀린 입꼬리가, 평소의 무례함을 지운 목소리가 낮게 물었다. 숲색 눈이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네.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전부. 모두 다… 여기도, 이 가게도, 구두도.”
“……”
“그래도 그 중에서 그쪽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등신새끼. 바쿠고가 입매를 픽 비틀었다. 그 채로 구두가 꿰어진 미도리야의 발목을 다시 땅 위로 내려주고 바쿠고는 허리를 폈다. 정리가 끝났는지 급하게 되돌아온 직원이 상자를 정리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하지만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민 건 미도리야가 아니었다.
쏟아질 듯 크게 열린 숲색 눈이 서명을 하는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왜? 라는 그 질문을 읽어낸 바쿠고가 가볍게 대꾸했다. 수트 답례, 멍청아.


“구두 사주는 건 상대를 속박하고 싶다는 뜻이랬는데…”


미도리야가 우물거렸다. 하지만 바쿠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바쿠고 카츠키의 복층 로프트 앞으로 정식 초대장이 도착했다. 토요일 5시에 열리는 디너파티의 호스트는 올마이트였다.










*

미도리야는 거의 한 숨도 자지 못했다.

파티 당일에도 미도리야는 밤새도록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를 빠져 나왔다. 고용인들이 퀭한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스타일팀 팀장은 비명까지 질렀을 것이다. 그야말로 다크서클이 무릎과 인사하기 직전이었다.


“세상에... 아니, 오늘 파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면서 대체! 안되겠어요.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아니, 어, 팀장님 저는 오늘... 힉!?”


그대로 어깨를 붙들려 저택 내에 있는 살롱으로 보내졌다. 물이 다 채워지지도 않은 히노끼 욕탕에 던져져서 항변할 틈도 없이 LED 마스크팩이 씌워졌다. 마스크를 벗기가 무섭게 이름도 모를 수상한 패치들을 떼었다 붙이고, 묘한 크림들이 정신없이 발리고 나니 거울 앞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까보다 제법 얼굴이 나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단장이 시작됐다. 고용인들이 달려 들어 동시에 머리를 하면서 셔츠를 입히고 단추를 채우는 내내 미도리야는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평소처럼 이런 대접에 쩔쩔 매지 않았던 것은 딴 생각을 하느라 그랬다. 역시 그때도 미도리야는 그 다크서클을 만들어준 장본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바쿠고는 제 발목만으로 사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꿈에서.

쇼핑몰을 함께 다녀온 이후로 미도리야는 며칠동안 내내 비슷한 꿈을 꿨다. 그저께는 발목에 수갑을 차고서 엎드려 바쿠고의 구두를 핥는 꿈을 꿨고, 어제는 탈의실이었다. 어째선지 꿈속에서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수트를 맞췄던 의상실의 탈의실 안에 들어가 있었고, 전날과 달리 앉은 쪽은 바쿠고 쪽이었다. 쇼핑몰에서 제 발에 직접 구두를 신겨주었던 그 근사한 손이 제 발목을 스르륵 감싸올 땐 꿈 속에서도 신음이 터졌다. 저를 올려보는 선홍색 눈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미도리야님.’


그때도 바쿠고는 꿈속에서 미도리야를 그렇게 불렀다. 무례한 반말이 아닌, 정중하고 깍듯한 존대가 낮게 속삭였다.


‘구두만 신겨 놓으면 달아날 것 같아서요.’


말을 맺은 색 밝은 머리가 발목으로 확 기울어진 것과 동시에 잇날이 박혔다. 온몸이 흠칫 떨려서 미도리야는 기어이 비틀거리며 탈의실 벽을 짚으며 간신히 버텼다. 꿈인데도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신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역시 꿈인데도, 미도리야는 손등을 씹으며 소리를 참았다. 발목에 이를 세웠던 준수한 입술이 천천히 곧은 뼈대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닿은 자리마다 정성껏 핥고 빨며 들이마실 때마다 나른한 물소리가 츱츱 울렸다. 그때마다 살갗은 녹아내릴 듯이 끓어 올랐다. 지퍼 안쪽이 조금씩 불편한 고개를 들었다. 꿈인데도, 분명 꿈이었는데.

미도리야의 무릎 뒤로 돌아간 뜨거운 혀가 천째로 예민한 틈을 깊게 애무했다.

꽉 깨문 손등새로 참지 못한 신음이 울음처럼 흐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미도리야는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 벗은 것보다 천째로 핥아지는 것은 답답하고 불편한만큼 더 농밀했다. 뜨거운 혀를 찌를 때마다 습해진 까슬까슬한 천이 예민한 피부 위를 문질러댔다. 꿈인 게 억울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가고 싶어. 뒤가 안 되면 앞이라도. 숨을 참느라 잔뜩 젖어버린 손등을 제 입에서 풀어낸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머리칼을 슬며시 움켜잡았다. 바쿠고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픽 비틀리는 입꼬리가 역시 꿈에서도 근사했다.


‘바라는 게 있는 얼굴인데.’
‘맞아. 있어. 엄청.’
‘뭘 말입니까, 미도리야님.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전 모르는데요.’


일부러 이러는 거다. 일부러 알면서 묻는 거야. 미도리야가 억울함에 볼 안쪽을 꽉 씹었다. 꿈 속에서도 이런 성격일 필요는 없잖아.


‘...하고 싶어요.’
‘뭘요.’
‘그거...’
‘아, 설마 그거라는 게 제 좆을 미도리야님 뒤에 밀어넣고 비벼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당장 지퍼 안에 있는 발기한 미도리야님의 좆을 입이든 손이든 빼달라는 말씀이신지.’
‘좆.... 이라니, 캇쨩!’


꿈인데도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을 생생하게 느꼈다. 이런 말을 저런 입으로, 것도 평소에 쓰지 않는 말투로 들은 대가는 엄청났다. 꿈인데도 잔뜩 달았고, 꿈이면서도 잔뜩 급해져서 기어이 손이 나갔다.


‘이딴 건 됐으니까 좀,’


여전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던 바쿠고를 급하게 일으켜곤 손을 잡아다 제 앞섶에 무작정 문질러댔다. 숲색 눈가가 조급함과 초조함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마 바쿠고를 쳐다보던 얼굴은 그때만큼은 꽤나 험악했을 것이다. 급해서.


‘얼른 하기나 해, 개자식아.’


