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작년 5월, 책으로 냈었던 고전썰 외전을 이제 슬며시 공개해봅니다:)
* 백건과 주은찬이 아직 황태자와 무동이었던 꼬꼬마 시절의 이야기
* BGM은 다 살린 김에 역시 이 곡으로
BGM / 꽃별 <Dancing In Blossoms>


http://youtu.be/muS-E-5wXZM










고전으로 백건은찬 # 외전

w.Ruka
for.白朱





호의 검은 강직하며 곧다. 그러나 백호의 검은 잔악하며 무도하다. 오래도록 호족들은 백호의 검을 경외하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나라가 열린 뒤 천년 동안 호족들과 황족간의 알력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고, 학자들은 이를 초대 황제인 백무장이 강압적으로 호족을 제압한 데에서 그 근원을 찾고 있다. 전해지는 역사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다. 백무장은 현무의 간계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언덕에서의 전투에서 주작의 가호를 받아 대승을 거둔 이후, 당시 소국이었던 호족의 나라들을 자비 없이 징벌했다. 들판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호족들이 흘린 피가 온 나라에 강처럼 흘렀다. 

그로부터 흘러온 천 년은 호족들과 백호 황가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라 하여도 조금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호족은 겉으로는 백호 황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한편, 끝없이 암살자를 보내 그 대를 끊고자 했다. 7대의 황태자가 청룡 일족이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백호의 황가와 청룡의 호족은 오래도록 반목을 일삼았다. 과정 중에 수십 명의 호족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오랜 반목은 몇백년이 지나 현재, 백호의 백은 공주가 청룡의 후계와 혼례를 올려 사돈지간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백호는 후계의 씨가 귀하다. 또한 백호의 아들들은 명운조차 불행했다. 암살이 아니어도 일찍이 숨을 거두는 이가 많았고, 장성하여 성인이 되어도 병으로 일찍 눈을 감는 이가 허다했다. 이를 두고 천년 전, 개국 당시에 ‘저주’가 붙어 그런 것이라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황가와 대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사가에서 떠도는 야사라 일축했다. 본래 다른 신수와 달리 포유류이며 새끼 복이 적은 백호를 신수 삼은 핏줄의 탓이라 학자들은 말한다. 허나 아직도 어느 연유에서 백호의 아들들이 일찍 숨을 거두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유야 무엇이건 이는 호족들에겐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었다. 호족들은 지난 천년간 줄곧 백호 황가의 멸족을 간절히 바라왔었다. 특히나 이번 대의 저주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은 태자가 나던 순간부터 호족들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금번 태자는 열 살을 넘기기도 힘이 들 것이라 했다. 주작 신당의 가호가 탄탄하고, 암만 그 기도가 영험해봤자 사람의 명운까지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호족들은 서넛만 모이면 수군거리며 황실을 조롱했다. 호족들은 진심으로 황실의 핏줄이 끊어지기를 바랐다. 백호 황실의 적법한 핏줄이 끊어지면 다음 황권은 백씨 가문과 사돈을 맺고 있는 청룡 일족에게 넘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이 있겠느냐면서도 청룡의 선대 가주는 이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아우의 핏줄에서 난 청룡의 후계를 제 아들로 삼고, 가주인 자신의 친아들을 백호의 공주와 혼례 시킨 것도 모두 이를 대비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사람들은 짐작했다. 백호의 아들, 이 대국의 황태자는 차피 열 살이 되면 신탁대로 죽을 것이라 했다. 청룡이 백호의 관을 물려받게 될 그날을 호족들은 모두가 손을 모아 기다렸다.

허나 태자가 열 살이 되었다고 전해지던 그 즈음, 새로운 소문이 호족들 사이에 떠돌기 시작했다. 신탁에서 태어나 열 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던 태자는 죽지 않았다. 이를 두고 호족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태자의 곁에 주작신당의 어린 무동이 하나 붙었다고 했다.






