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며칠동안 어른거렸던 건찬을 끝내 참지 못하고 그만(..
* 뒷동네 심부름꾼 백건이 점성술사 주은찬 납치하려다 코 꿰는 이야기
* 뚜렷한 배경이 되어준 나라가 있지만 일단은 소설적으로 만들어진 세계관
* 별 내용은 없지만
* 일단 이 노래를 듣고 썼습니다


http://youtu.be/vxC3l7XZRfM











* Baraka : 점성술사


BARAKA

@ruka_tea






# 1

태양의 도시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대체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분이 컸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사시사철 난류가 흐르는 바다를 품었고, 남쪽으로는 황금빛 사막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근 천 년 전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회벽 건물들은 햇빛이 비칠 때마다 시시각각 색이 변했다. 자연과 문명이 함께 만든 그 기이한 실루엣은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관광객들은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분주하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고, 도시의 원주민들은 그들을 상대로 터무니없이 비싼 기념품을 팔거나 주머니를 털며 삶을 연명했다. 그럼에도 도시는 늘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도시에는 즐길 것이 많았다. 도시의 빛은 밤이 되어도 저물지 않았다. 해가 서편으로 저문 후에도 도시는 늘 성황이었다. 낮동안 낯선 이국의 풍경에 감탄하던 관광객들은 해가 지면 불빛을 따라 도시의 연안과 빈민가로 향했다. 연안을 따라 세워진 수십 곳의 카지노와 빈민가의 유곽은 도시의 오랜 자랑이었다. 이곳에서는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카지노와 유곽을 오가며 이국의 여자와 인생의 행운을 밤이 저물도록 사들였다.
처음 이 땅을 태양이라고 부른 자들은 남쪽의 사막을 유랑하던 유목민들이었다. 북쪽 바다에 반사된 빛이 마치 사막 위에 내려온 태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였다. 유목민 중 가장 많은 낙타와 부인을 거느리고 있던 자가 이곳에 처음으로 도시를 세웠다. 시간이 흐르며 크고 작은 전쟁과 반란들이 있었고, 도시의 주인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누가 주인이어도 도시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태양의 도시를 다스리는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태양이었다. 태양이 다스리는 도시, 태양처럼 찬란한 도시. 밤에도 빛이 저물지 않는 도시. 도시는 지지 않는 태양 같았다. 그래서 백건은 이 도시를 싫어했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부터 줄곧 그랬을 것이다.

「그건 카마르, 네가 잠을 편히 잘 수가 없기 때문이야.」

메디나*빈민가의 중개인은 백건이 이 도시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늘 그 정도로 가볍게 정리했다. 백건보다 딱 스무 살 정도가 많았던 그녀는 그만큼의 지혜와 요령을 가진 여자였다. 유곽의 빚을 스스로 갚았던 것처럼 그녀는 사업 수완이 좋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거리에서 기억을 잃고 헤매던 동양인 청년을 데리고 와 거둔 것도, 일을 가르친 것도 그녀였다. 이 사업을 하다 보면 험한 일이 참 많은데 내 주변의 사내란 것들은 전부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10년 전, 그녀는 백건을 데려온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백건의 유일한 기억은 이름뿐이었다. ‘백건’이란 이름을 듣고 그녀는 잠시 묘한 얼굴을 했었다. 좋은 이름이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 그녀는 백건을 카마르*月,moon라고 불렀다. 백건이 이 도시에서 가질 수 있던 유일한 것이었다.

「거처는 정하지마. 이 일을 하려면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거든. 돈은 땅에 묻어. 이 나라 은행은 왕족과 관광객들에게만 친절하거든. 그리고 알라에게 맹세코 나는 내 사업에 피를 묻힐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너도 너의 신을 걸고 맹세해.」