하. 선홍색눈의 미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이 근사해서 미도리야는 잠시 넋을 잃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허리가 단단히 맞붙어 있었다. 발목을 더듬고 능숙하게 끈을 꿰던 그 솜씨 좋은 손가락들이 지퍼를 내리고 드로즈 속을 은근히 헤집었다. 달아오른 호흡을 잇새로 뭉개면서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등에 팔을 감았다.
얼른, 더, 빨리, 얼른, 당장. 잔뜩 급해진 말투에 가볍게 입매를 민 바쿠고가 이윽고 그 목에 단정히 걸려있던 넥타이를 잡아 뽑았다. 벽 쪽으로 급하게 돌려세운 미도리야의 허리에서 바지와 속옷이 단숨에 무릎까지 벗겨졌다.


‘소리 죽여. 올마이트의 후계자가 얼마나 밝히는 새끼인지 세상에 들키기 싫으면.’


귓등의 갈라진 틈을 깊게 핥으며 바쿠고가 날선 숨을 거칠게 몰아냈다.


‘한다.’


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는지. 미도리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기분 좋은 긴장에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아랫배가 달렸다. 이윽고 허리 틈에 바짝 다가붙은 열기가 두 다리를 가르며 격렬히, 급하게...
왜 꿈이야. 억울함에 미도리야가 입술 끝을 꽉 깨물었다. 그런다고 진심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역시 수트 살 때 해봤어야 했는데...”
“예?”
“아,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하.”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고용인들에게 황급히 고개를 가로 저은 미도리야가 소리없이 입가를 당겼다. 무심코 진심이 흘러 나왔다. 이게 흔히들 말하는 욕구불만일까? 고용인이 시키는대로 순순히 팔을 올리면서도 미도리야는 그 생각 뿐이었다. 며칠간 야한 꿈을 꾸고 잠을 설친 것도 아예 관계 없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쇼핑몰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일에 바빠 바쿠고를 보지 못했었다. 즉, 전혀 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삽입은 차치하고서라도 블로잡도, 핸드잡도, 심지어 키스라든가 손을 잡는 다섯살용 스킨십까지도.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매번 데리러 가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불한당, 아니, 바쿠고 카츠키는 도련님의 알파 파트너라구요. 오메가가 알파 파트너를 데리러 간다니 이런 관례는 없습니다. 없다고요!”


자택에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은 후에 저택을 나설 때는 이미 5시였고,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데리러 가야겠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동시에 이이다는 노발대발했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 아닐까 싶을만큼 이이다는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것을 중시하는 성격이다. 그 성격에 자꾸 정해진 일정에 변수가 생기니 견딜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무엇보다 항상 단정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던 미도리야가 자꾸 안하던 행동을 하는 이유가 그 불한당 같은 알파 때문인 것을 이이다는 가장 못 견뎌하는 눈치였다.


“너무 그러지마, 이이다군. 물론 일정을 바꾸게 된 건 내가 진짜진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이마를 반쯤 훤히 드러낸 미도리야가 슬며시 웃었다. 오늘 스타일팀은 미도리야를 위해 클래식 턱시도를 골랐다. 피부톤과 머리색에 맞춰 옅게 감색이 감도는 캐시미어 턱시도에 블랙 타이를 걸고, 행거치프에는 흰 벨벳 손수건을 꽂아 놓았다. 모두 스타일팀의 초이스였지만 구두만큼은 미도리야의 고집대로 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는 이이다에게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리무진에 오르면서도 미도리야는 연신 제 발 쪽을 흘깃거렸다. 턱시도에 옥스포드 슈즈는 다소 캐주얼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걸 신고 싶었다.

길게 뻗은 순환도로를 빠져 나간 리무진이 어퍼타운 고급 빌라 앞에 멈춰섰다.

오후 일정이 따로 잡혀 있던 올마이트는 아마 파티장으로 곧장 올 것이다. 평소라면 미도리야도 동행했을 테지만 미도리야는 대신 바쿠고를 먼저 보는 쪽을 택했다. 나름은 배려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고를 쳐버린 탓에 전세계 사람들이, 올마이트조차도 바쿠고 카츠키라는 자신의 알파애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집으로 마중하러 오라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바쿠고가, 가짜이긴 하지만, 연애 중인 상대의 집에 넉살 좋게 찾아올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결혼 발표에 미쳤냐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도리야는 이 관계를 결코 강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된다. 하기야, 이미 인터뷰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사고를 친 상태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로비로 내려선 미도리야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리러 가겠노라 메시지를 했던 시간까진 아직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진짜 얼마나 끝내줄까? 클래식 턱시도를 입은 캇쨩은.

수트를 입은 모습이라면 지난 번 경매 때부터 종종 봤다. 게다가 데이트메이트 출신이니 짐작컨대 수트라면 지겹도록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클래식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처음 맞출 때는 짜증을 엄청 냈었는데. 생각에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수트라면서 어디서 턱시도를 들이미냐면서, 오메가들의 신종 인형놀이냐며 바쿠고는 있는대로 짜증을 냈지만 치수는 모두 순순히 쟀다. 파티가 고작 사흘 뒤라 제대로 가봉을 하고 지어 입는 턱시도는 맞추지 못하고 대신 치수를 잰 후에 기성 턱시도를 수선해 입는 쪽을 택한 게 약간 아쉽다. 미도리야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랬으면 치수 재는 시간도 길었을 거고, 탈의룸에도 오래 있었을 거고, 재단사가 자리를 비웠더라면...

아니, 아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미도리야가 주근깨가 흩어진 제 뺨을 찰싹찰싹 쳤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고, 벌써부터 음란마귀가 활동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게다가 오늘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다. 자리를 마련한 올마이트를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은 불길하다. 미도리야가 연거푸 고개를 가로 젓고 제 뺨을 두드리던 그때였다.


“하. 뭐하냐.”


호흡을 걷어차는 것 같은 익숙한 웃음 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리를 따라 허겁지겁 눈을 들자 로비 앞에 우뚝 서있던 색밝은 머리칼의 미남이 보였다. 동시에 미도리야가 입을 헙 틀어 막았다. 인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세상에.

잘 생긴 건 질리도록 알고 있지만, 신이시여. 이렇게 잘 생길 일인가요?

재단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골랐던 블랙 턱시도는 둥글게 처리된 미도리야의 턱시도와 달리 피크트 라벨로 처리해 그 깃이 날렵하고 예리했다. 자켓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비스듬히 들어올린 예리한 턱선에도 그 핏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저도 모르게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뚫어보았다. 반듯하게 드러낸 하얀 이마부터 단단히 그 몸을 감싼 블랙 턱시도를 지나 제 것과 달리 끈이 없는 포멀한 슈즈까지. 감탄 대신 울대를 꿀꺽 밀었더니 바쿠고가 기가 막힌 듯 헛웃었다.


“스캔하냐?”
“어? 어. 아니, 어, 너무 멋져서...”
“뭘 씨발. 나 잘난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맞아. 그러게.”
“...”
“진짜, 완전, 최고 멋져.”


