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올해도 여지없이 은찬이 생일이라 작년 봄, 웹온에 냈던 이 글을 웹상에 공개합니다 :D

* 족장후계자 x 주술사로 건찬한 백건은찬

* 한달 보름은 인간, 한달 보름은 늑대로 지내는 늑대일족 이야기

* 늑대수인AU | 시리어스 판타지를 지향합니다.

* 사랑해 은찬아ㅠ.ㅠ.ㅠ.ㅠ.ㅠ.ㅠ 생일 축하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달>이 소년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너는 누구도 사랑하지 마라.

산 자도 죽은 자도 너를 탐하면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달>은 소년을 영원히 취하였다.


- 큰 이리 <달狚>




* 일러스트 : 연두님 (@oksopi12)





태초에 빛이 있고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과 늑대가 있었다.

해의 그림자에서 인간이 태어났고, <달>의 그림자에서 늑대가 태어났다. 늑대들은 산에서 살았다. 인간들은 산 아래에서 수렵을 하고 밭을 일구며 문명을 꽃피웠다. 문화가 생겼고, 신분이 생겼고, 일족과 국가가 생겼다. 인간들은 수시로 전쟁을 하며 다른 이를 도륙하거나 그 땅을 점령해 여인들을 겁탈하고 아이를 몸종으로 취했다.
그러던 중 한 일족이 늑대들이 살던 산으로 올라왔다. 늑대들이 많은 산이라 하여 인간들은 이 지역을 랑이라 불렀다. 그들은 그곳에 산의 이름을 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랑족이라 칭했다. 랑족은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했고, 가장 막강했다. 랑족은 늑대들과 더불어 살며 <달>을 섬겼다. <달>은 태양의 아이들인 인간들에게도 늑대들을 위한 축복을 나눠주었다. 세계는 천년간 평화로웠다.

어느 날, 새로운 이가 랑족의 왕이 되었다. 새로 선출된 왕은 너무 젊었고, 탐욕이 많았다. 선대의 왕과 후보들을 모두 물어 죽인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쟁에 나섰다. 산과 숲이 불타올랐고, 늑대들은 고통에 울부짖었다. 찬연히 떠 있던 보름달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늑대의 족장은 수족 몇을 데리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산을 에워싼 숲의 가장 깊고 깊은 곳엔 신성한 연못이 있었다. 이곳에서 <달>이 늑대를 만들었다 하여 늑대들은 모두 이곳을 ‘달못’이라 불렀다. 족장은 달못의 바위 제단에 올라 무릎을 꺾으며 <달>에게 기도했다. 이대로는 인간이 우리들을 모두 죽일 것이고, 우리는 살지 못할 듯 하니 최소한 암컷들과 새끼들만이라도 살려 달라 빌었다. <달>은 제 자식들의 기도를 들었고, 천년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달>은 실로 오랜만에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 밤, 피의 살육이 벌어졌다. 해가 뜰 때 살아남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성에는 인간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달>은 늑대들에게 인간을 취하라고 했다. 그들의 조각을 모두 남김없이 먹어라. 그리하여 그들이 가졌던 것을 완전히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 누려라. 늑대들은 <달>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시신을 남김없이 먹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늑대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수를 먹은 자는 장수가 되었다. 여인을 먹은 자는 여인이 되었다. 대장장이를 먹은 자는 또 대장장이가 되었다. 성에는 다시 인간들이 번성했다. 족장이 나아가 <달>에게 물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달>이 말했다.

둘로 쪼개져 너희는 싸우는 것이니 하나로 합친 것뿐이다. 허니 너희는 보름은 인간으로, 보름은 늑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이 산을 지켜라. 이 산이 거짓으로 더럽혀지면 그때는 너희를 내가 멸할 것이다.

임금을 먹고 이제 임금의 모습을 한 늑대의 족장이 <달>에게 꿇어 엎드렸다. 살육으로 얼룩졌던 성은 오래지 않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늑대들에게는 해에 두 번, 발정이 찾아온다. 해가 가장 짧은 밤과 해가 가장 긴 밤이었다. 늑대들은 밤이 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수컷과 암컷을 가리지 않고 음탕하게 뒤엉키며 접을 하다 아침 해가 뜰 무렵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를 두고 늑대들은 오래도록 광기의 밤이라 불렀다.
<달>이 산에 머물고 있던 중에 광기의 밤이 찾아왔다. <달>은 퍽 흥미가 없어 산책을 나섰다. 늑대들이 열에 들떠 울부짖는 소리는 오래지 않아 멀어졌다. <달>은 숲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연못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똑 굳었다. 연못가에 웅크려 앉아 울고 있던 소년의 모습 때문이었다.

별처럼 찍힌 색점이 참으로 예뻤던,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달>이 소년에게 다가섰다. 그제야 기척을 알아차린 소년은 눈물을 닦으면서도 주춤 뒤로 물러섰다. 소년의 얼굴은 잔뜩 달아올라 상기 되어 있었다. 그런 밤이었던 탓일 것이다. 하필 그런 밤이어서 소년은 그랬을 것이다. <달>은 소년의 얼굴은 잠잠히 쳐다보았다. 화사하진 않아도 소년은 작은 체구만큼 오밀조밀한 생김을 가지고 있었다. 밤 어둠 속에 홀로 은은히 피어난 작은 들꽃 같았다. <달>은 소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소년이 겁에 잔뜩 질린 눈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달>의 노란 눈이 희번득 빛을 냈다. 실로 오랜만에 느낀 욕정에 눈길은 타는 듯 했다. 입술을 혀로 쓸며 <달>은 말했다.

너의 주인.

그 밤, <달>은 달이 기울도록 소년을 취했다. 소년은 쉼 없이 울었다. 울 힘조차 없이 소년이 축 늘어지고 난 후에야 <달>은 소년을 놓아주었다. 소년의 뺨에 쉼 없이 입을 맞추며 <달>은 속삭였다. 너는 이제 나의 것이다. 나는 이제 너를 통해 말할 것이고, 너를 통해 전할 것이다. 너는 내 말을 듣고 너의 가족과 친구에게, 너의 임금에게 전해라. 그로 인해 너는 부유해질 것이며 그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달>은 말했다.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너를 취할 수 없을 것이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은 <달>의 품에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새벽 푸른 여명이 떠오를 때 <달>과 소년은 천천히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얗게 빛나던 <달>의 털색과 달리 소년의 털색은 불꽃처럼 붉었다. 소년의 문양도 털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달>은 처음으로 이 산의 생명들을 질투했다.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을 모든 존재들에게 처음으로 격렬한 질투를 느꼈다.

이제 곧 돌아갈 시간이었다.

날이 밝았다.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족장에게 <달>은 자신에게 기도를 올릴 제단을 만들 것을 명했다. 족장은 그렇게 했다. 제단은 <달>의 명에 따라 산 가장 깊은 곳의 성스러운 연못가로 정해졌다. 늑대들은, 이제 인간이 된 새로운 랑족들은 호숫가의 주변에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으며 그 사이에 다시 달이 바뀌며 인간이 되었다. 늑대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야 제단은 완성 됐다. 기도를 올리기 위한 주술사를 선출했다. 수많은 주술사들 가운데 <달>은 머리가 붉은 소년을 선택했다. 보름달이 뜨던 밤이었다. <달>은 흡족해했다.

이제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 보름달이 뜨는 밤, <달>은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의 장막 안쪽에는 <달>과 소년뿐이었다. 소년은, 주술사는 스스로 <달>의 앞에 엎드려 제물이 되었고, <달>이 그를 취했다. 둘은 해가 뜰 때까지 머리를 맞대고 오래도록 호수에 어린 달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야 <달>은 소년을 두고 제단에 올랐다. 소년이 엎드리며 펑펑 울었다. <달>이 소년의 붉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찌 우느냐. 소년이 말했다. 헤어지기 싫어서, 너를 하늘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달>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 죽음의 사슬로부터 외면 당한 존재다. 나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결코 영원히,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울지 말아라. 그리고 <달>은 소년의 등에 돋아난 자신의 문양에 깊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나 만일 네가 힘들고 괴로워 나를 찾는다면, 내 이름을 부르며 네가 운다면,

나는 반드시 네게 돌아올 것이다.

<달>이 허공을 향해 손짓 하자 커다랗고 붉은 새가 날아와 소년의 어깨에 앉았다. 이 새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달이> 말했다. 슬피 우는 소년을 꼭 끌어안고 <달>은 입을 맞췄다. 너는 영원히 죽어라. <달>이 말했다. 너는 영원히 새로 살아라. 너의 육신은 세상의 것이나 네 혼백은 죽어서도 나의 것이다. 붉은 소년이 말했다. 나의 신이시여.
그렇다면 저에게 세상의 사랑을 알려주지 마세요. 세상의 탐욕을 영원히 모르도록 하세요. 나는 당신 이외의 신을 모릅니다. 당신 이외의 존재가 내게 불경이 되게 하세요. 나는 당신 이외의 하늘을 모릅니다. <달>이 소년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너는 누구도 사랑하지 마라.

산 자도 죽은 자도 너를 탐하면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달>은 소년을 영원히 취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이리의 형상으로 변해 하늘로 뛰어오른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주술사는 나이를 먹었다. 붉은 머리는 하얀 백발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성에는 붉은 머리를 한 소년이 태어났다. 소년은 주술사가 되었고, 주술사는 장막 안에서 붉은 새의 깃털로 점을 치며 <달>이 하는 말들을 전하거나 <달>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이를 먹었고, 죽음을 맞이했고, 다음 해엔 어김없이 또 붉은 머리칼을 한 소년이 태어나 <달>을 섬겼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수백 번의 계절이 저물고 다시 봄이 무르익을 때 노란 눈을 가진 하얀 늑대가 태어났다.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에 털이 붉은 늑대가 태어났다. 하얀 늑대의 이름은 백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털이 붉은, <달>의 총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주은찬이라고 했다.

<달>이 하늘로 돌아간 지 꼭 천 년이 되는 때의 일이었다.






* * *




은 오래 전부터 <달>의 것이었다.

늑대가 인간을 취하기 이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달>은 랑족狼族에게 산을 주었다. 산은 랑족의 터전이었다. 랑족은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죽으며, 산에서 사냥하며 산에서 취하며 산과 더불어 살았다. <달>은 랑족이 누리는 모든 삶을 베푼 태초이자 시작이었다. 붉은 머리 주술사가 <달>의 의지를 표하며 기도를 올렸으며, 랑족은 모두 그를 경외하며 두려워했었다.
세월이 흐르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그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달>이 세상에 도래한 때로부터 꼬박 천 년이 흘렀고, 역사는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믿음은 조금씩 약해졌다. 제사는 겉치레이며, 주술사를 향한 경외는 껍질일 뿐이다. 날 때부터 붉은 머리로 태어나 사냥을 하는 노력도 없이 풍족하게 배를 불리면서 사는 주술사에게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더러 생겨났다. 털이 붉은 것뿐이다. 붉은 늑대로 태어났을 뿐이다. 누구도 노골적으로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기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달>은 오지 않는다. 주술사의 예언은 힘을 잃었고, 의식은 겉치레로만 남았다.


이번 대의 붉은 늑대, 주은찬이 세상에 태어난 지 꼭 18년이 되던 해였다.

아침부터 공터가 소란스러웠다. 랑족들은 공동우물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었다. 아침에 우물에서 젊은 수컷의 사체가 발견된 탓이었다. 젊은 병사들이 물에 흠뻑 젖은 수컷의 사체를 건져냈다. 죽은 늑대는 흔한 갈빛이었다. 여자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아이들은 울었으며, 사내들은 끌끌 혀를 찼다. 병사장이 사체의 신원을 확인했다. 녀석의 얼굴을 알고 있던 사내가 신원을 보증했다. 올해로 18세가 된 젊은 수컷 중 하나였다. 녀석은 근래까지도 보름 뒤에 있을 족장 선출을 위한 경연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붉은 털옷의 앞섶을 습관처럼 꽉 움켜잡았다. 늑대가 될 때의 소년도 걸치고 있는 털옷과 머리색처럼 짙고 붉은 털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나던 사람들이 모두 소년을 흘끔거렸으나 소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소년은, 주은찬은 이런 시선에 어릴 적부터 익숙했다. 이 산에서 털이 붉은 늑대는 오로지 하나 뿐이다. 저 깊고 깊은 달못에서 달에게 기도하며 달의 의지를 전하는 자, 달의 주술사. 붉은 늑대.
은찬이 이 아침,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랑족의 족장은 선출된 지 꼭 100년을 채우게 되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오랜 순리였다.

올해는 지난 선대 족장이 선대 주술사를 통해 ‘달’의 축복을 받아 족장에 오른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며칠 후면 새 족장을 선출하기 위한 경연이 벌어진다. 공터와 사냥터 곳곳에서는 18세를 맞이한 젊은 수컷들이 매일 스스로를 단련하며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무탈하게 진행되길 바라며 족장은 경연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달못에 올라 달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관례다. 허나 이번 족장은 달못에 올라 기도를 드리기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난 봄에 사냥터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흰 사슴을 좇다 벼랑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탓이다. 은찬이 달못을 나와 족장에게 찾아간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죽었대요.

작달막한 얼굴의 시종이 까치발을 들며 은찬에게 소곤거렸다. 병사가 늑대의 형상을 한 수컷의 긴 주둥이를 검 끝으로 쿡쿡 찍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달>의 저주라고 하던데.”
“나도 들었네. 어제 이 녀석이 장막 안쪽을 서성거리는 걸 본 녀석이 있어.”
“그럼 빤한 거지. 자네도 소문 들었지? 주술사를 취하면 달처럼 정결한 기운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그…”
“쉿, 자네. 목소리가 너무 커.”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남자가 이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은찬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들은 허겁지겁 눈길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일부러 저편으로 걸을까. 웃으면서 인사를 할까. 은찬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저가 생각해도 별로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주춤 걸음을 당기다 은찬은 이내 관뒀다. 저편이 소란스러워진 탓이었다.
길 끝에서 젊은 수컷들 여럿이 나타났다. 이제 올해로 갓 성인이 된 녀석들은 그 또래의 수컷들이 으레 그렇듯 으스대는 구석이 있었다. 으름장을 놓으며 녀석들이 성큼성큼 공터로 들어섰다. 젊은 암컷들의 눈길이 바빠졌다. 뺨을 붉히며, 저희끼리 소곤거리며 암컷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젊은 수컷 무리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잡던 소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색이 밝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춤을 추었다.