* * *

낯선 이방인처럼 불쑥 찾아왔던 봄은 잡을 틈도 없이 훌쩍 멀어졌다. 아침저녁으로 해가 조금씩 높아졌다. 유년처럼 향긋했던 바람에는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는 청춘의 녹음이 은은하게 배어났다. 황궁의 하얀 매화는 앞을 다투어 꽃을 피웠던 것처럼 빠르게 저물었다. 싱그럽게 돋아난 어린 잎새 틈으로 하얀 꽃잎이 비처럼 흩날렸다. 동궁의 궁녀들은 비를 들고 하이얀 꽃잎을 쓸어냈다. 궁녀들의 치마폭처럼 세상의 색은 조금씩 다채로워졌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하여, 정인이라는 말은 평생을 함께 할 반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둥그렇게 열어둔 동궁의 창 위로도 꽃바람이 불었다. 서책을 읊고 있는 학사의 진지한 얼굴과 달리 마주 앉은 어린 소년은 영 공부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창 쪽으로 반쯤 돌아앉은 노란 눈이 노골적으로 하품을 삼켰다.

“정인은 주작의 깃털을 취한 상대를 일컫는 것입니다. 옛 성현의 말씀을 따르자면, 정인을 대하는 일에도 법도가 있으니 마음을 주었다는 의미로 이름의 뒷 글자를 칭해 부르고, 예우를 갖춰 대하며… 마마.”
“…”
“태자마마.”

열린 창 쪽을 바라보고 있던 노란 눈이 옅게 움찔했다. 눈만큼이나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툭 대답을 던졌다.

“어.”
“아직도 소인에게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어.”
“언짢음도 가시지 아니하셨구요.”
“어.”

하이얀 뺨이 어린 복어처럼 부풀었다. 심통이 단단히 났다. 뿔이 돋은 제자의 목소리에 학사가 눈 끝을 접으며 난감한 듯 웃었다.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주름결을 따라 부드럽게 웃음이 걸렸다. 훤히 열린 둥그런 창 너머에선 이제 꽃잎을 거의 떨군 매화의 푸른 잎이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꽃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제 신당에 큰 기도가 있어 무동께서 오질 못하셨다구요. 하여 동무의 얼굴을 보지 못해 서운한 마음은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만, 마마. 공부를 할 적엔 공부에 집중을 하셔야지요.”
“…서운해한 적 없어.”
“예, 마마. 심통이 나신 것뿐이겠지요.”

빚은 듯 놓여있던 작은 입술이 씨근대다, 이내 말았다. 또 팩 고개가 돌았다. 학사는 웃음을 참느라 볼 안쪽이 아플 지경이었다. 또래보다 의젓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나라의 아들도 제 동무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 살 아이가 되는 모양이었다.

“마마께 소중한 벗이 생긴 것은 소인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장차 관을 물려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까. 배움 또한 성군의 의무이며 중한 일입니다.”
“나는 분명 오늘 수업을 미뤄달라 했어.”
“소인은 그리는 아니된다 고해 올렸구요.”
“어제 했으면 되었잖아.”
“오늘의 배움은 또 오늘의 것이지요. 마마의 동무 되는 무동은 공부도 그리 열심히 한다면서요? 헌데 벗 되는 마마께서 이리 소홀히 하시니, 제가 무동 볼 낯이 없습니다.”
“……”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고 견디십시오, 태자마마. 다시 서책을 펼치시지요.”

보고 싶기는 누가. 씨근대며 탁 뱉어놓는 하얀 귀가 울긋불긋 했다. 그래도 충고가 약이 되긴 한 모양인지 백건은 다시 주춤주춤 몸을 돌려 앉았다. 허나 책을 채 펼치기도 전에 잠잠하던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유모였다.

“마마! 태자마마! 무동이 마마님을 뵙겠다고 찾아와서 곁방에서 기다리고 있…. 어머나. 학사님이 와 계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호호.”

유모가 입을 가리며 넉살 좋게 웃었다. 백건이 눈을 둥그렇게 열었다. 학사의 주름 잡힌 눈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암만 보아도 일부러 들어온 게 빤한 듯한 눈치였다.

“제가 나이를 먹더니 눈치가 이렇게 없네요. 수업 중에 훼방을 드린 거라면 어쩌죠?”
“……”
“근데 날이 이리 좋은데 계속 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오늘은 공부를 더 이어갈 날이 아닌가 봅니다.”