그녀는 살인을 싫어했다. 그보다는 혐오에 가까웠다.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해서 백건은 자신이, 아마도, 종교가 없었을 것 같다는 말을 하지 못 했다. 그러니 백건이 지난 10년간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백건은 그 정도가 그녀를 위해 지킬 수 있는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일은 그녀의 말마따나 고된 편이었지만 구태여 살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관광객이 투숙 중이던 호텔 방에 코카인 분말 한 팩을 숨겨놓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경악에 가깝게 감탄을 했다. 이 레벨을 처리하면서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라고 그녀는 말했었다. 다음 날 아침, 도시는 도시의 주인과 회담을 위해 입국했던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마약 소지 스캔들에 휘말려 출국 금지조치 당했다는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백건은 TV도 없는 도시의 낡은 여관방에 처박혀 메디나의 무허가 의사가 처방해준 약초를 한 대 태우고 종일 잠만 잤다. 그녀가 준 수고금은 오래지 않아 약초 값으로 모두 사라졌다. 약초가 떨어지면 다시 일을 얻기 위해 그녀를 찾았다. 차라리 여자를 사. 그녀는 즐겨 충고했지만 백건은 듣지 않았다. 이 도시는 달이 잠들기에는 너무 훤하고 찬란했다. 불면증은 점점 더 깊어졌다. 약초가 없으면 백건은 이제 잠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 무렵, ‘검은 남자’가 찾아왔다. 백건은 그날, 여관방의 서랍장에서 마지막 남은 약초를 긁어모아 태웠다. 사흘 전의 일이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피차 밝힐 필요가 없겠지요. 제가 그렇듯 당신 역시 저에게 관심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쓸데없는 중개도 생략하죠. 당신과 제 사이에는 오더만 존재하면 됩니다.」

남자의 이름은 ‘현’이라고 했다. 아마 본명은 아닐 것이다. 남자는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백건의 여관방에 홀로 찾아왔다. 머리색처럼 검고 짙은 눈을 감정 없이 끔벅이며 남자는 인사 없이 곧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백건은 그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왔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백건이 자신의 진짜 이름과 함께 기억하고 있던, 낯익은 언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꼬마를 하나 찾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메디나의 뒷길 어딘가에서 점을 보는 꼬마라고 하더군요.」

남자가 내민 사진 속에는 남자 아이가 함박 웃고 있었다. 불꽃처럼 색이 붉은 머리칼보다도 입술 밑에 찍혀 있던 색점이 더 눈에 박혔었다. 아이는 어렸다. 열 살 정도 되었을까. 백건이 이 거리에 처음으로 휩쓸려 들어왔을 무렵에 태어난 아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백건은 아이의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보다는 아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었다. 남자는 그 아이를 샴스*日, Sun라고 불렀다.

「물론 그게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를 그렇게 불렀지요. 이 거리에서는 샴스가 아니라 바라카Baraka로 불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
「사흘 뒤 새벽에 항구 앞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남자의 용건은 그뿐이었다. 남자는 떠나면서 자신의 머리색처럼 새카만 수트케이스를 여관방의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아두고 갔다. 착수금이라고 했다. 절반은 유로 지폐, 절반은 약초였다. 백건은 약초를 수 번 반복해 피우고 다음 날 해가 뜨고 저물 무렵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첫 끼니를 때우고 씻은 후에 백건은 방으로 다시 돌아와 남자가 두고 간 사진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의 꼬마가 별 같은 색점을 달고서 함박 웃고 있었다. 어쩐지 이름을 알 것도 같아서 백건은 한참동안 눈을 좁히며 사진을 뚫어봤다. 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잘려나간 필름처럼, 저물어버린 지난 계절의 태양처럼.




# 2

메디나에서는 그 붉은 머리 소년을 이렇게 불렀다. 신의 예언자, 바라카.

「알라께서 예언의 은혜를 주신 것이지. 밤마다 관리들이 뒷길로 몰래 찾아온다니까. 왜긴 왜겠어. 바라카가 하도 영험하니까 자기들 장래를 물으려고 오는 거지. 이건 소문인데 말이야. 왕실에서도 그렇게 찾는다는구먼? 지난달에 왜, 공주가 결혼을 미뤘잖어. 그것도 이 꼬마가 친 점괘 때문에 그랬다니까. 혼례를 진행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답이 나왔거든. 그런데 이 꼬마가 앞을 못 봐. 눈이 멀었다더라고. 알라께서 예언의 은총을 내려준 대신 빛을 가져가셨다던가…」