털옷을 하얗게 휘어감은 소년의 키는 다른 늑대들보다 머리 하나만큼이 가뿐하게 컸다. 분수대 쪽에서 물장구를 참방거리던 소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더러는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허나 소년은 앞을 노려보며 묵묵히 걸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마치 달처럼 노란 눈이었다.
소년이 이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은찬이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노란 눈의 소년이 준수한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말았다. 남자들이 수군거렸다. 족장후보들이야.

“시체를 치우러 온 모양이군.”
“열여덟 살이 되었으니 녀석들도 족장의 일을 도와야지.”
“그래봤자 족장은 한 녀석이 될 게 빤한데 뭣하러…”

수군거리던 남자들이 눈치를 보며 슥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수레를 가져왔고, 소년은 다른 수컷들과 함께 축 늘어진 사체를 수레 위에 올렸다. 공터 저편에서 한 여인이 달려와 사체를 와락 끌어안았다. 여인은 죽은 수컷의 젖은 주둥이에 입술을 부비며,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여인의 울음을 뒤로 한 채 은찬은 돌아섰다. 어린 시종이 종종 걸음으로 은찬의 뒤를 따랐다. 암컷들이 소년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답 없이 소년의 노란 눈이 잠자코 은찬을 좇았다. 붉은 머리가 길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오래도록 은찬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이름은 백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백건이 족장이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

지난 주술사는 밤중에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그가 죽고 꼭 일주일이 지난 뒤에 은찬이 태어났다. 말하자면 그는 은찬의 지난 생이었다.


은찬에겐 그 생의 기억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의 기억뿐이었다. 은찬은 이 산에서 태어나 달못에서 자랐다. 부모가 누군지는 모른다. 은찬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기도 전에 이곳으로 옮겨져 자라왔다. 붉은 늑대는 달이 취한 최초의 주술사가 거듭해 태어나는 것이다. 털이 붉은 것은 다시 태어난 주술사라는 약속이라고 했다. 은찬은 다섯 살이 되어서야 성소의 일을 돌보는 자들에게서 겨우 그와 같은 연유를 들을 수 있었다.
붉은 털을 가진 주술사라고 하여 하늘에서 곧바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허니 은찬에게도 부모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은찬에게 누가 은찬의 부모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붉은 늑대는 누군가의 자식 이전에 랑족에 속한 존재이며, 달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때문에 성소의 일을 보는 자들도, 장로들도, 족장도 은찬에게 기도와 주술 이외의 것들은 또렷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가족을 가질 수도 없으며, 가족에게 속할 수도 없다. 붉은 늑대는 달에게 기도하며, 달의 의지를 받아 전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은찬이 깨닫게 된 것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해, 사냥터에서 오래도록 지하 동굴에 구금되어 있던 젊은 부부가 족장과 병사들에게 사살되었다. 암컷의 주둥이에는 은찬과 꼭 같은 모양의 점이 찍혀 있었다. 부부는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족장과 병사들에게 먹혔다. 그날 이후로 은찬은 더 이상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는 어차피 소용이 없다. 은찬에게 집은 오로지 달못 뿐이었다.


달못은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달못을 둘러싼 천막을 모두 성소라고 불렀다. <달>께서 최초의 주술사를 취한 성지인 덕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늙은 시종이 공손히 인사했다. 성소에는 어린 시종과 늙은 시종, 그리고 은찬 뿐이다. 성소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늙은 시종이 어린 시종과 은찬의 모습을 발견하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은찬은 털옷을 벗어 늙은 시종에게 건네주면서 기도의 준비를 부탁했다. 오래지 않아 사체를 실은 수레가 성소를 찾아올 것이다. 염을 하는 것은 달못의 일이며, 주술사의 업이다. 퍽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죽은 자는 언제나 산 자보다 더욱 껄끄럽다. 하지만 이것은 은찬의 업이자 운명이었다. 랑족 중 유일하게 털이 붉은 늑대의 숙명이었다.

평범한 갈색 털이나 흑색 털로 태어났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은찬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굶어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족장 경쟁에서는 진작 도태되었을 것이다. 은찬과 같은 해에는 유난히 수컷들이 많이 태어났고, 대체적으로 덩치들이 큰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하얀 털을 가지고 태어난 백건은 덩치도, 발의 크기도 개중 가장 컸고, 모두 백건이 족장에 오를 것이라 입을 모았다. 그러나 다른 녀석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고, 올해 싸움은 지난 어떤 때보다 치열할 것이라고 장로들은 말했다. 은찬과는 모두 먼 얘기다. 은찬은 족장이 될 자격이 없다. 랑족들의 사냥터에서 토끼나 사슴을 좇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굶을 일은 없었다. 성소엔 늘 먹을 것이 있었다. 한때는 사냥한 것 중 가장 좋은 고기가 성소에 들어왔다고 했다. 지금은 고작해야 은찬과 남은 두 시종이 풀칠을 할 수 있을 정도일 뿐이다. 그래도 그 모두가 은찬의 삶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숙명이고 업이었다.

이제 곧 젊은 수컷들이 죽은 늑대를 지고 성소에 오를 것이다. 죽은 사체를 염해 <달>의 곁으로 올려 보내는 것 역시 은찬의 일이었다.

은찬은 먼저 제 방에 들러 손과 발을 정결하게 씻었다. 어린 시종이 건네준 얇은 천을 걸쳐 입고 달못으로 향했다. 성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달못은 오로지 선택 받은 자들만이 오를 수 있다. 은찬은 달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달에게 직접 기도하길 원하는 자가 머리를 조아리면 은찬은 달을 대신 해 그를 선택하고, 그는 달못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은 사체를 짊어지고 성소에 오르는 자가 은찬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은찬을 대신해 사체를 달못의 바위에 펼칠 것이고, 은찬은 달못의 맑은 물에 온 몸을 적시고 그 앞으로 걸어 나가 사체에 염을 한다.

아마도 네가 올라오겠지.

달못의 장막을 걷어내며 은찬은 잠시 생각했다. 근거는 없다. 그저 막연한 감이었다. 다른 이를 시켜도 될 일을 구태여 스스로 도맡아 그 거대한 사체를 짊어지고 너는 굳이 나와 단둘이 달못에 오를 거야. 그런 사소한 감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쩌면 우리가 처음으로 벗이 되었던 바로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달못은 높고 커다란 바위와 나무들에 에워싸여 햇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어둡지는 않았다.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난 빛나는 풀꽃들과 발광나비들, 그리고 못 한 중간의 커다란 바위섬에 앉아 있던 붉은 새 덕분이다. 나비들은 높다란 달못 주변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사시사철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마치 별이 내려와 있는 것만 같았다.
좁다란 돌길이 너른 못의 한중간을 가로지르며 둥그런 바위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바위섬에는 잎이 맺히지 않는 커다란 고목이 넓고 판판한 석단石壇을 에워싸며 푸르고 마른 가지를 온 사방에 뻗었다. 오랜 옛날, <달>은 저곳에서 주술사를 취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목 위에 앉아 있던 붉은 새가 은찬을 보며 퍼드득 홰를 쳤다. 두 손을 모으며 은찬은 천천히 달못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맑지만 요즘은 다소 차갑다. 언제나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덕이다.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길을 천천히 헤치며 은찬은 한중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릎을 굽히며 머리끝까지 적신 후에 다시 배끔 고개를 내밀었다. 바위섬의 제단으로 걸어 오르는 마른 몸은 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젖었다. 얇은 천은 흠뻑 젖어 투명한 껍질처럼 은찬을 에워쌌다.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면서 은찬은 새장의 문을 열었다. 퍼덕거리던 붉은 새가 은찬의 팔위로 뛰어 올랐다. 부리를 비벼대는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며 은찬은 고요히 웃었다.

은찬은 열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달>의 목소리를 들었다. 봄이었다.

이전까지 은찬은 단 한 번도 직접 <달>이 하는 말을 듣지 못 했다. 장로들과 성소의 늙은 시종은 때가 되면 언젠가 다 들릴 것이라 했다. 붉은 머리는 <달>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자의 유일한 증거다.
그날, 은찬은 그 소년을 만났다. 마치 보름달처럼 반짝이던 황금색 눈을 가지고 있던, 하얗고 예쁜 소년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장막 바깥에서 어린 시종이 은찬을 불렀다. 은찬은 제단에 선 채로 시종에게 답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누구인지 묻지 않은 것은 어차피 짐작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감이다. 그래도 그 감은 랑족의 다른 누구보다도 예리했고 퍽 적중률이 높았다. 장로들은 그 역시 <달>께서 오로지 붉은 늑대에게만 허락한 은총이라고 했다.

장막이 소리 없이 걷혔다. 장막의 틈새로 색 밝은 머리칼이 불쑥 나타났다. 역시. 은찬이 생각했다. 이번에도 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백건이었다.

시종들이 제단으로 통하는 길 앞에 사체를 내려두고 다시 장막을 나섰다. 은찬이 제단에서 내려와 돌길을 걸어 사체 곁에 서 있던 백건에게 다가왔다. 신 하나 꿰어 신지 않은 마른 발자국을 따라 돌길 위에는 동그랗게 발자국이 남았다. 뚝뚝 물길이 떨어지는 은찬의 얼굴을 백건은 말없이 뚫어 보았다. 은찬은 백건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모르는 척 잠자코 다가와 은찬은 가만히 사체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붉은 머리칼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똑, 사체의 주둥이 위로 떨어졌다. 백건이 뚫을 듯 은찬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은찬이 눈을 감으며 손을 모았다. 낮은 주문이 얇은 입새를 비집을 때 사체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형상은 오래지 않아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기 시작한 수컷의 얼굴은 공터에서 사람들이 떠들던 말처럼 이제 갓 열여덟 살을 넘긴 듯 보였다. 은찬이 젖은 뺨을 무심히 훔쳤다. 발광 나비가 근방을 날아가며 부연 빛을 잠시 흩뿌렸고, 얇은 껍질처럼 달라붙은 마른 몸이 은은히 드러났다 사라졌다. 백건이 느리게 울대를 밀었다.
백건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사체를 위한 염도, 달에게 올리는 기도도 아니었다.

“왜 아는 체 안 했냐.”

은찬이 차갑게 굳은 시체의 얼굴을 쓸었다. 이목구비의 선을 따라 인을 그으면서 은찬은 가볍게 웃었다. 그냥. 숨결이 빠져 나간 파란 입술 위로 마른 손가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래야할 것 같아서.

“너는 백 마리가 족히 넘는 족장후보들 중에서도 족장이란 자리에 가장 어울리고 유력한 존재야. 그리고 나는 <달>의 의지를 받아 족장을 결정하는 이 산의 주술사고.”
“그래서.”
“쓸데없는 오해는 피하는 게 좋다는 의미야.”
“오해는 무슨, 어차피 너랑 나랑은…”

백건이 우물거리다 합 입을 다물었다. 노란 눈이 슬그머니 은찬을 피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있는 일이었다. 백건은 은찬과 대화중에 스스로 자주 말꼬리를 잘라냈다. 그때마다 콧날을 구기면서 잔뜩 불편한 얼굴을 했다. 백건의 그런 얼굴을 은찬은 잘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성대에 돌처럼 걸려 있어 답답한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지도 은찬은 요즘 들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잘 알아. 그래도 그 말을 구태여 백건의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은찬은 늘 모르는 체 했다. 그건 지난 8년동안 이어져온 백건과 자신의, 일종의 우정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찍 떠날 것까지는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말꼬리를 잡아채는 대신 은찬은 말의 방향을 틀었다. 그 채로 입을 다물고 염을 시작했다. 백건은 말이 없었다. 은찬의 나지막한 말소리를 따라 섬 안쪽에서 붉은 새가 퍼드득 날아왔다. 새가 사체 위에 날개를 펼치고 앉을 때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사체는 단숨에 불타 올랐다. 두 소년은 한참동안 사체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사체는 재 한 줌만 남긴 채 사그라졌다. 은찬이 허리를 굽히며 하얗게 바스러지는 뼈를 가만히 긁어모았다. 재는 녀석의 부모에게 보내질 것이고, 부모는 가장 달이 높은 밤에 사냥터로 나가 자식의 뼈를 뿌릴 것이다.
백건은 말이 없었다. 고집스럽게 다물었던 입술이 한참 후에야 우물거렸다. 분한 얼굴이었다. 그보다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노란 눈이 성난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마음에 걸린 돌덩이를 끝내 불살라버릴 것만 같은 그런 눈이었다.

“너는… 너무 몰라.”

아니. 은찬이 소리 없이 대답을 삼켰다. 나는 너무 많이 알아.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조차 나는 알고 있어. 그게 가끔 내가 섬기는 존재보다도 나를 더 끔찍하게 만들어. 그 말을 은찬은 단 한 마디도 뱉지 않았다. 백건이 은찬의 목덜미를 불현듯 움켜잡았다. 대처를 하지 못한 마른 몸은 힘을 따라 맥없이 비틀거렸다. 젖은 옷섶을 단단히 움켜잡고 백건은 은찬에게 바싹 콧날을 들이댔다. 주은찬. 이름과 함께 송곳니가 제 입술을 하얗게 짓씹었다. 서늘했다.
우습게도 은찬은 그때에도 딴 생각을 했다. 너는 참 강해. 그래서 은찬은 가끔 그 하얀 이가 제 목을 물어뜯는 꿈을 꾸고는 했었다. 네가 나를 송두리째 씹으며 갈갈이 찢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바깥에서 모두들 뭐라고 떠드는 줄 알고나 있냐.”