이만 가보십시오, 태자마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건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잡을 새도 없었다. 제 스승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는 잽싸게 복도로 튀어 나갔다. 그래도 법도를 배웠다고 어떻게든 달리지는 않았으나 잰걸음은 영 조급했다. 조바심이 묻어나는 잰걸음이 잽싸게 멀어지고 난 후에야 유모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학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기척은 이제 멀어져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둥그런 창 너머로 바람결만 살랑거렸다. 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벌컥 열어젖힌 문이 오똑 멈췄다. 들뜬 듯 호선을 그리던 노란 눈의 시선을 잡아챈 건 방안의 풍경이었다. 와르르 웃음을 쏟아내던 궁녀들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선 합 입을 다물었다. 허나 백건의 시선은 처음 문을 열어젖힌 순간부터 한 곳에 멈춰 있었다. 궁녀들에게 에워싸여 하하호호 웃고 있던 붉은 머리를 보자 백건은 저도 모르게 우뚝 굳었다. 뺨이 당겼다. 뒤늦게 눈치를 챈 은찬이 백건을 돌아보며 아는 체를 했다.

“앗, 태자마마! 벌써 오셨습니까?”
“…뭘 하고 있는 거야.”
“아, 마마의 공부가 늦어질 참이라 해서 누님들께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있었습니다.”

노란 눈이 언짢은 듯 일그러졌다. 말마따나 은찬의 작은 손 안에 찻잔이 살포시 쥐어져 있었다. 동궁에는 손님이 드물다. 때문인지 봄부터 은찬을 들락거린 이후부터 궁녀들은 걸핏하면 은찬에게 다과라도 내어 주고 싶어 안달을 냈었다. 준수한 콧날이 울컥 구겨졌다. 들떴던 기분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언제 봤다고 누님이야. 제법 젊은 축에 드는 궁녀들 서넛이 호호 입을 가리며 얌전히 웃었다. 개중 한 궁녀가 나서며 넌지시 고해 올렸다. 열 살 어린 속이 서툴게 꼬이기 시작했다.

“마마의 벗이 너무나 귀여워 저희가 잠시 어울려 놀아주고 있었습니다.”
“저야말로 누님들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런 귀한 다과는 신당의 제례 때에도 먹어본 일이 없어요.”
“많이 들어요. 무동을 위한 간식이라면 주방에 산처럼 쌓여 있답니다.”

노란 눈이 다시 한 번 울컥 구겨졌다. 입술을 질끈 물고 백건은 말없이 곁방을 뚜벅뚜벅 걸었다. 자리 곁에 다가 섰을 때 고맙다며 연방 웃고 있던 붉은 머리가 두 눈을 뎅그랗게 열었다. 태자마마? 되묻는 말에 백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찻잔을 쥐고 있던 손을 잡아채며 백건은 잠자코 일렀다. 나와.

“예? 하지만 마마, 아직 다과가 남았…”
“다과는 또 배불리 먹여 줄 터이니 됐어. 오늘은 정원에 가자. 데리고 가줄게.”
“정원이라뇨. 분명 오늘은 그제 들어온 귀한 서책을 제게 보여주신다고…”
“맘이 바뀌었어.”

따라와. 백건이 은찬의 손을 잡아끌며 잠자코 재촉했다. 자리가 자리이니 은찬은 별 수 없이 손길을 따라 끌려갔다. 막 곁방으로 들어서던 유모가 두 소년을 재미있다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백건이 제 곁을 지날 때에 유모는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어릴 적부터 제 젖을 먹여 키운, 때문에 마냥 아들 같은 나라의 태자가 유모를 홱 쳐다보았다. 유모가 먼저 손사레를 쳤다. 아뇨, 아닙니다, 태자마마. 그리고는 넌지시 말을 돌렸다. 백건이 아닌 은찬을 향한 말이었다.

“우리 마마님께서 무동이 다른 분과 어울린다고 샘을 내시는 모양이어요.”
“샘이라니, 예?”

노란 눈이 일순 유모를 쳐다보았다. 유모가 체격만큼 포근히 웃으며 운을 뗐다. 암만 들어도 반절은 농이었다.

