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존잘님의 귀한 연성에 대한 답례로 스르륵 써보는 무협 AU

* 이 망한 연성을 사랑하는 연두쨔마께 바칩니다ㅠ_ㅠ...
* 보시기 전에 이 건찬을 봐주시오면 더욱 좋읍니다

https://twitter.com/oksopi12/status/691146796567887873

* 정파 백건 x 사파 주은찬으로 건찬합니다. + 약간의 현가람



http://youtu.be/X0d9i48z7kY










그날 소년은 불(火)을 보았다.

달도 없던 깊은 어둠은 삽시간에 낮인 듯 달아올랐다. 범산(範山)의 높은 바위 위에서도 천년을 우뚝 버텨왔던 대각(臺閣)은 화마(火魔)에 휩싸여 그 오랜 세월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온 곳에서 나무와 살을 태우는 냄새가 가득했다. 별조차 가릴 듯이 치솟던 연기 틈틈이 산 자들의 비명이 천지를 찢었다. 사람의 시신과 호랑이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 범각(範閣)의 너른 바위터는 이미 본연의 흰 빛을 잃었다. 수라였다. 불가(佛家)의 지옥이었다. 찬연히 타오르던 불길의 한중간에서 소년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좀처럼 현실을 인지할 수가 없었다. 꿈인 듯 멀었다. 서너 걸음 앞에 쓰러져 있던 중년의 사내와 여인, 그 몸을 덮듯이 감싼 채 미동이 없던 하얀 호랑이 두 마리. 무릎을 꺾은 누이가 불길에 그을린 호랑이의 하얀 털을 움켜잡으며, 사내와 여인을 몸을 더듬으며 오열을 했다. 아빠, 엄마. 누군가 어둠 너머에서 소리를 질렀다. 주작의 짓이야. 피울음이 하늘을 갈랐다. 주작의, 아이가, 우리 일족을 멸했어! 소년의 노란 눈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흔들며, 떨며, 황금빛 눈길이 아비와 어미의 시신을 넘어 바위터 끄트머리로 움직였다. 붉은 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빛인 듯 했다. 태양인 듯 했다. 꽃처럼 일렁이던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노란 눈의 소년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빠진 넋의 조각이 천천히 다시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해. 보검을 꽈악 움켜잡으며, 노란 눈의 소년이 말했다.

니가, 아니라고, 말해. 붉은 머리칼의 소년은 답하지 않았다. 꽃처럼 웃으며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색점이 찍혀있던 얕은 입술이 고요히 웃었다. 마른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불길이 붉은 소년을 감싸듯이 휘몰아쳤다. 눈이 시렸다. 아프도록 눈이 부셨다. 노란 눈의 소년이 불길을 향해 달렸다. 울던 누이가 다급히 동생을 불렀다. 안돼, 건아, 안돼! 등 뒤에서 주인과 꼭 같은 눈동자를 한 하얀 호랑이가 부리나케 뛰쳐나와 소년의 하얀 장포자락을 물어 잡았다. 무릎을 꺾고 주저앉으면서도 소년은 버둥거렸다. 불꽃이 천천히 잦아졌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리 위로 재가 하얗게 흩날렸다. 그제야 소년은 바닥에 웅크리며 떨었다. 부르지 못한 이름이 울음처럼 터졌다. 대답 없는 울음이 범산의 산세를 흔들던 그날, 소년은 많은 것을 잃었다. 소년의 나이는 그때 열여덟이었다.

대륙력 일천삼백삼십년, 백호각은 전소되었다. 가문은 일족과 수장을 잃었고 보패는 사라졌다. 주작의 불꽃이 백호를 태웠노라고 후대는 회고했다.





로써 범을 죽이다 ;

@ruka_tea



~ 第 一 章 ~




남쪽의 주작을 향해 서쪽의 백호가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린 형국. 서방부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금원(檎園)을 사람들은 그렇게 평했다. 중앙에서 시작되어 대륙의 서남쪽을 가로지르는 백색 산맥을 등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도시는 작았지만 아름다우며 사계(四季)의 변화가 뚜렷했다. 산맥은 서쪽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막아주었고, 탁 트인 남향에서는 사막의 온화한 훈풍이 불어왔다. 덕분에 금원은 곡식과 과수(果樹)들이 결실을 맺기에 딱 좋았다. 곳간은 가득했고, 거리는 북적였다. 주작단(朱雀團)이 남방을 다스리고 이린성(理焛城)이 지금과 같은 폐허가 아니었던 22년 전에는 서방부와 남방부의 교역을 주도하며 더욱 번성했었다. 그래도 여전히 금원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먹고 마실 것이 풍족했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되며 세상은 얼어붙었다. 남방부와 가까워 서방부의 도시와 마을들 중에서도 가장 온화하다는 금원이었으나 1월에 접어들면서는 곧잘 추워졌다. 현무의 겨울은 자비가 없어서 백호의 산맥을 훌쩍 넘으며 온 곳곳에 눈보라를 흩뿌렸다. 허나 동지(冬至)를 넘긴 이 시기가 금원이 가장 북적거리는 때였다. 금원의 일등 특산품이라는 능금의 수확이 모두 끝나고 본격적으로 능금주가 출하되는 시기인 덕분이었다. 달큰한 능금주는 겨울의 찬바람을 만나야 향에 깊이가 더해진다. 대륙인이라면 한 번쯤은 죽기 전에 범산(範山)의 순례에 올라야하고, 금원의 겨울 능금주를 맛보아야 한다. 때문에 겨울이면 대륙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금원의 객잔이 해가 저물기 전부터 북적거린 연유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객잔의 2층은 저녁부터 시끄러웠다. 겨울철 능금주의 맛을 보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손님들이 찾아드는 덕분이다. 방은 진작부터 빈 곳이 없었고, 주인장은 주머니 가득 은전(銀錢)을 수시로 쓸어 담았다. 사람들은 1층의 탁자마다 한 석씩을 차지하고 앉아 거배(擧杯)를 했다. 일천삼백사십이년, 연의 초월(初月)이었다.

“그래서, 백주대낮에 길을 걷던 사람이 픽, 쓰러지더니 억, 하니 죽었다는 거여! 것도, 이게 벌써 다섯 번째라니까, 다섯 번!”
“허허,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해서야, 원.”

사내들이 목청을 드높였다. 흰 두건을 걸친 사내가 능금주(-酒)를 한 모금 들이키며 입술을 훔쳤다. 여인들의 웃음소리, 가희(歌姬)가 뜯는 현의 곡조와 취한 사내들의 주정이 한 데 엉켜 객잔은 통 부산스러웠다. 흰 두건의 사내는 현재 금원 근방에서 요즘 가장 큰 소란이라는 살인사건에 대해 장황설을 늘어놓던 참이었다. 사내가 다시 눈을 좁히며 말했다. 목소리가 잔뜩 낮았다.

“그런데 내 고을 관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일세. 그 시체가 그리 희한하다는구먼. 겉으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데 시신의 혀를 뒤집었더니 화상을 입었더라는 거여. 목구멍 안쪽이 죄다 녹았다 하지 뭔가. 꼭 열상(熱傷)을 입은 것처럼!”
“어디 무서워서 맘대로 외출이나 하겠는가? 사내건 아녀자건 분간이 없다면서?”
“거, 왜, 모퉁이 포목점의 장씨도 당했지 않은가. 직전까지 우씨네랑 여기, 그래, 여기에서 곡주 한 잔 거하게 걸치고 길을 나섰다는데, 허허…”
“이러니 현무교가 그리 위세를 떨치는 게지. 세상살이 무서워 살 수가 있나. 벌써 이 고을에만 현무교 사당이 셋이네, 셋.”