선홍색 눈이 드물게 당황한 빛을 했다. 아마 바쿠고는 놀리려고 꺼낸 말일 테다. 그 말에 맞다고 즉답이 되돌아오니 쑥스러웠던 모양인지 바쿠고는 괜히 얼굴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멋지기는, 등신아. 그리고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바쿠고를 미도리야는 또 넋을 잃고 쳐다봤다.
눈앞에서 홀로그램이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정말 무심하다. 어떻게 이런 얼굴로 연예인을 안 했지? 어떻게 이런 얼굴을 가만 놔뒀을까? 하기야, 세상이 바쿠고 카츠키의 가치를 자신보다 일찍 알아보았다면 진작 토도로키처럼 전세계를 누비는 배우가 되어 있었겠지. 생각에 미도리야는 어쩐지 슬퍼졌다. 그랬으면 저랑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토도로키처럼 우연히 소개에 소개를 받아 만나지 않는 한은.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 중이야. 등신새끼처럼 실실대더니.”


한 발 앞에 다가선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가볍게 눈을 구겼다. 바쿠고는 눈치가 빠르다. 그에 비해 미도리야는 눈치가 둔한 대신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항상 제 기분은 어떻게 이렇게 잘 읽어내는지. 신기하면서도 민망한 기분에 미도리야가 금방 시무룩한 기분을 지우고 눈매를 둥글게 접었다. 바쿠고도 그 얼굴엔 딱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미도리야의 얼굴 곳곳에 이리저리 닿았다 떨어졌다.
왜? 미도리야가 툭 물은 말에 바쿠고가 가볍게 대꾸했다. 그냥, 멍청아.


“데쿠새끼 오늘 분위기가 평소랑 달라서.”
“...”
“에스코트할 맛 나겠는데.”


이건 칭찬인 걸까, 놀리는 말인 걸까. 헷갈려 하는 미도리야 앞에 바쿠고가 툭 제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한 미도리야가 숲색 눈을 꿈벅꿈벅 떴다. 선홍색 눈 사이가 가볍게 구겨졌다 펴졌다. 잡으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 캇쨩, 갑자기 내 손은 왜... 으억?”


내밀어진 손이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미도리야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 채로 제 팔에 걸며 팔짱을 끼도록 만든 후에야 바쿠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졸지에 반쯤 끌려가는 꼴이 된 미도리야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별 수 없이 바쿠고에게 끼워진 팔을 따라 나란히 곁에 섰다. 그제야 뒤늦은 눈치가 지금 이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아. 바쿠고를 올려다보는 미도리야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알파가 에스코트해주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에스코트가 에스코트지, 뭘 기분씩이나.”


가볍게 입매를 민 바쿠고가 남은 손으로 리무진의 뒷좌석을 열어 젖혔다. 팔에 걸쳐져 있던 미도리야의 손을 풀고 살며시 잡아드는 동작은 익숙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대로 미도리야를 좌석 쪽으로 안내하듯 손을 이끌던 바쿠고가 불현듯 행동을 멈췄다. 미도리야의 손등이 바쿠고의 입가에 스치듯 멈춰 있었다.


“물론 모든 알파가 나처럼 끝내주진 않겠지만.”


그대로 기울어진 입술이 미도리야의 손등 위에 쪽,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그 손을 떨칠 뻔 했다. 부드러워서, 뜨거워서,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데쿠새끼. 내가 아무한테나 아양 떠는 성격은 아니거든.”
“...”
“대놓고 설레지마, 멍청아.”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뒤에 붙은 말은 작아서 똑바로 듣지 못했다. 어? 라고 되묻는 미도리야의 말에 대꾸해주는 대신 바쿠고는 저를 돌아보는 등을 잠자코 리무진 뒷좌석 안에 밀어넣었다. 미도리야가 먼저 자리에 앉고, 바쿠고가 그 옆에 올라 문을 닫은 후에야 리무진은 파티장을 향해 출발했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흐, 웃었다. 뭘 또 쪼개. 바쿠고가 물었다. 미도리야가 대답했다. 그냥.


“다음엔 턱시도 제대로 맞춰야겠다 싶어서.”
“...”
“진짜, 꼭, 제대로..”
“뭔 헛소리야, 혼자.”


그런 게 있다며 미도리야는 저 혼자 흐흐 웃고 말았다. 이제 해가 완전히 저문 풍경이 차창 너머로 경쾌하게 흘러갔다. 파티의 시작이었다.











“아, 그런데 미도리야 도련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이다가 대신 맡아두고 있던 미도리야의 핸드폰을 슥 내밀었다. 잠시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노라며, 이이다는 말했다.


“토도로키님께서 전화를 주셨거든요.”







*


사실 바쿠고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었다.

거듭 말하지만 바쿠고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연히 파티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가짜 연애 상대로 경매에서 팔려온지 한달만에 일방적으로 결혼상대라는 공표를 당한 것도 모자라 그 상대의 가족이 여는 파티에 참석해야한다니, 이 자리가 달가울 리가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고의 기분은 괜찮았다. 아니, 사실 꽤 좋았다. 전적으로 미도리야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보는 재미가 쏠쏠한 녀석이었다. 차문을 열어주며 은근슬쩍 손등에 입술을 찍었더니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던 녀석은 리무진에 올라서도 제 쪽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여러모로 신선했다. 이런 새끼가 또 있겠냐고.

입으로는 저에게 삽입을 안 해준다며 노골적이고 대담한 소릴 해대면서 손끝이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 떠는 모습은 정말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늘따라 수시로 미도리야에게 손이 가는 것도 그 탓이다. 조수석에서 이이다가 말을 걸 때도 바쿠고는 은근슬쩍 미도리야의 허리에 손을 걸고 턱시도 자켓 위로 드러난 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기분은 딱 거기까지였다.


“토도로키군? 진짜? 아, 그럼 전화기 저 주세요. 잠깐, 캇쨩, 잠시만.”


조수석에서 핸드폰을 건네받으면서 미도리야는 제게 감겨있던 바쿠고의 손을 스르륵 풀어냈다. 양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선 화면을 내려다보던 숲색 눈이 아예 앞으로 기울었다. 그 얼굴에 활짝 웃음이 걸렸을 때부터 바쿠고는 어쩐지 언짢았다. 그럴만 했다. 아무리 가짜 연애라고 해도 자신과 미도리야 이즈쿠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닌, 알파와 오메가로 묶여 있는 관계다. 그 사이에 다른 오메가가 끼어들 수 없듯, 다른 알파가 끼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알파는 본래 다른 알파를 견제하는 경향이 강하다. 오메가가 멋을 내는 걸 좋아하고, 제 상대에 대해 애착이 강한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살아온 환경에 따라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며 모든 알파와 오메가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어. 메시지가 와 있었구나. 이이다군, 혹시 오늘 파티에 토도로키군도 초대 받았어?”
“아마도요. 다른 분도 아니고 토도로키님이시잖습니까. 아이자와 보좌관님이 어련히 초대장을 보내셨겠지요.”
“그렇겠지? 그렇지? 와, 오랜만에 얼굴 보면 진짜 좋겠다. 벌써 세 달을 못 봤는데!”


