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노래 듣다가 불현듯 생각난 건찬 토막글입니다
* 백건과 주은찬의 기묘한 동거에 대한 이야기
* BGM / Sean Braddford <Playground>


http://youtu.be/Mw_0SmtkhfU









“몇 살이에요?” 너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필터 끝을 질근거리면서 대답했다. 동갑요, 그쪽이랑.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첫인사였다. 백건이란 남자를 주은찬이 처음 만났던 순간.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면… 그건 일단 뒤로 미뤄두자. 

그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고민에 빠진 노란 눈동자의 색이 달처럼 아름다웠다거나, 속눈썹이 유독 촘촘해서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거나, 콧날이 빚은 듯 준수했다거나, 버릇처럼 입술 끝을 질근거리던 그 하얀 송곳니까지 완벽하게 잘 생겼다는 빤한 묘사는 생략하도록 한다. 


어쨌거나 그는 잘 생겼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그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백건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인 미남이었다. 


그 준수한 눈매를 울컥 좁혀가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사람을 잘 본다. 그게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내 직업적인 의무감에서 당시 백건의 의중을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호칭을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조금 전에 흡연 부스에서 불을 빌리면서 처음으로 말을 튼 남자가 어떻게 자기에게 동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보는 데에 난이도가 있다면 백건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감정이 잘 드러나는 덕분이다. 어쨌건, 나는 지금도 백건이 그 둘 중 한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좀 더 정답을 유추해보자면, 백건은 처음엔 다소 혼란스러워하다가 금세 다음 생각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다음에 이런 질문을 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이름이 뭔데.”


존대를 단숨에 떼어낸 말이 그렇게 물었다. 참 알기 쉬워. 나는 비슷한 투로 받아쳤다.


"주은찬."


그는 백건이라는, 이미 나는 알고 있었던, 그 이름을 무심히 꺼내놓았다. 나는 담배의 필터 끝과 함께 대답을 질근거렸다. 좋은 이름이네. 그리고 머금었던 연기를 그의 얼굴을 향해 느리게 후우 뱉어냈다. 스캔은 어차피 다 끝났다. 노란 눈이 잠깐 당황한 듯 했지만 말은 없었다. 아마 그는 내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담배를 비벼 끄면서 나는 말했다. 차 있어? 그가 눈을 좁히며 되물었다. 차는 왜. 나는 대답에 앞서 그의 목에 삐뚤게 걸려 있던 넥타이를 끌어 당겼다. 바싹 붙은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웃었다. 미안, 사실은 일부러 그랬어.


그때 네가 나를 거절했어야 했었는데.


“30분 내로 보내줄게.”

“……”
“천국.”


세상 모든 배드엔딩은 으레 이렇게 시작된다. 두 사람이 만났다. 그리고 사랑이 시작됐다.






롤플레잉 Role-Playing

w.Ruka







나는 남을 관찰하면서 산다. 한 사람의 사생활, 생활 패턴, 일상의 아주 사소한 버릇까지 전부 빠짐없이 기록해 판매하는 것이 내 일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대상을 주로 장사밑천이라고 부른다. 밑천마다 급도 다르다. 누구는 A, 누구는 F를 찍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어설픈 B와 평범한 C가 많다. 


백건은 내 밑천이었다. 그것도 A, 위험도로 따지자면 플러스가 네 개쯤은 붙어 있을 A 중의 A.


나에게 일을 준 게 누구냐면, 그건 비밀이다. 그래도 대충 이런 정도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정보를, 그것도 백건 같은 인물에 대한 정보를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사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흑막들은 보통 거물급 정치인이거나 기업 총수인 경우가 많지만, 그건 아니다. 알고 보면 좀 시시한 상대다. 

그러니까 내 의뢰인에 대해서는 대충 이런 정도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그 의뢰인에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대통령을 대입한다거나, 어느 대기업의 총수를 대입해도 나는 별로 상관이 없다. 달리 얘기하면 별 거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상당한 돈을 지불하며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그가 내 삶의 방향 자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만큼 비중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백건은 내 삶에서 가장 비중 있는 주연이었다. 이게 이 이야기의 전부다. 왜냐면, 이 이야기의 화자가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는 주은찬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레포트의 형식을 빌리자면 이와 같겠다. 주은찬은 반년 전에 거리의 카페에서 처음으로 백건을 만났다. 직업, 전공, 살고 있는 지역과 전화번호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보다 마세라티의 앞좌석에서 서로의 다리 사이를 확인하는 것이 더 빨랐던 두 사람은 지금은… 같이 산다. 