사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얼굴이 불콰하던 수염의 사내가 쯧 혀를 찼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백호각은 뭘 하고 있다던가? 이 고을이 아무리 변방이긴 하나 그래도 엄연히 서방부 백호각의 엄호에 있는 곳이건만, 쯧쯧.”
“백호각은 그냥 두게. 12년 전에 그런 큰 변고를 당한 것치고는 상당히 회복세가 빠르지 않은가. 멸문(滅門)을 당할 뻔 하였는데.”
“그것도 선대의 아우가 바깥에서 자금을 조달해준 덕분이지. 그 왜, 진작부터 분가해서 대륙 전역을 돌며 무역을 한다던 그 백훈이란 공자가 있지 않은가.”
“천축국도 서방이요, 천지의 덕이 모이는 곳이 서방이고 범산이라 하더니 다 가문의 덕망 아니겠는가. 이만큼 일으켜 세운 것도 가히 기적이네.”

탁자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사내들이 너도 나도 나서며 한 마디씩을 거들었다. 수염 난 사내는 이 분위기가 영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하얗게 샌 수염만큼 숱이 두터운 눈썹을 울컥 구기면서 사내는 능금주 한 잔을 거푸 들이켰다. 저만치에서는 가희들이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했고, 사내들이 어울려 목청을 높이며 합창을 했다. 그래도 수염 난 사내가 쥔 불만의 고삐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래봐야 가문의 신기도 부릴 수 없는 문파가 무슨… 보패 없는 호각은 12년 전에 멸족한 것과 다름이 없네. 지금 각주는 금강불괴를 쓸 수가 없다면서? 아무리 범산이 천의 요새고 백호의 가호가 있다고 해도 그리 해서 오래 살기는 하겠는가. 경연에 나갔다 까딱 상대를 잘못 만나면 요절하기 딱 좋은 형국이네.”
“허허, 이 사람. 자네가 백호 각주의 무예를 직접 본 일이 없다는 건 확실하구먼. 금강불괴를 잃고도 이 강호에서 12년간 각주로 건재하다는 것이 무공의 반증 아니겠나.”
“게다가 미공자야. 뭐, 자네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난다 한들 그 기분을 알겠는가마는.”

수염 난 사내가 얼굴을 붉혔다. 뭐야? 당장 멱살을 잡을 듯 자리를 박차는 모습에 곁에 앉은 하얀 두건의 사내가 슬금슬금 웃으며 자리를 무마시켰다. 자자, 이게 다 괜한 소리를 꺼낸 내 탓이게, 자네 술이나 한 잔 받게. 넉살 좋게 권해오는 잔에 수염 난 사내가 볼을 씰룩거리다 이내 빈 잔을 불쑥 내밀었다. 잔이 오가고, 다시 한 번 건배가 돌았다. 화제는 금세 다른 편을 향해 머리를 틀었다. 사는 이야기, 근래 금원을 찾는 여행객들과 능금주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그 탓인지 사내들은 줄곧 자신들을 힐끗 바라보고 있던 뒤편 탁자의 객(客)들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 했다.
보패 없는 백호각 따위, 잘난 건 또 뭐냐! 수염 난 사내가 농처럼 떠들었다. 사내를 등지고 있던 객(客) 중 남자가 뒤편을 흘끔거렸다. 행로(行路)가 길었던 모양인지 남자는 방한을 대비한 두터운 회색 두건을 머리까지 덮어 쓴 채였다. 그 탓인지 남자의 얼굴은 채 알기 어려웠으나 두건 그림자 밑으로 반쯤 드러난 이목구비는 빚은 듯이 준수하며 예사로운 풍모가 아니었다. 두건 그림자 밑으로 달을 닮은 노란 눈길이 슥 뒤를 보았다, 이내 말았다. 남자와 비슷한 차림새로 나란히 앉아 있던 여자 객(客)이 옅게 웃었다. 여자의 늘씬한 등에는 제 키만큼 기다란 검이 한 자루 메여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마치 남매인 듯 했다. 다른 것은 체구, 검(劍)을 매고 있는 위치, 더불어 눈동자의 색 뿐이었다.
남자와 닮은, 허나 색이 다른 자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신경쓰지마. 두건 밑에 놓여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다. 여자가 능금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객잔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훈 숙부도 말씀하셨잖아. 보패는 그냥 상징일 뿐이야. 범들이 우릴 떠나지도 않았으니 파괴되지도 않았어. 그럼 살다 보면 언젠가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이 넌 속 편해서 참 좋겠다. 그게 되냐? 난 각주라고.”
“그래, 금강불괴를 쓸 수 없어도 강호에선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용맹한 우리 각주님.”
“……”
“기분 좀 나아졌지? 그럼 술은 이제 적당히 마셔요. 검은 잘 써도 술은 못하는 우리 건이.”

애초에 놀러온 것도 아니잖아. 점원이 건네준 술병의 마개를 열며 여자가, 백은이 동생을 향해 눈을 흘겼다. 남자가, 백건이 미간을 좁혔다. 알아, 안다고. 씨근거리면서도 손끝은 좀처럼 채워진 잔을 놓지 못 했다. 그러다 노란 눈이 울컥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또 오른쪽 눈이야? 백은의 말에 백건은 제 눈가를 슥 문지르며 담담히 말했다. 어.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문지르면서 백건은 무심히 툭 입을 열었다. 그 역시도 익숙했다.

“숙부한테 볼 일 끝났으면 집에나 가면 되지, 여긴 왜 오냐고.”
“겨울이니까? 곧 죽어도 바깥일은 싫다는 우리 각주님도 능금주는 한 잔 해야지.”
“하하하. …속을 것 같지, 내가.”

들켰어? 답하며 백은이 장난처럼 웃었다. 모를 수가 있나. 이곳은 서방부에 속해있기는 하나 변방이다. 지리적으로도 남방부에 훨씬 가깝고, 남방부의 이린성이 대륙에서 으뜸으로 꼽힐만큼 번성했던 시절에 이 도시는 항상 주작단의 사람들도 북적거렸었다. 대륙의 가장 깊은 서쪽에서 살고 있다는 호각의 사람들이, 그것도 각주와 각주의 보좌라는 사람들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올 일은 백건이 장담컨대 거의 없을 것이다. 능금주를 맛 봐야 한다면 어차피 사람을 쓰면 될 일이다. 암만 호각의 위세가 전성기만큼은 아니라고는 하나 이런 술 하나 맛보지 못할 형편은 아니었다. 숙부의 금전적인 지원 덕분에 전소(全燒)되었던 건물은 거의 재건되었고, 살아남은 일족들과 호각의 정신을 함께 끌어갈 문파의 사람들은 백호의 각주 남매가 모자람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헌데 동행 하나 없이 여기에 와 있다니, 그것도 금원이라니.
꿍꿍이가 있는데. 백건은 생각했다. 기왕 나선 김에 금원에 들렀다 가자고 권했던 것도 제 누이인 백은이었다. 대체 뭘 꾸미는 거야. 백건의 말에 백은이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아우처럼 기다란 속눈썹을 나비처럼 살랑거리며 백은은 말했다. 금원의 능금은 대륙에서도 으뜸이니까.

