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의다락, 둥굴레차! BBS



* 또 틈 났을 때 부지런히 이어보는 5편
* 역시 천재 프로파일러 백건 x 연쇄살인범 주은찬으로 건찬합니다


BGM / Komatsu Ryota <Libertango>


http://youtu.be/Vt-_xrmSX10




A Clean Case

@ruka_tea







~ 05 ~







아이가 눈을 든다. 잔뜩 웅크려 앉은 아이의 뺨이, 소매 틈을 비집고 나온 손목 언저리가 붉거나 검다. 엄마가 손을 치켜든다. 아이가 질끈 눈을 감는다. 철썩 소리가 울릴 때 아이의 붉은 머리칼이 꽃처럼 춤을 춘다. 아. 꿈 너머에서 남자는, 은찬은 생각한다. 꿈이다.

엄마는 자주 화가 나 있었다. 아빠가 집을 자주 비웠던 열 살 무렵부터 그랬을 것이다. 단단히 걸어 잠근 어린 여동생의 방문에 기대 선 채로 아이는 종종 화난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다. 양말을 똑바로 벗지 않아서, 장난감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서, 죄송하다는 말을 만족스럽게 하지 않아서, 냉장고의 문을 똑바로 닫지 않아서, 다 씻은 세면대를 정리하지 않아서 엄마는 아이를 때렸다. 여동생이 울어서, 엄마가 아끼던 귀걸이가 보이지 않아서 맞은 적도 있었다. 네가 잘못한 거야, 다 네가 잘못해서 엄마가 때리는 거야.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그날도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의 뺨을 후려치면 아이는 잠자코 주저앉았다. 동생의 문앞에 기댄 채로 아이는 소리 없이 숫자를 헤아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정도뿐이었다. 얼른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 그때까지 얌전히 버티고 견디는 것. 아이는 울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었다. 외려 우는 건 엄마였다. 제 아들의 머리채를 움켜쥐면서, 동그랗게 웅크린 등을 걷어차면서 엄마는 목이 쉬도록 울었다. 엄마의 매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금세 지쳤고, 엄마는 소파나 침대에 쓰려 죽은 듯이 잠들었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엄마는 저녁을 했다. 그런 날이면 메뉴는 언제나 꽃게탕이었다. 유난히 두툼한 꽃게의 살을 헤집으면서 아이는 이젠 이 자리에 없는 아빠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빠가 너무 미웠다.
아빠는 종종 사라졌다. 점점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어느 틈엔가 몇 달 씩 보이지 않게 됐다.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가 아무리 목이 쉬어라 불러도, 햇님과 달님에게 불러봐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아이와 엄마를 버렸다고 했다. 항상 수더분한 얼굴로 아이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던 아빠는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변해버렸다. 당직과 출장이 잦아졌고,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술을 자주 마셨다. 엄마와는 언성을 높여 싸웠다. 아빠가 문을 걷어차고 집을 나서면 엄마는 밤이 새도록 목을 놓으며 울었다. 그 바람에 자다 깬 여동생이 울기 시작하면 아이는 동생의 입을 고사리손으로 가만히 틀어막았다. 쉿, 엄마가 많이 화나셨어, 조용히 하자. 아이는 동생과 함께 잠자코 숨을 죽였다. 숨을 죽여도, 눈치를 보아도 엄마는 늘 방문을 열었다. 울며 엄마는 늘 아이를 끌어냈다. 여동생이 엉엉 울었다. 엄마는 아이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비명처럼 꾸중을 했다. 너 때문에, 또, 은지 울잖아.
엄마는 모두 아이의 탓이라고 했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것도, 동생이 우는 것도 모두 아이가 잘못한 일이었다. 아이는 늘 반성했다. 엄마 말은 늘 옳았다. 맞아. 내가 혼나는 것도,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은지가 우는 것도 다 내 탓이야. 한 번도 아니라고 대든 적이 없었다. 울며 대들기에 아이는 너무나 엄마를 사랑했다.
그래도 엄마, 한 번 정도는 사랑한다고 직접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가 웃었다. 엄마는 아이가 좀 더 어른스러운 아들이기를 늘 바랐다. 개점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백화점에서도 엄마는 아이의 손을 한 번도 잡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종종 걸음으로 엄마를 좇기 바빴다. 그래도 엄마는 그날 기분이 좋았다. 물건을 많이 샀고, 사은품도 많이 받았다. 철판볶음밥 집을 나올 때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아이는 엄마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사라지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한 입도 먹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백화점에는 정말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 아이를 등 뒤에서 툭 밀쳤고, 그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엄마의 새 모직 코트 위로 떨어졌다. 엄마가 사납게 아이를 돌아볼 때 아이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혼날 거야. 또 맞을 거야. 그리고 또 미움 받을 거야. 엄마가 아이의 어깨를 잡아채며 소리를 죽여 다그쳤다. 차에 내려가 있어. 너 오늘, 아주, 죽을 줄 알아.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이의 앞에 스윽 나타난, 아이 또래의 소년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년은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당황한 아이에게 소년은 말했다. 멍청아, 너 오늘 나랑 놀기로 했잖아. 아이의 손을 움켜잡으면서 낯선 소년은 엄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엄마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넌 누구니. 소년이 노란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저, 얘 친구요.
꿈속의 아이가 소년을 한참 쳐다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소년을 향해 아이가 우물거렸다.