끼니는 주로 외식으로 해결하며, 침실은 따로 쓴다. 섹스는 좋아하지만 누가 곁에 있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는 주은찬의, 유일하게 까탈스러운, 특이사항을 백건이 일주일간의 설득 끝에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는 동거 중인 평범한 게이커플과 다름이 없다. 잠자리는 평균적으로 하루 두 번. 영화는 달에 두어 번씩, 적당한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가 개봉할 때. 

대체적으로 엇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욕실 앞에서 아침 인사를 겸한 키스를 나눈다. 가끔은 둘이 함께 들어간 욕실의 문이 오래도록 열리지 않기도 하고, 그런 때면 허겁지겁 출근을 서두르는 백건에게 주은찬이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어준다. 현관 앞에서 짧은 볼키스를 나누고 백건은 출근한다. 본래 백건 명의로 되어 있는 이 오피스텔에 다달이 도착하는 보험사의 고지서에 명시되어 있듯, 백건은 여의도에 위치한 어느 증권사의 미래전략팀으로 출근 해 한 달 뒤 증시 상황을 기록하는 업무로 하루를 보낸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주은찬이 매해 5월마다 프리랜서 광고 카피라이터라며 가짜 개인 소득세를 신고하러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처럼.


백건은 ‘늑대’다. 의뢰인은 그것이 그의 진짜 별명이라고 했다. 2년 전이었다.


“이 바닥에서 쓰레기들을 정리해 죽여 버리는 치들을 늑대라고 불러요. 겉보아선 잘 모르죠. 가족조차 모르거든요. 그것조차 늑대 같지 않나요? 늑대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조용히 표적의 숨통을 끊어버려요. 표적은 물리는 순간까지 늑대의 존재조차 몰라요. 그래요, 달. 늑대는 달이에요. 어둠을 밝히는 달… 하지만 우리는 밤거리를 걸어가면서도 하늘에 달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죠.”


의뢰인과는 그날 이후로 직접 만나지 않았다. 만날 일도 없었다. 내가 백건의 하루하루를 세밀하게 기록해 정리한 파일을 주에 한 번씩 메일로 보내면 5분도 지나지 않아 은행에서 입금을 알리는 문자가 날아왔다. 2년간 대금결제가 미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큰 불편이나 곤란을 겪은 적도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사람 관찰하는 것을 꽤 좋아했고, 잘 했고, 잘 숨겼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순조로웠다. 백건과 마찬가지로 가족들 역시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사는 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모른다. 어차피 달에 두어 번씩 어울려 꼭 식사를 함께 하는 백건네 식구들과는 다르지만.

백건은 나를 가족들에게 ‘친구’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적어도 내가 조사를 시작한 후로, 어떻게 솔로일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백건은 상당히 괜찮은 남자였다. 나에게는 잘 져줬고, 잘 생겼고, 잠자리까지 끝내줬다. 우린 꽤 완전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았을 때.


백건은 여전히 내 ‘밑천’이었다. A 중의 A


하지만 들키게 된다면 장담하건데 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죽을 것이다. 최후에는 염산 속에서 뼈 한 조각 남지 않고 녹아버리겠지. ‘늑대’의 일처리는 그런 식이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해가 뜨면 흔적조차 없는 달 같았다. 그 달이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 너를 지켜봐온 지난 2년동안 줄곧.


밤 10시, 현관이 열렸다. 넥타이를 무심히 끌어내리는 노란 눈이 퍽 지쳐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야근?”
“어.”

가방을 받아주면서 나는 물었다. 대답에도 어쩐지 기운이 없었다. 백건은 요즘 종종 늦었다. 말로는 일이 많다고 했다. 거실에 올라오면서도 백건은 툴툴거렸다. 이 좆같은 회사, 씨발, 내가 때려치우든가. 백건은 요즘 자주 회사에 대한 욕을 했다. 하지만 때려치우고 싶은 게 회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도 팀장님이 보고서 뺀찌 놨어?”
“어. 아, 그 새끼는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 졌나.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별 말 같지도 않은 걸로 다시 써라, 집어치워라, 때려치워라… 씨발.”
“그냥 화풀이야. 너무 맘에 담아두지마. 씻을래? 밥은? 먹었어?”
“어… 아니. 주은찬 먹을 건데.”
“또 오자마자 그런… 잠깐, 백건. 바보야, 그만, 간지러워, 하하… 읏,”