“찾아올 가치가 있어. 그중에서도 능금주는 단연 최고지. 현무교에서도, 청룡사에서도 제례 때마다 능금주를 사용해. 능금주는 지금이 출하하기엔 가장 적절한 시기야. 지난 가을에 빚은 능금주가 겨울의 찬 기운을 만나 천천히 달아지는 때거든.”
“허, 누이 너는 모르는 것도 없다.”
“칭찬이지?”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있지. 청룡의 절기는 봄이니까. 청룡사에서는 이맘때마다 금원에 사람을 보내거든.”

두건의 그림자 밑에서 노란 눈이 돌연 둥그렇게 열렸다. 우뚝 굳은 제 아우를 향해 백은이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어.”
“…누굴.”
“청룡사의 연락책.”

여자래, 굉장히 예쁘고 어리다더라. 사족 같은 말을 덧붙이며 백은은 웃었다. 저편에서 술에 취한 사내들이 멱살을 잡으며 실랑이를 벌였다. 넘어지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팔을 걷어붙인 주인장이 달려 나오는 동안에도 백건은 여전히 제 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능금주 한 모금을 더 홀짝이며 백은은 말했다. 이번에는 좀전 보다 더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청룡사에서 현무의 보패를 찾았대.”
“……”
“이제 슬슬 되갚아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노란 눈이 크게 열렸다. 때를 맞춰 술에 취한 거구가 우당탕 탁자 위로 쓰러졌다. 검을 뽑으며 사내는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소란을 쳐다보는 법도 없이 백건은 가만히 입구 쪽을 향해 눈을 들었다. 장막이 두텁게 쳐진 창틀 너머로 바람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금원의 겨울 밤이었다.





*    *    *


눈보라가 덜컹덜컹 창틀을 흔들었다. 단단히 닫은 창틈을 비집은 칼바람을 따라 등불의 붉은 빛이, 붉은 장막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방은 이미 한 차례 소란이 지나간 듯 어지러웠다. 탁자 위에 누군가의 소지품인 듯한 부채와 여인의 머리끈 같은 것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는 침상까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침상 위에 올라 있던 소녀가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뻗으며 침상의 붉은 장막을 걷어냈다. 걸친 것이라곤 얇은 적삼뿐이었다. 침상 곁 바닥을 더듬으며 소녀는 제 겉옷부터 집어 올렸다. 바깥에서 들린 소리에 소녀는 잠깐 문 쪽을 건너보다, 이내 말았다. 금원 객잔의 소란은 사흘 밤을 내리 들어도 어쩐지 잘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싸움은 소녀가 묵고 있는 객잔의 2층까지 올라오는 법은 없었다. 마음을 놓으며 소녀는 옷자락을 추스르며 침상의 안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제 곁에 함께 누워 있던 남자에게 가만히 몸을 붙였다. 돌아앉은 남자의 등은 곧고 늘씬했다. 허리까지 떨어지는 붉은 머리칼의 틈새로 드러나 있던 남자의 등에는 새의 형상과 소녀는 채 읽지 못할 낯선 글자들이 붉게 새겨져 있었다. 소녀가 천천히 손을 뻗으며 남자의 등을 가만히 더듬었다. 남자가 잠시 돌아보다, 이내 고요히 웃었다. 소녀는 좀체 손을 떼지 못 했다. 마치 꽃인 듯 했다. 불인 듯 곱고 어여쁜 문신이었다. 남자의 붉은 머리칼과 마른 등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소녀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왔다.

“나으리께선 어찌 이리 고운 것을 등에 업고 계신가요? 꽃 같습니다. 이것은 새인가요?”
“그렇단다. 마음에 드느냐?”
“예, 정말로… 너무 곱습니다. 너무 예뻐요.”

남자가 소녀를 돌아보았다. 색점이 별처럼 박혀있던 얇은 입매가 부드럽게 웃었다. 몸의 선만큼, 그 몸에 그림처럼 펼쳐진 새와 문자의 생김만큼 유려한 미소였다. 좀 더 살펴보련. 말하며, 남자는 스스로 손을 뻗어 길게 드리워져 있던 붉은 머리칼을 찬찬히 걷어냈다. 소녀가 남자의 마른 견갑골(肩胛骨)을 따라 휘감겨 있던 새의 날개를 손끝으로 가만히 더듬었다. 한쪽뿐인 날개는 지금에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이 있었다. 허리를 따라 떨어지던 크고 작은 붉은 문자들은 마치 새의 깃털인 듯 싶었다.
소녀가 날개를 따라 남자의 유려한 옆선을 더듬으며, 갈빗대를 스르륵 쓸었다. 새의 남은 몸통은 남자의 마른 가슴팍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 맘에 드느냐. 남자의 말에 소녀가 홀린 듯 고갯짓을 했다.

“소녀도 이런 고운 새를 한 마리 가지고 싶습니다. 어찌 이리 고울까요…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주작이란다. 재(灰)로 죽어 불꽃으로 다시 태어나지.”
“허면 정말로 꽃이로군요. 헌데 나으리께선 어찌 이런 것을 몸에 지니고 계십니까? 글만 아는 서생이라 하시면서.”
“서생이라 하여 고운 것을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니.”

남자가 소녀의 손을 제 쪽으로 끌며 찬찬히 돌아앉았다. 소녀는 순순했다. 남자가 소녀를 뚫을 뜻 빤히 쳐다보았다. 붉음이 짙어 흑색에 가까운 눈길은 한 점 끔벅이는 법도 없었다. 어찌 그리 보셔요. 소녀가 부끄러운 듯 눈길을 떨어뜨렸다. 조금 전 정사(情事)의 흔적인 듯 발갛게 달아오른 양뺨이 더욱 붉어졌다. 네가 고와서. 남자의 말에 소녀가 잔뜩 붉은 눈길을 옅게 흘겼다.

“글을 쓰신다더니 말을 어찌 이리 잘하십니까? 소녀는 문장을 짓는 분들을 보면 가슴이 떨려요. 어찌 그런 말들을 골라내실까? 주술… 그래요. 주술 같습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글줄은 나오지 않는 법이지. 네가 내게 너무 꽃 같아 그런다. 어찌 고운 것을 대하며 가만히 두고만 보겠느냐.”
“하지만 저는… 무서워요. 나으리와 동침한 것을 알면 제 윗 분이 저를 죽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쁜 생각은 지금은 하지 말자꾸나. 나쁜 마음은 다 잊고 이 안에선 달게 꿈만 꾸는 것이지. 그래. 내 너를 위해 이름을 하나 줄까?”

일렁이던 소녀의 커다란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이름요? 소녀의 말에 남자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름. 남자의 손끝이 가만히 소녀의 손등 위를 매만졌다. 마치 섬세하고 여린 꽃잎을 대하 듯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보자꾸나. 네 두 눈은 아득히 깊어 사내의 마음을 울리고, 네 입술은 여름날 작약처럼 참으로 붉어. 마음에 쇠를 두르고 철을 입힌 사내라도 네 연심을 얻고 싶어 애간장이 끓겠지.”
“나으리 어찌… 그런 말씀 감히 마셔요. 소녀는 미천합니다. 사찰의 일을 돕는 심부름꾼일 뿐인 걸요.”
“신분이 미천하고 행색이 남루하다고 빛나는 옥석(玉石)과 진주의 찬연함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란다. 보렴, 내 얼마나 네게 애가 끓는지.”