“…양.”


진붉은 눈이 스르륵 열렸다. 남자가, 은찬이 누운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창 너머는 이미 훤했다. 많이 잤다. 은찬이 그제야 주춤주춤 자리를 정돈하며 침대를 빠져 나왔다. 찌뿌드드한 팔과 허리를 천천히 풀면서 은찬은 베드 테이블에 펼쳐져 있던 노트북부터 정리했다. 아침이었다.
빈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을 때 천칭 모양의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잔을 싱크대에 넣고 은찬은 커튼을 모두 열었다. 냉장고를 열어 자몽주스를 한 잔 마셨고, 반팔에 트레이닝팬츠 뿐이던 몸에 패딩부터 걸쳐 입은 후에 뜰로 나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대문 밖으로 나가 신문을 수습하고 우체통을 열었다. 우체통에서 상속세 고지서와 함께 두툼한, 빨간 봉투를 끄집어내고 대문을 닫을 때 은찬은 문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널빤지를 여러 장 덧대 하얗게 색을 입힌 대문의 바깥에 보기 흉한 발톱 자국이 군데군데 그어져 있었다. 또야. 은찬이 한숨을 쉬었다. 옆집에서 키우는 세인트 버나드는 이 문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페인트가 남아 있었나. 우편물과 신문을 챙겨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은찬은 거듭 생각했다. 없었던 것 같은데. 챙겨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은찬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대기음은 오래지 않아 끊어졌다. 빨간 봉투의 봉합을 열면서 은찬은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교수님.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죄송해요. 이 시간에 항상 클라이언트랑 미팅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오늘은 괜찮으세요? 다행이다. 방해했을까봐 걱정했어요.”


핸드폰을 잡지 않은 오른손이 봉투 속을 더듬으며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열 장 남짓의 사진이었다. 사진들을 찬찬히 펼치면서 은찬은 프 웃었다. 건너편에서 상대가 농담이라도 건넨 모양이었다.


“교수님은 늘 여유가 넘치시더라. 부러워요. 그냥, 그런 거요. 어른의 여유? 하하… 아. 딴 게 아니구요. 옆집에서 또 저희 집 대문을 긁어서… 네, 그때 그 세인트 버나드요. 직접 칠해보려고 하니까 페인트도 없고, 제가 오늘 작업 때문에 집을 비울 예정이라서… 점심 약속 있으세요? 아쉽다. 아, 그때 그… 조카분.”