그러니까 지금 느끼는 이 불쾌감도 본능에 기인하는 것이겠지. 바쿠고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 뿐이다.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선홍색 눈이 활짝 웃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잠시 흘깃 거렸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웃지 말라고, 등신 새끼야. 빡치니까.


“캇쨩, 왜? 뭐가 불편해?”


시선을 느낀 미도리야가 홱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눈이 마주쳤다. 파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어온 말에 바쿠고는 그저 짧게 대꾸하고 말았다. 아니.


“전혀.”
“...”
“내릴 준비나 해. 슬슬 다 와가는 것 같으니까.”


올마이트의 귀환을 기념하는 디너파티는 어퍼타운의 센트럴 호텔에서 열린다. 그전에도 데이트상대의 초대로 바쿠고는 몇 번 라운지 바에 들른 적이 있어서 이 호텔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저 멀리 센트럴 호텔의 상징이라는 드넓은 인공호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쿠고가 허리를 똑바로 펴며 목에 걸린 타이를 바로 잡았다.
다시 핸드폰을 이이다에게 건네준 미도리야가 제 왼쪽에 앉은 바쿠고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짧게 마주친 눈 안에서 수많은 말이 얽혔다 사라졌다. 로비 앞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진 리무진이 천천히 속도를 세우며 멈춰섰다. 혀밑까지 치민 말을 이번에도 꾹 누르면서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미도리야님.”


언짢은 빛은 하나도 남기지 않은 선홍색 눈이 정중하게 말했다. 눈을 둥글게 열던 미도리야가 이내 흐 웃었다.


“벌써부터 두근거리면 안 되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미도리야가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로비에 서있던 보이들이 문을 열며 인사를 했다. 붉은 카펫에 내려선 순간, 사방에서 플래시들이 별처럼 펑펑 터졌다.
연예인 된 기분인데. 바쿠고가 소리를 죽여 가볍게 말했다. 그러게. 미도리야가 역시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입매를 당겨 보란듯이 웃었다. 그때만큼은 어리숙한 데쿠새끼도, 멍하고 특이한 오메가도 아니었다.


“긴장해야할 거야. 물론 내 탓이고 내 잘못이니까 나도 최선을 다할게.”


카메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미도리야가 담담히 말했다.


“저 사람들은 지금 올마이트 후계자가 반해버린 알파의 최대 발기 사이즈까지 기사로 내고 싶을 테니까.”
“……”
“손 잡고 걸을까?”


말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두 손이 가볍게 마주 얽혔다. 먼저 걸음을 뗀 건 바쿠고였고, 그 손에 담담히 이끌리며 미도리야가 반 발 늦게 레드 카펫을 밟았다. 로비에서 리셉션장까지 이어지는 50미터를 걸어가는동안 카메라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다는 알파와 오메가 커플을 빠짐없이 담아냈다. 저에게 꽃을 건네는 어린 소녀에게 활짝 웃어주다 미도리야는 잠시 걸음을 잘못 딛고 휘청거렸고, 그 순간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부축했다.
포토존에 도착할 때까지 바쿠고는 그 팔을 풀지 않았다. 가볍게 끌어안고, 끌어안긴 채로 정면을 돌아서자 이번엔 질문이 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할게. 미도리야가 여전한 얼굴로, 이번에도 소리를 죽여 바쿠고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그때도 역시 바쿠고가 익숙하게 보았던 어리숙한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미도리야군, 정말 오랜만에 올마이트님과 함께 하는 공식자리인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약간 긴장되지만 괜찮아요. 올마이트의 귀국 파티를 함께 빛낼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곁에 계신 분이 화제의 중심에 선 파트너분이신가요? 어떻게 만났나요?”
“소꿉친구예요. 제 트레이너이기도 하구요. 인터뷰에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이런 파티에 동행하셨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텐데요. 미도리야군이 곧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지금까지 알파와는 아무 스캔들도 없으셨던 걸로 아는데,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라도 있나요?”
“결혼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게 없구요. 서로 진지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곁에 계신 분께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미도리야군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나요!”
“알파와 오메가니까 역시 잠자리겠죠?”
“두 분 히트사이클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질문은 조금씩 도를 넘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바쿠고가 소리없이 볼 안쪽을 꽉 씹었다. 꺼지라는 말이 벌써 혀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얼굴을 읽었는지 바쿠고를 바라보며 활짝 웃은 미도리야가 입모양으로만 바끔거렸다. 괜찮아, 내가 정리할 테니까.
우습게도 그 말에 울컥 오기가 났다. 미도리야가 곤란한 얼굴로 다시 기자들을 돌아보던 그 순간이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입장 시간이 다 되어서 질문은 여기까지…”
“전부 다 맘에 듭니다.”


툭 터진 낮은 목소리에 기자들이, 동시에 옆에 서있던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쳐다보았다. 마주 잡은 손에 꽉 힘을 실은 바쿠고가 씩 입매를 밀었다.


“첫눈에 반했거든요.”


동시에 홱 얽은 손을 마주 당겨 그대로 미도리야를 끌어안은 바쿠고가 입술을 겹쳤다. 환호 같은 비명이 터졌고, 카메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담았다. 그날, 바쿠고의 품에 끌려가 허리가 기울만큼 키스하던 미도리야의 모습은 다음 날 오전이 될 때까지 온갖 포털의 메인 화면에 걸려 있었다.


“…이런 것까진 안 해도 괜찮은데.”


다시 바쿠고의 손에 잡혀 포토존 앞을 떠나면서 미도리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흘깃 돌아본 귀끝이 불긋불긋했다. 하. 바쿠고가 가볍게 입 끝을 비틀었다. 우습게도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아까 느낀 불쾌감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내 맘이지, 등신아.”
“……”
“똑바로 걸어. 넘어지지 말고.”