남자가 매만지던 소녀의 손에 가만히 손을 얽었다. 그 채로 몸을 붙이며, 남자는 스르륵 자신의 가슴께로 소녀의 손을 끌어왔다. 기껏 여몄던 장포의 자락이 스르륵 벌어졌다. 여름날 미풍 같은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달게 속삭였다. 들어보렴. 소녀가 좁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마른 가슴팍에 박힌 붉은 문신 위를 더듬으며 소녀는 홀린 듯 답했다. 뛰고 있어요. 색점이 박혀 있던 얇은 입매가 요요히 웃었다. 남은 손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올 때에도 소녀는 작은 새처럼 떨었다. 귀엽구나. 남자가 웃었다. 하얀 얼굴을 온통 붉히며 소녀는 우물우물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녀의 손을 포개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멀어지며 천천히 치마의 폭을 헤집었다.
소녀가 남자의 가슴팍에 손끝을 세웠다. 그래도 끝내 밀어내지는 않았다. 후에 닥칠 열락을 이미 알고 있던 탓이었다. 둔부가 달콤하게 울리던 그 감각은, 발끝부터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던 그 쾌락은 독처럼 달았었다. 소녀가 달게 떨며 목을 젖혔다. 남자가 소녀의 목덜미에 잘근 이를 세웠다. 소녀가 힘껏 눈을 짓눌러 감았다. 그 탓에 소녀는 남자의 의복 틈에서 발갛게 비져 나오던 붉은 빛을 보지 못 했다.

“나으리, 이렇게는… 소녀는, 흐읏,”
“괜찮다. 쉿, 옳지. 그래, 내 너를… 모란이라 부를까.”
“나으리는, 읏, 어찌 그리 요령이… 좋으십니까. 아, 그래도… 그리는, 읏,!”
“네가 고와 그러는 것이다. 모란은 꽃 중의, 꽃이지.”
“하, 나으리… 아아, 더… 깊이, 읏,! 녹을 것 같아요. 뜨거워요. 나으리, 아,”
“……”
“그만, 너무, 아, 나으리, 델 듯,… 델 듯 합, 아흡,!”

침상의 장막 너머에서 두 몸이 겹쳐졌다. 허리를 뒤틀며 소녀는 남자의 등을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헐겁게 틀어 올렸던 남자의 붉은 머리가 풀어지며 스르륵 떨어졌다. 비단처럼 쏟아진 긴 머리칼 아래에서 붉은 주작이, 또 촘촘하게 박혀 있던 글씨들이 찬찬히 빛을 뿜었다. 방 너머는 소란했다. 취객끼리 싸움이 붙은 것인지, 혹은 관아에서 들이닥쳐 주인과 실랑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소녀의 숨결이 점차 잘고 달게 떨었다. 황홀에 취한 듯이 소녀는 온몸을 뒤틀었다.

뜨거워,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 비명처럼 잘게 흩어지던 소녀의 눈이 일순 우뚝 열렸다. 남자가 소녀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래, 많이 뜨거울 거야.

소녀가 몸을 뒤틀며 괴롭게 호흡했다. 컥, 커헉, 막힌 숨을 흩으며 소녀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남자가 소녀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훌쩍 치마의 속을 뒤집었다. 움켜잡고 있던 허벅지를 따라 살갗을 파고든 붉은 불꽃이 소녀의 하얀 피부 위에 잎맥처럼 선명했다.
소녀는 어떤 말도, 어떤 비명도 지르지 못 했다. 이미 성대까지 덴 탓이었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소녀가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도와… 주세요, 나으리 제발, 도와주세요… 남자가 답했다. 그래. 덧붙이며 남자가 남은 손으로 소녀의 입을 힘껏 틀어막았다. 소녀가 동공을 크게 열었다. 그린 듯이 웃으며 남자는 말했다. 헌데, 살려줄 수는 없어.

“이게 내 ‘일’이라서. 하하, 미안. 청룡사의 심부름꾼이 이렇게 어여쁜 소녀일 거라곤 나도 짐작을 못 했거든.”
“……”
“가람인 잘 지내고 있어? 아, 그래. 대사가 되었겠구나. 법사일 적에 봤었는데… 벌써 10년이 넘었네. 그런데 요즘 청룡사의 법사들은 다른 문파엔 관심이 없나보구나. 공부를 좀 더 했다면 이 문신이 무엇인지 금방 알았을 텐데. 술사(術士)들의 문신이야. 술사들은 주술을 몸에 새기거든. 알았다면 네게도 도망갈 기회가 있었을지도?”
“……”
“아, 정을 통했으니 어차피 청룡사로는 돌아가지 못했겠구나.”
“……”
“편히 가렴.”

버둥거리던 소녀의 몸이 크게 떨더니, 이내 우뚝 굳었다. 그제야 남자는 펼쳤던 손을 걷어내며 잠시 합장을 했다. 남자의 가슴팍과 등에서 베어져 나오던 붉은 빛도 꿈처럼 사라졌다. 후 숨을 가다듬으며 남자는 흩어진 의복의 매무새를 정돈했다. 장포를 다시 걸쳐 입고 허리까지 흘러내린 길고 붉은 머리칼을 남자는 익숙하게 쓸어 넘겼다. 탁자에 던져놓았던 부채를 집어드는 것으로 단장은 모두 끝이 났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아무래도 큰 싸움인 모양인데. 옅게 웃으며 돌아서다 남자는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오똑 멈췄다. 그리고는 품을 뒤적여 서신 한 장을 꺼내 소녀의 시신 위에 올려두었다. 눈을 크게 뜨고 모로 누워 있는 소녀의 몸 위에 하얀 봉투가 꽃처럼 떨어졌다. 봉투에는 붉은 글씨로 이와 같은 말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야주(夜珠).

“12년만이겠구나.”

아직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남자가, 은찬이 웃었다. 들창 너머가 덜컹덜컹 세차게 흔들렸다. 눈보라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쉬이 그칠 눈은 아니라고, 은찬은 생각했다.





*    *    *


쾅, 요란한 소리가 1층의 너른 대당(大堂)을 울렸다. 우당탕 엎어진 탁자에 백건이, 또 백은이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로 엎어진 사내가 잔뜩 일그러진 눈길을 들어올렸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상을 울컥 쓰며 백건은 사내의 행색을 잠시 훑어보았다. 사내는 검고 짙은 겉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좀 전까지 저 편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던 수염 난 사내였다.
뭐야, 니미럴. 욕을 우물거리면서 일어나던 사내가 일순 백건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백건이 순간 한 발을 물러나며 뒤늦게 두건의 끝을 끌어내렸다. 먼저 물러서지 못한 게 백건의 가장 큰 실수였다. 허나 이미 늦었다. 사내가 비척비척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이야, 백호의 보검에 노란 눈이라니… 이게 누구신가. 소문의 그 백호각 각주님이시잖아?”