“그리 노려보셔도 소용없어요, 태자마마. 얼굴이 사과만치 발갛게 익으셨는걸?”
“누가!… 됐어. 정원에 갈 거야.”
“너무 늦게까지 어울리면 아니 되십니다, 마마님?”

백건은 대꾸 없이 성큼성큼 문턱을 넘었다. 백건 대신 은찬이 반절은 끌려가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동무의 손을 꽉 움켜 쥐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모양새를 유모가, 또 궁녀들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리 귀여우실꼬. 유모의 말에 궁녀들이 짠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리 좋으실까요?”
“생에 처음 생긴 친구인데 오죽하겠누. 진작 동무를 붙여줄 것을 그랬어. 좋은 티를 저리 내시는데.”
“누가 보면 색시를 데리고 다니는가 하겠어요.”
“자네, 마마님 앞에선 그리 말하지 말게. 경을 칠지 몰라.”
“어머, 제가 실례를. 예, 어르신.”

가볍게 입을 놀렸던 궁녀가 서둘러 무례를 사과했다. 그래도 모두 웃음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높았다. 오늘은 날도 참 좋을 모양이었다.





* * *

열쇠를 가져온 건 백건이었다. 열쇠를 찔러 넣고 단단히 잠겨 있던 문을 열어젖힐 때부터 은찬은 담벼락 너머를 기웃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당연한 듯 탄성이 터졌다. 진붉은 눈이 그보다 더 커질 수는 없을 정도로 훌쩍 열렸다. 

“우와.”

은찬은 좀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끝이 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정원은 열 살 소년에겐 너무 컸고, 또 곳곳이 태어나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했다. 가지런히 돌을 깔아놓은 연못 위로는 듬성듬성 떠오른 색색의 연들이 커다란 봉오리를 머금었고, 말간 물결 위로 낯선 물새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유유히 헤엄을 쳤다. 이름 모를 하얀 새가 커다란 꼬릿깃을 펼치고 푸드득 홰를 치는 광경에 은찬은 아예 넋을 놓았다. 시선이 붙들린 것만 같다. 저게 뭐야? 눈도 돌리지 않고 묻는 은찬을 보며 백건은 담담히 대답했다. 공작. 더불어 픽 웃었다. 은찬의 반응이 퍽 재미있던 덕이었다.

“그리 좋냐.”
“응! 완전! 엄청! 가까이에서 봐도 돼?”
“맘껏 봐라. 차피 여기 너랑 나, 둘뿐이다.”

말대로 너른 정원엔 궁 곳곳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병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듯 주변을 둘러보던 은찬이 정원 안쪽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여인의 치마 같은 무동의 장포 자락을 양손을 거머쥐고 은찬은 수국이 가득 피어있는 연못가를 빙 둘러 보았다. 잰걸음은 오래지 않아 달음박질이 되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며 백건은 또 한 번 옅게 웃었다. 좀 전까지 상해 있던 기분은 온데 간데 없었다.

“이 정원은 누가 가꾸는 거야?”

백건을 돌아보며 은찬이 물었다. 서너 걸음 바깥에서 찬찬히 따라 걸으며 백건이 가볍게 대꾸했다. 어마마마.

“그럼 황후마마의 정원이야?”
“어, 어마마마께서 혼례 드실 때 아바마마가 선물로 열쇠를 주셨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와도 돼?”
“상관없다. 허락은 미리 구했어. 어마마마가 너와 노는 거라면 언제든 보라 하더라.”

슬쩍 굳었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진짜? 되물어 온 말에 백건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마음을 놓았는지 은찬의 걸음이 조금씩 더뎌졌다. 맘껏 놀아도 된다는 약조를 받았으니 천천히 둘러볼 셈인 모양이었다.
은찬은 공작을 좇아 한참이나 연못가를 달렸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백건이 넘어진다고 조심조심 다니라고 해도 좀처럼 듣지를 않았다. 뛰다, 은찬은 연못가에 찰팍 엉덩이를 묻고 앉았다. 익숙하게 말아 쥔 장포자락 아래로 마른 다리가 꽃처럼 흔들거렸다.