메디나에서는 예언자, 그러니까 ‘바라카’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백건에게 약초를 즐겨 팔았던 늙은 의사조차 바라카를 알고 있었다. 어찌 그 소년을 모를 수가 있느냐며 의사는 백건을 향해 끌끌 혀를 찼다. 알라의 은혜를 입은 게 분명하다며 의사는 몇 번이고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바라카라는 이름 역시 왕족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의사는 덧붙였다.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 알라를 섬기는 이 도시에서 점에 의지해 국정을 끌어간다는 게 용납이나 되겠어? 당장 난리가 나지. 그런데 그게 사실이거든. ‘바라카’도 본래 왕실에 소속된 점쟁이를 의미하는 말이라잖아. 점성술? 어허, 그런 빤한 게 아니라고 해도 그러네. 카드도 없고, 구슬도 안 써. 이 꼬마가 내놓는 답은 딱 두 개 뿐이지. 예, 아니오. 그런데 그게 기가 막히게 딱 맞거든.」

소년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카드도, 구슬도 없는 소년의 점괘는 결과조차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점을 보러 찾아간 이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청하면 소년은 예, 아니오로 나누어 대답을 한다. 이 답은, 의사의 과장 섞인 어조를 그대로 빌어온다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소년은 대단한 복채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 역시 그 붉은 머리 소년 바라카가 메디나에서 명성이 높은 이유 중 하나였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소년에게 점을 보길 원했지만 소년은 높은 명성만큼 인기가 많았고, 손님을 받는 데에도 규칙이 있어 하루에 딱 열 명 정도만 받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7년 전 이후로 여태까지 점을 보지 못했다면서 원통해했다. 그때 백건은 들고 있던 사진을 다시 한 번 잠자코 내려다봤다. 사진 속의 붉은 머리칼 소년은 어떻게 보아도 열 살 남짓이다. 의사가 기억하는 소년의 얼굴 역시 사진과 똑같았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백건은 생각했다. 그러나 의사도, 또 메디나 사람 중 그 누구도 그 괴리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딸도 이 꼬마에게 점을 봤다고 했었어. 10년 전이었지. 그때 만나고 있던 애인과 결혼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 물었는데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왔다지 뭔가. 그래서 헤어지고서 뒷조사를 해봤더니… 허, 이 죽일 놈이 유부남이었더라고.」
「……」
「그러니 자네도 이 참에 궁금한 게 있으면 가서 한 번 물어보게. 유곽 안쪽 세 번째 길, 맨 끝에 있는 붉은 대문을 찾으면 돼.」

백건은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서쪽에서부터 붉게 물든 하늘 밑에서 유곽의 아가씨들이 분칠을 하고 가슴골을 끌어내리며 단장을 했다. 오늘은 약초를 사지 않았다. 긴 밤이 될 것 같다고 백건은 생각했다.





# 3

붉은 대문은 메디나의 세 번째 길에 있었다. 의사의 말대로였다.
어린 여인들이 던지는 눈짓을 무심히 지나치며 백건은 길을 걸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붉고 노란 구슬로 꿴 발을 밀면서 들어간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영업이 끝났나. 하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백건은 기척을 죽여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점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종교가 없었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은 미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는 허상이고, 점은 사기다. 세상에 예언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다. 예언도, 미래도, 운명도 그저 추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백건은 오래도록 그렇게 생각했다. 열여덟 살,로 추정되던 나이에 기억을 잃었으니 오래라고 해봐야 고작 10년이다. 그래도 10년은 어떤 편견을 견고히 다지는 데엔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너에게도 분명 너를 조정해 돈을 버는 어른이 있겠지.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백건은 거듭 생각을 짓씹었다. 신이 내린 예언의 은혜 같은 것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 도시는 모두 환상이다. 관광객들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도시의 풍경은 해가 사라지면 어둠 속에 먹혀 버리고, 카지노의 잭팟도 누군가 기계의 수치를 조작해 부자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뿐이다. 예, 아니오라는 단순한 답을 예언이랍시고 내놓는 점쟁이는 하룻밤 꿈을 파는 유곽의 여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해는 져 버리면 그만이다. 밤이 오면 저무는 태양처럼 모두 사라진다. 이 도시에는 진실이 없다. 꿈속에서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처럼.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 생각하며 백건은 복도 끝에 걸려 있던 붉은 휘장을 손끝으로 떠밀었다. 구슬로 엮인 발과 달리 두터운 휘장이 스르륵 안쪽으로 떠밀리며 속을 드러냈다. 방은 돔처럼 둥글었다. 방 정중앙에는 태양처럼 둥글고 노란 카펫을 깔아 두었다. 가구는 그뿐이었다. 그 텅 빈 방 한 가운데에 ‘소년’이 앉아 있었다. 붉은 머리칼도, 입술 밑에 박혀 있던 색점도 사진과 똑같았다. 사진처럼 작고 어린 열 살 소년이었다. 백건이 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소년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얗고 얇은 천이 안대처럼 소년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소년이 백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년이 느리게 흐 웃었다. 색점이 찍혀 있던 얇은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소년이 말했다.