사내의 목소리는 컸다. 취한 탓일 것이다. 그 탓에 주변의 눈길이 일순 이 편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백호각? 각주라고? 백씨 남매라고? 아니, 각주가 이 변방까지 왜 와? 더러는 대놓고 술잔을 던졌다. 낭패다. 눈썹을 좁히며 백건은 생각을 짓씹었다. 서방부의 변방인 금원은 예로부터 지역 문파인 백호각보다 주작단에 대한 평이 더욱 좋았었다. 최근에는 근방에 살인사건도 벌어졌다 하니 여론은 더욱 험악할 것이다. 게다가 사내가 걸친 옷은 현무의 것이었다. 금원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현무의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자일 것이고, 백호와 현무는 오래 전부터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몸을 사려야 한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보다 더 중한 일이 있었다. 자리를 뜨자. 생각하며 백건은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러나 사내는 그마저도 그냥 두지 않았다. 백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내의 화살은 곁에 있던 백은을 향해 있었다.

“허, 꼴에 미인하고 함께 다니시네? 거기 이쁜 누이. 나 좀 보지? 히야, 살결 고운 거 봐라.”

사내가 느물스럽게 웃으며 물러나던 백은의 손목을 잡았다. 백은이 반사적으로 손목을 홱 떨쳤고, 그 탓에 몸을 가누지 못한 사내가 다시 한 번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사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 년이 지금 장난하나. 말을 씹으며 사내가 두건채로 백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백건의 눈이 사나워졌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향해 벼락 같이 움직이는 손을 백은이 일순 저지했다. 하지마. 백은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검 위에서 망설이는 제 동생을 향해 백은은 몇 번이고 간청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절대, 여기에서 소란을 부리면. 백건이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신이 난 듯 목청을 높였다.

“허, 산중에 처박혀서 집채도 홀랑 태워먹은 호랑이들이 뭐가 그리 잘들 났다고! 이 등신 같은 것들아. 금수 좀 부릴 줄 아는 것만 빼면 니들이 뭐가 있어, 어? 아, 그래. 호각에서는 어릴 적부터 호랑이랑 함께 큰다며? 니들 그 잘난 호랑이 새끼들 좀 보자.”
“오라버니, 술이 과하신 것 같아요. 일단 이 손은 놓고…”
“이야, 미인이 역시 말을 잘 해. 저 벙어리 같은 새끼는 말도 없는데. 쫄았냐? 쫄았지?”

백은이 슬며시 사내를 달랬고, 의기양양해진 사내는 백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다면, 적어도 12년 전이었다면 진작 저 얼굴을 뭉갰을 것이다. 허나 이젠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참아라. 몇 번이고 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백건은 힘껏 이를 악다물었다. 참아야 한다. 백은이 남자를 향해 슬며시 웃었다. 오라버니, 술이라도 같이 한 잔 하실까요? 사내가 백은을 돌아보며 흐 웃었다. 기분이 퍽 풀어진 모양이었다. 잡고 있던 머리채를 스르륵 놓아주며 사내가 백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백건이 또 한 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객잔의 2층이었다.

“여기 사람이… 여자가 죽었어요!”

백건이, 또 백은이 동시에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두 남매가 반사적으로 눈을 맞췄다. 여자. 동시에 둘은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청룡사의 심부름꾼.

“누가… 누가, 관아에 연통을…!”

객잔이 소란스러워졌다.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2층의 방문마다 훌쩍 열리며 구경을 하겠다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꾼이 주인장을 불러왔고, 주방에서 국에 넣을 고기를 토막 내고 있던 주인장이 행주로 손을 닦으며 급히 나섰다. 또 푸닥거리를 하게 생겼다며 주인장은 연신 투덜거렸다. 허나 주인장보다도 백건이 계단참을 뛰어 올라가는 속도가 갑절은 더 빨랐을 것이다. 그 모습을 수염난 사내가 그냥 두지 않았다. 분을 참지 못한 사내가 검을 뽑았다. 이 새끼가, 사람을 무시하고! 사내와 함께 나선 무리들이 우르르 검을 뽑으며 계단참으로 몰려갔다. 그 앞을 백은이 막아섰다. 사내들이 주춤 멈춰 섰다. 등에 걸고 있던 검을 잡아 뽑을 때 백건이 잠시 제 누이를 돌아봤다. 검 끝을 고쳐 세우며 백은이 말했다. 올라가, 얼른!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가서 확인해.”
“하? 누구 놀리나, 지금. 예쁜 누이는 좀 빠지시지? 어디 여인의 몸으로 감히 사내들 하는 일에 나서고 자빠…”

얼굴을 노골적으로 구기던 사내의 말이 단숨에 잘려나갔다. 아니, 수염이 잘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휘둘렀던 검을 거둬낸 자세 그대로 백은이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사내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물들이다 이내 분통을 터뜨렸다. 저 계집이 뒤지려고! 사내의 말과 함께 무리들이 검을 앞세우며 우르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객잔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인장이 뒷목을 잡으며 주저앉았다. 현무교의 사당에 대체 헌금을 몇 푼이나 해야 이 불운을 떨쳐낼 수 있을는지 감도 안 잡히는 탓이었다.
니들은 다 죽었다. 씩 웃으며 백건은 2층으로 훌쩍 뛰었다. 1층의 마루 위에서 검날이 사내들 틈을 유려하게 날아올랐다. 빽빽하게 복도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백건은 훌쩍 열려 있던 방으로 뛰어 들었다. 붉은 장막이 반쯤 둘러쳐져 있던 침상의 정 가운데에 놓여 있던 것은 열댓 남짓의 소녀였다.

차마 시신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던 사람들을 밀치고 백건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으며 백건은 소녀의 맥부터 확인했다. 소녀의 손목에는 아직 온기가 있었다. 허면 얼마 되지 않았다. 따져봐야 한 식경 전이겠지. 생각을 짓씹으며 백건은 소녀의 몸을 눈으로 바삐 훑었다. 흐트러진 의복 틈으로 허벅지와 가슴팍이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하얀 피부 위로 수상쩍은 붉은 선이 잎맥처럼 뻗어 있었다. 열상(熱傷)이었다.
노란 눈이 크게 흔들렸다. 최근 이 근방에서 벌어진 다섯 건의 살인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죄 이런 열상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그 때문은 아니었다. 백건은 이처럼 사람의 혈맥(血脈)을 태우며 속을 태워 들어가는 열상(熱傷)을 눈으로 직접 보았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범각이 불탔던 바로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에는 이와 같은 열상이 있었다. 허나 그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소녀의 시신 위에 놓여 있던 서신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서신에 새겨져 있던 단 두 글자였다.
그때였다.

“당신 갑자기 뭐야! 사람을 밀치… 어, 인마, 사과 안 해?!”

복도 쪽에서 누군가 불쾌한 듯 고함쳤다. 동시에 백건의 안에서 어떤 촉이 울렸다. 화급히 서신부터 품에 챙겨 넣고 백건은 부리나케 복도를 향해 뛰었다. 저편에서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남자가 반대편 계단을 다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너로구나. 소회를 짓씹으며 백건이 훌쩍 몸을 날렸다. 잰 걸음으로 걷던 남자가 흘끔 이쪽을 돌아보더니 날래게 사람들 틈을 비집었다. 확인사살이었다. 시신을 구경한다고 복도를 꽉 채운 사람들을 밀치고 젖혀가며 백건은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허나 사람은 너무 많았고, 체구가 작은 남자는 생각 이상으로 너무 날랬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놓치면 안 돼. 저 자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서신에 대해서, 아니, 서신에 새겨져 있던 그 야주(夜珠)라는 이름에 대해서.