수시로 비틀거리는 미도리야를 다시 부축하며 바쿠고가 파티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인공호수를 둘러싸며 반원형태로 지어진 센트럴 호텔은 층수가 높지 않은 대신 모든 공간들을 넓고 큼직하게 지어 놓았다. 도심형 리조트를 표방하고 있다며, 때문에 조용히 쉬러 오기 좋다고 알려준 것은 역시 바쿠고를 이 공간에 초대해주었던 오메가였다. 초대를 받는다고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호텔도 아니었다. 고객들의 편안한 휴식을 보장한다는 취지 하에 이곳의 보안은 다른 어디보다도 엄중했다.
때문에 수변을 감싸고 지어진 1층 테라스와 4층 루프탑 라운지에선 기업 총회나 정부 주재의 중요한 파티들이 자주 열렸다. 특히 1층 테라스는 인공호수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거대한 폭포가 한 중간에 지어져 있어 꽤나 운치가 좋았다. 하지만 바쿠고에겐 딱히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저 엿 같은 폭포 앞에서 러트 유도제를 썼었지, 그 망할 오메가가. 불쾌한 기억에 바쿠고가 눈 사이를 잠시 깊게 좁혔다. 그러나 불쾌함을 오래 내색할 시간과 여유는 이번에도 없었다.


“오, 세상에. 이즈쿠!”


밤이 되어 색색의 조명으로 물들여 놓은 폭포 앞에 그 남자가 서있었다. 이미 TV나 인터넷에서 수시로 봐왔던 금발의 남자는 바쿠고의 짐작보다도 풍채가 좋았고, 인상 역시 푸근했다. 남자가 팔을 활짝 벌리자 그때까지도 제 손을 잡고 있던 미도리야가 손을 풀곤 그대로 남자에게 달려가 안겼다. 파티장까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기자들 대신 연합정부 로고가 찍힌 비표를 걸고 있던 정부의 카메라 기사들이 그 모습을 플래시 없이 촬영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누구인지는 빤했다. 세상은 모두 그를 올마이트라고 불렀다.


“아, 자네가 이즈쿠가 말했던 바로 그 알파로군.”


서른 살이 된 아들을 다섯 살 아이처럼 꽉 끌어안아준 올마이트가 그제야 팔을 풀며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대답 대신 포옹이 돌아왔다. 윽 소리가 터질만큼 강한 팔에 억지로 끌어안긴 바쿠고가 인상을 썼고, 곁에서 보던 미도리야가 소리 없이 기겁을 했다. 아무래도 스킨십은 이 남자의 버릇인 듯 했다.


“파파, 그렇다고 갑자기 끌어안으시면…!”
“아, 그런가? 하하, 미안하네. 너무 반가워서 말일세.”


올마이트가 쑥스러운 얼굴을 하며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래놓고도 아쉬운지 바쿠고의 손을 잡고 억세게 흔들었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역시 저 오메가 후계자의 남다른 성격은 저를 키워준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왜 우리 아들이 자네를 골랐는지 단박에 알겠군. 이렇게 잘 생겨서야, 하하! 그래, 이름이 바쿠고 카츠키라고. 얼굴도 모자라 이름까지 잘 생기다니 이것 참, 역시 우리 이즈쿠가 보는 눈이 있어!”
“파파, 그러니까 좀… 윽!”


바쿠고와 격하게 악수를 했던 손이 미도리야의 등을 예고 없이 퍽 두드렸다. 정말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물론 매력이 그것 뿐만은 아니겠지. 트레이너라는 이야기는 들었네. 혹시 어떤 운동을 좋아하나? 수영? 골프?”
“뭐건 못하지는 않습니다.”
“오, 그래? 잘됐군. 마침 좋은 라운딩 자리가 있는데 말이야.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쪽으로 오게. 이즈쿠, 네 짝 좀 잠시 빌리자꾸나.”


올마이트는 마음에 든 것이나 한 번 결심이 선 것을 물러는 사내가 아니었다. 바쿠고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하긴, 그 행동력이 그를 이 연합 정부의 수장으로 만들어준 것이겠지. 당황한 미도리야가 둘을 붙잡을 틈도 없이 그대로 바쿠고를 붙잡아 무작정 끌고 가는 행동력은 아무리 봐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허나 바쿠고는 싫다는 얼굴도, 뿌리치지도 않았다.

소름끼칠만큼 잘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경매에 나섰던 것도, 하필 미도리야 이즈쿠여야만 했던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었다. 벌써 자리를 가득 채운 파티장엔 바쿠고도 익숙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올마이트가 빙 둘러 서 있는 무리들을 향해 바쿠고를 이끌었다. 저 뒤에서 미도리야가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것을 바쿠고는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미안한데, 멍청아. 나는 너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고. 이 자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아, 이쪽은 우리 아들의 소꿉친굴세. 바쿠고 카츠키라고. 이쪽은 우리 정부의 정무장관인데, 마침 적당한 골프 상대를 찾고 있었거든.”
“오, 골프를 잘 치는 모양이지?”
“못 치지는 않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바쿠고 카츠키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고, 그 권력을 견인해주는 것은 인맥이다. 특히나 이런 세상에서 알파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그저 줄을 잘 잡는 것뿐이다. 나는 너처럼 팔자 좋은 오메가가 아니니까. 바쿠고가 내밀어진 손과 악수를 하며 소리없이 볼 안쪽을 꽉 물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보통 오메가가 아니다. 녀석 곁에서 매너 좋고 근사한 알파 메이트를 연기한다면 이런 인맥쯤이야 앞으로 수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넌 내 발판이 되겠지.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어차피 바라는 게 있는 건 녀석도 마찬가지다. 난임을 해결하고 싶어 알파를 돈주고 사온 오메가나, 그 오메가를 이용해 출세하고 싶은 알파나.

하. 소리 없이 입 끝이 비틀렸다. 이렇게 완벽한 페어가 또 있겠냐고.

그러니까 이건 공정한 거다. 바쿠고는 수시로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 같은 거 느낄 필요 없다고, 너나 나나. 미도리야도 아는 얼굴들을 만난 모양인지 이미 바쿠고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았다. 보인다 해도 신경쓸 겨를은 어차피 없었을 것이다. 올마이트도 오래지 않아 다른 일행들과 인사를 하며 자리를 비웠다. 바쿠고에게 그 사람이 다가온 건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어머.”


목소리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장관의 지인과 악수를 하던 바쿠고가 목소리를 따라 슥 몸을 돌렸다. 보라색으로 물들인 롱헤어의 반삭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푸른 수트를 입고 있던 화려한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목 안쪽이 긴장으로 우뚝 굳었다.


“왠지 이름을 묻고 싶어지는 사람이 여기에 있네.”
“……”
“우리, 초면이죠?”


반 년 전, 이 오메가가 바쿠고에게 러트유도제를 투약했었다. 이 자리에서.