둥그런 눈매에서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내 웃었다. 마른 손끝으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펼쳐놓으면서 은찬은 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구요.


“그때도 저녁 약속 미뤄지셨다고 하셨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요즘 제일 바쁜 사람이 그 조카분이실 텐데. 하하, 그러게요. 설명만 들으면 진짜 연예인 같다. 네, 저도 TV에서 봤어요. 잘 생겼던데… 하긴, 은이 누나도 미인이잖아. 누나는 요즘도 바쁘죠? …그러게요. 대문은 어떡하지. 정 그러시면 아는 업체를… 어. 정말요? 직접 해주셔도 돼요? 약속은… 아.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그 조카분한테 밥 사야겠다, 하하…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감사해요, 백교수님. 은찬이 말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남자는 기분 좋게 웃었다. 점심 쯤 들르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오래지 않아 끊어졌다.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은찬은 손끝으로 가만히 떠밀었다. 프 웃으며 은찬은 펼쳐진 사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열 장 전부 괜찮네. 은찬이 솔직하게 소회했다. 앞서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사진은 전부 은찬의 앨범 속에 정돈될 것이다. 은찬은 이미 똑같은 앨범을 7권정도 가지고 있었다. 오늘만큼 사진이 전부 맘에 드는 때는 잘 없기는 하지만.
사진은 전부 제각각의 장소에서 찍혀 있었다. 하지만 찍혀 있는 인물은 모두 같았다. 7권의 앨범 속에 이미 오래도록 보관되어 왔던 얼굴을 향해 은찬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양. 아니.


“…좋은 아침이야, 백건.”


사진 속의 백건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양의 비극> 3권이었다.






*    *    *


사진을 싫어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에 찍히기 위해 다른 사람 앞에서 표정과 행동을 꾸며내야 한다는 사실이 백건은 늘 껄끄러웠다. 핸드폰에는 셀카 한 장 없었고, 인터뷰가 잡힐 때면 사진기자가 동행을 하는지에 대한 여부부터 확인했다. 물론 기자들은 젊고 유능하며 동시에 비주얼까지 완벽한 이 프로파일러를 자신들만 감상하며 감탄하지 않았다. 사진은 절대로 찍지 않겠다는 기자들치고 사진기자가 없던 일이 없었고, 그 탓에 백건은 유사의학 신봉자만큼이나 기자들을 불신하게 됐다. 자신이 잘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의 이 잘난 외모를 허락 없이 멋대로 남기는 것은 백건에게 몹시 무례하며 불편한 행동이었다. 때문에 백건은 기자회견을 싫어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책임자도 아닌 사건의 기자회견이라면 특히나 더욱.
오늘 아침, 기자들에게 백건의 등을 떠밀었던 것은 청장이었다. 국민들은 나나 본부장보다 백교수님 말을 보다 더 신뢰할 것이라며 비행기를 살살 태우더니 회견장 입구에서 설명도 없이 등부터 냅다 떠밀었다. 졸지에 카메라 화면 속에 들어온 백건의 모습에 회견장은 적잖이 술렁거렸다. 울며 겨자먹기로 단상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원고를 읽는동안 수십 대의 카메라가 백건의 모습을 전국각지에 생중계했고, 국민들은 미간에 개울 하나는 파일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던 천재 프로파일러의 얼굴을 감상하며 아침을 먹었다. 이제까지의 주된 수사 내용에 대해서 건조하게 낭독을 끝마친 뒤 백건은 자신을 부르는 기자들을 매몰차게 외면하고 회견장을 떠났다. 당연히 기분이 좋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백건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비단 기자회견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경찰청 특별본부 취조실, 앞에서 다리 꼬고 띠껍게 앉아 있는 갈색 머리 삐죽이, 그리고 때마침 걸려온 삼촌의 전화였다.


“이 씨발, 왜, 또 갑자기 못 오는데.”