백건이 말했다. 멱살을 움켜잡은 주먹이 옅게 떨었다.

“죽은 자들은 모두 달의 저주를 받았다고, 달의 주술사를 탐해 모두 죽어버린 거라고. 감히 <달>의 것을 탐하고 원하다가 그만 죽었다고.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 설마 지혜롭고 현명하신 붉은 늑대께서 그딴 소문도 모르시겠냐.”
“…백건.”
“내 친구는 이제 바깥에서 내게 아는 척도 하지 않지. 처음부터 남이었던 것처럼 벼랑으로 떠밀어. 왜. 내가 ‘저주’라도 받을까봐서, 내가 이 녀석들처럼 혹여 혀를 길게 빼고 우물에 똑 떨어져 죽을까봐서. 혹시라도 붉은 늑대를 탐할까봐서, 너를 억지로 꿇어 엎드리고 너의 얇은 틈을 찢으면서 취할까봐서, 그러다 모두 죽을까봐서, 그게 넌 끔찍해서 …!”
“……”
“…내 마음을 너는, 다 알면서.”

털색처럼 붉은 눈썹이 옅게 좁아졌다. 그런 거 아냐. 은찬이 우물거렸다. 정말로 그런 게 아냐. 그래도 백건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노란 눈이 달처럼 일렁거렸다. 흔들리는 눈이다. 정처를 잃은 눈길이다. 알기에 알면서도 은찬은 끝내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건아. 꽉 눌린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제 친구의 이름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이제는 제법 물기가 마른 손끝이 백건의 하얀 뺨 위를 미끄러졌다. 붉음이 짙어 밤 어둠을 닮은 둥그런 눈이 달 같은 노란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이 못처럼 깊었다. 별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은찬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너를 소중하게 생각해. 노란 눈이 절망처럼 일그러졌다.

“너는 좋은 족장이 될 거야. <달>께서도 너를 축원하시겠지. 물론 아직 기도를 드려보지 않았으니 족장이 너일지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하하…”
“……”
“곧 네 짝을 두겠구나.”

쓸데없는 말이었다. 말을 하고 은찬은 아차 싶었다. 뒤늦게 입을 다물며 은찬은 어물어물 몸을 돌렸다. 반쯤 돌아선 몸이 벼락처럼 붙들렸다. 그대로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잡으면서 백건이 제 쪽으로 은찬을 홱 잡아 당겼다. 은찬이 힘을 따라 휘청거리며 백건의 품으로 쏟아졌다. 하얀 얼굴이 은찬에게 바싹 다가붙었다. 뺨 위로 제 것이 아닌 날선 호흡이 뜨겁게 쏟아졌다. 잽싸게 몸을 빼려던 찰나에 허리에 하얀 팔이 단단히 감겨왔다. 속수무책으로 품에 갇혔다. 의복의 천은 너무 얇았고 젖었다. 발가벗은 것 같았다. 껍질도 낱낱이 벗겨진 것 같았다. 젖은 천이 투명하게 달라붙어 있던 마른 살결 위를 백건이 거칠게 쓸어내렸다.

“은찬아.”

백건의 입술이 은찬의 뺨을 더듬으며 말했다. 동시에 이를 세웠다. 칼날 같은 통각에 은찬이 크게 떨었다. 뺨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백건이 붉게 젖은 입술을 엄지 끝으로 훔쳤다. 뺨이 아팠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보다는 그 눈길에 은찬은 숨이 막혔다.

“내 송곳니를 가진 건 너야.”

제 잇자국이 선명히 박힌 뺨을 더듬으면서 백건은 거듭 말했다. 내 첫 번째 이를 너에게 줬어, 털이 붉은 늑대에게 줬지. 은찬이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흘러넘친 피가 마른 목줄기를 타고 떨어졌다. 하얗던 의복에 점점이 붉게 번졌다. 백건이 말했다. 너야, 주은찬. 너에게, 줬어.

“내 이를 너에게 줬고, 네가 내 이를 받았지. 그건 맹약이다. 너와 나, 영원히 죽음에서조차 갈라서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건 그냥 어릴 때 치는 장난이야.”
“장난으로 내 목숨을 너에게 맡기지는 않지.”
“나는 붉은 늑대야. 이 털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 나를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어.”
“어, 나는 너를 달라고 안 해. 네가 나를 가져.”

이미 넌, 충분히 가지고 있겠지만. 백건이 낮게 말하며 팔을 풀었다. 풀린 힘을 따라 은찬이 떠밀리듯 휘청거렸다. 백건이 제 윗옷의 아랫단을 무심히 주욱 뜯어냈다. 아직도 피가 송송 솟고 있던 은찬의 뺨 위에 천조각을 힘주어 꾹 눌러주고, 백건은 그대로 돌아섰다. 색 밝은 머리칼이 장막 너머로 사라진 후에야 은찬은 주저앉았다. 피는 이제 멎었다. 그래도 뺨에 댄 천조각만은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문 건 너잖아.”

말하며 은찬은 프 웃었다. 뺨에 댄 천에선 익숙한 체취가 났다. 따뜻하고 그리운 냄새였다.








*

일찍 사랑을 알았다. 동시에 절망을 알았다. 그리고 죄를 배웠다.

죄악감은 끝을 모르는 탐식처럼 은찬을 발끝에서부터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열 살 때였다. 사랑을 커녕 세상의 관계를 알기에도 너무 어렸던 나이였다. 그때, 은찬은 <달>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었다.
그전까지 <달>은 은찬에게 실체 없는 이름이었다. 어릴 적에 늙은 시종의 품에 안겨 성소로 옮겨진 이후부터 은찬은 오래도록 <달>에 대해 배웠지만 한 번도 <달>을 듣지 못 했었다. 3월의 30일이었고, 그믐이었다. 그믐이면 랑족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주둥이는 길어지고, 사람의 몸을 덮고 있던 털옷은 온몸을 휘감싸면서 가죽으로 변한다. 은찬이 <달>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년아.

누군가 은찬을 불렀다. 붉은 머리 위로 쫑긋 솟은 뾰족한 귀가 소리를 따라 쫑긋거렸다. 늙은 시종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은찬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달>이다. <달>이 연거푸 은찬을 불렀다. 소년아, 나의 소년아. 은찬은, 붉은 늑대는 소리를 좇아 성소를 뛰쳐나갔다. 달이 사라진 밤은 어두웠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면서도 붉은 늑대는 넘어지지 않았다. 늑대일 때의 랑족은 밤눈이 밝았다. 어둠 속에서도 서른 걸음 바깥에 있는 작은 새의 움직임을 따라 실수 없이 밤길을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숨이 턱이 차도록 붉은 늑대는 달렸다. 왜 달리는지,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도 몰랐다. 그저 <달>을 따라 달렸을 뿐이다. <달>이 들려 달렸을 뿐이다.

지난 생도 너는 내 것이었다. <달>은 말했다.
너의 이번 생도 나의 것이다. 너는 그러니 홀로 외로워라. 야성과 번민, 인간과 축생의 틈을 떠돌면서 너는 홀로 있어라. 너를 감히 탐하는 자는 온 사지가 찢기며 고통 속에 죽을 것이다.

은찬은, 붉은 늑대는 가슴이 뛰었다. 두근거렸다. 왜 심장이 뛰는지, 어째서 숨이 막힐 것 같은지, 왜 달리고 있는지 다 알기에 붉은 늑대는 고작 열 살이었다. 어렸고 약했다. 멈추지를 못해 그저 달렸다. 그러다 무언가에 툭 부딪치며 붉은 늑대는 와르르 주저앉았다. 주둥이를 찡그리며 붉은 늑대는 저와 부딪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들었다. 짙붉은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눈이 부셨다. 그믐인데도 보름인 듯 찬란했었다.

처럼 하얀 털을 가진 늑대였다.

녀석은 그때에도 또래 중에 덩치가 가장 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아. 생각을 삼키며 붉은 늑대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늑대가 이쪽을 스르륵 돌아봤다. 그제야 붉은 늑대는 그 얼굴을 또렷이 보았다. 그런 털색을 가진 늑대를 붉은 늑대는 처음 보았다. 또 그런 눈을 가진 늑대도 붉은 늑대에겐 처음이었을 것이다. 늑대들은 대체적으로 짙은 갈빛과 흑색 털을 가졌고 초록이거나 검은 눈을 가진 녀석들이 많았다. 녀석의 털은 눈처럼 하얬고, 눈은 달처럼 근사한 황금색이었다. 멋지다. 붉은 늑대는, 은찬은 생각했다. 동시에 그제야 녀석이 앞발을 절름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괜찮아?」

붉은 늑대가 물었다. 하얀 늑대가 노란 눈을 둥그렇게 열다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저에게 달려와 부딪치고 쓰러진 녀석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도 녀석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콧잔등에 그어진 주름도 눈처럼 하얗던 털색과 그 눈길만큼 근사했다. 사람이어도 필경 멋질 것이라고 붉은 늑대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만히 하얀 늑대 앞에 엎드려 앞발의 틈을 가만히 혀로 쓸어냈다. 하얀 늑대가 흠칫 놀라다 이내 순순해졌다. 붉은 늑대의 발간 혀 위에 잔가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얀 늑대는 물었다. 그냥. 붉은 늑대는 웃었다. 하얀 늑대가, 백건이 씩 웃었다.

「너는 특별한 녀석이구나.」

붉은 늑대는, 은찬은 그 얼굴을 한참 홀린 듯 바라 봤었다. 아마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얀 늑대의 눈은 타는 듯한 황금색이었다. 그 눈이 하늘의 노란 달님을 닮았다고 은찬은 생각했었다.

그날, <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은찬은 밤이 저물도록 <달>의 경전을 들척거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달>은 거대한 이리의 형상을 입고 하얀 털에 눈부신 황금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은찬은 들리지 않는 <달>의 목소리 대신 낮에 보았던, 제 또래의 그 어린 늑대에 대해 떠올렸다. 또 보자고 백건은 말했었다.
은찬이 책 속으로 작은 얼굴을 푹 파묻었다. <달>에게 얼굴이 있다면 그건 너였으면 좋겠다. 은찬은 막연히 생각했다. 네가 나의 신이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의 <달>이었으면 좋겠어. 뾰족하게 솟은 귀 끝이 홧홧했다. 어린 늑대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러다 은찬은 그림의 한 귀퉁이에 쓰여 있던 작은 글귀를 발견했다. 달못의 바위제단에도 새겨져 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너를 탐하면 죽을 것이다

그날부터 은찬에겐 비밀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친구’가 생겼다. 백건은 그해 가을에 자신의 빠진 송곳니를 은찬에게 주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은찬은 백건의 송곳니를 달못의 제단 옆에 파묻었다. 그리고 가끔 땅을 헤집어 그 이를 한참동안 들여다보고는 했다. 목소리뿐인 <달>은 한 번도 은찬에게 자신의 제단 옆에 묻은 송곳니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 곁에서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소년은 곧 청년이 될 터였다. 열여덟 살, 광기의 밤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여름이었다.









*

차올랐던 달은 빠른 속도로 작아졌다. 손톱만한 달이 하늘에서 사라지며 다시 그믐이 되었다. 랑족들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경연이 머지않은 때였다.

산은 들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올해로 갓 열여덟 살이 된 늑대들의 짙은 체취가 노골적으로 떠다녔다. 젊은 수컷들은 틈나는 대로 싸움을 했다. 약한 녀석들은 진작 꼬리를 말았고, 강한 녀석들은 자신과 비슷한 체취를 가진 수컷들을 볼 때마다 이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어린 암컷들은 주변에 두런두런 모여서선 그 광경을 한참 구경했다. 며칠이 거듭되자 수컷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녀석들이 있었다. 녀석들은 이미 스스로 족장이라도 된 양 으스대거나 암컷, 혹은 예쁘장한 수컷들에게 주둥이를 들이대며 수작을 걸었다. 늑대들은 피하거나 혹은 모르는 체 했다.
그래도 모두들 하얀 늑대가 족장이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암컷들은 족장이 된 하얀 늑대가 자신을 선택하는 꿈을 꾸었다. 경연이 끝날 때 그믐도 끝나고 족장이 결정된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면 올해 첫 번째 광기의 밤이었다. 그 밤에 하얀 늑대와 접하는 녀석이 그와 영원히 같은 운명을 지고 살아갈 짝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암컷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컷들의 싸움 속에서도 하얀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수컷들은 불쾌했다. 아무리 약한 녀석들을 찍어 누르며 저희들끼리 싸움을 해도 가장 강한 녀석이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기를 쓰고 찾아다녀도 어디에서도 녀석을 볼 수 없었다. 수컷들은 녀석이 비겁하다고 입을 모았다. 동시에 녀석이 두려웠다. 어릴 적부터 하얀 늑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강한 자가 발톱을 숨길수록 도태된 자들은 더욱 안달이 나기 마련이다. 힘이 필요하다. 이미 몇 번의 싸움에서 승리한 수컷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하얀 늑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힘을 누가 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붉은 늑대를 취하면 <달>의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하얀 늑대가 강한 건 이미 그 녀석을 취했기 때문이야.”
“가장 가까운 친구지간인데 접을 못 했으면 그게 등신이지.”
“들었냐? 지난 해 광기의 밤에, 두 녀석이 접 붙는 걸 본 암컷들이 있다고 하던데.”

약한 자들은 겁이 많다. 겁이 많기 때문에 말이 많다. 수컷들은 첫 교미의 기억을 공유하듯 붉은 늑대와 하얀 늑대에 대한 소문을 주고받았다. 더러는 아직도 주술사를 두려워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의 저주를 받아 죽으면 어쩌려고? 벌벌 떠는 녀석이 있을 때마다 수컷들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윽박질렀다. 이미 <달>의 창부라고 했다. 하얀 늑대가 강한 것도 모두 붉은 늑대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녀석을 겁간하여 취하면 강해질 수 있었다. 비겁한 하얀 늑대는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겠다고 경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경연이 시작되기 전에 움직여야 해.”