오래 전에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 있었다. 그 이름을 백건은 12년동안 줄곧 쫓아왔었다. 가히 망령과도 같았다. 악몽처럼 믿기지 않던 비극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린, 설사 죽어 이 혼이 진토된다 하여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생의 유일한 존재.

그러니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백건이 습관처럼 송곳니로 입술 끝을 질근거렸다. 걸음을 좁히며 백건은 허리에 얌전히 걸려 있던 검을 뽑았다.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선 남자는 사람들 틈을 요령 좋게 비집었다. 그래도 간격은 조금씩 좁아졌다. 남은 계단을 단번에 뛰어내리며 백건은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때 하필이면 덜미를 잡혔다. 현무의 사내들이었다.

“저거 저거, 잡아!”

백은과 검을 맞대고 있던 사내가 악다구니를 썼고, 현무의 사내들이 부리나케 백건의 앞을 막고 섰다.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온 검날을 피해 성큼 물러서면서도 백건은 사내들의 등 너머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잡을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눈발이 휘날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건의 눈썹이 좁아졌다. 씨발, 놓치면 안 되는데. 허나 사내들은 좀처럼 백건을 보내줄 기색이 아니었다. 무시하자니 머리수가 적잖이 예닐곱은 되었다. 수가 없었다. 서둘러 녀석들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각에 백건이 검을 움켜잡으며 저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날을 맞받았다.
규(刲)로 찌르고 월(刖)로 벤다. 찌르며 휙 허공을 베어낸 검 끝에 걸린 사내 하나가 어깨를 움켜잡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백은이 뒤를 돌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건아! 동시에 치고 들어온 칼날이 백건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잽싸게 몸을 잡아 빼며 검날을 수평으로 움켜쥔 채로 백건이 검보(劍步)를 밟았다. 예(刈)로 베며 불(刜)로 친다. 일갈하며 파고든 검날에 정면과 측면을 노리던 사내 둘이 동시에 우당탕 나동그라졌다. 백건의 눈길이 다급하게 누이를 향해 움직였다. 열 걸음 바깥에서 백은을 둘러싼 사내들이 순식간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다시 또 다른 무리들이 백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멀어. 백건이 눈썹을 좁혔다. 누이야 호각에서도 손에 꼽는 실력자이니 이런 정도로 당하지는 않을 테다. 다만 수가 너무 많았다. 돕자니 바깥으로 달아난 사내가 또 급했다. 아, 씨발, 어쩌라고. 생각을 삼키며 백건이 검을 틀어잡았다. 막 그 편을 향해 뛰려던 찰나, 백은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오지마! 가볍게 몸을 돌리고 유려하게 검을 그으며, 백은은 우뚝 멈춘 동생에게 덧붙였다. 쫓아, 얼른, 지금!
백건이 송곳니를 질근거렸다. 어디서 각주(閣主)한테 명령이야, 누나면 다냐? 그런 소리를 씨근거리다 백건은 발길을 돌렸다. 비틀비틀 달려들던 사내 둘을 검등으로 후려치며 백건은 객주의 입구를 걷어찼다. 눈보라는 아까보다 제법 거셌다. 입구에서 말(馬)을 묶고 있던 소년이 잠시 백건을 돌아봤다. 말이 필요하세요, 나으리? 소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백건은 눈이 흩날리던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은호(隱虎)!”

하얀 눈이 흩어지던 어둠 속에서 하연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소년이 눈을 좁히다, 이내 혼비백산하며 주저앉았다. 저편에서 빠르게 달려 나온 하얀 그림자가 백건의 앞에 엎드리며 크게 포효했다. 길이가 족 잡아 10자는 될법한 하얀 몸에 까만 먹물 같은 줄무늬가 휘어 감겨 있었다. 소년이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며 벌벌 떨었다. 호, 호,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 대꾸 없이 백건은 제게 엎드린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턱을 긁었다. 하얀 호랑이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가만히 고개를 들며 고르르 울었다. 하얀 이마를 헤집어주며 백건은 그 앞에 반쯤 찢긴 서신을 내밀었다. 은호(隱虎)가 서신에 킁킁 코를 박았다. 서신의 겉봉에는 다음과 같은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야주(夜珠).

은호의 하얀 꼬리가 눈보라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백건이 씩 웃었다. 그래, 너도 반가울 거야. 제 주인과 꼭 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둥그렇게 열면서 은호는 백건을 올려보았다. 백건이 은호의 머리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운 냄새지?”
“……”
“찾아.”

은호가 대답처럼 크게 울었다. 산을 찢을 듯이 울고, 하얀 호랑이는 그대로 훌쩍 돌아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하얗게 멀어지는 제 호신수(護身獸)를 잠시 바라보다 백건은 다시 검을 고쳐 들고 뒤를 따랐다. 어둠 속에서 백호의 보검이 서늘하게 빛을 냈다. 달 한 점 보이지 않는 밤, 술시(戌時)였다.





*    *    *


하얗게 눈발이 휘날리던 밤하늘에 퍼드득 불길이 나타났다. 아니, 새였다. 불길을 닮은 커다란 새매였다.

눈보라를 헤치며 커다란 새가 천천히 하강했다. 검고 어두운 사당(社堂) 위를 한 바퀴 휘 돌던 새매는 이윽고 너른 공터에 내려앉았다. 집 한 채를 덮을만큼 커다란 새 위에서 검은 장포를 걸친 남자가 훌쩍 뛰어 내렸다. 헐겁게 덮어 썼던 두건 자락이 떨어지며 남자의 붉은 머리칼이 눈바람결에 드러났다. 습관처럼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기고 남자는, 은찬은 제 새를 돌아보았다. 수고했어, 백요(伯鷂). 말을 들은 새매가 주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동시에 찬찬히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집채만했던 붉은 새매는 오래지 않아 보통의 매와 다름없는 크기가 되었다. 짧게 울음을 울고, 새매는 퍼드득 은찬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어깨에 앉아 주인의 뺨에 얼굴을 부비다 백요는 붉은 깃털을 흔들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저 편에서 나타난 그림자 때문이었다. 발목까지 떨어지는 짙은 흑색의 장포를 걸친 사내가 은찬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오십니까, 야주(夜珠)님. 한쪽 눈이 사라진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남자가 덧붙였다.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찬이 답 대신 웃었다. 그린 듯 가볍게 웃고, 은찬은 그대로 사내를 지나쳐 사당(祠堂)으로 들어섰다. 백요가 붉은 날개를 펄럭이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사당의 통로는 좁고 깊었다. 검은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기둥마다 횃불이 요괴롭게 춤을 추었다. 붉은 금을 건널 때 백요가 끼이, 날카롭게 울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백요는 그 이상 건너오지 못 했다. 결계 탓이다. 미안, 너는 여기서부턴 들어올 수 없어. 말하며, 은찬은 제 새를 두고 남은 통로를 마저 걸었다. 검고 얇은 장막 너머로 인영(人影)이 일렁거렸다. 짧게 입술을 짓씹으며 은찬은 장막을 걷었다.

장막 안쪽에서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짙은 향내였다. 향연(香煙)이 부옇게 흩어지는 너른 방의 벽에는 거대한 현무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고, 거북의 머리 아래에 서넛이 앉기 꼭 좋은 평상이 있었다. 평상에 펼쳐진 장기판에는 짙은 흑색 장포를 걸친 사내뿐이었다. 눈의 색도, 머리칼도 입고 있던 의복과 꼭 같았다. 여밈이 깊은 장포의 틈으로 검은 뱀의 머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목까지 비져 나온 뱀의 문신을 따라 은찬은 잠시 사내의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붉은 돌이 파란 돌의 코앞까지 전진했다. 비어있는 건너편의 파란 돌을 옆 칸으로 슥 밀면서 사내가 툭 말을 던졌다. 사내의 눈길은 여전히 장기판에 향해 있었다.