*

아예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미도리야가 10만 골드에 자신을 낙찰 받기 전까지 바쿠고는 오메가들을 상대하는 데이트 메이트였다. 그저 그런 급의 오메가도 아니었다. 바쿠고를 손수 골라냈던 마담은 시작부터 바쿠고의 레벨을 높게 잡았었다. 상대한 이는 죄다 상급 오메가들뿐이었다. 기업체의 회장이거나 여당의 실세라거나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장학 재단을 이끌고 있는 사회사업가라든가.
성공한 오메가들인만큼 그들은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도 대단히 예민했다. 피지컬 좋은 알파를 데이트메이트 삼아 데리고 다니면서 선을 넘고 도를 넘었다는 게 알려지면, 가뜩이나 정적이 많은 상류사회에서 단박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데이트메이트를 하면서도 본명을 썼던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바쿠고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약점을 잡혀있는 건 알파인 자신보다 상류계급인 오메가들이다. 데이트메이트는 전적으로 비밀이 보장된 관계였고, 금전으로 엮인 계약이 끝나면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J도, 그러니까 바쿠고에게 러트 억제제를 투여했던 오메가인 그도 그랬다. 하지만 J는 결코 매너 좋은 상대가 아니었었다.


“미도리야군의 파트너라면서요? 부러워라. 나도 이렇게 근사한 알파랑 데이트 한 번만 해보면 좋겠어.”


이 말이 단순한 칭찬이나 발린 말이 아닌 것을 바쿠고는 단박에 알았다. 제 동의도 없이 가드를 이용해 몸을 구속하고 러트유도제를 찔러 넣었던 오메가다. 섹스를 딱히 즐긴 것도 아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앞을 세우는 법엔 익숙해져 있던 알파에게 그날은 가장 굴욕적이고 혐오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멋대로 발기시킨 것을 장난감처럼 유린하던 그 손이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바쿠고에게 건넸다.
이렇게 만났는데 건배나 할까요? 뱀 같이 가늘어진 눈이 교묘하게 웃었다. 자요.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확 이 잔을 저 역겨운 얼굴에 끼얹어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 캇쨩! 한참 찾았는데, 흐.”


억지로 권해 받은 샴페인잔을 J에게 끼얹지 않았던 것은 그 순간 저를 불러준 목소리 덕분이었다. 허겁지겁 사람들을 헤치면서 다가온 미도리야가 마침 뒤에서 팔을 잡아끌었다. 이 성격에 의도한 것도, 감히 예상한 것도 아니었을 테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숲색 눈이 바쿠고의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기자들 앞에서 보여준 올마이트의 후계자다운 얼굴이 이번에도 거기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제 파트너를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외로워서요.”


그대로 미도리야를 따라 바쿠고가 자리를 벗어났다. J에게는 일부러 인사하지 않았다. 바쿠고는 언제나 감이 좋았다. 가뜩이나 기억이 좋지 않은 상대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래도 희한하게 제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숲색 머리를 바라보니 혀밑까지 치밀었던 토기가 가라앉았다. 이 감정을 바쿠고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자. 파파가 축사를 하신대. 올라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맨 앞에 서서 들어드려야 하거든. 우리 얼굴이 안 보이면 마음이 상하실 테니까… 파파가 은근히 그런 거엔 서운함을 많이 느끼셔서, 흐.”


왜 이 새끼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놓이는 건지.


“축사만 끝나면 곧바로 식사를 할 거야. 내가 우리 자리는 일부러 프라이빗 룸으로 달라고 했어. 둘만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좀 편할 테니까, 캇쨩 조금만 더 참아주면… 캇쨩?”
“……”
“캇쨩, 왜 갑자기…”


색이 밝은 머리가 제 앞에서 걷던 숲색 머리를 향해 제 멋대로 기울어졌다. 이 새끼는 정수리도 귀엽네.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둥글게 휘어진 가르마 언저리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별 의미도, 계산도 없었다.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데쿠새끼 오늘 좀 귀여워서.”
“……”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하.”


이런 감정은 계획에 없었다. 나는 이 새끼를 이용하고 있는 거다. 진짜 애정이 아니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성공한 최초의 알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유리한 발판으로 널 골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수시로 쓸데없는 기분을 느낀다. 대체 왜 이 새끼만 보면 기분이 복잡한 건지, 왜 느낄 필요가 없는 가책을 수시로 느끼는지. 슬며시 뻗어간 손이 잘 정돈되어 있던 미도리야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것조차 바쿠고는 도무지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런 걸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나는.


“어… 긴장해서 그러는 거 아닐까? 미안, 괜히 내가 이런 데 오자고 해서…”


풀이 죽은 숲색 눈이 우물거렸다. 그 얼굴은 조금 전까지 완벽하게 자리를 정리했던 올마이트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맹한 데쿠새끼다. 나만 보면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데쿠 새끼, 브레이크를 밟을 줄도 모르고 무작정 들이받는 대담한 데쿠 새끼.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신기하고 희귀한 오메가.
긴장은 무슨. 절로 느슨해진 입매를 바쿠고가 가볍게 픽 비틀었다.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이 미도리야의 어깨에 툭 내려앉았다.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바쿠고가 단상 앞쪽으로 저벅저벅 걸었다. 끝까지 팔은 풀지 않았다. 일부러.

툭툭, 마이크를 두드린 올마이트가 허리를 폈다.


“예, 여러분. 멋진 밤이죠? 오늘 밤 저의 귀국을 축하하고,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모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때마침 단상 앞쪽으로 나온 바쿠고와 미도리야를 바라보며 올마이트가 소리 없이 눈을 찡긋했다. 서버가 돌면서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샴페인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건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특히 축하할 일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이야 워낙 소식에 빠르시니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저희 아들이 이번에 좋은 짝을 만나게 되었거든요. 대체 언제 이렇게 컸는지, 하하. 연애는 안 하고 저랑만 살겠다고 말하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요.”

올마이트의 농담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고, 미도리야의 얼굴이 귀끝까지 붉어졌다. 그런 말을 왜 이런 데서… 우물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향해 올마이트가 잔을 들어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 잔은 제 아들, 미도리야 이즈쿠와 그의 멋진 파트너를 위해 올리고 싶습니다. 바쿠고 카츠키라는 멋진 청년이죠.”


바쿠고가 점잖게 올마이트를 향해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허나 픽 비틀리는 입꼬리까지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이 잔은 단순한 축하주가 아니다. 이 건배 이후로 내 인생은 달라지겠지. 보라고,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올마이트가 건배를 외치자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 미도리야가 바쿠고에게 잔을 부딪쳤고, 그대로 마주 선 채 샷을 들이켜는 모습이 또 한 번 카메라에 담겼다. 등 뒤에 선 누군가가 소리를 죽여 수군거렸다.