안경 속에서 노란 눈이 있는 힘껏 꿈틀 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백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주 앉아 있던 선홍색 눈이 잠시 백건을 휙 쳐다봤다 픽 코웃음을 쳤다. 전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백건에게 허허롭게 웃었다. 정말이지 때려주고 싶은 목소리였다.


[말했잖니, 조카야. 너희 삼촌이 공사다망하셔서 오늘 어떻게 좀… 그렇게 됐네? 하하. 삐치고 서운해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삐치기는 개뿔. 와, 누구는 야박하다고 하도 갈궈서 오늘 겨우 시간 냈는데.”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 꼭 직접 봐줘야 할 데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집수리를 왜 댁이 직접 하냐고. 교수씩이나 되는 주제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백건이 입술 끝을 꽉 짓씹었다. 좁아진 미간만큼이나 기분 더럽다는 얼굴이었다. 마주 앉아 있던 소년이 의자를 드르륵 끌어 당겼다. 노란 눈이 반사적으로 홱 노려봤고, 소년이 대충 손을 흔들었다. 미안요. 백건이 눈을 구겼다. 저 새끼나, 이 새끼나. 생각하며 백건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런 말 같잖은 통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됐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해봐라. 만나주나.”
[인마. 말을 또 그렇게… 너 설마 삐쳤나? 서운한 거 아니지?]
“아, 됐어. 끊어. 바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백건은 액정의 숨통을 끊었다. 끊어진 전화는 대충 테이블 한 쪽으로 던져 놓았다. 다시 앞을 쳐다보면서 백건이 버릇처럼 눈을 좁혔다. 뭐요. 갈색 머리 소년이 소리 없이 버끔거렸다. 백건이 펼쳐져 있던 진술서를 잠깐 흘깃했다, 다시 눈을 들었다. 텅 비어 있는 진술서에는 소년의 이름과 간단한 부연 설명이 따박따박 박혀 있었다. 청가람, 만 15세, 피해자와의 관계 : 子
말해. 백건이 등받이에 기대며 툭 말을 던졌다. 가람이 코끝으로 팩 웃었다. 선홍색 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쪽도 별로 기분이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 그러니까 숨기는 거 없다니까요?”
“어, 있는 거 다 알거든. 말해.”
“경찰들은 원래 다 아저씨처럼 싸가지가 없어요?”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이렇게 잘 생긴 아저씨 봤냐? 이 삐죽이가.”


가람이 헛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 하면 양심 같은 거 안 찔려요? 되돌아온 말에 백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애들이 싫다. 특히나 이런 애새끼는 더더욱 싫다. 괜히 정공법을 선택했다. 생각을 삼키며 백건은 잠시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되씹었다. 나는 어른이다, 어른인 내가 자비롭게 인내하자. 그리고 노란 눈이 다시 가람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이번엔 아까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었다. 백건으로서는 최대의 친절이었다.


“아버지 그렇게 되셔서 힘들고 그러는 것도 다 알고, 너한테 뭐라고 캐묻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랑 사이 안 좋은 거야 전 세계 15세 청소년이면 다 그런 거지. 싸우고 대드는 게 뭐 대수라고.”
“근데요.”
“피해자 청송…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살해 되던 날 아침에도 대판 싸웠다던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내가 아버지를 홧김에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이 씨발.”
“어, 물론 너는 범인이 아니지. 내가 보는 이 사건의 범인은 너처럼 멍청하진 않거든.”