“기다리던 손님께서 오셨네요.”

이쪽으로 가까이 오시겠어요? 소년이 백건을 향해 말했다. 장님이라는 것도 사실 거짓말이 아닐까. 손짓을 따라 다가서면서 백건은 그런 생각을 했다. 소년은 백건이 제 앞에 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소년이 소리 내서 웃었다. 좀 더 가까이요. 소년의 작은 손이 서너 걸음 앞에 앉아 있던 백건의 소매를 잡으며 끌었다. 마치 훤히 보이는 듯 소년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가까이에서 본 안대는 백건의 짐작보다도 더욱 두껍고 능직이 촘촘했다. 장님이 아니어도 저런 안대로는 앞을 볼 수 없다. 허나 소년이 앞을 보건, 보지 않건 그런 사실은 백건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백건은 소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사진보다 더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 드리면 될까요? 소년은 물었다. 그제야 비로소 백건이 입을 열었다. 카마르. 백건은 대답했다. 소년이 실바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런 거 말구요.

“…‘진짜’ 이름.”

백건이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른 주먹 안에 천천히 땀이 배여 나왔다.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던 건 단지 ‘진짜’ 이름을 물어온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딴 거 없는데.”
“없을 리가 없어요. 나는 지금 형이랑 형이 태어난 나라의 말로 얘기하고 있는걸.”
“……”
“굉장히 근사한 이름을 가졌을 거야. 하얀 달처럼. 아니면 하늘처럼.”
“……”
“달은 해의 짝인데, 형은 참 외롭겠다… 왜 해를 잃었어요?”

백건이 실소했다. 어이가 없는 말장난 같아서 그랬다. 점을 본다는 녀석들의 흔한 수법이다. 잃은 적 없어. 백건이 짧고 낮게 대꾸했다. 그래요. 소년이 웃었다. 어쩐지 안대 속에 감춰진 소년의 눈도 함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이 백건의 손을 양손으로 가만히 움켜잡았다. 제 손의 반절 밖에 되지 않는 작고 어린 손이었다.
그럼 이제 자리에 편히 누워주세요. 소년이 말했다. 백건은 나올 때 지갑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잠시 떠올려보다, 이내 말았다. 어차피 사기다. 백건은 모르는 척 한 번 어울려 보기로 했다. 소년의 손을 따라 순순히 카펫 위에 길게 누웠다. 둥그런 방에 뚫린 창 너머는 어두웠고, 주변에선 여전히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 살배기 아이를 유괴하기에는 모자람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소년이 백건의 이마를 천천히 쓸었다. 소년은 질문에 제한이 없다고 했다. 후련해질 때까지 물어보시면 돼요.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백건은 검은 남자와 항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자는 내일 새벽에 항구에서 만나자고 말했었다.
가도 될까. 백건은 물었다. 붉은 머리 소년이 대답했다. 아뇨.

“왜.”
“미안해요, 형. 왜라는 말에 대한 답은 없어요.”
“아니라고 대답한 건 예언이 아니지.”
“아뇨.”
“안 갔으면 좋겠어?”
“아뇨.”
“내가 널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지.”
“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는데, 실패할까?”
“아뇨.”
“가지 말라면서.”
“네.”
“안 가면 실패하는 건데.”
“도망가면 되죠.”

편히 누워 있던 노란 눈이 우뚝 굳었다. 둥그렇게 열린 노란 눈이 소년의 하얀 안대를 쳐다보았다. 네, 아니오 밖에 없다더니. 불퉁거린 말에 소년이 말했다. 이건 덤이에요. 왜냐면 나는…
얇은 입매가 활짝 웃었다.

“지난 10년동안 널 기다렸거든.”

백건. 귓가로 바싹 다가온 숨결이 얕게 우물거렸다. 백건이 벌떡 일어났다. 뒷목이 어찔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름에 대해서도, 정체에 대해서도 백건은 묻지 못 했다. 소년이 작은 손끝으로 가만히 백건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그리고는 하얀 목에 팔을 두르며 스르르 백건의 허리 위로 올라앉았다. 바싹 붙은 숨결이 콧날을 타고 간지럽게 떨어졌다. 몸을 붙이며, 소년이 백건의 코앞에서 우물거렸다.