“그럼 이제 저 둘은 결혼을 하는 건가요?”


웨이터들이 빈 잔을 걷어가고, VIP들이 안내에 따라 자신들의 이름이 적힌 자리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바쿠고와 미도리야는 테라스 가장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됐다. 프라이빗한 장소로 골랐다던 미도리야의 말대로 룸에는 둘 외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냅킨을 펼치자마자 서버들이 음식을 내오며 와인을 채워주었다. 애피타이저는 절인 연어알과 캐비어를 곁들인 샐러드였다.


“어… 미안, 캇쨩. 나 잠시 전화가 와서.”


애피타이저 접시를 다 치울 때쯤 진동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야의 핸드폰이었다. 이이다에게 다시 전해 받은 모양인지 제 손으로 되돌아온 핸드폰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본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향해 미안한 얼굴을 하곤 전화를 받아 들며 자리를 피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미도리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경 쓰이게 하지, 또.”


메인인 어린 송아지 스테이크는 벌써 나왔지만 바쿠고는 나이프 한 번 찔러 넣지 않았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좀 전에 통화를 하면서 나서던 모습이 생각나 관뒀다. 아직도 전화를 안 끊었다면 걸어봤자 방해가 되거나 받지 않을 게 빤했다. 선홍색 눈 사이가 기어이 울컥 깊어졌다. 해야할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결국 바쿠고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나 귀찮게, 씨발.”


홀 테이블에도, 테라스 쪽에도, 복도 쪽에도 미도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곳은 화장실과 비상계단이 있는 입구 쪽 뿐이다. 대체 무슨 전화기에 이렇게 자리까지 깊숙이 피해가면서 받고 자빠졌냐고. 울컥 눈을 구긴 바쿠고의 뇌리에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토도로키 쇼토.
토도로키 쇼토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바쿠고도 알고 있었다. 아까 파티장에서는 보지 못했다. 늘 미도리야를 보필한답시고 졸졸 따라다니는 안경 로봇 녀석은 분명 이 파티에 초대했다는 말을 흘렸었다. 그렇다면 사정상 파티에 못 오게 됐거나 지각하게 된 녀석이 미도리야에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다. 그걸 데리러 갔거나 설득하고 있느라 통화가 늦어지는 것일 테고. 여기까지 디테일하게 생각해보던 바쿠고가 하, 입 끝을 비틀며 제 얼굴을 크게 쓸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짜증이 치밀만큼.

이게 무슨 감정인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건 그닥 유쾌한 감정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파티장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이 조금씩 급해졌다. 일단 찾아야 한다. 찾아서 얼굴을 봐야 이 더러운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 생각 뿐이었다.
그게 바쿠고의 가장 큰 실수였다. 데쿠 새끼 생각만 해대느라 눈앞을 보지 못한 것.


“갑자기 이렇게 다짜고짜 부딪치면… 어머.”


입구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 때 미처 앞사람을 보지 못하고 어깨가 부딪쳤다. 얼굴도 똑바로 보지 않고 대충 고개만 숙이고 지나가려던 바쿠고가 우뚝 멈춰섰다. 이번에도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역겹고 짜증나는 그 어머, 라는 추임새를 따라 선홍색 눈이 저와 부딪친 상대를 쳐다봤다. J였다. 공교롭게도 복도에는 바쿠고와 J말고 다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가요, 바쿠고씨?”


이번에는 J도 모르는 체 보내주지 않았다. 우뚝 멈춰선 바쿠고의 옆얼굴을 똑바로 뚫어보며 J가 한껏 교묘해진 입매를 비스듬히 밀어 올렸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자기는 진짜 불편한 건 잘 못 감춘다. 그쵸? 왜 그렇게 대놓고 불편해해, 사람 존심 상하게. 솔직히 그쪽이 감히 날 무시할 위치는 아니잖아.”
“……”
“뭐, 하긴. 오메가 상대로 몸이나 팔다가 저런 봉을 잡고 출세를 했으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어. 꺼져.”


잔뜩 일그러진 선홍색 눈이 J를 사납게 노려봤다. 눈이 마주치자 지레 어깨를 움찔 떤 J가 어머어머, 추임새를 연발하며 두 눈을 황홀한 듯 질끈 감았다 떴다. 반 년 전에 이미 한 번 느꼈었던 끈적한 욕망이 그 눈 안에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또 한 번 토기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 역시 욕할 때 제일 섹시해. 그거 알아? 나 그날 자기한테 쑤셔진 후로 입 더러운 알파 새끼들만 찾아다니잖아. 젖질 않아서.”


욕이 혀 밑까지 치밀었다. 그래도 하지 않았다. 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똑같이 나서봐야 이딴 변태 새끼는 좋다고 벌개져선 저를 붙잡고 늘어지기나 하겠지. 반 년 전엔 대체 이 역겨움을 어떻게 견뎠을까. 자꾸 치미는 토기에 바쿠고가 볼 안쪽을 연거푸 힘껏 씹었다.
어차피 이딴 쓰레기에게 휘말릴 필요는 없지.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서는 바쿠고의 발목이 다시 한 번 붙잡혔다. 하필 그 얘기였다.


“알파 끼고 놀 줄도 모른다던 새끼가 어떻게 이런 걸 잡았지, 짜증나게.”


돌아선 등이 우뚝 멈췄다. 빈주먹이 힘줄이 돋아오를만큼 꽉 움켜 잡혔다. J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이걸 저 맹한 새끼한테 뺏기다니, 하하, 기가 막혀. 이렇게 쉽게 지 몸뚱아리 파는 새낀 줄 알았으면 나도 진작 돈 좀 찔러볼 걸 그랬나봐. 그치? 맞지? 얼마에 팔렸어? 5만?”
“……”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고 알려줘봐. 내가 배로 쳐줄게. 미도리야 그 맹한 새끼도 돈 주고 니 좆 샀을 거 아냐. 어차피 알파랑 제대로 뒹굴 줄도 모르는 새끼는 내버려두고… 꺅!”


다시 뒤쪽을 향해 돌아선 바쿠고가 그대로 J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J를 뚫어보는 선홍색 눈엔 분노도, 흥분도 없었다. 표정을 완전히 지운 얼굴이 차갑게 입을 비틀었다.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해봐, 어디. 죽고 싶으면. 나는 댁들처럼 곱게 자란 새끼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또라이라서, 씨발, 어떻게 돌아버릴 지 모르거든.”
“……”
“해보자고. 누가 잃을 게 더 많은가. 고작해야 오메가 상대로 데이트 메이트나 해준 알파가 더 많은지. 알파새끼 욕하는 소리 들으면서 그 좆같지도 않은 좆 세우면서 질질 싸댄 새끼가 더 많은지. 나는 씨발 어차피 본명도 다 까고 굴려댄 새끼라서 잃을 게 하나도 없으셔서.”
“……”
“한 번만 더 그 새끼 이름 입에 올리면 죽여 버린다.”