"대대로 백씨의 황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정원이야.”
“언제부터? 천 년 전?”
“아마. 옛날 옛적에 백무장이 사랑하던 여인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던데.”

백무장? 말을 받으며 은찬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발은 여전히 연못의 수면을 튕기며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백무장에게는 정식 황후가 없었다며. 나는 그리 들었는데.”
“나라를 세우기 전에 사랑했던 여인이라나, 뭐라나.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왜?”
“몰라. 어른들이 그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전해지는 것도 없다고 하고.”

천 년은 너무 긴 세월이니까. 백건의 말에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 년도 까마득한데 천 년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천일도 내게는 긴데 천 년의 세월은 얼마나 까마득히 먼 걸까. 하얗게 드러난 발끝으로 물결을 튕기며 은찬은 생각했다. 백건이 잠시 흘깃 거리다 이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원은 기척 없이 고요했다. 이곳에서의 시간만 멈춘 것 같았다.

“여기는 황후들만 드나드는 정원이다. 백무장이 그리 만들었어. 황제가 평생을 사랑할 여인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낯선 데로 시집온 여인이 맘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던데.”
“시집?”
“응, 황궁으로 혼례 든 여인들. 황제의 여인.”

어른들 얘기는 잘 모르겠지만. 말을 삼키며 백건이 은찬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은찬은 말이 없었다. 말없이 하늘을 올려보다 프 웃었다. 백건이 의아한 듯 은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은찬이 대답했다. 그냥.

“너도 언젠가 혼례 들까 싶어서.”

하얗게 드러난 맨발이 천천히 물 위를 덧그리듯 흔들거렸다. 진붉은 눈이 담담히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왠지 물그림자 같다고 백건은 생각했다. 곁에 있어도 너무 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물그림자.

“그럼 언젠가는 너도 이 정원의 열쇠를 네 황후에게 주게 되는 걸까? 그 마마님은 세상에서 가장 고우실 거야.”
“……”
“좋겠다.”
“뭐가.”
“그냥. 너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는 거…”

마른 발 밑으로 찰팍 물이 튀었다. 하얗고 붉은 무늬를 가진 커다란 잉어가 잠시 수면 아래 어렸다 쏜살 같이 사라졌다. 멀거니 멀어지는 잉어를 은찬은 말없이 내려보았던가. 그러다 불현 듯 뒤통수가 번쩍 했다. 백건이었다. 가볍게 알밤을 쥐어 박으며 백건이 불퉁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냐. 내 평생은 네가 함께 해야지.”
“어?”
“어, 가 아니거든. 이 못난 참새야. 백호의 사내는 검을 푼 상대와 일평생을 함께 하는 거랬다.”

진붉은 눈이 끔벅끔벅 했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달전쯤, 백건을 공식적으로 처음 소개 받던 처소에서 그런 묘한 의례를 하기는 했었다. 은찬은 궁녀들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가슴팍에 붉은 깃털을 달고 처소에 올랐고, 백건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머리맡에 풀어 두었다. 어른들은 그것이 동무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의례라고 말했었다. 은찬이 얼이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혼례였어?”
“어. 것도 모르냐?”
“몰랐어…”

한 마디를 더 타박 주려다가 백건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듣기로 주작 신당은 평생 혼례를 들지 않는다고 했다. 여신을 위해 정결을 바치는 구도자라 하였으니 속세의 혼례 의식에 대해서도 당연히 서툴 것이다. 게다가 들어본 바로 은찬은 다른 무동들과는 달리 궁의 담벼락 곁에서 발견되어 날 때부터 주작 신당에서 자라왔다고 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당연한 것인데도 백건은 묘하게 웃음이 났다. 귀엽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허나 백건은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다. 대신 담담히 연못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상대를 정인이라 부른다던데.”
“정인은 혼례 상대를 일컫는 거잖아.”
“혼례 의식 했으면 정인이지, 뭐가 달라.”
“그래도 남자끼리 혼례는 못한다고 했는데.”