울컥 일그러지던 선홍색 눈이 순간 둥그렇게 열렸다. 그리고 이내 씩씩 거리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누가 멍청하다는 거예요!? 꽥 터지는 목소리에 백건은 익숙하게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이 소리만 벌써 7번째 들었다. 애새끼가 성질머리하곤. 거기까지는 물론 말하지 않았다. 청가람이 책상을 퍽 발로 걷어찼다. 팔짱까지 끼곤 등받이에 기대는 꼴이 아무래도 쉽게 말할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백건이 소리 없이 볼 안쪽을 짓씹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아,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해요. 모른다고 했잖아요. 숨기고 할 게 뭐가 있어?! 씨발, 그 새끼는… 아버지는… 나한테 관심도 없었다고요. 기껏 얼굴 보여줘봐야 나 같은 거, 실망스럽다는 소리나 해대는 주제에 지가 뭐라고! 지가, 지가 뭐라고…”
“……”
“…멋대로 죽고 지랄이야, 씨발.”


분노로 일렁거리던 선홍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천천히 젖어 들더니 이내 녀석은 홱 눈길을 피했다. 하얀 코끝이 벌겠다. 저 나잇대는 그렇다. 감정을 감출 줄을 모른다.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모두 표정 위에 드러난다. 꼬아서 말하면 요령이 없는 거고, 좋게 말하자면 그 요령을 체득할 정도로 아직 더러운 꼴을 보지 못한 거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때문에 백건은 어제 청가람이 눈길을 피한 것이 다른 무엇보다 몹시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다. 게다가 청가람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무렵까지도 부자의 사이는 꽤 돈독했다고 했다. 가람이는 남편을 존경했고 남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고, 또 남편은 그런 가람이가 무슨 꿈을 꾸든 모두 이뤄주고 싶어 했었다고 말해준 것은 혼절했었던 피해자의 부인이었다. 두 부자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진 것은 작년 여름 무렵부터였다고 했다. 피해자의 부인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유는 몰랐다. 당시에도 그저 막연히, 자신의 외아들에게 사춘기가 닥쳐 왔겠거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춘기라고 해서 어제까지 좋았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급작스럽게 냉각 되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화학 공식 같은 것이다. 괜히 관계를 케미컬에 빗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는 것에는 모두 일정한 ‘조건’ 또는 ‘계기’가 충족되어야 한다. 사춘기는 분명 예민한 시기다. 그러나 단순히 예민한 시기라고 해서 아이가 하루 아침만에 변하진 않는다. ‘계기’가 존재해야 한다. 청가람의 주변 상황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나쁜 친구를 사귀었다거나, 학교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거나,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다거나,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다거나. 그러나 확인해본 결과 청가람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체조부의 고문인 체육 선생님은 청가람이 가을부터 연습을 자주 빼먹었다고 했다. 시기적으로는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여름 이후부터의 일이다. 백건이 정리한 인과 관계는 명확했다. 청가람은 예민한 사춘기 때문에 아버지와 틀어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청가람이 변한 거다. 그리고 그 원인을 쥐고 있는 것은 아들인 청가람이 아니라 아버지인 청송이다.
사춘기는 어른에게 실망하는 시기다. 청가람은 아버지인 청송을 누구보다 존경했다고 했다. 존경하던 아버지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아들은 대체적으로 방황한다. 실망한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다. 아내에게서도, 아들인 청가람에게서도 폭력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피해자인 청송 내외는 인근 주민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청송은 종종 아내에게 줄 꽃을 사들고 귀가했고, 두 부부는 주말이면 꼭 데이트를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바람이다.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라고 해도 가정 바깥의 사생활까지 아내가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다. 특히나 청송 내외처럼 아내가 전업주부인 경우는 유독 그렇다. 주말은 늘 아내와 함께 보냈지만 청송은 세미나가 잦았고, 전임이면서도 외부 강연이 많아 자주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인근 주민들도, 교수들도 청송이 참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백건이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청송에게 다른 상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확인된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아들인 청가람이 아버지와 뚜렷한 계기 없이 급속도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눈을 피했던 행동도 모두 납득이 갔다.
청가람은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하게 된 그 결정적 ‘계기’를 청가람은 숨기고 있었다.