움켜잡았던 멱살을 그대로 홱 떠밀듯 내려놓고 바쿠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기분 엿 같다. 잠깐 저 얼굴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토기가 치밀고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약이 잔뜩 오른 J가 소리를 질렀다. 야! 웬 개가 짖네, 씨발. 입 끝을 비튼 바쿠고가 그대로 저벅저벅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때였다. 날카로운 바늘이 돌연 바쿠고의 뒷목을 힘껏 찍었다. 동시에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게 뭔지, 이 엿 같은 게 뭔지.


“미친 새끼가, 꺼지라고,…!”
“한 번만, 응?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한 번만 해. 나랑 하자.”


홱 팔을 떨치자 반쯤 남은 주사제가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졌다. 그래도 J는 악착 같이 달려들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제 가슴을 더듬고 멋대로 달라붙어 오는 그 감촉이 뱀처럼 소름이 끼쳤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바쿠고가 그대로 제게 달려드는 J를 힘껏 떠밀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 J도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던 건지 쫓아오진 않았다.
하, 씨발. 복도를 걸어가는 바쿠고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니, 온몸의 피가 단 한 곳으로 쏠려 가고 있었다. 간신히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가며 바쿠고가 잔뜩 밭아진 호흡을 잇새로 몰아쉬었다. 눈앞이 어지럽게 끓어올랐다. 이게 무엇인지, 저 망할 새끼가 제게 무엇을 찔러 넣었는지는 이미 한 번 당해봐서 알고 있었다.
러트 유도제였다.


“엿 같은, 하, 씨발,…”


벽을 짚고 간신히 걷고 있는 중에도 식은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셔츠의 등판은 이미 흠뻑 젖었을 것이다. 그래도 벗어나야 한다. 여기는 집이 아니다. 올마이트가 여는 파티장이다. 여기서 까딱 이성을 놓쳐 버린다면 주기도 아닌 러트가 닥칠 거고, 그렇게 되면 이 파티장에 있을 오메가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게 되겠지. 러트 중의 알파가 억제제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불법이다. 굳이 그게 아니어도 이런 데서, 이딴 식으로 러트가 오는 게 달가울 리도 없었다.
아, 데쿠새끼의 곁에 있는 망할 안경쟁이라면 억제제를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은 알파와 오메가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였고, 바쿠고가 러트를 겪고 있을 때에도 녀석이 직접 억제제를 가져다 줬었다. 그런데 내가 그 새끼 연락처를 저장했었나.
생각을 삼키며 허겁지겁 자켓 속을 뒤지던 그때였다. 로비 앞에 찾고 있었던 얼굴이 서 있었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마주치지 말아야할 녀석이기도 했다. 바쿠고가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꽉 씹었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주선 그 얼굴이 누구인지도 바쿠고는 이미 알고 있었다. 토도로키 쇼토.

이런 자리인 탓인지 토도로키 역시 턱시도 차림이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대체 식사 중에 뛰쳐나가서 둘이 뭘 하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할 사고와 이성이 바쿠고에겐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저보다 한 뼘 정도가 큰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도리야는 연신 웃고 있었고,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끔씩 드물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주 웃거나 했다. 그러다 뭔가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모양인지 미도리야가 소리를 내며 와르르 웃었다. 그리곤 선 자리에서 폴짝폴짝 신이 난 듯 뛴 미도리야가 저보다 큰 토도로키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포옹했다.

바쿠고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순간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성을 떠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당겨 토도로키와 가슴을 맞대고 있던 미도리야의 어깨를 낚아챈 바쿠고가 그 몸을 그대로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토도로키가, 미도리야가 동시에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숲색 눈이 쏟아질 듯 크게 열렸다.


“……? 캇쨩? 갑자기 왜… 캇쨩, 괜찮아? 왜 그래?”
“함부로 비비지마.”


헉헉 어지럽게 비져 나온 호흡이 낮게 갈라졌다. 미도리야의 몸을 단단히 얽어온 양팔에 힘줄이 잡힐만큼 꽉 힘이 실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귀밑이 요란하게 쿵쿵거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 이 감정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


“내 꺼라고.”
“……”
“내가 이 새끼 알파라고.”
“캇쨩, 갑자기 무슨… 캇쨩!”


힘껏 얽혀온 손목이 그대로 미도리야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점잖게 일그러졌다. 같은 알파라서 토도로키는 잘 알고 있었다. 러트다. 그리고 토도로키는 역시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 이즈쿠가 절대 오늘 밤 안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날, 미도리야는 귀가하지 않았다.








(계속)


연휴 전에 백업도 착착착 ///// 남겨주시는 피드백 언제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피드백은 언제나처럼 글쓴이/비번만 입력해주시면 돼요U///U

?
  • 갓갓 2019.02.02 17:49
    피드백 남기려고 일부러 링크타고 들어왔어요ㅠㅠㅠㅠㅠㅠ이 시리즈 신선하고 너무 좋아요!!!!!알파쿠고 넘 섹시하고 오메가도랴 넘 귀엽고 야하고 최고됩니다ㅠㅠ루카님 항상 꽃길만 걸으세요..,,, 항상 감사합니다ㅠㅠㅠㅠ새해복 많이받으세요!!!!
  • ㅌㅎ 2019.02.02 18:25 SECRET

    "비밀글입니다."

  • OOP 2019.02.03 04:41 SECRET

    "비밀글입니다."

  • I 2019.02.04 20:19
    아 진짜 이번판 보다가 너무 좋아서 소리지를 뻔했어요! 보는 저까지 설래게 하시면 어떡해요!! 이거 진짜 다음편 기대되서 한동안 잠 잘수 없을것같다고요 ㅠㅠㅠㅠㅠㅠㅠ 이거 기다리느라 다크서클 생기겠어요 ㅜㅠ 쨌든 사랑해요 진심 사랑해요 루카님 새해복 많이 받으십쇼!!
  • Hart 2019.03.13 23:45
    캇데쿠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와 후르륵 읽어버렸습니다ㅠ 너무 좋고..너무 좋고...(언어마비
    정말 좋아요 쇼토도 감초 역할 톡톡히 하고...마담이나 제이 등도 그렇고 캐릭터들의 관계가 완벽합니다ㅠ 이제 포스타입으로 달려가서 뒤를 찾을거예요!!! 복 받으세요...
  • 솔기 2019.04.02 09:48 SECRET

    "비밀글입니다."

  • 2019.05.15 12:30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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