은찬이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우린 동무고. 그러나 그보다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난 무동이고 곧 신관이 돼. 그럼 누구와도 혼례 할 수 없어.”
“신관이 왜.”
“신관은 혼례 들면 안돼. 누굴 연모해도 안 된대. 법도래.”
“뭐 그런 웃기는 법도가 다 있냐.”
“몰라. 근데, 그렇대.”

왜 그런지는 모른다. 날 때부터 외어온 기도문에 있으니 은찬은 당연한 듯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남자와도, 동무와도 혼례할 수 없다. 그 이전에 자신이 주작 신당에서 자라며 신관의 길을 걸어간다면 누구도 연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주작 신당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규율이며, 은찬에겐 지극히 당연한 세계였다. 은찬을 지도하는 신관들은 괴로워도 견뎌야 한다고 했다. 괴롭고 아파도 마음의 싹을 잘라야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은찬은 그 말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헌데 근래 들어 이따금씩 아팠다. 괴로웠다. 그 통증의 이유를 알기에 은찬은 아직 너무 어렸다.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마음에 돌이라도 얹은 것만 같았다.

“그럼 내가 황제 돼서 그 법도 바꾸면 되지.”

연못 속에 던져넣은 돌처럼 가라앉던 마음을 건져낸 건 백건이었다. 백건은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어? 은찬이 황망히 백건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황금색 눈이 씨익 웃었다. 불쑥 손을 잡아오며 백건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그냥 곁에 있어. 작은 손에 또 한 번 힘이 꾸욱 실렸다. 응. 은찬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끝이 어쩐지 홧홧했다. 심장께가 어쩐지 근질거렸었다. 그린 듯 근사해서 은찬은 차마 눈을 들지 못했다. 그 얼굴을 백건이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다 불쑥 새끼손가락을 걸어왔다. 왜? 은찬이 묻자 백건이 무심히 대꾸했다. 약조하라고. 더듬더듬 함께 엮는 손가락이 어쩐지 어색했다. 여신 외에 처음으로 하는 약조였다.

“약속한 거다? 영원히 나랑 떨어지지 않는다고.”
“응.”
“혼례도 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슨 그런 농담을 해.”

농 아닌데. 볼멘 소리로 우물거리면서도 백건은 은찬의 손은 끝내 놔주지 않았었다. 날이 좋았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










많은 분들이 가장 기다려주고 계시는 썰일진데 업댓도 통 없고 죄송한 마음에 + 이제 1년이 넘었으니 슬며시 공개해도 될 듯 하여(mm 무튼!
고전썰은 조금조금씩 스톡해두고 있어요u///u 둥차 연재 재개하면 그때부터 달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ㅠㅠ 꼭 완결내도록 하겠습니다ㅠ ㅠ///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해요 흑흑 ㅠㅠㅠㅠㅠ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ㅠ..♥

?
  • YJ 2016.12.10 02:23 SECRET

    "비밀글입니다."

  • 응애... 2017.02.21 00:22
    감사합니다...제가 왜 이걸 이제야 봤을지...정말 감사해요...루카님의 글을 보게 된 건 제 인생의 행복인걸까요8ㅅ8 앉은 자리에서 바로 건찬 고전썰 정독 완료해버렸는데 더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에요. 늦게 봐버려서 책을 구매하지 못한 게 평생 한이 되어 남을것만 같네요ㅠㅠ건찬 행쇼해 사랑해...글 읽으면서 웃다가도 눈물 백사발정도 들이키고 다음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또 안도해가면서...이 정도로 썰에 몰입해 읽은것이 정말 오랜만이라 너무 행복해서 이렇게나마 감사인사를 전해봅니다ㅠㅠ사실 제가 코멘트를 남기고 있는 지금도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인지라 제 급작스러움에 당황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루카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제 마음을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네요ㅠㅜ(부디,,,) 건이태자님 (이제 황제님이지만!)과 은찬신관의 이야기를 생생히 지켜볼 수 있도록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저는 이제 둥차 연재 재개일만 기다리도록 할게요....^ㅅ^!! 좋은 썰의 뒷부분을 기다리는 일 만큼 두근거리는 일은 또 없겠지요! 그럼 안녕히....! 정말정말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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