“금원의 날씨는 온화해서 좋군요. 본부의 회당(灰堂)이었다면 산 것들은 이미 모두 숨을 죽였을 시기 아닙니까. 뭐, 음식이나 침소는 금원의 사당보단 회당 쪽이 마음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은찬이 주춤 했다, 이내 담담히 대답했다. 일이 생겨서. 사내가 밤의 어둠 같은 눈을 스르륵 들어 올렸다. 칠흑의 눈동자는 심연인듯 까마득히 깊었다. 사내가 소매자락을 추스르며 은찬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은찬 공자. 불린 이름에 은찬은 내색 없이 볼 안쪽을 꾹 씹었다. 아마 이름을 불린 탓이었을 것이다.

“사소한 교란(攪亂)이었을 뿐인데 퍽 힘에 부쳤나 봅니다. 세상은 현무의 사술사(四術士) 중에서도 야주(夜珠)의 위용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어찌 실수를 다 하셨을까요. 서신을 다 남기시고.”
“……”
“보기 불편한 상대라도 만난 모양입니다.”
“현우야.”

남자가, 사내가 은찬을 꿰뚫듯 올려보았다. 은찬이 프 웃었다. 그만.

“시비 걸 거라면 오늘은 좀 피해주라. 피곤하거든.”
“예, 피곤이야 하시겠지요. 호랑이에게 쫓겼는데 오죽 하겠습니까. 강호의 검객들도, 유랑을 즐기는 학자들도 그만한 호랑이에겐 재간이 없을 텐데.”
“……”
“뭐, 임무를 무사히 끝내셨으면 되었습니다.”

현우가 훌쩍 웃었다. 마치 붓을 들고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회답 없이 은찬은 빈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다시 장기판을 향해 돌아앉는 현우를 보며 은찬은 입으로만 웃었다. 할말없으면 갈게. 현우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검은 돌을 일보 전진시키며 현우는 담담히 다시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내일 저는 다시 회당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서방부에서의 일은 공자가 알아서 마무리 지으시지요. 어차피 청룡사의 연락책이 죽었으니 호각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 아. 물론 서신을 남기셨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도록 하시고. 모름지기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하는 것입니다.”
“말 하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야.”
“안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회당은 갑자기 왜. 여기에 온 지 이제 겨우 보름 지났어. 현무 보패의 흔적을 찾았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보패에 대해서는 따로 사람을 심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한 것이 회당에 도착할 예정이라서요.”

둥그런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웃음이 지워진 얼굴로 은찬이 짧게 물었다. 무슨 의미야. 현우가 담담히 다음 수를 놓았다. 파란 돌의 차례였다. 파란 돌은 검은 돌에게 사위가 막혀 있었다. 저런, 막혔군요. 덧붙이며 현우는 손끝으로 파란 돌을 장기판의 바깥으로 무심히 쳐냈다. 판에서 내쫓긴 파란 돌이 은찬의 발 앞에 굴러 떨어졌다. 무심히 현우가 말했다.

“용을 한 마리 데려올 예정입니다만.”

표정 없던 진붉은 눈이 둥그렇게 열렸다. 용이라니. 그 채로 천천히 일그러졌다. 은찬이 코끝으로 헛웃었다. 말이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저는 진지한데요.”
“현우야.”
“이제 슬슬 그 속에 삼킨 것을 토해놓을 때도 되었지요.”
“청가람이 청룡의 보패를 삼켰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믿는 거야?”

 불가능해. 은찬의 말에 현우는 담담히 회답했다. 가능합니다. 뱉으며 현우가 다시 장기판 위로 손을 뻗었다. 붉음이 짙은 눈이 옅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청가람은 용족이고 청룡사의 그냥 법사가 아니라 대사야. 여의주를 쓸 수 있는 청룡사의 대사를 구금할 수 있을 리가…”
“가둘 곳은 준비해뒀습니다. 거기까지 공자가 신경 쓸 건 없지요. 애초에 공자 삶에 진심으로 신경 쓰는 게 존재하기는 합니까? 백호를 제외하고서.”
“…일부러 이러는 거야?”
“예, 일부러 이러는 겁니다. 당신을 만난다면 호각의 그 철벽같은 사내도 마음이 흔들릴 테니까. 적어도 죽이진 못하겠지요. 몸정이라는 게 본래 그렇지 않습니까.”
“……”
“혹시 또 모르지요. 제발 나와 도망치자고 또 울면서 빌어줄지도.”

은찬이 헛웃었다. 수많은 말과 감정들을 단숨에 짓누르고 은찬은 돌아섰다. 말을 말자는 심산이었다. 허나 한 보를 떼기도 전에 우뚝 멈췄다. 바둑판이 와르르 넘어졌다. 붉은 돌과 파란 돌이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은찬이 눈을 구긴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걸음이 멈췄다. 아니, 온몸이 붙들렸다. 마치 공기가 옥죄는 것 같았다. 주변을 에워싼 공기가 소리 없이 숨통을 짓누르는 듯 했다. 은찬이 홱 현우를 노려보았다. 현우는 좀전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이 감각이 무엇인지, 누구로 인한 것인지 은찬은 알고 있었다.
놔. 대답 대신 현우는 웃었다. 벌어진 가슴팍에서 검은 안개가 미미하게 빛을 발했다. 동시에 은찬이 컥 호흡을 삼켰다. 목이 죄인 탓이었다. 에워싼 공기가 점차 힘을 주어 은찬을 죄기 시작했다.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현우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밤처럼 어두운 눈에는 표정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맘껏 풀어 드렸더니 눈에 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자꾸 입장을 잊으시면 곤란하다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제가 공자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선 공자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계실 텐데.”
“……”
“왜요. 이제 주작의 보패 같은 건 관심도 없는 모양이로군요. 허, 이래서야… 당신 여동생이 딱하고 안 됐습니다. 자신은 오빠라는 자 때문에 그 위험한 것을 지키다 구금되었는데. 공자는 참, 말이 많아요.”
“……”
“뒤는 제가 알아 할 것이니 공자는 주어진 소임이나 다 하면 됩니다.”

얌전히, 시키는대로. 말하며, 현우는 다시 장기판 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제야 은찬을 죄던 주박이 사라졌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공기의 압(壓)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은찬이 와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밭은 기침이 터졌다. 쿨럭쿨럭 한참동안 기침을 토하다 은찬은 일순 현우를 노려보았다. 장기돌을 끌며 현우는 무심히 말했다. 이만 가보시지요. 은찬이 소리 없이 일어나 돌아섰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방을 벗어날 때 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한 투였다.
그러고보니.

“그때, 당신이 당신 벗이란 자의 부모와 친지들을 전부 죽이고 범각을 불태웠던 그날, 그날 말입니다.”

은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허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장기돌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돌을 끌고 내려놓으며 현우는 말했다.

“정말로 잃어버린 겁니까?”
“……”
“백호의 보패.”
“어, 잃어버렸어.”
“……”
“직접 봤잖아.”
“그러게요.”
“……”
“가보십시오.”