경연을 사흘 앞둔 밤, 다섯 마리의 젊은 수컷이 몰래 성소로 숨어들었다. 성소의 늑대들은 모두 일찍 잠들었다. 수컷들 중 한 녀석이 자리에 숨어들었을 때 붉은 늑대는 불현듯 눈을 떴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나머지 녀석들이 달려들어 늑대의 마른 팔과 다리를 제압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장 먼저 뛰어 들었던 녀석이 어둠 속에서 붉은 늑대를 향해 낮게 그르르 울었다. 입 다물어. 소리를 지르면 네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버릴 거야. 붉은 늑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녀석들이 늑대의 몸을 뒤집어 바닥에 엎드리게 짓눌렀다. 머리 위로 거친 호흡이 뱀처럼 떨어졌다. 붉은 늑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야. 붉은 늑대는 생각했다.

지난 광기의 밤에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다. 모두 붉은 늑대를 취하고 싶어 했다. 모두 <달>의 힘을 가지고 싶어 했다. 겉으로는 <달>의 말을 듣는 귀한 주술사라 떠받들면서도 제 몸을 핥듯이 쳐다보던 눈길들을 붉은 늑대는, 은찬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반항도 하지 않았다. 덤벼봐야 죽는다. 이 나이대의 수컷은 자제력이 없다. 게다가 녀석들은 족장이 되지 못할까봐 안달이 잔뜩 나 있었고, 틈만 나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들었다. 사람일 때보다 늑대일 때 랑족은 더욱 자제가 없다. 죽인다는 말이 협박은 아닐 것이다. 하기야, 죽으면 또 태어나면 된다. 죽으면 은찬은 또 이 산의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 달못으로 옮겨져 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제 허리 위에 올라타는 무게를 느끼면서 은찬은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남이겠지. 그래서 죽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이 피에 힘이 있다면, 녀석들은 나를 취해 강해질 거야. 그렇다면 너를 꺾고 족장이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족장은 가장 강한 늑대다. 가장 강한 늑대는 반드시 반려를 택해 자손을 남긴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은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숨을 삼키면서 백건의 주변을 떠돌던 암컷들을 생각했다. 광기의 밤에 그 중 누군가를 택해 교접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속이 메스꺼워서 은찬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울렁이는 속을 참으면서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다섯을 다 새기도 전에 허리에 올라탔던 녀석이 틈입 직전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녀석이 은찬의 몸 위에서 툭 미끄러져 떨어졌다. 수컷들은 당황했다. 축 늘어진 녀석의 얼굴을 주둥이로 툭 쳐보던 한 녀석이 사시나무처럼 파랗게 떨었다. 이 녀석,

죽었어.

그 밤, 겁에 질려 달아나던 수컷 한 마리가 벼랑에서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는 목이 졸려서, 혀를 깨물어서 두 마리가 죽었다. 다섯 마리 중 남은 것은 한 녀석뿐이었다. 다섯 중에서도 유난히 싸움을 좋아했었던 녀석은 경연이 시작되는 날까지 굴 안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경연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올 무렵에야 집안의 어른들이 녀석을 바깥으로 억지로 끌어냈다. 귀신이라도 보았느냐는 어른들의 호통에도 녀석은 꽉 입을 다물었다.
은찬은 네 구의 시체를 염했다. 시체들은 모두 재가 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종이 헐거워진 성소의 문에 걸쇠를 덧대 달았다. 불긋해진 하늘 저편에서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제 곧 경연이었다.




*

경연은 치열했다. 더러는 물린 상처가 깊어 죽기도 했다. 하루를 넘기고 이틀째가 될 때에야 비로소 두 마리의 수컷만이 남았다. 다섯 마리 수컷 중에 살아남았던 한 마리, 그리고 하얀 늑대였다.

하얀 늑대는, 백건은 경연이 시작될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부산을 부리며 달라붙는 암컷들을 잠자코 무시하고 백건은 경연장에 모여 있던 장로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경연이 시작되고 백건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틀째의 해가 다 질 무렵에야 길고 긴 경연은 비로소 끝이 났다.

족장은 오늘 밤에도 끝내 굴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젊은 두 수컷은 장로들과 함께 달못으로 향했다. 행렬은 구경꾼들이 섞이면서 제법 길어졌다. 붉은 늑대가 두 시종과 함께 성소 앞에서 일행들을 맞았다. 하얀 늑대와 나란히 걷던 수컷은 몇 번이고 걸음을 휘청거렸다. 녀석은 오른쪽 뒷다리를 크게 절뚝거렸고, 오른쪽 눈도 경연 중에 물린 모양인지 좀체 뜨지를 못 했다. 그에 반해 하얀 늑대의  털에는 상처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소의 문이 열렸다. 모든 사람들이 주술사 앞에 조아렸다. 개중 몇은 고개를 조아리면서 주술사를 힐끔거리거나 저희끼리 클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장로들이 넌지시 주의를 줬다.

노란 눈이 사납게 뒤를 돌아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던 녀석들은 그제야 앓는 소리를 내며 주둥이를 합 다물었다. 붉은 늑대가, 은찬이 말없이 발 앞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복잡했다. 모두들 주술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못의 붉은 새가 날개를 퍼드득 펼치며 머리 위를 날았다.

소년아.

누군가 은찬의 귓가에 속삭였다. <달>의 목소리였다. 계시를 따라 은찬은, 붉은 늑대는 눈을 들었다. 붉은 늑대가 천천히 길을 따라 성소 앞으로 내려섰다. 수컷들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백건이 족장이 될 것이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산의 주인이 될 것이다.
<달>이 말했다. 털이 하얀 늑대가 이 산의 주인이다. 더불어 말했다. 그러나 너는,

거짓을 말하게 될 것이다.

붉은 늑대는, 은찬은 숨이 막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모두 은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은찬은 천천히 성막 앞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앞으로 나와 앉아 있던 두 마리 수컷 앞을 천천히 맴돌다 은찬은 돌연 갈색 늑대 앞에 오똑 멈췄다. 그리곤 말없이 녀석의 뺨을 핥았다. 녀석이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녀석은 기쁨에 그르르 울면서도 흘끔 제 오른편을 쳐다보았다. 백건의 노란 눈이 울컥 일그러졌다.

그리고 모든 일은 삽시간에 벌어졌다.

하얀 늑대가 단숨에 갈색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붉은 늑대가 날카롭게 울며 한편으로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붉은 늑대는 하얀 늑대가 갈색 늑대의 목을 물던 그 순간을 보지 못 했다. 하얀 늑대의 거대한 주둥이가 갈색 늑대의 목을 꿰뚫고 격렬히 흔들었다. 허공을 향해 부릅뜬 갈색 눈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갈색 늑대가 차갑게 축 늘어진 후에야 하얀 늑대는 턱을 풀었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얀 털이 붉은 피에 흠뻑 젖었다. 앞발로 저가 물어 죽인 갈색 늑대의 사체를 짓밟으며 하얀 늑대가 그르르 사납게 울었다. 황금색 눈이 붉은 늑대를 뚫을 듯이 꿰뚫었다. 붉은 늑대는, 은찬은 그 눈이 처음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네가 죽인 거야. 하얀 늑대의, 백건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너는 거짓말을 했어.

은찬은 고개조차 젓지 못 했다. 왕은 나야. 백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널 가지는 것도 나다. 너의 주인도 나야. 이 산의 주인은 오로지 나뿐이다.
백건이 달을 향해 크게 우짖었다. 겁에 질려있던 장로들과 수컷들이 하나 둘 고개를 젖히며 뒤따라 울었다. 왕의 울음이었다. 왕의 탄생을 기뻐하는 울음이었다. 은찬은 잠자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뽑힐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빴다.

그 밤, 은찬은 내도록 잠을 설쳤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백건과 마주쳤다. 달처럼 빛나는 황금색 눈을 가진 하얀 늑대였다. 은찬은, 붉은 늑대는 달아나지도 못한 채 하얀 늑대의 거대한 앞발에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녀석은 제 발 아래 깔린 붉은 늑대의 허리 위로 올라타고는 그대로 흘레붙었다. 은찬은, 붉은 늑대는 꿈속에서 내내 앓다 빠진 잇자리처럼 울었다. 죽고 싶어. 은찬은 간절히 빌었다. 차라리 놈에게 죽고 싶었다. 너의 칼날처럼 하얗고 서늘한 이에 갈갈이 찢겨 죽고 싶다고 은찬은 몇 번이고 생각했다. 백건은 끝내 은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너는 꿈에서마저도 나를 귀히 여긴다. 꿈에서마저 내 맘 다칠까 그리 마음을 써. 그 점이 못내 서러워 은찬은 뺨이 붓도록 퉁퉁 울었다.

끝내 백건은 유령처럼 떠났다. 허공뿐인 빈 꿈속에 은찬만 홀로 남았다. <달>이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너는 나를 기만했다. <달>이 은찬의 귀에 달게 말했다. 너는 거짓말을 했어. 은찬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주변은 칠흑 같은 고요와 어둠뿐이었다. 빈 어둠 속에서 은찬은 다시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그리고 붉은 꼬리에 제 얼굴을 틀어박고는 밤이 저물도록 울었다.
곧 광기의 밤이었다.





*


사라졌던 달이 천천히 차올랐다. 랑족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랑족은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의 일을 했다. 집을 고치고, 산에 열린 과실을 채집하고, 무기를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었다. 늑대일 때는 날 것을 먹지만 사람일 때는 사람의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보름동안 비어있던 화덕이 다시 불타올랐다. 아이는 어미의 봉긋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젖을 빨았고, 노인들은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장기를 두면서 수다를 떨었다. 화제는 늘 소소했고 자주 바뀌었다. 그래도 대부분 새로운 족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얀 늑대의 이야기였다.
은찬은 그 밤 이후로 백건을 보지 못 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백건은 몇 번이고 은찬을 찾아왔다. 어린 시종이 은찬을 대신해 백건을 돌려보냈다.

“족장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시종이 사슴의 뼈를 발라내며 은찬에게 말했다. 새 족장이 준 것이라고 했다. 은찬은 백건이 주고 간 것이 분명한 저 선물을 돌려보낼 방법에 대한 고민보다 시종의 입에서 나오는 족장이란 말이 낯설어 한참을 말없이 서있었다.

그래, 너는 족장이 되었구나.

은찬이 사슴을 내려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사슴은 눈을 감지 못 했다. 밤처럼 새카맣고 깊은 눈이었다. 늘씬한 목줄기에는 구멍 두 개가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사슴이, 다음 날에는 큰 물소가 상에 올라왔다. 은찬은 여전히 백건을 만나지 않았다. 손톱만큼 가늘었던 달은 서서히 차오르며 제 몸을 불렸다. 해는 조금씩 더 길어졌다.

이제 곧 하지夏至였다. 연중 가장 낮이 긴 날이었다.

하지의 해가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 때부터 요요한 기운이 산을 에워쌌다. 어미들은 일찍부터 자장가를 부르며 새끼를 재웠고, 성질 급한 녀석들은 해가 저물기 전부터 혀를 길게 빼고 헉헉 거리면서 산을 떠돌았다. 참지 않는 자들도, 참고 있는 자들도 모두 해가 지면 발정에 젖을 것이다. 광기의 밤은 발정의 절기다. 암컷도 수컷도 열에 들떠 가림 없이 교접을 하고 흘레붙는 유일한 날이다. 밤동안 누구와 어떤 식으로 교접을 하건 용인되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특히 이번 광기의 밤은 새 족장이 선출되고 난 직후였다. 모두 이 밤을 족장과 함께 보낼 암컷 중 하나가 그의 짝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
랑족은 18세부터 짝을 찾고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같은 짝과 어울려 살았다. 흔히 광기의 밤을 함께 보낸 이들이 이듬해까지 짝을 짓는 때가 많았다. 많은 암컷들이 강하고 젊은 족장의 짝이 되기를 원했다. 족장이 밤이 저물도록 자신을 취하고 날이 밝은 후에 족장이 잡아온 사슴이 자신의 집 앞에 놓여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랑족의 젊은 암컷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꿈을 꾸었었다. 일찍부터 몸을 씻고 손톱을 다듬으면서 여인의 모습을 한 암컷들은 모두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석양이 서편으로 사라졌다. 밤의 시작이었다.

바람결에 훅 떠밀려온 공기가 온통 달았다. 수컷들과 암컷들이 내뿜는 발정의 향이다. 늑대들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도 그 향에서 자유롭지 못 했다. 손끝을 덜덜 떨면서 은찬은 가까스로 성소의 창을 모두 닫았다. 붉은 털옷을 추켜 입으면서도 은찬은 몇 번이고 휘청거렸다. 발끝부터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짓씹으며 은찬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발정의 시작이었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부터 성소는 조용했다. 모두 성소를 떠난 탓이다. 발정의 때가 오래 전에 저물어 버린 늙은 시종은 오늘 밤을 주인 없는 굴에 숨어 홀로 보낼 것이다. 어린 시종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행선지도 말하지 않았지만 은찬은 시종이 오늘 밤에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올해로 갓 열다섯이 된 소년에게 오늘 밤은 첫 발정이었다.

사방에서 늑대들이 우짖고 있었다.