“그런… 추잡한 것만 아니었어도…”


사람이 비밀을 고집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주변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만일 그런 이유에서 청가람이 지금 입을 다물고 있다면 결론은 더욱 간단하다. 청송은 ‘불륜’을 저질렀다. 그리고 백건의 짐작이 맞다면, 청가람은 그 상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일어나.”


백건이 자리를 밀며 툭 말을 던졌다. 선홍색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백건을 올려봤다. 왜요? 대꾸 대신 백건은 가람이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찼고, 가람이 악 비명을 질렀다. 씨발, 경찰이 사람 팬다고 민원 넣을 거야! 백건이 가벼운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경찰 아니라니까. 생각을 가볍게 우물거리면서 백건은 심리실의 문을 열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람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대체 어딜 끌고 가는 건데? 백건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라면 한 번쯤은 몰래 찍어 소장하고 싶을만큼 근사한 얼굴이었다.


“반성문 쓰러.”


그러고 보니 청 옆에 있던 카페의 예가체프가 꽤 괜찮았었다.



*    *    *


카페는 넓었고, 조용했다. 정동과 덕수궁 돌담길 근방에 위치한 덕분인지 드문드문 앉아 있는 관광객들을 제외하곤 손님도 그다지 없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핸드폰을 충전 중인 관광객들을 제외한다면 2층은 대체적으로 홀로 온 손님뿐이었다. 신문을 보는 남자,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여자, 문제집을 펼쳐 놓고 엎드려 졸고 있던 학생.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 붉은 머리의 남자.
흘러내린 안경을 벗으면서 은찬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3페이지 남짓이었던 글은 이제 10페이지를 넘었다. 이만하면 이번 주 분량도 절반은 뽑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건 없지만. 생각하며 은찬은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노트북을 접으면서 은찬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모두 그대로 두고 담배곽과 핸드폰만 챙겼다. 흡연부스는 텅 비어 있었다. 문을 단단히 닫고, 유리벽에 기댄 채로 은찬은 담배를 물고 핸드폰을 들었다. 불을 당기는 동작처럼 엄지는 익숙하게 액정 위를 미끄러졌다. 몇 개의 화면을 지나친 후에야 은찬은 이름 없는 어플리케이션을 툭툭 두드렸다. 화면이 로딩 되길 기다리며 필터를 한 번 깊게 빨았다. 느리게 후욱 뱉어낸 연기가 하얗게 흩어질 때 화면도 하얗게 바뀌었다. 몇 개의 말풍선이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익명, 이라는 말이 상단에 박혀 있던 창에 박힌 메시지는 짧았고 모두 같은 투였다. 바빠? 요즘 연락이 뜸하네. 오늘은 네 생각을 했어. 화났어? 우리 좋았잖아. 언제쯤 다시 만나줄래. 보고 싶다, 라는 말과 함께 창에는 사진 한 장이 작게 떠 있었다. 붉은 장미였다. 은찬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유치해. 그린 듯이 웃으며 은찬은 그대로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남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시원한 걸 마셔야겠어. 빈 꽁초를 문질러 끄며 은찬은 생각했다. 카페는 여전히 한산했다.
은찬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지갑만 더 챙겼다. 마시다 만 커피는 아직 반절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카페의 예가체프는 품질이 좋았지만 석 잔을 연이어 마시기엔 너무 텁텁했다. 주스를 마실까. 생각하며 은찬은 모퉁이를 돌아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다 첫 걸음을 딛기 전에 걸음이 우뚝 멎었다. 아래층 저만치에 보인 색 밝은 머리칼 때문이었다. 난간을 짚은 마른 손에 꽈악 힘이 실렸다. 누구지. 은찬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 백건은 혼자가 아니었다.