백건은, 아니, ‘늑대’는 오늘 인천에 있었다. 연안부두였을 것이다. 비어있던 하역항 앞에서 백건은 30분이 넘도록 남자의 뒤를 조용히 좇았고, 남자가 후미진 곳에서 잠시 담배를 피워 물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칼날이 남자의 목덜미를 관통한 것과 동시에 백건이 피가 튀지 않도록 찌른 자리를 준비한 수건으로 꽉 눌렀고, 인간에서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둔탁한 덩치가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래지 않아 자리를 정리한 백건은 남자의 시신을 자루에 넣고 트렁크에 실었다. 경인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에 잠깐 시멘트 공장에 들렀고, 잠시 후 백건은 가벼워진 차를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공장에선 내일 새벽에 용도 폐기된 콘크리트 폐자재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대형 분쇄기 안에 던져 넣을 것이다. 곱게 다져지고 또 다져져서 세척기를 지난 폐자재는 다시 처음의 콘크리트 분말로 돌아가 어느 아파트의 벽들을 견고하게 덮어줄 날을 기다린다. 어쩌면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집의 기둥 어딘가에.


나는 모두 안다. 네가 오늘 무얼 했는지, 그리고 내게 어떤 것을 속이고 있는지. 


아는 것은 나 역시도 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속이고, 너 역시 나를 속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완전했다. 너는 내 존재조차 모르겠지만.


“카피 안 써져서 죽겠다더니, 원고는. 했어?”


욕실 문을 열고 나온 백건은 가장 먼저 내게 그렇게 물었다. 씻었더니 얼굴은 한결 나았다. TV 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면서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대충. 백건이 내 말에 옅게 웃었다. 잘했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 내 팔에 어깨를 스르륵 둘러 안았다. 소파의 가죽이 잠깐 길게 울었다. 나는 백건의 등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바디 클렌저의 향이 익숙했다. 아마 나한테서 나는 체취도 똑같았을 것이다.

은찬아. 백건이 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나를 돌아봤다. 이럴 때의 백건은 내 성을 잘 부르지 않는다. 네 손 안에 스르륵 뺨을 문지르며 나는 대답했다. 응. 

네가 내 턱을 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몇 번을 겹치던 키스는 이내 깊어졌다. 틈을 비집고 혀를 얽으며 너는 내 티셔츠 안쪽을 급히 더듬었고, 힘에 떠밀린 나는 네 목에 팔을 두르며 소파에 누웠다. 입술을 떼어낸 네가 내 뺨에 키스하고 턱 밑에 가만히 이를 세웠다. 

똑같네. 색 밝은 머리칼을 천천히 헤집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제도, 그제도, 반년 전에도 우리는 이런 밤을 함께 보냈다. 내일도 그렇겠지. 또 내일 모레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요즘 때때로 불안했다.

노란 눈이 스윽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백건이 낮게 나를 불렀다. 주은찬.


“딴 생각하지.”


백건은 요즘 이런 말을 자주 했다. 페팅 중에도 자주 멈췄고, 자주 나를 빤히 올려봤다. 그 눈에 꿰뚫릴 것 같아서 나는 숨이 막혔다. 그 눈이 아득했다. 무서웠다. 늑대라는 별명은 누가 붙인 걸까. 그런 생각을 잠깐 삼키다 이내 나는 웃었다. 노란 눈이 옅게 일그러졌다. 백건이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해.”
“네 생각.”
“그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
“눈을 자꾸 피하는데, 요새.”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말고… 응?”


일부러 농담처럼 웃었다. 턱을 당기며 내가 먼저 너에게 입을 맞췄다. 너를 올려다보면서 네 손을 나는 일부러 천천히 내 몸 위로 잡아끌었다. 그거 말고, 그런 거 말고… 그런 재미없는 거 말고… 


"여기, 응? 자기야."


네가 이내 픽 웃었다. 내 티셔츠를 울컥 움켜잡으면서 너는 거칠게 밀어 올렸다. 노란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 웃음에도 나는 숨이 막혔다. 어지러웠다. 네가 무서워서.

네게 들킨다면 어떻게 될까. 너는 나를 분명히 죽일 텐데,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닌데. 너를 볼 수 없을까봐, 나는 그게 가장 슬펐다. 


“애라도 하나 만들어야 딴 생각을 안 하지, 우리 마누라.”
“무슨 농담도 그런 저급… 잠, 건아, 그렇게는… 잠, 너무 급, 흡,!”


이 드라마는 언제쯤 끝날까.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속이지 않게 될까. 언제가 되어야 나는 네게 솔직히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너는 언제가 되어야 내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거짓 속에 살게 되겠지. 


이건 사랑이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내게 짧게 키스했다. 눈을 접으며 너는 웃었다. 내 뺨을 쓰다듬으며 너는 속삭였다. 사랑해.


“…너 참, 예뻐. 은찬아.”


그래서 영원히 속고 싶었다. (*)







이게 대체 뭐하자는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고 싶은 것만 짧게 써놓고 저는 퇴근합니다^_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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