인적 드문 이 근방까지도 소리는 꽤 가까웠다. 은찬은 다시 한 번 성소의 입구가 잘 닫혀 있는지 확인했다. 걸쇠를 거는 동안에도 손이 떨렸다. 돌아서는 동안에도 숨결은 조금씩 거칠어졌다. <달>의 의지를 받는 붉은 늑대라 해도 몸은 랑족의 것이다. 달뜬 숨을 허공중에 흩어놓으면서 은찬은 달못을 향해 비척비척 걸었다. 제단의 좁은 돌길을 지날 때엔 몇 번이고 넘어져 못으로 떨어질 뻔 했다. 제단 앞에 반쯤 쓰러지듯 기댄 채로 은찬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열이 끓었다. 온몸을 어지럽게 떠도는 열을 참을 수 없어 스스로 옷을 벗었다.
털옷을, 속을 에워 감싼 천옷을 끌어냈다.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이 몸을 타고 떨어지기도 전에 은찬은 급하게 제단 옆에 웅크렸다. 맨손이 바쁘게 흙바닥을 헤집었다. 두어 마디 정도를 파헤친 후에야 흙더미 속에서 작고 하얀 조각이 나타났다. 은찬이 허겁지겁 조각을 움켜쥐었다. 송곳니였다.
를 움켜쥔 채로 은찬은 급하게 제단 위로 올랐다. 몸을 덮고 있던 마지막 천 조각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곧 알몸이 되었다. 붉은 새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달못 끄트머리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은찬은 제단 위에 비스듬히 엎드렸다. 달아오른 피부에 닿은 촉각이 서늘했다. 기분이 좋아서 은찬은 누운 채로 몸을 뒤척이며 제 뺨을, 또 제 몸을 몇 번이고 스스로 제단 위에 문질렀다.

<달>님.

한 손으론 이를 움켜쥐고, 남은 손은 스르륵 제 다리 틈으로 끌어 내리면서 은찬은 불렀다. <달>은 대답이 없었다. 은찬이 신음처럼 거듭 불렀다.
<달>님, 내 <달>님, 내 <달>아. 손에 속도를 더하면서 은찬은 질끈 입술 끝을 물었다. 점점 의식이 혼탁해졌다. 이성이 달처럼 조각나기 시작했다. 참고 있던 이름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건아.

나는 언제나 너를 상상해. 지난해에도, 첫 발정을 맞았을 때에도 나는 그랬어. 언제나 그랬었다. 네가 내 목을 물어뜯으며 나를 겁탈하는 상상을 했어. 제단의 돌 위에 나를 문지르면서도 나는 언제나 너이길 바랐었어. 구겨 감은 눈 끝을 타고 눈물이 달아오른 뺨 위로 굴러 떨어졌다. <달>은 침묵했다. 대답 없는 <달>의 이름을 부르며 은찬은 남은 한 손으로 제단의 귀퉁이를 꽉 움켜쥐었다. <달>이시여, 저는 죄를 지었어요. 그러나 죄를 지어 이번 생을 잃게 되는 것보다 그의 암컷과 그의 새끼를 보는 것이 몇 배는 더 괴로울 것이다. 너는 오늘이 지나면 이제 홀몸이 아니겠지. 생각이 괴로워서, 아파서 은찬은 그저 힘껏 헐떡였다. <달>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무릎이 서서히 주저앉았다. 허공중에 흩어지던 호흡이 거듭 한 사람의 이름을 더듬었다. 건아.

나는 차라리 네가 나의 신이었으면 좋겠어.

변화가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

낯선 손이 은찬의 눈을 가렸다. 동시에 은찬의 어깨를 거칠게 낚아채며 그대로 제단 위에 밀어 붙였다. 마른 몸이 크게 떨었다. 돌아볼 사이도 없이 뒷머리가 제단의 차가운 돌 위에 짓눌렸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그리고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냈을까. 그런 말들을 묻는 대신 은찬은 제단의 돌 귀퉁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단단한 벽처럼 은찬의 뒤를 덮친 그림자가 허겁지겁 몸을 붙였다. 은찬은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며 숨을 참았다. 말을 참았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그 체취를 이미 알아차린 탓이었다.

이 체취를 은찬은 오래도록 알고 있었다.

랑족은 체취를 통해 서로를 확인한다. 내 체취를 네가 모를 리 없어. 더불어 네 체취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모를 리가 없어. 알면서도 너는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걸까. 귓가에 젖은 숨이 거칠게 쏟아졌다. 가슴을 비벼오는 손이, 허리춤을 끌어내리는 손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시야를 가렸던 손은 이미 사라졌다. 그래도 은찬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꿈처럼 네가 사라져 버릴까봐.

건아.

부르지 못할 이름을 은찬은 혀끝으로 소리 없이 더듬었다. 열병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허리를 당기는 손짓을 따라 은찬은 스스로 뒤를 들었다. <달>께서 노하실 거야. 발갛게 달아오른 가슴팍을 돌 위에 문지르면서 은찬은 거듭 생각했다. <달>께서 모두 지켜보고 계실 거야. 분명 벌을 내리실 거야. 바짝 들어 올린 다리 사이가 긴장처럼 벌벌 떨렸다. 그래도 무릎을 모으지는 않았다. 울음을 삼키면서도 끝내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었다.
정사는 밤이 하얗게 저물도록 이어졌다. 꿈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꿈보다 격렬했고, 꿈보다 더 달콤했다. 은찬은 입술에 피가 배도록 깨물며 숨을 참았다. 나는 널 위해 여기에 있어. 그가 속삭였다. 너를 위해 나는 강해질 거야. 그러니 너는 여기에 있어. 너는 영원히 이 품에 있어라.

나는 <달>처럼 영원히 네 것이다.

독처럼 온몸에 퍼져 가는 열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은찬은 그 탄탄한 가슴 밑에서 끝내 하얗게 흐려졌다. 발정의 열이 그제야 모두 식었다. 그가 제 품에 축 늘어진 은찬을 천천히 마주 안았다. 흠뻑 젖은 마른 상체를 준수한 입술로 더듬으며 그는 은찬의 곁을 지켰다. 노란 눈에 새벽빛이 걸릴 무렵에야 그는 성소를 떠났다.

다음 날 장막 앞에는 사슴이 한 마리 놓여 있었다. 아직 피도 채 식지 않은 신선한 사슴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린 시종이 물었다. 은찬은 즉답 대신 목덜미에 단단히 찍혀 있던 낯익은 잇자국을 바라보았다. 내게 줘. 그제야 은찬은 담담히 대답했다. 왜냐면 이제,

“내 것이니까.”

달못을 언제나 한가로이 날아다니던 붉은 새가 보이지 않았다. <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광기의 밤이 끝났다.






*

며칠이 흘렀다. 젊은 암컷들은 성질이 잔뜩 날카로워져 있었다. 광기의 밤이 저문 이후부터 젊은 암컷들은 수시로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다. 서로 사이좋은 자매처럼 지냈던 암컷들조차 서로를 헐뜯으며 싸움을 일삼기 일쑤였다. 암컷들의 신경이 곤두서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하얀 늑대와 밤을 함께 보낸 이는 누구인가.
광기의 밤이 저물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부터 랑족은 서넛만 모였다 하면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백건은 젊은 수컷 중 가장 강한 존재다. 백건이 누구와 짝을 지을 지는 랑족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개중 성미가 급한 암컷은 성소에 올라 은찬을 찾기도 했다. 은찬은 그때마다 잠자코 고개를 저으면서 암컷들을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달>은 랑족의 사사로운 감정에 관여하지 않아요, 살아 사랑하며 살아 미워하는 감정은 <달>의 뜻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은찬이 차분하게 설득하면 암컷들은 분한 얼굴을 하거나 혹은 눈물을 찍으면서도 고분고분 고개를 조아리곤 다시 돌아갔다. 아무도 모른다. <달>조차도 몰랐다. 하얀 늑대가 그 밤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에 대해 <달>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달>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은 모른다. 은찬이 근래 들어 점을 통 치지 않는 이유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달>의 일이 아닌 것을 묻는 탓이다.

<달>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소의 어린 시종은 답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종은 종종 잠을 설쳤다. 나이가 어려 속열이 높은 탓이라고 어른들은 즐겨 말했었다. 열은 광기의 밤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시종은 첫 교접에 실패했다. 급히 마을로 내려갔지만 대부분은 모두 짝이 있었고, 해가 지기도 전부터 교접이 한참이었던 탓이었다. 시종은 그날 종일 달빛 아래를 내달렸다. 어린 시종에겐 늙은 시종처럼 이런 밤을 피해 몰래 몸을 숨길 수 있는 굴이 아직 없었다. 언덕을 따라 달리고 달리다 끝내 다시 제 자리가 있는 성소로 돌아왔다.
시종은 입구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젊은 수컷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선 어린 시종도 잘 알고 있었다. 시종에게 발정이 찾아오지 않았었던 지난 해 광기의 밤에도 붉은 늑대를 노리는 수컷들이 낮게 울며 밤새 성소 근처를 떠돌았었다. 더러는 성소에 달아오른 제 몸을 비벼댔고, 아침이면 성소의 장막에 하얀 탁액들이 점점이 튀어있었다. 그것은 은찬이, 붉은 늑대가 허술한 듯 보여도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 시종은 잠금이 부서져 있던 입구를 기이하게 여겼다.

걸쇠가 헐겁게 떨어진 문에는 누군가 그어둔 발톱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시종의 작은 앞발이 다섯 개쯤은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수컷의 발이었다.

시종은 헐거워진 문을 다시 단단히 닫으면서 성소 안으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제 자리 앞에서 망설였던 것은 달못 안쪽에서 들려오던 달뜬 숨결 때문이었다. 붉은 늑대의 잠자리를 지나쳐 슬그머니 달못으로 향했던 것도, 부정을 탈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못의 장막 틈을 훔쳐보았던 것도 그 탓이었다. 달빛이 부옇게 떨어지던 바위섬 한중간에서 하얀 등이 꿈틀거렸다. 마른 손이 하얀 등을 단단히 휘어 감으며 손끝을 세웠다. 시종은 입을 틀어막으면서 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열다섯 어린 눈길은 좀처럼 눈을 돌리지 못 했다.
다음 날 정오를 넘길 무렵에야 늙은 시종이 돌아왔다. 늙은 시종은 벽을 향해 돌아앉아 꼬리를 말고 있던 어린 시종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종을 대신해 성소 앞에 놓여있던 사슴을 거두고, 정돈한 후에야 붉은 늑대를 깨우러 갔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장막에는 사슴이 놓여 있었다. 저녁잠이 많은 늙은 시종이 일찍 잠자리에 들면 바깥에서 덜그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린 시종은 벽을 향해 돌아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보름이 지나고, 또 보름이 지나고, 다시 한 번 보름이 지나면서 어린 시종은 조금씩 이 기이한 일상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린 시종은 어째서 늙은 시종이 달못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달못의 붉은 새가 사라졌다. 붉은 늑대가 점을 치지 않는다. 입을 다물라고, 늙은 시종은 어린 시종에게 말했다.





광기의 밤이 저물고 보름이 지났다. 랑족은 다시 늑대가 되었다. 공터에는 새로이 짝을 지은 늑대들이 자주 어울려 입을 맞추거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거나 했다. 모두 발정의 밤을 함께 보낸 짝들이었다. 백건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눈에 불을 켰던 암컷들도 대부분 다 짝이 생겼다. 젊은 늑대들에게 서로의 짝이 생기면서 관심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날은 지난밤보다 더욱 무더웠다.

불볕 같은 여름이었다.

늑대의 몸을 입은 수컷들은 젊고 강한 족장을 따라 자주 사냥터로 나갔다. 백건은, 하얀 늑대는 한낮의 가장 뜨거운 때를 피해 주로 오전 중에 사냥을 했다. 사냥은 거의 매일 벌어졌다. 산천초목이 가장 무성한 이 무렵에 사냥감들이 가장 토실하게 살이 오르기 때문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백건은 젊은 수컷들과 함께 산 아래의 사냥터로 향했다. 백건은 주로 사슴을 잡았다. 젊은 수컷들은 백건의 곁에 재게 따라 붙으면서 젊은 족장의 용맹을 칭송하며 아부처럼 울었다. 그러나 백건이 누구와 그 사슴을 나누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보름이 저물었다.

하늘에는 사라졌던 달이 나타났고, 늑대들은 달빛을 받아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사냥은 멈췄다. 은찬은 자주 스스로 문단속을 했다. 자신이 이미 걸쇠를 단단히 잠가놓았노라고 어린 시종이 고해 올려도 은찬은 꼭 한 번은 걸쇠를 스스로 매만졌다. 그리고 자주 어린 시종과 함께 저녁을 만들었다. 식단은 대체적으로 늘 신선한 사슴이었다. 늙은 시종과 어린 시종은 은찬이 서툴게 솜씨를 보탠 저녁을 배불리 먹고 늘 일찍 잠들었다. 은찬이 부엌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후부터 두 사람은 잠이 많아졌다. 은찬이 유독 아침잠이 많아진 그 무렵부터였다. 어린 시종은 일찍 잠든 그 밤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 짐작하지 않았다. 일찍 자리에 누워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어린 시종은 늙은 시종이 했던 말을 주문처럼 되뇌고는 했다. 입을 다물어라, 모르는 척 해라. 보아도 보지 않은 것이다, 들려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은찬이 스스로 문단속을 한 게 분명한 걸쇠가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도, 누군가 달못으로 걸어가는 기척이 들려도 어린 시종은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밤이 저물었다. 늙은 시종과 어린 시종은 일찍부터 방으로 들어가 장막을 내리고 자리에 누웠다. 반쪽짜리 달이 하늘 중턱에 걸렸다. 은찬이 스스로 문단속을 했던 걸쇠가 소리 없이 열렸다. 달못의 제단 위에 앉아 있던 은찬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입구의 장막을 걷어내며 누군가 달못으로 들어왔다. 부옇게 흩어지던 달못의 빛에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색이 밝은 머리칼 밑으로 노란 눈이 달처럼 일렁거렸다.

백건.