*    *    *



어? 파인더에 눈을 붙이고 있던 남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옆으로 돌려놓은 모자챙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면서 남자는 이번엔 맨눈으로 차창 너머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여전히 조수석의 차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남자가 다시 파인더에 눈을 붙였다. 남자가 다시 렌즈를 길 건너편 카페 쪽으로 조정했다. 배율을 높이자 카페의 통유리 안쪽이 남자의 망막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둥그런 창 안에 걸린 것은 세 사람이었다. 등을 지고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소년, 이쪽을 향해 앉아 있는 색 밝은 머리칼의 남자. 그리고…
형님! 남자가 등 뒤를 향해 말했다. 뒷좌석에서는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성급해진 남자가 아예 뒤로 몸을 틀었다. 아, 현우형님! 그제야 뒷좌석에 기대 앉아 있던 흑발머리의 남자가 쓰고 있던 거북이 등껍질 패턴의 안대를 스르륵 끌어 내렸다. 머리색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울컥 일그러졌다. 뭡니까. 짧게 물은 말에 남자가 창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요, 형님, 저기 말입니다.
현우가 남자를 따라 창 너머, 정확히는 길 건너를 쳐다보았다. 이 먼 곳에서도 유난히 시선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붉은 머리였다.


“저거, ‘단골’ 아닙니까? 그 손 크신 손님. 그 왜… 어디… 그, 뭐냐. 무슨 그룹 외손자 있잖아요. 상속로또 맞았다고 돈은 달라는대로 주시는 그 손님.”

“아마도 그렇군요.”
“아, 형님. 아마도가 아니라… 아니, 왜 또 저렇게 나타나셨대요. 3년동안 접촉 한 번 하신 적이 없었는데 요새 부쩍 저러시네.”


사진 또 여러 장 버리겠네. 남자가 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투덜거렸다. 셔터음이 연달아 철컥철컥 세단 내부를 울렸다. 현우는 여전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가 앉아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남자가 틈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저렇게 자주 나타나실 거면 애초에 표적만 나온 사진을 달라고 하질 마시든가. 암만 3년 단골이라지만 이거 너무하시네. 버린 필름값 챙겨주실 것도 아니면서. 현우가 잠깐 남자의 뒷통수를 흘겨보다 말았다. 당신은 수다가 너무 많노라고, 진지하게 그 혀를 잡아 뽑아주고 싶을 때가 있노라는 말을 해보려다 현우는 이내 말았다. 어떤 어휘를 사용해도 점잖게 들리지 않을 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까만 눈이 길 건너의 카페를 향해 움직였다. 붉은 머리가 자리를 벗어났다. 색 밝은 머리가, ‘표적’이 벌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남자가 파인더에서 눈을 떼어내며 쯧 혀를 찼다. 아, 사진 또 버렸네. 창가에는 등을 지고 앉은 갈색 머리 소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현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투로 남자에게 말을 던졌다. 점잖은, 그러나 명확한 통보였다.


“청소팀 준비 시켜요. 배달팀도 준비 하고.”
“예?”
“조만간 송장 한 번 더 치워야 할 것 같으니까.”


유비무환입니다, 유비무환.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며 현우는 다시 안대를 뒤집어썼다.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옆차선이 조금씩 정체되기 시작했다. 주차된 차창 곁을 버스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버스가 자리를 벗어났을 때에 세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주은찬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업무를 생각보다 일찍 쳐낸 기념으로 힘내보았심두아ㅠ///ㅠ 이제는 가람이도 나오고 현우도 나오고, 백훈만 제대로 나와주면 나올 사람은 다 나올 듯... 허허... 무튼!
플롯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처음 생각했던 분량보다는 다소 길어질 듯 합니다ㅠㅠ 편마다 길이가 짧아서 어째 회차만 적립하고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ㅋㅋㅋ큐ㅠㅠㅠ 그래도 이챠이챠 힘내서 쓰겠심둥//// 6편도 조만간에 커밍쑨....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 알티도 마음도 다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눈ㅇ ㅠㅠㅠ


+ 이 글은 건찬 외에 다른 커플링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ㅇ;만 읽히는대로 자유롭게 읽어주세요/// 저는 언제나 감상을 존중합니다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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