“그리고 이건… 복채.”

츕, 입술이 닿았다. 닿은 채로 슬며시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틈을 작은 혀가 꽃술처럼 파고들었다. 달게 훔치며 작은 입술을 조일 때 백건은 저도 모르게 눈결을 울컥 구겼다. 이상하다. 백건은 생각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꼬마랑 키스를 하고 있는 거지. 잠시 떨어졌던 입술을 소년은 다시 깊게 겹쳐왔다. 백건이 습관처럼 두 눈을 짓눌러 감았다. 낯설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강렬한 기시감이었다. 왜. 백건은 거듭 생각했다. 몇 번이고 입술이 포개졌다. 우뚝 굳은 혀를 달게 쓸며 소년의 온기는 그제야 스르륵 멀어졌다. 구겨 감았던 눈을 열기 전에 백건은 허공 중에 떠돌던 묘한 위화감을 먼저 느꼈다. 무게가 달랐다. 그보다 촉각이 달랐다. 백건이 뒤늦게 구겨 감은 눈을 열었다. 눈앞에서 소년이 웃었다. 아니.
남자였다. 제 또래이거나 혹은 동갑이거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백건이 신음처럼 우물거렸다. 소년이, 아니,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제 손의 반절에 불과했던 작은 손은 이제 백건과 고작 한 마디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말랐지만 선이 분명한, 청년의 골격이었다. 그조차도 낯이 익었다. 잘려나간 필름 같았다. 이제 색이 바랜 어린 날의 사진 같았다. 노란 눈이 보름을 지나버린 달처럼 일그러졌다. 남자가 웃으며 제 붉은 머리 뒤를 더듬거렸다. 매듭을 당기자 하얀 안대가 매끄러운 뺨을 타고 스르륵 백건의 입술께로 툭 떨어졌다. 안대가 떨어진 백건의 입술 위를 천 째 더듬으며 남자가 가만히 백건을 내려다보았다. 붉음이 유독 짙은 눈이 둥그렇게 웃었다. 그 웃음에도 백건은 숨이 막혔다. 심장이 뽑힐 것처럼 뛰었다.
알아. 백건이 몇 번이고 거듭 생각했다. 나는 널 알고 있어. 남자가 천천히 백건의 뺨을 쓸어 내렸다. 그 손길이 어쩐지 나른했다. 수마처럼 졸음이 끼쳐왔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을 더듬으며 백건은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왜, 너를 잊었을까. 나는 어째서 너를 잊어버린 걸까.
주은찬.
백건이 그 한 마디를 가까스로 쥐어짰다. 남자가, 은찬이 웃었다. 얇은 입매가 백건의 입술 위에 키스를 떨어뜨렸다. 하얀 뺨을 더듬으면서 은찬이 말했다. 그래, 맞아.
근데 너무 늦었어.

“…잘자, 내 사랑.”









다음 날, 하늘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달이 사라져도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이 너무 훤했던 탓이었다. 사람들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달이 사라졌음을 차츰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공포에 떨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어느 이방 민족의 경전처럼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지며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미래를 묻기 위해 메디나를 찾았다. 하지만 누구도 메디나의 셋째 길에서 붉은 대문을 발견하지 못 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슬퍼했지만, 오래지 않아 잊었다. 사람들은 메디나의 붉은 대문도, 하늘에 달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다. 누군가 사막에서 달처럼 노란 눈을 가진 청년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을 보았노라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메디나의 의사도, 중개인도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








저는 그저 점치는 은찬이가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은찬이 별자리도 천칭이니꽈^3^ 주작 신기는 예언일 것이라고 저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ㅠ ㅠ 이 글은 나중에 기회 되면 길게 한 번 써보고 싶네요 흑흑 ㅠㅠㅠㅠㅠㅠ

+ 메디나, 카마르, 샴스는 모두 아랍어에서
+ 제목인 바라카(Baraka)는 스페인에서 점성술사, 더 정확하게는 모로코 왕실의 점성술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불어로는 축복을 의미하기도 하고 영어권에서는 동방의 영적인 힘을 바라카라고 일컫는다고.. 바ㅋ카ㄹ라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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