이름을 부르는 대신 은찬은 제게 걸어온 백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발정이 아닌데도 열이 끓어올랐다. 숨이 막혔다. 단단한 허벅지 위를 천천히 쓸어 올리는 마른 손을, 흔들리던 붉은 머리칼을 백건은 말없이 한참을 내려 보았다. 그러다 좁은 턱을 왈칵 움켜쥐면서 벼락처럼 은찬의 몸을 일으켰다. 두 몸이 성급하게 겹쳐졌다. 호흡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어떤 인사도, 말도, 감탄도 없었다. 붉은 털옷이 제단 옆을 빗겨 떨어졌다. 급하게 드러난 맨 몸을 쓸어내릴 때 은찬은 떨었고, 백건은 살집에 힘이 몰리도록 은찬을 움켜쥐었다. 새가 사라진 달못은 조용했다. 퍼덕이는 새의 울음도, <달>의 목소리도 사라진 못가에서 은찬은 기도처럼 몸을 말았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

엎드리며, 은찬은 말했다. 백건은 답도 없이 엎드린 은찬의 몸을 훌쩍 뒤집었다. 그 채로 마주 안은 등을 백건은 정성껏 더듬었다. 목부터 천천히 끌어내리는 손길을 따라 은찬은 정처 잃은 별처럼 떨었다. 건아. 호흡을 짓씹으며 은찬이 말했다. 짙붉은 눈 끝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나는… 우물거리던 말이 자꾸만 멈춰 섰다. 어쩐지 자꾸만 목이 멨다.

“우린 이 삶에선 아무 것도 주고받아선 안돼.”
“정을 통했잖아.”
“아니, 나는 너를 위한 남창조차 될 수 없어. 왜냐면 난…”

무서워. 은찬이 말했다. 백건이 은찬에게 입 맞추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누워있던 허리를 가만히 들어 올리며 백건은 은찬을 깊게 마주 안았다. 마른 등을 더듬는 손길이 깊었다. 매만지는 손끝이 다정했다. 가장 귀한 것을 어르는 듯 부드러웠다. 그 손길이 은찬은 아팠다. 몸의 아픔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네게 꿰뚫린 고통 같은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도 놓고 싶지 않아서 은찬은 백건의 허리에 감겨 있던 제 양다리에 꽉 힘을 실었다. 백건이 멈췄던 허리를 다시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하얗고 너른 등에 손끝을 세우며 은찬은 신음처럼 속삭였다. 내 사랑아. 짙붉은 눈끝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너는 나를 버려야만 해.

<달>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너는 이제 이 산의 왕이야. 네 스스로 이 산을 버리지 않는 한은 100년동안 이 산을 지켜야만 해. 그때까지 너는 살아야 해. 하지만 이대로라면 우린 죽을 거야. <달>께서 언젠가… 우리를 버리실 거야.”

노란 눈이 말없이 은찬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이 꼭 달 비치는 호수처럼 맑았다. 달못 같았다. 내 사랑아, 너는 이토록 고결한 존재인데. 말을 삼키며 은찬이 백건의 하얀 뺨 위에 축축한 뺨을 문질렀다. 문지르는 기척을 따라 눈물은 자꾸만 샘물처럼 일렁거렸다. 은찬이 혀끝으로 제 사랑의 이름을 더듬었다. 다리를 잃은 것처럼 절룩거렸다. 건아, 내 사랑아, 나의 왕아.

“너도 언젠가 나를 범하려던 녀석들처럼 죽게 될 지도 몰라. 그게 나는 싫고 아파. 나는 네가 오래도록 살았으면 해.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너의 산에서, 너의 길을 걸으며, 너의 나라를 번영시키기를 나는 원해.”
“……”
“나는 그 곁에 살아 있을게.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마. 그 이상을 주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암컷과 접하기를 원해. 너를 닮은 새끼를 낳아 너의 대를 이어가길 바라고 또 소망해.”

내 사랑아, 내 달 같은 사랑아. 나는 너로 인해 저물어간다. 새가 떠난 후부터 은찬은 줄곧 괴로웠다. <달>의 침묵이 은찬은 더없이 아팠다. 벌해달라고 간청하는 말에도, 답을 달라고 드리던 기도에도 <달>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달>이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은찬은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달>이 떠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달>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랑족이 붉은 늑대를 공양하는 것은 <달>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달>에게 기도할 수 없는 주술사는 랑족에게 가치가 없다. 추방당할 지도 모른다. 혹은 도태 되어 죽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오로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백건은 한참 말이 없었다. 노란 눈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화를 내는 것도 같았고 우는 것도 같았다. 그때만큼은 은찬도 오래도록 익숙하게 들여다보았던 백건의 속을 알기 어려웠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내가 넌 미울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무서운 걸까. 알 수가 없어서 은찬은 그저 가만히 백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백건이 왈칵 은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잔뜩 메인 호흡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은찬아. 이름을 부르는 말끝이 잔뜩 눌려 있었다. 잔뜩 떨고 있었다. 그래도 안은 팔을 풀지는 않았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백건이 말했다. 나는 언젠가 너를 위해서 반드시,

<달>을 넘어설 테니까.

“나는 모두 널 위해 참는 거다. 널 위해 인내하지. 세상이 뭐라 해도 좋아. 허나 널 위해 말하지 않는 거다. 네가… 아플까봐.”
“……”
“그러니 너는 내 그림자 밑으로만 걸어라. 내 발길 닿는 곳으로만 너는 걸어. 왕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차라리 널 위해 산이 될 거다. 네가 묻힐 거대하고 높은 산이 될 거야. 어떤 생의 너라도 나는 놓지 않을 거다. 너는 내 품에서 태어나 내 품에서 죽어.”

가슴이 뽑힐 듯 뛰었다. 숨이 막힐 듯 어지러웠다. 너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미워서, 원망스러워서 은찬은 답 대신 제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힘이 하얗게 몰린 얇은 입매 위로 백건이 입술을 덮었다. 하얀 손가락들이 은찬의 젖은 뺨 위를 미끄러졌다. 울지마, 내 짝아. 노란 눈이 낮게 속삭였다.

나를 너에게 줄 것이다.

“허니 너는 울지 마라. 아파도 말아라.”

숨을 참아. 백건이 속삭이며 이를 세웠다. 은찬이 몸을 크게 떨었다.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둥그런 구슬더미처럼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산산이 흩어질 거야. 부서지는 게 두려워서 은찬은 백건의 등에 손끝을 세우며 매달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꿰이길 원했다. 부서져 흩어지지 않도록 네가 날 단단히 꿰었으면 좋겠어. 나는 네 목에 걸릴 거야. 너의 하얀 털을 감싸며 너를 가장 찬란히 돋보이게 하는 증거가 되고 싶어.
주술사를 범하여 취하면 <달>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힘이 정말 제 안에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확신은 없었다. 정말로 나를 취하고 접한 자는 <달>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네가 더 강해지길 원해. <달>의 권능에 네 이를 세울 수 있을만큼 네가 강해지길 바라. 나를 취해 네가 왕이 되었으면 해.
은찬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더듬었다. 짙붉은 눈이 타는 듯이 백건을 쳐다보았다. 그럼 너를 완전히 나에게 줘. 은찬이 달게 떨며 백건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너는 나를 취해.

“이제 너는 진짜… 이 산의 주인이 되는 거야.”

그날, 둘은 너무 가까웠고 또 멀었다. 백건이 은찬을 부술 듯 끌어안았다. 마주 본 눈길이 타는 듯 했다. 이렇게 불타올라 사라져 버릴 달인 듯 했다. 달아오른 두 몸이 성급하게 겹쳐졌다. 제단 위에 엎드리며 은찬은 낮게 울었다. 커다란 손가락들이 몸을 쓸어내릴 때마다 열기가 한낮의 꽃처럼 피어올랐다. 떠밀리며 은찬은 잔뜩 흩어지며 부서졌다. 이대로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아 은찬은 허겁지겁 손을 뒤로 뻗어 백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입술이 겹쳤다.
몸 안에서 날뛰는 불길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은찬은 제 틈을 비집는 백건의 호흡을 간절히 더듬으며 힘껏 들이마셨다. 단단히 움켜 안은 채로 백건이 허리를 흔들었다. 젖힌 턱을 헐떡이며 은찬은 백건의 이름을 꿈처럼 더듬었다. 숨결을 겹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은찬은 몇 번이고 몸을 떨었다.

내 사랑이 언젠가 너의 숨통을 조르겠지. 내 사랑이 언젠가 너의 사지를 자를 거야. 너의 무쇠 같은 발톱을 무디게 하고, 너의 칼날 같은 송곳니를 슬게 하겠지. 그럼에도 생의 번민이 너를 끝없이 욕망하고 탐하기를 부추긴다. <달>의 몸이지만 축생의 몸이어서, <달>의 마음이지만 사람의 마음이어서 은찬은 제 안의 폭풍을 참지 못 했다.

은찬아.

백건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혀끝처럼 꺼칠한 음성이 은찬의 뺨 위로 떨어졌다. 입술을 문지르며 백건은 기도처럼 거푸 중얼거렸다.

내 세계의 신은 너야.

그러니 너를 향한 마음들이 죄일 리 없어. 불경일 리 없어. 백건이 은찬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 위에 깊게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옅게 떨던 짙붉은 눈을 향해 백건은 말했다. 내 빛, 내 영혼의 근원이자 내 호흡의 이유, 붉고 붉어 귀하고 아름다운 내 사랑아. 준수한 입술이 낮게 속삭였다. <달>은 이제 오지 않아. 은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백건이 천천히 은찬의 허리 위로 올라오며 바닥에 눕혔다. 헐거워진 의복을 거칠게 끌어내리며 백건은 허겁지겁 입술을 묻었다. 가슴의 얇은 피부에 얼굴을 묻고 백건은 깊게 빨았다. 은찬이 턱을 젖히며 흡 숨을 삼켰다. 입술이 닿은 자리가 온통 두근거렸다. 광기의 밤이면 떠오르는 붉은 달처럼 연신 뛰었다.

“너를 품는 것은 <달>이 아냐. <달>도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질 테니까.”
“그만,… 괴로워, 건아,… 숨을, 쉴 수가 없어, 괴로워… 아아,…!”
“나는 언젠가 너를 위해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은찬은 어지러웠다. 숨이 막혔다. 투박한 손끝이 은찬의 뺨을 간절히 더듬었다. 눈을 맞추는 것도 은찬은 힘에 겨웠다. 호흡조차 버거워서 은찬은 아득히 눈을 감았다. 너는 끝내 나를 완전히 가질 수는 없을 거야. 둥그런 눈결을 타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영원하기를 은찬은 간절히 빌었다. 모두 샅샅이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네가 곁에 없어도 너의 체온을 그릴 수 있기를, 너를 보지 않아도 황금처럼 빛나는 너의 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너를 기억하면 나는 외롭지 않을 거야. 그리고 홀로 늙어갈 수 있겠지. 내 사랑아, 내 <달> 같은 사랑아. 그러나 은찬은 끝내 그 말을 실수로도 꺼낼 수 없었다.



동쪽 하늘 끝이 푸르게 밝아올 무렵에야 백건은 성소를 떠났다. 성소의 문이 닫힐 때에야 늙은 시종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은 시종은 아침잠이 적은만큼 잠귀가 밝았다. 여전히 잠에 빠진 어린 시종 앞을 지나쳐 늙은 시종은 달못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의복을 반쯤 비스듬히 걸친 채로 은찬은 제단 위에 엎드려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달못에는 은찬 뿐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도, 오래 전부터 새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늙은 시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늙은 시종은 부엌으로 돌아가 사슴의 살을 도려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달못 안쪽에서 비명처럼 오열이 터졌다. 붉은 늑대의 울음소리였다. 숨이 넘어갈 듯이 붉은 늑대는 엉엉 울었다.

때가 되었다고 늙은 시종은 생각했다.

젊은 수컷의 사체가 우물 위로 떠오른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암컷들은 비명을 질렀고, 새끼들은 겁을 먹었다.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산이 저주를 받았다. 랑족에 저주가 내렸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붉은 늑대의 <새>가 사라졌다. <달>이 붉은 늑대를 버렸다. 우리를 버렸다.

붉은 늑대가 <달>을 속였다.








*

소문은 봄처럼 빠른 속도로 온 산을 에워쌌다.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입과 저 입으로 옮겨 다니면서 소문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더러는 주술사가 사특한 간계를 부린 것이라 떠들었다. 누군가는 주술사가 산 아래의 다른 일족과 내통을 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많은 늑대들이 이렇게 말했다. 붉은 늑대가 누군가와 정을 통했다. 다른 이와 짝을 맺었다. 그리하여 <달>을 배신했다.
하여튼 붉은 늑대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쯧쯧 혀를 찼다.

“지난 번 붉은 늑대도 다른 수컷과 정을 통하다 천벌을 받았었지요? 우물에 떨어져서는 죽어버렸잖아요.”
“그 붙어먹었다던 수컷이 죽고 난 후였었지.”
“그래놓고 붉은 늑대는 자기 스스로 우물에 뛰어 들어 죽었구요.”
“그때에도 새가 사라졌다던데.”
“이번에도 달못에 새가 보이질 않는대요.”
“그것 보라니까. <달>의 권능을 저버리니 저주를 받는 게지.”
“산 안의 수컷들에겐 전부 꼬리를 치고 다닌다면서요?”
“어우, 더러워라. 그래봤자 <달>의 창기인 주제에.”

농처럼 주고받으며 늑대들은 낄낄 웃었다. 붉은 늑대는 더 이상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수컷들은 붉은 늑대의 성소 근처를 서성거리며 노골적으로 농을 던졌다. 성소 앞에 놓여있던 제물들은 어느 날인가부터 천천히 사라지더니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 시종은 은찬에게 전에 없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항상 먼저 다가와 꼬리를 흔들던 녀석은 은찬이 저만치에 보이기라도 하면 슥 눈을 돌리고는 다른 곳으로 피하기 바빴다. 소문 때문이라는 사실을 은찬은 진작 알고 있었다. 모두가 은찬을 피했다. 은찬은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달못에 묻어두었던 작은 송곳니 조각을 꽉 움켜쥔 채로 은찬은 벽에 걸린 경전의 구절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달>의 말이었다.

너는 홀로 외로워라.


새가 사라진 이후 <달>은 침묵했다. <달>이 입을 닫으면서 은찬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식사조차 거의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백건이 찾아와 성소를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 사이 죽음의 그림자는 천천히 산을 에워싸고 있었다. 먼저는 우물에 떠올랐던 젊은 수컷이었다. 다음 날, 구경꾼 중 가장 어렸던 새끼 늑대가 밤새 열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은찬을 두고 창기 운운하며 낄낄거렸던 늑대가 자기 잠자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늑대들은 조금씩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달>의 저주였다. 붉은 늑대가 <달>을 배신한 탓이었다.