그뿐이었다. 다시 한 번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은찬은 인사 없이 복도를 걸었다. 결계를 넘어서자 맴을 돌던 붉은 새가 잽싸게 은찬의 어깨 위에 앉았다. 깃을 부벼오는 작은 얼굴의 턱밑을 가만히 긁어주며 은찬은 문을 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저편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이제 곧 아침이었다.





*    *    *


눈처럼 하얀 여인이 눈보라 속을 내달렸다. 서너 걸음 앞에서는 눈처럼 하얀 호랑이가 날렵하게 좁은 숲길을 돌진했다. 숲은 퍽 깊었다. 길조차도 흐린 숲을 한참이나 달리다 너른 공터가 나올 무렵에야 호랑이는 멈춰 섰다. 공터의 안쪽에는 먼저 도착한 이가 있었다. 하얀 호랑이가, 은호가 하늘 너머를 쳐다보며 웅크려 앉았다. 곁에 서 있던 자신의 아우 역시 같은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둘을 건너다보며 백은이 자신의 호신수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수고했어, 호련(虎連). 호련이 그르르 울며 주인에게 화답했다. 그제야 공터 안쪽으로 재게 걸으며 백은이 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건아! 허나 백건은 돌아보지 않았다.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 살인자는?”

곁에 다가 선 백은이 거푸 물었다. 여전히 눈발이 흩어지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보며 백건이 담담히 말했다. 놓쳤어. 이어 백건이 제 입술을 꽉 짓씹었다. 백은이 눈길을 구겼다. 영문을 통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적어도 흔적은 잡았을 거 아냐. 은호는 호각의 호신수들 중에서도 추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녀석이야. 네 무공이 이 아일 그렇게 키웠고. 그런데 갑자기 놓쳤다니, 은호는 왜 또 여기 우뚝 굳어 있…”

백은의 말이 우뚝 멈췄다. 그제야 제 아우와 은호의 발치 아래에 떨어져 있던 것을 보았던 탓이었다. 하얀 눈발 위에 붉은 깃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바람결에도 날아가지 않은 붉은 깃털에서 일순 불길이 치솟았다. 붉게 타오르며, 깃털은 이내 재 한 줌 없이 사라졌다. 붉은 깃털. 백은의 눈길이 일순 서늘해졌다.
은찬이구나. 백은의 말에 백건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마.

“뭐, 세상천지에 이런 희한한 새를 부리는 녀석이 또 있다면야 얘기가 다르겠지만.”
“괜찮아?”
“뭐가.”
“네 기분은 괜찮냐고.”
“……”
“건아.”
“어, 안 괜찮아. 기분이 존나 더럽거든.”

12년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 날이 없었다. 어디엘 가더라도 네 흔적만 홀린 듯이 좇았었다. 행여 머리칼이 붉은 치라도 보면 먼 발치에서도 달려가 어깨부터 붙잡았었다. 매일을 찾았고, 매일을 이미 죽었기만 간절히 바랐었다. 너는 죽었어야 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럼, 그건, 정말로 공정하지 못 하니까.
헌데 살았다. 너는 아직 살아 있고, 12년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눈앞에 나타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무얼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명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백건은 후련했다. 다행이었다. 네가 살아있어서. 너를 아직, 내가 아닌 다른 누가 죽인 것이 아니어서.

“수가 없네.”

찾는 수밖에는. 생각을 짓씹으면서 백건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 채로 담담히 제 누이를 불렀다. 누나.

“일정을 조정하자.”
“너 설마… 찾으러 가겠다는 거야? 물론 은찬인 아직 백호각에선 수배 된 신분이기는 해.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던 애였다면 지난 12년동안 그렇게 흔적도 없었을 리가…”
“어, 근데 이번엔 다르지. 찾아오라잖아.”
“……”
“그럼 찾아드려야지.”

노란 눈이 씨익 웃었다. 너른 공터에 바람이 불었다. 눈발은 이제 제법 옅었다. 조금씩 가늘어지는 눈 속에서 백건은 가만히 눈길을 들어 올렸다. 하늘 저편에서 여명이 푸르게 밀려왔다. 이제 곧 해가 뜨겠지. 생각하며 백건은 아득히 눈을 감았다. 다시 또 오른눈이 쑤셔왔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적어도 너만큼은, 네가 도려낸 그 가슴의 자리만큼은.
일천삼백사십이년, 백호각의 각주인 백건이 꼭 30세가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계속)






다 써보니 대체 이 1편 왜 이렇게 긴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은 일단 플롯을 다 짜보니 최소 15편이라 제가 이후 연재를 하는 데에 아주아주 큰 맘을 먹어야 할 듯 하여(..) 우선 1편을 거대하게(?) 질러 보았습니다ㅠㅠㅠㅠㅠ.... 흑흑흑흑 이것이 다 존잘님께서 뽕 채워주신 덕분이라며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2편... 2편 나올 수 있을까요...... 2편을 나는 쓸 수 있을까..... 과연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일까..... ㅠㅠㅠㅠ흑흑 ㅠㅠㅠ 우선은 1편을 다 썼다는 데에 의의를 두겠습니다ㅠㅠㅠㅠㅠ(?)

일단 1편을 썼으니 저는 힘내서 다시 클린케이스를 완결 내러.... 2편은 과연 나올 수 있을까요22222...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몇 가지 소소한 이야기.


+ 작중에서 백호각에서 부리는 호랑이들의 이름엔 모두 범 호 자가 들어갑니다. 암컷일 경우엔 앞(호련), 수컷일 경우엔 뒤(은호).

+ 백건이 쓰는 검법의 이름은 전부 칼 도(刂)를 부수로 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안 나왔지만) 은찬이 주술 이름은 전부 불 화(火)가 부수인 한자들.


+ 보다 자세한 상황 설정은 이쪽에서
http://rukaruka.kr/200416


+ 나름 이런 지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1편의 주된 배경인 금원은 아마 서남부의 나무(?) 그려진 저 곳.




?

둥굴레차! BBS

네이버 웹툰 둥굴레차! 관련 2차창작 글이 등록되는 공간입니다. 이용 전 공지글 정독 부탁드립니다X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공지 □ 썰說 백건은찬 연대기 (~67화) 2015.07.31
공지 □ 공지 ■■ 둥차! 전용 BBS입니다 (이용방법) 2014.06.04
191 ■ 완결 큰 이리 《달狚》 2 2017.10.09
190 ■ 완결 청춘언더그라운드 / Side.B (FULL) 4 2017.03.30
189 ■ 단편 9th 2 2016.10.09
188 ■ 연재 고전으로 백건은찬 #외전 2 2016.06.15
187 ■ 단편 매너 있는 우정에 대하여 2 2016.03.04
186 ■ 단편 BARAKA 2016.03.02
185 ■ 단편 2 2016.02.23
184 ■ 단편 롤플레잉 2016.02.22
183 ■ 단편 Grade 8 1 2016.02.02
182 ■ 단편 처음이라서 1 2016.02.01
» ■ 연재 이린도호기以燐屠虎記 ~ 01 1 2016.01.30
180 ■ 연재 이린도호기以燐屠虎記 ~티져, 설정 2016.01.25
179 ■ 단편 화서華胥 2016.01.18
178 ■ 단편 건찬이_소꿉친구_작살내는_이야기.short 2 2016.01.13
177 ■ 연재 A Clean Case # 05 2016.01.1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 Nex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