은찬에게 뒤를 대달라며 농을 던지던 수컷들도 성소에 발길을 딱 끊었다. 아무도 성소 근처에 오르지 않았다. 소문이 불어나면서 산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가득 찼다. 성질이 예민한 녀석들은 밤마다 하늘의 <달>을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누군가는 벌써 산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냥터에서도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몇 번 불이 났고, 초목이 사라지면서 사냥감들은 사냥터를 떠났다. 전에 없이 사냥감이 보이지 않아 허탕을 치는 일이 잦아졌다. 백건을 선두로 한 젊은 수컷들은 보다 더 먼 곳으로 사냥을 나섰다. 오전 중에 그쳤던 사냥은 하루, 그리고 이틀과 사흘씩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사냥감은 줄어들고, 이유 없는 죽음이 일족을 떠돌면서 랑족은 불안에 떨었다. 장로들은 매일 같이 마을 공동 장막에 모여 이 사태에 대해 의논을 했다.
그 무렵, 누군가 장로들이 논쟁 중인 장막으로 찾아왔다. 달못의 일을 돌보는 늙은 시종이었다.

“새가 떠났습니다.”

늙은 시종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장로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장로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새가 떠났다는 것이 무슨 듯이냐고 물었다. 개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장로가 신음처럼 대답했다. <달>의 가호가 떠났다는 의미라고 했다. <달>이 이 산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했다.
늙은 장로가 부들부들 떨었다. 장로가 병사들을 불러 모으며 소리쳤다.

“당장 주술사를… 붉은 늑대를 잡아와라!”

성소에 들이닥친 병사들이 은찬을 끌어냈다. 은찬은 아무 말 없이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한동안 빛을 보지 않고 갇혀 지낸 탓에 은찬은 일족의 기억보다 훨씬 더 파리하게 말라 있었다. 저러다 놔두면 굶어죽는 것 아냐?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뒤편에 서 있던 누군가 말을 받았다.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들은 소리를 낮추며 낄낄 거리거나 혹은 차가운 눈길로 감옥에 들어서는 은찬을 쏘아보았다. 은찬은 곧바로 지하 감옥에 갇혔다. 새 족장이 사냥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나던 때였다. 사냥 행렬은 모두 열흘이나 지난 후에야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자네 말대로 했네.”

늙은 장로가 말했다. 늙은 시종이 머리를 조아렸다. 밤 깊은 장막에서 등빛이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자네 말대로 젊은 수컷들의 시체를 우물 속에 넣었다. 새끼들에게 독을 먹였지. 걸어가는 녀석의 등을 떠밀고, 잠들어 있던 놈의 목을 졸랐어. 사냥터에 불을 질렀으니 사슴들도 한동안 사냥터로 돌아오진 않을 걸세.”

족장이 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장로가 연거푸 걱정을 했다. 늙은 시종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가치 있는 희생도 필요한 법입니다.”

붉은 늑대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 다시 태어나는 존재다. 이번 생의 붉은 늑대는 글러 먹었다. 정결해야할 그 피는 사내를 알고, 사내의 품에 안기며 더러워졌다. 감히 <달>을 배신하다니. 술잔을 쥔 시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달>의 것이 감히 <달> 외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다니.
족장은 달이 바뀔 무렵에야 돌아올 것이다. 사냥감들은 먹어야할 초목이 다 사라져버린 사냥터로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괜찮다. 늙은 시종은 생각했다. 일족은 그 모두가 다 <달>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생명은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불안에 떨고, 불안해지면 언제나 생각은 좀 더 불길한 쪽을 향해 기울기 마련이다. 올해로 꼭 300살을 넘어가는 늙은 시종은 이와 같은 일을 지금껏 서너 번쯤은 보아왔다. 지난 대의 붉은 늑대도, 그보다 더 앞선 때에 태어난 붉은 늑대도 모두 그랬다.

괜찮다. 늙은 시종은 거듭 생각했다. 더러워지면 죽이면 된다.

죽여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면 된다. 처음부터 다시 정결하게 가르치면 그만이다. 녀석은 어차피 홀로 목을 매 죽어버리거나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지난 생의 붉은 늑대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아 애를 먹었었다. 보름이 지나도 죽지를 않아 시종은 스스로 그 목을 조르고 밤중에 붉은 늑대의 사체를 우물 속에 던져 넣었었다. 그래도 아무도 모른다. 일족은 모두 붉은 늑대가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했다. <달>을 배신했기 때문에 죽었다. 주제에 감히 <달>을 저버리니 죽는 것이다.
죽어 마땅하다. 이 죽음은 타당하며 <달>을 지키기 위한 고결한 희생이다. 생각을 삼키며 늙은 시종이 술잔을 기울였다. 주름이 자글자글 앉은 눈매가 장로를 향해 고요히 웃었다.

“어차피 계속 그래 왔으니까요.”

이 일은 신앙이다. 랑족을 위한 고귀한 순교다. 산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것뿐이다. 다음에는 아예 세상을 모르도록 해야겠다. 아예 처음부터 성소 안에 가두어 키우면 되겠노라고, 시종은 잠시 생각했다.
붉은 늑대가 감옥에 갇힌 후 더 이상 죽음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달>의 저주 때문이었노라고 일족들은 입을 모았다.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공터에 모여 있던 늑대 중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했다. 누구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또 열흘이 지났다. 사냥을 떠났던 수컷들이 돌아왔다. 꼭 보름만이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떠났던 수컷들은 모두 늑대의 모습이 되어 돌아왔다. 다른 때보다 길었던만큼 이번에는 제법 수확이 있었다. 랑족의 산에서 닷새를 꼬박 달려야 하는 곳에서 사슴무리들을 새로이 발견했다고 했다. 새 사냥터를 얻은 수컷들은 사냥감이 수북하게 쌓인 수레를 의기양양하게 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행렬의 맨 앞에는 하얀 늑대가 있었다.
장로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와 하얀 늑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백건은 장로들과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족장의 성채로 올랐다. 성채는 떠나기 전과 별 반 다름이 없었다. 별 일은. 하얀 늑대가, 백건이 물었다. 장로 중 가장 나이 지긋한 늙은 장로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별일 없었습니다. 주름이 앉은 눈길이 잘게 떨며 거듭 덧붙였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노란 눈이 말없이 장로를 돌아보았다. 장로가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뜨리며 시선을 피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백건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성채의 시종을 불러 수레에서 가장 크고 좋은 사슴을 골라내라고 분부했다. 고개를 조아리며 영문을 묻는 시종에게 백건은 말했다. 달못으로 보내라. 그리고 덧붙였다. 노란 눈이 고개를 조아린 장로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보름 후 달이 뜨면 새 사냥터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릴 것이다.”

고개를 조아린 장로들이 저마다 눈치를 보았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알겠노라며 인사를 올리고 장로들은 물러섰다. 장로들이 늙은 장로를 돌아보았다. 말을 여는 자는 없었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름이 오기 전에 끝을 내야한다. 때가 되었다.
밤부터 산에는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는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또 사흘이 저물고 나흘을 넘어 닷새가 흘러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마라고 했다. 공터는 텅 비었다. 늑대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굴에서 수컷들이 사냥해온 먹이들을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붉은 늑대는 어찌 되었을까? 간혹 몇몇이 궁금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지 않아 붉은 늑대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죽었겠지. 랑족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보름이 지나고 다시 달이 나타나면 새로운 붉은 늑대가 태어날 것이다. 발정의 밤 이후로 새로이 짝을 짓고 부부가 된 젊은 늑대들은 부디 붉은 늑대가 자신의 새끼로 태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비가 오고 있었다. 쉼 없는 장마였다.





*

열흘이 넘도록 이어지던 비는 보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멎었다. 말끔해진 밤하늘 틈으로 손톱 같은 달이 얼굴을 배꼼 디밀었다. 달빛을 받아 랑족은 늑대의 털가죽을 벗고 다시 사람이 되었다. 달빛은 산 곳곳을 틈틈이 훑으며 공평하게 쏟아졌다.

성채 지하의 손바닥만한 창에도 달빛이 걸렸다. 힘없이 떨구고 있던 붉은 앞발이 달빛을 따라 천천히 마른 손가락으로 변했다. 늑대의 시간이 저물고 사람의 시간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입고도 붉은 늑대는, 은찬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 했다. 텅 빈 허공을 향해 기력 없는 눈길이 스르륵 움직였다. 창살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찬이 꽉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펼쳤다. 손 안에서 작았던 새끼의 송곳니가 하얗게 반짝거렸다. 달처럼 찬란했다. 은찬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건아. 이름은 힘을 잃고 소리로 맺히지 못 했다. 그만한 힘도 남아있지 못한 탓이었다.

너는 돌아왔을까.

은찬은 생각했다. 사냥은 끝났을까. 내가 여기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에 올 땐 사람이었고, 늑대였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적어도 보름은 넘었을 것이다. 그동안 은찬은 백건을 전혀 보지 못 했다. 아마 너는 모르고 있는 거겠지. 은찬은 생각했다. 백건도, 다른 자들도 이곳에 내려오지 않았다. 들어온 이후부터 은찬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했다. 아니, 자신 외에 살아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 했다. 완벽히 단절됐다. 여기엔 오로지 은찬 뿐이었다.
왜 갇혔는지에 대해선 알고 있다.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부터 그랬다. 누가 답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짚이는 곳은 많았다. 늑대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사냥감이 줄었고 붉은 새가 달못을 떠났다. 그리고 은찬은 최근에 늑대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떠돌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겠지.

아마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삼키며 은찬이 철창살이 단단히 얽혀 있는 바위 감옥을 느린 눈길로 훑었다. 벽 곳곳에 발톱 자국이 가득했다. 바로 곁에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늑대의 뼈와 유골이 굴러 다녔다. 그래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생은 이처럼 질긴 것이다. 은찬이 느리게 프 웃었다. 그래도 머지않아 나는 죽겠지. 송곳니를 움켜쥔 주먹을 입가로 끌어당기며 은찬은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마른 어깨가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건아. 소리 없는 호흡이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더듬었다. 내 사랑아.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다음 생에서 우리는 또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을 삼키며 은찬이 눈을 들었다. 벽에 박혀 있던 오랜 발톱 자국들을 올려 보았다.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 누가 오래도록 이곳에 갇혀 있다 끝내 죽었는지 은찬은 몰랐다. 지난 생의 붉은 늑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랬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거두어 성소로 데리고 왔던 늙은 시종이 알려준 이야기가 은찬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사고였답니다. 늙은 시종은 그렇게 말했다. 사고로, 우연히,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모두 그가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번 생은 온화롭게 찬란하라며 은찬이라는 이름을 주었던 이도 역시 시종이었다. 아직 작은 핏덩이에 불과했던 은찬을 소중히 제단 위에 눕혀두며 늙은 시종은 주름이 앉은 눈으로 천천히 웃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죽고 또 다시 태어난답니다. 붉은 늑대란 것은 말이지요.

지난 생도, 그보다 더 앞선 생도 붉은 늑대는 죽었다. 그때는 은찬이라는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생을 살았을까. 은찬은 그조차도 몰랐다. 분명 앞선 그 생도 나의 것일 텐데,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 생은 나의 것이었을 텐데 기억 하나 나지 않았다. 어떤 책을 뒤져보아도 붉은 늑대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랑족의 역사는 붉은 늑대에 대해서는 탄생과 죽음 외엔 어떤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어떤 수컷이 어떤 경연을 거쳐 족장이 되었는지, 그 족장이 어떤 치세를 펼쳤는지, 족장이 이끄는 수컷의 무리가 어떤 것을 사냥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기록해도 붉은 늑대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선 제례의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존재였다. 죽어도 어차피 다시 태어나 다음 생을 살아갈 존재, 그리하여 영원히 <달>을 섬기고 <달>을 전할 유일무이한 존재.
그런 것은 모른다. 다시 태어나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에 대해서도 은찬은 알 수 없었다. 아는 것은 그저 단순했다. 이제 곧 죽음이 온다. 죽으면 모두 끝이 난다. 지난 생의 기억이 없는 은찬에게는 오로지 이 삶에서의 기억뿐이다. 그 중의 절반을 한 사람과 함께 만들었다. 내 생의 절반이 너였어.

내 사랑아. 은찬이 빈 호흡을 몰아쉬었다. 너를 잃은 다음 생의 나도 너는 사랑해줄까.

점차 숨결이 옅어졌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힘조차 잃어버리면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늑대의 모습으로 사그라진다. 그리고 저처럼 이름 없는 유골로 감옥 한 귀퉁이를 구르고 있을 거야. 랑족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 죽을 때면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랑족은, 늑대는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의 껍질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달>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다. <달>이 그리하여 본래 하나였던 둘을 다시 합쳤기 때문이다. 이 산의 모든 것은 <달>의 것이다.

그때 은찬은 불현듯 그 말에 대해 떠올렸다. 바위 제단에 오래도록 박혀 있던 말이었다.

나는 반드시 네게 돌아갈 것이다.

<달>님. 은찬이 몸을 웅크렸다. 은찬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온 마음으로 간절히 불렀다. 송곳니를 움켜쥔 주먹에 입을 맞추며 은찬은 소리 없이 거푸 입술을 달싹였다. <달>님. 살려주세요.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이 생을 접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가가 열처럼 따끔거렸다. 은찬이 눈을 짓누르며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달싹였다. <달>님. 온갖 말들이 혀끝을 떠돌았다. 괴로워요. 힘들어요.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잡지 못한 말이 바싹 마른 입술을 비집었다.
<달>님.

“보고 싶어요.”

백건이 보고 싶어요. 너를 만나고 싶어. 어차피 이 생이 여기에서 끝날 거라면 그 전에 너를 보고 싶어. 나는 아직 네게 말조차 하지 못 했는데, 너에게 가장 하고 싶던 한 마디도 하지 못 했는데.
내 사랑아. 오로지 홀로 걸어야하는 나는 너를 알고 외로움을 배웠다. 그래도 끝내 잡지 못한 마음의 불씨가 자꾸만 너를 불길처럼 내 안에서 꽃피운다. 영혼을 신의 예언에 얽매여서도 마음은 산 것의 운명으로 그만 사랑을 알았다. 그만 죄를 알았어. 그리하여 나는 끝내 짐승의 욕망과 인간의 욕심으로 너를 바란다. 내 사랑아.

은찬이 흐린 눈결로 프 웃었다. 다음 생에선 차라리 너의 새끼로 태어나고 싶어.

끔벅이던 눈앞이 천천히 흐려졌다. 이젠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서 은찬은 스르륵 눈을 닫았다. 잠처럼 꿈이 왔다. 꿈처럼 잠들었다. 그래도 마른 주먹은 여전히 작은 잇조각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비명을 질렀다.













캄캄한 밤하늘이 점차 붉어졌다. 온 산이 절규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늑대들은 당하면서도 알지 못 했다. 사방이 너무 어두웠다. 아이가 울었다. 어른이 오열했다. 늑대들은 어둠 속을 장님처럼 헤매며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우는 자, 비는 자, 이미 침묵한 자가 한데 엉켜 어둠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늙은 장로가 무릎을 꺾었다. 땅에 입술을 붙이며 그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눈과 코에서 줄줄 물을 쏟으며 그는 어둠을 향해 엎드려 빌었다.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엎드려 비는 장로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주름이 잘게 앉은 장로의 눈길이 어둠을 향했다. 하얀 발톱이 칼날처럼 번쩍이던 순간 장로의 목은 더 이상 그 몸에 붙어 있지 않았다.
하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하얗고 커다란 발이 성큼성큼 진땅을 밟으며 걸었다. 걸음을 따라 진땅에서 배어나온 것들이 하얀 발을 붉게 적셨다. 울던 아이가, 오열하던 어른들이 숨을 멈추고 울음을 멈췄다.
오래지 않아 산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달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


추워. 은찬이 잠결 중에 어깨를 움츠렸다. 추위는 자꾸만 삶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비척거리면서 은찬은 어렴풋이 감은 눈을 열었다. 잠들었나. 그래도 잠깐 눈을 붙인 덕인지 눈을 감기 전보다는 머리가 제법 맑았다. 은찬이 멍한 눈길을 두어 번 끔벅거렸다. 온 사방이 부옇게 흐렸다. 어디부터가 꿈인지,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질 않았다. 꿈일까? 누운 채로 스르륵 손 쪽을 쳐다보면서 은찬은 생각했다. 펼쳐진 손바닥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가 없어. 은찬이 눈을 끔벅거렸다. 나는… 죽은 걸까? 죽었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짙붉은 눈이 무심코 창을 올려봤다. 동시에 은찬이 눈을 크게 열었다.

밤하늘이 붉었다. 아니, 그보다는 달이 없었다.

은찬이 습관적으로 제 팔과 다리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사람의 형상이었다. 달이 없는데도 늑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은찬이 흐 웃었다. 모두 다 꿈같았다. 바깥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허공중에 피비린내가 떠돌았다. 그 냄새조차 은찬에겐 모두 멀었다. 은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끼익 열렸다. 기척을 따라 침묵이 밀려났다.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은찬이 소리를 향해 눈을 들었다. 비스듬히 떨어지던 어둠 안쪽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본 순간 은찬이 오똑 굳었다. 노란 눈이 달처럼 빛났다. 백건이었다.

아니. 은찬은 생각했다. 그보다 알아차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냐. 너는, 당신은…

백건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색 밝은 머리칼도, 하얀 털옷도 붉게 젖었다. 백건이다. 동시에 백건이 아니다. 막연히 은찬은 그렇게 느꼈다. 짙붉은 눈이 크게 열렸다. 은찬이 웃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따라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정말로… 오셨구나.”

백건이, 아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말했다.

내 소년아.

닫혀 있던 철창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백건이 열린 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허리를 굽히며 백건은 은찬의 손을 들고 가만히 입을 맞췄다. 뺨을 부비며 백건은 은찬을 불렀다.
내 소년아. 은찬이 잠잠히 웃었다. 예, 나의 신이시여.

“…나는 당신을 지난 18년동안 백건이라고 불렀었어요.”
“나는 너를 지난 18년간 주은찬이라고 불렀었지.”
“그 백건을 나는 사랑했어요. 이 가슴이 다 찢기도록 사랑했어. 신에게 죄를 지어도 좋을만큼 사랑했어요.”
“우린 이번에도 또 같은 사랑을 했구나.”
“저는 죄를 지었나요?”
“아니. 너는 아무 것도 죄짓지 않았어.”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백건이, <달>이 천천히 웃었다. 손바닥에 떨어졌던 입술이 은찬의 마른 팔목을 타고 올랐다. 백건이 팔꿈치 안쪽에, 어깨에, 목에 연거푸 천천히 입술을 찍었다. 은찬이 백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척을 따라 은찬은 잘게 떨었다. 그 몸짓마저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백건은 은찬의 턱에 얕게 이를 세웠다. 은찬이 흡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너는 내 것이다. 백건이, <달>이 말했다. 얇은 피부를 매만지면서 <달>은 거듭 낮게 속삭였다. 소년아, 너는 영원토록 내 것이었다.

“너를 위해 생의 껍질을 입었다. 너를 위해 태어나고 죽으면서 나는 지난 천년간 너의 곁을 맴돌았지. 그리고 전부 보았다. 네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네가 어떻게 삶을 걸어가는지, 네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 어떤 자가 감히 네게 손을 대는지, 어떤 자가 감히 너의 생에 간섭하는지. 어떤 자가 감히, <달>의 것을 함부로 하는지.”
“좋아요. 더… 아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턱을 젖히며 은찬이 애원처럼 속삭였다. 백건이 힘껏 은찬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은찬을 안은 채로 천천히 일어났다. 꼬박 보름을 굶주린 몸은 백건의 기억보다도 너무 가벼웠다. 백건은, <달>은 그 사실에 무엇보다 맹렬한 분노를 느꼈다. 땅을 살아가는 존재들처럼 사사로운 분노가 백건을, <달>을 발끝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 격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달>은 소년에게 입을 맞췄다. 소년이, 은찬이 품에 안긴 채로 크게 떨었다. 그 채로 몇 번이고 입술이 겹쳤다. 호흡의 한 조각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긴밀하고 맹렬한 입맞춤이었다. 한참 후에야 은처럼 가느다란 실을 남기며 두 입술이 떨어졌다. 발갛게 부은 입술로 은찬이 말갛게 헐떡였다.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백건은 은찬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은찬이 백건의 목을 안은 팔에 꽉 힘을 주었다.

이제는 영영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감옥의 문을 넘어 백건은 빈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붉게 젖었다. 갈갈이 찢긴 늑대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있는 틈을 타고 붉은 피가 도랑처럼 잘게 흘렀다. 투구를 쓴 갈색 늑대의 목이 백건의 발끝에 툭 부딪쳐 저만치로 굴러갔다. 산 자는 아무도 없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제멋대로 떨어진 시체들은 찢긴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거대한 발톱에 찢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은찬이 잠깐 백건을 올려보았다. 하얀 뺨까지 튄 붉은 핏줄기가 유난히 은찬의 눈을 찔렀다. 은찬이 손을 뻗어 백건의 뺨을 더듬었다. 슬프게도.

당신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더러워졌네요.”

백건이, <달>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은찬이 잠깐 대답을 망설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백건이 은찬을 힘껏 안았다. 하얀 발이 사체들을 넘어 감옥의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곧바로 성채 앞 공터였다. 붉은 밤하늘이 선연해서 은찬은 잠깐 눈살을 구기다, 이내 천천히 눈을 열었다.
공터에는 산 자가 없었다. 아니, 산 전체에 숨을 쉬는 존재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피에 젖어 진탕이 된 공터의 한중간에 두 늑대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늙은 시종과 장로의 얼굴임을 은찬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백건이, <달>이 말했다.
널 위한 것이다. <달>이 거듭 속삭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너의 것이었다, 나의 소년아.

“이제는 어떤 것도 너를 괴롭게 하지 않겠지.”

내가 두려우냐. 백건이, <달>이 물었다. 은찬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달>이, 백건이 웃었다. 그 웃음조차 근사해서 자꾸만 은찬은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은찬이 백건의 목에 제 머리를 기댔다. 흔들리며 말했다. 나의 신이시여. 나의 <달>님.
건아. 백건이 대답했다. 어.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나는, 하하… 어쩌지.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은찬이 프 웃었다. 정말로,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 산 자가 아무도 없는 성을 먼 눈길로 바라보며 은찬은 말했다. 백건이 은찬에게 가만히 제 코를 문질렀다. 눈길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랬어.

“천 년 전부터.”

너를 만나 처음으로 하늘을 배신하고 ‘죄’를 지었던, 그때부터.











*

아침이 밝았다. 해는 비어버린 성을 따라 서편으로 기울다 어제처럼 저물었다. 진땅은 말랐고, 사라졌던 달이 다시 하늘에 나타났다. 달이 기울고 해가 뜨며 시간은 강처럼 흘러갔다. 시체는 고요히 썩었다. 성소의 주변과 성채에는 긴 덩굴이 자라기 시작했다. 덩굴은 오래지 않아 성의 벽돌 틈을 헤집으며 문명을 뒤덮었다. 연중 가장 해가 짧아지는 밤이 왔다. 두 번째 광기의 밤이었다. 하지만 산 어디에서도 늑대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절이 수십 번씩 피었다 저물었다.

달의 주기가 바뀌었다. 달은 제 몸을 점차 우그러뜨리다 그믐 하루에만 잠시 하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성채가 있었던 자리는 숲이 되었다. 산 아래의 인간들은 점점 불어났다. 사냥감들이 떠난 사냥터에 인간들은 학교를 세웠다. 인간들은 저희끼리 반목하며 싸우다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국가를 세우고 전쟁을 일으키며 왕을 살해하거나 투표를 했다. 땅에는 흙이 사라졌다. 쇠붙이들은 흙이 사라진 아스팔트 위를 달리거나 혹은 하늘을 날았다. 인간들은 신 대신 다른 것들을 믿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신을 믿는 자들은 종종 산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제 늑대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됐다. 그래도 달이 사라진 날에 산에 오르면 어디에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누군가 우짖는 소리를 좇아갔다 산기슭에 마주 웅크리고 있던 늑대 두 마리를 보았다고 했다. 털이 붉은 늑대를 보았노라고, 그를 지키듯이 감싸 안던 하얀 늑대를 보았노라고 했다. 그리고 두 마리는 달이 없는 어둔 하늘 아래에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노라고, 오래도록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노라고. 그러다 아침이 밝으면 마법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사람들은 그 늑대를 <달>이라고 불렀다.

먼 옛날, 산에는 늑대들이 살았었다. <달>이 있었다. 그리고 <달>이 사랑했던
소년이 있었다.



~ 큰 이리 <달> 끝









+ <닫는 글>은 책을 구매해주신 분들을 위해 웹에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



건찬으로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행사에서 냈던 책이라 의미가 깊은 글인데 은찬이 생일을 핑계 삼아 슬며시 공개해봅니다... 재판 요청을 더러 받기도 했었던 글이기도 해서 u////u 의미가 크기도 하고, 꼭 써보고 싶었던 글이라 매우 아끼는 것.... 그리고 협력해주신 연두님의 은혜로 저는 줄줄 울면서 건찬의 8번째 책을 마무리 했던 것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흑흑 연두님... 저의 빛... 저의 은혜..... 웹에 올려도 괜찮겠느냐는 문의에도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ㅠ0ㅠ////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사랑고백을 하는 저였고..

무튼, 맘 같아선 한글날이니 새 글을 써주고 싶은데 휴재 중이라 달릴 에너지가 없음이 넘나 슬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사랑해 은찬아...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내 인생의 최애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라고 저는 오늘도 굳게 믿는 것입니다ㅠ.ㅠ.ㅠ.ㅠ.ㅠ.ㅠ 어쨌건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ㅜ////ㅜ 그리고 은찬아 생일 축하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한다 내새끼 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

?
  • ㅇㅇ 2017.10.09 07:48
    루카님 사랑해요
  • 사랑합니다 2017.10.09 19:53 SECRET

    "비밀글입니다."

  • 보살 2018.11.02 14:48
    너무 사랑합니다 선생님 첨엔 흠...하면서 보앗던 제가 어느새 끝날땐 얼굴에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보고잇엇습니다 어떻게 이런생각을하실수있으신가요 왠지 첨부터 건이가 달일것같은 느낌이 물씬났지만 그건 저희만의 시크릿이엇죠..,,후반부로 가면서 은찬이도 건이가 달이라는 걸 알았을 때..,,건이가 은찬이 델꼬나올때.....그것은 저희만으 비밀이 아니게되엇고 그런 건찬을 보는 저는 어느새 입을 틀막고잇엇읍니다 문단 하나하나마다 눈앞에 절벽위의 달이 환하고 별이 쫑쫑박혀잇는 평지와 산이 펼쳐져잇는것같앗읍니다 선생님 글을 몇 가지 읽어보앗지만 이 글만큼 제 심금을 울리는 글은 없엇습니다.,...선생님은 툭툭 내뱉듯이 쓰는 듯 하지만 사람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끌어당기는 그런 문체가 너무 좋습니다 특히 건찬이들의 행동에서 배어나오는 감정들,,,,굳이 따로 감정지문을 쓰지 않아도 행동에서 보여지는 그 느낌들이 저를미치게합니다 선생님문체는 먼가...건이보단 은찬이에게 이입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애절하고 더 재미잇고 건이에 대한 은찬이의 마음까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정말.......정말ㅈ사랑합니다 선생님 ㅠㅠㅠㅠㅜㅠㅜ,ㅠ,ㅠㅠㅠ,ㅠㅠ,ㅠ부디 만수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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